雙峯鄭公行狀
쌍봉정공 휘 극후 행장
公의 諱는 극후(克後)이고,字는 효익(孝翼)인데, 본관은 오천(烏川)이다, 公의 17代祖의 諱가
습명(襲明)께서 고려조에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내 당대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증조는 諱가 세홍(世弘)인데 승의랑을 지냈고, 회재(晦齋:여강 이언적(李彦迪))이선생(李先生)과 교분이 두터웠다, 조부는 諱가 유(瑜)인데 통정대부 였고, 고의 諱는 삼외(三畏)로 군자감 주부를 지냈다,임진란때 명(明)나라 군병에게 군량을 제공한 공로가 있어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수원김씨(水原金氏)에게 장가들어 만력 정축년(1577,선조10)1월20일에 公을 낳았다, 公이 3쌀 때 김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 종조부 성균관 진사 諱 윤금(胤金)의 집에서 길러졌는데, 진사공이 아들이 없어 그대로 후사로 삼았다,
公은 어려서 부터 놀이를 좋아하지 않고 몸가짐을 바로 하는 데에 힘썼으며,본생부(三畏)및 양부모(胤金,三畏)를 섬기면서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살아 계실 때 봉양하는 것과 돌아가신 뒤 장례를 치르면서 과인(過人)한 행실이 있었으니,고을 사람들과 종족들이 모두 칭찬을 하였다, 14,5세 때에 학문에 뜻을 두어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경사(經史)를 독실히 외고 익히는 외에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통달하여 그 폭을 넓혔다,
일찍이 여헌 장선생(旅軒 張顯光)에게 배웠는데,선생이 한 번 보고서 기특하게 여겼고 매번 책상을 마주하고 강론할 때면 자기를 일깨운다는 감탄을 누차 하고 붕우의 예로써 대하였다,
공부를 마치고 물러 나와서는 편지를 왕복하였는데,모두가 도의(道義)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내용들이었다,
또 한강 정선생(寒岡 鄭逑)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鄭先生이 그의 행동거지가 남다른 것을 살피고서 그를 주시하면서 말하기를,"月城에 다시 인물이 나왔다,"고 하였다, 숭정(崇禎) 갑술년(1634,인조12)에 公의 나이가 거의 60세가 되었는데,유행(儒行)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자년 1636년에 선릉참봉에 제수되자 비로소 사은숙배하고, 상소하여 능졸(陵卒)이 침해받는 폐단과 능향(陵享)이 정폐(停廢)된 잘못에 대해 논하니,上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정축년1637년에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계미년1643년에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는데, 재직한 지 몇달 만에 늙고 病들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재이(災異)로 인하여 상소를 올려,천리를 따르고 성상의 마음을 공변되게 하며 덕정(德政)에 힘쓰고 인화(人和)를 얻는 것이 재이를 상서(詳瑞)로 로 바꾸는 방법이라고 말하였으나 비답이 내리지 않았다, 이때부터 다시는 벼슬할 생각을 하지않고 삼성산(三聖山)아래에 집을 짓고서 날마다 산수 간에서 거닐며 유연히 자득(悠然自得)하는 정취(情趣)가 있었다,. 매일 닭이 울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갖추고서 가묘(家廟)에 전알(展謁)하고,집안을 청소하고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바르게 않아 경사를 토론하며 후학을 권면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았다,일찍이 글을 지어 서원의 제생(書院諸生)들에게 말하기를,"학자가 처음에는 반드시 먼저 뜻을 세워야 하고,독서하는 법은 글줄만 따라 읽는 데에 있지않다, 요는 마땅히 성현이 가르침을 내린 뜻을 찿아야 한다,성현의 수많은 말씀이 모두가 사람들로 하여금 道에 들어가게 하는 방법이며 그중에 나의 마음을 일깨우는 한두 가지 말씀이 있으니,만약 찾고 연구하여 깨달음을 얻고 참으로 힘을 쓴다면 선인군자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하고,끝에 다시 회재선생이 뜻을 세우고 공부했던 방법을 반복해서 제생들에게 말해 주었으니, 이는 이 서원이 바로 회재를 제향하는 곳이기 때문에 더욱 뜻을 기울인 것이다, 그리고 속유(俗儒)들이 제사 지내는 일을 익히지 않는다고 하여[문묘사향지(文廟祀享志)]를 지었고,우리나라 사람들이 단군기자(檀君,箕子)이하 신라와 고려의 고사에 어둡다고 하여[역년통고歷年通攷]를 지었으며,설총,김대문,최치원(薛聰 )(金大問),(崔致遠) 삼현(三賢)의 사적이 감추어지고 산실되었다고 하여 [서악지(西岳志)]를 지었다,
일찍이 종인(宗人)들과 함께 계(契)를 만들어 신의를 강론하고 친목을 다질 수 있게 하였으며,형 사물(四勿)과 함께 부(府)의 북쪽에 있는 안강현(安康縣) 곤제봉(昆弟峯) 아래에 집을 짓고서 조석으로 함께 앉아 고금(古今)을 강설(講說)하며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으니,그 우애의 돈독함과 배우기를 좋아하는 정성이 늙어서도 해이해지지 않은 것이 이와 같다,
갑오년1654년에 公은 78세이고 부인 李氏는 83세 였는데,이해가 公이 혼인60해가 되는 해였다, 여러 자식들과 손자들이 수연(壽宴)을 베풀었는데, 주(州)의 목사(牧使)와 고을의 장로(長老)들이 모두 와서 모이니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고,이것으로 인하여 자호(自號)를 쌍봉노인 이라 하였다, 무술년1658년효종9,봄에 病이 들자 손수 글을 써서 자손들에게 고하였는데,선조를 받들고 종족을 중히 하라는 뜻을 당부하였다,
病이 위중해지자 시자(侍者)가 죽을 드시라고 권하니 公이 거절하며 말하기를,"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을 맞이 해야 되는법인데,나만 유독 죽지 않고 오래 살겠는가,편안하고 고요히 천리를 따를 뿐이니라,"하고,임종하기 하루 전에 부녀자들이 곁에 있자 公이 눈을 뜨고 살펴보고서 말하기를,"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죽지 않는 법이다,"하고 손을 저어 나가게 하였다,3월14일에 세상을 떠나니,춘추가 82세였다,
이듬해 기해년1659년1월 기유일에 연일현 운제산에 장사 지냈다, 公은 월성이씨에게 장가들었으니 군수(郡守) 을규(乙圭)의 손녀이고,찰방(察訪) 홍각(弘慤)의 따님이다, 부인은 정숙한 德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어 남편을 받들면서 부덕(婦德)에 조금도 어긋나는 행실이 없었고,자손을 가르치는데 법도가 있었다,公보다 1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니,향년89세였다, 公의 묘 왼쪽에 부장 하였는데,지관(地官)의 말을 따라 신유년에 부(府)의 서쪽에 있는 부산(富山)손향(巽向)의 언덕에 합장(合葬)하였다,
公은 3남3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호(호)인데 진사이며,차남은 추(추)인데 헌능참봉이고,막내는 야(야)이다, 장녀는 사인(士人) 서강례(徐强禮)께 출가하고 차녀는 사인 손정(孫廷)에게,막내는 사인 임정(任정)에게 시집갔다, 그 외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장(庄)이다,
장남 호가 아들이 없어 족질 시전(時銓)을 후사로 삼았고, 딸이 하나 있는데 사인 이광(李光)에게 출가했다, 둘째 추가 1남6녀로 아들은 시석(時錫)이고,장녀는 생원 서행구(徐行矩)에게,차녀는 사인 조윤후(曺胤後)에게,다음은 사인 최국침(崔國琛),다음은 사인 권중배(權仲培),다음은 사인 손여호(孫汝虎),다음은 사인 이용(李榕)에게 각각 출가했고 측실에 아들 하나는 이름이 시감(時鑑)이다, 셋째 야가 1남1녀로 아들은 시함(時함)이며,딸은 사인 손여룡(孫汝龍)에게 시집갔다, 측실에 아들 둘은 시명(時銘),시협(時鋏)이다, 시석의 아들 하나에 연(沇)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이 되었다, 연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상문(相文)이다, 내외의 손,증손은 남녀 모두 60여 명이다,
公은 자품(資稟)이 혼후(渾厚)하고 심중(沈重)하여 거인(巨人)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었다, 관대하여 남을 용납하고,남이 무례를 범해도 따지지 않았으며, 평생 빨리 말하거나 다급한 안색을 지은 적이 없었다, 비록 천한 노복일지라도 성난 말을 하거나 노한 표정을 짖지않았다,
혹 연회가 있어 종일토록 술을 마시더라도 심하게 취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자신에 대해서는 검약하여 옷은 몸을 가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집안에서는 가난을 편히 여기고 분수에 만족해 하며 살림살이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환란과 궁핍한 처지를 보면 반드시 힘을 다 쏟아 구휼하고 도와주니 고을 사람들과 종족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항상 한 방에 조용히 앉아 경적(經籍)을 완미(玩味)하였는데 낮부터 밤까지 계속하면서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았으며,특히 대학과 중용(大學,中庸)에 대해 힘을 많이 들여서 연로한 나이에도 매일 아침 세수하고 반드시 한 번을 암송하였다,
평생 작록에 마음을 두지 않아서 누차 제수하는 命이 있었으나 혹 병을 핑계하고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기도 하고,잠시 갔다가 곧바로 돌아오기도 하여 관직에서 몇 달을 지체한 적이 없었다, 이는 그가 좋아하는 바가 따로 있어서 외부에서 오는 것은 영화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詩文을 지을 때는 혼후하고 원만하여 조탁(雕琢)하지 않아도 스스로 한체제를 이루었는데, 유고(遺稿)할 분이 없음을 애통해하였다,
公이 돌아가신 지 34년이 되었는데, 公의 손자 시석이 公의 行事를 가지고 수 백리를 멀다 않고 와서 현일(갈암 이현일)에게 행장을 청하여 장차 大家에게 銘을 청하려고 하였다,
현일이 대대로 통가(通家)해 온 사이이고 또 公이 후하게 인정해 주고 아껴 주셨기 때문에 마침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그 가첩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기록한다,
갈암 이현일은 삼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