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 손성호
대학 입학 후 처음 맞이한 방학이었지만 시골집엔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아들 얼굴이 많이 아쉬운지 어머니는 내게 줄 반찬거리를 챙기면서도 내내 툴툴거렸다. 과 학회 공부가 일주일에 한 번씩 잡혀 있었지만 빠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단지 2학기에 내야 할 등록금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아버지를 향한 제법 거친 잔소리가 집에 내려 온 일주일 내내 계속 되어 불편했을 뿐이었다. 걱정말라는 아버지의 큰소리엔 언제나 그랬듯이 믿음이 가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1,2만원 정도는 아버지에게, 등록금이나 방세같이 큰돈은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있었다. 처음엔 자신만만하게 큰소리 뻥뻥 치다가도 막상 돈을 치러야 할 날이 코앞이면 변명만 늘어놓는 아버지를 지금껏 숱하게 봤던 탓이다.
터미널엔 시내버스를 타고 가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아버지는 오토바이 뒤에 반찬통을 야무지게 묶고서 시동을 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오토바이가 큰길에 들어서자 슬쩍 집쪽을 보니 여지없이 옥상엔 어머니가 서 있었다. 답답함과 짜증, 괜한 설움에 눈물이 나왔다.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고속버스에 오르려는데 아버지는 지갑에서 5만원을 꺼내 건넸다. 언뜻 본 지갑속엔 달랑 주택복권 1장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에게 용돈 받았다며 괜찮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어 버린다. 등록금 걱정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차에 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후반기에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해 겨울방학 때 아버지가 농협을 그만 둔 걸 알게 되었다. 친구인 조합장이 다음 조합장으로 아버지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고 삼향에서 현경으로 발령을 내는 바람에 계속 근무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머니는 조합장은 친구도 아니라며 화를 내면서 다음 번 출마를 적극 권했지만 정작 아버지는 당시 조합장을 오히려 두둔하고 나섰다. 오토바이로 다니기에도 먼 출퇴근 거리와 계속되는 친구의 견제에 결국 사표를 쓰고 만 것이다. 문제는 3천만원이라는 빚을 안고 퇴직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현경으로 가기 전까지 연쇄점 책임자였는데 퇴직 후 실시된 감사 결과 그 엄청난 빚을 떠안게 되었다고 한다. 실은 부책임자였던 조합장의 동생이 횡령했는데 아버지에게도 관리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했다. 논밭을 팔고, 결혼한 큰누나와 취직한 작은누나가 도와서 급한 불을 끄고 조금 돈을 남겨 아버지는 포클레인 중 제일 작은 걸 사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중장비라곤 전혀 몰랐지만 할부금과 생활비 정도는 벌었다. 간혹 품삯 대신 닭 몇 마리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자신감을 얻은 아버지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한 단계 위의 포클레인으로 바꾸면서 기사까지 고용했다. 남들에게 '사장님' 소리는 들었지만 기사 월급과 할부금을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또 빚만 남기고 말았다. 그때 아버지 나이 오십대 중반이었다.
어릴 적 누구 아버지가 최고인지를 두고 동네 친구들과 말씨름을 했다. 이장이 제일 높다길래 부장인 우리 아버지가 그 위라고 우겼다. 동네에 부장이 어디 있냐며 반격이 거셌지만 양복을 입고 농협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녀석들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다. 우리집에만 있는 TV와 자전거, 오토바이도 한몫했다. 최고와 제일 부자가 다른 뜻이라는 걸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진 몰랐다. 다른 아버지들과는 달리 욕도 안하고, 신문도 보고, 퇴근하면서 전병 과자도 사오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믿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이후론 그러지 못했다. 퇴직 후 아버지가 하는 일은 대개가 어설퍼 보였고, 세상사나 처세술을 이야기할 땐 그냥 흘려 들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가족 모두를 힘들게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아버지의 지갑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어렴풋이나마 복권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남들처럼 '한 방'이라 폄훼하고 싶진 않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과 책임감, 자존심 등등에 아마도 힘들었을 게다. 운에 기댈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복권을 사면서도 탓했을 것도 같다. 어머니 말대로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예의 바르고, 우스개도 멋드러지게 하고, 기억력도 좋아 주변 사람들에겐 멋진 양반이었지만 내겐 무능력하고,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던 어머니가 사촌 누나에게 돈을 빌렸다. 입대를 결심했다.
그때 이후 아버지의 지갑을 들여다 보지 않았다. 복권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여섯 명의 자식이 결혼하고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나름 가정을 꾸려 나가자 아버지는 좀 편안해 보였다. 아버지에게 품었던 원망은 점차 옅어졌다. 내게서 아버지를 보는 순간이 많아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늙고 병든 아버지가 가엾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빼 닮았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진 않다. 어머니가 그럴 땐 특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