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시총서<시향만리>제2집 수록시]조오현,문무학,김세웅,서지월,홍승우,이상번,김창제,신지혜,우이정
◆2007년 7월에 펴내 연변시인협회 창립 1주년기념 및 시총서「시향만리」출간식이 중국 연길 백산호텔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한국 대구에서는 서지월 윤미전 신표균시인 등이 참여했으며, 앞으로 「시향만리」시문학상을 제정해 한중공동으로 시상할 예정이다.
◆연변시잡지<시향만리>제2집(2008.봄)<한국시인 특집>에 수록된 조오현,문무학,김세웅,서지월,홍승우,이상번,김창제,신지혜,우이정시인.
|
[연변시총서]<시향만리>제2집 수록시]조오현 시-'산에 사는 날에' 외4편
산에 사는 날에
조오현
나이는 뉘였뉘였한 해가 되었고 생각도 구부러진 등골뼈로 다 드러났으니 오늘은 젖비듬히 선 등걸을 짚어본다
그제는 한천사 한천스님을 찾아가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어 보았다 말로는 말 다할 수 없으니 운판 한번 쳐보라, 했다.
이제는 정말이지 산에 사는 날에 하루는 풀벌레로 울고 하루는 풀꽃으로 웃고 그리고 흐름을 다한 흐름이나 볼일이다.
神 話
조오현
어린 오누이가 오솔길을 탈래탈래 걸어간다
잎겨드랑이에 담홍색으로 핀 꽃 같다
이슬이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에
몽상
조오현
산에는 백도라지 들에는 민들레꽃 내 고향 아득한 기억은 우물 속 드리운 얼굴 담장가 등돌리고 섰던 순이 한 번 만나고 싶다.
물올라 싱그러운 쑥 내음은 나도몰라 십리도 까마득한 언덕 달은 너무 밝아 못 지울 영상을 밟고 몰래 나온 조그마한 마을.
마셔서 차지 않고 못내 비운 이날 밤은 어딘지 시름 번질 속 쓰린 항아린가 깨고난 잠의 자리엔 메아리만 감도네.
잘못 살온 세상이라도 정화수 끝내 말고 초 한 자루 밥 한 그릇 외할머니 빌어주신 그날 그 돌상 곁에서 놀 수 없는 왕자여
계림사 가는 길
조오현
게림사 외길 사십 리 허우단심 가노라면 초록산(草綠山) 먹뻐꾸기가 옷섶에 배이누나 이마에 맺힌 땀방울 흰구름도 빛나고
물따라 산이 가고 산을 따라 흐르는 물 세월이 탓없거니 절로 이는 산수간에 말없이 풀어논 가슴 열릴 법도 하다마는
한 벌 먹물 옷도 내 어깨에 무거운데 눈감은 백팔염주 죄일사 목에 걸어 이 밝은 날빛에 서도 발길이 어두운가
어느 골 깊은 산꽃 홀로 피어 웃는 걸까 대숲에 이는 바람 솔숲에 와 잠든 날을 청산에 큰절 드리며 나 여기를 왔고나
할미꽃
조오현
이른 봄 양지밭에 나물 캐던 울 어머니 곱다시 다듬어도 검은 머리 희시더니 이제는 한 줌의 귀토(歸土) 서러움도 잠드시고
이 봄 다 가도록 기다림에 지친 삶을 삼삼히 눈 감으면 떠오르는 임의 樣子 그 모정 잊었던 날의 아, 허리 굽은 꽃이여
하늘 아래 손을 모아 씨앗처럼 받은 가난 긴긴 날 배고픈들 그게 무슨 죄입니까 적막산 돌아온 봄을 고개 숙인 할미꽃
.
<약력>
▲1932년 경남 밀양 출생. ▲6세에 '절간 소머슴'으로 입산, 1959년 조계종 승려가 됨. ▲1966년 등단. ▲가람시조문학상, 남명문학상 본상, 한국문학상,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백담사.신흥사.낙산사 회주. ▲현재, 만해사상실천선양회 고문. 백담사 만해마을 이사장.
|
[연변시총서<시향만리>제2집 수록시]문무학 시-'우체국을 지나며'외4편
우체국을 지나며
문 무 학
살아가며 꼭 한번은 만나고 싶은 사람 우연히 정말 우연히 만날 수 있다면 가을날 우체국 근처 그쯤이면 좋겠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엔 우체국 앞 만한 곳 없다 우체통이 보이면 그냥 소식 궁금하고 써놓은 편지 없어도 우표를 사고 싶다
그대가 그립다고, 그립다고 그립다고 우체통 앞에 서서 부르고 또 부르면 그 사람 사는 곳까지 전해질 것만 같고 길 건너 빌딩 앞 플라타너스 이파리는 언젠가 내게로 왔던 해 묵은 엽서 한 장 그 사연 먼 길 돌아와 발끝에 버석거린다
물 다든 가로수 이파리처럼 나 세상에 붙어 잔바람에 간당대며 매달려 있지만 그래도 그리움 없이야 어이 살 수 있으랴.
그냥
문 무 학
‘그냥’ 이란 말과 마냥 친해지고 싶다 나는
그냥 그냥 읊조리면 속된 것 다 빠져나가
얼마나 가벼워지느냐 그냥 그냥 또 그냥
달빛에 붙잡히다
문 무 학 달에게 붙잡혔다 벗어날 수가 없다 유월 열 이튿날 열대야를 가로 질러온 달빛이 포승을 던져 나를 금방 낚아챈다. 솔가지 조금씩 흔들 만한 바람도 꼼짝도 못하는 포로가 되었는데 겁 없는 소쩍새만 소쩍 달빛 물어뜯고 있다. 희미한 내 그림자 저 달이 찍어냈다 똑 바로 서지 못하고 비틀댄다, 휘청댄다 나 몰래 내 사는 꼴을 지켜봤단 말인가. 달빛에만 묶여서도 숨이 콱 막히는데 별빛은 왜 또 슬며시 거들고 나서는지 비명을 냅다 질러도 달은 들은 척도 안한다.
구불텅 소나무
문 무 학
솔 아래 바위에 앉아 그를 우러른다 큰 바위 두어덩이 버선처럼 덮혀있고 구불텅 한 굽이 휘고 도 한 굽이 틀고 있다
구불텅 두어 굽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 해일까 달일까 아니면 바람일까 걸칠 것 하나 없는데 솔은 왜 돌아갈까
내 모를 까닭이사 없지야 않겠지만 달빛에 짓눌리고 햇살에 눈 감다 보면 헛디뎌 그도 한번씩 휘청거린 것 아닐까
평사 휴게소에서 라면을 먹다
문 무 학
나는 지금 철 지난 바다로 가고 있다 어디로든 떠날 땐 마음이 먼저 설쳐 서둘다 놓친 아침을 라면으로 떼운다.
꾸불꾸불 라면 가닥 내 걸어온 길 같다 국물 맛은 아무래도 굽이에서 풀린 것일 터 내 거친 발자국들엔 어떤 맛 스몄을까
바다는 추령을 넘어 파도로 서 있었다 저 물이 짠 것은 또 부서지며 든 것일 터 온전히 부서지지도 못한 내게도 드는 맛 있을까
철썩철썩 파도소리 옷깃 잡고 따라와서 네 맛은 어떠냐고 묻고 도 묻는데 뒤통수 긁적이면서 잠든 척 하고 있다.
<약력>
⊙1949년 경북 고령 낫질 출생. ⊙1981년 『시조문학』으로 등단. ⊙1982년 『월간문학』신인상 시조 당선. ⊙1988년 『시조문학』에 문학평론 천료. ⊙대구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현대시조문학상, 대구문학상, 유동문학상, 자랑스런 방송대인상 대상 수상 ⊙시집 『가을 거문고』,『설사 슬픔이거나 절망이더라도』,『눈물은 일어선다』, 『달과 늪』, 『벙어리 뻐꾸기』등 있음.. ⊙현재, 대구문인협회 회장. 대구시민예술대학장.
|
[연변시총서<시향만리>제2집 수록시]김세웅 시-'보다 젊은 당신에게' 외4편
보다 젊은 당신에게 김세웅
산을 오르며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던 건 잘못 이었습니다 꼭대기에 이르자,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말라 죽어가면서도 변명하지 않는 나무들과 더 이상 솟을 데 없는 정상의 외로움에 둘러싸여 잡초만 후회처럼 무성하였습니다 돌아보지 않고 자존심을 앞 세워 곧장 내달아온 나의 발걸음은, 가기 싫은 곳에 서둘러 나를 데려온 셈입니다 건너 편 산은 나에게서 돌아앉아 푸른 등을 보였습니다 그제서야, 아무도 기다려주지 못한 후회에 치가 떨렸습니다 기다리지 않은 만큼, 정상에는 나를 기다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멀어지던 계곡의 물소리마저 내가 멈추었다면, 더 이상 멀어지지 않았겠지요 아, 온갖 소문에 쫓겨 서둘러 올랐는데, 잡초만 후회처럼 무성한 여기는 정상입니다
별 김세웅
먼 곳에서 별은 스스로의 무게를 못 이겨 웅 웅 소리 죽여 운다 고압선 전류의 귀 울림 닮은 별이 우는 소리에
별과 마주보며 공전하는 나도 스스로의 무게를 못 이겨 소리 죽여 운다 삶의 더께를 비우지 못하는 별과 나는 서로를 안아주지 못하고, 무게가 가지는 중력으로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두고 헛바퀴 돈다
오늘도 먼 곳에서 쇳덩이가 마려운 소리를 내며 별은 울고, 삶의 온갖 이유에 쫓겨 헛바퀴 도는 나도 따라 운다
저녁 무렵 김세웅
어두워지고,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둘기 소리가 점점이 하늘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별들이 숨쉬기 시작하였다
바람난 여자들은 종소리 따라 도시를 쏘다니고
내 몸의 온갖 땀구멍으로 나도 모르는 천사들이 들어와 숨을 쉬었다
사랑이여 김세웅
사랑이여, 아직도 네 겉모습은 그럴싸, 쓸만하구나 김중배의 백금반지에 놀아난 네 몸은 아직도 요염하구나 나이 들자, 이러구러 나에게도 백금반지가 생겼다만 늦었구나, 네 열 손가락에 넘치는 호사여, 내 자리가 없구나 날아오는 가을 기러기도 그 계절이 있구나 풀잎도 푸른 시절 따로 있구나
사랑이여, 네가 김중배의 반지에 놀아나던 그래도 그 때가 좋았구나 세월 따라 이러구러 내 배가 불러지자, 모든 것이 따라 넘쳐 제 모습을 잃었구나
해 뜬다 김세웅
새해 첫날, 일출 보러 뒷동산에 오른다 여기 저기 시절 잊고 피어난 개나리, 누굴 위해 피어난 게 아닌데도 꽃은 예쁘다 무얼 다짐하지 않아도 새해는 희망차다
새해엔, 주어진 길을 따라 오래 오래 걷고 싶다 오래 걸었기에 배고파 무엇이든 맛있는 그런 길을 가고 싶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 지붕들은 하늘 향한 사람들의 변명 같다 새해엔 물에 물 타는 사랑을 하고 싶다 변명하지 않고 그리움에 목마르지 않을 그런 사랑, 그리움은 욕심이다 욕심은 목마르다
머리 위에서 까치가 먼 길 가듯 힘차게 솟구친다 떠나거라, 떠나도 돌아올 목숨인데 가고 싶은 어디라도 가거라, 지치기에 깊이 잠들 그런 길을 가거라
새해는 희망차다 꽃은 예쁘다
<약력>
▲1953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81년『시문학』 추천 완료로 등단. ▲시집,『삼중주』(시문학사),『날이 갈수록 별은 보다 높이 뜨고』 (시와 시학사),『돌아가는 길』 (시와 시학사) 등이 있음. ▲에세이집『바람으로 지은 집』발간. ▲현재, <낭만시> 동인. 세종이비인후과 원장. | |
[연변시총서<시향만리>제2집 수록시]서지월 시-'두만강변 옥수숫대' 외4편
두만강변 옥수숫대
서 지 월
두만강변에는 지금 옥수숫대가 하늘 치솟아 옥수수알 배어 통통하겠다 누굴 기다리는지 멀뚱하게 줄지어 서서 푸른 의상 바람에 날리며 흘러가는 두만강 바라보겠다
두만강변에는 지금 바람이 전해주는 말과 구름이 떠서 서성이는 심사 옥수숫대 저들은 알아 허리끈 불끈 졸라매고 옥수수알 단단히 키우겠다
두만강변에는 지금 옥수숫대들이 줄지어 서서 수 천 수 만 독립군들 이름없이 숨져갔듯이 옥수수알 단단히 키워내어 세상에 내보내는 일 그것으로 마음 달래며 흘러가는 두만강 바라보겠다
두만강 다리
ㅡ도문 량수진에서
서 지 월
강둑에서 바라보면 한 시대의 책장은 넘겨진지 오래 자갈들끼리 모여 마을 이루며 살아가는 평화만 눈에 뜨일 따름이었다
눈보라 속 헤집고 두만강 건너오던 조선민족의 짐보따리와 노 젓던 소리 어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지 엉겅퀴 쑥부쟁이들의 아우성만 키재기하며 무성할 뿐 강 너머 김일성장군 주체탑이 오늘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패망한 일본군 물러나며 폭파했다는 부서진 다리의 철골이 아물지 않은 채 상처난 살 헤집어 피를 말리고 있었다
두만강 허리
서 지 월
백두산에서 흘러온 강물이 당신의 허리 휘감아 흐르는 것 보면 강은 미인을 닮아 구비치는 것을
숲속에서 나온 뱀이 풀밭 기어나는 것 보면 미인의 허리같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당신이 누워있는 허리까지 강물이 차오르는 것 보면 내가 당신에게로 다가가고 있는 것을
두만강 뱃놀이
서 지 월
도문에 와서 두만강 뱃놀이 즐겼네 손 내밀면 잡힐 듯한 북한땅 강기슭 풀잎들은 손짓하는데 악수 한번 못한 채 그저 안타까울 뿐인데 바람은 불어와 자꾸 보채는데 손짓하는 풀잎과 나 악수한다면 죄가 되는지 강물은 내 몸 싣고 가만 두질 않으니 배야 가자, 어서 가자 노 저어도 갈 곳 없고 의지할 곳 없네
훈춘 가는 길
서 지 월
두만강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고 훈춘 가는 길 강물이 손 뻗는 대로 나는 가고 있지만 북녘땅이 아닌 남녘땅 되어버린 강 너머 북한을 바라보며 침묵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산빛의 푸르른 심정 알겠네 두만강에 겨울이 오면 꽁꽁 언 강의 얼음 위에서 상봉하고 발걸음 돌린다는 중국 조선족 동포들 넘을 수 없는 경계 안타까움도 강물은 알면서 모르는 척 흘러가더라
<약력>
• 1955년, 연개소문과 같은 생일인 음력 5월 5일 단오날 대구 달성 출생. • 1985년 10월, 제2회「전국교원학예술상」문예부문에 시 <꽃잎이여>로 大賞에 당선, 문교부장관상 수상. • 1985년『심상』 신인상 시 당선으로 등단. • 1986년『아동문예』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 1985년『한국문학』신인작품상 수상. • 1999년, 전업작가 정부특별문예창작지원금 수혜시인에 선정됨. • 1993년 제3회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 2002년, 중국「長白山文學賞」수상. • 2006년, 한국전원생활운동본부 주관, 詩碑「신 귀거래사」가 영천 보현산자연수련원에 세워짐. • 2007년, 달성군 주관, 한국시인협회 MBC KBS 등 후원으로 詩碑「비슬산 참꽃」이 비슬산 자연휴양림에 세워짐. • 현재, 한중공동 시전문지『해란강』한국측 편집 주필. 대구시인학교 지도시인.
|
[연변시총서<시향만리>제2집 수록시]홍승우 시-'그래도 오늘만은'외4편
그래도 오늘만은 홍 승 우
젖고 젖은 자여, 그대 적신 날개 아래 몸 풀고 있는 산 비 그친 뒤 젖은 자는 구름을 타고 앉아 조촐한 식탁을 마련한다. 길 떠나는 자여, 깨닫지 못한 꽃잎 하나 흔․들․리․면 아직은 깨어 있는 꽃 마른 눈물 데워질 때까지, 산 너머 꽃잎 피는 소리에 녹아드는 그리움 안타까움만 쌓이는데 잴 수 없는 것은 약속 어긴 마음뿐인가. 잠시 즐거워하는 자여, 그래도 오늘만은 꽃잎 지는 소리에 거짓은 진실을 드러내고 발자국은 그림자를 문지른다.
그대 만나게 되면
홍 승 우
가슴속에 묻어 둔 말을 화롯불에 구워 그대 만나게 되면 얼굴이 붉어질까, 더듬거리게 될까.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 그대 만나게 되면 가슴이 천둥칠까, 바닷물에 씻겨질까.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 그대 만나게 되면 멍청이가 되네, 한 줌의 먼지가 되네.
길 홍 승 우
가는 걸까 저기 저 강물 따라 불빛 따라 우리 마음 한데 모으고 눈물나는 모국어 찾으러 숨죽여 세월 따라 가는 걸까. 가다가 바람은 멍석을 펴고 꿈을 말린다.
가는 길 멀지만 흙을 털며 터벅터벅 가야 한다. 목화밭 앞까지, 어둠의 저 끝까지 불을 밝히면 아직은 쓸쓸한 낙도여, 그대 꿈 반짝여오는 햇살이 따사롭다.
가야 한다. 저 산 너머 바다 건너 구름 위 하늘까지 사랑은 구름을 타고 선반 위를 갈무리하느니 저기 저 꽃 좀 봐, 이 소리에 누구더라, 고개 숙여 감추는 얼굴 햇볕도 숨죽여 돌을 쓰다듬고 있나니 흩어진 말 돌아오지 않는다.
슬픔의 찌꺼기를 찾으러 가야 한다. 가위로 허전함을 잘라내고 누구더라, 무딘 칼날로 갈참나무 잎사귀를 따내는 자는. 발 머문 곳 취기는 묻어나고 빈손을 흔들며 풀잎 앞뒤에 묻힌 생애를 닦아낸다.
내 마음의 노래
홍 승 우
내 마음을 친구의 맑은 눈 속에 들여보내 짭짤한 눈물 자아내곤 혼자 깔깔 웃다가 영원히 썩지 않고 그대로 화석으로 남을까 보다.
친구의 방울 울리는 목소리를 따라 깊고 아늑한 가슴으로 들어가 살살 갈빗대를 긁는 장난을 치다가 무료해지면 보숭보숭한 솜털을 뽑아 갈빗대와 갈빗대 사이,가늘고 야무진 줄을 매달아 그네를 뛰는 모습 아름다워라
튕겨나오는 그넷줄을 되받아 정을 튕기면 야금야금 아파오는 가슴 언저리 혼자서 울고, 나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 되어 슬픈 이중주로 너와 나는 마음의 강을 사이에 두고 비올라를 켜면서 울어야 할까, 웃어야 할까.
기대
홍 승 우
나는 여기 있고 너는 멀리 있다. 나의 눈에는 너의 마음만이 보인다. 내가 기다린 젖빛의 엽서에도 봄이 풀어내고 있는 온기로 짜릿한 설레임이 수 놓여 있을까?
<약력>
▲1955년 경주 안강 출생. ▲1995년,문학평론가인 서울대 불문과 오생근교수에 의 심사로「동서문학」신인작품상에 시 '새' 외 4편 당선으로 등단. ▲시집 『식빵 위에 내리는 눈보라 』(나남출판사) 있음. ▲<낭만시> 동인.
[연변시총서<시향만리>제2집 수록시]이상번 시-'친절한 아버지'외4편
1. 친절한 아버지 - 일본 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생각 함 이 상 번
“아빠 이 글씨는 무슨 글씨야” “음- 그것은 글씨가 아니란다.”
성북동 심우장의 봄은 북향의 마당 어귀에 쌓인 눈 더미 속에 있었다. 만해와 그 유일한 혈손 어린 한영숙과의 대화다. 가갸 거겨만 배운 그의 딸 영숙이 처음 보는, 괴상한 일본글을 보고 묻는 말에 대한, 만해의 대답이다. 참으로 친절한 아버지다.
“아빠 선생님한테 야단맞았어요, 선생님이 이름표를 잘못 썼다고 일본글로 써야 한다며 고쳐 줬어요" "아가 그것은 글씨가 아니라고 하지 않더냐”
친절한 아버지와 그의 딸은 이 짓을 1944년, 6월 29일 그가 죽을 때 까지 했다고 한다. 냉돌방에서 그가 죽을 때 까지가 아니라, 아마 저승에서 조차 그 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히라가나를 보고 그의 딸아이에게 그것은 글씨가 아니라고 가르친 만해, 친절한 아버지의 투박한 한글 이름표를 소학교 선생이 일본글로 고쳐오면 다시 한글로 고쳐 달아 준 만해,
어찌 글씨뿐이겠는가. 글씨 속에는 민족이 살아 있고
슬픈 내 조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과 혼이 서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에다가와 조선학교여 너희 영원함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니더냐.
*일본 에다가와 조선학교에 대한 변
본의 아니게 우리 동포들이 일본에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한 것은 전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잘못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잊히어져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에다가와 조선학교는 일본채류 동포들이 현재 60여 년간 도꾜도 쓰레기 덤이를 일구어 학교를 지어 우리 글을 가르치며 운영 해 오던 중 갑자기 부지 일체를 내어 놓으라는 바람에 뜻있는 분들의 도움으로 재판에서 현 시가의 1/10에 해당하는 땅값(한화 17억)을 지불하고 사용하라는 판결을 받아낸 후 국내에서 에다가와 조선학교 돕기 운동을 벌려 무려 1개월 만에 1억 원을 모금하여 전달(2007년 6월)하는 것을 보고 일본 얼론들이 호들갑을 떨었다고 함. 그런대 지금까지 에다가와 조선학교를 비롯한 대다수 조선학교의 지원은 북한이 어려운 가운데 지원해 왔다고 함. 남한에서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지원한 바가 없다고 함. 앞으로 남북이 형편대로 함께 지원하여 일본에서 우리의 민족정신이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2. 겨레여 나는 바로 당신입니다. 이 상 번
한 사람이 바뀌면 만인이 바뀔 수 있다.
우리 흰 서리 내린 신 새벽이 오기 전에 경건히 제주 노릇을 하자. 굴건 제례복도 챙겨두고 유세차 모년 모월 반만 년 세월 고스란히 제문에 올려놓고 상향을 하자.
신단수도 불러 세워놓고 묘향산과 구월산 피양도 불러 놓고 산둥반도 무씨사당 갈석산도 불러 놓고 마늘 냄새 싱싱한, 단군왕검의 그 할미도 불러놓은 채, 신라, 가야, 백제, 동예, 옥저, 활기 넘치는 고구려, 부여, 발해, 태봉, 후백제, 고려, 조선의 슬픈 노을 한 자락과, 그 神내 나는 무당들과 임금들 모두 부복시켜 참회의 제례를 올리자.
그리고 마지막 왕조들의, 그 임금으로 하여금 목 놓아 울게 아주 내버려 두자. 제관이 될 수 없는 공화국의 아들들은 물푸레나무로 소금을 쳐 가며 힘껏 내리치자. 무수한 귀신들 달라붙은 거창한 명분 찾던 그들에게 제관은 따귀를 치자. 몹쓸 것들! 조국과 민족을 팔아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것들! 스스로 죄인임을 모르는 것들! 조국의 허리를 동강 낸 것들! 제관이란 제관은 나와서 푸른 손바닥으로 따귀를 치자.
세월은 가도 진실은 남는 것, 우리 모두 산비탈의 눈 폐이고 코 베어 진 석불처럼 맨몸으로 비를 맞자. 거추장스런 옷이란 옷 모두 벗어 버린 채, 이냥 빈 마음인 채 죄 없는 석불 앞에 서서 통일을 빌어 보자. 우리 시대 통일 시대 너와 내가 손을 잡고 통일을 이루자.
뭉치면 죽어 질 것이다. 흩어지면 살아 질 것이다. 뭉쳐서 흩어지고, 흩어져 강강술래를 하듯 손에 손을 잡고 뭉치고 흩어지자.
겨레여 나는 바로 당신입니다.
3. 뒷물 이 상 번
언제부터인가 나는 뒷물을 한다.
수행하는 선사들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여자도 아닌 내가 하루에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큰 일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뒷물을 한다.
출입이라도 하는 날이면 의례히 조절을 하던가, 그도 아니면 빨리 집으로 가야한다는데, 또 다른 내가 사로잡히게 된다. 남의 집에 가는 날이며, 내가 쓸 맑은 수건 하나를 준비해야 한다. 수건을 가져가지 못한 그런 날에는 그 집의 수건 하나 말끔히 빨아주고 나온다.
내가 뒷물을 하게 된 것은, 하루 종일 아니 몇 날 몇 일이고간에 앉아서 수 십 년 동안 도장도 찍고 딴 짓도 하는, 피나는 노동의 댓가로 얻은, 선사들이 생사를 거는 좌선의 그 삼매에서 얻은, 또 다른 댓가 하나가 치질 이였다고 하는데, 좌탈입망* 한 저 20세기의 선지식 한암 선사*가 찰찰 흐르는 개울에서 뒷물을 했듯이 나는 그 무서운 선홍의 혈흔! 처음엔 아주 미지근한 물에 좌욕을 하듯 조심스러웠지만, 이제는 인도 사람처럼 평상심이 되어, 거시기가 다 떨어져 나갈듯한 얼음물에도 포동포동 소리가 나야, 그 날은 시 같은 것도 좀 세련된 것이 나온다.
우리의 역사도 험절했던 적 참으로 많았지만 지나고 보면, 다 잊고 사는 것이 우리다. 그 처참했던 수모와 굴신들 앞에 쓰러지고 또 쓰러졌던, 우리네 아픈 질곡의 계단을 내려서서, 우리가 언제 그랬던가.
내 출타에서 그 찝찝했던 과거 청산들, 우리는 뒷물을 모르는 잔인한 역사 앞에서 그 찝찝한 것들을 안고 가던지, 달고 가던지 피 칠을 하고 가던지 간에, 슬픈 역사 하나에 우리는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좌탈입망(坐脫入忘); 앉은 자세로 육신을 벗고 입적 하는 것.
*한암선사(한巖禪師) (1876-1951)한국 근현대 불교사에 경허, 만공에 이은 대 선지식으로써 초대 종종을 지냈다. 만해를 비롯한 올곧은 수행자를을 많이 길러 냈다. 1925년 경 견성 후 서울 봉은사 조실로 주석할 무렵 친일 승려들이 도움을 청하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차라리 내 천고에 저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촌(三春)의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강원도 오대산(월정사.상원사)으로 들어간 후 27년동안 동구밖을 나오지 않은 채 수행과 후학을 양성하다가 좌탈입망(坐脫入忘)의 성성함을 보인 채 입적에 든 스님.
4. 龍牙長城 이상번
언제 부터인가 그들은 우리를 보고 상쾌한 웃음을 보낸다. 천하 절경이니 가경이니 온갖 수사를 다 동원하여 우리를 찬송한다. 어떤 배운 것들은 한 수 더 떠서 우리의 속도 모르고 금수강산이라고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영하 삼십 도가 넘는 추위를 살점 하나 없는 뼈마디로 버텨 온 것이다. 영상 사십 도가 오르내리는 불볕 뙤약볕을 이겨 온 우리를 보고 금수강산이라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그들도 우리가 절벽 위 소나무 한그루 올려놓듯 벼랑 틈바귀에서 들꽃 한 송이 간수 하듯, 홀로 설 수 없는 담쟁이 넝쿨 한 줄 받아 주듯이, 소위 그들도 언제 부터인가 간에 깡마른 지사거나 미련한 투사 하나씩은 숨겨두고 살 일이다.
5. 겨울 서어나무 이 상 번
가산 산성에 가면 외성과 내성 사이 중성이 있다.
이 겹성들이 둘러쳐진 산에는 서어나무가 유난히 많다. 하늘도 가물거리는 내 외성 사이 건강한 겨울 서어나무가 가랑이를 벌리고 하늘 향해 서 있다.
물구나무를 선 채 좌탈입망 한* 등은봉* 선사처럼 가랑이를 벌린 채 수피가 눈처럼 고운 겨울 서어나무가 아무렇게나 저렇게 부끄럼도 없이 가랑이 사이로 내 외성에서 겹쳐오는 겨울바람을, 온통 스쳐가게 해도 괜찮다는 건지.
성곽 구멍사이로 몰려다니는 모양새가 꼭 아궁이에서 나온 쥐새끼 같은 먹새 떼들 우르르 부끄럼도 없이, 저렇게 산란 시켜도 된다는 것인지.
*좌탈입망(坐脫立亡); 선 자세로 입적(죽음)에 드는 것. *등은봉 선사(鄧隱峰 禪師); 생몰연대는 미상이지만,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선사의 제자 임.
물구나무를 선 채 입적 함. 전등록의 내용을 각색한다면 아래의 내용일 것이다. 『 등운봉 선사는 평소에도 괴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고래(古來)로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예,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꾸러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자 등은봉 선사는 갑자기 물구나무를 하더니 그대로 입적해 버렸다. 그래서 여러 대중들이 달러 들어서 누이려고 하는데 마치 무쇠가 땅에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비를 하긴 해야 하는데 다비를 할 수가 없었다. 이 기괴한 소문이 삽시간에 고을 전체로 번져 나갔다. 마침 비구니스님으로 있던 속가 누이동생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이 기이한 광경을 목도한 누이동생은
“오라버니는 살아생전에도 괴각스런 행동만 일삼더니 죽어서 조차 사람들을 계속 골탕을 먹이고 있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하면서 오빠를 꾸짖으며 꼼짝하지 않고 서 있던 오빠의 시체를 손가락으로 “톡”치니, 시체가 사르르 넘어갔다고 함.』禪師들의 세계를 알 수 없긴 하지만 누이동생이 한 수 위라고 한다면 참으로 위대한 상상들이 펼쳐 질 것이다.
<이상번(李相繁) 약력>
* 1954년 경북 청송 출생 * 경운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영남대경영대학원 수료. * 1987년 대구.경북 민족문학회 창립회원(현,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 전신) * 1990년 우리시대젊은 시인들 제4집에 “망월동 가는 길” “무등산 소낙비”등으로 신인상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이사) * 현대불교문인협 대구.경북지회 (고문) * 대구참여연대 운영위원 *선진한국연대 공동대표 * 전, 대한불교청년회 중앙회장 및 만해사상실천선양회 공동대표 역임
|
[연변시총서<시향만리>제2집 수록시]김창제 시-'폐냉장고' 외4수
폐냉장고
김창제
냉동된 고뇌가 헐겁게 녹아내린다 누군가의 발길질에 줄기세포가 가짜다 한때 단단한 먹거리들을 먹어 치우고 싱그런 과일향기로 사랑했다 곰삭은 김치 입맛나는 행복이었지 벌름벌름 느낌표를 배설해내고 목 고개 끄덕끄덕 내 몸 가눌 수 없지만 콘센트를 빼버리면 어떡해 내가 선택하지 못한 사랑 선택 당해진 삶은 꽁꽁 냉동된 그대로인데 바람 벌름벌름 들어오고 귀 기울여도 소리 나지 않는 아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에 집착하지 말라 불필요한 전원을 끄고 자유의 코드를 꼽아라 누구의 발길질에도 아프지 않는 자유 이제 사랑은 얼지않는다
공드럼
김창제
탱탱한 자만은 굴려버려 비워내는 습관을 가져봐 터질 것 같은 가슴앓이는 이제 그만해 제멋대로 굴러온 녀석 사랑을 운반하는 그릇으로 홀가분한 그리움을 견디기 위해 몸을 가볍게 해봐 탱탱한 겉모습으로 비어있다는 것을 누가 알아 귀 기울어 두들겨 봐야 알지 반듯한 상표 다시 누구의 사랑이 될래 한 덩이 붕붕 바다 위 부표 생의 경계를 지우는 사각의 담장 슬픈 장맛비 덮는 골함석지붕 날카로운 다가내의 편가름으로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이제 가벼워진 무게로 고요한 사랑을 얻었다 내 몸 가눌 수 있는 빈 공간을
나사
김창제
내 마음에 박혀있는 나사 조이면 조일수록 서로가 단단해지는 힘 산이 푸르름을 당기고 하늘이 구름을 당기고 꽃이 아름다움을 당기고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면서 조이고 있네. 매냥 오른쪽을 겨냥하면서 당기고 있네 세월에 헐거워진 사랑을 조이고 조금 행복한 일상을 조이고 그리운 곳으로 추억을 당기네 꽃이 꽃에게 사랑이 사랑에게 숫나사는 암나사에게 암호 같은 나사산으로 비벼간다 안개의 윤활유로 산은 매끄럽게 대지에 박히고 꽃은 붉게 나뭇가지에 박히고 내 사랑 내 심장에 들어박히고 조이면 조일수록 단단해지는 믿음으로
못
김창제
너 뾰족한 입술로 사랑 깊숙이 못질을 하고 서로가 서로를 확인했다 단단한 살점에 인연을 접하고 못의 생명이 시작 됐다 서로의 만남이 언젠가는 삭아지겠지만 삐거덕 삐거덕 소리 나는 사랑은 싫다 영원히 살 것처럼 버티고 서있는 가당찮은 놈 날카로운 주둥아리 뭐 별거야 심장을 겨누는 소리 망치의 두근거림 통쾌한 점령은 내 영역이 되어 못대가리의 저항에도 용서는 없다 꼿꼿이 박힌 채로 삭아질 세월을 기다릴 뿐 운명이라 여기며 녹슨 죽음을 준비하라 누군가의 한번의 망치질이 내 무덤이 될 줄은 날카로운 심장을 겨누는 소리 몸통 벌겋게 내려앉아도 끝을 향한 당당한 집념 계속 박히고 싶다 실컷 두들겨 맞고 싶다 영영 식지 않는 그대의 심장을 향해 날카로운 못이 되고 싶다
농우소 길들이기
김창제
배내소이라 어디어디 다래나무 코뚜래끼고 콧구멍 벌름벌름 가난이 가난에게 아야 어디어디
새벽달 논빼미에 이랴 어디어디 청오이 등굴손에 막내둥이 잠꼬대에 철지나는 구름에게 이라 어디어디
꽁보리밥 젓가락에 이랴 어디어디 개똥먹은 들꽃에게 꺽꿀가재 더듬이에 운명이 행복에게 가난이 가난에게 이랴 어디어디
“아부지 인자 밥 묵고 합시다”
<약력>
○ 경남 거창 출생 ○ 영남 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자유문학』『대구문학』신인상 등단 ○ 시집 『고물장수』,『고철에게 묻다』『녹 그 붉은 전설』 발간 ○ 한국문인 협회. 국제펜클럽협회, 현대시인 협회, 죽순문학회, 솔뫼문학회 회원 ○ 현 건국철강 대표
[연변시총서]<시향만리>제2집 수록시]신지혜 시-'밑줄' 외4편
밑줄
신 지 혜
바지랑대 높이 굵은 밑줄 한 줄 그렸습니다 얹힌 게 아무것도 없는 밑줄이 제 혼자 춤춥니다
이따금씩 휘휘 구름의 말씀뿐인데, 우르르 천둥번개 호통뿐인데, 웬걸? 소중한 말씀들은 다 어딜 가고
밑줄만 달랑 남아 본시부터 비여 있는 말씀이 진짜라는 말씀,
조용하고 엄숙한 말씀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인지요
잘 삭힌 고요,
空의 말씀이 형용할 수 없이 깊어, 밑줄 가늘게 한번 더 파르르 빛납니다
허공을 조심하라
신 지 혜
조심하라 존재를 만날때는 가령 꽃속의 허공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나비속 허공에 눈멀지 않도록 나프탈렌 흰 종이 속에 발목이 잡히지 않도록 하루종일 금단증상에 혼을 빼앗기지 않도록
나는 어느날, 너의 허공에 빠져 너의 블랙홀을 지나 다시 죽음으로써 빠져나오지 않았던가.
때때로 나는 ‘나’라는 허공에 빠져 현실과 멀어질 때 있다 나는 지금도 침몰중이다 이것은 내 허공 속의 가장 사소로운 일, 나는 무의식의 단층을 한 계단씩 오르내린다 내가 나를 아주 처음인 듯 낯설게 답습한다 허공의 백팔 단계가 나를 황홀하게 빨아들인다 내 더러운 흔적이 남지 않게
저 고요 속에도 낙뢰가 있던가
신지혜
한낮�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