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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18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본문: 요한복음 14장 5절~11절
5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8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5. トマスが言った。「主よ、どこへ行かれるのか、わたしたちには分かりません。どうして、その道を知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6. 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は道であり、真理であり、命である。わたしを通らなければ、だれも父のもとに行くことができない。7.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知っているなら、わたしの父をも知ることになる。今から、あなたがたは父を知る。いや、既に父を見ている。」 8. フィリポが「主よ、わたしたちに御父をお示しください。そうすれば満足できます」と言うと、9. イエスは言われた。「フィリポ、こんなに長い間一緒にいるのに、わたしが分かっていないのか。わたしを見た者は、父を見たのだ。なぜ、『わたしたちに御父をお示しください』と言うのか。10. わたしが父の内におり、父がわたしの内におられることを、信じないのか。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言う言葉は、自分から話しているのではない。わたしの内におられる父が、その業を行っておられるのである。11. わたしが父の内におり、父がわたしの内におられると、わたしが言うのを信じなさい。もしそれを信じないなら、業そのものによって信じなさ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기쁜 소식입니다. 구원으로 인해 우리는 내세의 천국을 보장받을 뿐만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도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된 것을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그 임재의 복음이 우리를 사람답게 하여 인생 안에서 영생을 살게 하여 주시는 소식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복음이 약속한 것을 의지하며, 복음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때의 힘과 담력, 그리고 당당함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충만하신 능력으로 되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에 위로와 격려, 그리고 새로운 깨우침으로 회개할 용기와 기쁘고 새롭게 살아갈 소망이 넘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함께 주목하고 싶은 주제는 하나같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님께서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육신의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일하신 것처럼 예수를 믿는 우리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은 당신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이 두 가지 주제의 말씀을 묵상하며 제게 주신 주님의 마음과 생각을 이 시간 함께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소망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너무도 유명한 구절이며 약속이고, 너무도 많이 들었던 설교의 주제라서 아주 잘 아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너무 모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3년 동안 주님과 동행하며 배웠던 도마도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도마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내면의 고백일 것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말씀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서도 조차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오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합니다. 가족과 친구에 관하여,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알다가도 모를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도마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 이 약속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확실하게 기억하도록 주시는 말씀인 것을 믿습니다.
어떤 분들에겐 너무도 자주 들어서 식상할 정도의, 그저 그런가 보다 할 메시지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무리 강조해도 늘 새롭고 아무리 반복해도 부족함을 느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십니다. 하나님께 닿는 길이십니다. 성도인 우리가 걸어야 하고, 오직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이십니다. 이 세상에 많은 방법들과 노하우들과 지혜와 지식이 알찬 인생을 논합니다. 하지만 예수님만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오직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야 하고, 길로 삼아야 합니다.
길은 걷는 것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쉽지만, 쉽지 않게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거짓을 말하면 안 된다고 당연하게 가르칩니다. 그런 어른들이 때에 따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선 거짓을 말하는 것을 더 수월하게 여깁니다. 아이들에게 싸우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어른들은 아직도 전쟁을 준비하느라고 수 많은 돈을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남을 놀리거나, 욕을 하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어른들은 연일 서로의 약점을 들춰내는데 재미를 붙이고, 남의 허물을 소문 내는 일에 삶을 소진합니다. 왜 이러죠? 정말 바른 길을 안다고 하지만, 죄인으로서 그 길을 따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단 한번의 감동이나 감격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꾸준히 해야 할 과정입니다. 예수님도 그 길이 쉽다고, 편하다고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속량하셨지만, 그 은혜를 지키는 데에는 영적 싸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지난 신년성회에서 선교사님들에게 건강 운동을 가르쳐 주셨던 목사님의 말씀의 결론적인 요지는 꾸준함이었습니다. 간단한 운동이지만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몸의 중심이 온전해 질 때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단기간에 효과가 나지 않아도 운동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병원이나 치료원에서는 당장 뭔가 효과가 날 것처럼 뭔가 조치를 취해 주지만, 결국 다시 찾아 오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평생을 통해 운동하며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앙선배도, 교회의 역사 속에 빛나는 신앙선배들도 모두 평생을 걸쳐서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그들이 걸어간 길은 모두 예수님이라는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며 동시에 또한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단어는 다르지만,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길이신 예수님을, 그 말씀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그 어느 곳에서도 진리입니다. 어제도 진리이며 오늘도 진리이고 내일도 진리여야 진리입니다. 북극에서도 진리, 남극에서도 진리, 아시아에서도 아메리카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진리입니다. 만일 진리가 변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의 그 어떤 길이라도 자기들이 진리라고 생명이라고 말한 것들은 모두 한계가 있었습니다.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이 우리에게 유효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길다운 길이요, 변하지 않는 진리요, 우리를 영생하게 하는 생명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연구해서 내린 추론이 아닙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창조 전부터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약속의 말씀인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 삶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다음으로 8절에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질문하자, 9절 이하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안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친밀한 연합의 관계를 맺고 일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 단지 이 곳에서만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당시 종교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절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을 더럽고 죄인인 인간이 아버지라고 부르다니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참람한 것, 즉 신성모독의 죄에 해당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하게 불렀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라는 젊은이가 율법중의 율법인 십계명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명령을 공공연히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세속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가장 세속적이면서 종교적이었고, 종교적이면서 세속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상식을 깨는 예수님을 증오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오해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인류를 만드시고, 언제까지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사귀기를 원하셨습니다. 영생하도록 함께 행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배신으로 그 관계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다시 그 관계를 회복시키고 인류의 원형을 바로잡아 구원하시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참된 하나님과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본 사람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사람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의 지식으로 헤아려보고, 혹은 시대의 대세나 상식에 따라서 하나님을 판단하고 헤아리는 것을 종교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면 지극정성을 다하여 뭔가 해 내었을 때 신께서 응답할 것이라는 생각(샤머니즘, 무당)을 갖게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정성을 다해야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종교적 열심을 내어야 하나님께서 불러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구약에는 450명이나 되는 바알의 종교가들이 엘리야와 진정한 신의 응답을 받기 위해 시합을 하는 이야기를 고백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영적 대결에서 바알의 종교가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신을 불렀습니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단 주위에서 뛰놀고(굿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자기들의 종교적 규례대로 몸에 해를 가하기까지(금욕) 열심을 다하여 불렀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저녁 때까지 대답이 없자 “미친 듯이 떠들었지만” 우상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엘리야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르자 하나님은 곧바로 하늘에서 불이 내리셔서 응답을 하셨습니다. (부르기 위한 안달이냐, 자연스런 반응이냐의 차이…)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관심이 놓여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무게중심이 예수 그리스도께 묶여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묶여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곧 하나님의 응답을 증거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클라우드라는 기술이 유용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용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고 저도 유용하게 활동할 때가 있습니다. 핸드폰에서 사진을 찍으면 동시에 내가 가진 컴퓨터나 다른 사람의 휴대폰에 그 사진이 기록되고 저장되는 것입니다. 물론 전제가 있지요. 유무선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기계와 기계의 동기화(싱크로)가 이루어져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가장 긴밀하고 완벽하게 동기화되어 있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셨고, 하나님의 생각이 곧 예수님의 생각이신지 모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진지하게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는 자는 그 안에 성령이 계시기에 그 모든 생각과 의지와 믿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록되고 저장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생각에 순종하면 곧 하나님의 마음이 생각나서 순종하고, 결국 하나님의 일하시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하나님의 거룩한 뜻(마음)이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자아를 함께 죽이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죽었지만, 육신으로 살아 있는 이유는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것으로 인하여 산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서로 하나로 연합하셨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면, 구원받은 나는 바로 예수와 연합하였고, 성령과 연합하였고, 하나님과 연합하였다는 것을 체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는 우리는 서로 연합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연합이라고 A.W 토저 목사는 말합니다.
“연합이 없으면 능력도 없다!”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연합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연합하지 않으면 그 능력이 그들을 위해 나타나지 않는다.
성령님은 우리를 연합시키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연합해야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일에만
몰두하겠다는 일념으로 뭉쳐있는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하나님의 큰 일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복종하고 영적 장애물을 제거하겠다고 굳게 결심하는가?
<이것이 성공이다> 중에서 토저 목사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연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합을 사용하셔서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강림이 있기 전에 사도들과 제자들은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열흘 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강림을 체험합니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와 자매의 허물을 용서하고, 잘못을 용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으로 양보하고 연합할 때 성령의 파워가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로 연합하셨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하고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는, 우리에게 엄청나게 소망이 넘치는 약속입니다.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길, 진리, 생명이 되시고, 그 약속의 말씀으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서로 사랑할 수 있게, 격려하시고, 하나의 교회로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됨과 사랑의 능력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많은 좋은 길들이 있다고들 주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걸어야 할 유일한 길이십니다. 그의 말씀은 진리이고, 복음의 약속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생명입니다. 그를 믿는 자들은 그의 영이신 성령으로 서로 함께 연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연합하시듯 우리도 주님과 연합되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순종함으로 우리는 연합된 것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연합되었다는 말은 같은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꿈꾸시는 세상을 나도 꿈꾸게 됩니다. 예수님의 실천하셨던 인생을 우리도 추구하게 됩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감동을 우리모두 함께 체감하게 됩니다. 주님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우리가 연합할 때 필요로 하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서로 다른 이론과 혈통과 지식, 그리고 경험은 서로를 돕기 위한 수단입니다. 오직 우리의 연합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하도록 자신을 양보할 때 현실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걸어가며, 그 말씀의 진리를 바라보고, 생명을 품을 때 복음은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한 사람의 꿈은 그저 꿈에 불과하지만, 함께 그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연합하여 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할 때, 그리고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의 현실입니다. 길과 진리, 생명이신 주의 영을 품은 사람은 이미 그 마음이 천국입니다.
인생을 살면서도 영생을 살고 있는 여러분과 저에게 어떤 악조건과 불안한 여건이 둘러싸도 반드시 이길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령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번 한 주간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여전히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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