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hwa-People's painting is drawn by the grass roots in Joseon dynasty
1. 역사를 움직이는 것
풍속화를 볼 때 우리는 지배계급의 눈으로 본다. 누군가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했다면 그는 분명히 양반으로서 상놈들을 부려먹으리라는 가당찮은 야망을 품고 있을 것이다.

논두룩에 퍼질고 앉아서 새참을 먹는 상놈이야 상놈이지. 나야 평생도에 나올만큼 팔자 좋은 양반으로 태어 났을테지 하고 착각한다는 말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인류의 역사는 차별화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배계급이 있었고 당연히 피지배계급이 있었다.
지배계급은 지배의 당위성을 기록으로 남겨야 했다. 역사는 지배계급의 실록實錄과 동일시되었다. 그 사관에서 역사를 배웠으니 타임 머쉰을 타고 조선으로 가도 양반으로 태어나겠지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따름이다. 조선시대만 그랬을까. 그 뿌리는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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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 민화의 뿌리 자유문고 2015에서 인용
소뿌리1H4B守護鵲虎圖03
소뿌리3M2F蓮子鯉魚圖01
소뿌리3M2F平安鳳凰圖01
소뿌리3M2F喜報鵲虎圖05
소뿌리3M3L多孫頌祝圖01
소뿌리3M3L長生雙鹿圖02
소뿌리3M4I猫頭仙景圖01
[주제22,23] 조선후기 문화(퍼즐로보는실학,민화,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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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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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 말기로 추정되는 먼 옛날부터 이 땅에 사람들은 씨족을 만들었고 씨족장을 뽑았다. 외교와 전쟁에 능한 씨족장은 부족장이 되었다. 권한과 지위가 강화되었다. 상고시대의 암각화에서도 지배계층의 사람은 크게 그려졌다.
고구려의 벽화는 철저한 지배계급의 풍속화를 보여준다. 무덤의 주인은 주인답게, 마나님은 마나님답게 그려졌다. 시종은 작게 그리고 중요하지 않게 그려졌다. 그러고 보면 신라의 천마도 역시 정치-경제-문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진골이나 성골귀족의 승천을 위한 탈것이었을 것이다.
고려의 분묘벽화인들 다르랴. 거창 둔마리 벽화의 주악선인은 분명히 왕족-척족-문무관리 그리고 지방호족의 풍속화일 것이다. 과전과 공음전을 세습하면서 죽고 나서도 그 부귀를 당연히 누리련다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재력과 권력의 소유자였다는 말이다.
조선의 풍속화는 지배계층인 왕공귀족과 양반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교육과 학문-과거와 관직-과전과 녹봉을 세습 사유화하면서도 군역과 요역에서 면역되었다. 그 특권의식에서 나온 요구와 취향의 결과가 도화원 그림의 방향이자 주류였다.
도화원은 엄밀히 말해서 어용화사의 집단이었다. 왕의 취향에 따라서, 궁중행사의 필요에 맞추어 양반들의 수요에 따라 도화원 화원이 중국 그림이라는 범본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궁중행사도宮中行事圖이고 수원행궁도水原行宮圖요, 평양감사야연도平壤監司夜宴圖이다.
그런 풍속화에 익숙해진 우리는 양반의 시각에서 재미꺼리로 그림을 본다. 또 있다. 전가낙사도田家樂事圖라, 농촌의 즐거운 일을 그렸다는 말이다. 봉건군주가 태평성대를 자찬하기 위해 그리게 했던 그림이다.
자작농이라면 즐거울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가렴주구와 수탈에 찌든 농민에게도 농사가 즐거움일까. 서리와 군교 등의 중인 농공상의 상민들이 그러할진대 천민은 어떠했겠는가. 공公 사천私賤의 노비-무당-광대-창기-백정 등은 고려 쩍부터 매매 증여 상속 점탈의 대상이었다.
이들 역시 풍속화에서 그려질 때도 주역이라기보다는 구경꺼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양반체면에 씨름판에 끼어 구경을 할 수가 있나. 숨어서 청포물에 머리감는 아낙네들 허벅지를 훔쳐볼 수가 있나. 그래서 그림이 필요했었을 께다.
물론 구경꺼리가 아닌 민중의 역사도 있다. 그러나 민중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반란이나 봉기 그리고 후세에 민중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른바 집단행동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민중의식을 읽어야할 때도 지배계급의 역사를 뒤져야한다.
이를테면 고려 때만 하더라도 명종 2년(1172년) 조위총趙位寵의 난-명종 6년(1176)년 망이亡伊 망소이亡所伊의 난 그리고 신종원년(1198)의 만적萬積의 난 등은 천민의 신분해방을 꾀한 반란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종 24년(1237) 전남 담양에서 봉기했던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 형제의 난, 명종 23년(1193) 반란군의 연대에 의한 김사미金沙彌 및 효심孝心의 난 등은 수탈과 착취에 저항하는 민중의 의사를 대변하는 또 다른 반란으로 기록된다.
그나마 미미한 반란은 무슨 민란이라고 싸잡아 밀쳐둔다. 정말 살기 힘든 세월이었다. 콱 죽어버려? 하고서도 죽지 못하는 것은 잡초같은 생명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생명력이 전통의 다른 이름이었다.
민초라 했다. 풀 중에서도 잡초다. 이 땅의 억새풀이다. 몽고가 이 땅을 휩쓸었을 때 왕공 귀족이 강화에서 꼬리를 사렸을 때도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친 것은 그토록 천대받았던 이름 없는 농민과 천민들이었다.
관악산 초적草賊이 그러하고 충주노예군忠州奴隸軍이 그러하다. 임진왜란 때 조현-곽재우-고경명-김천일-정문부-사명대사-휴정 등의 의병장 이름 아래 목숨을 바친 것은 유생과 승려 뿐이 아니라 오히려 농민과 노비라 할만하다.
그 전통이야 어디 가겠는가. 1894년의 동학혁명-1919년의 3.1운동-1960년의 4.19 혁명이 그 맥에서 이 땅을 지킨 민초의 공덕인줄 알겠다. 그 뿐이랴.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땅의 문화사는 거꾸로 씌어져야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천민의 역사이어야 문화사가 된다는 말이다.
생각해 보라. 고려는 세계적인 청자를 만든 문화민족이었다. 그러나 고려청자를 만든 세계적인 도공은 부곡部曲의 천민이었다. 백정白丁이라는 농민보다 낮은 신분이었다. 바우인지 쇠돌인지 어느 누구도 그 이름을 찾아낼 재간이 없다.
조선의 백자를 만든 도공 역시 이름이 없다. 관요官窯에 소속되었던 천민이기 때문이다. 그 도자기에 완벽한 것이 없다하여 파격의 미를 애써 찾아낸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일생에 몇 개 나올까 말까한 신품은 도공이 스스로 깨뜨렸다는 데야 일러 무삼하리오.
평양감사에게 신품을 진상했는데 아래 것도 한참 아래 것인 아전 나부랭이가 하급품을 받았다고 목을 쳐도 살인이 안돼는 것이 도공이요, 천민의 신세였다. 그렇게 우리의 국보가 만들어졌다면 우리의 문화사는 ‘구경꺼리, 재미꺼리의 잡초같은 인생’이 만든 천민의 역사였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겠는가. 그럴 리가 있나. 그 속에 뭐가 있어도 있겠지.
2. 한국을 움직이는 것
미국을 움직이는 머리수가 한국을 움직이는 인구와 같다고 생각했던 일이 있다. 2억 미국인의 20%에 해당하는 수뇌집단 이른바 왜습(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지배양상을 꼬집은 말이기도 하다. 그 20%가 4천만이다. 한국의 인구와 같다.
한국에는 통계상 문맹이 없다. 시골 할머니도 자기 이름은 읽고 쓸 줄 안다. 그래서 4천만이 한국을 움직인다고 했다. 보통의 미국인이나 소수민족에는 문맹이 많다. 흑인 중에는 평생 2백 단어 정도를 구사한다는 통계도 있다. 그래서 결국 4천만이 미국을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난다.
한국인은 실직을 당하면 ‘리어카라도 끌고 배추장사라도 한다’고 큰소리친다. 적도에서 남극대륙에 옮겨놓아도 곧바로 적응하여 일할 수 있다는 한국인의 기질을 잘 표현한 말이다. 미국인은 왼 나사를 돌리는 조립공장에서 오른 나사를 돌리는 공장으로 옮기면 자살한다 했다. 극단적인 분화에 단세포적으로 적응하여 사는 미국인을 꼬집는 에피소드이다.
미국인은 1930년대의 대공황 때에 공원으로 몰려들었다. 남이 보던 신문 한 장이 허기를 잊게 해주고 찬바람을 막아주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예술인들인들 다를 바가 있었겠는가. 연방예술계획(Works Administration/Federal Art Project)을 비롯한 지원정책이 없었더라면 미국미술이란 아예 말라 비틀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 동란 때에도 한국의 화가들은 살아남았다. 다방에 앉아서 보리차로 끼니를 때우며 그들은 전시를 했다. 전시戰時의 전시展示는 무려 2백여 개를 헤아린다. 그렇게 시련을 승화할 수 있는 민족이요, 예술가들이었다. 빚 보증에 나라 얼굴이 깎였다하니 얘기 돌 반지까지 팔아 빚을 갚겠다고 팔뚝을 걷어붙이는 민족이다. 그렇게 모인 금이 2천 톤이 넘었다. 국제구제금융IMF의 한파인들 한국동란보다 심하랴.
그런 한국인들도 한국에서 살면 병이 난다. 자기폄하증이라는 고질병이다. 그래서 모래 같은 민족이니, 짚신이니, 엽전이니 하고 스스로를 모독한다. 그럴까. 20세기 문명을 만든 것이 모래다. 모래가 도시를 만들고 실리콘이 모래에서 나왔다.
김정호는 짚신발로 삼천리반도를 답사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엽전이라...상고 노예시대부터의 뿌리 깊은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근세 자유경제로의 길을 닦은 것이 대동법의 실물경제에 이은 화폐경제였다.
그 징표인 상평통보 즉 엽전이었다. 엽전으로 대표되는 서민의 자유경제가 살려놓은 민중의 역사가 있다. 민화와 판소리가 그것이다. 민중의 얼굴이 찍힌 풍속화가 거기 있었다.
3. 오늘날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것
풍속화라고 하면 한국인은 단원과 혜원을 떠올린다. 단원 김홍도는 서민생활의 애환을 그렸다. 혜원 신윤복은 상류계급과 유한계급의 시정과 서정 나아가서는 색정을 담았다. 그러나 그것은 민중의 삶의 방식을 기록했을망정 삶 그 자체는 아니다. 지배계급의 권위와 호기를 담은 기록화에 민중이 동원되었다고 해서 민중의 그림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삶의 호흡 속에서 민중의 기원과 송축을 담고 있는 그림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민화라 부르는 그림이다. 판소리 역시 민중의 내 것 사랑이 숨 쉬고 있다. 그러나 자기네 삶과 기원祈願과 원망願望을 기록할 수단을 배울 수 없으니 상징도상으로 그렸다. 그것을 민화라 했다.
민화는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던 17.8세기에 많이 그려졌다.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의 해(1608)에 경기도에서 시행되어 백년 후인 숙종34년(1708년)에는 평안도와 황해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토산물의 현물공납 대신 단위 경작면적 1결에 대하여 쌀 12되를 공납했다. 대동법은 새로운 세력권으로서의 강상江商-송상松商-만상灣商 등의 거상巨商 및 종류鐘樓-칠패七牌-이현梨峴 등의 상권商圈을 등장시킨다.
민화라는 그림은 그렇게 윤택해진 서민경제에서 폭발적으로 그려졌다. 몸이야 지배체재에 묶여 있지만 마음이나마 호사를 부리고 싶어 했다. 양반이 누리던 특권을 누리고자 했다. 대례복입고 혼사도 치르는데 궁모란닮은 모란병풍 하나 두르지 못하라는 법이 있나?
그렇게 간이 부은 민중이 그려달라고 했던 것은 그러나 생각외로 소박했다. ‘내 것’을 그려달라 했다. 그래서 나라사랑과 주체성이 배어들었다.
민화나 판소리에는 화가나 저자의 이름이 없다. 환장이와 광대가 그 이름이었다. 천민 중에서도 한참 천민이었다. 그런데도 민중은 지켜야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지배계급의 풍속화가 중국의 그림을 번안할 때 민중이 지킨 것, 그것이 몽고란과 임란때 목숨을 바쳐 지켜야했던 것이었다.
반만년 이 땅 사람들의 정체성과 우리의 배냇신앙이 모두 그 안에 녹아 있었던 것이다. 동이는 그 지켜야할 우리 것 중의 하나였다.
한민족은 신석기시대 말부터 회하지역과 산동반도-남만주-발해만과 한반도에 살던 동이족의 후손이라고 문화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 동이족은 하 상 주 춘추전국에 이르기까지 중국문화의 시원이자 영향원이었다.
동이의 나라 商의 멸망, 만리장성에 의한 북방과의 단절, 신라의 반쪽 통일 등의 역사에서 고착되고 동이문화권의 백제가 멸망하면서 숨어 들어간 이 땅의 원형적 역사가 모두 민화와 판소리에서 신화와 원형이란 이름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이다.
민화와 판소리에는 상고신화와 진나라 시황제 이전의 중국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동이의 경전이라는 산해경의 신수神獸들-맹자가 동이라 일컬었던 순임금-요임금의 딸들이자 순임금의 왕비였던 아황 여영의 二妃-동이의 왕자 백이 숙제 등이 단골이다. 동이풍속화라 할만하다.
정말 요순쩍 이야기 아닌가. 그것이 옛 조상의 것이었거니 하고서 읊고 그렸던 것이 한국인이요, 그리고 민초였다. 그렇게 민중은 피에서 피로 우리의 정체성을 전해 내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전통傳統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로서 역사에 남는다. 그것이 진정한 민중의 초상, 그 풍속화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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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 민화의 뿌리 자유문고 2015에서 인용
소뿌리1H4B守護鵲虎圖03
소뿌리3M2F蓮子鯉魚圖01
소뿌리3M2F平安鳳凰圖01
소뿌리3M2F喜報鵲虎圖05
소뿌리3M3L多孫頌祝圖01
소뿌리3M3L長生雙鹿圖02
소뿌리3M4I猫頭仙景圖01
[주제22,23] 조선후기 문화(퍼즐로보는실학,민화,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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