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족보 수권에 수록할 사진을 찍기 위해 2차로 사진전문가인 남표 편집장을 2019년 10월 10일 10시에 만나기로 하였다. 시간이 좀 남아서 농협하나로마트에 가서 우리 집 출입문 건전지를 사고 있었는데, 누군가 인사말을 건너서 누군가하고 보니 오늘 만나기로 한 남표 종보편집장이었습니다.
바쁜 일정을 쪼개서 운전해 주기로 한 찬균 형님을 만나서 한참을 달려서 제왕산 기슭 왕산면 곰자리 묘소에 도착하였습니다. 묘소에서 150m 정도 떨어진 간이주차장엔 태풍 미탁 영향으로 땅이 패여서 돌이 울퉁불퉁 있어서 주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장풍득수(藏風得水)라 하여 바람은 막고(감추고) 물을 얻는다는 곳에 묘소를 쓰면 좋다는 내용을 본 적 있었는데 오늘 관심을 두고 보니 전에 미처 보지 못하였던 개울도 보았습니다. 묘소에 도착하니 벌초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봉분은 도래석을 둘러서 문제가 없었으나, 묘소 앞 제절은 산돼지 운동장이 되어 있어서 사방이 울퉁불퉁 불규칙으로 되어있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8대조 德元 公의 묘비가 원래는 강릉비행장 부근에 있었는데 6. 25때 전투과정에서 묘비에 총탄을 맞아 흔적이 여러 군데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 역사의 비극을 웅변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릉시 노암동, 강릉시 하시동 녹두정, 강릉시 사천면, 강릉시 교동 등으로 산재된 묘소를 2003년, 2005년, 2006년 즉 3년에 걸쳐서 이곳 강릉시 왕산면 곰자리(熊座)에 모셨습니다. 정성껏 모셨는데 경계를 잘못 알아서 다른 사람 소유의 땅을 침범하게 되어서 그쪽의 이의제기로 결국은 그 땅을 사게 된 사연도 들었습니다.
◎ 정선 전씨 44세 46세 [ 강원 강릉시 왕산리 산 204 ]
◎ 정선 전씨 45세 47세 48세(생부) 48세, 49세[ 강원 강릉시 왕산리 535 ]
입강릉(入江陵)한 10대조(정선 전씨 45세)의 묘소로 보면서 장손 문중으로 묘소 수호가 이어지지 않고 작은 집인 우리 문중이 묘소를 수호하게 된 연유를 찬균형님과 함께 추측해 보았습니다.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우리문중이 묘소를 수호하면서 오랜 시간이 흘렀고 산재된 묘소를 다니면서 벌초하고 전사를 지내면서 묘소 수호의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장손 문중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였는데 지금은 함께 하지 못하여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족보작업을 하면서 알게 된 옥계 찬주 집안과 병산집들인 강릉농고 출신 예비역 소장 전영진 장군 집안들도 참여대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핵가족화로 인하여 11대조, 10대조, 9대조, 8대조, 7대조, 6대조에 대하여 추모하는 마음이 희석되어지는 것 같아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11대조 묘소는 문중일에 헌신한 종인들에 의해서 충주댐 수물에 대응하여 이곳으로 이장하게 되었음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묘소 사진 촬영 후 종보편집장님이 뒤에 제왕산이 있고 앞이 탁 트여 있는 남향이라서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장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덕담을 듣고 묘소 촬영을 끝내고 마당갈비에서 점심 식사를 하면서 독고성(전원윤)과 독고영재(전영재)에 대하여서도 어느 문중인지 궁금해 하여서 우리 문중임을 알려드렸습니다.
종보편집장님의 노력으로 강릉지역에 있는 채미헌파와 임하군파의 수권에 등재되는 묘소 사진 촬영을 마쳤습니다. 남은 장소는 강릉 성산면 오봉리에 있는 전공간 묘소와 양양에 있는 전공신의 묘소가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수권에 등재되는 사진설명에 도로명 주소를 넣으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아서 찾아보았으나 산에 있는 번지는 도로명 주소가 아직 부여되지 않은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다만 옛 족보에 주소가 막연하게 표시되어 있는 것을 지번을 확실히 넣어서 실묘(失墓)되어도 찾을 수 있게 기록이 유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