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교구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님의 글을
일부 인용 편집하여 평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신앙의 해’,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해주십시오.”(루카 17. 5)
하느님, 예수님 권위가 상실한 시대!
즉 신부님의 권위와 평신도의 권위가 스스로 추락한 시대이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인권운동,
사회복지와 생태계보호,
통일을 향한 민족화해 등의 다양한 실천운동 탓에
국가안보를 뒤엎으려는 정치발언, 대통령퇴진 등의 시국미사
본질과 다른 일부 정치사제들의 불순함에
여기가 북조선인지!
대한민국이지!
혼돈스런 상황에서
신자들의 가슴에 피멍든 한해이며!
2014년 올 한에도 대선과 연계하여
교회성직자가 스스로 정치판이 되어
거룩한 사랑 말씀의 강론시간에
성직자라기보다는 스스로 정치 선동가 되어
평신도간 좌,우로 나누어져
교회와 사회가 피비린 내나는 한해가 될 것이다.
믿음이 별로 달갑지 않은 시대!
믿음이 점차 사라지는 시대!
세상에 정말로 믿을 것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시대!
그래서 더욱 믿음이 필요한 시대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호위 호식한 시대이다.
잘 먹고. 잘 놀고 조금만 몸에 이상 있다 하면 병원약국을 찾는다.
토. 일요일은 일용노동자도 주말 휴일을 찾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를
불신의 정치,
불균등한 경제,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고 주장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삶의 바탕인 가정과
지혜의 보고인 학교,
게다가 진리의 기둥이라고 믿어온 종교에서조차도
믿음의 신빙성이 의문에 처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는 관계 안에서의 상호 신뢰와
그 신뢰를 가능하게 해주는 삶의 권위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교회의 일부성직자는
기쁜소식의 복음전파와 기도보다는
책상 앞에 샌님인지라
사회경험과 체험도 없이
모든 것이 만물박사가 되어 버렸다.
사회와 교회는
맘몬주의를 연상케 하는 물질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과 이기적 탐욕,
집단적 광기와 냉소주의가 얽혀
그야말로 신뢰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좌절로 병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처해 있는 위치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국 천주교 신자숫자가 500만 명이 넘었다는 반가운 소식 뒤에는
4분의 1도 미치지 못하는 주일 미사 참례자 수와
신자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가지 못하는
형식적인 신앙과 전례생활,
공동체 안에서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제와 평신도들의 모습들이 있다.
가톨릭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인권운동,
사회복지와 생태계보호,
통일을 향한 민족화해 등의 다양한 실천운동을 펼치고 있다는
고무적인 입장과는 달리
일반 신자들은
가톨릭신앙에 대한 매력에 빠지기에 너무 삶에 지쳐있거나
세속적인 삶의 가치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는 듯싶다.
이는 분명히
오늘날 우리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향한 힘든 순례의 여정을 걷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보기보다는 일부성직자의 사목활동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즉위 이후
연일 언론에서는 교황님의 파격적인 행보에 관심을 갖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과
새 시대에 부응하는 가톨릭신앙의 쇄신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많다.
지난 해 전임 베네딕토 교황님이 선포한 신앙의 해(2012. 10. 11-2013. 11. 24)를
1년 넘게 보내면서
가톨릭교회는 보편 교회차원에서부터
지역교회 전반에 걸쳐 불신의 위기를 겪으며 풍랑을 만난 듯 흔들리는 교회에
새로운 성령의 바람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신부님들은 사회정치적 선동 발언보다는
실제로 본당사목활동을 신앙의 해의 의미를
현장의 신자들에게 보다 생생하게 전달해야한다.
신앙 쇄신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가톨릭 신자로서의 소명들을
함께 해나가기를 호소하여야한다.
가령 성호경 긋기를 생활화 하며 신자의 자긍심을 강조하거나,
기초적인 기도 생활,
냉담자 찾아 신앙 권면하기,
본당과 사회에서 서로 사랑과 나눔의 작은 실천을 해나갈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한다.
공의회 문헌을 함께 배우고,
성경 통독과 성경 말씀을 찾아 외우는 일,
매주 평일미사 후에 신자 재교육을 위한 짧은 교리와 성경교육을 꾸준히 하여야한다
바쁜 사목 일정이지만
예비자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고,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찬양미사와 특강,
그리고 신자들이 본당에서 좀 더 행복하게 머물 수 있도록
친교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일까지
신앙 쇄신을 위한 다양한 일들을 직접 사목 현장에 적용하여야 한다.
세계 교회의 흐름 속에서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필요한 교회적 비전을 신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평화방송의 TV강좌/성경 등의 대중 매체 속에서
신자로서 성경과 신학을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있었다.
즉 하느님가치관에서
나에 정체성과 하느님사랑 이웃 사랑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활력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한 가지 분명히 깨달아가는 것이 있다.
신자 재교육을 위한 좋은 강의와 피정,
영적쇄신과 친교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많아도
한국가톨릭교회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아닌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회가 쇄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제가변화 하여야 한다.
투쟁과 반목 보다는
늘 공부하고
기도하며 깨어있어야 하는 것 이다.
목자가 양들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의 안식을 가져야한다.
군주가 아닌 신부!
종이 아닌 평신도!
맹목적 순종을 강요하기보다는
사목자 스스로의 실천적 사랑이
평신도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톨릭신앙은
오랫동안 목자가 양들과 떨어져
그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관리하고
보호하는 ‘목장형 종교형태’로 발전하였다.
목장 안에 있는 신자들은
목자의 보호 속에서
신앙의 위기를 겪지 않게 하는 ‘문단속 신앙’에 익숙해져버렸다.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으며 교회 안에 충실하게 머무는 것,
성직자들을 존경하면서
그들의 영적 지도를 따르는 것이 올바른 가톨릭 신앙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신앙은
더 이상 신자들을 목장 안에 가둬두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침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문단속만으로
풍요로운 가톨릭 신앙의 매력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우리 교회에 심어준 새로운 비전은
그야말로 목자와 양이 목장 안과 밖을 넘나들며 함께 어우러지는 신앙이었다.
어머니인 교회의 품에 머무는 유아기적 신앙에서 벗어나
이제는 신앙의 위기에 스스로 맞설 수 있는 면역체계를 심어주고,
자신의 신앙지평을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에로 넓힐 수 있는
성숙한 신앙에로 초대되고 있다.
이런 신앙 쇄신의 중심에는 신자들의 신앙 감각이 필요하다.
이 시대의 표징을 읽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해낼 수 있는 영적 식별능력,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면서도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손길을 읽어낼 수 있는 영적 감수성,
불신의 시대라는 부정보다는
긍적적 사고와 믿음으로 지키고, 전하며,
심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평신도에게도 필요하지만
성직자에게 어느 때보다 필요하고 중요하다!
믿을 수 있는 능력은 가톨릭신자라면
누구나 세례성사 때 성령의 이끄심으로 받은
신앙 감각의 은사를 되찾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믿음의 그리스도 이전에
인격적 예수의 매력에 먼저 맛들이기 위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드러난 삶의 한(恨)을 넘어서는
참된 부활의 기쁨을 얻기 위해
세속적 가치질서로 물들어버린
자신의 동물적 감각들을 정화하고 고양시킬 수 있는 참된 쉼이 필요하다.
오늘날 교회에 진정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쉼을 맛보는 것이다.
쉴 틈 없이 살아가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무엇을 향해 뛰고 있는지!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 지!
나의 삶의 반사적 행동보다는
성모님처럼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 할 것이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평신도의 변화를 요구하기 이전에
성직자들의 변화가 더 중요하다!
신학의 의미 속에 신앙을!
신앙 속에 하느님의 숨결인 사랑과 평화, 자유를
하느님사랑. 이웃사랑 안에서
되새김 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신앙의 해를 보내며
우리가 매일 매일을 다시 신앙의 해로
다시 살아가야할 이유라고 생각한다.
첫댓글 대체로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중심은 하느님 백성이며 거기에 보조적 역활을 하는 것이 성직자라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근본적인 구조적 변화 없이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 바로 거기에 있으며 율법의 유대교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수님을 바라보면 거기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중심은 하느님백성이지만 엄연한 교계제도는 존재하죠. 그리고 그분들이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서 봉사해주시는거구요 그리고 그분들의 인격을 존중하는것이 아니고 그분들이 가진 직책에 따라 존경과 예의를 바치는거죠(일부제외)
존경과 예의는 평신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성직자들에게도 있는 것이지요.
네 그렇죠 서로서로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단 정구사 신부들이 사제라는 신분을 앞세워 종북사탄질을 하는 것이 문제지요.
그래서 제가 마지막에 일부제외라고 붙였습니다. 물론정신차리고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열심히 사목활동하면 하느님의사람으로 받아들여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