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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하면 우선 떠오르는건. 바로 한탄강이다.
그리고는 한국전쟁때 남과 북이 서로 치열한 전투를 했던 곳이란 것이다.
철원땅이 그렇게 먼건 아닌데 왜이리 멀게만 느껴지는건지.
포천을 지나 뻥 뚤린 길을 한참이나 달리다보니 신철원이란 이정표가 드뎌 나온다.
예전 한국전쟁때 원래 있던 철원, 그렇니까 지금은 허가를 받아야 갈 수 있는 곳은 구철원이고
북한의 점령때문에 새롭게 이주한 곳이 지금의 철원읍내인 신철원이다. 철원은 한탄강이
화산작용에 의해 아래로 푹 꺼져 신비한 지형을 보여주는 협곡이 잘 발달해 있는데
마치 미국의 콜로라도 그랜드캐년과 비슷한 모양새다. 여름철 래프팅과 캠핑으로 달궈졌던 철원도
겨울이 한참일때는 그 자태를 빼곡히 추위속에 묻고 덜덜 떨고있다.
철원은 통일의 전초기지이고 평화가 숨쉬는 남북대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소박한 고을이다.
드디어 철원시내로 진입한다. 통일을 꿈꾸는 미래의 땅 철원이란 큰 안내판이 있고
그 위에는 철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하얀 학과 찰지다는 오대쌀이 적혀있다.
이곳이 철의 삼각지대요, 남과 북이 빼앗고 뺏기기를 거듭했던 궁예의 땅이었던 후고구려의 지역 철원.
철원 한탄강변에 있는 임꺽정의 전설이 남아있는 고석정을 한바퀴 둘러보고 463번 도로를 따라
10여분정도 마을길로 들어가니 강 전체가 마치 폭포처럼 보이는 한국의 나이아가라란
별명이 붙은 직탕폭포가 나온다. 직탕폭포 입구에 서니 얼어붙은 강 아래로 궁예가 세웠던
후고구려의 도읍지 중 한곳인 태봉을 이름으로 삼고 있는 번지점프대가 설치된 태봉대교가 보인다.
철원팔경 중 하나인 직탕폭포는 강폭이 80여m에 달하는데, 3m 정도의 수심으로 깊지는 않지만
물이 많은 수영기에는 강을 따라 곧게 흘러내리는 강줄기의 모습이 장관이다.
직탕폭포를 건너는 다리 입구에는 민물매운탕 집이 두군데 있는데, 직탕폭포를 보면서 맛보는 한탄강표
매운탕의 맛은 꽤나 입맛을 당기는 별미란다. 구수한 국물에 쇠주 한잔 하면 겨울의 추위도 물러간다.
직탕폭포는 온통 하얀 눈으로 덮이고 추운 날씨에 꽁꽁 얼어 흐르는 물줄기는 끝쪽에 조금 남아있다.
여름철에는 물놀이도 하고 강고기도 잡으면서 시원하게 보냈을 텐데. 겨울에는 그저 얼어붙은 폭포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김현주와 강성연이 주연했던 드라마 덕이를 촬영했던 곳이 바로 직탕폭포.
그 흔적이야 온데간데 없지만 그래도 직탕폭포 아래를 흐르는 물줄기는 막혔던 가슴을 맑게 해주는 느낌이다. 폭포아래는 수심이 꽤 깊을텐데 꽝꽝 언 얼음위로 가보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북녘에서 내려오는 저 물줄기는 언제나 말없이 남과북을 이어준다.
한겨울 두껍게 얼어버린 강물도 따듯한 봄이 되면 녹아 맑은 실개천을 이루듯이 언젠가는
함께 웃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눌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꿈꾸어본다. 직탕폭포 한가운데를
지나는 다리를 건너 산책을 해도 좋다. 직탕폭포 인근에는 한탄강오토캠핑장도 있어
철원의 청정공기와 수려한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며 캠핑의 묘미를 느껴볼 수 있다.
태봉대교 위에서 바라본 한탄강의 겨울풍경. 한탄강은 차를 타고 지나가면 보이지 않는다.
번지점프장은 쳐다보기만 해도 아찔한 느낌이다. 보통의 강들이 지표면과 비슷하게 흐른다면
이곳 한탄강은 현무암의 침식작용으로 절벽으로 푹 꺼진 형국을 보인다.
평원분지 한가운데를 20~30m 깊이의 협곡을 이루면서 흐르기에 그 모양새가 독특하고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결코 범람하는 일이 없단다.
하긴 이렇게 깊은데 아무리 물이 들이차도 넘친다면 그건 홍수가 아니라 대재앙이겠지.
한탄강에서는 일년에 한두명씩은 꼭 수상사고가 생기니 조심해야 한다. 물살도 빠르고 깊은 곳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에. 그렇지만 그 풍경은 한폭의 수묵담채화를 보는 듯 선경이 따로 없다.
협곡을 지나 굽이쳐 흐르는 곳곳에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비경들이 널려있다.
칠만암, 직탕, 고석정, 순담계곡은 대표적인 명승지. 이곳에는 오염원이 없기에 청정자연속
야생동물들이 많고 맑은 한탄강속에는 깨끗한 물에만 사는 물고기들이 많아 강태공들의
끊이지 않는 사랑을 받는다. 한탄강은 량천이라 불렸는데, 북한의 평강에서
남한의 철원, 연천을 거쳐 임진강에 합류하는 110여km의 비교적 긴 강줄기이다.
직탕폭포를 구경하고 다시 고석정유원지로 나와 본격적인 철원의 속살을 더듬는 안보투어를 시작한다.
한탄강관광사업소 1층 매표소에서 신청서를 작성하고 견학접수를 한다.
제2땅굴과 평화전망대 견학 출발은 오전 9시 30분과 10시 30분, 오후 1시 30분과 2시 30분.
이렇게 하루에 4차례 할 수 있다. 철원 전적지 안보투어에 걸리는 시간은 3시간 가량.
차량으로 들어가야 하니 신분증 지참은 필수.
2천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데, 비무장지대 안이기때문에 사진촬영은 이동중에 안된다고 하지만
살짝 찍긴 했다. 입장료를 내면 차량에 출입허가판을 준다. 단체로 버스를 타면 안내하는 분이 동승하지만
개인이 가면 각자의 차량을 이용해 가이드차를 따라 이동해야 한다. 넓은 평야지대를 지나
북으로 북으로 달리다 보면 어느새 적막감이 흐르는 비무장지대로 들어온다. 황량한 벌판에는 곳곳에
군사시설과 농가들이 눈에 들어온다. 논에서는 독수리와 철새들이 낙곡을 주워먹는 풍경도 연출된다.
고성적관광안내소에서 출발한지 30여분만에 높은 고지에 철책을 두르고 경계를 서고 있는
초소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철책들은 이곳이
북한과 면해 있는 군사지역이라는 걸 실감하게 해준다.
넓디 넓은 철새들의 천국, 토교저수지를 빙둘러 산을 넘고 넘어서야 제2땅굴에 다다른다.
제2땅굴 입구에서 땅굴 관람 수칙과 땅굴에 대해 설명을 들은 뒤 안전모를 쓰고 안으로 입장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공식적인 땅굴은 파주와 연천을 비롯, 철원과 양구의 4땅굴까지 모두 네곳이다.
철원의 2땅굴은 1973년에 지하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폭음소리를 귀이하게 여겨 조사를 하던중에
발견되었다. 이 땅굴을 발견하게된 직접적인 경위는 북한에서 땅굴을 파다 귀순한 김부성씨의
증언으로 확신을 갖게되어 본격적인 시추작업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났다. 1975년 3개월간 45개의
시추공을 지하 깊은곳으로 보낸끝에 드뎌 북한의 남침의욕을 여실히 보여주는 2땅굴이 온전하게 드러났다.
북한이 파놓은 땅굴을 연결하던중 북한이 설치한 폭발물에 의해 아까운 생명 8명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북한은 남한에서 땅굴을 팠다고 억지로운 주장을 편다.
길이 3.5km에 지하 50 ~ 160m 깊이라니 북한의 땅파는 기술도 알아줘야겠다.
그렇게 파다가 맨틀까지도 내려가지 않을런지. 지금이야 이렇게 편하게 보고 있지만
만약 발견하지 못했다면 무장한 수만의 군사들이 이곳을 통해 남한지역으로 침입할 수 있는것 아닌가.
땅굴 안으로 줄지어 들어간다. 땅굴은 높이가 낮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굴 옆면에는 삐죽삐죽한 날카로운 바위들이 그대로 노출돼 있어 안전모를 썼지만 항상 조심하며 걸어야 한다. 사진촬영이 금지된 곳이지만 그래도 안찍을 수 없기에 찍긴 찍었는데, 빛도 없고 습기도 많아
사진은 잘 나오지 않았다. 물론 조절을 하면 되겠지만 지켜보는 눈초리가 매섭기에.
가다보니 통일을 기원하는 우물이 있어 백원짜리 동전 두서너개를 우물에 퐁당 빠트렸다.
땅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기에 천천히 걸어야 하지만 아이들은 무슨 놀이공원 온것처럼 떠들면서
잘도 좁은 공간을 헤집고 다닌다. 지하 몇십미터에 들어왔다는 것이 축축한 공기와 등을
적시는 온기로 사뭇 실감나게 다가온다. 이 땅굴을 팠을 북한의 병사들도 고생 꽤나 했을것 같다.
지금도 어디선가 땅굴을 파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땅굴을 둘러보고 땅굴 앞에 있는 땅굴전시관에 들어갔다.
땅굴안에서 북한 병사들이 땅굴을 팔때 사용했던 장비들과 북한병사들이 사용한 무기와
전투용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나름 북한의 실상에 대해 조금 더 알수있게 되었다.
평화전망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니 노란 박스같은 모노레일이 운행하고 있다.
동송저수지 인근에 중강리에 있는 평화전망대는 2007년 개관하였는데,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은
5천원을 내고 느릿느릿한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타기에는
3분동안 움직이는 탈것에 돈이 아까울것 같다. 사지멀쩡한 사람들은 10분만 걸으면 되니
길을 오르면서 주변 경치도 감상하고 바람을 쐬는것이 정신건강에도 좋을것 같다.
철원평화전망대의 외부 모습.
전망대 옆에 있는 정사각형 모양의 동송저수지. 이곳에도 낚시를 하면 대어들이 많이 잡힌다지만
여기까지 낚시하러 오기에는 비무장지대에 군사지역이니 참는것이 속편하겠다.
그래도 저수지 주변이 시원스런 전망에 낚시하기에는 꽤 좋은 분위기이다.
저수지 뒤로는 철원의 명쌀 오대쌀을 재배하는 드넓은 곡창지대 철원평야가 펼쳐져 있다.
평화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비무장지대의 을씨년스러운 모습.
동송저수지 뒷편으로 철책들이 드넓은 평야를 가로지르며 서있고 곳곳에는 경비초소들이 보인다.
평화전망대는 원래 지금의 월정리 역사가 있는 곳에 있었는데,
지대가 낮고 전망이 좋지 못해 지금의 전망대로 2007년 옮기게 되었다.
저 평야지대 한가운데에는 그 먼 옛날 신라 왕족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꿨던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궁성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한때는 신라를 비롯 주변 나라들을 오싹하게 만들었던
그 위세도 저 바싹 말라버린 황량한 빈처처럼 부질없는 역사의 뒤안길로 잠들었다.
고려왕조 초기의 궁성과 관직의 기틀이 되었던 궁성터는 잡풀과 철새들만이 주인이 되어
그때의 영화를 지켜보고 있다. 평강고원과 사방산 오성산이 보이고 낙타고지와 피의 능선,
백마고지를 먼발치에서나마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이곳이기도 하다.
전망대 테라스에 잠깐 나와 따듯한 커피 한잔을 마셨다. 북녘땅을 바라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북한의 도발로 항상 시끄럽기만 한 정국에서도 이곳 휴전선지역은 언제 그런일이 있느냐는둥
마냥 평화롭기만 하다. 저 평야지대 한가운데 관목과 덤불이 뒤덮은곳에 궁예의 태봉도성이
그 흔적만 남은채 숨어 있다. 이곳 휴전선에는 다양한 식물과 동물, 문화유적들이 고스란히 쉬고 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기에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던 것.
저 안에서는 사슴과 늑대, 곰과 노루가 한데 어울려 평화로운 삶을 영위해 나가겠지.
평화와 통일이 반갑기는 하겠지만 이런 천혜의 자연이 곱게 보존된 곳은 지금처럼
그들의 평온한 쉼터로 오래토록 남아주길 바란다.
바로 앞에 남한측의 초소가 보이고 그 뒷편으로는 남방한계선 구역이다.
궁예의 태봉 궁성은 비무장지대인 철원군 홍원리에 있으며, 900년대 초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궁예는 효공왕 8년(서기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서기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천도당시에 도선의 도참설에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0년을 지속할 것이며,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년밖에 유지하지 못한다”는 설이 있었는데 궁예는 이를 무시하고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고 이곳에다 903년부터 궁전을 크게 짓기 시작하고
외성, 내성도 튼튼히 축조하기에 이르렀으며, 10여개의 외곽성도 함께 구축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도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중 축조된 특이한 성인데,
밑부분은 석축으로 상단은 토축으로 외성 둘레는 4,370m. 내성은 577m 규모다.
내성에는 궁예만이 사용하였던 어수정과 석등 등 많은 유적이 있었으나 오랜 풍상으로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현재 휴전선 비무장지대내에 유지가 일부 남아 있다고 하나 출입통제 지역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전면에 북한지역이 시원하게 보이는 통유리가 있는 평화전망대의 관람관.
의자에 앉아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눈을 이곳저곳 돌리면서 흥미롭게 바라본다.
모두들 호기심어린 눈으로 정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망원경으로 보면 좀 더 잘 보이지만 시야가 좋지 않아 그냥 독수리같은 눈으로 응시만 한다.
DMZ내의 자연생태, 궁예도성의 성곽, 평강고원, 북한 선전마을을 전망하며 6.25때의 치열했던 전투의 모습과
남북의 전비태세에 대한 가이드의 안내를 듣자니 민족분단의 생생한 현실이 무겁게 느껴진다.
전망대 관람석에서 바라본 북녘땅. 멀리까지 평야지대가 이어진다.
평야지대에 우뚝솟은 산들이 시야를 가리지만.
왼쪽 조금 낮은 산에는 북한 최전방 초소가 있고 그 옆으로는 평강시의 낙타봉이 보인다.
초목 산천은 겨울의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표정이다.
한여름철에는 이렇게 푸릇푸릇하고 상큼한 자연을 보여주는데.
그래서 여름이 더 경계근무하기가 어렵다 한다. 겨울에는 나무들과 풀이 무성하지 않아
시야가 좋지만 여름에는 이렇게 잘자란 풀과 나무들이 전방을 가로막고 있으니까.
평화통일전망대 전시관에는 전쟁중 차가운 동토에서 이름없이 숨져간 전우들이 남긴
철모와 전사자의 백골이 전시돼 있다. 젊은 나이에 고귀한 몫숨을 나라에 바치고
총탄과 육탄에 의해 희생한 그분들의 넋을 잠시 떠올리며 영혼이 편하길 바래본다.
지금도 전사자들의 유해발굴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흔적을 찾기도 쉽지 않고 찾더라도
누구인지 확인하기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아마 치열했던 전장을 발굴한다면 수만기의 유해들이
땅속에서 백골로 남아 피비린내났던 전쟁의 씁쓸한 기억을 보여줄 것이다.
전시관에는 땅굴모형을 비롯해 휴전선의 철책모형과 전방초소, 군대 막사등의 모형들이 있어
전방 군생활과 남북한 대치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체감온도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전방의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후배 군인들 참 고생이 많겠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팻말과 함께 전쟁중에 쓰러진 열차를 보존하고 있는 철원두루미관 옆
조그마한 월정리역.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던 월정역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이
최근접한 지점에 있으며, 현재는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부서진 열차의 잔해와 수풀이 우거진 철로만
남아 있다. 이제는 더이상 열차가 들어오지 않는 월정역은 분단의 아픔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경원선은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고 당시 러시아(구소련)의 10월 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아인을 고용하여 1914년 8월 강원도내에서 제일 먼저 부설되었는데
서울 ↔ 원산간 221km를 연결한 산업철도로 철원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원산의 해산물 등을
수송하는 간선철도 역할을 했다.
오늘날 경원선의 최북단 분단 지점이 되고 있는 월정역은 예전에는 월정리란 큰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을 월정리로 부르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애화가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아주 먼 옛날 이곳 어느 사골에 이름모를 병으로 고생하는 홀아비와 그를 지성으로 봉양하는
딸아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 처녀는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밤마다 달니께 빌었다.
어느날 밤 달님께 빌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도사가 나타나서 “ 나는 달의 화신인테
너의 정성이 지극하여 이르노니 집 옆 바위 위에 가보면 물이 고여 있을 것이니 달이 지기전에
너의 손으로 천 모금을 길어 아버님께 드리면 병이 나을것이다”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처녀는 허둥지둥 꿈에 들은 곳을 찾아가서 물을 길어다 아버지 입에 넣기를 기백번
얼마 남지 않은 달은 서편으로 기우는데 가련하고 효성이 지극한 딸은 온몸을 바위에
부딪혀 찢겨지고 피가 흘렀으나 갸날픈 손으로 드디어 천 번째 물짓기를 마치자 선천의 달도 지고
그 덕분으로 아버지 병환은 나았으나 그 효녀는 영영 회생되지 않았다.
그 후 물이 고였던 자리를 달의 우물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 역시 월정리라 불리웠다 한다.
월정리역 바로 옆에는 이곳을 월정리로 부르게 된 전설 속의 효녀 동상을 만나볼 수 있는데,
전설 속의 효녀는 아픈 아버지를 위해 달이 지기 전에 천 번 물을 길어 날랐다고 한다.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효녀동상의 손이 지금을 갈 수 없는 북녘의 하늘을 향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철원에서 만나는 근대문화유산 두 번째는 제일감리교회(등록문화재23호)다.
노동당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했던 감리교회 역시 6.25 때 파괴되어 구조의
일부만을 엿볼 수 있다. 얼음창고와 농산물검역소(등록문화재 24, 25호)를 보기 위해서는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민통선 밖에 있는 노동당사와 달리 자유롭게 관람할 수 없다.
신분증을 맡기고 들어가야 하는것.
노동당사와 거리가 멀지는 않지만, 한탄강관광사업소(구 철의삼각전적지관리사무소)나
군부대등의 협조를 얻어야 들어갈 수 있다. 등록문화재 24호인 얼음창고는 가로 12m, 세로 10m의
콘크리트 박스모양이고 농산물검역소(등록문화재 25호)는 작지만 잘 정돈된 비례를 가진
근대건축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도 구철원의 많은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드디어 근대문화유산들을 잠깐 보고 군인들이 지키는 민통선해제지역을 통과한다.
신분증을 받고 나가면 노동당사와 백마고지가 지척이다. 전쟁다큐멘터리에서 수없이 그 명성을 들어왔던
백마고지. 1952년 10월 6일부터 중공군 2개 사단과 10일 동안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던 피의 전적지다.
당시 흙먼지와 시체가 뒤엉켜 악취가 코를 찔렀으며 포격으로 산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형상과 같아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된 가슴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백마고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400m 정도의 평범한 고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철의 삼각지를 지키는 요충지가 되면서 이 고지 하나를 빼앗기 위해
피비릿내나는 전투가 벌어졌던 것. 10일동안 주인이 뒤바뀌면서 13,00여명이 희생되었다 한다.
백마고지전적지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장병들의 영혼을 진혼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전적지 끝 종이 있는 상승각에서는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백마고지를 볼 수 있다.
산등성이가 지금도 메말라 있는 헐벗은 백마고지의 모습.
노동당사로 오르는 계단은 일정의 간격으로 부수어져 있다.
이것은 전쟁 때 탱크가 계단으로 밀고 올라가면서 으스러진 자국이다.
건물 외벽에는 총탄과 포탄으로 구멍뚤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의 뮤직비디오가 촬영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옛 북한군의 노동당사. 광복 이후 북한이 한국전쟁 전까지 중앙당으로부터 지령되는 극비사업과
이곳 철원, 김화, 평강, 포천지역의 주민들의 동향은 물론 대남공작을 주도했던 공산 치하 중부지역의
주요한 업무를 보던 당사이다. 이지역의 양민수탈과 반공인사들을 체포해 구금하고 고문과 학살을
자행했던 곳으로 악명이 자자한데, 당사 주변 방공호에는 고문흔적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인골과
실탄, 낫, 철사, 곡괭이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전쟁중 폭격으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지만
그 당시의 처절했던 흔적들은 곳곳에 묻어있다.
소련식 공법으로 시멘트와 벽돌조적으로 된 무철근 3층 건물은 당시 이 건물 일대가
철원읍 시가지여서 한국전쟁당시 주변 건물들은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유독 이 건물만 남아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견고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그만큼 건물을 짓기 위해 동원된 지역 주민들의 고생도 심했겠다.
지금은 건물의 네면과 골조만 남아 있고 천장은 물론 외벽에도 전쟁 당시의 총과 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노동당사는 귀신이라도 나올만큼 을씨년스러워 보이고 괴기스런 모습이다.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22호로 관리되고 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거나 그믐달이
뜨는 밤이 되면 이곳에서 당시 북한군병사들에게 고문당한 반공인사들의 웃음소리와
북한군을 되레 고문하는 모습도 보인다한다.
노동당사에서 동송읍내로 2km정도 가다보면 왼쪽으로 도피안사란 표지판이 보인다.
도로변에서 멀지 않아 금방 다녀올 수 있다. 도피안은 어리석고 미혹한 마음을 돌이켜 진리의 깨우침을
열어 다 함게 온갖 얽매임의 고해바다를 건너 저 이상 세계에 도달하는 뜻.
조계종 신흥사의 말사인 도피안사에는 대적광전에 안좌하고 있는 국보 63호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이 유명하다.
신체와 대좌 모두 철로 된 신라말의 보기 드문 불상이다. 도피안사 3층석탑 역시 통일신라시대
특유의 석탑 특징을 잘 보여준다. 도피안사는 주차장에서 걸어 경내를 천천히 둘러본다 해도
30여분이 걸리지 않을만큼 작고 아담한 사찰이지만 조용한 분위기에서 산책하며
남북접경지역 철원의 역사를 떠올려볼 수 있는 의미 깊은 사찰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연꽃이 있는 연못이 나오고 바로 전각 몇채가 있는 도피안사 경내가 보인다.
화개산 자락에 자리잡은 도피안사는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인 국보 63호 철조비로사나불좌상.
대적광전 앞마당에 있는 보물 223호인 도피안사 3층석탑.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얼굴이 긴편이고 귀가 짧으며 목에는 일선을 그었을 뿐으로 비교적 위엄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백여자에 달하는 명문이 돋을새김으로 남아 있는데,
함통육년이라는 기년이 있어 불상의 정확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통일신라 후기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기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 하지만 불상에 최근 개금을 해 철불의 고고한 느낌은 사라져 아쉽다.
도피안사 3층석탑은 법당 앞에 건맆된 높이 4.1m의 삼층석탑으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법당안에 안치된 철불상의 명문에 의해 신라 경문왕5년(856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설과 연화좌대를 사용한 것과 전체 형태의 비례감과 조성수법을 통해 신라하대 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언제 조성되었는지 여부를 떠나
방형 중흥의 신라계 일반형 석탑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안보투어코스 : 고석정(철의삼각전적지관광사업소) ->제2땅굴 -> 철원평화전망대 -> 철원 두루미관
-> 월정역 -> 노동당사 ( 3시간 소요 )
- 안보투어 신청 : 투어 당일 철의삼각전적지관광사업소 1층에서 출발시간 10분전까지 신청서를
작성하여 신분증과 함께 제출해야 한다.
- 안보투어를 하기 위해서는 자기 차량이 필요하다. 평일에는 개인차량만 이용 가능하지만
주말에는 안보관광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주말에 운행되는 셔틀버스는 어른 기준으로 8천원의 요금을 받는다.
- 개인차량으로 여행시에는 오전 9시 30분, 10시 30분, 오후 1시, 2시에 가능하니 시간을 꼭 지킬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단체로 동호회나 모임에서 버스로 갈때에는 개별적으로 출입도 가능하니 미리 문의해 봐야 할것이다.
위 치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20-1번지 (고석정)
문 의 : 033 - 450 - 5558 http://tour.cwg.go.kr
주변 가볼만한 여행지
다리 하나에 서로 다른 모양의 아치가 아름다운 승일교
승일교는 길이 120m, 높이 35m, 너비 8m로 ‘한국판 콰이강의 다리’로 불린다.
1948년 지금의 철원지역이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에서 군사용으로 다리 공사를 시작하였다가
6·25전쟁으로 인해 중단됐다.
북한에서는 다리 기초공사 2개와 교각을 세워 북쪽 부분은 거의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 후 전쟁이 끝나고 한국의 영토로 포함되자 1958년 12월 한국 정부에서 미완성이 었던
남쪽 부분을 완성해 드디어 다리가 완공되었다. 결과적으로 기초 공사와 교각 공사는 북한이,
상판 공사 및 마무리 공사는 한국이 하게 된 남북합작의 다리인 셈이다.
처음 북한이 지을 때에는 구소련의 유럽 공법이 도입되었으나, 뒤에 한국측에서 지을 때에는
그와는 다른 공법으로 완성됐다. 이 때문에 북한 쪽에서 먼저 지은 다리는 둥글고, 한국측에서
지은 것은 둥근 네모 형태를 띠고 있다. 서로 다른 아치는 승일교가 지닌 아픈 역사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인 셈이다. 본래 이 다리는 한탄교란 이름으로 공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시간차를 두고
남북한이 합작으로 만든 의미로 승일교란 명칭이 붙은것. 명칭에 대해서는 김일성 시절에 만들기
시작해 이승만 시절에 완성했다고 해서 이승만의 ‘승(承)’자와 김일성의 ‘일(日)’자를 따서 지었다는
설과 6·25전쟁 때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던 중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박승일(朴昇日) 대령의 이름을
땄다는 설이 있다. 현재 승일교는 안전과 유적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통행은 금지된 상태이지만
걸어서는 건너갈 수 있다. 이 승일교 대신에 그 옆에 놓인 한탄대교가 한탄강을 건너게 해주는
교량의 역할을 하고있다. 승일교 주변은 승일공원이라 해 놓았지만 펜션과 화장실을 제외하면
볼거리는 딱히 없는 편. 다리 아래로 내려가 한탄강 물가에서 잠시 쉬다가 와도 괜찮다.
임꺽정의 전설이 숨쉬는 고석정
한탄대교를 지나 한탄강 중류에 있는 고석정은 철원의 대표적인 관광지중 하나다.
고석정이라 해서 ‘정자’만을 생각하면 오산.
고석정은 강 중앙의 고석과 정자 그리고 일대의 현무암 계곡 전부를 아우른다.
한탄강관광사업소의 오른쪽 광장방면으로 가다 보면 고석정 향하는 길이 보인다.
평지에서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듯 아래로 난 계단을 밟아 가게 되는데 선선함은 땀을 식히기에 충분하다.
정자는 6.25 때 소실 된 것을 복원 개축했다. 정자 본래의 예스러운 맛은 좀 떨어지지만
경관을 조망하기에 좋다.
한탄강 가운데 10m가량 봉긋 솟은 거대한 기암봉과 어우러지는 계곡.
고석정에는 임꺽정이 은신했다는 자연동굴과 건너편 산 정상에 석성이 있다.
운이 좋다면 산다람쥐의 귀여운 모습도 볼 수 있다.
고석정을 오가는 길엔 한탄강관광사업소 안에 있는 북한 및 통일전시실을 둘러보자.
철의 삼각지대에 펼쳐진 겨울 철새들의 낙원인, 철원평야
철원군은 예로부터 강원도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이곳에서 생산된 철원쌀은 '오대미'라고도 하는데, 차지고 밥맛이 좋아서 철원의 대표적인 특산물로
이름 나 있다. 한때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도읍지가 철원에 들어섰던 것도 이 평야지대와 그곳의 풍부한
산물 덕택이었다. 그러나 국토가 두 동강나기 전만 해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했던 철원평야의
절반 이상은 지금 민통선과 비무장지대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의 발길마저 뜸해져
침묵의 땅이 된 그곳은 속절없이 오락가락하는 철새들의 낙원으로 탈바꿈했다. 반세기 전 수많은 포화가
밤을 밝히고 총탄이 빗발치던 격전의 땅이 두루미떼 한가로이 노니는 평화의 땅으로 변모한 것이다.
겨울철새들의 낙원 샘통[泉通]은 철원평야의 일부인 재송평 들녘에 있다.
야트막한 구릉지대 아래의 작은 연못에서 한겨울에도 섭씨15℃를 유지하는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나는데,
이 일대의 약 0.5ha 가량 되는 천연습지가 바로 샘통이다. 분단 전에는 주변에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갈대, 억새, 부들, 버드나무 등이 무성하여 철마다 날아드는 새들의 보금자리 구실을 한다.
그래서 이 연못을 중심으로 반경 2㎞ 이내의 지역은 지난 1973년 7월 천연기념물 제245호로 지정되어
철새도래지로 보호받고 있다. 이곳에 처음 철새들이 날아들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쌀 생산량의 6분1 가량을 생산한다는 철원평야에 새들이 좋아하는 곡식의 낟알이
흔하고, 사방이 확 트인 지형은 들짐승을 경계하기 쉽다. 또한 철원평야를 관통하는 한탄강과 남대천에는
피라미, 돌마자, 납자루, 갈겨니 등 새들이 좋아하는 민물고기가 풍부하며, 샘통에서는 맑은 샘물이 연중
쉼 없이 솟아나기 때문에 철새도래지로는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 철원평야의 61% 가량이 민통선 안에 포함됨에 따라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게
된 것도 새들에게는 퍽 다행스런 일이었을 게다. 현재 샘통을 비롯한 철원평야에 날아드는 철새는
30여 종에 100여만 마리에 이른다고 한다. 전세계를 통틀어 1,300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두루미
(천연기념물 제202호)와 재두루미를 비롯해 독수리, 흰꼬리수리, 참수리, 되새,기러기 등의 겨울 철새들이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이곳에서 겨울을 나고 돌아간다. 그러니 철원평야의 탐조여행도 겨울철이 제격이다.
게다가 이곳은 시야가 시원할 뿐만 아니라 새들이 워낙 많아서 어디서나 쉽게 새떼를 감상할 수 있다.
정연한 'V'자형의 대오를 갖추고 날아가는 기러기떼의 비행모습, 또는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고
유유히 하늘을 선회하는 독수리의 자태도 아름답지만, 무엇보다도 눈부시도록 우아한 날갯짓과 몸매를 갖춘
두루미와 재두루미의 군무(群舞)가 압권이다. 그 어디에서 만난 철새들의 자태보다도 아름답고 황홀하다.
어쩌면 이곳이 지독히도 깊은 생채기들을 품은 분단의 땅이기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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