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호 2017년 1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모호한 심오함 혐오…명료하고 책임있는 철학 추구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선정
김재권 브라운대 철학과 명예교수
모호한 심오함 혐오…명료하고 책임있는 철학 추구
김재권 브라운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재권(불문53입) 브라운대 명예교수가 최근 2017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됐다.
김 동문은 마음과 몸의 관계를 다루는 심리철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동양인 중 처음으로 미국철학회(중부지역) 회장을 역임했고 미국학술원 정회원이기도 하다.
그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수차례 메일이 오가는 동안 한 차례도 다음날로 미루지 않고 바로바로 성실한 영문 답변이 왔다.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선정
세계 심리철학계의 거장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인생에서 이보다 더한 보람과 기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60년에 걸친 나의 커리어를 돌아보면, 서울대 인문대에서 보낸 3년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성장기’라고 하지요. 이 3년이 내게는 정말로 성장기였습니다.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디에 있었을지, 무엇이 됐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서울대 시절은 행복으로 가득하고 아련한 애정과 향수를 담아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도 푸른 직사각형의 대학 배지를 양복 재킷의 깃에 달고 찍은 사진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2014년 브라운대를 퇴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공식적으로 은퇴했지만 여전히 사무실을 두고 일주일에 이틀은 나가고 있습니다. 은퇴한 이후 철학책보다 문학서를 더 많이 읽고 있어요.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앤 섹스턴(Anne Sexton), 제인 케년(Jane Kenyon), 루이스 글럭(Louise Gluck), 클라우디아 에머슨(Claudia Emerson), 샤론 올즈(Sharon Olds) 등. 한국에서 친숙한 이름들은 아니죠.”
-한국에 올 계획은 없으세요.
“내년 안에 한국에 가기를 희망합니다.”
김재권 동문의 학창시절 모습
-불문학을 전공하게 된 동기는.
“고등학교 시절 시인이나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파리 레프트뱅크(파리 센강의 좌안으로 예술가와 학생들이 밀집해 사는 곳)에 작은 방을 빌려 시를 쓰면서 지내는 것을 꿈꿨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독학으로 프랑스어를 익히면서 기본적인 독해력을 갖췄고 덕분에 서울대 입학시험에서 프랑스어 과목 점수를 받을 수 있었죠. 당시 부산 가교사에서 시험을 봤는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목조 건물과 교실의 맨 땅 바닥이 생각납니다.”
-전쟁 직후라 캠퍼스 상황이 열악했죠.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휘영, 김붕구, 손우성 교수님 등 지식과 통찰력을 갖춘 분들에게 뭔가를 배우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라신의 희곡 ‘페드르(Phedre)’의 장면들을 흥분하면서 읽었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나요. 당시 인기 있던 카뮈,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 작가들의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철학 수업은 고형곤 교수님의 강의가 생각납니다. 독특한 스타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어요. B 혹은 C. 1학년 가을에 부산에서 서울 동숭동 캠퍼스로 왔습니다. 그해 겨울 난방이 전혀 안 돼 장갑을 끼고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장갑을 낀 채 필기하기가 어찌나 어렵던지….”
-미국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됐나요.
“3학년 때입니다. 봄으로 기억하는데, 교내 게시판에 ‘김재권 학생 학생처장 면담’ 쪽지가 붙어있어 안 좋은 소식인가 했어요. 학생처장이 미국 대학에 입학추천을 받은 두 명 중 한 명이라고 하시더군요. 몇 주 지나 최종 합격 통지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다트머스대학(Dartmouth college) 이었어요. 운이 좋았죠.”
-유학 가서 전공을 철학으로 바꾸셨죠? 계기가 있으세요.
“두 사건이 계기가 됩니다. ‘19세기 프랑스 문학’ 수업 과제로 소설에 대한 논문을 준비해야 했는데, 시간이 충분치 않았어요. 오노레 드 발자크의 ‘나귀 가죽’의 처음 20페이지와 마지막 20페이지만 읽고 부실한 논문을 냈습니다. 놀랍게도 ‘A’를 받았어요. 문학 비평의 지적 수준과 엄격성에 심각한 회의가 들었죠. 3학년 크리스마스 때 한 철학과 미국 학생과 논쟁을 벌이게 됐는데,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이의를 제기하더라고요. 이 친구가 그렇게 똑똑할 리는 없고 그가 듣는 철학 수업이 그런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죠.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고 철학과 학과장을 찾아갔습니다.”
-유학 후 한국으로 올 마음은 없었나요.
“미국에서 거주하고 일을 하겠다고 의도적으로 결심하지는 않았어요.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다 보니 연구와 강의 기회가 주어졌고 그렇게 지금까지 오게 됐습니다.”
김 동문은 전공을 바꾼 후 처음에는 프랑스 실존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 박사학위논문을 과학철학으로 쓰면서 강의도 그 주제로 시작했다. 과학철학을 하게 된 데에는 칼 헴펠과 로더릭 치좀으로부터 받은 영향도 컸다. 헴펠은 “모호하고 거짓된 심오함을 혐오하고, 명료하고 책임있는 논의를 강조하는 특정한 스타일의 철학”을 권유했고, 치좀에게 ‘형이상학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 차차 관심이 형이상학과 인식론으로 옮겨갔고 1970~80년대 당시 철학계의 핵심문제였던 심리철학 연구에 집중한다.
심리철학은 영국과 미국을 주 무대로 발전해온 분석철학의 한 분야다. 주로 마음과 신체의 관계를 연구한다. 자연의 인과관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마음의 위치는 어디며 마음은 신체와 독립해 존재할 수 있는가 등을 연구한다. 김 동문은 정신현상을 물리현상에 귀속시키는 이른바 ‘물리주의(physicalism)’를 옹호한다. 마음 또한 자연현상의 일부로 파악하면서 정신적 사건의 대부분을 뇌의 사건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본다.
-심리철학을 연구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는 무엇입니까.
“박사논문은 과학철학 분야였습니다. 과학철학을 하면 실재의 궁극적인 본질과 그 속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형이상학적 의문이 필연적으로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이고,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우리는 마음과 의식의 본질, 특히 자의식에 대해 알고 싶게 될 겁니다. 이것이 심리철학을 연구하는 근본적인 동기입니다.”
-모든 자연현상이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을까요.
“정신적 사건의 대부분이 뇌의 사건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감각, 또는 의식의 영역은 예외를 인정합니다. 커피 향을 맡을 때 그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해 인지할 뿐 아니라 그와 동반하는 감각도 함께 느낍니다. 이런 감각 또는 느낌의 영역은 인지 영역과 달리 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아요. 그렇다 하더라도 정신현상의 다른 부분인 인지적 상태는 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고 포괄적인 세계관으로서의 물리주의를 대체할 만한 대안적 세계관이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는요.
“종교라면 저는 종교적인 신념은 없습니다. 다른 많은 한국 사람들처럼 불교 환경에서 자랐지만 우리는 그렇게 진지하게 종교적인 가족은 아니었습니다. 종교가 ‘믿음’의 문제라기보다 삶과 세계, 타인과 의식적인 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 근본적으로 ‘삶의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심리철학은 AI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AI는 테크놀로지고 저에게 크게 흥미 있는 주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스마트한’ 기계를 말하지만 여기서 ‘스마트’는 정신과 의식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도 ‘스마트폰’이 특별한 의식 또는 정신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죠. 의식이 있고, 지각이 있는 기계(명확한 의미로)가 존재할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당 기계가 의식이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바위와 나무는 의식이 없고, 개나 고양이, 기타 등등이 의식이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의식이 있고, 정신적인 것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그것이 세상에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고 움직이는 ‘행위인(agent)’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물리적, 생물학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등 또한 중요할 수 있죠. 복잡한 문제지만, 철학에서 특별히 곤혹스런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을 잘 알기 위해서는 어떤 책을 보면 좋을까요. 추천해 주십시오’란 질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의 책을 얘기하란 뜻으로 알겠다”며 마르셀 프루스트와 샤를 보들레르 등의 책, 시를 추천했다. 그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저서를 알려달라는 의도였다. 어쩌면 이 책들을 읽으면 그를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답변이다. “몇몇 프랑스어 문학 작품을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첫 번째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굉장히 길고 방대한 양의 명작입니다. 다른 어디에도 이런 작품은 없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어 시로는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아르튀르 랭보의 ‘취한 배’,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들.”
김남주 기자
김재권 동문은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분야에서 세계적 거장으로 손꼽힌다. 형이상학 분야에서 그가 제시한 ‘속성예화사건이론’과 ‘강수반·약수반·총체적 수반’의 구분은 철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심리철학 분야에서 ‘기능적 환원 모형’을 제시해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불문과 재학 중 한미장학위원회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다트머스대학(철학, 수학, 불문학 전공)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 후 미시간대학에서 20년간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7년부터 2014년까지 브라운대학에서 월리엄 허버트 페리 폰스(William Herbert Perry Faunce) 석좌교수로 재직했다. 미국철학회 중부지역 회장을 역임했다.
2000년 KBS 재외동포상, 2001년 서우철학상, 2014년 경암학술상을 수상했다. 국내 번역된 저서로 ‘물리주의-또는 그에 충분히 가까운 것’(아카넷, 2007년), ‘물리계 안에서의 마음’(철학과 현실사, 1999년), ‘심리철학’(철학과 현실사, 1997년) 등이 있으며 홍창성·선우환·이좌용 동문 등이 그의 책 물리주의를 읽고 쓴 ‘김재권과 물리주의’(아카넷, 2008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