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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의 성탄 준비 / 사 62:6-12, 눅 2:8-20
목자라는 말에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는가? ‘양치는 목동들’ 하면 평안한 안식과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의 목자들의 삶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평민이었지만 그 당시의 사회 상황에 비추어보면 경제적으로 천민에 가까운 어려운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에게 별로 대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했던 이들 목자들에게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소식이 들려졌다는 사실과 그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신 그 하나님을 맞이 했다는 사실은 실로 우리에게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은 목자들의 이야기라고 하면 다 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목자들이 주님을 맞이한 사건을 그냥 ‘아, 그런 것’ 하고 넘어갈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 본문을 다시 한번 더듬어 생각하면서 목자들이 어떠한 마음가짐과 태도로 첫 번째 성탄을 맞이했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저는 첫번째 성탄 사건에 나오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믿음으로 성탄을 맞이한 사람들이 바로 이 목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을 보여 주는 본문이 바로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본문 15절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5절은 ‘천사들이 떠나’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이 말씀은 천사들이 아기 에수의 탄생을 알리는 말씀을 전하고 떠나간 것을 가리킨다. 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3-14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성탄절이 되면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씀 중의 하나가 ‘하늘에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내용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시비하기도 한다. ‘이 땅에는 평화라고 했는데 왜 평화가 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본문은 막연하게 하늘에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구절을 대단히 감상적으로 인용하고 있지만, 14절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하면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고 믿음으로 주 안에서 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다’라는 것이지, 그냥 땅에 평화가 있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 땅에는 전쟁과 기근이 계속될 것이다. 평화에 대한 사람들의 낭만적인 기대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부패한 죄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한, 이 땅에 전쟁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전쟁과 기근과 고통의 세상 한복판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 ,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평안이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다윗의 동네에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는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가 임하게 되었다. 천사가 이런 말씀을 전했지만, 목자들이 믿지 않으면 그뿐이다. 이 말씀은 2천년 동안 수없이 이 지구상에서 전파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믿지 않고 있다. 설교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교가 끝난 후에 사람들이 전파된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설교를 들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 나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라는 점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천사를 통해서 구세주의 탄생의 소식이 전달되었다. 목자들은 이 소식을 그냥 묵살해 버릴 수도 있었고, 한 밤의 꿈처럼 그냥 무시해 버릴 수도 있었던 상황이다. 그러나 15절은 말한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이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나?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달되어진 말씀을 믿었다는 이야기이다. 아직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아기 예수가 탄생한 것을 보지 못했다.그들은 다만 들려온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여기에 믿음이 있다. 롬 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렇다. 믿음은 언제나 들음에서 난다. 나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아직 눈으로 본 상황이 아니라 해도, 내게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행하실 그 놀라운 일을 믿을 수 있는가? 이러한 것으로 우리는 신앙을 측정할 수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아직 눈으로 보인바 된 사실이 아니지만 들려온 말씀에 근거해서 믿는 것, 이것이 신앙의 출발이다. 우리는 15절에서 목자들의 이 귀한 믿음을 볼 수 있다. 천사들이 나타나서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보다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었다는 사실이 더 소중한 것이다. 여기에 목자들의 믿음이 있다.
목자들은 말씀을 믿었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에게 최우선의 순위를 두었다. 16절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여기에서 인상적인 단어는 ‘빨리 가서’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목자들은 이제 그 말씀에 선포된 영광스러운 메시야를 만나고 싶어서 빨리 가야 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메시야되신 아기를 보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던 모든 일을 제쳐놓아야 했다. 말씀을 듣고 구세주에 대한 기대를 건 그 순간부터, 목자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들의 믿음의 대상에 관해서 우선 순위를 두고 행동한 목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인들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지켜보면 자기 할 일을 다하고 마지막에 시간이 남으면 ‘오늘은 심심한데 교회나 나가서 예배나 볼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잇는 사람들이 있다. 또 자기를 위해서 쓸 것을 다 쓰고 남으면 ‘조금이라도 드려야 체면이 서지’라는 생각으로 헌금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모습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들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목자들은 자기들을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을 믿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가? 이제 한순간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 그들은 다른 모든 일을 제쳐놓을 수가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그분과의 만남, 그분과의 관계가 그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았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다. 우리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메시야.’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까 변변한 여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구유에 아기가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매우 실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에는 적어도 목자들이 실망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을 볼 때, 목자들에게는 믿음의 눈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눈으로 보이는 것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그런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어떻게 메시야일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달한 이상,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태어난 그 메시야를 자기의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안목이 이 목자들에게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게만 느껴진다. 고후 5:7절을 통해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바울은 이 짤막한 구절에서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무엇으로 살아가나? 말씀이다. 반면에 눈에 보이는 것을 근거로 삼지 않는다. 목자들은 믿음에 근거해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었던 것이다. 목자들은 말씀을 믿었고, 또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여했다. 그리고 이제 그 믿음을 전한다. 이 짤막한 사건 속에서 우리는 실로 믿음의 진수를 다 찾아볼 수 있다. 17절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들 목자들은 성탄 소식에 대한 최초의 전도자라고 말할 수 있다. 목자들이 말씀을 전할 때, 두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반응을 보였다.
1. 많은 무리들의 반응
18절에 ‘듣는 자’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일반적인 청중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여기에서 ‘놀랍게 여기되’라는 말은, 목자들이 전한 소식을 듣고 그냥 신기하다고 느꼈다는 이야기이다. 헬라어에는 이 문장의 동사가 부정과거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꼭 한번 그렇게 느꼈다는 말이다. 이것은 일종의 일시적 호기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상은 없다. 이것이 그 당시에 목자들에게 성탄 소식을 전해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설교 말씀을 접하면서 어떤 감동을 받거나 공감을 하지만 거기에세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씀에 대한 진정한 반응이 아니다.
2. 마리아의 반응
19절을 영어 성서는 ‘But’이라는 접속사로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아는...’ 우리 말은 이 접속사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들이 많지만, 여기서 성서기자는 두가지 유형의 반응을 대조적으로 제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자들이 말한 것을 그냥 놀랍게 여기고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접속사가 바로 ‘But’이다.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마리아는 목자들의 말에 두가지로 반응하고 잇다. 우선 그들의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었고, 그 다음에 생각했다. 이 구절에서 ‘새기다’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아서 마음 속에 간직한 다음에 죽을 때까지 계속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들은 다음에 ‘그것 참 멋있는데, 좋은 이야기지’라고 하고는 다 잊어 버린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목자들을 통해서 전달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계속해서 마음 속에 간직했다. 마리아는 새기었을 뿐만 아니라 생각했다. 여기에도 물론 계속해서 그렇게 했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에 보면 ‘생각한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단어를 ‘pondered’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 말은 그냥 한번 생각한다는 말이 아니라 곰곰이 되씹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태도는 말씀을 받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 천사들을 통해서든 목자들을 통해서든, 구세주에 관한 말씀에 반응하고 있는 마리아의 태도 속에서 우리는 그녀가 믿음의 여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19절 말씀을 그냥 지나치지 마라. ‘마음에 새기어 생각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새기고 생각한 마리아에게 그 말씀은 축복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목자들이 그들의 믿음을 간직하고만 있지 않고 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최초의 복음 전도자는 목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저는 이 목자들을 생각하면서 구약 왕하 7장에 나오는 네 명의 나환자를 떠 올리게 되었다.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 있던 네 명의 나환자들이 사람들이 다 굶어 죽어가는 기근의 때에 하나님의 기적으로 그 성밖에 양식이 가득 쌓여 있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이 놀라운 사건을 발견하고 나서 네명의 나환자들은 무엇이라 말했나?‘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모든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양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이것은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소식인가?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만민을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가 오셨다.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놀라우신 주님이 오셨다. 그 주님은 나의 삶을 바꾸셨고 내 삶의 소망이 되셨다. 이것이 참으로 사실일진대, 우리가 잠잠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이 목자들은 놀라운 구세주를 발견하고 나서 너무 기뻐서 잠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구세주를 전하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는 세상에서 조금만 신나는 경험을 해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서 안달을 한다. 그런데 복음은 어떤 소식인가? 하늘과 땅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놀라운 소식이 아닌가? 이 소식을 듣고 주님을 발견한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잠잠할 수가 있나? 목자들은 복음을 전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성서는 말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자.
20절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은 만민을 구원 할 수 있는 구세주가 오셨다는 이 위대한 사실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무엇으로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하나? 찬양이다.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 찬양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영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참된 찬양, 진정한 의미에서 찬송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무엇을 찬송했나? 찬송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찬송했다고 기록한다. 메시야에 대해서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감격해서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영광을 돌렸던 것이다. 어떤 유명한 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참된 찬양은 신앙의 체험에서만 우러나온다.’ 저는 전적으로 이 말에 공감한다. 노래를 잘하는 것과 찬양하는 것은 다르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어 내나? 훌륭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 노래를 잘할 수 있다. 그러나 듣고 본 체험이 없는 사람의 노래는 다른 이들을 움직이지 못하고 은혜가 안 된다. 또 주께 영광이 될 수도 없다. 메시야를 노래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오시고 나를 위해 죽임당하셨다는 것을 정말 믿고 체험했을 때의 감격을 아는 사람만이 그 찬양 속에 동참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내 주는 살아계시고...’ 주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 찬양을 할 수가 있나? 노래 잘한다고 찬양을 잘하는 거 아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 아무리 성악가라 할지도 찬송을 부르면 어색하다. 기도하고 신앙생활 하며 은혜를 받아야 한다.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한 사람이 남편따라 교회나와 반주를 하게 되었지만 어색하다. 틀린 곳이 없지만 은혜롭지 못하다. 그러나 지금은 믿음생활을 오래 했기에 어색함이 사라지고 은혜스럽게 피아노를 친다.
본문을 보면 목자들은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참 말씀을 믿고 구세주를 만나는 체험을 한 그 감격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했다고 기록한다. 목자들이 첫번째 성탄절을 맞이해서 부른 이 찬양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놀라운 찬양이었나? 저는 이것이 진정한 찬양이라고 믿는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는 목자들의 모습을 정리하면 15절에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전달된 말씀을 믿었다. 16절에서 그들은 믿음의 대상에게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를 두었고, 17절에서는 그 믿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들은 그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 앞에 찬양으로 영광을 돌렸다. 목자들에게서 성탄을 맞는 바른 태도를 배움으로써 구원의 기쁨과 감격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이 성탄을 맞게 되기를 바란다. 목자들에게 전달되었던 이 구원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전달되었다. 방법은 다를지라도 전달된 말씀의 내용은 같다. 우리를 위하여 베들레헴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우리들의 메시여야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 나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푸시고 나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 가운데 평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해진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만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성탄절을 맞는 우리의 가슴엔 찬양과 감사가 흘러넘쳐야 할 것이다. ‘오 주님, 이 목자들처럼 주임을 만난 감격 속에서 내 평생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런 심정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7-051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