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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중국작가 해경청(海镜清)이 <전쟁의 예술>이란
중국 군사관련 사이트에 연재한 <북조선의 명장>중 김책 부분을
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부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6. 멸사봉공
1945년 8월,김책은
당시 국가 경제를 담당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임무였다. 광복후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에 물려준 것은 모두 낙후되고 파괴된 공장, 시설 등이었으며 국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는 이런 어려운 상황하에서 완전히 생소한 일을 한 것이다. 김책은 항상 공장으로 내려가 기업상황을 파악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했으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했다. 성진제강공장(당시 명칭)의 일제 용광로에는 절연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고압 전기를 이용하여 쇠를 녹였다. 용광로 주변에는 고압전류가 흐르기 때문에 사람이 한번 접촉만 하면 바로 감전사할 수 있어 설비 조작이 매우 위험하고 불편했다. 김책은 현장에서 노동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노동자와 기술자들이 새로운 제강기술을 활용한 용광로 개선 작업에 연구 및 개발하도록 독려하여 마침내 성공했다.
1948년 6월,김책은 남포로 가서 유리공장을 건설하고 평판유리를 생산할 것을 지시받았다. 그는 남포 유리공장 건설시 건설노동자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공장 건설을 지도하고, 승강기를 제조하고, 기술자를 양성했다. 2년이 안되어 유리공장이 준공되었으며 평판유리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금속공업, 전력공업, 철로운수 및 경공업, 화학공업을 막론하고 김책은 항상 그가 담당한 중책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는 아주 짧은 시간내에 일본 식민시대의 단방향적이고 기형적인 약탈형 공업을 현대화된 기술집약적 중공업으로 성공적으로 개조했다. 김책은 북조선 신공업의 창시자로 부를 수 있다.
1949년 6월 남북 노동당이 조선노동당으로 합당된 후 김책은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50년12월,당중앙위원회 조직위원으로 다시 선출). 김책은
1950년 6월 조선전쟁 발발후 김책은 조선에서 전쟁기간 최고통수기구인 전선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7월에는
김책은 본인 스스로 대부대 작전에 대한 경험 및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전략상으로
전투가 9월로 접어들면서 인민군의 상황은 매우 어려워지고 있었다. 무기 보급은 수요량의 30%수준이었으며, 연료는 수요량의 최소한도로 보급되었고, 식량 또한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최전선의 장병들은 하루에 한끼씩 배급됐다. 1/3의 병사들은 남한에서 급히 모집한 신병으로 그들은 전투장비가 부족했으며 군사훈련을 받지 못했고,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다. 병력 총수에서는 유엔군의 1/2수준이고, 탱크는 1/6에 불과했다. 여기에 항공지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보급 및 공격도 주로 야간을 이용하여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어선의 축소를 필요한 조치, 더 나아가서는 비교적 큰 범위에서 주동적 철수를 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었다. 그렇게 했다면 최소한 37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를 보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민군의 9월 공세가 진행중에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남부에서 전투중인 인민군의 보급선과 퇴로를 차단하였다. 조선군사위원회는 우선적으로 인천상륙부대를 격퇴하기로 결정하고 김책에게는 “현전선을 최대한 확보와 동시에 가능한 많은 병력을 수원지역으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다. 인천상륙작전은 김책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모든 보급이 차단되고 퇴로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인민군 장병들의 정신적 충격은 더 큰 문제였다. 당시 북쪽 출신 인민군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퇴로가 차단되었음을 알았고, 남쪽 출신 병사들은 그들의 고향이 이미 적들에게 점령당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장병들의 사기는 이미 절망적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김책은 상부 명령에 따라, 105기갑사단 주력과 인천 지역의 87연대를 서울 인근에 배치하여 최대한 현전선에서 방어하도록 하고 최전선부대에 인천상륙작전 소식은 전파되지 않도록 비밀에 부치도록 했다.
그러나, 인천상륙을 저지하고 낙동강 전선을 고수하려던 계획은 곧바로 실패했다. 유엔군은 9월 18일 김포공항을 점령하고 서울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재앙적 상황하에서 김책은 전선사령부 소재지인 김천에서 미24사단과 격렬한 전투를 벌인끝에 1군단 퇴로의 중요지점을 확보했다. 9월 24일 김천을 적에게 내준 후 지휘부는 상주, 안동, 문경, 단양, 충주 등지로 철수하면서 6일간의 완강한 방어전투를 벌여 최대한 많은 부대가 철수하도록 했다. 그러나, 9월 30일 유엔군의 기계화 돌파부대가 조치원 지역에서 남하하는 상륙부대 일부와 합류하여 원주, 강릉 방향으로 진격했다. 이렇게 되어 남쪽의 인민군은 대부분 포위되자 김책은 포위된 부대는 분산하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전개할 것을 명령했다. 10월 1일 38선의 방어전투를 보장하게 위해 조선최고사령부는 전선을 서부와 동부로 나누고 김책을 동부전선사령관(서부전선사령관 :
그러나, 한국군 2군단(6, 7, 8사단)은 10월 6일 38선을 돌파하여 철의 삼각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책 휘하의 부대 병력은 매우 적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훈련 경험이 없는 신병들이고, 중형 무기 또한 대부분 퇴각중 소실되었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유효한 방어를 할 수 없었다. 북쪽 인민군의 주력은 개성일대에 집결하여 미군에 대한 응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김책은 최대한 한국군 2군단을 견제하기 위해 부대를 지휘하여 고량포에서 양구 일대에 완강한 방어전을 벌였다. 현격한 실력 차이로 10월 11일에 이르러 한국군은 철의 삼각지대를 점령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엔군은 긴급하게 38선 북쪽으로 진격하면서 인민군 주력부대에 대한 포위 섬멸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인민군 일부는 유격전을 진행했으며 일부는 조직적으로 북상하여 인민군 재편시 그나마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0월 17일,평양 남부의 최후의 방어 거점인 사리원이 점령당한 후 북쪽의 인민군 주력은 완전히 괴멸되었다. 김책은 철의 삼각지대 방어전에 실패한 후 이미 평양부근으로 철수하여 즉각 흩어진 패잔병들을 모아 부대를 편성했다. 그는 중화(미1군단 방어). 상원(한국군1사단 방어), 강동(한국군 2군단 방어)일대에서 최후의 평양 방어선을 구축하고
새로 구축된 평양 방어선은 미군 2개사단 및 한국군 4개사단의 공격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비해 인민군은 병력이나 화력면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다. 중화에서 강동까지는 70km나 되어 방어선이 너무 길었으며, 이곳에서 평양까지는 20km에 불과해 방어 종심이 매우 짧았다. 이로 인해 유엔군은 매우 자신만만했으며 10월 18일까지 평양에 진격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김책은 유엔군과의 몇 달간의 대결에서 유엔군의 공격은 반드시 도로를 따라 진행된다는 것을 알았으며 도로 요충지를 집중 방어하면 유엔군의 공격속도를 지체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평양 철수 시간을 최대한 확보해 주기 위해 김책은 자신이 선정한 중화 등 방어 거점은 모두 유엔군이 공격할 때 반드시 지나가야 되는 몇몇 도로에 있었다. 즉, 유엔군은 도로를 따라 공격한다면 반드시 몇몇 거점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전진할 수가 없었다.
10월17일 야간에 미1군단과 한국군1사단은 38선 돌파이래 처음으로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매 방어거점마다 인민군의 병력수는 수백명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도로 양측 진지에서 유엔군의 진격을 최대한 억제했다. 인민군은 연료가 떨어진 탱크를 도로위에 묻어 화력공격점을 구축하고 진지앞과 도로상에 지뢰지대를 설치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유엔군을 일시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는데 특히 미군은 그러했다. 비록 한국군 1사단이 10월 18일 하루 종일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경우 2km밖에 진격하지 못했다
평양방어선의 저항은 19일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이시간 평양의 정부기관 철수는 이미 완료되었다.
평양 함락이후 김책은 제2전선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남쪽에서 철수한 인민군 2,3만명으로 재편된 부대를 이끌고 유격전을 전개했다. 유엔군의 배후를 습격하고 고립된 유엔군 및 연락차량, 보급부대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절단하고 경찰서를 습격하였으며 많은 중소도시를 점령했다. 중국인민지원군 참전후에는 더욱 빈번하게 유엔군의 보급기지에 대해 습격하고 반복적으로 도로 교량 등을 파괴했다. 또한 미8군과 미10군단의 지상 연락망을 차단하고 양쪽 군대의 측후를 위협했다. 그러나, 김책은 본래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적후방의 열악한 환경에서 장기간 유격활동을 견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그는 오래지않아 최고사령부로 복귀했다.
주1)
평안북도 용천군 출생. 중학시절 반일활동 조직으로 체포되어 4년형 선고받음.
1919년 중국으로 망명. 천진 남개대학 입학
1922년 운남강무당(무관학교,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덕 원수 제자)으로 전학
1925년 황포군관학교 제5기 6구대장
1926년 중국북벌전쟁 참가 및 중국공산당 가입
1927년 광주봉기 참가
1928년 동북파견, 김치강으로 개명. 흑룡강성 통허현 조선인항일투쟁 영도
1929년 요허현 일대 항일활동 전개
1933년 4월 요허현 공농의용군 창설, 최석천으로 개명
1935년 8월 동북인민혁명군 4군단 4연대 참모장
1936년 3월 동북항일련군 4군단 2사단 참모장
1936년11월 동북항일련군 7군단 참모장, 대리군단장
1940년 동북항일련군 2로군 참모장, 동북당집행위원회 서기
1945년 귀국후 북조선 민주당 부위원장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
1948년 2월 인민군총사령관, 대장 계급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상
1950년 조선전쟁 발발후
1950년 10월 서해안방어지휘사령관, 서부전선사령관
1950년 6月~1957년 9월 군사위원회 위원, 조선인민군 최고부사령관,
내각부수상 및 민족보위상
1953년 차수 칭호
1957년 원수 칭호
1956년 ~1972년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 국가부주석, 노동당 정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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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독립투사의 정신은 뭔가 달라도 확실히 다릅니다... 아첨이나 하는 개한민국 젖같은 똥별새끼들하고는 근본뿌리 부터 다
르군요... 실로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