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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북부 니더작센(Niedersachsen)주의 주도(州都) 하노버(Hanover)에서 태어났으며, 잉글랜드 북서부 컴브리아(Cumbria)주 웨스트몰랜드(Westmorland) 리틀랭데일(Little Langdale)에서 죽었다.1909~1914년 드레스덴 미술 학교(Hochschule fur Bildende Kunste Dresden)에서 배우고 전통 화법(畫法)을 익혔으나, 마르크(340)와 칸딘스키(886)의 영향을 받아 1917~1918년쯤에는 입체파(立體派, cubism)적 표현주의(表現主義, expressionismus) 작품을 그렸다.1차 대전(1914~1918년) 직후 기존의 미학적(美學的) 가치의 파괴를 추구하면서 새로 등장한 허무주의(虛無主義, nihilism)적 문예 운동인 다다이즘(dadaism)에 매료되었다. 베를린의 다다 화가 모임에서 회원 가입을 거부당하자, 하노버에서 독자적으로 새 모임을 이끌었다.1918년에는 추상화(抽象畫)를 그렸으며, 그 해 말부터 이듬해에 걸쳐서 일상 생활에서 쓰다 만 여러 물건(기차표⋅나무 실패⋅신문⋅끈⋅담배⋅우표 등)을 모아 콜라주[collage, 풀로 붙인다는 뜻으로 1912~1913년쯤 브라크(551)와 피카소(1111) 등의 입체파가 유화의 한 부분에 신문지나 벽지⋅악보 등 인쇄물을 풀로 붙였는데, 이것을 ‘파피에 콜레(papiers collés)’라고 불렀다.]와 릴리프(relief, 浮彫, 평면상에 형상이 떠오르게 하는 조형 기법. 돋을새김)를 시작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그의 시는 신문의 표제(標題)와 광고 문안, 그 밖의 일시적인 인쇄물을 합성한 것이었다.1919년 이러한 자신의 예술 활동 전체를 ‘메르츠(MERZ)’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상업(commerce)’이라는 뜻의 독일어 ‘kommerz’의 두 번째 음절에서 따 온 무의미한 단어이다.그의 콜라주 작품은 메르츠빌덴(Merzbilden, ‘메르츠 회화<Merz pictures>’)이라고 명명되었고, 나중에 자기의 모든 일상 활동과 자기 자신까지도 이 명칭으로 불렀으며, 1923년에 펴낸 잡지의 표제로 하였다.[Picture with Light Center](1919년, 뉴욕 현대 미술관)⋅[성좌(星座)](1920년)⋅[버찌](1921년)⋅[콤포지션(Composition)](1926년) 등 광고지나 기차표, 넝마 등으로 바른 콜라주 기법의 구성물로 널리 잘 알려졌고, 전위(前衛)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1920년에는 네덜란드 다다이즘의 활동에 참가하였다.1920년쯤에 일상적인 물건으로 성당을 지을 구상을 하였다. 하노버의 자기 집 안에 ‘메르츠바우(Merzbau<Merz building>)’라고 이름 붙인 입체적인 아상블라주(assemblage, 일상품을 한데 모아 구성한 미술품) 작업을 16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집 안에 다른 물건을 놓을 공간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작품들은 2차 대전(1939~1945년) 중에 파괴되었다.1932년에는 파리의 추상화 그룹 아브스트락시옹 크레아시옹(abstraction creation)에 참가하였다.1937년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Bayern)주의 주도 뮌헨(München)에서 퇴폐 미술전(頹廢美術展, Entartete Kunst<Degenerate Art>)이 열렸다. 이 전시회는 나치 정부가 선전용으로 마련한 현대 미술 전시회로, ‘볼셰비키(Bol’sheviki)와 유대인이 만든 퇴폐적인 작품의 문화 자료’라고 선전하였다. 전시된 작품 가운데 괴벨스(Paul Joseph Goebbls, 1897~1945, 독일 나치 정부의 선전 장관)의 명령으로 독일의 미술관에서 압수한 2만여 점의 현대 미술 작품은 극히 일부밖에 포함되지 않았다.슈비터스를 비롯하여 그로스(65)⋅네슈(100)⋅놀데(106)⋅딕스(188)⋅뭉크(421)⋅뮐러(425)⋅바를라흐(445)⋅베크만(501)⋅슐레머(653)⋅칸딘스키⋅코코슈카(932)⋅클레(967)⋅키르히너(975)⋅페히슈타인(1045)⋅피카소⋅헤켈(1137) 등 20세기 주요 화가들이 창조한 이른바 나치가 타락한 미술로 비난하여 ‘퇴폐적’이라고 명명한 작품들은 정신 병자들이 그린 그림과 나란히 전시되어, 악의에 가득 찬 언론과 독일 국민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이 전시회는 나치 지도자들이 찬양하는 예술 작품인 나치의 전형적인 주제인 영웅주의(英雄主義)와 사회적 의무를 전통적인 양식으로 다룬 예술 작품 전시회와 동시에 열려 뚜렷한 대조를 이루도록 꾸며졌다.1937년 나치 정부가 그의 작품을 퇴폐 예술로 규정짓자, 노르웨이의 수도(首都) 오슬로(Olso)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제2의 ‘메르츠바우’(1951년 불에 타서 없어졌다.)에 착수하였다.1940년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나치의 탄압을 피하여 다시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곳에서 뉴욕 현대 미술관(MoMA,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의 도움을 얻어 제3의 ‘메르츠바우’ 작업에 착수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메르츠바우 Ⅲ’은 잉글랜드 북동부 타인위어(Tyne and Wear)주 뉴캐슬어펀타인(Newcastle upon Tyne)에 있는 국립 종합 대학교 뉴캐슬 대학교(University of Newcastle upon Tyne)에 보존되어 있다. |
하노버에서 태어나서 드레스텐에서 미술 공부를 하였다. 공식적으로는 다다 운동을 거부하였으나 많은 다다 작가와 교류하였다. 그는 메르츠(잡지 이름)라고 부르는 그 자신의 다다를 창립하였다. (하노버에서)
미술은 각각 다른 것들과 관계지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종이 꼴라쥬를 위시하여 온갖 물건들을 붙이고, 결합하므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는 작품을 구축하고, 구성하여 만들었다. 이것을 메르츠 회화라고 하였다.
입체파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입체파보다 훨신 더 앞으로 나아갔다. 일상 생활의 쓰레기들을 모아서 미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그의 미술이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뿐아니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다. 나치가 퇴폐 미술로 분류하자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그의 미술은 환경미술, 라우센버그의 콤바인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1970년대에는 이태리의 아르테 포베라에도 영향을 주었다.
모두가 내다버리는 쓰레기가 예술작품이 될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보자. 아파트 단지나 주택가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쓰레기봉투를 열어서 예술작품을 만들 재료를 골라보는 상상. 아마도 예술작품은커녕 손도 대기 싫은, 말 그대로 쓰레기들만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어떠한가. 슈비터스는 창고에 있는 온갖 잡동사니 물건을 붙이고, 구성하고, 만들어서 작품을 만들었다. 슈비터스 미술을 메르츠(Merz)라고 한다.
정크아트(Junk Art)라는 예술장르가 있다. ‘정크’라는 단어가 뜻하는 대로 쓸모없는 물건, 폐물을 재활용하여 미술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대략 1950년대부터 활성화된 정크아트는 물질문명이 가져온 편리함 이면에 숨은 산업폐기물문제와 점점 더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는 생활쓰레기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의미에서 철학적인 부분도 포함하고 있다. 버려진 쓰레기에서 예술적 잠재력을 발견한 슈비터스는 이미 1910년대부터 이를 활용한 콜라쥬 작품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정크아트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슈비터스는 버려진 잡동사니가 당시 시대를 반영해주는 좋은 재료라고 생각했다. 버려진 티켓, 날짜지난 신문, 성냥, 당배꽁초, 철사, 낡은 옷가지, 나뭇조각 등 슈비터스에겐 그야말로 모든 것이 예술작품의 재료가 될 수 있었다
슈비터스는 자신이 거리나 쓰레기통에서 주워 모은 잡동사니로 만든 일련의 작품에 메르츠(Merz)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메르츠’라는 이름도 작품에 붙이려고 잡지에서 찢어낸 은행 광고에서 가져온 말이다. 슈비터스의 손에 의해 ‘선택된’ 폐품들이 작업과정을 통해 재활용된 후 여느 예술작품과 같이 동일한 진열방식으로 벽에 걸리면 실제로 예술작품이 되었다. 메르츠의 열거에서 현실세계와 예술을 하나가 된 것이다. 결국 메르츠는 생활용품이나 산업자재로 생산되었다가 사용 후 버려진 것들을 작품화하여 ‘고상한 예술의 벽’을 허물고, 또한 현대문명의 부작용을 비판하고자 했던 슈비터스의 발언이었다. 쓰레기가 가진 예술적 잠재력에 대한 슈비터스의 탐구는 ‘공간’으로 이동한다. 1923년 슈비터스는 자신이 거주하던 하노버 자택에 일종의 설치미술인 메르츠바우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집 아래위층을 관통하고 천정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영역에 온갖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끊임없이 덧붙여가며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나갔다
슈비터스의 메르츠 바우는 1943년 연합국의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사진으로만 남아있지만 후에 등장하게 되는 설치미술과 신체미술(실제 거주하는 집, 그러니까 살고 있는 사람까지도 작품에 일부라는 점에서)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