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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알고 갑시다.
우리 알고 갑시다.
1100년전 고려 개국공신 장무공(윤웅)을 시조로 하는 집안이 고려말 역적 세력인 이성계. 이방원을 피해 고려 남평감무 수절신 삼대불사유훈 한림공 유(愈), 선조님이 지금의 광시면 은사리 오류골에 은둔, 자리하였기에 ‘유’ 선조님을 중시조로 모시고 지금까지 600년의 세월을 간직한 전통적인 유교 집안의 박씨 집성촌 마을이 이곳이다.
낙향한 한림공 ‘유’ 선조님은 고사리로 연명하시며 은둔생활하시다. 세상을 떠나시며 “동지 날을 택해 제를 행하며”, “후대 3대에는 조선에 출사하지 말라.”는 유훈으로 당시 고려 태자궁내 정랑의 벼슬에 있었으나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같이 이곳에 자리한 1대 아드님이신 정랑공 ‘근’ 이시며, 광시면 구례리 안쪽, 초롱산 서쪽 끝자락에 묘소와 망주석 제실과 시제 답 등이 있으며, 선조님의 부인(곽씨)가 지금의 정문(열려문)의 주인이시다.
2대 손자 ‘자번’ 선조님의 묘소가 정문을 바라보며, 오류골 선산에 있었으나 제2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면서 종중선산이 국토부에 수용당해 부득이 역말 한림공‘유’ 선조님의 묘소 아래 로 2023년 초봄에 이전하였으며 오류선산 감찰공(윤) 선조님 좌측아래에 자리한 3대 증손인 세마불사 ‘원창’ 선조님의 묘소이다.
‘원창’ 선조님은 어르신의 유훈를 받들어 벼슬을 피해왔다.
이 무렵 여러 차례에 거처 태조 이성계는 사람을 보내 조정에 등청해 줄 것을 선조님께 요청했으나 이를 모두 거절하였다. 하여 광시면 광시리(영말)에 선조님 묘소 입구에 신도비(비석)를 유학의 근원인 성균관에서 세워놓았으며, 이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절로 높이 받아 들였다.
‘원창’ 선조님묘소의 자리가 손자인 감찰공 ‘윤’ 선조님의 묘소위치보다 아래에 자리 하였기에 많은 후손들이 이를 이상히 여기며 의문을 갖으나 당시 여건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러 지관과 풍수 학자들은 해석하고 풀이하여 설명한다.
또한 4대 고손인 ‘한’, 선조님은 출사하여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에 오른다, 3대를 출사하지 않은 집안이기에 그리 높은 벼슬은 아니지만 이때부터 조정에 출사하기 시작하였다. 묘소는 광시면 마사리에 모셔져있다.
이후 5대 ‘영무’,선조님 때부터 조정에 적극 출사하여 대장군과 좌찬성, 등의 벼슬을 하였으며, 열려 곽씨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알게 된 당시 영의정 황희가 세종대왕에게 추서하여 지금의 광시면 은사리 입구에 열려 문을 세웠다.
‘영무’ 선조님은 의정부의 좌천성 그리고 대장군의 벼슬을 하였으며, 4형제 중 네째 아드님이신 ‘윤’ 선조님은 사헌부 감찰 벼슬을 하셨기에 재산을 하사받아 가문을 유지 하였으며, 지금까지 한 고을에서 600년의 세월동안 집성촌을 이루어 양반의 위치를 지키며 살아왔다.
세월은 어느덧 흘러 그렇게 묻혀만 있던 후미진 고향땅이 현실과 삶이 너무 어려워 태어난 고향을 뒤로 할 수 밖에 없던 시절이 오고야 말았다. 이에 우리 집안도 예외가 아니어서 고향 마을을 뒤로하였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70년이 지나 올해로 나이 75세가 되고 보니 내가 때어난 고향 광시면 은사골이 제2서해안 고속도로가 가로지르며 정문(열려문)도 도로공사에 수용 당했으며, 고향마을 초롱산 안쪽을 가려면 고속도로 다리 아래로 지나가는 현실과 지금은 박씨 성보다 타성이 훨씬 많은 마을이 되어버렸다. 주변 환경들이 급변하면서 이제는 모르는 마을에 온 것 같아 안타깝다. 여기에 잊혀져가는 것이 아쉬워 몇 자 기록해 놓는다.
◇ 오류골 선산 묘소에 관해
2023.11월 현제 감찰공파 종중회 회장으로 오류골 선산에 대해(시조 1세 윤웅 선조님 기준) 기록해 놓는다.
오류골 선산 중앙 상단에 모셔진
세 한림 대 존함 직위 산소주변
22세 (한림 6대) ‘윤’ 감찰 오류골 선산 중앙 상단
봉분 비석 망주석,
23세 (한림 7대) ‘지남’ 부완우하 봉분
24세 (한림 8대) ‘심’ 부하우 평장,
25세 (한림 9대) ‘상준’ 부우 평장
26세 (한림 10대) ‘조’ 분토골 – 관리 소홀
27세 (한림 11대) ‘성눌’ 분토골 – 관리 소홀
28세 (한림 12대) ‘현’ 분토골 – 관리 소홀
29세 (한림 13대) ‘경한’ 분토골 – 관리 소홀
30세 (한림 14대) ‘영’ 분토골 – 관리 소홀
31세 (한림 15대) ‘규로’ 분토골 – 화장 해체
32세 (한림 16대) ‘민’ 분토골 – 화장 해체
33세 (한림 17대) ‘성진’ 오류골 선산 완좌하 봉분,
34세 (한림 18대) ‘승재’ 부하우 평장
은사 골 을 돌이켜 보면
집안 내력을 알아보려면 큰댁(‘승하’)을 기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26세‘조’, 27세‘성눌’, 28세‘현’, 29세‘경한’, 30세‘영’의 다섯 분의 선조님의 시제는 종중의 몫이며 31세‘용로’ 32세‘돈’ 33세‘중진’ 34세‘승하’ 35세‘동수’선조님의 몫은 당연히 36세 ‘희준’의 몫이다.
그동안 시제와 제사를 구분 없이 종가에서 행사 해왔기에 모든 시제 답도 종가에서 관리 운영했기에 종가 댁이라 한다.
이 때문에 유교사상에 근본 하여, 많은 시제와 제사의 행사를 유지하기 위해 선조님의 재산들이 장자를 기준으로 상속하여 대를 이어 지금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수백 년을 이어온 종가의 명맥이 지금 흐르지 않고 꽉 막혀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다시 말해 유교전통의 종가 집이 종손 ‘동수’형이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종부인 형수(이난주)님이 자식들과 삶이 어려웠겠지만 끝내는 산소자리가 많아 팔지 못한 임야를 남기고 모두 매매의 절차로 처리하고야 말았다.
이후 형수님은 분토골 조상님 산신제를 지내던 터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 판넬로 거처를 만들어 이전하고 혼자 생활하고 계시다.
물론 생활여건이 힘들어 자식들과의 회의를 통해 그리되었다. 해도 이런 엄청난 일을 버렸다면. 최소한 집안의 종중 관계자와 집안 어르신들과의 충분한 협의가 있어야 했다. 지금의 모든 자산은 본인들이 구입한 것이 아니고 모두 선조님으로부터 물려 내려온 종중토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기에 관련된 형제를 포함하여 모두에게 충분하게 논의와 협의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어렵기는 하겠지만 설마 거기까지는 아니겠지...,
하는 소문에 혹여 알아보려 했으나 지나친 간섭이 될까봐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 하지 않았으나 큰댁 어르신(‘승하’)이 돌아가시던 날 장례를 치루며 내용을 알게 되어 ‘남수’형은 깜짝 놀라며, 목청을 높이나 이미 저질러놓은 일에 한탄하고 있었으며, 많은 참석자들이 혀를 치며 안타까워했다.
어찌 조상님 보기 부끄러운 부도덕한 일을 벌려놓고 후손들의 지탄 받음에서 피할 수 있겠는가?
물론 법률적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유교적 관점에서 종택을 지켜내지 못한 책임이 분명 존재한다 할 것이며, 이는 누군가가 그 책임을 지어야 할 것이다.
한때는 종택 입구에 들어 계단을 걸어 오르면 가끔은 돌계단을 예쁘게 땀 흘리며 보수 공사하는 ‘남수’형이 생각난다. 고즈넉한 돌계단을 지나 대문 앞 탱자나무 향나무를 끼고 올라 사랑채에서 내려 보면 소나무 미루나무 등이 어우러진 정원에 넓은 마당과 소나무위에 백로가 노니는 안산을 멀리 바라보면 앞이 확 트여 시원하다. 객들이 끊이지 않는 사랑채, 를 둘러친 턱 마루가 있어 객들이 늘 모여 있던 사랑채와 둘러쳐진 청마루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우리들이 뛰어놀던 아래 마당, 뒤쪽으로 우거진 대나무 숲 울타리와 옆으로 오래된 그네가 매달려있는 구멍의 은행나무가 있으며, 집안 대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우물이 있으며, 높은 대청 마루위에 뒤주가 있어 고풍스런 전통적 한옥이며, 작은 소슬 문 옆 기와 사당이 있어 조상님 들을 모셨던 훌륭한 박씨 집안의 본이 되고 존경받던 양반집 명문 가문의 종택이다.
시제 행사 날
종손인 큰댁 아저씨는 대문 앞에 금태하고 황토를 퍼 놓아 오늘 시제가 있음을 고한다.
어린 우리들은 무엇인지도 모르며 괜히 즐겁다.
음식을 만드느라 여기저기에서 집안일가 친척아줌마 그리고 동내 아낙내분들이 모두 모여 부산하다.
저녁 무렵 향을 피워놓고 사당에서 신위를 대청마루 제단으로 모셔오는 예를 갖춘다.
안채 다락 벽장의 과방에서는 제사에 올릴 제물을 예쁘게 진설하기 위해 친척 여러분과 셋째 댁 아저씨가 지위하여 내놓은 음식들은 제기위에 높이 쌓인 고임새 좋은 제물들과 자시(子時)에 엄숙하게식순에 맞춰 진행된다. 할아버지 따라 참여한 나는 대청에 차린 제단에 어른신들 따라 절하며 제를 올린다. 이 자리에 동참한 인원이 너무 많아 대청을 가득매우니 아래 마당에 멍석과 돗자리를 깔고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엎드려 예(절)를 드리는 모습이 머리를 스친다, 그 시절 무엇보다 제를 마친 후 음복 시간이 나는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제를 마치고나면 몫이라며 음식들을 적당한 나누어 담아 한보따리씩 나누어 주었다. 이때를 생각하면 집안의 가풍이 느껴지며 종가 집 종손 어르신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생겨난다.
이 영향으로 나는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 후 바로 선산인 분토골 선조님 산소를 찾아 제를 올리고 큰댁에 들러 어르신의 안내로 신혼내외는 사당에 모셔진 신위에 절을 올리게 되었다. 이때 큰댁 어르신은 모셔져있는 조상님 신위를 한 분, 한 분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기에 마치 시집온 신부는 남편 집안에 대해 더욱 알게 되었으며 좋은 교육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내가 고향을 찾을 때면 늘 그날을 생각하게 했으며, 집안의 자존심이며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34세 ‘승하’ 어르신은 아드님을 먼저 보내고 홀로 고령으로 힘겨워할 때 종부님이 뒤 바라지로 고생 하시는 것을 나는 여러 차례 목격할 수 있었다.
형수님은 이렇듯 어려움을 겪을 때, 혼자되어 종가 집을 유지해야 했으며, 한참 자녀교육이 필요한 때 많은 돈이 필요했음을 유추한다. 형편이 어려워 삶에 무게를 견디지 못해 시제 답을 포함하여 살고 있던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종산, 종답, 종토, 종택을 잘 보존하고 관리해야 하는 것은 종가의 책무인 것이다.
그런데 종가를 포함한 많은 재산들을 탕진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 모든 재산은 벌어서 구입한 개인 소유가 아니고 선조님으로부터 대대로 종가에 내려오는 전통적 관례적인 종중 자산이다. 그런데 종중과 집안에 아무런 통보나 합의 없이 한순간에 종부님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날려버린 꼴이 되었다.
이 과정의 부당성을 ‘승모’ 아저씨가 알고 족질인 형수님께 찾아와 당장 은행에 담보되어있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재산을 찾아서 제자리로 돌려놓으라면서 호통까지 치셨다고 형수님은 나에게 털어 놓는다.
‘승모’ 아저씨는 종가 집에서 관리하는 모든 자산들이 개인소유의 자산이 아니고 종중자산 이기에 더욱 분노하여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으라고 지적하며 매섭게 호통하셨다면서 동지날 (양 2014. 12. 22. 음 11. 01) “할림공(유)” 선조님 시제 날에 참석하시어 털어 놓으며 종중회 에서는 이를 올바로 해놓아야 한다며 열변하신다.
큰댁 실정에 관해 우연치 않게 가까이서 지켜보았으며, 한 가문이 몰락하고 가산이 쓰러져가는 현실을 가까이에서 목격하였고 이지경의 현실을 종부 형수(이난주)님은 당시 서울 신림동에서 공무원시험 학원을 운영하던 내 사무실로 찾아와 하소연 하였으며, 나를 찾은 형수님의 의도는 아래 집 ‘한수’네 집터도 같이 매도하려는데 셋째댁 아저씨(승기)의 명의로 된 노후 폐가가 있어 매수인의 요구에 이를 처리하기 위한 서류에 도장을 받겠다면서 인천에 큰아들 ‘길수’형 집에 거주하는 아저씨 계신 곳을 알고자 찾아왔다고 한다.
그 소식을 접한 나는 너무 놀라 ‘남수’형 그리고 ‘병수’에게 연락하였으며 나는 마음 조바심에 혹여 좋은 해결책은 없을까? 어찌 이를 구해 볼 수는 없을까? 하여 ‘병수’가 있는 충주로 향했다. 하지만 밤샘의 토론이 아침까지 이어졌으나 뾰족한 어떤 대한도 대책도 구할 수는 없었다. ‘남수’형과의 전화통화를 끝으로 마음을 접고 동행한 ‘한수’와 같이 귀경했다.
이때 느낀 감정은 아주 묘했으며, 또한 능력이 될 것 같은 나의 무능함도 실감했다.
내가 이 세상을 1950년 범띠 동갑으로 ‘병수’ ‘경수’ ‘한수’가 같은 해에 그곳에서 태어나 자라 뛰어놀며 지내던 곳이 그곳이 아닌가? 우리들의 자존감이며 영원할 것 같은 종가집이 이렇게 적은 돈에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후일 종가 집 종부가 잘못하여 모두 말아먹고 말았다는 후손들의 비난을 어찌 피한단 말인가? 너무 황당하여 허무감마저 드는 것이...,
아----, 허무하고 허망 하구나.
정당한 부동산 매매 인가?
이때 법적 등기 소유자인 종손 ‘박승하’가 생존해 계셨으나 연로하여 어떤 결정권도 또한 이러한 내용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을 주변 모두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재산의 양도에 따른 법적절차는 어르신이 세상을 떠나신 후 처리하는 일종에 유질계약의 형태라는 것을 형수님께 전해 들었기에 나는 깜짝 놀랐으며 그렇다면 이는 불법행위의 매매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또한 형편이 되어 일정한 기간 내에 채무를 이행한다면 본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단서로 달았다고 형수님께 전해 들었으며, 매매사실을 혹여 어르신이 알까봐 아주 쉬쉬하며 조심. 보안하는 모습을 보며, 후 일 별일 없을까? 걱정이 되었다.
일반 개인 간의 부동산 거래에서 “민법 제399조” 유질계약의 매매는 불법이다.
따라서 이 부동산매매는 많은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이때 뵌 어르신의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었으며, 결국 모든 재산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현실을 당시에 나는 모른체해야했다. 아니 감당할 용기가 없었다.
내용을 유추하면 어르신 명의 재산을 어르신이 누워계신 와중에 어르신 모르게 몰래 처리하는 불법적인 행동들이었다.
이후 얼마동안 살아계셨지만 이런 불법적 행동을 당사자는 전혀 모르고 돌아가셨으며, 이후 남은 재산은 상속자들이 분해했다.
나는 묻고 싶다. 일이 그렇다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종중의 회장의 입장에서 이를 본다면 이제부터는 누가 26세 ‘조’ 선조님부터 30세 ‘영’선조님 까지 다섯 분의 시제를 모신단 말인가?
지금 시대는 제를 모시지 않으니 아예 없애버리자는 큰댁(희준 형제들)의 생각이라는 것을 형수님께 전해 들었다. 또한 내가 직접 종손 ‘희준’에게 물었으나 의견도 그러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제 답 모두를 없애버렸으니 무엇으로 유지하겠는가?
이제는 조상님들이 귀찮을 것이다.
자산 모두는 대대로 내려온 중중자산이다.
지금 나는 종중을 이끄는 위치에 있는 종중회의 관리자로 종중내의 종중자산들을 살펴보니 이곳저곳 에서 자산관리를 이유로, 불법으로 명의가 이전되는 등의 여러 잘못된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종중운영에 있어 등기부상 명의신탁 되어 대를 이어 관례상 종가에서 장손의 명의로 하여 관리하여 내려오고 있으나 분명 종중자산이다.
그래서 비정상적인 종중운영의 부분들을 정상적운영이 되어야하기에 종중에서는 하나하나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정상화의 일을 추진함에 있어 많은 종원님 들의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지지와 도움이 필요하기에 협조를 구하며, 관계되시는 종원 님들의 더욱 많은 협조를 구합니다.
나는 왜 종중 일에 매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돌이켜보면,
종중일은 많은 본인의 시간적 손실을 야기한다. 또한 희생적 봉사의 마음이 있어야하며, 조상 섬김의 의무감과 자산 관리에 따른 사명감이 투절해야 하며, 모든 처세가 두리 뭉실 해서는 안 될 것이며, 믿음과 정직을 원칙으로 해야 할 것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길,
종사일은 아무리 잘해도 욕먹고 비난 받으니 적당히 해라.
종사일은 잘했다고 칭찬은커녕 욕 안 먹고 물려주면 잘 한 것이다.
종사일은 똑똑한 놈은 챙기고, 못 챙긴 놈은 무능한 놈이다.
어느 가정이든 종사일 하는 것을 환영하는 집안은 없다.
어쩔 수 없어 한다하니 별사고 없을 때 적당한 핑계로 그만둬라.
라고 하는 말을 늘 접한다.
여기에 덧 부쳐 종사 일을 열심히 하면,
돈이 생기냐?
땅이 생기냐?
명예가 생기냐?
괜하게 종사일 본다고 큰댁 종가에 수년 동안 안 지내던 시제를 종중에서 지내라고 한다면 ---,
나를 얼마나 미워하고 원망할까?
요즘 누가 그리 옛 풍습인 유교를 들먹이며, 시제행사를 야기한다면 이를 얼마나 비웃겠는가?
정말 나는 머리가 복잡하고 고뇌가 많다.
솔직하게 말해 글을 쓰면서도 마음이 몹시 불편하다. 불편한 말을 하필이면,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이 더 떨린다.
하지만 잘못을 올바로 해야 하는 일이며 종중 회장의 업무이기에 할 수 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지금 내가 행하지 않으면 영원히 묻혀버릴 일일 것이다.
내가 종사 일을 보지 않았다면 말할 이유도 없고, 또한 감히 어느 누구도 거론 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종중의 관리자로 부당한 종사 일을 올바로 해야 하는 입장에 있기에 부득이 잘못된 큰댁의 처사를 올바르게 하려한다.
나도 생각해보면 고향을 떠나 수십 년 동안 삶에 바빠 큰댁의 실정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러다 후일 수습 못할 지경에야 알게 되었으니 답답한 일이 아닌가. ‘희준’형제들과도 그럴만하게 내왕도 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어떻게 해야 가장 지혜롭게 할 것인가?
우선 종손 ‘희준’의 몫에서 선조님 26세부터 30세까지 다섯 분의 시제와 31세‘용로’부터 35세‘동수’까지의 제사 중에서 종중회의 관련된 앞에 다섯 분에 관한 시제행사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에 따른 시제 답을 인수받아 종중에서 시제를 행한다. 만약 ‘희준’이 시제를 행한다고 확실하게 표한다면 관련 종손이기에 우선하여 그리하도록 권한을 부여한다.
만약 이를 거절한다면 종중회의 안건으로 상정하여 처리한다.
글이 서툴러 중복된 말과 어색한 문구에도 이해하고 끝까지 읽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 정기총회 즘 하여 -
2023. 11. 19.
울산박씨감찰공파종중 회장 박 경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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