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9개 교회를 찾아서
참변의 현장을 돌아보며
경신참변이 있었던 와룡촌, 연통라자, 남별리, 대황구, 장암동, 소영자 등에 다녀왔으나 그 어떤 기념비에도 교회 이름은 없었다. 현지인들에게 경신참변에 관해 구전되는 이야기나 불에 탄 교회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어도 수상하게 보일까봐 혼자 애 태우다 돌아오곤 하였다.
나 자신이 전문가도 아니고 전공학도도 아니어서 도서관 이용도 쉽지 않아서 주로 헌 책방을 이용하여 자료를 찾았다. 오직 관심과 열정으로 발품을 팔아서 책을 구하였지만 원하는 자료를 많이 확보하지 못하였다. 북간도 캐나다장로회에 대한 자료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낯선 땅에서 고난을 당하며 복음을 전한 유명, 무명의 전도사들과 선교사들 그리고 참변에 희생당한 수많은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싶어서 경신참변 100주년에 부족한 글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19개 교회 숫자에 대한 진실
불에 탄 교회당의 숫자에 대한 기록에 편차가 크다.
1920년 18일자 임시정부 파견원이 올린 <독립신문> 87호는 11개로, 그러나 임시정부 파견원이 올린 글을 참고하여 현천추는 15개로 정리하였다. 상해임시정부는 총계는 <독립신문> 92호에서 19개라고 하였는데, 임시정부 통계표에 나타난 훈춘현 7개, 화룡현 2개, 연길현 10개, 왕청현 7개 숫자를 합하면 26개이다. 숫자에 오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해임정의 통계를 이용하는 경신참변에 대한 대부분의 글들이 판에 박은 듯 19개라고 하고 있어서 난감하다. 박환은 독립신문 12월 18일 및 19일 관련기사를 참조하여 14개로 작성하였고, 김춘선은 가와구찌의 <간도훈춘북선 및 동해안지역 행각기>를 인용해서 28개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견해는 소실당한 교회 수가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교회와 학교가 한 건물을 사용한 케이스가 36개나 되었고, 교회 수로 계수되지 않은 기도처가 20여 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교회와 기도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학교 건물이나 가옥으로 정리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신문과 각종 문헌들, 각 현들의 역사적 사료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계산에서 빠진 교회들이 나올 것이다.
불탄 교회들에 대한 기록들
먼저 19개라는 숫자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건물이 소실된 것으로 나오는 통계표나 교회 이름, 기록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곳에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었는데 마을 전체가 불탔다는 기록, 국민회가 있었던 마을로서 대 참변을 당한 곳, 한 건물에 교회와 학교가 있었던 교회 등등을 여러 기록 속에서 찾아 있는 그대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김춘선 저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514쪽에 나오는 상해 임정이 발표한 “북간도지역 한인참변 조사통계표” 에 의하면 소실된 교회당이 훈춘현에 7개, 화룡현에 2개, 연길현에 10개, 왕청현에 7개이다. 4개현의 소실된 교회 수의 총계는 26개인데 총합통계표의 합계는 19개로 나온다. 교회 명단이 없으므로 어느 숫자에 착오가 있는지 이 책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2) 박은식 저 ⌜한국독립운동지혈사⌟합본, 444~450쪽에 나오는 “서∙북간도 각지에서 우리 겨레에 대한 왜적의 만행 참상 조사표”에 의하면 소실된 교회는 연길현 각지에 유수하자교회, 관도구교회, 이도구교회, 약수동교회, 대모녹교회, 남구교회 등 7개, 왕청현 각지에 라자구 대전자교회 2개, 합마당교회 1개 등 3개로 총 10개이다.
3)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1권 ⌜개척⌟ “간도학살사건” 편, 523~533쪽에 걸쳐서, 30개에 가까운 참변을 당한 지역이나 마을 이름이 나온다. 당시 토벌의 대상이었던 국민회와 관련된 대부분의 마을들에는 교회가 있었다. 당시 교회는 항일운동 중심부에 있었으며, 교회의 담임목사나 책임자가 국민회 지회장으로서 의연금 모금과 독립군 지원을 책임졌다.
① 간장장암교회는 연길현에 속해 있으며 <노루바위골>이라고도 한다. 간도국민회 제2동부지방회 4분회에 속해 있었고 참변 시 영신학교(동명학교)와 함께 불에 탔다. 일본군은 주민 33명을 교회당 안에 몰아넣고 불을 질렀다.
② 의란구교회는 연길현에 속해 있으며 1912년에 교회가 세워졌다. 간도국민회 본부와 의군부가 있었고 류채구와 구룡평을 중심으로 방초령에는 국민회군 사관훈련소가 있었다. 일제 토벌군은 구룡평, 고성촌, 유채촌, 태양촌, 연화촌 등지를 5차례에 걸쳐 토벌하였고 민가와 학교를 불태웠다.
③ 송언동은 화룡현에 속했으며 삼합진에서 서북쪽으로 8km 떨어진 두만강 회령대안에 있는 마을로 간도국민회 제1남부지방회에 소속되었다. 간도국민회 강백규, 이동춘, 김약연, 마진이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선전을 위해 자주 다녔던 지역으로 교회나 기도처가 있었을 것이다.
④ 서래동은 화룡현에 속했으며 삼합진에서 용정으로 들어가는 큰 길을 따라서 13km 정도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있는 학교 교장과 교원, 광복단 통신부장 등 9명이 사살되었다.
초성학교는 항일학교 였으며 국민회 독립군의 활동기지로 알려졌다.
⑤ 학서동은 화룡현에 속하였으며 삼합소재지에서 두만강을 따라 서남쪽으로 5.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김희구, 김도현, 허진세 등 10명이 학살당하였다.
⑥ 마패촌은 화룡현에 속하였으며 남양시와 마주하고 있다. 조강식, 조대겸, 조춘현 등 10명이 학살당하였다.
⑦ 세린하촌은 현재 용정시로부터 서북으로 2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연길현에 속하였고 황상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김명세, 김병은, 이율석 등 10여명이 살해당하였으며 민가 수십 채를 불태웠다.
⑧ 류동촌은 두만강 무산대안인 덕화향 남평에서 서북쪽으로 9km 거리에 있는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으며 당시 주변 60리 구역에 600호의 한인마을들이 산재해 있었다. 김래건, 양이홍, 박현춘, 최주운, 한성철 등 10여 명을 살해하고 민가 10여 채를 불태웠다. 국민회 제2남부지방회에 소속되었다.
⑨ 진채구는 용정시 장안진에 속하였고 장안향 소재지인 위자구에서 서쪽으로 2.5km떨어진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일본군이 민가 70여 채를 불사르고 주민 300여 명을 학살하였다.
⑩ 십리평은 왕청현 장영촌이다. 북로군정서 병영이 있었다. 항일부대에 식량을 공급하고 정보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30여 명이 학살당하였고, 20여 채가 방화를 당하였다. 1918년에 교회가 세워졌다. 국민회 북부지방회에 속하였다.
⑪ 평양촌 화룡현 삼도구에 쳐들어간 일제군은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 까지 모든 남자들을 살해하였다.
⑫ 연길현 발계라자에서는 항일교육을 시키는 학교 1채와 민가 20여 채가 방화되었다.
⑬ 대왕청에서는 대왕청, 대두천, 대감자 등지에서 민가 50여 채와 조 64섬을 소각하고 20여 명을 학살하였고 2명의 한족도 살해당하였다. 북로군정서와 국민회 조직이 있었다.
⑭ 화첨자에서는 5채의 민가, 곡물, 땔감 등을 모두 소각하였고 홍유국, 오여만, 지청수, 채경옥 등을 압송해서 륙도구에 가서 살해하였다. 사대사 대양툰에서는 이학용, 최남명을 사살하였다.
⑮ 화룡현 묘령에서는 심학인, 채순명, 김병호 등의 가옥과 묘령공립권학소를 소각하고 자피거우에 가서는 교원 신상성을 체포, 구타하였으며 학생 김인손이 구타하는 것을 말리자 그와 김희철을 사도구로 끌고 가서 사살하였다. 묘령공립권학소는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었다.
열문툰에서는 박춘화, 박안삼, 김두북, 김학준 등 10명을 학살하였다. 국민회 제1남부지방회에 속하였다.
⑯ 애위전자는 지역적으로 북로독군부 소속이었다. 오도현, 한양옥, 오양홍, 조복경, 최병욱 등 8명을 사살하고, 한경옥, 김형진, 최성련, 최창섭 등의 집 15채와 곡물 등을 모조리 소각하였다.
⑰ 서가구는 연길에서 동북으로 10여리 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국민회 중부지방회에 소속되었다. 오민구, 강구우, 이병순 등 7 사람의 가옥과 타작하지 않은 곡식 300단, 밀 300단 그리고 사립학교 1채를 소각하였다. 농민 10명을 체포하여 장봉의 김원필은 소영자에 끌고 가서 총살하고 나머지 8 명은 국자가 일본 영사관으로 압송하였다.
서골은 국자가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간도국민회 중부지방총회 소재지였다. 2명을 총살하고 7명을 체포하고, 이춘수, 최형기, 김소리 등 7명의 가옥과 사립학교를 불태웠다.
⑱ 오호정자는 천보산에서 동쪽 약 30리 상거한 곳에 있다. 서북마을에서 40여명의 사람을 체포하고 고문 후에 살해하였다. 40여 채의 가옥을 소각하였다. 한족 왕덕의 집도 소각하였다.
청산리 골짜기에 산재해 있는 마을과 남.북 완루구의 주민을 학살하고 마을 전체를 소각하였다. 대종교 마을이 있었으며 북로군정서가 기지를 세운 곳이며 1917년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간도국민회 제2남부지방회 관할이었다.
화룡현 투도구 서쪽 밭에서 10여 명, 사도구에서 9명, 장인강 동경동에서 8명, 로투구에서 10여 명이 학살당하였다. 1911년에 투도구, 1916년에 사도구, 1920년에 로투구, 1911년에 화룡현 교회가 각각 설립되었다. 간도국민회 제2남부지방회에 속하였다.
⑲ 훈춘 양진구는 간도국민회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훈춘한민회 소속지역이었다. 양진구에서 6명이 학살당하였고 대륙도구와 차대인구에서 10여 명이 학살당하였다. 회룡봉에서도 7명, 한민회 군사기지인 사도구에서도 7명이 학살당하였다. 1910년에 차대인구에 교회가 세워졌다. 왕청현 석두하자에서도 12명이 학살당하였다.
⑳ <독립신문> 12월 19일 추가조사에서 연길현의 의란구, 토성포, 하마탕, 로투구, 삼도하령, 의봉촌, 사당지방, 평강 사도구, 팔도구, 와룡동 등 지구에서 145명이 학살되었다.
옹성라자에서는 사일상점, 한명석상점, 송길석상점과 정재면의 개인 옷 등 국민회의 연락처였던 상점에서 대략 1,000여 원 가치의 물품이 약탈당하였다.
소영자, 이도구, 차조구, 계림촌, 토문자 등지의 민가 78채와 곡물 전부 그리고 학교 2개소와 교회당 4개소가 소각되었다고 하였다.
의란구, 하마탕, 로투구, 평강 사도구, 와룡동, 소영자에는 교회가 있었다.
6부에서
불탄교회에 대한 기록 4,5,6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