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8월29일 오늘, 조선 고종 13년 상해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에서 출생 (~ 1949년 0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2층 거실에서 총격으로 사망)
저서 백범 일지 | 백범일지(白凡逸志) 백범일지(白凡逸志)는 김구의 자서전으로, 이광수가 윤문하였다고 한다.
상권과 하권, '나의 소원' 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으며, 상권은 1929년, 아들들에게 편지로 전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구한말 당시의 과거를 전하는 한편, 하권은 그가 독립운동을 한 것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상권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썼으며, 하권은 1943년에 충칭시에서 쓰였고 상, 하권과 '나의 소원'을 합친 판본이 1947년 12월 15일에 출판되었다. 현재는 백범기념관에서 원본을 소장 중.
상편은 '우리집과 내 어린 적', '기구한 젊은 때', '방랑의 길', '민족에 내놓은 몸'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 하권은 '3.1 운동의 상해', '기적 장강 만리풍'으로 구성되어 있고, 말미에 있는 '나의 소원'은 '민족국가', '정치이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로 구성되어 있다.
김구가 직접 쓴 백범일지 친필 원본은 1997년 6월 12일에 '백범일지1929년(상권)1943년(하권)' 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었다. 다만, 저자가 사망한 지 50년이 지난 1999년 6월 26일 이후로는 그 내용에 저작권이 적용되지 않는다.
'나의 소원'은 상편과 하편 이후에 나왔다고 한다.
여기서 제목을 따 온 독서 감상문 쓰기 대회도 2005년부터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에서 개최되고 있다 |
🌱1910년 국치일 - 매국노 이완용의 흉계로 한일합병조약 공포됨. 대한 제국 국호를 없애고 조선으로 바꿈.
국치일(1910년 8월29일 국치일) - 매국노 이완용의 흉계로 한일합병조약 공포됨.
대한 제국 국호를 없애고 조선으로 바꿈. 나라가 수치를 당한 날. 흔히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날인 1910년 8월 29일을 이른다.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 일본어: 日韓併合条約 にっかんへいごうじょうやく),
한일 합방 조약(韓日合邦条約), 한일 병탄 조약(韓日倂呑條約)은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강제로 이루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이 길로 국권을 상실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흔히 한일 합방 늑약(韓日合邦勒約) 또는 국권피탈(國權被奪), 경술국치(庚戌國恥) 등으로도 호칭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특이한 점은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성립한 당시에는 조약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고, 순종이 직접 작성한 비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을사오적( 乙巳五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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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부산진 역사 준공 🌱1927년 상해임시정부, 국무령을 국무위원 주석으로 개편. 초대주석 김 구 🌱1940년 경성 흥행 협회가 서양영화의 상영을 금지 하기로 결정. |
🌱1941년 8월29일 일제 금속류회수령 공포 최후의 발악! 곧,패망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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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젓가락, 오강까지 총알,포탄피 만들 재료가 없어서 집집마다 도적질 했습니다> |
🌱1945년 유도회 창립 🌱1945년 국악원 창립 |
🌱1448년 8월29일 숭례문 신축(재건축)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40(남대문로4가 29)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으로, 서울 한양도성의 남문이며, 속칭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린다.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울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여겨지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명칭은 숭례문(崇禮門)과 남대문(南大門)이 있다. 숭례문은 정식 명칭이자 현판에 쓰인 이름이라면, 남대문은 일반 명사로서 흔히 불린 명칭이다.
숭례문(崇禮門) 숭례문(崇禮門)은 조선 왕조가 사상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반영하여 지은 이름으로 볼 수 있다.
한양 도성의 주요 성문에는 오행(五行) 사상에 따라 해당 방위에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 즉 오상(五常)을 이루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2]을 대응시켜 이름을 지었는데, 특히 동문, 서문, 남문에 이러한 대응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동: 인(仁)을 기르는 흥인(지)문 서: 의(義)를 두텁게 하는 돈의문 남: 예(禮)를 숭상하는 숭례문 북: 같은 원리대로라면 "지(智)" 자가 대응되나, 북문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문이어서 그러지 않았다.
<실록>에 의하면 숙청문(肅淸門)이라 부르다가 언젠가부터 숙정문(肅靖門)[5]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훗날, 숙종 대에 탕춘대성과 함께 홍지문(弘智門)이 세워지면서 빈자리를 메꾸었다.
중앙: 신(信)은 한양 한복판에 위치한 보신각(普信閣)이다. 그러나 보신각 역시 고종 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문의 이름인 숭례(崇禮)는 '예절(禮)을 높인다'는 뜻으로, 유교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중용》에서 따온 말이다.
정도전(鄭道傳)의 시문집인 『삼봉집』(三峯集)[6]에서는, 도성 팔문의 이름을 정도전이 지었다고 하였다.# 공식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나, 다른 진술 중 정도전이 권중화 등과 함께 한양의 도시계획을 구상[7]하고 경복궁과 각 전각의 이름을 지어 바친 것[8], 한양의 팔경시(八景詩)를 지어바친 것 등이 교차 확인된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이것을 인용하였다.
남대문(南大門)
숭례문은 "도성의 남쪽 대문"이라는 뜻의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자주 불렸다. 정식 명칭이라기보다는 일반 명사로 시작하였으나,
조선 시대에도 숭례문보다 훨씬 보편적으로 불려온 명칭으로 보인다. 특히 한문을 잘 모르는 서민의 경우 현판을 읽을 수 없으니 보다 직관적인 "남대문"이 지배적으로 쓰였으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언급 빈도로 볼 때 한문을 잘 알던 권력층에서도 "남대문"을 매우 자주 사용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1996년까지는 "서울 남대문"을 공식 문화재 명칭으로 사용하면서 사실상 고유명사화되어 주변 지명도 전부 "남대문"을 사용하였고('남대문'시장 등), "숭"남대문"이라고 부른 기록의 예시
숭례문이 처음으로 언급된 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 9월 24일 기사부터가 '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正南曰崇禮門, 俗稱南大門(정동왈흥인문, 속칭동대문, 정남왈숭례문, 속칭남대문)'이라 하여 보통 동대문, 남대문으로 부른다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속(俗)은 속되다, 천박하다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세간에서는, 백성들은' 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우리가 흔히 접하는 "속칭~~이다"와 같은 맥락이다.). 백성들은 물론 신하나 군주들까지도 즐겨 남대문, 동대문 등으로 불렀다.
세종 9년 1월 26일 기사에는 '上曰: 明日置𧪚于南大門外愼以衷之家'라고 했는데, 여기서 상은 세종대왕이다. 그 외에 서애 유성룡, 한음 이덕형도 남대문이라고 부른 기사가 있으며, 실록을 쓰는 사관조차 성종14년 12월 4일에 보면 '南大門內行廊失火, 延燒十餘間(남대문내행랑실화 연소십여간)' 이라 하여 남대문이라고 적어놓았다.
《매천야록》을 저술한 매천 황현(1855~1910)은 경술국치 16일 후 절명시를 남기며 자결한 인물로, 야사임을 떠나서, 일제강점기 이전의 기록임에 주목하자. 또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례문"은 거의 잊혀질 정도였으나 이후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서울 숭례문"으로 개칭하였다. |
🌱1961년 한국 노동조합 총연맹(한국노총) 결성 : 군사 정부가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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