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 엽서
-박은형 시집 '흑백 한 문장'을 읽고
꽤 시간이 흘렀지요? 남도 땅 정읍에서 얼굴 본지가.
그 날은 이돈형 시인의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과 김분홍 시인의 <눈 속에 꽃나무를 심다> 시집을 축하하는 자리를 겸했지요. 깊어질때로 깊어진 가을날이고 내장산의 단풍도 절정을 이루어 문학기행에는 더 없이 좋은 날이었습니다. 코로나도 잠시 주춤하여 우리의 만남을 방해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던 때라 2차는 어림없고 가끔 뒤풀이로 들르는 노래방도 갈 수 없는 형편이었지요. 우리는 꼼작없이 조 모시인이 집필실로 사용하는 거처에서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때 입니다.
시와 문학과 술과 안주가 뒤섞여 청량한 가을 밤을 문학으로 물들이고 말았지요. 전라도 사투리와 충청도 사투리와 서울 사투리가 두서없이 섞여 묘한 분위기로 빠져 들 무렵, 짤막한 경상도 사투리가 툭 튀어 나왔지요. 나긋나긋한 연둣빛 여인의 경상도 사투리에 단번에 빠져들었지만 당신은 노란 표지의 시집 한 권을 슬며시 내밀고는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정성스레 사인한 시집을 살펴 볼 겨를도 없이 우리는 다시 들뜬 분위기에 취하고 말았지요. 그리고 속절없는 세월만 흘렀습니다. 가끔 단톡방에서 회원들의 시집 발간을 축하하고 떠나간 이들을 그리워하고 수상한 시절을 원망하며.
그런데 무슨 뜬금없는 엽서냐구요?
실은 봉투에 담긴 편지를 써서 진한 감동을 전하고 싶지만 머리속에서만 웅얼거릴 뿐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입 언저리에서만 맴돌다 이내 사라져버립니다. 노란 표지의 시집을 열고 시들을 만납니다. 처음 만난 박꽃에 머물러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한참을 지납니다.. 갑자기 주변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박꽃이 너무 활짝 피었거든요.
저녁의 단문이어서 흰, 태생이 후렴이어서 흰, 들키지 말라고 아니 들키라고 흰, 될 때로 되라고 문틈에 끼워 놓은 조바심이라서 흰, 등대처럼 한 송이로 무성해서 흰, 꽉 들어찼음에도 자꾸 쏠리는 눈자위라서 흰, 모르게 져버리는 미혹이라서 흰,
당신이라는 단 한 번의 미지
-박꽃, 전문
몇 시간 째 하얀 백지는 그대로입니다. 이제 편지 쓸 생각을 아예 접고 말았습니다. 박꽃처럼 빛나는 당신의 모습을 그려 보다가 급하게 떠오른 생각만 엽서에 몇자 적어봅니다.
걸어다니는 식물도감처럼 당신은 나무와 풀과 꽃들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추었지요. 길을 걸을 때나 야외에 나가면 어김없이 그 실력을 발휘하곤 하지요. 시골 태생으로 자연과 더불어 유년을 보낸 나로서도 자연에 대한 당신의 해박한 지식에 그저 놀랍고 부러울 따름입니다. 무심한 잡초나 거리에 핀 들꽃, 내 눈엔 비슷비슷한 나무에 고유의 이름을 새겨 주고 그것의 생태나 특징까지 전해주는 자상함이라니. 거기다가 한마디 씩 툭툭 던지는 사투리에 유머와 철학과 인생이 모두 담겨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번잡하지 않은 모습으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식물은 당신의 성품과 무척 닮았습니다. 뿌리에서 비롯된 강인한 생명력은 모성본능과 닿아 있다는 생각이구요. 당신이 유독 식물성 대상에 집착하는 것도 어쩌면 대지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느낌은 시집을 읽는 내내 지속되었지요.
환하게 시집을 여는 박꽃, 표제작에 해당하는 연두를 비롯하여 꽃집이 있었다, 구름 종묘상, 도화복음, 먼나무 편지, 천리향 전언, 다알리아, 율마, 미루나무 붉은 서쪽, 사슬나무, 꽃병의 감정, 작약, 도라지 꽃, 앵두의 폐사지, 수양버들 아래,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한 그 나무 붉은 지문 밑 까지.
거의 모든 시들이 식물을 소재로 하거나 자연의 본성을 다루고 있지요. 또한 모든 시들은 그릇과도 같은 인생 담론을 담고 있습니다. 당신의 시와 동행하다보면 여러 명의 당신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들은 특정지어진 이인칭이나 삼인칭이 아니라 주위에서 흔히 보는 갑남을녀이고 장삼이사 입니다. 그들은 삶과 죽음, 남과 여, 동물과 식물, 기쁨과 슬픔 등 수 많은 선택을 강요 받습니다. 당신이 택한 삶의 방식은 대립과 갈등보다는 상생과 조화 입니다. 당신의 눈길이 머물다 간 당신들의 치열한 삶 너머에는 무심한 풍경이 공존합니다. 글이란 자기 자신을 함축하여 비추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대상을 통해 투영되는 자아의 세계는 존재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지요.
당신 역시 김달진 창원문학상의 수상소감에서 비슷한 소회를 밝힌 바 있지요. "내 시들은 여타 주변의 식물들에게 빚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 속에 많은 식물이 등장하는 것이 그 연유다.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시집 투고 준비를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일이다. 나무와 풀과 꽃들의 사계를 어정거리다 마주친 푸른 저녁들. 죽음과, 시간과, 고독과, 사랑과, 사람과 슬픔 그리고 존재에 대한 질문들이 식물의 생멸을 좇으며 감각되다가 시가 되곤 했다."
이번 시집으로 당신은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의 문화예술지원금 수혜에 이어 김달진 창원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지요. 여전히 당신은 침묵하지만 촉이 좋은 누군가에 의해 전해들었습니다.
당신은 가타부타 말이 없지만 시집 첫머리에 쓴 '시인의 말'을 통해 당신의 속마음을 잠깐 엿볼 뿐입니다. "지나온 모든 가을처럼 마음에 붉은 반점이 돋았다/ 가까이 있으려고 당신과 멀어지는 날들이다"
이러다가 진짜 말이 길어질까봐 여기서 마무리 해야할 것 같습니다. 아직 각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는데 엽서란 형식을 취하다 보니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그래도 내 마음에 깊이 자리 잡은 시 한 편 낭독함으로 모든 축하의 마음을 갈음합니다. 부디 건필하소서. 이만 총총.
그럼에도 그 꽃나무 아래서 만나자 했다
그러니까 더욱 그 꽃나무 아래로 찾아오라 했다
새 옷 입는 꿈을 꾸었다는 당신은
차디찬 이월의 매화에 눈썹을 그려 넣자 했다
달콤한 맹세 같은 향기에 부빈 눈과 귀 멀어 보자 했다
나무는 방금 잊히어서 죽었다 울었다 하는 구원과
첫 꽃 구사하는 물색없는 사랑들에 둘러싸여 있다
삼백 년을 저렇듯 기다려서
한 가지 말과 일색의 마음인 꽃잎을 짓는 중이다
제발 만지지 말아 달라는 간청을
헛된 다짐으로라도 지켜 주고 싶게 하는 것이다
붙들 수 없는 꽃잎경을 알아듣게 고쳐 건네는
그 나무 붉은 지문 밑
우리는 그렇게 잠시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 나무 붉은 지문 밑, 전문
첫댓글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쓴 시들, 식물에 귀 기울인 시들, 역시 김달진창원문학상 수상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님을 실감합니다!
김연종 선생님께서 박은형 시인의 시와 시인을 세심히 관찰.기록하시는 예리하신 눈길도 돋보입니다~^^
아름다운 엽서 편지입니다
은형샘 덕에 , 연종샘 덕에 가을이 참 좋습니당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