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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토피아의 시학과 신인간의 역사철학적 방향
2008. 1. 14.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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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토피아의 시학과 신인간의 역사철학적 방향 -최동호-
1. 생태계의 파괴와 인간 존재의 부정
20세기가 마감되면서 심각하게 다가오는 세계사적 쟁점은 자연파괴와 생태계 변화이다. 자연의 파괴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인간성의 부정이다.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인간으로 하여금 테크노피아의 세계를 눈앞의 현실로 만들어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자연 생태계의 파괴와 인간 존재의 부정이라는 심각한 위기 상황을 초래케 한 것이다.
한국 문학에서 산업 공해와 자연 재해가 제기된 것은 70년대 중반 성찬경의 시「공해 시대와 시인」(1974)이나 김용성의 「사해 위에서」 (1976)나 김원일의 「도요새에 관한 명상」(1979)등의 소설에서 비롯되었지만 민주화 투쟁에 밀려 중심 과제로 떠오르지 못했다. 그러다 90년대 고비로 김지하의 「생명과 환경」(1990)등은 물론 김성곤의 「문학생태를 위하여」(<<외국문학>>25호,1990)를 비롯한 비평적 관심의 부각, 그리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몰락과 더불어 중요한 사회. 문화적 쟁점이 되었으며, 20세기를 마감하는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어느 문제보다도 인류의 미래를 가늠하는 심각한 논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까지 거론된 생태문학의 문제점은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생태문학이 지나치게 현장적이고 소재적이며 산발적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전통사상과 현대의 생태문학론이 긴밀하게 접맥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2. 에코토피아와 신인간의 근거로서의 인간
<21세기를 향한 에코토피아>는 다음과 같은 문제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자연’이라는 이항 대립이 ‘기술개발/자연파괴’라는 또 다른 대립항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가치중립적 사고로의 전환이 제대로 발휘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김지하는 <생명과 환경>에서 한 걸음 나아가 <생명 가치의 구체화를 위한 방향>(1994.12)에서 인간의 ‘영성’을 강조하고 있다. 영성을 ‘생명체 한 단위의 포괄적 통일성과 세계와의 연관’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이는 남다른 통찰력이라 할 만하다. 또한 생명의 과정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조화’와 ‘통합’인데, 1998년에는 전통 풍유도를 바탕으로 한 문화 운동 단체 ‘율려학회’를 발족시키고 ‘율려’란 제대로 숨쉬고 노래부르고 춤추고 배설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마음이 변하지 않고는 생태계를 지킬 수 없고, 문화가 변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바뀔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신인간주의 문화운동’을 펼치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김지하가 제창하는 ‘율려운동’이나 ‘신인간주의 문화운동’은 크게 다음 두 가지 점에서 검토의 대상이 된다. 하나는 그의 논리적 근거가 복고주의적 지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아심을 갖게 만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적 삶을 회복한다는 명제가 거창하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허황되게 들린다는 것이다. 그는 ‘정복자. 착취자로서의주체가 아니라 우주 만물을 책임감 있게 보살피는 주체로서 인간, 우주적 책임을 가지고 두루두루 이롭게 하는 성숙한 인간이 바로 홍익인간이고 신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홍익인간이란 말이 남용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말하고 있다. 자신이 강요하는 국법을 내세워 신께 맹세한 정의를 지키지 않은 크레온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오늘의 인간은 어떠한가. 18세기 영국 시인 포오프는 <<인간론>>에서 인간이란 어두우면서도 지혜롭고 거칠면서도 위대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포우프는 인간과 우주 사이의 어떤 연관을 상정하고, 이 연관이 깨어질 경우 인간이 얼마나 오류에 빠질 수 있는가를 역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 이후의 사유하는 존재로서 이성적 인간을 끝내는 니체에 이르러 신의 사망을 선고하고 자연의 정복자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면서 인간들의 찬란한 기계 문명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동양의 인간관은 어떤 것일까. 동양에서는 인간은 하늘과 자연을 매개하는 절대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동시에 천지와 공동 창조자로서 인식되고 있다.
우선 [중용]에서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과 만물의 타고난 본성을 이원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있다. 인간이 자극함으로 만물과 하나가 된다면 천지의 화육 운동에 동참하는 공동 주체가 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근거가 자연이라는 사실은 인간과 자연이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인간이 자연을 파괴할 수 없으며 자연 또한 인간을 부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천지가 만물을 화육하는 운동에 동참하는 인간은 창조적 주체이지 파괴적 주체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오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만물을 화육하는 자연으로부터 왔고 하늘이 그 주재자가 된다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 동양적 사고는 물론이고 한국적 사고의 근원이 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국인들에게는 有와 無는 물론이고 生과 死 또한 하나로 사고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며, 음양의 화육 운동 속에서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이상적 목표로 삼고 있다.
서화담도 「천기」라는 시에서 조물주의 뜻에 따라 만물이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物物相依’의 사상을 깊이 천착할 때 구극의 진리인 자연의 빛을 통찰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만나는 인간은 탐욕으로 일그러지고 마침내 자기를 부정하는 복제 인간을 만들어 낼 위기에 처한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오늘의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동양적 인간형에 대한 서양적 인간형의 승리이며, 현실 상황은 20세기적 물질문명의 추구에어 비롯된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3. 신인간의 역사철학적 의미
자본주의를 출동시킨 인간의 탐욕은 가공할 만한 기술 공학을 발전시켜왔다. 기술 공학이 국가 경제력으로 나타날 것이며, 이 경쟁에서 패배한 국가는 지구촌의 변방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가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이다. 그것은 기술공학의 발전과 더불어 생명 공학의 발전이 끝내는 인간 복제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21세기의 승자>>란 저서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자크 아탈리는 최근 가상 미래 소설 <자본주의를 종식시킨 사랑 이야기>에서 21세기의 인간복제는 가상 복제와 생물학적 복제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라 예견하여 우리에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다. 인간을 3차원의 가상현실에서 재현한 가상 복제 즉 ‘클론이마주’(clone-image)는 5-10년 후면 실용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재화 가치가 소멸하고 자본주의는 2037년 12월에 종말을 고한다고 쓰고 있다. 2005년 안팎의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유전자 정보를 컴퓨터에 보관하게 될 것이라는 예견 또한 결코 예견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생물학적 복제는 물론 가상 복제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인간은 과연 어떻게 자신을 조절해야 할 것인가.
한스 요한스가 기술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로서 “신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우리가 신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궁극적으로 돕는 길이다”라는 명제를 내세우고 주장했던 책임의 원칙에 대한 의미를 우리는 되짚어봐야 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에서 책임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순간의 행위가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까지 윤리학의 범위를 확장시켜야 한다는 그의 지적은 기술 권력의 지배하에 파괴되는 자연 생태계는 물론 인간의 인간성 파괴에 직면한 오늘의 우리들에게 절박한 호소력을 전달해 준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은 <중용>에서 말하는 지극한 인간 그리고 타고난 본성을 극진히 할 수 있는 인간의 실천 의지와 상통한다. 사람의 타고난 본성과 만물의 타고난 본성을 극진히 하여 천지가 만물을 화육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도울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타고난 본성에 대한 책임의 원칙을 실천하는 인간일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유일 절대의 고유성을 지키며 자연 생태계와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인류사를 전개한다는 것은 21세기를 조망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신인간이 가져야 될 역사철학적 의미가 될 것이다. 김지하류의 신인간이 매우 거창한 것이기는 하지만 현실성이 제거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현대사에서 인간 참구는 앞으로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더욱 힘든 탐구의 도정을 거쳐야 될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책임과 결하되지 않을 때 그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자각이야말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신인간의 존재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문학적 탐구의 목표가 된다는 사실을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시와 생태적 상상력
한국 현대시를 중심으로 -이은봉-
1. 서정시의 본질과 생태적 세계관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생태환경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곧바로 반정부 활동으로 간주되었고, 생태환경운동이 체제 내화되고 합법화된 것은 노태우 정권에 와서이다. 1990년 겨울 계간 <<창작과 비평>>과 <<외국문학>>이 생태환경의 문제에 관한 특집을 싣고 있다. 1991년 10월 격월간 <<녹색평론>>이 출간되어 생태환경의 문제를 구체화하는 데 깊이 있게 작용해왔다.
1990년 이전의 생태문제에 대응한 시는 이성부의 「불도저」(1976), 김명수의 「가죽장갑」(1980), 김준태의 「콩알 하나」(1981) 등이 있다. 필자의 경우 「남새갈기」(1979), 「라면봉지의 노래」(1984)등의 시를 통해 생태환경의 문제에 대한 나름의 고뇌를 담아내려 하였다.
서정시의 세계가 본원적으로 생태적 친연성을 함유하고 있는 특징을 보여주는 것은 본래 이성과 감성이 미분화된 세계, 즉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가 혼융하는 세계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사의 경우든 개인사의 경우든 주체와 객체가 변별되지 않던 시대는 자연스럽게 원초적 생명력이 발휘되던, 그리하여 인간에게는 더없이 행복했던 시대였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행복과 관련하여 라캉은 언어 이전의 세계, 무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의 세계를 설정하고 있거니와, 따라서 좀더 자세히 따져보면 서정시가 추구하는 세계는 본질적으로 어떤 영성, 신성성, 신비성이 상존하고 있는 세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서정시의 언어들이 지시적이고 외연적인 의미보다는 주술적이고 내포적인 의미, 즉 모호하고 다의적인 의미를 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마땅하다. 이런 점에서 서정시의 세계는 곧바로 생태적 이상과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최근의 생태학의 논리에서 동양의 物心一如, 主客一致, 無爲自然으로 상징되는 일원론적 세계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도 결국은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생태적 상상력에서는 모든 생명현상을 순환구조로 받아들인다. 생태계의 기본원리를 순환구조로 받아들이는 인식은 심지어 생명현상과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일체의 무기적 존재들에까지 총체적으로 포괄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순환을 거듭하는데, 이는 살아 있는 것들이 죽음을 통해 그 자신을 다른 살아있는 것들에게로 돌려주는 원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수많은 종교적 제의에 함유되어 있는 것처럼 죽음과 부활의 순환 고리는 하나의 긴 호흡, 끊어지지 않는 긴 숨결로 연결되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소멸과 생성, 밤과 낮, 봄. 여름. 가을. 겨울 등의 순환 고리로 생명현상의 기본원리를 삼고 있는 것이 생태적 상상력의 핵심내용인 것이다.
마지막/ 불게 부서지던/노을도 지쳤나/땅거미 지고//
내 마음 가득히/어두운 강물 밀리고//
희끗한 머리칼마다/수천개 달은 지고//
어지럽던 마지막/하루의 끝//
어둠 속에 싹트는/새 천지의 시작
-김지하 「하루의 끝」 전문-
이 시에서 ‘노을’, ‘땅거미’, ‘어두운 강물’, ‘수천 개의 달’은 끊어지지 않는 긴 숨결로 연결되어 있어 곧바로 새 천지의 시작으로 순환되고 있다. 시간의 전개와 더불어 실제로는 저녁과 아침, 끝과 시작이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는 가운데 일상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깨닫고 있는 것이 이 시의 주요 내용이다.
후기산업사회 혹은 정보화 사회라고 하는 오늘의 현실에 이르러서는 순환구조로 생태환경의 원리를 파악하는 의식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는 생태계의 모든 현상을 순환구조로 파악하는 인식이 인간의 생산행위가 자연의 순환질서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과거의 농업자본주의 시대, 농촌경제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지금의 시대는 자본의 축적을 농업 생산양식에 의존하던 시대가 아니며, 따라서 순환의 질서가 거의 무의미해진 시대이다.
2. 공해 및 오염문제를 보는 눈
전기 자본주의든 후기 자본주의든, 산업자본주의든 정보자본주의든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는 하나의 역사적 체계이다. 따라서 생태환경의 문제가 하나의 역사적 체계인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역사적 알레고리를 함유케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근대적 생산양식이 이룩한 최대의 난센스는 순화구조로서의 생태환경을 함부로 파괴시킴으로써 인간과 자연 사이에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적대적 모순관계를 갖도록 했다는 점이다. 자연히 자본주의적 산업사회로의 이행을 앞당기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바 있는 자연과학의 논리에 주목하게 된다. 자연과학의 발전과, 그에 따른 기술의 발전을 가리켜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기술의 근대성이라고 하거니와, 그것이 좀더 정신의 영역에서 작용해온 바 있는 해방의 근대성과 상호 착종되어 왔음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때의 해방의 근대성이 항상 자기만족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었으며, 반중세적(반기독교적)이고 인간 중심적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한 점은 해방의 근대성과 더불어 기술의 근대성이 볼테르, 루소, 뉴턴 등에 의해 체계화된 계몽주의 사상의 원류로 인식되고 있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인간은 본래부터 세계(객체)와 얼마간은 분리되어 있는 존재, 그리하여 자아(주체)의 현존을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존재이다. 에덴 신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이러한 인간의 기본조건과 관련하여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자아와 세계의 이러한 분리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이성이라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감성과 더불어 이성은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속성 중의 하나라고도 해야 마땅하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일정한 정도는 자연과의 분리가 불가피한 존재이다. 물론 자연과의 분리가 적정의 수준을 넘어 일방적인 이용후생의 관계로 전락하게 되고, 그리하여 적대적 모순의 관계로 귀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 인간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채로 자연을 이롭게 활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호간의 조화를 위해 끊임없이 자연을 돌보고 가꾸어온 존재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정신영역에 작용하는 것도 이성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고 보며 기본적으로 인간과 자연은 그 동안 상호 의존하면서도 대립하는 관계를 취해왔던 셈이다. 물론 인간과 자연이 실제의 모든 세계에서 언제나 이처럼 평면적인 일대일의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지만 인간이 없어도 자연은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더 큰 자연의 일부로 포서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생상양식하의 오늘의 사회현실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이루는 이러한 근원적인 관계를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무차별한 생산과 소비 위주로 진행되고 있는 도시 중심적 삶의 파괴와 착취의 배후에는 무엇보다 생산과 소비의 면에서 근대인의 생태환경에 대한 무지와 능멸의 무의식이 도사려 있다. 따라서 저 스스로 절멸의 조건을 만들고 있는, 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 오늘의 생태환경의 현실에 대해 깨어 있는 시인들이 시적 언어의 촉수를 들이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 시단에서 살펴볼 수 있는 생태환경 시는 대강 두 가지 과제의 축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바른 정립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낙청이 말하고 있는 “그때그때의 공해나 오염문제, 특히 특정 지역의 자연보호 같은 단기적인 과제와, 인간과 자연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장기적인 과제”가 다름 아닌 그것이다. 단기적 과제와 장기적 과제, 이 두 가지의 “과제를 매개해 줄 중간항이 빠져 있어 지엽적인 개량과 원대한 이상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결과가 되기 쉽다. 현존의 세계체제에서 계급갈등, 성차별, 인종주의와 같은 문제들이 어떻게 생태환경의 문제와 맞물려 있으며, 그렇게 맞물려 있는 문제들이 한반도에서는 어떻게 분단체제라는 독특한 하위체제를 통해 작동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백낙청은 이 두 가지 과제 사이의 중간항과 관련하여 매우 복잡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실제로 씌어지고 있는 우리 시에서 살펴볼 수 있는 생태적 상상력은 대강 이 두 가지 차원 안에 포섭되어 전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승호의 「공장지대」는 얼마간 생태환경문제에 대한 단기적 과제와 장기적 과제 사이의 중간형이 종합적으로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이 시는 인간과 자연의 바른 관계 정립과 관련해 볼 때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과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 즉 공해나 오염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재무의 「아무도 호수의 깊이를 모른다」는 공해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설득력있는 감동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고여 있는 물 웃자란 풀이 썩고/냄새는 떼지어 몰려다닌다
벌써 며칠째 소로를 따라 걸어온/달빛 무안한 얼굴로 되돌아간다
기미와 화장독 오른 그녀의 낯짝에/가래를 뱉는 돌을 던져본다
그러나 그녀는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소란은 이내 가라앉고
우르르 몰려간 냄새에 밟혀/먼 마을의 꽃들이 진다
아무도 호수의 깊이를 모른다
이시는 목소리가 한층 차분하고 서정적이어서 감동의 밀도를 강화시켜 주기도 한다. 객관적 시점에서 주관적 시점으로, 다시 주관적 시점에서 객관적 시점으로 이동되고 있는 시점의 이동도 이 시에서는 환경오염의 실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시의 경우는 일종의 목적시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만큼 심각한 정서를 담을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가장 주목이 되는 것은 일련의 신경림의 시이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한낮인데도 사방은 저녁 어스름처럼 어둡고/골목에는 고추잠자리 한 마리 없다.
바람에서도 화약 냄새가 난다./종소리에서도 가스 냄새가 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
꽃과 노래와 춤으로 덮였던 내 땅/햇빛과 이슬로 찬란하던 내 나라가
언제부터 죽음의 고장으로 바뀌었는가./번쩍이며 흐르던 강물이 시커멓게 썩어
스스로 부끄러워 몸을 비틀고/입술을 대면 꿈틀대며 일어서던 흙이
몸 가득 안은 죽음과 병을 숨기느라/웅크리고 도사리고 쩔쩔매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죽음의 안개가 이 나라의/산과 들을 덮게 되었는가.
쓰레기와 오물로 이 땅이 가득 차게 되었는가.
-신경림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시는 이 땅 이 나라, 아니 전지구가 보여주는 생태환경의 현실에 대한 시인의 생생한 탄식과 경고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이 시로부터 독자가 생태환경의 현실에 대한 그의 예언자적 지성을 읽는 것은 당연하다.
주지하다시피 생태적 상상력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좀더 나은 관계, 바른 관계를 모색하는 데 초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좀더 나은 관계, 좀더 바른 관계라는 것이 자연과 인간의 참다운 조화와 균형의 관계, 즉 참다운 중용의 관계를 뜻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이 존재하는 모든 생명 현상과 사물들 사이의 좀더 본원적인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의 생태적 노력이 이들 시에서처럼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과제, 즉 당장의 공해나 오염문제에 주목하고, 그것의 폐해를 고발하고 질타하는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고려하여 좀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노력 또한 강력히 요구되고 있다는 뜻이다.
3. 욕망 그리고 모성과 동심
자본주의하에서는 욕망이 있는 그대로 분출되는 생산력 위주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 경제적 효용가치를 위주로 하는 삶의 방식을 취할 때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욕망을 최대한 부풀릴 수밖에 없다. 욕망은 본래 인간으로 하여금 쾌락을 추구하도록 하고, 그와 관련된 대상들을 소유하도록 부추기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근대에 와서 비롯된 생태환경의 파괴도 또한 이러한 욕망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에 있어서도 오늘의 사회현실이 내포하고 있는 생태환경의 문제를 욕망의 관점으로 비판하고 있는 시가 적지 않다. 유하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3」을 보자. 서울의 압구정동은 자본주의적 대중문화가 첨단을 달리고 있는 곳,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부풀러진 욕망이 노골적으로 방출되고 있는 곳이다. 그가 보기에는 “캐럴이 섹슈얼하게 파고드는 이, 색 쓰는 거리”, “온갖 젖과 꿀과 분비물 넘쳐 질퍽대는 그 약속의 땅”이 다름 아닌 압구정동인 것이다. 이를테면 압구정동은 무엇보다 과잉욕망에 따른 온갖 소비와 환락이 난무하고 있는 곳인 셈이다.
그와 관련하여 우선 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엄청난 소비와 환락을 위해 일찍이 이곳 압구정동에서 배나무들이 “대량 학살당”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캐럴의 톱날에 무더기로 벌목당한 이 도시의 겨울이여”등의 구절에서 확인이 되고 있다. 겉으로는 “젖과 꿀이 메가톤급 무게로 굽이치는” 곳이지만 “영하의 보도블록 밑”에서는 “우우우 무수한 배나무 뿌리들이 신음소리를”내는 곳이 압구정동이라는 뜻이다. 시인 유하로서는 오늘의 생태환경의 파괴가 과잉욕망 및 그에 따른 소비와 환락에 의해 야기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본래는 욕망도 인간의 본능에 뿌리내리고 있는 정신작용 중의 하나이다. 지향의 방향에 다라 나날의 삶을 육체에 굴복시키는 면도 있어 육체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만은 않다. 욕망의 실체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따라서 인간의 본능과 관련하여 그것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은 욕망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쾌락에 대한 것(육체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고에 대한 것(정신에 관한 것)’으로, 이들은 공히 갈망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 두 가지의 욕망은 서로 억압하는 가운데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많다. 전자는 흔히 말하는 본능과 관련된 것으로 식욕이나 성욕 등과 연결되고(일차적 욕망), 후자는 정신영역과 관련된 것으로 좀더 높은 차원의 숭고함이나 성스러움, 혹은 지혜(이차적 욕망) 등과 연결되기 마련이다.
라캉은 실제의 세계에서는 죽음만이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라고 한다. 결국 모든 욕망은 그것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자아와 세계를 동시에 억압하기 마련이다. 욕망의 구조를 究明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옳게 교육하는 일에 그리고 바르게 초극하는 일에 좀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하나이면서 둘인 정신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은 감성과 더불어 상호 조화와 혼용을 이룸으로써 자아와 세계 사이에 사랑과 慈悲, 仁의 정신을 실현해온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성이 있기에 인간은 오히려 원초적 욕망, 즉 과도한 식욕과 성욕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고, 감성과의 연결고리를 튼튼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이상으로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세계, 즉 생존을 위한 갈등과 투쟁의 세계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자연의 세계는 앞에서도 말한 바 있는 일차적 욕망의 세계, 즉 식욕과 성욕에 기초한 이른바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不可近 不可遠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다름 아닌 이에서 연유한다. 참다운 의미에서의 자비와 사랑, 인의 실현과 관련하여 和而不同의 정신, 즉 하나이면서 둘인 정신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구체적으로 에콜로지를 실현하려면, 즉 자연과의 참다운 공동체를 실현하려면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들과 관련하여 인간은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생태환경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도, 자연의 관계를 본원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이로부터 출발을 해야 마땅하다.
조태일의 「분꽃씨」는 다름 아닌 그러한 맥락에서 좋은 시의 하나이다.
햇볕 수줍어 몸 오므렸다가/해 지면,빠알강/노오랑/화알짝 웃던 그대.//
밤새도록 무슨 사연 있었길래/꽃새끼, 검은 새끼/때 되어 쏟는가./
씨젖 가득 채워 낳는가.//
이웃집 할머니,/시어머니, 친정어머니/다리 틈새에서 함박웃음으로/
손자 받아내듯 받는 이 있다./다칠세라 조심조심 받는 이 있다.//
오메, 내 새끼/오메, 내 새끼/하며.//
조태일은 이 시에서 분꽃씨를 대하는 시인의 마음, 즉 공경하는 마음과 愼獨의 마음을 기본적으로 자비의 마음, 사랑의 마음, 인의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때의 이 마음, 즉 사랑의 마음은 당연히 모성의 성격을 보여준다. 모성으로서의 사랑이 이 시의 주된 정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인데, 물론 그것의 정서적 구조에 대해서는 좀더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
모성으로서의 사랑은 일단 그것이 인간의 본원적이고 원천적인 마음, 있는 그대로의 원시의 마음이라는 점에서 동심과 그대로 통할 수밖에 없다. 동심은 유년의 마음이고, 유년의 마음에 상대적으로 자아와 세계의 괴리가 심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순수한 듯에서의 모성과 동심의 마음으로 자연을 대할 때 결코 생태환경의 문제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모성의 핵심에는 무한대의 자비와 사랑, 인의 정신이 자리해 있고, 동심의 핵심에는 조건 없는 동화와 중용, 중도의 정신이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자식과 같이 대하는 것이, 그리고 어머니와 같이 대하는 것이 다름 아닌 모성과 동심의 핵심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생태환경문제와 관련하여 이러한 마음에 구태여 이름을 붙이자면 아무래도 모성과 동심의 생태적 상상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과제이기는 하지만 전 지구적 생태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바른 뜻에서의 이른바 모성과 동심의 생태적 상상력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성과 동심의 생태학적 상상력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근원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시는 나희덕의 「어린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
내 앞에 꼬리를 쳐들고/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지금쯤 내 어린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울면서 젖을 짜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
언뜻 보면 이 시에는 단지 모성만이 강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러한 면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모성의 마음으로 세상(자연)을 바라보게 되면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어린것들”로, 동심을 지닌 것들로, 모성의 마음이 필요한 것들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다람쥐 새끼 등 모든 자연의 존재가 동심을 지닌 것들로, 즉 모성의 마음이 필요한 것들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모성의 마음으로 보면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난만한 그 눈동자”를 갖고 있는 것이 자연의 모든 존재인 것이다.
시인 나희덕이 이러한 마음을 갖는 것은 다람쥐 새끼를 비롯한 자연의 모든 존재들로부터 “내 어린”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내 어린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일체감으로부터, 즉 사랑으로부터 모성은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특히 마지막 행인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라는 구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구절에는 일종의 안도감이 함유되어 있는데, 그 안도감이 물웅덩이의 송사리떼가 무사한 것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생태환경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의 출발과 더불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근대와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생태환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사람들이 실제로 모성과 동심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살아가기까지에는 장구한 시간과 거시적인 기획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이는 깊이 있는 인간정신의 탐구와, 그것의 늠름한 실천이 여전히 요구되어야 마땅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 동안의 인간정신의 탐구가 언제나 생태환경의 문제와 상호 침투하는 가운데 존재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경계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 자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언급이 오늘의 생태환경의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 주체도 끝내는 인간이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되어도 좋다. 어긋난 생명의 순환 질서를 바로잡고, 그에 따라 삶의 구조를 재편하는 일도 역시 인간에게 주어진 일이라는 애기이다. 생태적 상상력과 관련하여 인간의 의미를 지나치게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본질적 조건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선현들이 남긴 수많은 교훈에 대해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도 당연히 이와 무관하지 않다. 거듭 窮究하고 실천할 따름이다.
생명시에 나타난 생명활동의 양상과 의미
-생명들 사이의 섭식관계를 중심으로- *신덕룡*
1. 들어가는 말
신화적 인식이란 자연계의 모근 사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사유방식이다. 모든 것은 신의 섭리로 이루어져 있고, 그 속에서 생명활동을 함으로써 삶의 가치와 의의를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사치를 어떻게 실현하는가에 의미를 둔다. 그러나 과학적 인식은 지식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사고방식이다. 근대이후 계몽 프로그램이란 세계를 주술에서 해방시키는 것, 즉 신화를 해체하고 환상을 지식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여기서의 지식은 도구적 이성이다. 자연에서 배우는 것 역시 자연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방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차이는 생명들 사이의 섭식관계에도 똑같이 드러난다. ‘생명을 지닌 것’들을 가치순위로 볼 것이냐 아니며 자연의 섭리로 볼 것이냐는 것이다. 생태계파괴가 인간의 삶마저 위기로 몰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인간중심적인 삶의 미래에 대한 공포가 밀려오고 있다. 이런 위기에 직면해서 새롭게 제기된 것이 세계에 대한 신화적 인식이다.
1990년대 이후 우리시에 생태학적 인식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 되었고, 이에 걸 맞는 문학적 성과가 있었다. 이런 성과 중, 목숨을 담도로 한 생명체 사이의 갈등과 충돌의 모습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2. 생명에 대한 연민
식욕은 모든 생명체가 공통적으로 지닌 자연적인 본성이며 필수적인 욕망이다. 이런 욕망들 사이의 충돌을 바라보는 인간의 입장은 어떠한가.
①코뚜레에 꿰인 소들이/제 넓적다리만한 소나무 둥치에 매여 있었다..
끈적이는 한여름 햇살이/소나무 그림자를 길게 늘여 놓은 오후,/
주위엔 더 뜯어먹을 게 없어/제 고삐를 매어놓은 소나무 껍질까지 뜯어먹은/
소들이 幻의 시간을 어금니에 물고/잘근잘근 되씹고 있었다./
함께 산책을 나갔던 어린 딸아이가 물었다./
-아빠, 저 소나무 밑둥으로 흐르는 게 뭐죠?/
-소나무가 상처를 치료하는 약인 셈이지./
가파른 언덕길을 되짚어오는 길,/멀뚱거리던 소들의 착한 눈과 껍질 벗겨진/
나무 밑둥을 회칠하듯 흘러내리던/허연 송진이,/자꾸만 내 발에 밟혔다.//
②징그럽기는커녕 오히려 측은함 속에서, 나는 그 기운 없는 할머니 같은 뱀이 기어가는 것을 비켜보았다. 개구리들이 빨리 겨울잠에서 뛰어나와야 저 핼쑥한 뱀도 기운을 차릴텐데, 하긴 뱀을 살리느냐 개구리는 살리느냐 하는 문제는 나에게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때로는 지게 작대기로 뱀의 입 안에서 개구리가 뛰어나오게 하고, 때로는 개구리나 들쥐 삼키는 뱀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
봄날의 뱀은 독이 바싹 올라 뱀비늘에서 윤이 나는 가을날 뱀들과 다르게, 풀이 죽어 스르르르 기어간다. 땅에서 배를 뗄 수 없는 한스러움의 무게로, 끝없이 먹어야 산다는 슬픔의 길이로, 봄날의 뱀의 혼자서 길 없는 돌밭길을 스르르르 간다.
①의 시를 보자. 이 시는 소나무 껍질을 뜯어먹는 소의 착한 눈과 벗겨진 껍질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흐르는 송진을 대비시키면서 섭식관계에 개한 윤리적 고민을 표현하고 있다. 소가 뜯어먹은 일이나 나무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시인이 “주위에 더 뜯어먹을 게 없어”라고 하듯, 일부러 다른 생명체를 해롭게 하는 행위도 아니다. 소는 살기 위해서 소나무 껍질을 양식으로 삼았을 뿐이다.
②에서 문제는 ‘뱀을 살리느냐’ 그 먹이가 되는 ‘개구리를 살리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를 대하는 화자의 시선과 행위는 일정하지 않다. “때로는 지게 작대기로 뱀의 입안에서 개구리를 뛰어나오게 하고, 때로는 개구리나 들쥐 삼키는 뱀을 그대로 내버려” 두기도 했던 것이다.
개구리는 개구리의 삶이 있고, 뱀은 뱀대로의 삶이 있다. 이들 삶의 관계는 자연의 섭리이고, 생명체 자체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삶을 실현하는 필연적인 과정 속에 구체화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에 대해 일정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무의식적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무의식적 믿음은 근대의 이념체계가 보편화됨으로써 강화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즉, 인간 중심의 이데올로기는 생명체에 대한 도구적 조작을 당연시하도록 했고, 자신의 생존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자연 생태계의 변형과 파괴를 일상화했다. 그 과정 속에서 여타의 생명체를 관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데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여타 생명체의 행위에 개입할 수 있다는 믿음의 안쪽을 살펴보자. 첫째, 약자(소나무, 개구리)에 맹목적인 연민이다. 이는 측은지심이나 자비심의 발로라 할 수 있으리라. 이런 성정은 인간과 여타의 생명체와의 본성적 차이를 드러내는 근거로서, 이해관계를 떠나 나와 남이 하나가 되는 자기초월적 성향이다. 이런 성향은 무의식으로 강자보다 억압받는 약자의 편에서 선한 행위를 하고 싶다는 도덕적 성정으로 이어진다. 둘째, 문화적 여과에 따른 심리적 반응으로 설명될 수 있다.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한 우리 설화나 민담에 뱀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뱀이 징그러운 형상 때문에 교활하거나 사악한 존재로 드러나기도 했지만 풍요와 다산의 상징성을 지닌 존재, 집안의 재물을 관장하는 신이거나 윤화사상과 결부되어 환생한 부모 또는 조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래 이후 뱀은 철저하게 사악한 존재로 규정되어 핍박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셋째, 근대 이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경제적 효용가치의 측면이다. 이는 철저히 인간 중심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선택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으로 보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쪽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기도 하고 또 이의 실현을 위해 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도록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본성에 의한 활동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경외감을 지니는 일이다. 본성에 의한 활동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기에 인간의 어떤 도덕적 판단도 개입할 수 없다. 생명의 질서로 드러나는 자연은 자애로운 것도 위험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을 제외한 생명체들 사이의 본능적 이해나 목적끼리 충돌할 때 인간이 여기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필요하다. ‘멍청하다’거나 ‘착하다’거나 ‘측은하다’는 감정은 자연스런 심성의 발로이지만, 이에 따른 도덕적 행위를 선택하기 위해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생명활동에 굳이 인간적 의미를 부여하고 또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문제는 섭식관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다. 오히려 연민을 가지고 자연의 질서에 섣부르게 개입하고자 하는 욕망을 경계하는 일이다. 인간 역시 생명의 질서 속에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3. 반성적 주체로서의 인간
생태학적 세계관의 대두와 더불어 종교의 차원에서 인간중심적 삶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일신앙인 기독교가 이교적인 애니미즘을 몰아내면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고, 자연 위에 인간이 서게 됨으로써 자연파괴가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신학자들이 ‘인간중심적 자연 이해’에 대한 반성을 중심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위치를 새롭게 모색하고 있다. 첫째, 예수는 자신의 메시지를 자연계에서 얻은 풍부한 비유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둘째,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관리의 의무를 부여받은 존재이기에 인간은 자연을 잘 보호, 유지할 의무가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인간의 차별성에 대한 인식은 불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불교 역시 인간을 六根(눈. 귀. 코. 혀. 몸. 의지)으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로 본다. 근의 원어가 인드리야로서 인드라 즉, 신의 권능을 의미한 듯 인간은 철저히 자유의지적 존재다. 주체로서의 인간에 반해 물질적 자연물들은 六境(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라는 인식대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인식주체로서의 인간과 인식대상으로서의 자연으로 구별된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 의지적 작용을 가할 수 있고 자연은 필연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인간과 자연이 기본적으로 얼마간 분리되어 있다는 사유의 밑바탕에 인간이 유일한 주체적 존재, ‘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는 사실과 이에 다른 도덕적 책임이 전제되어 있다. 우월한 존재이기에 보다 열등한 존재에 재한 돌봄과 살핌, 욕망의 통제가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간 역시 여타의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체와 충돌한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자연에서 취하지 않는다는 것, 이에 대해 어떤 책임감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자신의 생존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동물이건 식물이건 부득불 살생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런 사실에 대한 긍정과 동시에 인간과 다른 생명체 사이의 윤리적 실천의 명제가 제기된다. “생살을 뜯어먹고도 우리는 즐겁다”고 하듯, 쾌락만 추구하는 욕망을 제어하는 노력이 그것이다. 현실을 받아들이되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한 절제, 中節, 不殺生戒, 타 생명에 대한 책임의식 등의 규범이 요구되는 것이다. 쾌락을 위해 살아 있는 생명을 빼앗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앗는 것이 본성적이고 필수적인 생명활동에 국한된 경우에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절제의 윤리이기도 한다.
4. 생명실현의 양상과 의미
자연 생태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삶을 살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영향관계는 때로는 공생관계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비정한 섭식관계로 나타나기도 한다. 생태계의 구조인 생산자-소비자-분해자의 순환관계가 구체적인 섭식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원칙상 생물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원칙상’이란 전제가 붙어있는 것은 생명들 사이에 죽고 죽이고, 약탈하고 억압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고 또 이런 관계가 생명공동체 안에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생멸활동에서 나타난 생존경쟁에서 희생이 당연한 것이고, 희생은 생명의 본분을 다하는 것인가. 손진은의 시, 「봄동배추를 씹을 때」를 보자.
봄동배추를 씹을 때/바스락거리는 건 어린 추의들의 연둣빛 마음/
세상 어느 것과 비교도 안 되는 그/단 맛 우물거릴 때 입 속에서 파들거리는 건/
발전소처럼 윙윙거리는 추위거나 한밤,/
가슴에 끌어당겼을 먼 마을 불빛, 잔기침처럼 쏘아올린 별들/
그건 또 슬픔과 두려움, 놀람과 상쾌 같은/육체의 서랍 속에 있던 감각들/
버려진 밭자락에서 뽑아온/오소소 잎맥에 돋은 소름이 혀 끝에 만져지는/
파리한 배추 답사 온 일행과 함께 씹을 때/입안에서 잘게 부서지는 그 엽록소 속엔
가르릉대는 어린 추의들과 사우다/
마침내 순해진 고 짐승 어여 와 어여 와! 손주이듯
다독이는 할머니의 다정 같은 게 들어 있다/구체적으로 부서지면서 배추는/
그 연둣빛 마음을 씹는 이들 내장에/핏줄 속에 심는다, 하여/
입술에 묻은 쌈장 쓱 닦으면서 우리는/바스락거리는 생 하날 들고 나오는 것이다/
마치 장바구니이기나 하듯!
이 시에서 보면, 인간과 식물 사이의 섭식관계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친화적 관계임이 드러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다른 생명체를 살리는 역할로 바꾸면서 그 속에서 거듭남으로 받아들이는 봄동배추의 마음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의 활동이 생명의 유지와 종족의 전파라는 목적아래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란 의미에서다. 그것이 일차적인 목적이라면, 자신의 죽음을 다른 존재의 생명으로 바꾸는 일은 또 다른 목적 즉 자기구현의 모습일 것이다.
생명활동의 참다운 목적은 ‘제 완성’ 즉, 자신의 본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다. 삶의 목적이 하찮은 욕망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를 완성하는 것에 있다면, 그 외에 다른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이것 역시 인간에게 똑같다. 자기실현이란 무엇인가? 맹자가 말하는 盡心 즉, 인의예지의 본성을 충분히 발현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공자가 말하는 지천명과 이순의 단계를 거쳐 나이 70에 이르러 마음대로 하여도 거리낌 없는 不踰矩의 경지에 이르는 길과 크게 다름이 없을 것이다. 세속적 욕망을 초월하여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가 일치되는 경지를 말한다. 이는 불가에서 수행자가 불성을 찾아 묵묵히 수행하며 드디어는 부처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과 유사한 맥락에서 파악될 것이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본능적인 욕망 즉 식욕을 초월한 것이요, 이를 통해 나를 남이 하나가 되는 즉 세계와의 조화와 공존을 이루는 삶을 의미한다. 인간과 여타의 생명체를 비롯한 우주 만물이 수평적 관계 속에 자신의 삶을 실현해간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그 질서 속에 자기를 맡기려는 것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욕망일 것이다. 이런 욕망을 삶 속에서 찾고, 실현해 가는 존재가 자연스럽게 도래하는 육체의 소멸을 편안하게 맞아들일 수 있음은 물론이다. 묵묵히 자기를 완성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자기실현의 유일한 방식인 셈이다. 이럴 때 죽음은 단순한 존재의 소멸 이상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예의를 차리지 않을 수 없다.
5. 마무리
생명체들 사이의 섭식관계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비록 비정함 모습일지라도 그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섭식이 다른 생명체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자신의 행위가 무절제한 쾌락으로 추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경계심, 생명의 자기구현이 보다 큰 생명의 질서를 만들어 가는 일이며, 이는 다른 생명체와의 공존의 틀 속에서 가능하다는 인식이 나와야 한다. 나아가 과도한 인간중심주의를 버리고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물활론적 인식이 요구되지만, 더욱 절실한 것은 미래 삶에 대한 공포를 바탕으로 한 실천적 행위이다. 왜곡된 이성중심,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합리적 이성을 회복하고 발현하는 일이다. 따라서 책임의식과 돌봄의 실천이 다만 자연의 모든 것을 지금보다 세심하게 이용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데 있지 않음이 명백하다. 오히려 환경파괴와 인간의 존엄성 부정 즉 존재의 부정과 생명의 내재적 가치의 부정이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새롭게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가 최근의 생명시에 드러남은 다행스런 일이다. 자연의 신성이 인간의 존엄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 우리 삶에 대한 반성적 인식,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려는 철학, 종교적 모색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반성적 인식이 삶과 밀착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행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세계관의 변화가 곧바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행위의 문제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에서다. 생명들 사이의 섭식관계를 살펴보는 일도 이런 작업의 일환이다.
-초록생명의 길2, 시와사람(신덕룡), 2001. 내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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