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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변증법 오늘 읽고 논한 내용입니다.
수사법
철학은 명시적으로든 잠재적으로든 텍스트들과 결합됨으로써, 방법의 이상에 따라 부인하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 즉 자체의 언어적 본질을 시인한다. 이 언어적 본질은 전통과 유사하게 근대철학사에서 수사법으로서 배척을 받았다. 분리된 상태에서 효과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 격하된 언어적 본질(116)은 철학 속의 허위를 떠맡았다. 플라톤이 비난한 사물과의 분리로 인해 고대 이래로 수사법이 얽혀들어간 채무는 수사법에 대한 경멸을 통해 청산된 셈이다. 그러나 표현을 사유 속에서 살려내 주었던 수사법적 계기에 대한 박해는, 객체를 도외시하는 수사법 옹호 못지 않게, 수사법적 계기의 기술화(Technifizierung)에, 즉 그것의 잠재적 제거에 기여했다.
‘효과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 격하된 언어적 본질’: 아도르노는 계몽과정에서 언어가 대상과의 마술적 일치를 함의했던 이름, 대상들의 본질을 파악하고 분류하거나 묶어놓는 개념, 형이상학적이라고 여겨지는 의미들을 배제하는 기호 등으로 변하면서 언어의 풍부함 특히 ‘표현’의 요소가 제거되고, 언어적 본질이 ‘효과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 격하되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수사법이 사물과 분리되는, 혹은 객체를 도외시하는 현상과 함께 수사법을 경멸하는 철학 전통에 맞서 언어의 표현적 성격을 살려내는 수사법적 계기를 옹호한다. 이는 동일성 사유에 맞서 비동일자를 존중하는 방식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언어가 빈곤해질 뿐만 아니라 폭력으로 전환되는 문제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은 주목할 만하다. 언어를 통한 사태의 왜곡 문제는 다른 식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첫째, 유구한 전통을 지니는 ‘노예의 언어’가 있다. 검열이나 표를 의식해 노동이라는 말을 피하는 것이 그 예다. 둘째, 특히 인정투쟁에 진심인 학자들이 애용하는 ‘시장의 언어’가 있다. 튀는 말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만 면밀히 따지면 공허하거나 독자들을 호도하는 경우가 있다. 이론가들이 경계할 부분이다. 셋째, 활동가들 사이에서 자주 나타나는 ‘관료의 언어’가 있다. 한때 강력한 파괴력 혹은 생산력을 지녔지만, 여러 조건 속에서 오염되어 관습적으로 사용될 뿐 현실문제와의 연관이 한참 느슨하거나 내용상 공허해진 것들을 소그룹 내에서 반복하여 사용하는 경우다.
1) “기호로서의 언어는 자연을 인식하기 위해 계산의 도구로 전락해야 하며, 자연과 유사해지려는 요구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반면 형상으로서의 언어는 완전한 자연이 되기 위해 모상(摸象)이 되는 데에 만족해야 하며 자연을 인식할 수 있다는 요구는 단념해야 한다. 계몽의 진전과 함께 ‘진정한 예술작품’만이 이미 존재하는 것의 단순한 모방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계몽44)
수사법은 철학에서 언어를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대변한다. 수사법은 철학을 이미 알려지고 확정된 내용들의 소통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서술의 요구들을 통해 관철된다. 된다. 무엇인가를 대변하는 것 모두가 그렇듯이 수사법이 위험에 처하는 이유는, 매개되지 않고는 사고의 서술이 제공할 수 없는 것을 그것이 쉽사리 차지하려 들기 때문이다. 설득의 목적은 수사법을 부단히 훼손한다. 그러나 그런 목적이 없다면 실천에 대한 사유의 관계가 사유행위로부터 사라질 것이다. 플라톤에서 의미론자들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철학 전통 전체가 표현에 대해 갖는 알레르기는, 훈육되지 않은 태도에 대해 논리학에서까지 비난을 가하는, 모든 계몽의 성향과 일치한다. 그런 성향은 사물화된 의식의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개되지 않고는 사고의 서술이 제공할 수 없는 것’: 수사법이 매개를 혹은 개념의 운동을 건너뛰는 것은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점보다 더 수사법을 위태롭게 만든다. 이와 별도로 의미론자들 내지 논리실증주의자들처럼 표현적 요소 혹은 훈육되지 않은 태도를 철학에서 배제하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보는 아도르노의 입장에서, 사물화된 의식의 산물 내지 계몽의 성향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대상을 잘라내고 틀에 집어넣어 지배하기 편하게 만드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 지배의 본질은 맹목적 자체보존이다.
2) “계몽은 의미론적 언어비판이 보여주는 것처럼 단지 명석하지 못한 개념과 단어 속에서뿐만 아니라, 자기유지라는 목적의식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는 모든 인간적인 말들 속에서도 신화를 감지한다. ‘자기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덕(德)의 유일한, 또는 제1의 기초이다’라는 스피노자의 명제는 모든 서구 문명의 진정한 격언으로서, 이 격언 속에서 시민계급의 종교적⋅철학적 차이들은 평화로운 휴식을 얻게 된다.”(계몽59)
철학과 과학의 결합이 사실상 언어의 폐기로 귀결되고 이로써 또한 철학 자체를 폐기하기에 이를 경우, 철학은 언어적 노력 없이 살아남을 수 없다. 언어의 흐름 속에서 철벅이는 대신 철학은 언어에 대해 반성한다. 언어적인 느슨함이 −과학적으로 말해서 부정확한 것이− 언어에 의해 매수될 수 없다는 투의 과학적 제스쳐와 곧잘 결합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사유에서 언어를 폐기한다는 것은 결코 사유의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현혹되어 언어를 희생할 경우, 철학은 자신이 다루는 사물에 대해 단순히 기호적인 방식(signifikativ)과는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게 해 주는 것까지도 희생한다. 언어로서만 유사한 것이 유사한 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과 그것이 가리키는 것 사이에는 궁극적 유사점이 없다고 보는 유명론이 수사법에 제기하는 끝없는 비난(117)을 물론 무시할 수는 없다.[65] 또 그에 맞서 수사법적 계기를 무턱대고 내밀 수도 없다.
‘언어로서만 유사한 것이 유사한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닮아감으로써 제대로 알아간다는 미메시스적 반응의 매체로 언어를 지적하고 있다. 이것이 곧 ‘언어적인 느슨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단지 기호적인 방식만을 통해 사물을 재단하는 데에 반대하는 것이다. 현대의 언어관에서는 기표와 대상 사이의 관계를 우연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라는 점을 ‘물론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에 매몰되지 말고 언어의 표현적 미메시스적 성격을 통해 대상과의 풍부한 관계를 만들자는 생각은, 자체보존을 위해 사물을 지배대상으로만 파악하는 것에 비해 원론적으로 바람직해 보인다.
3) “비당파적인 과학적 언어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무력한 언어가 표현을 끌어낼 수 있는 힘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며, 현존하는 것만이 자신의 중립적인 기호를 찾아낸다. 그러한 중립성은 형이상학보다 더 형이상학적이다. 결국 계몽은 상징뿐만 아니라 그 후계자인 보편개념마저 고갈시켰다.”(계몽50)
4) “현대인은 사물을 곰곰이 생각해봄 없이 몇 개의 사유모델에 의해, 또는 언어가 붕괴된 후 그때그때 꺼내먹을 수 있는 비상휴대식량이 된 기술적인 용어를 통해 사물을 파악하는 법을 배웠다. 지각작용 속에는 지각을 하는 주체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 현대인의 지각에서는 ‘능동적인 수동성’−관습에 의해 이미 주어져 있는 범주의 계기들이 새로운 사물을 만날 때 선입견 없이 수동적으로 자신을 새로운 사물에 내맡기면서 스스로를 기민하게 활동시켜 새로운 사물에 적합한 형태로 자신을 재구성함으로써 지각된 사물에 불의를 가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계몽272-273)
어의상으로 사유기관으로서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변증법은 수사법적 계기를 비판적으로 구제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즉 사물과 표현을 무차별상태(Indifferenz)로까지 접근시키려는 노력이다.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사유의 오점으로 여겨진 것, 즉 무엇으로도 완전히 깨뜨릴 수 없는 언어와 사유의 연관관계를, 사고의 힘이라고 간주한다. 이러한 것이 현상학을 고무하여, 극히 순진하게나마 단어의 분석을 통해 진리를 확인하려 들게 했다. 수사법적 성질을 통해 문화⋅사회⋅전통은 사고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적나라하게 반수사법적인 것은 부르주아적 사유의 귀결인 야만과 동맹을 맺고 있다. 키케로*에 대한 비방이나 디드로**에 대한 헤겔의 반감은 생활고로 인해 자신을 일으켜 세울 자유를 상실한 사람들, 또 언어의 육체(Leib der Sprache)를 죄악시하는 사람들의 원한을 증언한다. 통속적 견해와 달리 변증법에서는 수사법적 계기가 내용에 관여한다. 변증법은 이 수사법적 계기를 형식적⋅논리적 계기와 매개함으로써, 정확하지만 비본질적인 것과 자의적 견해 사이의 딜레마를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변증법은 구조에 의해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닌 열린 것으로서의 내용을 애호한다. 이는 신화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다. 언제나 동일한 것은 결국 형식적 사유법칙으로 되어 희미해진다 해도 신화적인 것이다.
‘정확하지만 비본질적인 것과 자의적 견해 사이의 딜레마’: 전자는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 후자는 실존주의 류의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수사법적 계기는 전자로 인한 수량화⋅사물화의 해독제, 논리적 계기는 인식의 구속력을 위한 처방이 되며, 변증법은 이 양자의 매개를 비본질과 자의의 딜레마를 극복하고자 한다. 즉 사물과 표현의 일치를 향해 나아간다. 따라서 수사법적 계기는 내용과 무관할 수 없다.
5) “형식이 본질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 때문에 인식이 즉자 혹은 본질로 만족할 수 있고, 형식은 생략할 수 있으며, 또 절대적 원리 혹은 절대적 직관에는 인식의 전개과정이나 형식의 발전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그러나 바로 형식은 본질에 대하여 본질 자체만큼이나 본질적이기 때문에, 본질은 단지 본질로서만, 즉 직접적 실체 혹은 신에 대한 순수한 자기 직관으로서만 파악되고 표현될 수 없다. 오히려 그와 마찬가지로 형식으로서, 또 발전된 형식의 전체적 풍요로움 속에서 파악되고 표현될 수 있다. 이로써 비로소 본질은 현실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표현된다.”(현상24)
내용을 추구하는 인식은 유토피아를 원한다. 가능성에 대한 의식인 유토피아는 파손되지 않은 것으로서의 구체적인 것에 달라붙는다. 유토피아의 자리를 차단하는 것은 결코 직접적 현실이 아니라 바로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기존상황 속에서 추상적인 모습을 띤다.(118) 비존재자로부터는 지워지지 않는 색채가 나온다. 현존재의 일부인 사유는 비록 부정적으로나마 비존재자에 접근함으로써 이 비존재자에 봉사한다. 단지 극단적으로 먼 것만이 가까운 것이리라. 철학은 그것의 색채를 포착하는 프리즘이다.[66]
‘가능성에 대한 의식인 유토피아’: ‘가능한 것’이 유토피아의 자리를 차단한다는 말은 유토피아에 대한 아도르노의 금욕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즉 기존상황을 바탕으로 구상된 유토피아는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맑스도 이러한 금욕적 태도를 공유한다고 본다. 일견 수긍할 만한 주장이지만, 대안사회에 대한 구체적 전망의 부재, 혹은 대안 구상을 위한 이론적 의무 방기를 변호하는 논리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발생과 함께 시작된 여러 형태의 노동해방운동 전통, 특히 현실사회주의의 경험, 자본주의의 근본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들의 축적, 자본주의 속에서 발전해온 해방의 잠재력 등을 감안하면 맑스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구체적으로 대안사회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 대안을 특정한 모델들, 예컨대 구소련체제, 중국식 사회주의, 북한이나 쿠바 등에서 배타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주장하여 일정한 정파를 형성하고자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경우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사고, 즉 변증법적 사고를 가동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즉 제반 운동의 성과와 문제들에 대한 분석적 평가를 거쳐 대안사회를 구체화하는 주체적 종합이 필요한 것이다.
6) “유토피아라고 여겨지는 것은 기존 상황에 대해 부 정적인 것으로 머물며, 따라서 이 기존 상황에 예속되어 있다. 현재의 이율배반들 가운데 중심적인 것은 예술이 유토피아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러기를 원하고 있으며, 특히 현실적인 기능의 연관 관계가 유토 피아를 차단하면 할수록 더욱 그러하지만, 유토피아를 가상이나 위안^에 내맡기지 않으려면 유토피아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미학83-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