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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齊家 경제사상의 구조와 성격
1. 연구과제
초정 박제가의 경제사상은 北學議에 잘 집약되어 있는 데다가 그에 관해 적지 않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으므로, 그 내용이 잘 밝혀져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연구과제들이 남아 있다. 첫째, 박제가의 각종 저술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기록들을 면밀하게 검토하면, 박제가의 경제사상에 관한 내용이 더욱 풍부해질 여지는 남아 있다. 박제가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성과를 제출한 김용덕이 이미 이러한 작업을 충실히 진행하였으므로, 박제가의 경제사상으로서 추가적으로 밝혀질 내용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시각을 달리하면 새롭게 평가될 수 있는 내용은 적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번 유수원․박제가의 상업진흥론을 작성하면서 북학의를 다시 읽고 새로운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에 또 다시 읽고 또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둘째, 박제가의 경제사상을 더욱 체계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박제가의 경제사상에 관한 연구는 김용덕, 이성무 등의 종합적인 연구로부터 출발하였다가, 이후 그의 상업진흥론, 농업론 등 각론의 연구가 진전되어 왔다. 이러한 각론의 진전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종합적 인식이 요청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종합적인 인식을 추구하는 가운데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필자는 박제가의 상업론의 체계적 인식을 시도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는 농업 등도 포함하여 그의 경제사상의 종합적 인식을 시도하고자 한다.
셋째, 박제가 사상의 종합적 인식과 더불어 그 역사적 평가가 진전될 필요가 있다. 평가는 국내적인 면과 세계사적․비교사적인 면으로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내적으로 박제가 경제사상의 혁신성과 시의적절성은 이미 지적되었다. 金柄夏(1975, 2쪽)와 金龍德(1976, 160쪽)은 박제가의 해외통상론을 포함한 상업진흥론이 개항 이전에서 가장 선진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박제가의 사상이 가장 선진적이라는 데에는 반론이 없겠지만, 박지원 등 다른 북학파의 사상과 기본적으로 동질적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질성이 큰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李佑成(1963, 8-9쪽)은 북학파를 유통․기술의 발전을 목표로 하는 利用厚生學派라 불렀고, 연암 박지원이 그 대표 인물이라는 점에서 燕巖學派라고도 불렀다. 이에 대해 金龍德(1981)은 박제가를 ‘기적의 선각자’로 평가하면서 그의 사상의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본고에서는 박제가의 경제사상이 박지원 등 북학파와 어떤 점에서 공통적 기반을 가지고 어떤 점에서 달랐는지 좀 더 체계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박제가 경제사상의 시의 적절성은 누구나 인정한 바였지만, 좀 더 음미할 여지는 남아 있다.
박제가의 경제사상이 비교사적으로 어떤 특성을 가지고 경제사상의 일반적 발전 과정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에 관한 연구는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본고에선 그 작업을 시도한다. 박제가 사상의 경제학설사적 성격에 관해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본고에서는 그 검토를 할 것이다. 종전의 연구는 이런 요소를 지적하는 데에 그쳤지 전반적인 경제사상의 세계사적인 위상에 관한 논의하지는 않았다. 그 전단계의 작업으로서 박제가 경제사상을 같은 문화권인 중국․일본의 선진 경제사상과 비교한 연구도 없다.
2. 경제사상의 내용
1) 기본구조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의 사상은 文明向上論으로 집약할 수 있다. 문명향상의 방안은 선진문명국인 중국을 학습하고, 필요하다면 중국문명의 선진화에 기여한 서양문명도 선별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선진문명의 학습 욕구는 늘 역사발전의 중요한 동력이었다. 게다가 19세기 조선의 근대화 준비를 저해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서양문명의 자극(Western Impact)을 봉쇄하고 소극적 무역정책을 추진한 것이라고 보면, 북학파의 선진문명학습론은 절실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사상이었다.
원래 조선은 중국을 배우려는 열의가 특히 강한 나라였고 그 선진문명의 학습에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도 북학론이 대두된 배경은 무엇인가. 명나라가 망한 후 일반 주자성리학자는 청나라는 오랑캐의 나라이므로 문명의 중심지는 조선으로 이전하였다고 보아, 선진문명을 학습하려는 욕구가 사라졌다. 그에 반해 북학파는 청나라의 견문을 통해 조선이 청나라보다 문명 수준이 낙후되어 있다고 인식하고, 청을 오랑캐로 보고 조선을 중화문화의 계승자로 自任하는 고리타분하고 폐쇄적인 지배 관념에 대해 비판하였다.
선진문명 학습 자세의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였던가. 일반 주자성리학자는 폐쇄적 華夷觀에 입각하여 중화로부터만 학습하고자 한 반면, 북학파는 문명향상에 도움이 된다면 오랑캐로 간주되는 어떠한 나라로부터도 배우자는 학문의 개방적 정신을 가졌다. 그것은 박지원의 北學議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학문을 하는 길에는 방법이 따로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잡고 묻는 것이 옳다. 비록 종이라도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많이 알면 우선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 자신이 남과 같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이것은 종신토록 고루하고 무식한 테두리에다가 자신을 가두어두는 것이 된다. 舜은 밭 갈고 질그릇 굽고 물고기 잡는 데에서부터 임금이 되기까지 남의 잘하는 것을 취하지 않는 법이 없었다.
이러한 학문의 개방적 정신은 華夷觀의 극복을 낳음으로써 청나라와 일본, 심지어 서양까지 학습하는 자세가 갖추어졌다. 박제가는 대외 교류를 중시하여 사대부들이 漢語뿐만 아니라 만주․몽고․일본어도 모두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內篇 「譯」).
북학파는 개방적인 자세로 해외 문물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서양문명의 충격도 받고 인식의 코페니쿠스적 전환을 경험하기도 했다. 性理大全의 象數學에서 출발한 홍대용은 서양의 지구설을 수용하면서 다원적이고 수평적인 세계관을 수립할 수 있었다(李東歡 1999). 박지원은 서양사람이 지구의 밖을 둘러 다녔다고 하면 괴이하고 허튼 이야기라고 꾸짖음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熱河日記 「馹汎隨筆」). 이것은 박지원이 일반 조선유학자와 달리 서양문명의 충격에 개방적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중국에서 서양사람들이 曆法과 幾何에 정통하고 그것을 제조업에 활용하고 있다고 들었고 서양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다(熱河日記 「忘羊錄」․「鵠汀筆譚」). 나아가 박제가는 서양기술자의 초빙을 국왕에게 건의하기에 이르렀다(內篇 「丙午所懷」).
향상시킬 문명의 주된 내용은 문화와 경제였다. 조선의 일반 엘리트는 문명 향상의 핵심 요인을 유학 등의 문화로 보고 중국으로부터 배울 기본 항목을 문화로 본 반면, 실학자들은 경제도 중시하고 북학파들은 중국과의 교류를 경제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박제가는 北學議 「自序」에서 利用과 厚生에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위로 正德을 해친다고 역설하고, 백성이 많아진 다음 교화하라고 했던 孔子의 말씀과 의식이 풍족해야 예절을 안다고 했다는 管仲의 견해를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삼았다.
유학 일반이 경제 문제를 중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공자의 말씀이 있지만, 맹자도 恒産이 있어야 恒心이 있다고 했고, 주자는 경제생활의 안정 위에서 敎化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주자성리학의 이념에 투철한 조선처럼 민생의 안정에 힘쓴 나라를 동시대에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학의 기본 정신은 인의예지신의 도덕 실현을 궁극 목표로 삼고, 경제안정을 그 수단으로 간주하였고, 理財의 추구는 도덕에 손상할 것을 우려하였다. 그에 반해 실학은 경제를 수단적 가치에 국한하지 않고 문명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로 격상하고, 경제안정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발전에도 관심을 두는 경향을 가졌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실학자들이 일반 주자성리학자들보다 외국 물질문명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졌다. 더욱 중요한 차이점으로서 일반 성리학자들은 오랑캐로 간주된 나라의 선진 물질문명을 외면한 반면, 실학자들은 그러한 선입견을 극복해갔다.
북학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적 번영이 그 자체로 문명의 중요한 구성요소일 뿐만 아니라 문화의 수준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조선에서는 책장사가 한 권의 책을 가지고 두어 달씩이나 사대부 집을 두루 돌아다녀도 제대로 팔지 못하는데, 중국의 한 書店에서 주인이 매매 문서의 정리에 매우 분주한 것을 보고, 박제가는 중국이 문명의 본고장이라고 생각하였다(內篇 「古董書畵」).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방문한 조선 사절단은 일본이 조선보다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그것이 국내 상업과 해외무역의 활성화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인식하였다(金文植 2002, 155-7쪽). 북학파는 이러한 경제적 번영이 문화 발달을 낳았다고 보고, 그 대응책을 마련하기를 촉구하였다. 이덕무에 의하면, 조선이 해로로 통상하지 않기 때문에 문헌이 더욱 희귀하지만, 일본은 江南과 통상하여 명나라 말기의 古器書畵서적약재 등이 나가사끼(長崎)에 가득차 있고, 그 文雅가 조선보다도 성대하였다(靑莊館全書 권63, 天涯知己書, 筆談條).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박지원도 강남과 통상하는 일본은 문물이 발달한 반면 해로로 남방과 통상하지 못하는 조선은 문헌에 어둡다고 지적하였다(熱河日記, 「銅蘭涉筆」). 그래서 박제가는 중국과의 무역으로 이익을 얻고 그밖에 삼십여 나라와 무역하여 일본이 부강하게 된 술법(術法)을 조선도 추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進北學議 「通江南․浙江商舶議」).
유학자들은 문화의 핵심 요소를 仁義와 예의로 보았다. 주자성리학자들은 이러한 추상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는 도덕윤리의 기준을 절대시하고 교조적으로 적용한 결과, 폐쇄적 화이관에 빠지고 말았다. 공자 등 선진시대 유학자들은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도덕능력에 따라 문명과 야만을 구분함으로써, 화이관을 진전시켰다. 그러다 유교 도덕을 절대시하는 풍조가 강화되면서 화이관이 폐쇄적으로 변하였는데, 북학파가 형성되던 조선에서 그 폐단이 특히 현저하였다. 북학파는 공리주의, 곧 경제합리주의에 입각하여 생활수준․기술 등 객관적 기준으로 문명간 교류에 대처한 결과, 대외개방적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박제가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에서 김용덕은 박제가에게서 “北學의 정신과 목적은 단적으로 말하면 救貧에 있었다”고 보고 그의 사상을 ‘救貧富國策’으로 규정하였다(金龍德 1961b, 3, 21쪽). 지금의 경제학 용어로 표현하면, 1인당 소득의 향상 내지 경제성장을 주된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北學議를 읽어보면, 이 견해에 반박하기 어렵다. 박제가는 경제력이 문명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인식하였기에 경제성장을 특히 중시하였다.
유학자 일반은 도덕의 구현과 경제의 안정에 주력하는 王道的 安民策을 추구하고 富國强兵策을 覇道라 하여 경계하였으나, 실학자들은 부국강병책을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고, 박제가는 부국강병론으로 전환하였다. 박제가는 경제발전이 군사력을 뒷받침함을 중시하였다. 수레는 보급을 위해, 벽돌은 성곽에, 목축은 말의 조달에 필요하며, 공업기술이 발전해야 정예한 무기가 생산되고 鄕財가 형성되어야 군장비를 갖춘 병사가 늘어난다는 것이다(外篇 「兵論」). 그런 점에서 박제가의 사상은 부국론으로 집약될 수 있다.
주자성리학자를 포괄하는 유학자들이 부국과 富民을 바라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부민이 전제되지 않은 부국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고, 功利主義가 정책의 중심 가치로 부상할 것을 우려하였다. 그에 반해 박제가는 부국이 되지 않고 부민이 될 수 없다고 보고 공리주의를 정책의 중심 가치로 삼고자 했다. 유학자들은 가난이 아니라 불평등을 근심해야 한다고 보았던 반면, 박제가는 빈곤의 극복을 지상과제로 삼았다. 그는 인민이 가난하고 나라가 허약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분배정책과 안민정책에 의존할 수 없었고 효율과 경제발전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들은 빈곤의 극복을 우선 과제로 삼았으나 분배정책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일반 성리학자들은 경제안정을 중시한 반면, 왜 박제가는 누구보다 경제성장에 주된 관심을 두어 부국론을 제시할 수 있었던가. 더욱 근원적인 물음으로 박제가는 왜 일반 성리학자와 달리 경제가 문명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그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보았을까. 이것은 인간과 문명을 이해하는 시각, 궁극적으로는 철학적 토대가 달랐기 때문이다.
주자에 의하면, 形而上의 道인 理로부터 人性이, 形而下의 器인 氣로부터 人形이 생성하는데, 경제적 동기인 物欲은 天理로부터 부여받은 인성을 가려 타락시키므로, 천리로부터 부여받은 인성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는 修己를 통하여 私欲을 없애야 한다. 주자학의 경제윤리의 핵심은 物欲 내지 私利의 억제였다. 이처럼 수기의 차원에서 경제문제는 人欲이 天理와 人性을 제약하는 요인이라는 방식으로 등장하므로, 경제적 동기는 억제되는 경향이 있고 經濟的 合理主義가 발현될 수 없었다. 경제는 부차적 중요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도덕에 의하여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物欲과 私利 추구에 대한 부정적 관념이 강한 주자학에서도 물질적 욕구나 사리 추구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았다. 주자는 먹고 마시는 기본적 욕구는 天理이고 美味를 요구하는 것은 人欲이며, 인욕 중에 스스로 천리가 있다고 보았다. 士農工商이라는 四民 중에서 사리 추구를 조장하는 상업은 末로서 억제의 대상이고, 의식주라는 생필품을 생산하는 농업은 本으로서 중시되었다. 농업은 儉素와 淳朴의 미풍을 기르는 생업인 반면, 상업은 사치와 詐術을 빚어내어 풍속과 교화를 어지럽히는 末技로 간주되었다. 주자는 높은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 경제욕구만 충족하는 경제안정책으로 충분하며, 경제성장을 통해 사치가 늘어나면 인욕을 조장하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실학자가 일반 성리학자와 다른 근본적인 차이는 이익추구 성향을 인정하고 경제적 합리주의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제문제를 더욱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실학자는 일반적으로 이익추구 동기에 대한 유교윤리적 제약을 가하기를 바랐으나, 박제가는 그러하지 않았다. 조선국가는 사족의 주된 기능을 유교적 교화의 담당으로 설정하였으나, 박제가는 놀고 먹는 사족이 나라의 큰 좀이라고 규정하였다. 대학의 傳文 3章에서는 “군자는 현자를 어질게 여기고 친한 이를 가깝게 여기며, 소인은 그 즐거움을 즐겁게 여기고 이로움을 이롭게 여긴다”는 구절이 있는데, 치자인 군자는 이익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德治와 仁政을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반면에, 被治者로서 소인은 사회적 질서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여 이익을 추구해도 무방하며, 이처럼 각각의 사회적 직분에 합당한 경제윤리가 추구해야 천하가 태평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박제가는 군자로 간주되는 사족에게 상업을 장려하여 “날로 이익을 추구하게 하여” 놀고 먹는 형세를 줄이자고 제안하였다(外編 「丙午所懷」). 박제가는 이익 억제 윤리로 비롯된 儉約 관념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우리나라가 검소함으로써 쇠약해졌다”고 인식하였다. 즉, “비단을 입지 않기 때문에 나라 안에 비단을 짜는 사람이 없어서 길쌈과 바느질이 쇠하여졌으며, 그릇이 비뚤어지는 것을 개의하지 않으므로 교묘함을 일삼지 않아, 나라에 工匠과 질그릇 굽는 곳, 대장간이 없고 技藝도 없어졌다.”는 것이다.(內篇 「市井」) 박제가의 사상에서 일반 실학자에게서 볼 수 있는 유교윤리는 사라지고 경제합리주의가 전면에 나섰다.
박제가가 성리철학의 物欲 부정론으로부터 벗어나 경세론을 주도하는 원리를 이익추구 동기에 입각한 경제적 합리주의에서 구할 수 있었던 배경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물질세계의 충격, 주자학에 기초가 되는 經學의 탐구 및 諸子百家의 공부가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상적 조류가 형성되었다고 보고 싶다. 그중에도 시장의 성장이라는 물질세계의 충격이 근원적인 힘으로 작용하였다고 생각한다. 조선후기 시장의 성장과 그로부터 파생하는 문제에 대처하여가면서, 그리고 문화적으로 선진적인 중국의 물질적 풍요의 토대에 시장의 발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가면서, 이익추구 성향이라는 경제적 동기를 審問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성리철학의 물욕 부정론으로는 해소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성리철학의 源流인 주자의 義理學에 기초가 되는 경학을 탐구하고 나아가 諸子百家를 공부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경제적 동기를 전향적으로 인식하고 성리철학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박제가는 중국 문명의 높은 수준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 수준차를 낳은 중요한 요인으로 경제력이라고 인식하였다. 즉, 잘 살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데도 인심이 나쁘지 않고 높은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견문을 그의 경세론의 입각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박제가의 경제사상은 성리철학에 원류를 두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그는 性命과 義理의 논리가 科擧․朋黨․閥閱의 폐단을 합리화하는 현실을 비판하였다(文集 권1 「送元玄川重擧序」). 박제가는 성리철학 자체를 상대화하고 다원적인 사상의 폭넓은 흡수를 주장하였다. 중국에는 성리학이 없다는 上士의 비난에 대하여 그는 중국에서는 주자학, 양명학 등 사상이 다원적으로 존재하는데, 조선에서는 程․朱 학설만 말할 뿐이라는 사상의 편협성을 지적하고 있다. 道는 한 길로만 나오지 않고, 중국의 서적을 읽지 않으면 識見에 한계를 긋게 된다.(外篇 「北學辨 一」) 그는 만년에 大學을 탐구하면서 주자의 경전 연구를 상대화하여 비판적으로 흡수하였다. 窮理가 필요하지만, 性命을 고담하는 일은 實用에 급하지 않은데, 성명의 설로 奸雄과 私黨을 길러서 생각을 달리하는 이를 반도로 배척하는 자는 朱門의 죄인이라는 것이다.(文集 권4 「答金大雅正喜」)
박제가가 주자학을 상대화하여 비판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던 개인적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 사변적인 철학보다는 실용을 중시하고 문학을 좋아하는 학문적 趣向에 기인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둘째, 관료로서 중앙정부의 도서관에서 다양한 학문적 조류에 접할 수 있었고, 주자학을 盲信하기보다는 그 학문적 기초를 추구하는 抄啓文臣을 중심으로 하는 지식인의 세계에 소속되어 있었다. 셋째, 시장이 발달한 서울에서 살았으며, 시장이 훨씬 발달하고 사상적으로 다원적인 중국을 견문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유학자가 성리철학의 物欲 부정관념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상업관의 진전에 강한 제약을 받았던 반면, 박제가는 그 영향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 경제적 동기를 긍정하는 관념을 가졌기 때문에 적극적인 상업진흥을 통한 부국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박제가가 성리철학과는 다른 경제적 동기관을 내세운 것은 주자학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자 본연의 학문방법론에 입각하면서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흡수하고 다원적인 사상을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주자학의 극복이었다.
김용덕 이래 여러 학자가 공통으로 지적하듯이, 박제가는 가난을 구제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안의 제시를 기본 과제로 삼았다. 그가 부국을 위한 방안으로 제안한 것은 상업진흥론, 선진기술․경영도입론 및 제도개혁론으로 집약할 수 있다. 박제가는 산업발전의 도모를 위하는 데 핵심적인 의의를 가지는 첫 번째 요소를 시장, 그 두 번째 요소를 기술․경영으로 보았다. 그의 농업․수공업육성론은 시장지향적 생산과 기술․경영 발전을 중심적 과제로 삼고 있으므로, 상업진흥론과 선진기술․경영도입론에 포괄된다. 그래서 박제가의 사상에는 독자적인 농업․수공업 육성론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시장을 육성하고 기술을 발전시키고 경영을 효율화하면,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도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상업진흥론은 시장의 육성을 통해 산업을 발전시키자는 논의로 집약할 수도 있다. 그의 제도개혁론은 양반도 상업에 참여하도록 허용하는 것과 海禁을 해제하여 조선인의 해상무역 진출을 허용하는 것으로 대표될 수 있는데, 이것도 상업진흥론으로 수렴된다. 박제가의 부국론에서는 상업진흥론이 중심적이고 근본적인 의의를 부여받았다. 부국을 위한 중심적인 과제는 상업진흥이고, 상업진흥을 위한 주된 방도인 해로무역의 활성화는 기술발전을 촉진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박제가는 유학적 務農抑商의 관념으로부터 사실상 벗어났기 때문에, 상업진흥을 부국을 위한 중심 과제로 설정할 수 있었다. 그는 “근본을 두텁게 하고 농사에 힘쓰는” 일을 지방관의 기본 과제로 보면서도 상업이 산업을 진흥하고 富强을 도모하는 데에 중요한 촉매제임을 인식하였다. 근세 백성들이 오로지 末利만을 생각하므로 인위적으로 농업인구를 증가시키자는 견해에 대하여 박제가는 상인도 四民에 포함되므로 3/10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進北學議 「末利」). 이것은 농․공․상업의 균형발전론으로 보여질 수 있지만, 당시 농민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상공업의 적극적 육성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2) 상업진흥론과 해로무역육성론
박제가는 상업진흥방안으로 해로무역의 육성, 교통의 발전, 양반의 상업 종사 등을 들었다. 해로무역 육성론은 그의 상업진흥론뿐만 아니라 전체 경제사상에서 중심적인 의의를 차지하고 있다. 박제가는 상업진흥을 위한 핵심적 방도를 해로무역에서, 기술발전을 위한 핵심적 방도를 중국과 서양으로부터의 학습, 곧 北學에서 찾았다. 그는 부국을 위한 기본 방안으로 해로무역육성론을, 문화 발달을 위한 기본 방안으로 북학론을 제기한 무역입국론자이자 개방론자였다.
박제가의 적극적 해로무역육성론의 형성에 기여한 국외 자극은 중국의 경제발전이 시장발전에 의거하고 일본의 경제발전이 무역에 의거하였다는 사실이었다. 중국에서 시장 발전이 경제발전을 낳았다는 인식은 적극적 상업관과 상업정책의 수립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중국이 서양국가를 비롯한 각국과 무역을 한다는 사실의 파악도 해로무역의 필요성과 실현성을 인지하는 데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박제가는 1786년 정조에 건의한 개혁안 첫 머리에 나라의 큰 병폐가 가난이고 가난을 구제할 방도는 중국과 통상하는 길뿐이라고 주장했다(外篇 「丙午所懷」). 조선이 작고 가난하여 국내 산업을 육성하여 利源을 다 개발하여도 富國을 이루기가 힘들므로, 원격지 유통을 활성화하고 해로로 통상을 해야 하는데도, 조선조 동안 해상 통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선국가는 민간인 선박이 출항하여 외국과 교류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중국과는 육로무역만 허용하였고, 서양과의 무역을 금지하였다. 아시아국가에 대해서는 海禁정책이, 서양에 대해서는 쇄국정책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쇄국정책은 넓은 의미의 해금정책에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박제가는 고려는 송나라와 해상으로 교역하였으나, 조선 4백년 동안 중국 배가 한 척도 오지 않았음을 지적하였다(進北學議 「通江南․浙江商舶議」). 그는 신라가 부국강병을 이룬 요인으로서 배로 외국과 통할 수 있었던 사실을 거론하면서 조선의 해상(海商)이 일본에 건너가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였다(貞蕤閣全集 詩集 권2 「曉坐書懷」; 進北學議 「財富論」).
박제가는 무역의 이익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았던가. 중국과 육로로 무역하지만, 해로수송이 십배 이상 편리하다고 보았다. 지금은 면포를 입고 白紙에 글을 써도 물자가 부족하지만, 배로 무역을 하면 비단을 입고 竹紙에 글을 써도 물자가 남아돌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는 해로무역의 두절이 검소함의 숭상과 관련이 있고,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는 풍조로 技藝가 없어지고 소비시장이 위축되어 백성이 날로 궁핍해지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우물의 비유를 통하여 소비시장의 확대를 통한 생산의 자극, 그를 통한 國富의 증진을 주장하였는데(內篇, 「市井」), 여기서 우물, 곧 소비시장이 마르지 않도록 역할을 하는 주된 원천은 국제무역이었다. 이 비유에서 드러나듯이, 시장 발전을 주도할 영역은 국내 시장이 아니라 외국 시장이었다. 박제가는 외국무역의 활성화를 기본 동력으로 하여 기술의 발전과 생산의 확대를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박제가는 해로무역의 활성화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상적 폐쇄성을 극복하고 문물을 발달시키기를 기대하였다. 즉, 중국과의 해로무역을 통하여 “배․수레․궁실․器物의 편리한 제도를 배울 수 있고 천하의 서적도 들어올 것이니, 습속에 얽매인 선비들의 편벽되고 고루한 소견은 저절로 타파될 것이다”고 전망하였다(外篇 「丙午所懷」). 박제가의 해상통상론은 오랑캐로 간주하던 청나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파의 기본이념에 직결되는 것이다.
박제가는 조선정부가 중국 禮部에 “일본․유구․안남․서양 등의 여러 나라가 모두 閩中․浙江과 交州․廣州 등지에서 교역하니, 우리도 수로로 통상하여 여러 외국과 같게 하기를 원한다”라는 咨文을 보내면, 중국이 해로무역을 즉각 허락할 것이라 전망하였다(外篇 「丙午所懷」). 그는 安南․琉球․대만 등지는 멀고 험하므로 당장은 중국과의 해로무역이 편리하고 이익도 크겠지만, 국력이 강해지고 백성의 생업이 안정되면 다른 나라와도 차례차례 해로로 통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식하였다(進北學議 「通江南․浙江商舶議」). 그는 서양국가들과도 무역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金龍德 1988, 533-4쪽). 그는 海商이 일본으로 진출하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한 것으로 보건대, 무역상인에 의한 해상진출을 희망하였다. 그러면서도 황당선 등 외국선박의 적극적인 유치를 건의하였다(進北學議 「通江南․浙江商舶議」).
박제가가 국내 시장을 육성하기 위한 방도로서 중시한 것은 교통의 개선이었다. 그중에도 수레의 이용을 특히 강조하였다. 박제가는 농사란 사람의 창자로, 수레는 혈맥으로 비유하고, 혈맥이 통하지 못하면 사람이 윤택할 수 없다고 했다(進北學議 「應旨進北學議疏」). 박제가의 탁월성은 이러한 교통 개선을 시장통합의 차원에서 논한 것이다. 그는 교통의 낙후가 물자의 지역적 偏在와 가격차를 낳고, 그럼으로써 소비생활이 악화되고 산업이 위축된다고 인식하였다. 백성들이 물자 교환으로 부유해지고 싶어도 수송력의 부족으로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수레 사용 등으로 교통이 발달하면, 운송비의 절감과 운송량의 증대에 따른 상업 이익의 증대로 물자 이동이 원활해져 물가의 지역간 평준화와 소비지 물가의 하락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가 하락은 수요량을 증대함으로써 생산을 촉진한다.(內篇 「車」; 進北學議 「車九則」)
박제가는 유수원처럼 사회적 분업의 이점을 잘 인식하였다. 그는 벽돌을 자급하면 된다는 견해에 대해 전문성과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논박하였다(內篇 「甓」). 박제가는 분업을 중시한 데에 그치지 않고 종이, 布帛, 수레, 기와, 농기구 등 제품의 표준화를 주장하였다. 제품의 표준화는 거래의 편의를 도모하여 생산의 확대를 실현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부품 하나가 없더라도 시장에서 손쉽게 조달할 수 있고, 허비되는 자원을 줄일 수 있다(內篇 「宮室」, 「紙」). 분업과 제품 표준화의 추진은 시장의 확대와 기술의 발전을 낳는다.
박제가는 상인육성을 위한 직접적인 지원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상업활동에 대한 유교적 편견이 제거되고 교통 개선 등 시장 발전을 위한 환경이 조성되면 상인이 육성될 것이라고 판단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중국 상점에 商號나 거래 물품을 알리는 간판이 있는 것에 주목하고, 판서 蔡濟恭이 서울 시전의 상호를 정하고 간판을 달게 하자는 주장을 特記하였다(內篇 「市井」). 박제가는 상인에 대한 직접적 지원보다는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고 경쟁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상업 발전을 도모하는 환경의 조성을 선호하였던 것이다.
3) 선진기술․경영도입론
북학사상의 경제적 측면은 선진 제도․기술․경영의 도입론이었다. 선진 제도의 도입은 유학자는 누구나 관심을 기울였는데, 북학파, 그중에도 박제가 사상의 특징은 기술 및 경영에 특히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이었다. 北學議의 목차를 보면, 재화가 가장 많다. 중국의 재화들을 소개하고, 그 제조 기술을 도입하기를 건의하였다. 농업의 거름․수리․모심기 등의 항목은 그 기술 도입을 건의한 것이다. 과거제, 祿制 등과 같은 제도의 항목은 그 도입을 의도한 것이다. 도로․시장․상인․경지 등은 관련 기술․경영의 도입을 건의한 것이다. 항목에 따라서는 기술․경영․제도가 서로 결부되어 있다.
박제가는 기술과 경영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에 경험적 지식을 낮게 평가하고 학문적 지식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老農은 유식하지도 못하여 합리적 논거를 가지지 못하므로 믿을 수 없고 농업기술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서적을 활용해야 한다고 보았다(進北學議 「老農」). 그런데 서민들은 어리석고 무식하여 오직 근력으로써 일을 할 뿐이고, 지식인은 권세와 재력을 가져 농사일을 하지 않아, 학문적 지식이 농업에 활용되지 못한다는 것이다(外篇 「附李喜經農器圖序」). 그래서 박제가는 지식인인 양반의 상공업 참여를 허가하고 농업 참여를 권장하고자 했다(進北學議 「應旨進北學議疏」).
박제가는 기술발전을 특히 중시하였다. 舟車․宮室․器具․목축의 기술을 강구하지 않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백배의 이익을 잃는 것이다(進北學議 「財富論」). 박제가가 검소함의 숭상을 비판한 중요한 동기는 기술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內篇 「丙午所懷」). 조선시대에 검약을 중시하고 사치를 경계하고 정교한 공예품을 奇技淫巧라 배척하는 관념이 있었고, 이것은 사치품의 시장뿐만 아니라 공예기술도 위축시켰던 것이다.
북학의는 수레와 배로부터 시작한다. 상업진흥에 핵심적 의의를 부여한 박제가는 그것을 도모하는 기술을 특히 중시하였다. 그는 운송수단의 미발달이 유통에 애로를 낳아 가난을 초래했는데, 수레 운송이 牛馬 운송보다 훨씬 효율적이니, 중국에 工人을 보내어 수레 제작 기술을 배우게 하자고 건의했다(內篇 「車」). 그는 조선(造船)의 낙후가 해로무역에 장애임을 인식하고 중국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기를 바랐다(內篇 「船」). 그리고 표류선의 기술도 흡수하기를 바랐다(進北學議 「船四則」).
박제가가 농업발전을 위해 가장 중시한 것은 기술발전이었다. 그는 당면 계책으로 중국을 배워서 따비․보습․밭도랑․물골․거름하는 방법․양잠업을 적합하게 하는 것을 잡았다(進北學議 「農蠶總論」). 북학의에 종자, 농기구, 농법 등 여러 항목이 있는데, 이것은 주로 중국 기술을 도입하자는 건의이다. 박제가는 중국의 저장 기술을 습득해도 이익이 증가할 것으로 보았다(外篇 「桑菓」).
박제가는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데도 이용하는 방법을 모르는 점을 강조하였다. 나귀를 타고 다닐 뿐이고, 중국처럼 물긷기․맷돌굴리기․수레끌기․밭갈이에 이용할 줄 몰랐다(內篇 「驢」). 수레와 벽돌이 사용되지 않은 이유로는 기술이 부족하여 생산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이용할 줄 몰라 수요가 적은 점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농업발전을 위한 중요한 과제의 하나를 수레의 이용으로 보았다(進北學議 「應旨進北學議疏」).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도 사실은 고급품을 이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內篇 「市井」).
박제가는 경영효율도 중시하였다. 기술적 문제가 아닌데도 이용할 줄 모른다는 것은 정보가 부족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경영효율에 소홀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밭 갈고 씨 뿌리는 일에 서툴러 비용은 많이 들고 수확이 적다면 이익을 잃는 것이다(進北學議 「財富論」). 밭에 곡식을 심는 간격이 중국보다 넓어서 아무 까닭 없이 1/3을 그냥 버리는 셈이고, 종자도 고르게 뿌리지 않아 낭비를 하였다(進北學議 「田」). 박제가가 제시한 거름 대책은 거름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철저히 수합하여 잘 저장해두고 활용하는 것이었다(外篇 「糞」; 進北學議 「糞五則」). 결국 박제가는 기술․경영효율을 증대하여 최대 수익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金容燮 1977, 322쪽). 생산량과 수익은 땅이 아니라 사람에 달렸다고 보면서, 송도 성안에서는 목화밭 1일경에서 1,000근을 수확하여 400~500냥을 거두고 평양 외성에서는 밭 1일경에서 좁쌀 100섬을 수확하는 사례들을 거론하였다(進北學議 「地利二則」).
박제가의 기술발전방안은 기본적으로 외국 선진 기술의 학습이었다. 선진 기술의 주된 도입처는 중국이지만, 박제가는 어떠한 나라로부터도 선진적 요소가 있다면 배우고자 했다. 박지원이 “비록 종이라도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많이 알면 우선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천명한 북학의 정신을 박제가는 공유하였던 것이다. 박제가는 일본의 장점을 여러 군데에서 거론하였고, 서양기술도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무역의 중요한 이점이 기술이전인데, 박제가는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였다. 중국과의 해상무역이 활성화되면, “배․수레․궁실 등 여러 가지 기물의 편리한 제도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外篇 「丙午所懷」).
박제가는 기술자나 숙련공을 파견하여 중국 기술을 배우자고 건의했다. 수레의 경우 솜씨 좋은 工人을 중국에 보내 수레제작법을 배워오게 하자고 건의하였다(內篇 「車」). 중국 농업기술의 학습을 위해 해마다 경륜과 재주를 갖춘 열명을 사절에 끼어 파견하자고 건의했다(進北學議 「財富論」). 서양에 사람을 파견할 수는 없으므로, 서양기술자를 초빙하자고 건의했다. 즉, “중국 欽天監에서 曆書를 꾸미는 서양사람이 모두 기하학에 밝고 이용․후생의 방법에 정통하다고” 하므로, 이들을 초빙하여 과학기술을 배우면 “수년이 지나지 않아 세상의 경륜에 알맞게 쓸 수 있는 인재가 울창해질 것이다”는 것이다(內篇 「丙午所懷」). 외국 기술자초빙론 자체가 획기적인 방안으로서, 개항 이전에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외국 기술을 잘 습득하고 국내 기술을 잘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工人천시관념을 극복해야 했다. 박제가는 전문적 技藝를 익힌 편벽된 인물을 높이 평가하였고(文集 권1 「百花譜序」), 뛰어난 기술자를 士로서 대우하여야 기예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文集 권4 「謝鄭吏議志儉求見李吉大書」). 그는 기술자가 만든 제품에 제 값을 지불해야 기술이 육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일본에서는 技藝가 뛰어난 工匠에게서 배우고 기술의 평가를 받는데, 이것이 기예를 권장하고 민속을 專一하게 하는 방도라 했다(內篇 「瓷」). 그런 점에서 그의 지식중시론뿐만 아니라 기술발전론도 신분제개혁론에 연결된다.
박제가는 선진 기술의 확산기구도 국가가 조직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서울에 대장간을 개설하고 중국에서 각종 농기구를 사다가 그대로 제조하며, 서울 근교에 屯田을 만들고 농업기술자를 임명하여 농민을 지도하게 하고, 지도받은 농민이 각지로 가서 기술을 전수하자고 건의했다(進北學議 「應旨進北學議疏」).
4) 제도개혁론
북학의에는 科擧論, 官論, 祿制, 兵制 등의 제도개혁론이 있지만, 경제제도개혁론은 표면화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박제가는 경제발전에 관련된 중요한 제도개혁론을 제시하고 있다. 해로무역론에 결부되어 海禁의 해제 등 무역시장개방론을 제기한 셈이고, 신분제 개혁론은 경제문제와 직결된다. 전자는 이미 언급되었으므로, 후자를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시대 신분제의 문제는 노비제와 사농공상제로 집약될 수 있다. 노비제는 인륜상의 점에서 비판을 받아왔고, 박제가 시대에는 상당한 정도로 해체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농공상제는 민주적 시민관이 대두하기 전에는 그 폐지론이 나오기 힘든 성질이었다. 성리학에 의하면, 士農工商이라는 四民만이 천리와 의리에 합당한 직업이며, 사민은 모두 경제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직업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민간에는 貴賤․本末의 구별이 있어서, 생업 중에서 사리 추구를 조장하는 상업은 末로서 억제의 대상이고, 의식에 사용될 생필품을 생산하는 농업은 本으로서 중시되었다. 관리는 有德者라야 하므로 당연히 士 중에서 선발되는데, 성리학자들은 士․農間 상호겸업과 상호이동을 대개 인정하였지만, 사리를 추구하는 상인이 관리로 진출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士農工商制를 전제로 한다면, 그것을 경제 등의 발전에 제약이 적은 방향으로 개조하는 것이 과제로 될 수밖에 없다. 조선의 사농공상제는 폐쇄적일 뿐만 아니라 지배층인 양반의 경제적 동기 함양과 피지배층인 상민의 인적 자본 축적을 제약함으로써 근대적 전환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사농공상제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신분제보다 더욱 폐쇄적이었지만, 일본의 정치․경제구조로 인해 도시 상인을 비롯한 하층 신분이 지식인으로 활발히 성장하였고 지배층인 무사도 경제적 동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점에서 조선과 중국에 비해 근대적 전환에 지장을 적게 주었다. 요컨대 신분제의 경제발전에 대한 영향은 그 자체 요소뿐만 아니라 정치․사회․경제구조에도 의존하는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사공농상제의 폐쇄성과 경제발전에 대한 장애요소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여기서도 박제가는 가장 혁신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박제가의 사농공상제 개혁론의 특징은 경제적 관점에서 논의되고 경제합리주의에 입각해 있다는 점이다. 그는 유수원과 더불어 경제발전에 가장 제약이 적은 방향으로 사농공상제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박제가는 사대부가 과거․門閥․朋黨에 의하지 않으면 위로는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아래로는 상공업에도 종사하지 못하며, 굶어죽을 지경이라도 농부가 되지 못하기도 한다고 한탄하였다(文集 권1 「送元玄川重擧序」). 중국에서는 사대부가 가난하면 상인이 되는 것을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상인이 되더라도 풍류와 명예가 인정되지만, 조선에서는 비웃음을 사는 현실을 그는 개탄하였다(內篇 「商賈」). 그는 나라의 큰 좀인 놀고 먹는 사족을 줄이기 위해 水陸으로 貿易販賣하는 일을 사족에게 허가하고, 혹 밑천을 마련해주고 가게를 설치해주어 좋은 성과를 올리는 자에게 높은 벼슬에 발탁하는 것으로 권장하기를 제안하였다(「丙午所懷」). 이런 견해는 뛰어난 상공인이 사대부와 다를 바 없다는 인식으로 연장될 수 있다. 그는 기술을 천시하는 풍토가 심함을 개탄하고, 뛰어난 기술자를 기술자 천시 관례에 따라서는 안되고 士로서 대우하여야 하며, 그래야 기예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文集 권4 「謝鄭吏議志儉求見李吉大書」). 박제가는 놀고 먹는 양반은 나라의 큰 좀이라고 규정하면서도 기술과 경영의 발전을 위해서는 경험적 지식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서적을 통한 체계적 지식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던 점에서(進北學議 「老農」), 지식인인 士가 상인층이 되면, 상업경영의 합리화를 낳아 상업계 전체의 수준을 향상시킬 것으로 전망한 유수원(迂書 권1 「論麗制」; 권8 「論商販事理額稅規制」)과 상통한다. 박제가는 그에 그치지 않고 상공업자가 지식인인 士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요컨대 박제가는 양반의 생계 대책, 그리고. 상업진흥과 기술발전을 도모하는 사농공상제의 개혁론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사농공상제의 폐단은 사의 특권화와 상인의 천시였다. 박제가는 이익 추구에 대한 윤리적 비판의식이 없고 상업의 기능을 높게 평가하여 본말관으로부터 벗어나고 양반도 상업에 종사하기를 주장한 점에서, 사농공상제의 경제적 폐단을 전면 제거하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양반만이 관직을 독점하는 제도만 개혁하면 사농공상제를 폐지한 셈이 된다. 박제가의 과거제 비판은 시험 방식이 학식이 넓고 기예가 있는 인사의 선발에 비효율적인 점, 그리고 문벌․당색에 따라 선발이 좌우된다는 점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문벌이 좋은 집안 사람 외에도 재주와 덕이 뛰어나거나 한가지 기예라도 있는 사람을 천거하여 하류계층의 인재도 조정에 들어오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중국 과거제도를 배우자고 한 것으로 보아, 상인 집안의 자제도 과거응시자격을 부여하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外篇 「科擧論一․二」) 서얼 출신의 박제가는 사농공상제의 사실상 폐지를 의도하고 있었다. 박제가는 1786년의 「丙午所懷」에서는 놀고 먹는 양반은 나라의 큰 좀이라고 규정하였는데, 1798년의 「應旨進北學議疏」에서는 농정을 해롭게 하는 첫째 요소가 농사일을 하지 않으면서 농민을 부려먹는 양반이므로 이들을 도태시키자고 건의했다.
3. 박제가 사상의 革新性과 時宜性
박제가는 해로무역론 등 자신의 주장이 파격적이고 혁신적이어서 호응을 얻지 못하고 비웃음과 비판을 초래함을 잘 알고 있었다. 1778년 그가 처음 중국 여행을 하고 돌아온 후 중국 문명이 조선보다 월등하다고 말하면, 모두 허황하게 여겨 믿지 않았고 오랑캐를 편든다고 하였다(外篇 「北學辨一」). 박제가와 교제하여 그의 말을 들으러 온 양반들은 대개 보수적인 성향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북학파에 속하는 극소수의 진보적 인사만이 그의 견해와 주장에 동의하였을 것이다. 박제가는 1798년 개진한 「應旨進北學議疏」의 말미에서 “이번에 올리는 말도 지난번 비웃음을 받던 가운데 나온 한, 두 마디에 불과한 즉 또 妄發한다는 譏弄은 본시 스스로 취한 바이나, 그밖에 달리 할 말은 없습니다”라고 적어두었다.
박제가는 일반 사상과 어떻게 다른가. 1786년 정조는 百官에게 進言하는 기회를 주었다. 여기서 548건의 진언이 있었는데, 그 압도적인 내용은 君德論, 名分論, 務農抑商論, 절약론, 반상의 守分 강조 등이었음에 반해, 이 때 박제가는 자신의 지론인 해로통상 육성, 서양인 선교사의 초빙, 양반의 상업종사를 내세웠다. 박제가의 경세론은 당시 일반적 경세론과 현격한 차이가 있어서 ‘혁명적 주장이요 기적과 같은 것’이라는 후세의 평가도 나오게 되었다(金龍德 1986, 6-7쪽).
어느 시대나 그러하듯이, 박제가가 활동한 시대에도 보수적 사상과 진보적 사상이 경합하고 있었다. 박광용에 의하면, 정조가 특별히 믿고 선택한 재상 3인이 있었는데, 노론 벽파인 김종수는 강경보수파였고, 1795년부터 1년간 우의정으로 있던 윤시동은 벽파와 시파를 조화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남인인 채체공은 개혁진보파였다. 박제가가 1778년 첫 燕行을 하게 된 것은 正使 蔡濟恭의 특별한 후의였던 데에서 드러나듯이, 양자의 사상은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金龍德 1961a, 53쪽). 김종수와 더불어 노론 벽파에 속하면서 강경보수파인 심환지는 순정 주자성리학의 이상을 관철하고자 하였다. 그는 정조 사후 정조가 키운 노론 시파와 남인 서학파 관료을 모두 제거하는 데에 앞장 섰다. 이러한 과정에서 혁신적인 인사로서 남인 서학파인 이가환은 1801년 신유옥사에 연루되어 맞아 죽었고, 박제가는 유배를 당하였다.(박광용 2004, 190-207쪽) 정조의 사후 박제가와 친분이 있는 이조판서 尹行恁이 노론 벽파에 밀려 처형되고, 그 불길이 박제가에게 날아들어 심환지를 비롯한 벽파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박제가는 ‘慕華’, 곧 북학의 주장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만년에 유배의 빌미를 제공하였다고 술회하였다. 그는 ‘唐魁’로 지목을 받았던 것이다.(金龍德 1986, 12-3쪽)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박제가는 시파 등 진보적 엘리트․관료와 친분이 있었던 반면, 벽파 등 보수세력의 질시를 받았다. 박제가의 혁신적 주장은 채체공의 시대에는, 채택되기는 만만치 않더라도, 충분히 공론화될 수 있었으나, 보수강경파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북학파가 가장 진보적이었는데, 박제가는 다른 북학파로부터도 비판과 우려를 받기도 했다. 박지원은 1780년 중국에서 돌아오자 박지원이 보여준 北學議 內․外編을 펴보고, “자신의 熱河日記와 조금도 어긋난 것이 없어, 이는 마치 한 솜씨에서 나온 것이라 의심할 만하다”며, 이것은 연행 이전의 공동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북학의 서문에다 밝히고 있다. 북학파 인사간에 사상의 공통성이 컸던 것이다. 그런데 박제가의 주장은 특히 혁신적이고 치열하여 박지원과 이덕무의 우려 내지 비판을 초래하였다. 박지원은 박제가가 서출로서 榮職에 있는 만큼 근신해야 하는데도 ‘奇高之策’을 개진한다고 염려하였으며, 심지어 ‘無狀無道’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박제가와 절친한 이덕무는 그가 동방 예의의 나라에 자라서는 도리어 풍속이 다른 중국을 흠모하여 ‘唐癖’, ‘唐魁’ 등으로 지목받고 있다고 우려하였다.(金龍德 1988, 531-2쪽; 박지원 2005, 19쪽) 이에 대해 김용덕은 박지원이 北學議 序文을 쓰던 1781년에는 “두 사람은 北學의 동지였지만 20年後인 정조 22년(1798) 課農小抄와 進北學議를 올릴 때에는 정반대의 經綸, 즉 중농과 중상을 주장하는 대조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金龍德 1988, 528쪽). 박지원의 경제사상에 관해서는 별고를 준비하고 있지만, 열하일기에 비해 과농소초에 중농사상이 한층 뚜렷이 천명되어 있지만, 박지원이 애초부터 중농사상을 버린 적은 없어서 그의 경제사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박제가의 사상은 다른 북학파와 근본적인 차이를 가졌고, 그 점이 후에 부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북학파의 사상적 공통성은 무엇이고, 그것은 보수파와 어떻게 달랐던가? 박제가의 사상은 다른 북학파 인사, 특히 박지원과는 어떻게 달랐던가? 이들간 차이를 낳은 근본적인 요인은 功利主義, 곧 경제합리주의 수용의 여부와 정도이다. 보수파 인사들은 유교 도덕, 곧 義理를 절대시하고 이익추구 동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여 공리주의를 경계하였다. 그에 반해 실학자들은 이익추구 동기를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으로 용인하여 공리주의도 수용하고 중시하였다. 박제가는 경제활동에 대한 유교 도덕의 제약을 사실상 제거하여 유교 도덕을 구현해야 할 양반까지도 이익을 적극 추구하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에 반해 다른 북학파 인사들은 유교 도덕과 공리주의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홍대용은 義理學이 없으면 經世學은 功利에 빠지고 경세학이 없으면 의리학이 구현할 바가 없다고 보아, 의리학의 근본적 의의를 부여하면서도 경세학의 의의도 부각하였으며, 경세학이 예학보다 긴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유봉학 1995, 100-6쪽). 홍대용은 공리에 대한 경계관념을 표명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의리와 조화를 이룬 공리를 추구한 셈이었다. 박지원은 공리주의를 적극 표명하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유교 윤리를 결코 경시하지 않았다. 그는 克己復禮를 통해 명분과 절개를 닦은 선비가 明農․通商․惠工의 이치에 관한 실학을 발전시켜 민생의 안정과 국가 후생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용․후생에 미흡함이 없으면, 인민의 교화가 가능하여 유교 도덕이 구현된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교 도덕을 절대시하는 보수파는 주자학만 숭상하고 나머지를 모두 배척하였던 반면, 공리주의도 용인하는 실학자들은 주자학을 상대화하고 다른 학파에도 개방적이었다. 다른 북학파 인사들은 그래도 주자학을 학문의 중심에 두었으나, 박제가는 주자를 높게 평가하면서도 학문의 중심에 두지도 않았다.
보수파는 수기에 대해 末인 經世 중에서도 경제문제를 말로 본 반면, 공리주의를 수용하는 실학자는 경제문제를 중시하였다. 보수파는 왕도적 안민책을 벗어나지 않고 경제안정 위주 정책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실학자는 적극적인 경제대책을 제시하였다. 북학파 중에서는 박제가가 경제문제를 가장 중시하였고, 그 다음이 박지원이라 할 수 있다. 박제가뿐만 아니라 박지원도 선진 기술의 利用이 있은 연후에 인민의 복지가 향상될 것[厚生]이요, 그런 연후에야 윤리도덕이 바르게 될 것[正德]이라고 인식하였다(熱河日記 「渡江錄」). 김용덕의 지적처럼 박제가에게서 “北學의 정신과 목적은 단적으로 말하면 救貧에 있었”는데, 박지원도 빈고 구제를 주요 정책과제로 삼았다. 그는 중국에 처음 여행을 하면서는 “나라에 인민의 살림살이가 이다지 가난함은, 한 말로 표현한다면 수레가 국내(國內)에 다니지 못한 까닭이라 하겠다”고 했고, 또한 중국의 농업․수공업기술을 도입한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의 극도에 달한 가난병도 얼마쯤 고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熱河日記 「馹汛隨筆」). 이처럼 박지원과 박제가 모두 경제문제의 근본적 의의를 인식하고 富國을 중요 정책 과제로 삼았는데, 박제가가 한층 적극적이었다. 공리주의자인 박제가를 부국론자로 규정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박지원의 경우는 달랐다. 유교 윤리와 공리주의의 조화를 추구한 박지원은 경제안정과 부국을 二大課題로 설정하였기에, 경제안정을 위한 토지 兼幷 대책을 강구하여 「限民名田議」를 제출하였던 것이다.
보수파는 農本觀과 抑商觀을 가졌지만, 공리주의자인 박제가는 양자를 모두 버렸다. 그런데 유교 도덕과 공리주의의 조화를 추구한 다른 북학파 인사들은 억상관을 극복하여 상업의 활성화를 바랐지만, 농본관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덕무는 농업을 大本이라 하였고, 박지원의 課農小抄는 농본․重農사상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북학파 인사들은 공통적으로 상업의 육성을 바랐지만, 그 적극성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보수파는 기존 士農工商制를 고수한 반면, 실학자는 그것을 개혁하고자 했다. 북학파 중에 박제가만 사실상 사농공상제의 해체를 의도하였고, 나머지 인사는 모두 양반에 대한 비판의식은 강하였으나 사농공상제의 유지를 의도하였다. 홍대용은 인품의 高下와 재주의 장단점에 따라 適材適所에 사농공상의 직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李東歡 1999, 158-9쪽). 박지원에게도 사와 농․공․상은 기본적으로 신분에 따른 구분이 아니고 도덕과 기능에 따른 구분으로 보이는데, 그는 사가 明農․通商․惠工의 이치에 관한 실학에 종사하여 농․공․상업을 진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課農小抄 「諸家總論」).
보수파는 서양은 물론 청나라도 유교 윤리에 저촉되는 사회로 보아 오랑캐로 간주하였다. 그에 반해 공리주의를 중시하는 북학파는 청나라가 경제적으로 우월하고 서양이 기술적으로 앞선 점을 인식하고 그들로부터도 배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보수파는 海禁․鎖國체제를 고수하고자 한 반면, 북학파는 개방체제로 전환하고자 했다. 1778년 작성된 박제가의 北學議 「自序」와 1781년 박지원이 써준 북학의 서문을 검토하면, 북학을 둘러싼 양자의 미묘한 차이가 감지된다. 여기서 박제가가 평가한 인물은 중국 제도를 도입하여 오랑캐의 풍습을 변혁하려던 최치헌과 조헌뿐이었다. 박제가는 청나라는 엄연히 중화문화의 계승자인 반면 조선은 아직 오랑캐의 습속을 모두 혁신하지는 못한 단계에 머물러 모든 면에서 중국보다 열등하다고 평가하여, 중국과 다른 조선의 풍습이나 언어마저 모두 오랑캐의 문화로 생각하여 변화하고자 했다. 모든 면에서 중국에 뒤떨어졌다고 보는 박제가와 달리 이덕무는 조선을 동방 예의의 나라라 하여 조선문화의 自尊의식을 버리지 않았고, 풍속까지 중국식으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박지원에 의하면, 당을 사모한 신라는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夷가 변하여 中華가 되었다(熱河日記 「忘羊錄」). 그는 조선의 아름다운 점을 듣기를 요청하는 중국인에게 온 나라의 풍속이 유교를 숭상하는 점 등 네 가지를 거론하였으며, 중국 학문이 차차 쇠퇴하여 주희와 육구연의 두 갈래로 나오게 되었다고 보았다(熱河日記 「太學留館論」․「審勢編」). 박지원은 조선이 주자학을 발전시킨 사실에 긍지를 느꼈던 것으로 보이나, 박제가는 조선에서는 程․朱 학설만 말할 뿐이라는 사상의 편협성을 지적하였다(外篇 「北學辨 一」). 박지원과 이덕무는 유교 도덕을 중시하는 조선의 사회와 정치, 그리고 그 이념적 토대로서 주자학의 발달을 평가하는 반면, 유교 도덕을 중시하지 않는 박제가에게는 그러한 의식이 없었다. 박지원은 조선이 청나라보다 후진적이고 조선 선비가 지정학적 요인으로 치우친 기질을 타고났다고 인식하고, 모르는 것은 종에게서도 배워야 하는데 하물며 선진 문명인 청나라를 본받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民族主體性’을 중시하였으나, 박제가는 오랑캐를 면하여 중국과 동일하게 되기 위해 우리말을 버리자고 주장하여 ‘민족의식이 결여된 일종의 세계주의’를 보여주었다(金龍德 1976, 153쪽). 조선문화의 장점과 고유성을 인식한 주체적 입장 위에서 선진문화를 흡수해야 하고자 했던 박지원과 이덕무는 중국문명의 전면적 도입을 주장하는 박제가를 ‘唐癖’을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앞서 박제가로부터 중국 문명의 우월성에 관한 설명을 들은 인사들이 허황하여 청나라 오랑캐를 편든다고 생각한 데에는 박제가가 한탄한 이들의 고루함과 자신의 ‘당벽’이 상승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박지원은 왜 박제가가 ‘奇高之策’을 개진한다고 염려하고 ‘無狀無道’하다고 평하였는지 논해보자. 박지원은 자신도 종종 과격하다고 생각하는데(박종채 1998, 223쪽), 박제가의 개혁안이 자신보다도 과격하여 ‘기고지책’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유교 윤리와 공리주의의 조화를 추구한 박지원은 유교 윤리를 무시한 채 공리주의에 입각한 개혁안을 제시하는 박제가를 ‘무상무도’하게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박지원은 농본이념을 버리고 사농공상제의 해체를 의도하는 점 외에는 박제가 개혁안의 기본 취지에 모두 동의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지원은 박제가의 개혁안에 대부분 동의하더라도 그것이 실현되기 어렵다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보수파의 역공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하였음이 분명하다. 박지원도 해로무역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하였으나, 그것을 적극 주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건대, 서양과도 통상을 하자는 박제가의 주장이 시기상조로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박지원은 중국에 가서 曆法과 幾何에 정통한 서양사람들로부터 하고 직접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던 만큼(熱河日記 「忘羊錄」․「鵠汀筆談」), 서양인을 초빙하여 기술을 흡수하자는 박제가의 주장에 반대하지는 않았을 터이나, 그에 대한 보수파의 공세를 우려하였을 수가 있다. 박지원이 양반의 상공업 종사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이익 추구에 대한 유교 윤리의 제한을 제거하여 양반들이 날로 이익을 추구하게 하자는 주장을 과격하다고 보았을 가능성이 있고, 박제가처럼 農本관념과 사농공상제의 폐지를 의도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북학파 내에서 박지원은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개혁안을, 박지원은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안을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박지원은 자신의 정서로 보아 과격하게 생각되는 주장들, 그래서 실현되기 힘들 뿐만 아니라 보수파의 공세를 초래할 우려가 있는 주장들에 대해 ‘기고지책’으로 비판하였다고 생각된다.
북학파 인사들간에 이러한 차이점이 있지만, 인식의 공통점이 훨씬 크고 기본적이었다. 공리주의의 중시관, 명분론적 화이관을 극복하여 선진 중국문명과 서양 기술을 학습하자는 인식, 수레의 이용 등을 통한 교통발전, 상업과 해로무역의 육성, 선진기술 도입,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양반제의 개혁 등은 보수파보다 선진적인, 북학파 인사의 공통적인 인식이었다.
박제가는 1778년 처음으로 중국 사절에 수행하여 북경 朝鮮館에서 30일간 묵었다. 이 燕行에서 돌아온지 약 3개월만에 北學議 내․외편을 탈고한 것이다(金龍德 1986, 3-4쪽). 박제가가 아무리 탁월하더라도 중국에 대한 사전 연구가 없이는 이 일은 불가능하다. 박지원은 1780년 중국에서 돌아오자 박지원이 보여준 北學議 內․外編을 펴보니 “자신의 熱河日記와 조금도 어긋난 것이 없어, 이는 마치 한 솜씨에서 나온 것이라 의심할 만하다”며, 이것은 연행 이전의 공동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북학의 서문에다 밝히고 있다. 북학의 첫 번째 수레 항목에서는 홍대용이 그 이점을 거론한 것으로 지적하였는데(內篇 「車」), 박제가는 첫 중국 여행 직후에 홍대용과 친교를 맺었다(金龍德 1961a, 53쪽). 박지원은 1780년 연행 이전에 홍대용 등과 수레 제도를 논의하였다(熱河日記 馹汎隨筆 車制). 북학파 공통의 관심사와 문제의식, 그리고 공동 연구가 있었기에 사상의 공통성이 컸던 것이다. 북학사상의 형성에는 홍대용과 박지원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겠지만, 북학파의 공통적 사상 기반 위에서 박제가는 경제사상을 가장 예리한 통찰을 가지고 가장 체계적으로 전개하였으며 가장 혁신적인 개혁안을 내세웠다. 해외무역과 시장의 이점 등을 가장 예리하게 통찰하였으며, 무역시장개방론과 신분제개혁론에서 가장 혁신적이었다.
정조는 박제가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그는 박제가를 ‘無雙士’라 불렀고 ‘왕안석’에 비유하기도 했다(金龍德 1961a, 64쪽). 왕안석과 같은 가장 혁신적인 인물로 보았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박제가는 종성으로 유배되어가는 길에 지은 시 <利原>에다 정조가 폐습을 개혁할 뜻을 실현하려다가 중도에서 승하하였음을 아쉬워하였는데, 정조가 자신을 왕안석에 비유한 사실을 회상하고 있다. 박제가는 왕안석의 新法과 같은 자신의 개혁안을 정조가 어느 정도 실현해줄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박제가의 기대는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정조는 보수파가 간신의 표본으로 삼는 왕안석을 높게 평가하고 충신의 표본으로 삼는 사마광에 비판적인 데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왕도적 안민론자인 사마광은 조선의 보수파가 모범으로 삼는 사람인 반면, 부국강병론자인 왕안석은 조선의 진보파만이 용납할 수 있었다. 1791년 4월 中庸을 강하면서 좌의정 채제공의 제의로 知와 行의 관계를 논하였는데, 정조는 왕안석의 兵制 개혁은 잘 한 것이고 사마광이 그 신법을 폐지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자, 채제공은 유자들의 견해가 편협하다고 비판하고 구법의 개혁은 어려우나 신법의 폐지는 쉽다고 하여 왕안석이 사마광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왕안석이 간신이라는 평가는 조선시대의 일반적 견해였으나, 정조대 조정에서는 왕안석의 평가가 긍정적으로 변하였고, 나아가 왕안석이 사마광보다 낫다고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정조가 이러한 개혁적 성향이 있었기에, 정조가 만년에 박지원을 다음 정승으로 지목한다는 속설이 돌았고, 남인들은 서학파인 이가환이 채제공의 뒤를 잇는 정승으로 임명되기를 기대하였다(박광용 2004, 207, 245쪽). 정조가 더 오래 살고 진보적 재상을 더 두었더라면, 어떠하였을까. 정조는 ‘유학을 지키고 正學을 옹호하는 것’을 학문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잡았으며 그 핵심은 주자학의 수호였다(김문식 2000, 23쪽). 정조는 성리철학에 매몰되지 않고 주자처럼 그 토대 위에서 事功과 개혁의 실천을 위해 힘썼으되, 錢穀甲兵類의 실용지식을 지엽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李東歡 2000). 정조의 聖學은 보수파와 진보파를 모두 수용할 만큼 깊고 넓었으나, 正學, 곧 주자학을 수호하고 농본 이념에 입각한 만큼 박제가의 혁신적인 개혁안을 추진할 정도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김용덕은 박제가가 기적의 선각자라고 평가했다. 그의 경제사상이 가장 혁신적이고 선진적이고 체계적인은 명백하다. 그런데 종교의 세계와 달리 학문의 세계에서는 비유적 표현의 기적에 해당하는 일은 있다 해도, 기존 학문의 기반과 완전한 단절은 있을 수 없다. 박제가의 중심적인 건의안인 해로무역육성론만 하더라도 북학파에서는 공통적이었고, 그전에 李之菡(1517-1578)과 柳馨遠(1622-1673)이 주장한 바 있다(이헌창 2004). 수레와 벽돌은 정부에서 사용을 시도한 바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북학파 인사들간에 인식의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크고 기본적이었으며, 북학사상은 그들간 공동 연구를 통해 형성, 발전하였다.
그러면 북학론은 북벌론이 횡행하는 시대에 돌출한 이단인가? 원래 조선의 엘리트는 어느 나라보다 중국을 열심히 배우려 했고 중국의 문화와 제도의 흡수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박지원은 우리나라가 중국을 사모하는 것은 천성으로 되었고, 당을 사모한 신라는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夷가 변하여 中華가 되었다고 했다(熱河日記 「忘羊錄」). 청나라가 들어선 후 약화된 그런 전통을 잘 발전시킨 것이 북학파였다고 볼 수 있다. 박제가는 ‘慕華’를 추구한다고 생각하였는데, 박제가처럼 극단적인 ‘모화’를 추구한 선배들이 바로 사림파 주자학자였다. 물론 ‘모화’의 내용은 달랐으나, 그런데 선진문명의 흡수라는 데에는 공통적이었다. 주자학자들의 주된 모화 대상은 주자학을 중심으로 하는 유학 및 그 이념에 입각한 정치제도였으나, 박제가의 그것은 경제․문화생활의 발전상이었다. 주자학자에게 모화의 대상은 유교의 고향인 중국일 수밖에 없으나, 박제가에게 오랑캐로 간주된 청나라, 일본, 심지어 서양도 잘 살고 기술이 앞서면 학습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박제가의 모화론은 주자학자와 달리 개방적이었다. 그것은 지역이 아니라 문명의 수준에 따라 華夷를 구분하는 유학 원래의 정신이었다. 이상으로 보건대, 박제가는 조선시대 지성사의 이단아라기보다는 그 기반 위에서 그것을 시대적 요청에 맞게 잘 변형하여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박제가의 ‘모화’에 대해 다른 북학파마저 唐癖이라 비판하고 보수파는 唐魁라 지탄한 점이 흥미롭다. 18세기에는 조선의 문화적 성취의 자긍심 위에서 선진 문명을 흡수하자는 정신 사조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고, 박제가의 철저한 ‘모화’ 의식은 그러한 사조에 이단적인 성질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소중화의식의 성리학자들은 조선 성리학의 한계와 중국․서양문명의 선진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한계를 가졌다.
혁신적인 사상이라고 모두 타당한 것은 아니나, 박제가의 경제사상은 가장 혁신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시의적절하였다. 조선시대에 경제는 발전하는 추세였으나, 서유럽이나 일본과 같은 역동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18세기에 인구밀도는 높았으나, 소득수준은 일본보다 상당히 낮았고 재정도 빈약하였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에 간 사절들이 그들 나라보다 가난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제성장의 추세는 18세기 말에는 전통적 경제성장의 한계점에 접근하여, 경제환경과 경제제도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더 높은 차원의 발전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필자는 개항전 조선의 경제발전에 가장 절실한 정책으로서 재산권보장제도와 공정하고 경쟁적인 거래질서의 확립, 해로통상 등을 통한 무역발전책 및 양반층의 상업 종사를 들고 싶다. 박제가는 이중 두 가지를 제시하였다. 이중 하나를 선택하여 역량을 집중하라고 한다면, 해로무역육성책이 단기간에 가장 효과가 클 것으로 생각된다. 재산권보장제도나 신분제도의 변혁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며 효과는 장기적으로 나타난다. 그에 비해 무역이 활성화되면, 사회가 경제적 동기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하여 제도 변화를 자극하고 기술발전도 촉진된다. 박제가는 당시 경제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적절한 처방을 제시하였다고 생각된다. 선진문화를 주체적 자세로 수용하자는 입장이 원론적으로는 타당하지만, 청나라를 오랑캐로 간주하는 당시 조선의 고루한 현실에서는 박제가와 같은 중국 문명의 전면적이고 철저한 도입론을 통해 분위기를 일신할 필요가 있다.
만약에 박제가의 개혁안이 채택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북학의를 처음 완역한 李翼成은 “우리나라 역사는 일찍부터 근대화의 방향으로 접어들었을 것이며, 倭政 36년이라는 치욕을 겪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혼자 감탄하기도 하였다.” 그전에 金聖七(1960, 70쪽)은 박제가의 사상을 “아마 조선에 新生面을 개척할 뻔한 憂國濟世의 大經綸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박제가의 개혁안이 실현되었더라면, 시장이 성장하고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경제적 동기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상공인의 성장과 사회관념의 변화는 제도를 시장친화적으로 변모시켰을 것이다. 그러면 서양 근대문명의 자극을 능동적으로 흡수하여 19세기에 자주적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18세기 조선이 근대문명을 흡수할 사회적․문화적 역량을 결여하였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유교와 기독교의 충돌을 슬기롭게 처리해야 하고 재산권보장제도를 확립하도록 정치제도가 개혁되어야 하고 자주국방력을 갖추어야 하는 등의 난관들이 있기 때문에, 자주적 근대화의 전망을 가능성 차원에서 거론하는 데에 그치고자 한다.
박제가의 개혁안이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선진국을 따라잡는 데에 가장 유효하였지만, 그 혁신성으로 개항 전 조선의 현실에서 박제가의 개혁론이 수용될 수는 없었다. 그의 해로무역육성론, 서양기술자초빙론 및 양반의 상업종사론은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그 근저에는 華夷觀, 農本觀, 士農工商觀 및 物欲경계론이 사회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발전을 저해하던 이런 문화관념이 제거되면, 박제가의 개혁안들은 적은 비용으로 시행하고 많은 편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유학자들에게 선호된 토지소유제의 개혁안은 문화적 저항이 없었으나 실현하는 데에 엄청난 비용을 요구하는 반면, 그것이 경제안정에 기여할 수는 있어도 경제성장에 기여할지는 미지수이다. 박제가의 개혁안은 정치적․사회적 저항을 강하게 받았으되, 경제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박제가의 개혁안이 조선의 경제발전을 위해 시의적절하여 절실하였더라도, 보수파의 공세를 우려하는 박지원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다. 정조의 사후 그의 우려가 현실화되었던 것이다. 박지원이나 이덕무의 입장을 고려하여, 당벽이나 기고지책이라는 비판이나 우려를 받지 않고 실현가능한 방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박제가가 만약 고위관료에 올랐더라면 그러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정책을 건의할 수는 있으되 그 결정과정에서 배제된 서얼 신분의 지식인으로서는 자신에 부여된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우리 역사는 그로부터 사상의 보물을 얻게 되었다.
정조가 더 오래 살고 채제공 이후에도 그 정도의 진보적 재상이 계속 임용되었더라면, 박지원의 온건한 개혁안은 실현될 가능성이 있었다. 박지원의 개혁안은 치밀한 논리와 실증으로 무장하고 현실적 제약을 고려하여 온건한 성격을 가진 점에서 실현가능성이 높았다. 박제가는 현실의 통찰력에서는 박지원보다 앞섰으나, 논리와 실증의 치밀성에서는 박지원에 비해 미흡하였다. 박제가는 이런 현실적 제약은 捨象한 채 넓고 먼 시야로 개혁책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유봉학(1995, 156, 159, 160-230쪽)에 의하면, 19세기 전반에 주자주의적 義理學이 쇠미해진 자리에 북학이 풍미하였고, 연암일파의 학문을 정책에 구현하고자 노력한 대표적 인물로 李書九와 徐有榘를 들었다. 그런데 이서구는 국가재정을 증진하는 ‘裕國’보다는 민생 안정을 위한 ‘恤民’을 중시한 安民論者여서 정통 주자성리학자의 견해와 다를 바 없었고, 서유구는 박지원의 경제사상을 충실히 계승하였으나 실무관료로서 그의 구상을 실현할 정치적 힘을 가지지 못하였다. 고찰하고 있다. 청조 문물과 고증학의 수용 문제가 자유롭게 논의되었다. 그리고 19세기 전반에 서양문명의 충격에 대한 대응이 17세기 후반보다 진전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19세기 전반에 박지원의 북학사상은 사회적으로 구현되지 못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박제가의 견해처럼 공리주의를 적극 주창하고 해로무역을 적극 육성하고 사농공상제를 전면 개혁하지 않고서, 박지원의 견해처럼 유교 도덕, 농본관 및 사농공상관을 고수하면서 온건한 개혁책을 추구하는 데에 그쳐서는, 근대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데에 미흡하고 중국 선진지역이나 일본의 경제를 따라잡기도(catching up)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박지원 식의 개혁이 대세로 자리잡으면, 선진문물의 도입에 한층 개방적인 태세가 갖추어지고 상업․해로무역에 대한 더욱 진보적 시책이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변화된 환경에서 박제가 식의 개혁이 수용될 여지가 넓어진다.
4. 박제가 경제사상의 비교사적 좌표
이성무, 김용덕 등에 의한 북학의에 관한 평가는 공통적으로 근대적 내지 근대지향적 경제사상이라고 성격을 규정하였다(洪德基 1983, 336-7쪽). 여기서는 비교사적 고찰을 통해 그 근대성 내지 근대지향성의 성격을 논해보기로 한다. 제3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박제가는 개항 이전 경제발전을 이루어 경제적 근대화를 준비하는 데에 가장 유효한 방안을 제시하였다. 박제가는 중세 경제사상을 극복하였지만, 근대 경제이론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자체로 근대 경제이론을 확립한 유럽 사상의 변천과정에서 박제가 경제사상을 좌표를 찾아보자. 중세 기독교 사상을 체계화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74)와 유학 사상의 철학적 체계화를 달성한 주자(1130-1200)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면서 이익 추구에 대한 윤리적 제약 이념을 정립하면서 공정하고 안정된 경제질서를 추구한 점에서 상통한다. 양자는 중세 경제사상을 체계화한 인물로 간주될 수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고 이기적 활동이 공동체에 유익하다는 인식이 출현하고 이익 추구에 대한 윤리적 정당성이 부여되었다. 16세기 이후 조선․중국․일본에서도 이익추구를 긍정하는 사상이 출현하고 확산되었으나, 종교개혁기의 유럽처럼 철저한 사상적 전환을 경험하지는 못하였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세속권력과 교회권력의 대립, 그리고 국민국가간 경쟁은 종교개혁과 같은 문화적 변혁을 낳았으나, 동아시아에서는 그러한 정치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아 사상의 변화가 점진적이었다. 이것이 기본적인 요인으로 생각되나, 그밖에도 유대․그리스사상의 영향, 시장의 발전도 등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윤리의 사회적 전환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종교개혁기 유럽인처럼 적극적 이익추구관을 제시한 소수의 학자들이 있었는데, 18세기 조선에서 그러한 인물로는 유수원과 박제가 정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을 통해 이러한 경제윤리의 전환이 이루어짐과 더불어 국가경쟁력을 향상하고 국가이익을 적극 추구하는 정책체계로서 중상주의가 대두하였다. 박제가의 사상은 유럽의 경제사상에 비견하면 重商主義와 가장 닮았다. 박제가의 경제사상을 전면적으로 다룬 李成茂(1970)는 그가 중상주의자처럼 銀의 축적을 국부를 증진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중개무역의 이익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러한 선구적 견해의 토대에는 이익 추구 성향을 정당화하는 근대적 가치관으로의 지향이 있었다는 등의 중요한 사실들을 지적하였다. 박제가는 조선이 해마다 수만냥의 은을 중국에 수출하여 藥材, 綢緞 등을 수입하는 데에 대하여, 귀금속을 공산물과 교환하여 有限한 지하자원이 고갈되어간다고 우려하였다. 돈[泉貨]이란 순환하면 무궁한데, 끝없이 유출된다(內篇 「銀」). 나라의 寶貨가 국내에서 활용되지 못해 외국으로 유출되니, 외국은 날로 부유해지고 우리나라는 날로 가난해진다는 것이다(內篇 「市井」). 이러한 사상은 중상주의의 重金主義(bullionism)에 상통하지만, 다른 면도 있었다. 박제가는 귀금속을 축적하기보다는 그 유출을 막자고 의도하였고 화폐인 귀금속을 국부와 일치시키는 데에 이르지 않아서, 유럽의 중금주의자만큼 귀금속 화폐에 대한 적극적인 관념을 가지지는 않았다.
박제가는 은화 유출 대책과 관련하여 영남의 木綿, 호남의 苧布, 서북지방의 絹絲와 麻布 등 공산물이 수출품의 주종이 되기를 바랐다(「丙午所懷」). 그의 사상은 귀금속 화폐의 축적을 위한 공업육성책을 제시한 점에서는 중상주의와 공통적이지만, 그는 공업 육성을 위해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중상주의는 타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국 상업공자를 보호하고 외국 상공업자의 활동을 규제하고자 했으나, 박제가는 그러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의 황당선을 오도록 하여 조선상인에게 물길을 안내하게 하자고 했다(外編 「丙午所懷」).
한편으로 보면 박제가의 사상은 중금주의가 뚜렷하지 못하고 보호무역주의의 관념이 없는 점에서 중상주의 단계 이전의 사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박제가는 개방적인 자유무역주의를 추구하고 그 이점을 잘 설명한 점에서, 중상주의를 극복한 아담 스미스의 자유무역주의에 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박제가의 사상을 중상주의에 끼어 맞추기 힘든 것은 유럽과 동아시아가 국제환경을 달리 하였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중세 후기에 상업혁명을 거치면서 원격지유통이 활성화되었으며, 국민국가의 성립 이전에 유럽의 군주와 영주는 무역의 통한 이익 추구를 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조공무역체제 아래서는 무역활동을 외교와 정치에 종속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민간무역에 억제적이거나 소극적인 면이 있었다. 해로무역을 육성하자는 박제가의 주장은 海禁이 시행된 동아시아에서는 절실하였지만, 서유럽에서는 그러한 것이 제기될 필요조차 없었고 무역 이익의 추구 방식을 어떻게 할지가 과제였다. 동아시아에서는 국가에 의한 민간무역의 규제를 제한한 조공체제를 개혁하고 무역이익을 적극 추구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였기에, 박제가는 무역이익을 충실히 제시하면서 개방적인 자유무역을 주장하였다. 유럽 근세에서는 대대적 통일과 대외적 독립을 성취하면서 국민국가를 확립하는 데에 봉사해야 했기에, 중상주의는 국가간 경쟁에서 우세를 차지하기 위해 보호무역주의를 추구하고 자국 상공업자를 보호육성하고자 했다. 그에 반해 중화세계질서에 편입된 조선에서는 중국 및 주변 국가와 경쟁할 필요가 약했기 때문에,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울 유인이 약하였다.
그런데 넓은 시야에서 보면, 박제가의 사상은 중상주의와 공통점이 많았다. 양자 모두 경제적 근대화를 준비하는 역사적 의의를 가졌다. 부국을 도모하여 중국과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고자 의도한 박제가의 사상은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중상주의와 상통한다. 적극적 무역활동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자는 점에서 양자는 공통적이었다. 앞서 언급하였지만, 귀금속 화폐를 중시하고 수출산업으로서 공업의 역할을 인식한 점에서도 공통적이었다. 박제가의 글 중에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검약을 비판하고 재화를 우물과 같다고 보는 다음 구절이다.
지금 나라 안에는 구슬을 캐는 집이 없고, 저자에는 산호의 값이 없다. 또 금과 은을 가지고 가게에 들어가도 떡을 살 수 없다. 어찌 그 습속이 참으로 검소함을 좋아해서 그러하겠는가. 아니다. 이것은 오직 물건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용할 줄 모르니 생산할 줄 모르고, 생산할 줄 모르니 백성이 날로 궁핍해지는 것이다. 대저 재물은 비유하자면 우물과 같아서, 퍼내면 채워지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비단을 입지 않기 때문에 나라 안에 비단을 짜는 사람이 없다. 따라서 길쌈과 바느질이 쇠하여졌다. 그릇이 비뚤어지는 것을 개의하지 않으므로 교묘함을 일삼지 않아, 나라에 工匠과 질그릇 굽는 곳, 대장간이 없고 技藝도 없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농사하는 방법도 몰라서 흉년이 자주 들고, 장사는 물건을 팔 줄 몰라서 이익이 박하다. 그러니 四民이 모두 곤궁하여져서 서로 도울 길이 없다(內篇, 「市井」).
이 구절의 경제적 함의를 둘러싸고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김용덕(1981, 97쪽)에 의하면, “수요의 억제, 禁奢節約이 경제의 안정책이란 전통적 견해에 대하여 생산의 확충, 유통의 원활 즉 충분한 공급이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박제가는 물가를 소비해야 생산이 더 활발하게 일어난다고 본 점에서, 송주영(1979, 237쪽)은 재물을 우물에 비유한 견해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세이(John Baptist Say, 1767-1832)의 법칙을 역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李成茂(1970, 167쪽)는 박제가가 ‘節儉’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소비가 생산을 자극한다고 주장하고 소비와 생산을 매개하는 상업의 중요성을 천명하였음을 지적하였듯이, 박제가의 주장은 김용덕의 견해보다 송주영의 견해가 사실에 가깝다. 그런데 세이 자신이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그 의미가 명확하게 인식되지 못하는 법칙을 역으로 하여 박제가의 견해를 해석하려는 입장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까. 박제가의 서술도 공급된 것은 모두 팔린다는 취지가 아니다. 김상규(2004)는 위의 구절을 케인즈(J. M. Keynes)의 유효수요론과 넉시(R. Nurkse)의 빈곤 악순환론과 같은 내용으로 보았다. 케인즈는 저축의 증가가 유효소비의 감소를 통해 투자와 생산을 위축시켜 불황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는데, 박제가는 불황기의 상황을 거론한 것이 아니고 저축이 소비를 감소시킨다는 발상을 한 것도 아니었다. 넉시는 저소득→저소비→저투자→저생산․고용→저소득이란 악순환을 지적하고 수출 등을 통한 시장확대방안을 강구하였다.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 점에서 박제가의 사상과 맥락이 같고 무역육성이란 처방도 같다. 그런데 박제가는 빈곤이 악순환된다는 관점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검약관념과 지식․정보의 부족으로 이용할 줄 모르는 문제점을 지적한 점에서 달랐다. 이헌창(2002)은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데에 시장이 기축적인 역할을 한다는 맥락으로 이해하여, “분업을 낳은 것은 교환의 힘이므로 분업의 범위는 늘 시장의 크기에 의해 제한된다”라는 아담 스미스의 유명한 명제에 상통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박제가는 생산 확대와 기술발전을 낳는 힘으로서 시장을 중시하였는데, 분업의 심화도 기술 발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어떻게 해석이 되든 박제가 사상의 선진성을 엿볼 수 있다.
전반적인 경제사상의 발전에서 유럽이 조선보다 훨씬 앞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유럽에서는 중상주의학파라 할 만한 것을 형성하였는데, 조선에서는 북학사상이 그에 접근한 가운데 중상주의자라 부를 만한 인물은 박제가 외에 달리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유럽의 중상주의자에 의한 무역 방식, 무역 이익, 화폐의 기능 등에 관한 논의가 박제가의 사상보다 더욱 구체적이었다.
조선보다 일본과 중국에서 중상주의에 비견할 만한 사상의 폭이 더욱 넓었으나, 동아시아에서는 중상주의를 대표하는 토마스 먼(Thomas Mun 1571-1641) 정도의 체계와 분석을 갖춘 저술은 19세기 개항 내지 개국 이전에는 나오지 않았다. 왜 유럽만이 경제학을 확립하고, 동아시아를 비롯한 기타 지역은 유럽으로부터 경제학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가? 유럽에서는 시장발달이 동아시아보다 역동적이고 앞섰던 점, 고대 고리스문명의 덕분에 논리학과 수학이 가장 발달하였던 점,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이 분열되고 영토국가들과 도시국가들이 경쟁하는 가운데 경제합리주의가 종교와 도덕으로부터 벗어나 분출할 수 있는 다원적인 문화가 형성되었던 점 등이 작용하였을 것이다(이헌창 2005).
당대의 경제문제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적합한 처방의 제시라는 점에서 박제가는 중상주의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박제가는 토마스 먼 정도의 경제분석을 제시하지는 못하였지만, 현대 경제발전이론에 부합하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지금까지 경제사 연구의 성과로 보건대, 장기적 경제성장을 규정하는 기본 요소는 시장, 기술 및 제도이다. 박제가는 이 세 요소를 모두 거론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 연구의 진전을 통해 박제가가 활동한 시대적 과제를 파악한 다음 경제사․경제발전이론의 진전을 통해 그 시대적 과제에 부응하는 정책을 제시한다고 할 때, 박제가의 개혁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관견으로는 18세기 조선이 중국․일본보다 가난해진 중심적인 이유는 시장이 덜 발달하였기 때문이며, 나라가 작고 중앙집권체제인 조선이 시장 발달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국제무역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전근대 중앙집권체제 아래서는 봉건제와는 달리 재정을 통한 물자유통이 발달하여 시장을 구축하는 면이 있었다. 박제가에 의하면, 조선은 작고 가난하여 국내 산업을 육성하여 利源을 다 개발하여도 富國을 이루기가 힘들므로, 원격지 유통을 활성화하고 해로로 통상을 해야 하는데도, 조선조 4백년 동안 해상 통상이 이루어지지 못했는데(進北學議 「通江南․浙江商舶議」), 이것은 나라가 작을수록 무역이 제공하는 경제적 이익은 커진다는 경제이론에 부합하였다.
당시 조선의 경제성장을 위해 가장 절실한 제도개혁안은 재산권 보장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박제가가 이 점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아쉽게 생각하지만, 유럽을 제외하고는 재산권보장사상을 확립한 지역은 없었다. 그리고 신분제 개혁론과 해금 해제론은 재산권 보장론 다음으로 중요한 제도개혁안으로 생각된다. 기술발전은 점진적으로 달성해야 할 과제이고, 시장과 국제교류의 자극이 제약을 받은 것이 당시 조선의 기술발전에 중대한 애로 조건인 점에서, 무역을 포함한 국제교류의 활성화를 통한 기술발전론은 타당한 제안이었다. 박제가는 기술발전과 경영효율화를 도모하는 데에 경험적 지식으로는 불충분하고 서적을 통한 체계적 지식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던 점에서, 학문적 지식의 경제발전에 대한 기여를 평가하였다.
박제가는 시장육성, 개방정책, 기술발전, 지식경영 등 오늘날 경제학의 수준에서 제기할 수 있는 경제발전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소를 거의 모두 고려하였다. 박제가는 이론을 알고 현실에 대입한 것이 아니라, 경제이론을 모른 채 현실에 대한 선입견 없는 문제의식과 예리한 통찰을 통해 경제이론에 부합하는 개혁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슘페터(Schumpeter 1954, p. 53)와 스피겔(Spiegel 1991, p. xxii)은 모두 경제학이 서양문명의 소산이며, 그 외에는 중국만이 경제학을 성립할 잠재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았다. 도쿠가와시대 일본 경제사상의 발전 수준은 동시기 중국보다 낮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개혁정치를 추구하는 幕府의 吉宗장군(1716-1751)이 實學을 장려하고 네덜란드 학문인 蘭學을 연구하게 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상업중시주의가 주류가 되었고, 나아가 영주의 국부증진정책으로서 일본형중상주의가 출현하였다.(杉原四郞․逆井孝仁․藤原昭夫․藤井隆至 1990, 11, 23, 110쪽) 집권적 分權制 아래 幕府․藩間 경쟁체제 및 시장 발전의 역동성이 사상의 다원화, 경제적 합리주의의 부상과 정책 이념으로의 채택을 낳았던 것이다.
이러한 유리한 풍토가 있었기에, 16세기만 하더라도 유학이 낙후된 일본이 도쿠가와시대에 유학과 더불어 경제사상을 현저히 발달시켰던 것이다. 조선에서와는 달리 중국과 일본에서는 상인이 경제합리성을 중시하는 사상을 발전시켰다(余英時 1993). 조선에서 경제적 동기를 중시하는 사상이나 중상주의적 사상의 전개의 폭이 중국과 일본에 비해 크게 좁았다. 작은 나라가 중앙집권제를 발전시켰고 시장의 발전도가 가장 낮았던 것이 주자학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경제사상의 발전을 제약하였던 것이다.
박제가를 유럽 경제학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이전 중국과 일본의 가장 선진적인 경제사상가와 비교해보자. 19세기 중엽 이전 중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경제사상가는 魏源(1794-1857)이었다. 그는 국내상업을 매우 중시하였으나, 농본사상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禁奢崇儉을 위에서 장려할 수 있으나 아래에 강제해서는 안되며, 부자의 사치는 빈민의 생계에 도움을 주므로 장려할 필요가 있다고 하여 崇儉사상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박제가는 농본사상을 극복하였고 사치의 기능과 무역의 이점을 위원보다 예리한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원이 무역차액을 분석하여 근대경제학의 초기 분석 단계에 오른 점에서 박제가보다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재화교역의 차액이 화폐로 보상되고 은이 광산뿐만 아니라 대외무역에서도 유래하는 것을 알고 은화․동전간 교환비율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였다.(胡寄窓 1981, 662-683쪽) 종합적으로 보건대 서양 경제학 지식의 도움을 받은 위원의 경제사상은 박제가를 앞섰으나, 그전에 박제가보다 진보적인 중국의 경제사상가를 찾기는 힘들다.
일본형중상주의의 대표자인 本多利明(1743-1820)과 佐藤信淵(1769-1850)의 경제사상을 간단히 살펴보자(杉原四郞․逆井孝仁․藤原昭夫․藤井隆至 1990, 137-147쪽). 本多는 농민층 구제와 생산력 향상을 위해 국내개발론과 해외무역론을 내세웠다. 난학자인 그는 서양과학기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다음 인용문에 나오듯이, 그는 서구에서 국왕이 무역을 천직으로 삼는 정보를 알고 관이 무역을 장악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무역에 의한 금은 유출을 경계하여 필수품만 수입하고 불필요한 것은 수입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그 다음 인용문에 나오듯이, 佐藤는 정부가 국내 무역과 해외 무역을 관리, 장려하자고 주장했다. 양자 모두 국부의 원천을 외국무역에서 구하였다.
第三 선박이란 것은 천하의 물산을 관의 선박으로 바다를 건너 운송하고 교역하여 천하의 有無를 통하고 만민의 飢寒을 구제하는 것이다. 渡海․운송․교역은 國君의 천직이므로 商民에 맡겨서는 안된다. 만약 잘못 상민에게만 맡기면 사기와 탐욕을 자행하여 나라의 여러 물종의 시세를 평준하지 않고 시세가 크게 달라지고 高下가 있어서 농민이 살아가기 어렵다. 이것을 구제하는 것은 관의 선박으로 바다를 건너 운송하여 교역하면 자연히 여러 물종의 가격이 평준화되어 농민을 구제할 수 있다.……따라서 구라파 국가들은 국왕이 있어서 만민을 撫育하는 데에는 도해․운송․교역으로 기근을 구제함을 국왕의 天職으로 삼는다.(本多利明)
融通府는 세계의 화물을 統轄하고 천하의 상민을 撫御하여 財用을 융통하고, 많은 곳의 여러 물자를 적은 곳으로 옮기고 싼 곳의 물자를 비싼 곳으로 옮겨 有無를 상통하고 輕重을 相交하여 동서남북의 偏鄙라도 萬貨屈伸의 차이와 郡品高卑의 다름이 없게 하고, 각지에 나는 산물로써 항상 그 가격을 평준화시킨다. 또 두루 외방에 통상하게 하여 互市交易의 이윤을 거두어 국내를 충실하게 하고 크게 백성을 번식하게 하여 상하를 豐樂하게 하는 일을 맡는다.(佐藤信淵)
이러한 일본형중상주의의 대표자에 대비해보아도 박제가의 경제사상은 손색이 없다. 동아시아 삼국의 문호개방 이전에 국제무역의 이점과 검약론의 한계를 박제가처럼 예리하게 지적한 인물을 달리 찾기 힘들다. 중국․일본보다 서양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경제합리주의가 뿌리를 내릴 토양이 가장 척박한 조선에서 중국․일본의 최고 수준의 경제사상가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사실을 박제가의 천재성만에 돌릴 수는 없다. 3국 중 시장발달 수준이 가장 낮아 해로무역을 통한 시장 육성이 가장 절실했고 주자성리학의 지배력이 가장 강고하여 검약관의 폐해가 가장 컸던 현실이 박제가의 통렬한 문제의식을 낳은 면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기본적인 요인은 조선의 학문 역량이 동시대 중국과 일본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중국문화권에서 가장 정합적이고 형이상학적 사유체계인 주자성리학에서 조선은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경제합리주의 실학자층은 협소하였지만 유형원, 이익, 유수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및 정약용은 중국과 일본의 일류 실학자와 대등하였다. 유형원의 經世致用論은 동시대 중국의 顧炎武와 黃宗羲보다 훨씬 구체적이었다(全海宗 1991, 108쪽). 홍대용이 華를 상대화하여 夷와 동일하게 인식하는 세계관은 동아시아의 누구보다 선진적이었다. 이익은 유학과 서학의 종합을 모색하였다. 유수원은 박제가만큼 진보적인 상업론을 제시하였다. 박지원의 경제현상에 대한 논리적 설명은 개항 전 동아시아의 누구에 못지 않게 높은 수준이었다. 정약용은 이러한 실학을 집대성하였던 것이다.
유럽 경제학이 도입되기 전단계에 경제사상이 가장 발달한 지역은 동아시아였다. 동아시아 3국은 유럽 중상주의․중농주의에 상응하는 경제사상 체계를 수립하지는 못하였지만, 문화역량이 높은 편이었고 경제합리주의의 사유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경제합리주의 사상이 가장 밀도 높게 성립, 발달한 일본이 유럽 경제학을 가장 신속하고 활발하게 흡수하였다. 한국은 일본에 훨씬 못미치지만, 그래도 경제학을 빠르게 흡수한 편이어서 대한제국기에는 보성전문 理財․經濟學專門科를 통해 경제학 고등교육이 성공적으로 정착하였다(이헌창 2005). 조선의 학문역량이 이러한 성과를 낳은 기반으로 작용하였다고 보고 싶다.
5. 박제가 사상의 영향
박제가의 저술은 상당히 읽혀지고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서얼 신분인 그가 네 차례 燕行을 하였다는 것은 그의 뛰어난 역량을 널리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첫째 연행은 채제공의, 마지막 연행은 윤행임의 배려에 힘입었는데, 당시 이들은 명망가이자 실권자였다. 게다가 중국에서까지 文名을 떨친 인물이라 그 자신이 명사로 보인다. 수도권의 진보파 인사는 거의가 그의 글을 보았을 터이고, 진보적이지 않은 엘리트도 상당수 보았을 것이다. 보수파 인사는 그의 글을 읽지 않더라도 상당수가 그의 주장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唐魁’로 지목받은 데에서 엿볼 수 있다. 그의 주장은 정책건의안으로 정식으로 두 차례 정조에게 제출되었고, 정조는 자신이 우호적으로 인식한 왕안석에다 그를 비유했다.
그런데 같은 북학파인 박지원이 박제가가 ‘奇高之策’을 개진한다고 보았고, 이덕무도 그의 ‘唐癖’을 지나치게 보았다. 그런 만큼 그의 혁신적 주장은 당시 사회에 강하고 폭넓은 충격은 가했을지라도 호응자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책으로 채택될 수 없었다. 박제가와 이덕무 정도의 온건하고 점진적인 북학론 정도가 진보파에게 수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후대에 대한 영향력은 사상면에서 제한적이었고 정책면에서는 없었다. 북학의는 8․15해방까지 刊刻되지 못하였고 일부 유지 사이에 寫本으로서 회람되었을 따름이었는데, 이것은 그 내용을 수용하는 인사가 적었음을 드러내며, 그 때문에 후대의 영향력이 제한되었다. 박제가의 경제사상을 적극 계승한 것으로 확인되는 유일한 인물이 정약용의 중요한 제자인 李綱會였다. 그는 수레의 이점, 工人의 교육에 의한 제작, 선박의 제조법, 조선제조기술의 낙후, 외국과의 교역을 통한 일본 문명의 진보 등을 거론하면서 “朴楚亭의 北學議는 헐뜯을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스승인 정약용은 북학론을 흡수하여 선박 등에서 외국 선진기술을 학습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安大會 2005). 그런데 이강회는 중앙 학계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그의 견해는 정책에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박제가와 가장 절친한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이 저술한 五洲衍文長箋散稿 에 의하면, 벽돌과 수레를 각각 辨證하는 곳에서 박제가의 북학의를 소개하고 있다(人事篇 燔甓辨證說, 獨輪車辨證說). 이규경은 박제가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해로무역육성론자였는데, 해로무역론을 제기한 선구자로 이지함과 유형원을 거론하면서 가장 체계적인 해로무역론을 전개한 박제가를 거론하지는 않았다. 그는 인성론, 농본주의 관념, 그리고 국내 상업과 화폐에 대한 입장에서 박제가보다 보수적이었다. 이것은 박제가의 당벽을 비판하고 그보다 온건한 조부 이덕무의 사상을 家學으로 계승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규경이 이덕무보다 적극적으로 해로무역의 육성을 주장하게 된 데에는 북학파보다 해외정보에 훨씬 밝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규경은 瀛環志略, 海國圖志 등 漢譯西學書를 근 20종 참조하였고, 서양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이헌창 2003)
최한기는 이규경과 더불어 서양과의 개국통상론을 주창하였고, 박제가만큼 상업의 기축적 역할과 국제무역의 이점을 잘 인식하였고 박제가에 못지 않는 체계적인 무역육성론을 제시하였다. 최한기가 박제가보다 진전된 면도 포함하는 적극적 무역육성론을 제기한 주된 계기는 박제가의 학습이라기보다 풍부해진 해외 정보 덕분이었다. 그는 서양이 상업을 근본으로 하여 무역에 힘쓰고 있고 國計가 전적으로 상업활동에 달려 있었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박제가에게는 중국과의 해로무역이 절박한 과제였던 반면, 더욱 폭넓은 해외 정보에 접한 이규경과 최한기에게는 서양과의 교류가 기본 과제였다.(이헌창 2003)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가학으로서 조부의 저술을 공부하였다. 그는 1840․50년대에는 서양을 잘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천주교 확산의 방지, 해안의 방어 및 내정 개선을 통해 서양의 침략을 방어하려는 의식이 더욱 강하였던 점에서(孫炯富 1997, 207쪽), 박지원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다 열강이 북경을 유린한 직후인 1861년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에 그는 “지금 세계 정세는 날로 변하여 동서 열강이 서로 대치하여 옛날 春秋列國 때와 비슷하다”는 인식에 도달하였고, 이후 화이관이 변하여 洋夷도 禮를 가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原田環 1997, 5장). 이 단계에서 박규수는 박지원의 대외 인식 수준을 넘어서 홍대용의 ‘華夷一也’의 세계관에 접근하였다. 1874년 서양이 해로무역을 통해 富强을 추구한다고 보고했던 것으로 보아(일성록 고종 11년 6월 25일), 그는 통상 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경쟁적인 국제질서의 실체를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였다. 이 단계에서 박규수는 박지원의 해로무역론을 넘어서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나, 박제가 수준의 혁신성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박규수가 박제가의 저술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 그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어떻게 보면 조부 박지원의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 박규수 사상의 선진화를 제약했다고 볼 수 있겠다. 달리 보면 그래도 박지원의 개방적인 사상 덕분에 대외 인식을 향상하여 당대로서는 가장 선진적인 수준에 도달하였고, 박지원의 신중하고 치밀한 학풍을 이어받은 덕분에 대일수교를 통한 대외개방으로 나아가는 데에 공로를 세워 북학사상을 정책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1880년 제2차 修信使의 보고 이후 조선정부는 이전의 王道的 安民策을 富國强兵策으로 확고히 전환하고, 해외통상의 장려를 부국을 위한 주요한 수단으로 인식하여 1882년 海禁을 해제하고, 1881년부터 해외 유학생을 활발히 파견하고 1882년부터 외국인 고문관․행정관․기술관․교육관․군사교관 등을 활발히 고용하였다(이헌창 2004). 박제가의 주장이 1세기가 지나 이 무렵에 비로소 실현되었던 것이다. 개항 직후부터 박제가의 사상보다 선진적인 변법개화사상이 형성되었는데, 박규수가 변법개화파를 지도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개항 이후 개화사상이 빠르게 성장하여 1882년은 東道西器論을 정책이념으로 천명하는 고종의 敎書가 발표되고, 1884년에는 변법개화사상을 구현하려는 정변이 시도되었다. 1880-4년간 개화정책은 괄목할 진전을 이루었다. 이렇게 개화사상이 형성되는 데에 박제가의 직접적인 역할은 없었다. 그런데 박제가와 같은 선진적 사상을 제기할 수 있는 학문 역량은 개항 이후 개화사상의 신속한 형성을 위한 기반을 이루었다. 더 넓은 시야로 보면, 원래 선진문명인 중국을 잘 학습하는 전통과 역량이 개항 후에 근대문명의 학습에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개화사상의 형성에 대한 보수적인 衛正斥邪思想의 저항은 강력하였다. 정부내 파벌 대립뿐만 아니라 재정난, 관료 실무역량의 부족 등은 근대화정책에 큰 애로가 되었다. 게다가 개항된 직후부터 제국주의시대가 열렸고 임오군란을 계기로 한반도의 지배를 둘러싼 중․일간 대립이 격화되어, 자주적 근대화에 주어진 시간적 여유가 너무 짧았다. 결국 외압의 가혹함과 내부 역량의 부족은 식민지화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제가의 개혁안이 19세기 전반이라도 구현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니 박제가보다 더욱 온건한 박지원의 개혁안이 19세기 전반에 실현되었더라도, 제국주의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조선은 근대문명의 본격적이고 원활한 도입 태세가 갖출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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