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본성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
사람들은 어째서 마음이 뇌의 산물이고 뇌는 부분적으로 유전체에 의해 조직되고, 유전체는 자연선택에 의해 형성된다는 생각이 위험하다고 믿는 걸까.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가'에 관한 발견들에 입혀진 정치적. 도덕적 색깔들을 따져봄으로써 우리는 더 정직한 과학과 덜 두려운 지적환경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실에 입각해 어떤 가설을 세우는 것이-가치중립적인-제3의 레일이고 그것을 건드리면 죽는다고 한다면, 진실을 찾기란 더욱 어렵다. 양육에 대한 연구는 이 점을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다. 수많은 연구들이 부모의 행위와 그 자녀들이 보이는 양상 사이의 상관관계를 측정하였다.
이를테면 부모가 아이들을 때리면 아이들은 자라서 폭력적인 사람이 된다거나 대화를 많이 하면 아이들의 언어기술이 좋아진다는 식이다. 대부분의 육아업체와 정부정책은 이런 상관관계를 부모들에 대한 책임으로 돌리면서, 아이들이 탈선하면 부모를 비난한다. 하지만 상관관계가 반드시 원인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환경뿐만 아니라 유전자도 물려준다.
자녀와 대화를 많이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의 뛰어난 언어능력은 단지 말을 잘하는 부모를 만든 그 유전자와 동일한 유전자가 아이들에게도 말을 잘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양부모와 유전적으로 관련이 없는 입양아동들 대상으로 하는 정확한 연구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그러한 상관관계의 원인이 유전자의 결과인지, 양육의 결과인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개는 그러한 상관관계가 공통의 유전자를 반영하는 것일 가능성조차 터부시된다. 발달심리학에서는 검증은 커녕 그러한 가능성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무례함으로 여겨진다.
유전적 특징을 거부하는 네가지 두려움
첫째, 불평등에 대한 두려움이다.
"마음은 빈서판이다"라는 주장에 강한 호소력을 부여하는 것은 0=0 이라는 단순한 수학적 사실이다. 모든 인간이 빈서판으로 출발한다면 어떤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적힌 서판을 가질 수 없다. 반면에 인간이 풍부한 마음의 능력들을 지니고 세상에 태어났다면 이런 능력들은 사람마다 다르게 작동할 수 있다. 즉 어떤 마음의 능력은 특정한 사람이 다른이 보다 더욱 잘 작동할 수 있다.
이것이 차별과 억압, 우생학, 심지어 노예제도와 인종 학살로 연결지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혀 불합리한 추론이다. 많은 정치저술가들이 지적했듯이, 정치적 평등에 대한 서약은 모든 인간이 똑같은 복제품이라는 경험상의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 그들은 하나의 개인으로 존재하지 그들이 속한 집단의 통계적 평균치로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인 요구다. 또 그것은 사람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인간은 본성적인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라마다 정치적평등과 행복추구권 등을 헌법에 명시해 놓는다. 이러한 권리를 인식하는 것과 인간이 모든 점에서 구분되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둘째, 교정 불가능에 대한 두려움이다.
만약 인간이 이기심과 편견, 자기기만 같은 흠결들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면 정치개혁은 시간낭비로 보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뱃속까지 썩어있다면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도려낼 수 없다면 세상을 더욱 나은 장소로 만드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한한 가능성으로 1960~1970년대의 낭만적 혁명정치에 공감했던 사람들은 사회생물학에 대해 엄청난 반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사회생물학이 '인간본성의 한계가 사회제도를 제한한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인류역사에 제동을 걸고 있다고 격분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분노로 인해 사회생물학의 주장 그대로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물론 그것은 사회생물학의 핵심적인 내용도 아니었다. 우리는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가 실제로 개선되어 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망이 없는 새로운 인간을 키우거나 사회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서로 다른 개인들의 야망을 조율하고 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선해 왔을 뿐이다. 인간의 본성이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지 않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인간본성의 많은 양상들이 자유매개변수들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언어학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확인된 것이다.
이를테면 언어들은 영어와 정반대의 구 배열 패턴을 가지고 있지만 작동하는 논리는 동일하다. 인간의 도덕관념도 마찬가지로 자유매개변수들을 가질 수 있다. 즉,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른 사람들이 누구냐는 것이다. 도덕관념을 잘못 구성하면 자기 씨족이나 자기 마을 사람들끼리만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공감대의 울타리는 점점 더 확장되어 왔고 인류전체로 확장되었다. 세계 인권선언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철학자 피터싱어에게서 처음 시작된 이러한 견해는 우리가 일정한 기능의 틀 안에 묶여있다손 치더라도 그 기능이 외부로부터의 입력에 반응할 수만 있다면 사회의 개선과 도덕적 진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실증해 준다.
세째, 결정론에 대한 두려움이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뇌나 유전자, 혹은 진화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진화론적 충동이나 살인유전자 따위를 변론의 무기로 삼는다면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않겠느냐는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두려움은 두 가지 점에서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먼저, 나쁜 행동에 대한 가장 어이없는 변론들은 사실 생물학이 아니라 환경에 의지해 왔다는 사실이다.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인 메넨데즈 형제에 대한 첫 공판에서 그들을 풀어 주게 만든 아동학대 변론, 강간범들의 변호사들이 걸핏하면 들고 나오는 '포르노를 보고 그랬어요'식의 변론.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생물학적 결정론이 아니라 성장과정 결정론, 매스컴 결정론, 사회적 환경 결정론 따위의 결정론에서 나온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사람들은 뇌나 유전자에 대해 단편적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어떤 범죄행동을 하게끔 만드는 뇌 부위가 있다고 한다면 다른 한편에는 이러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우는 뇌 부위가 존재하고 행동에 대한 억제와 통제가 가능하게 만든다. 우리가 유혹의 시스템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서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조절장치, 즉 뇌의 억제시스템을 포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넷째, 허무주의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간의 모든 동기와 가치가 뇌 생리학의 산물임이 밝혀진다면 그리고 뇌는 다시 진화의 힘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동기와 가치 따위는 객관적인 실체가 없는 가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나는 내 자식을 진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이기적으로 나의 유전자를 선전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꽃과 나비와 예술작품도 진짜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어떤 유형의 빛이 나의 망막을 때리면 내게 쾌감을 보내도록 나의 뇌가 진화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이 우리가 신성시해 온 모든 것들을 까발려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은 행동을 설명하는 전혀 다른 두가지 방법 사이의 혼란에서 생겨난 것이다.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근인해명Proximate Explanation은, 내가 가진 뇌를 전제로 해서 무엇이 나에게 의미가 있는지를 언급한다. 그에 반해 최종해명Ultimate Explanation은 그런 생각과 느낌들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뇌를 나에게 부여한 진화의 과정을 언급한다.
진화란 인간 마음에 대한 최종해명이다. 이것은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과정이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품의 숫자를 극대화하는 능력을 기준으로 선택된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인간이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늘 그렇지는 않다.
이기적이고 반도덕적인 자연선택과정을 겪으면서도 복잡한 도덕관념을 지니고 큰 뇌를 가진 사회적 생명체가 진화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기적인 유전자가 꼭 이기적인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