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여호수아 2장 1-24절
제목 : 환대의 정치
일시 : 2019년 9월 3, 4일
1.
여호수아 2장은 여호수아 전체의 맥락에서는 가나안 전쟁을 이스라엘이 어떻게 ‘준비’하는지를 보여준다. 1장에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위한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등극하는 장면을 연출했다면, 2장은 그 전쟁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스파이를 보내는 스토리이다. 이 부분은 다시 한 번 손자의 병법과 포개 읽으면 그 의미가 더 실감난다.
한편으로 저 구조 분석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그리고 이스라엘이 꿈꾸는 가나안 세상에 대한 청사진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개역개정의 단어를 골라 말하면, ‘선대’의 정치학이고, 요즘 철학계에서 핫 이슈 중 하나인 단어로 표현하면, ‘환대’의 정치학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환대의 공동체가 되기를, 그런 세상이 되기를 바라신다. 물론 이것은 ‘헤렘’ 곧 진멸/멸절의 정치 또는 전쟁과 상충하는 바가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2.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내부를 단속하는데 성공한 여호수아는 이제 눈을 외부로 향한다. 이미 수십 년 전에 자신이 정탐했던 그 땅, 며칠 후면 전투를 벌여야 할 그 곳이 과연 어떤 곳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간첩을 침투시킨다. 여리고 전투는 가나안 전쟁의 첫 전투이다. 이곳의 성패가 앞으로의 전쟁의 향방을 가늠할 것이다. 그러기에 절대로 져서는 안 되고, 질 수 없는 전투이다.
이는 그 자신이 정탐꾼 출신이기 때문에 스파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곳의 지형과 인구, 군사적 태세, 장수와 장병들의 사기, 훈련 상태 등을 면밀히 조사하고 검토한 다음, 자신들의 공격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좀 더 권위 있게 말한다면, <손자병법>의 첫 편인 “계(計)”에 나오는 다섯 가지 기본 요소, 이를 좀 더 확장한 일곱 가지 계획을 탐정하기 위해 보낸다. 즉, 정치, 기후, 지리, 장수, 법제이다. 그 중 앞의 두 가지만 말하면 이렇다. 그곳의 왕과 귀족들의 정치가 백성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데 급급한지를 알면 공략하기에 유리하다. 두 번째 기후의 중요성은 이미 적벽대전에서 그곳의 기후를 파악하고 이용한 제갈공명과 울돌목의 바다를 알고 있는 이순신의 전략과 승리가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첩자를 보내는 이유를 손자는 자신의 병법서 마지막 장인 “용간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리 적의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리더가 “출병하면 반드시 승리하고 남보다 뛰어난 공을 세운다.”(197-98) 간첩의 전략은 다섯 종류인데, 그 첫 번째와 두 번째, 다섯 번째가 여호수아 2장과 연결된다. 인간(因間), 내간(內間), 생간(生間)이다. 인간은 “적국의 평범한 주민을 첩자로 이용하는 것”이고, “내간은 적의 벼슬아치를 포섭하여 첩자로 이용하는 것”이고, “생간은 적국을 정탐한 뒤에 살아 돌아와서 정보를 보고하는 것이다.”
라합의 신분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첫 번째도 되고, 두 번째 첩보전이 된다. 이는 조금 있다 말하기로 하고, 간자를 보내는 행위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는 임건순의 책,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서해문집)의 4장, “지知: 손자, 정보전을 최초로 말하다”를 이용해서 한 두 문단 내 생각을 쓸 것, 여기에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땅이 우리 인간의 노력이나 전략도 필요하다는 것, 함께 간다는 것도 말할 것>>
3.
(이제는 라합을 말해 보자. 뺄까, 이 문장을?) 간첩으로 적지에 침투한 두 사람이 간 곳은 어느 창녀의 집이다. 그녀의 이름은 라합이다. 사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라합의 신분을 파악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무슨 말인고 하니, 창녀라고 했을 때의 이 직업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매매춘 여성인지 아니면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인지를 판단하기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여사제라고 생각했다. 이십년도 더 된, 그러니까 전도사 시절에 어느 집사님이 너무 좋다며 내게 빌려준 책이 하나 있었다. 제목도 아득한데, 소설가 김성일의 것이다. 그 책에서는 기억에 남는 것은 딱 하나다. 라합이 여사제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창기가 신전 사제라는 것이었고, 이 본문을 보면, 그녀의 말이나 행동, 정보가 평민의 것이라고 보기에 어렵다. 특히 사흘 동안 숨어 있으라는 것 등이 그렇다. 수색대가 3일 가량 찾다가 돌아간다는 것을 여성이 알고 있다는 것은, 그것도 창녀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놀랍다. 물론 그녀의 집을 드나들었던 이들을 통해 알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당시 여사제들이 신전 창기라는 것과 함께 또 하나는 홍색줄이다. 제롬 크리치는 건장한 청년들이 몸의 의탁해서 내려갔다는 것은 그녀가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의 모델이며, 옷감 공장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여호수아: 현대성서주석>, ??쪽). 그렇다면 부유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라합의 언어를 보면, 여사제인 티가 팍팍 난다. 학자들은 그녀의 말에서 신명기적 색채를 간파한다. 그녀의 말을 톱아보면, 신명기에서 사용된 것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녀와 두 세작(細作)의 대화 전부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마도 기록자의 편집, 각색을 했겠지만, 그녀의 말 자체가 종교적인 어휘를 구사하는데 능숙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고대가 종교적 사회이었으므로 평민이나 천민도 가능했겠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일 수 있고,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일단, 나는 매매춘 여성으로 보려한다. 그 이유는 첫째, 숨어들기에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 스파이들이 신전 여사제라면, 김성일의 소설을 읽었던 기억에 의하면 고급 사제라면, 이들이 그 집으로 잠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리라. 물론 그 가능성을 가지고 소설을 쓴다면 재미있겠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지 싶다.
또 하나는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었다(15절)는 점인데, 그곳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지역이다. 여리고 성은 두 개의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첫 성벽 안에는 이런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하고, 두 번째 성을 지나고 들어가면 권력층, 부유층이 산다. 왜 그랬겠는가? 시쳇말로 총알받이인 게다. 공성전이 벌어지면 그 모든 화살, 투석 등을 받아내야 하는 곳이고, 첫 성벽에서 방어를 실패하면, 이 지역을 버리고 두 번째 성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세 번째로는 쓰여진 단어인데, 히브리어로 ‘조나’이고 70인역의 헬라어는 ‘포르네’이다. 우리 시대의 ‘포르노’라고 했을 때의 그 단어이다. 내가 살펴본 모든 주석들은 이 단어를 통해서 라합이 신전 여사제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대체적으로 창녀로 본다. 알베르토 소긴의 주석(한국신학연구소)을 보면, 라합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당시의 사람들은 성적 충동을 느꼈을 것이라는 고대의 문헌을 제시한다.
위에서 말한 바, 나는 양쪽 모두라고 볼 수 있고, 어느 편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라합이 신전의 여사제이고, 고급 사제라면, 그녀의 행동은 여리고성 지도층의 균열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보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내간(內間)이다. 상대방의 고위층의 불만을 이용한다거나 욕망을 활용하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보낸 두 사람은 지배 세력 중 일부를 포섭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평민 혹은 천민이었다면, 여리고성의 하부 세력이 정서적 이반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그곳의 정치가 어떠한지를 파악하는 것이 정탐꾼의 목적 중 하나라고 했다. 그리고 위와 아래, 곧 군주와 백성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치하고 있는지를 염탐하라고 했다. 라합은 여리고성 또는 여리고 시스템을 뒷받침하는 노동 계급이 돌아섰다는 증거가 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여리고성은 이미 내부적으로 분열되었고, 스스로 몰락할 지경에 처해 있다. 이것은 6장에서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과도 일치한다. 그 성은 외부의 공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붕괴된 상태라고 봐야하겠다. 그것은 그때, 그곳에서 말하자.
4.
여기서부터는 선대의 정치를 말해 볼까 한다.
1) ‘선대’라고 번역한 ‘헤세드’의 단어적 의미를 설명할 것.
2) 이 맥락에서 라합이 보여준 선대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것
3) 민족과 성적 차이를 넘어선 ‘환대’의 정치에 관해서 레비나스와 데리다를 아주 조금 이용해서 쓸 것.
4) 그러면서 기독교가 말하는 환대에 관해서 크리스틴 폴의 <손대접>(복있는 사람)과 헨리 나우웬의 <영적 발돋움>의 두 번째 장, “적대에서 환대로”를 사용할 것. 가능하다면, <배제와 포용>도 찾아서 유용한 정보가 있다면 이용한다.
5) 그리하여 가나안 정복의 목적은, 그리고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은 미로슬라브 볼프가 말한 대로 배제가 아니라 포용임을 말한다. 이 본문에서는 신앙 고백이다. 그 고백 내용을 조금 쓸 것.
6)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기독교에게 의미하는 바를 한 문단 정도 기술하고 마친다.
7) 특별히 개역개정이 번역한 대로 ‘허물’이 없다는 것을 새번역은 ‘책임’이라고 했는데, 타자에 대한 책임을 저 위의 내용 어느 곳에 포함시킨다.
5.
라합이 두 정탐꾼에게 매달리면서 한 말 중에 13절을 읽으면서 라합의 마음이 보였다. “살려주세요, 죽이지 마세요. 죽음에서 건져 주세요.”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이 여성이 사용한 단어 중 하나가 ‘헤렘’이다. 문자적으로는 멸절시킨다, 진멸하다는 말이다. 솔까말, 다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종교적 의미는 희생제물로 신에게 봉헌한다는 뜻이다.
헤렘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한 문단 정도 쓸 것.
그러나 여기에서 헤렘은 무차별적 살상이 아님을, 반대로 가난한 자를 해방하는 것이 ‘헤렘’임을 말할 것.
* 또는 이 헤렘을 먼저 쓰고, ‘환대’를 뒤로 보내는 것도 고민해 볼 것. 그래야 글의 전개도 자연스럽고 결론을 맺는데 적절하겠다.
6.
라합의 행동에 대한 고대 교부들의 해석을 <교부들의 성경 주해 구약성경 4 - 여호수아기, 판관기, 룻기, 사무엘기 상.하권>(분도출판사)을 잠깐 설명할 것. 모형론, 교회론. 이에 대한 비판적인 우드스트라의 말을 쓸 것.
그러나 라합의 행동을 너무 신약으로 해석하는 것은 과한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와 교회의 모형과 모델로 보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녀가 사람을 살리는 일, 자기 희생적 사랑을 실천했다는 점은 고대 교부의 해석이 맞지 않을까?
히브리서와 야고보서가 라합을 믿음의 사람으로, 마태복음이 그녀를 다윗의 족보에 포함시킨 것.
<<아, 라합이 보아스의 어머니라는 것을 저 위 어느 곳에 살짝 집어 넣을 것 – 아, 환대를 말할 때 넣어야 겠다. 그게 룻기서의 핵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