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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의 조선조 문과 급제자를 대강 정리하여보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문과는 총 744회가 시행되어 14.620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습니다.
그 중 제가 수집한 자료에는 영남 71개 고을의 문과급제가 1884명(잠정치)으로 전체 급제자의 12.9%에 불과합니다. 그중 안동지역(안동부와 예안현. 여기에는 현재의 봉화군 일부 지역이 안동으로 되어있음. 특히 의성김씨 해저와 안동권씨 닭실)의 문과급제자는 312명으로 영남 문과급제자의 16.56%로 영남 지역에서는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료가 모두 정리되면 어느 정도 정확한 분석이 나오겠으나 인조 이후 진성이씨와
진주강씨, 풍산류씨를 제외한 다른 성씨는 당상관을 크게 배출 하지 못하였습니다,
차후 자료가 모두 정리되면 정치적인 성향이 영남에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알 수 있을것 같고, 지역적으로 어떤 시기에 어느 성씨가 어떤 변화가 있는지도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자인. 장기. 청하. 양산. 기장. 곤양. 웅천 7개 고을은 문과 급제자를 1명도 배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녕. 흥해. 청송. 진보. 영해. 언양. 남해. 산청. 통영. 진해. 산청등 11개 고을은 당상관을 배출하지 못하였습니다.
본 자료는 제가 조사한 자료로 현재 안동 지역의 자료와 다소 다들 수 있는 것은 수집자가
급제자의 출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 질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문제는 차후 자료 정리과정에서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안동 지역의 문과급제자의 대강을 공부하는 것으로 하고자 합니다.
개개인의 인적자료는 나름 데로 자세히 조사하였습니다. 시간 나는 데로 읽어 보시고
조언 부탁드립니다. 장달수
安東大都護府
문과급제자 251명 당상관 90명
진주강씨 22명. 제주고씨 1명. 능성구씨 1명. 안동권씨 40명. 강릉김씨 1명.
순천김씨 5명. 안동김씨 16명. 예안김씨 1명. 의성김씨 38명. 풍산김씨 8명.
영양남씨 6명. 전주류씨 15명. 풍산류씨 16명. 고령박씨 2명. 반남박씨 1명.
흥해배씨 10명. 원주변씨 1명. 대구서씨 3명. 평산신씨 3명. 영월신씨 1명.
순흥안씨 7명. 의령여씨 1명. 경주이씨 1명. 고성이씨 7명. 예안이씨 2명
전의이씨 1명. 전주이씨 4명. 진성이씨 8명. 한산이씨 5명. 풍천임씨 1명.
순천장씨 2명. 동래정씨 2명. 청주정씨 2명. 한양조씨 5명. 남양홍씨 1명
부림홍씨 1명 251
禮安縣
문과급제자 61명
안동권씨 2명. 봉화금씨 3명. 광산김씨 5명. 순천김씨 1명. 안동김씨 2명.
예안김씨 3명. 의령남씨 1명. 영천이씨 2명. 예안이씨 1명. 전주이씨 1명.
진성이씨 40명
安東大都護府
(文科) 251명 당상관 90명
진주강씨 22명(6)
*강 로(姜栳) 1747(영조 23)~1841(헌종 7).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수보(壽甫). 호는 도천(道泉).
흡(恰)의 후손. 조부는 집일(集一) 아버지는 헌(瀗)
미호 김원행(金元行) 문인.
영조(英祖) 50년(1774) 문과급제.
별검 역임. 1784년 左掌禮에 제수됨. 저서:『道泉遺稿』
*강 유(姜游):1722(경종 2)~1798(정조 22).
본관 진주(晋州). 자는 하우(友夏). 호는 남곡(南谷).
선의 현손. 조부는 진기(震耆). 아버지는 복일(福一). 외조부는 임총(任聰)
영조(英祖) 16년(1740)생원시 합격. 1763년(영조 39) 증광문과 급제.
영조 44년 정언. 영조 47년 지평. 영조 48년 승지. 정조 6년 남양부사. 정조 15년 공조참의. 한성판윤. 지중추부사 오르고, 耆老社에 들어감.
시호:효헌(孝憲). 고종 8년 저서:『南谷遺稿』.
*강시환(姜時煥) 1766년(영조 42)
본관은 진주. 자는 성여(聖汝). 호는 가은(稼隱)
아버지는 노(栳)이다.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장령을 지내고 시강원문학. 헌납이 되었다.
1836년(헌종 2) 부사직으로 있으면서 순조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비난하고, 성학(聖學)의 권장, 빈민의 구제, 기강의 확립, 재용(財用)의 절약, 군정의 충실, 과거제 폐단의 혁파 등 6개 조목의 시정책을 상소하였다가 국정을 모독하였다는 죄로 절도(絶島)에 유배당하였다.
1840년에 헌종이 직접 정사에 임하게 되자 풀려났다.
저서로는 가은집. 건거록(巾車錄)이 있다.
*강기환(姜基煥) 1778(정조 2)~1812(순조 12).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성흥(聖興). 호는 송간(松澗).
흡(恰)의 후손. 조부는 한(瀚) .아버지는 속(梀) 외조부는 진성 이세흡(李世翕).
순조(純祖) 3년(1803)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분관되고·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연원도찰방을 지냈다. 저서:송간집(松澗集)
*강운(姜橒) 1772년(영조 48)∼1834년(순조 34).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경하(擎厦), 호는 송서(松西).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색(𣽤),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빈(儐)의 딸이다.
1798년(정조 2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807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正字)·전적(典籍)·지평(持平)·이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그가 관생(館生)으로 있을 때, 정조가 사생문답(師生問答)을 들이라 하여 그것을 보고는 강운의 성명을 어병(御屛)에 써놓고 잊지 않으려 하였다.
1821년 이후로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강회(講會)에 참석하여 《심경 心經》·《근사록 近思錄》 등을 강의하였으며, 여러 곳의 명승지들을 두루 유람하였다. 그는 《근사록집해》와 《주서차의 朱書箚疑》 수십권을 남겼고, 칠서(七書)에 대한 훈고와 의례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하였으며,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죽은 뒤 홍문관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송서집》 10권이 있다.
*강필로(姜必魯)1782년(정조 6)∼1854년(철종 5).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치가(稚可) 또는 중가(仲可), 호는 노와(魯窩).
아버지는 목(穆). 외조부는 김여필(金汝弼). 처부는 유종문(柳宗文)
1809년(순조 9)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치사관(致詞官)·종부시주부·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교리·승지·회양부사를 거쳐 1843년(헌종 9) 선원보첩(璿源譜牒)을 계속 만든 공로로 종부시정으로 가자되었다.
1849년 대사간에 오르고 1851년(철종 2)에 병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삼사(三司)를 두루 거치고 삼주(三州)의 외관을 지냈으나 말년에는 초가에서 독서를 낙으로 삼고 스스로를 작약산인(芍藥山人)이라 칭하며 살았다.
*강태중(姜泰重)1778(정조 2)~1862(철종 13).
본관 진주(晋州). 자는 성등(聖登). 호는 유하(柳下).
아버지는 시환(始煥). 외조부는 이민(李敏)
순조(純祖) 7년(1807) 생원시에 합격. 순조(純祖) 9년(1809) 문과에 급제
홍문관교리·수찬·대사간·한성우윤·병조참판·동지중추부사 역임. 저서:『柳下集
*강장환(姜長煥)1806(순조 6)~1871(고종 8).
본관 진주(晋州). 자는 선지(善之). 호는 주일재(主一齋).
흡(恰)의 후손. 아버지는 식(栻). 외조부는 이광곤(李光坤)
유생 제술에 장원하여 문과에 직부 전시되어 헌종(憲宗) 3년(1837) 문과 급제.
율봉도찰방·무안현감·선전관·고종 1년 충청도사액어사·홍문관 교리 역임.
*강면규(姜冕奎):1804(순조 4, 갑자)~1862(철종 13, 임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주옥(周玉). 호는 면와(俛窩).
락(恪)의 후손. 아버지는 필헌(必憲). 외조부는 조광섭(趙廣燮)
헌종(憲宗) 6년(1840) 문과 급제. 승문원에 분관. 정언. 지평. 옥당. 승지· 철종 11년 제주목사로 나가 선치를 하였고, 철종 12년 대사간을 지냈다.
*강하규(姜夏奎)1813(순조 13)~1883(고종 20).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하오(夏五). 호는 백산(白樵).
아버지는 지평 송서(松西) 운(橒). 헌종(憲宗) 12년(1846) 문과 급제.
율봉도찰방. 장령. 교리·사간. 집의. 이후 동부승지·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북청부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펼침. 만년에는 고향 춘양에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 저서:『白山集』.
*강진규(姜晉奎)1817(순조 17)~1891(고종 28).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진오(晉五). 호는 역암(櫟庵).
락(恪)의 후손. 아버지는 필보(必輔). 생부는 필응(必應).
과재 성근묵(成近黙) 문인.
1845년(헌종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박사와 전적(典籍)을 지냈고, 1864년(고종 1) 사헌부장령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에도 능하여 금산사(金山寺)·태고사(太古寺) 등 사찰에 관한 내용이 많다.
당시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천주학에 대하여는 강력하게 반대하여 1881년 〈척사소 斥邪疏〉를 올려 사학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영남유생들에게 통문을 보내 연합전선을 펴면서 개화정책을 반대하다가 이만손(李晩孫)과 함께 유배되었다.
저서로는 《역암문집》 12권이 있다.
*강세규(姜世奎):1809(순조 9, 기사)~1861(철종 12, 신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이서(而瑞). 호는 부오재(負誤齋).
락(恪)의 후손. 조부는 강익(姜榏). 아버지는 필신(必臣). 외조부 안이룡(安爾龍)
철종(哲宗) 4년(1853)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원릉별검. 9년 사간원정언. 12년 홍문관부교리. 교리
*강경규(姜景奎):1827(순조 27, 정해)~1869(고종 6, 기사).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순흠(舜欽).
각(恪)의 후손. 조부는 원(榞). 아버지는 필교(必敎). 외조부는 김시탁(金始琢)
철종(哲宗) 6년(1855) 문과급제.
*강 기(姜 기):1824(순조 24, 갑신)~1880(고종 17, 경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국보(國寶). 호는 석당(石堂).
흡(恰)의 후손. 아버지는 명규(命奎). 외조부는 義城 김희수(金羲壽).
1852년(철종 6) 문과 급제. 홍문관 부정자를 거쳐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장령·병조좌랑·홍문관부수찬·경연관검토관·춘추기사관 역임
*강운중(姜運重):1827(순조 27, 정해)~1881(고종 18, 신사).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성회(聖會), 호는 산두(斗山).
흡(恰) 의 후손. 조부는 복(福). 아버지는 유환(逌煥). 외조부는 유현빈(柳鉉斌)
철종(哲宗) 6년(1855)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가주서. 승문원박사. 고종1년 사헌부정언
고종3년 사헌부지평. 장령. 고종 16년 홍문관수찬. 교리
*강 건(姜鍵):1808(순조 18, 무인)~1881(고종 18, 신사).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계현(啓玄). 호는 춘고(春皐).
아버지는 대중(大重). 생부는 태중(泰重). 외조부는 박기명(朴基明)
철종(哲宗) 10년(1859) 증광문과 급제.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사헌부장령·통례원좌통례·병조참의·병조참지·동부승지. 1868년 예조참판·동지춘추관사·동지돈령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역임.「墓碣銘」(李敦禹 撰)
*강준환(姜駿煥)1825(순조 25)~1876(고종 13).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눈성(文聲).
흡(恰)의 후손. 아버지는 침(琛). 외조부는 우재덕(禹在德)
고종 9년 경무대 추도기(秋到記)에서 장원 직부전시 되어 고종(高宗) 10년(1873) 문과 급제. 성균관 전적· 강원도도사 역임
*강연(姜鍊) 1800(정조 24)
본관은 진주(晉州) 아버지는 태중(泰重). 외조부는 정양선(鄭養善)
철종(哲宗) 1년(1850) 문과급제. 승문원 분관. 가주서. 사헌부 지평. 철종 2년 정언.
철종 3년 홍문관부수찬. 철종 3년 부안현감으로 나가서 선치 공적비가 세워졌다
*강만(姜鏋) 1831(순조 31)
본관은 진주(晉州) 아버지는 세규(世奎)
고종(高宗) 20년(1883) 평시서 직장으로 문과갑과 급제하여 승륙하여 정언이 되었다
고종 22년 사헌부지평. 28년 헌납. 29년 다시 지평이 되었다
*강 탁(姜鐸) 1833(순조 33)~1904(광무 8).
본관 진주(晋州). 자는 자목(子木). 호는 계하(桂下).
락(恪)의 후손. 아버지는 면규(冕奎) 외조부는 宣城 김영구(金永龜.)
철종(哲宗)12년(1861) 문과 급제.
성균관전적. 감찰· 고종 10년 사헌부지평. 고종 12년 홍문관수찬. 고종 15년 사헌부장령
고종 17년 홍문관교리. 고종 23년 헌납. 고종 30년 사간원사간을 지내고
모친상을 당한 이후로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 은거함
*강 호(姜濩)1836(헌종 2)~1927.
본관 진주(晋州). 자는 차소(次韶). 호는 이과(二果).
락(恪)의 후손. 아버지는 현(鉉)
고종(高宗) 27년(1890) 문과 급제. 교리· 비서승· 안동부사 역임
*강연(姜演) 1842(헌종 8)~1916.
본관 진주(晋州). 자는 경심(景深).
락(恪)의 후손. 아버지는 헌.
고종(高宗) 28년(1891) 문과에 급제. 정언, 교리. 비서승(승지) 역임
제주고씨 1명
*고세창(高世昌)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백겸(伯謙).
조부는 고득종(高得宗). 아버지는 대사성 고태익(高台翼).
생원으로 성종(成宗) 25년(1494) 문과급제하여 한림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관직은 승정원 주서이다.
능성구씨 1명
*구봉령(具鳳齡)1526년(중종 21)∼1586년(선조 19).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서(景瑞), 호는 백담(柏潭).
문정공(文貞公) 휘(褘)의 8세손이며, 겸(謙)의 아들이다.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1세에 아버지마저 죽자 초상집례(初喪執禮)에 있어서 어른을 능가하여 마을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처음 외종조 권팽로(權彭老)에게 《소학》을 배워 문리를 얻고, 1545년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6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봉교(奉敎)를 거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이르고, 1564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여 수찬·호조좌랑·병조좌랑을 거쳐, 1567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뒤, 정언·전적·이조좌랑·사성·집의(執義)·사간을 두루 거치고, 1573년(선조 6)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동부승지·우부승지·대사성·전라관찰사·충청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7년 대사간에 오르고, 이듬해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형조참의를 지냈다.
1581년 대사헌에 오르고, 이듬해 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그는 한때 암행어사로 황해도·충청도 등지에 나가 흉년과 기황(飢荒)으로 어지럽던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동서의 당쟁이 시작될 무렵이었으나 중립을 지키기에 힘썼으며, 시문에 뛰어나 기대승(奇大升)과 비견되었고, 또한 〈혼천의기 渾天儀記〉를 짓는 등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만년에 정사(精舍)를 세워 후학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다.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안동권씨 40명(16)
*권시(權偲) 1386년(우왕 12)~미상
본관은 안동(安東). 조부는 권도(權度). 아버지는 권질(權晊). 처부 이원밀(李原密)
태종(太宗) 11년(1411)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
세종 2년 좌정언. 지평(이때 황보인은 장령). 그뒤 이조좌랑. 사헌부 집의
권제(權踶)1387년(우왕 13)∼1445년(세종 27).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도(蹈), 자는 중의(仲義)·중안(仲安), 호는 지재(止齋).
증조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고(皐), 할아버지는 검교정승(檢校政丞) 희(僖), 아버지는 찬성 근(近), 부인은 판사(判事) 이휴(李攜)의 딸이다.
처음에 음보(蔭補)로 경승부주부(敬承府注簿)에 기용되었으나 감찰 때 대사헌의 비위에 거슬려 파면되었다.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우헌납(右獻納)이 된 뒤 병조정랑과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거쳐, 1416년 사예(司藝), 1418년에 사인(舍人)을 지냈다.
1419년(세종 1) 집의(執義)가 되었으며, 사은사 경녕군(敬寧君) 비(裶: 태종의 제1서자)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과 좌대언(左代言)을 차례로 지냈다.
1423년 집현전부제학이 된 뒤 예조판서·대사헌·함길도도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에는 평안도도관찰사가 되었다.
1430년 경창부윤(慶昌府尹), 1432년 경기도관찰사, 이듬해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며, 1435년 이조판서, 143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계품사(計稟使) 혜령군(惠寧君)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그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1439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1442년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하여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인 신개(申槩)와 함께 《고려사》를 찬진(撰進)하였다.
이듬해 좌참찬으로 전라도도관찰사가 되었고, 1444년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 이듬해에는 우찬성이 되어 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 등과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다.
시호는 문경(文景)
*권극화(權克和)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용부(庸夫), 호는 습재(習齋). 아버지는 삼(參)이다.
1411년(태종 11) 소과를 거쳐 1414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직강 등 여러 관직을 지내고, 1439년(세종 21)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446년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기민(飢民)의 구제를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로 이듬해에 장성에 유배되었다.
1450년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이조참판에 올랐는데 충청도관찰사 재직시, 세종조에 새로 제정된 연분구등(年分九等)·전분육등(田分六等)의 공법(貢法)을 비판하였으며, 이조참판 때에는 관찰사가 목(牧)의 행정을 겸하도록 하는 겸목제(兼牧制)의 실시를 반대, 중지하게 하였다.
관직은 중추원부사를 거쳐 1453년(단종 1) 행첨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시문이 다수 전한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권채(權採) 1399년(정종 1)∼1438년(세종 2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서(汝鋤).아버지는 제학(提學) 우(遇)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판사(判事) 빈(贇)의 딸이다. 양촌 근(近)의 조카이다.
1417년(태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25년(세종 7) 집현전수찬에 임명되었고, 142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집현전응교가 되었다. 그해에 비첩(婢妾)을 학대한 죄로 부처(付處)되었다가 얼마 뒤 석방되었다.
1430년 변계량(卞季良)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33년 대사성이 되어 송조고사(宋朝故事)에 따른 과거제도의 개선책을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1435년에는 동부승지가 되고, 다음해 우부승지가 되었다.
1438년 유호통(兪好通)·노중례(盧重禮)·박윤덕(朴允德) 등과 함께 《신증향약집성방 新增鄕藥集成方》을 편찬, 간행했다. 그해에 우승지가 되었으나 40세로 죽었다.
시문과 경학에 뛰어나서 세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으며, 《작성도 作聖圖》를 저작하였다.
시문으로 당시 그의 종형인 제(踶)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권항(權恒) 1403년(태종 3)~미상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변지(變之). 조부는 권의(權義). 아버지는 권심(權深)
외조부는 손숙오(孫叔敖). 처부는 유서(柳湑)
생원으로 세종(世宗) 23년(1441) 문과급제.
성균사예. 지병조사. 영천(영주) 군수. 사헌부집의. 증 이조참의
*권람(權擥)1416년(태종 16)∼1465년(세조 1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찬성사(贊成事) 근(近)의 손자이며, 우찬성 제(踶)의 아들이다
문종(文宗) 즉위년(1450) 문과장원급제. 정난 1등 공신
승지. 이조참판. 이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
세조묘(世祖廟)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권징(權徵) 1426년(세종 8)~미상
본관 안동(安東). 호는 등암(藤巖). 조부는 권해(權諧). 권가후(權可後)
세종(世宗) 29년(1447)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종(文宗) 즉위년(1450)에 문과에 급제
공조좌랑. 북평사. 정언
*권반(權攀) 1419년(세종 1)∼1472년(성종 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룡(子龍), 호는 무진(無盡).
조부는 찬성사 근(近), 아버지는 찬성 제(踶), 형은 우의정 남(擥)이다.
음보로 당상관이 된후 세조의 명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판, 한성부윤이 되었다.
산군(花山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권정(權侹) 조선 성종 때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증조부는 권근(權近). 조부는 권제(權踶). 아버지는 권지(權摯)
세조(世祖) 12년(1466) 알성시 갑과 3등으로 급제.
훈련원첨정. 성종 14년 황주목사. 병조참의. 대사간. 성종 19년 이조참의. 예조참판
연산군 2년 영안도관찰사.
*권경우(權景佑)
본관은 안동(安東). 아버지는 권질(權耋)
문과급제. 성종 24년 동부승지. 호조참판
*권건(權健) 1458년(세조 4)∼1501년(연산군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강(叔强). 증조부는 근(近), 아버지는 우의정 남(擥)이며, 중종의 열한번째 아들인 전성군(全城君) 변(邊)의 장인이다.
1472년(성종 3) 진사가 되고, 1476년 문과에 급제.
사가독서하고 감찰. 교리. 응교. 전한. 동부승지. 부제학이 되고,
1486년 예조참판, 이듬해 대사헌·한성부좌윤·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1500년 병조참판으로 성현(成俔) 등과 함께 《역대명감 歷代明鑑》을 편찬하였다.
이듬해 병으로 사임했으나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문명이 높았으며, 《동문선》에 시문이 10여편 전한다.
저서로는 《권충민공집 權忠敏公集》이 있다.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권 건(權建):?~1486(성종 17).
본관 안동(安東). 자는 자건(子建). 호는 지산(芝山).
조부는 권심(權深). 아버지는 권항(權恒). 외조부는 유서(柳湑). 처부는 전유의(全由義)
성종(成宗) 8년(1477) 문과에 장원급제. 1483년(성종 14) 이조좌랑으로 재임 시 임금이 泰慶殿에 거동하려고 承華門에 이르렀을 때, 문을 열지 못한 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그 해에 졸하였다
*권주(權柱) 1457년(세조 3)∼1505년(연산군 1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지경(支卿), 호는 화산(花山). 이(邇)의 아들이다.
1474년 진사시에 합격, 1480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승정원주서. 강경문신. 공조정랑. 지평, 사간원헌납. 홍문관부응교를 역임하고,
1499년 2월에 찬진된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홍문관부제학. 우부승지, 우승지, 도승지를 지내고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1502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에 걸쳐 동지중추부사로서 하정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503년 4월 동지중추부사로서 동지성균관사를 겸임, 같은해 10월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었고, 1504년 윤4월 정축일에 갑자사화가 발발하면서 1482년(성종 13) 연산군 생모인 폐비윤씨의 사사(賜死) 때에 승정원주서로서 사약을 받들고 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으며, 그달 경진일에 사사시켜야 한다는 전지가 있었으나, 유순(柳洵)·김수동(金壽童) 등의 “권주는 그 당시에 주서로 단지 승지의 지휘에 따랐을 뿐이다.”는 계(啓)에 따라 사형을 면하고 장형(杖刑)을 받은 뒤 평해(平海)로 귀양갔다.
그러나 1505년 6월 폐비윤씨의 사사 때에 사약을 받들고 간 것으로 거듭 논죄되면서 사사되었고, 형제자매도 아울러 외방에 부처(付處)되었다.
1506년(중종 1) 10월 우참찬에 추증되면서 신원되었고, 같은해 11월에 환장(還葬)이 허용되었다. 젊은 나이로 등제하였으나 문학에 뛰어나 명성이 있었고, 중국어에 능통하여 대명외교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문집의 서문은 창설재 권두경이 지었다
*권균(權鈞)1464년(세조 10)∼1526년(중종 2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정경(正卿). 현감 형무(逈武)의 아들이다.
1486년(성종 17) 생원·진사가 되고, 149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충익부도사(忠翊府都事)를 지내면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연산군 때에 장령·사간·도승지를 역임하며 연산군을 잘 보필하였다 하여 금대(金帶)를 하사받는 등 신임이 두터웠다.
그러나 연산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4등에 녹공되고, 영창군(永昌君)에 봉해졌다.
그 뒤 의정부좌참찬을 거쳐 1508년(중종 3)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좌찬성.
영경연사(領經筵事)·우의정을 역임하고, 영창부원군(永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성품이 엄격하고 재주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권벌(權橃) 1478년(성종 9)∼1548년(명종 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훤정(萱亭)·송정(松亭).
아버지는 성균생원 증영의정 사빈(士彬)이고, 어머니는 주부 윤당(尹塘)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 진사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예문관검열, 홍문관수찬·부교리·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상변(上變)하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계(堂上官階)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직신(直臣)으로 이름을 떨쳤다.
1514년 이조정랑에 임명되었고, 그 뒤 호조정랑이 되었으나 얼마 뒤 영천군수가 되었다.
1517년 장령을 역임하고, 1518년 승정원동부승지·좌승지·도승지와 예문관직제학 등을 거쳐, 1519년 예조참판에 임용되었다.
이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고 하였다.
그 뒤 아버지가 연로하고 풍병(風病)이 있음을 들어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갔다.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였다.
그 뒤, 15년간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임명되었고, 밀양부사를 거쳐, 1537년 12월 한성부좌윤, 이듬해 2월에는 경상도관찰사, 10월에는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539년 3월에 병조참판에 임용되고, 6월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7월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동지사 임권(任權)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1540년 병조판서·한성부판윤에 임용되었으며, 1541년 5월 예조판서, 11월 의정부좌참찬에 임용되었다. 1544년 정월 다시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1545년(인종 1) 5월 의정부우찬성이 되었고, 같은해 7월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해 8월 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허자(許磁)·임백령(林百齡) 등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대윤 윤임(尹任)세력을 배척하자, 이에 반대하여 윤임·유인숙(柳仁淑)·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啓辭)를 올리기도 하였다.
곧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었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으나, 9월 우의정 이기, 우찬성 정순붕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되었고, 10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처음 구례로 유배지가 결정되었으나, 곧 태천(泰川)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삭주(朔州)에 이배되어 이듬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는 재직기간 동안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참찬관(參贊官) 등으로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하였으며, 중종조 조광조·김정국(金正國)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개혁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567년 신원(伸寃)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독서를 좋아해 《자경편 自警篇》과 《근사록 近思錄》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
저서로는 《충재선생문집》 9권 5책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권예(權輗) 1495년(연산군 1)∼1549년(명종 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신(景信), 호는 마애(磨厓). 철경(哲經)의 아들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임명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예문관대교로 조광조(趙光祖)일파의 탄압을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1522년 홍문관부수찬을 역임하고, 1526년 사헌부지평에 기용되어 적극적으로 간쟁활동에 나섰다. 이어서 홍문관교리·사간원사간·홍문관직제학 등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고, 1529년 강원도어사가 되어 민정을 순찰하고, 탐관으로 지목되고 있던 평해군수 최수진(崔秀珍)을 파직시켰다.
이어서 내직으로 옮겨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치고, 이듬해에는 대사간으로서 당상관에 올랐다. 이때 홍문관의 운영이 대신들에 의하여 좌우됨을 보고, 홍문관은 공론(公論)의 발원지임을 들어, 그 직무의 공정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김안로(金安老)와 손을 잡고 복성군옥사(福城君獄死)를 일으켜 심정(沈貞)·성세창(成世昌) 등을 탄핵, 파직시키고 사사(賜死)하였다.
그 뒤, 홍문관부제학·대사헌 등 언관을 역임하였고 공조참판·호조참판·병조참판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옮겨 형조판서·대사헌·이조판서·우참찬에 이르렀다.
그러나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되고, 그 일파가 축출되면서 심언광(沈彦光)·심언경(沈彦慶)과 아울러 파직, 안동에서 10여년 은거하다가 죽었다.
성품은 강경하여 나서기를 좋아하였고, 자질이 총민하였으며, 근검하여 요직을 역임하고 권력을 장악한 바 있어도 가산을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문집으로 《마애집》이 전한다.
*권전(權磌) 1490년(성종 21)∼1521년(중종 16).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안(君安). 아버지는 참판 주(柱)이다.
1510년에 생원이 되고, 1519년에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수찬으로 재직중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다.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沈貞)·남곤(南袞) 등이 세력을 떨치자, 안처겸(安處謙)·이정숙(李正淑) 등과 함께 남곤·심정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린다 하여 이를 제거할 것을 모의한 것이 송사련(宋祀連)에 의하여 고발당하였다.
그 결과 안당(安瑭)과 그의 아들 처겸, 유인숙(柳仁淑)·정순붕(鄭順朋)·신광한(申光漢) 등과 함께 체포되어 곤장 170도를 맞고 죽었으며, 며칠 후에는 그의 시체에 대해서도 형벌이 가해졌다.
성균관의 유생으로 있을 때에는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를 문묘에 배향할 것과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직접 쓰기도 하였다.
*권춘란(權春蘭)1539년(중종 34)∼1617년(광해군 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
아버지는 증좌승지(贈左承旨) 석충(錫忠)이며, 어머니는 함창김씨(咸昌金氏)이다.
백담 구봉령(具鳳齡)·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0년(명종 15)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학유·학록을 거쳐 예문관검열·사헌부감찰·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김윤명(金允明)의 의병에 가담하였다.
1595년 정월 사헌부장령을 거쳐, 3월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 6월 사간원사간에 임명되었다.
1597년 5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으며, 6월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을 거쳐, 그 뒤 성균관직강·사간원사간·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임명되었다.
1599년 성균관사성에 임명되었으며, 1601년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
1604년 홍문관수찬, 1606년 다시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영천군수·홍문관부교리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초야에서 글을 읽으며 여생을 보냈다.
스승 구봉령의 유문(遺文)을 교정하여 완고(完稿)로 만들었고, 사림에서 구봉령을 모시기 위하여 주계서원(周溪書院)을 건립하는 데 앞장섰다. 주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진학도 進學圖》·《공문언행록 孔門言行錄》·《회곡집 晦谷集》 등이 있다.
*권태일(權泰一) 1569년(선조 2)∼1631년(인조 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수지(守之), 호는 장곡(藏谷).
조부는 권석충(權錫忠). 아버지는 내시교관 춘계(春桂), 백부인 집의 춘란(春蘭)에게 입양되었다. 외조부는 소고 박승임의 형인 박승간(朴承侃). 처부는 학봉 김성일(金誠一)이다
학봉 김성일과 백담 구봉령(具鳳齡)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 2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등용되고, 이어서 검열·승정원주서·시강원설서·정언·이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고 병으로 사임했다.
뒤에 다시 홍문관수찬으로 복직하고, 이어서 이조정랑을 거쳐 영덕현령으로 4년간을 재임하면서 큰 치적을 올린 공으로 왕으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았다.
이어 곧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요양한 뒤 사성으로 복직했다.
그뒤 풍기군수를 거쳐 동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경주부윤으로 나가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다시 호조참의·좌부승지를 거친 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의 지방관을 희망, 죽주부윤(竹州府尹)으로 나갔다가, 1623년(인조 1)에 좌승지로 들어왔으나 곧 전주부윤으로 나갔다.
그뒤 병조참의·충주목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승진, 지방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이듬해에 대사간을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고, 그뒤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가도(椵島)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졸하였다.
저서로는 《장곡집》이 있다.
*귄위(權暐)1552(명종 7, 임자)~1630(인조 8, 경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회(叔晦), 호는 옥봉(玉峯),
아버지는 심행(審行)이며, 학봉 김성일, 유일재 김언기, 월천 조목의 문인이다.
어려서 동당시(東堂試) 별시(別試)에 합격하였으며 1601년 문과 급제 하였다. 전적(典籍) ·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호조좌랑 ·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뒤에 형조 ·예조정랑을 제수받았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권환(權寏)1580년(선조 13)∼1651년(효종 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택보(宅甫), 호는 이우당(二愚堂).
아버지는 증사헌부집의 대기(大器)이며, 어머니는 흥해배씨(興海裵氏)로 희도(希度)의 딸이다. 송소 권우(權宇)의 동생.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인.
1610년(광해군 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부장(副將)이 되어 죽령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강화가 성립되어 적이 물러가 전투에 임하지는 못하였다.
1635년 장릉참봉에 천거되었으며, 그뒤 사옹봉사·직장 등을 지냈다.
1639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으며, 1640년 예부좌랑, 1641년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 1646년 강원도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전형적인 청백리로서 조정에서 임금을 모시고 있을 때는 거침없이 직간을 하여 당시 문란한 당쟁의 와중에서도 공평하고 명분이 뚜렷한 정책을 펴려고 노력하였으며,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학문을 권장하고 풍속을 순화시키는 한편, 인정(仁政)을 널리 펴서 많은 칭송을 받았다. 저서로는 《이우당문집 二愚堂文集》 4권이 있다.
*권 훤(權愃) 1639(인조 17)~1682(숙종 8).
본관 안동(安東). 자는 중화(和仲). 호는 용곡(龍谷).
증조부는 호연(浩然). 조부는 경행(景行). 아버지는 정(挺). 숙부는 군수 박(搏)
1663(현종 4) 생원시 합격. 1669년(현종 10) 문과 급제.
현종 11년 성균관학록. 학정이 되고, 1675(숙종 원년) 공조정랑. 6월 문경현감. 숙종 3년
성균사예. 5월 정평부사(定平府使)로 나갔다.
경신대출척(1680)때 삭탈되어 향리로 돌아와 일생을 마쳤다. 저서:『龍谷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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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경(權斗經) 1654년(효종 5)∼1725년(영조 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천장(天章), 호는 창설재(蒼雪齋).
충정공(忠定公) 충재 벌(橃)의 5세손으로 조부는 군자감정 석충(碩忠)이며,
아버지는 유(濡)이고,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이며, 부인은 표은 김시온(金是榲)의 딸이다.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닐암 이재(李栽) 등과 교유하였다.
1679년(숙종 5)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89년 문학으로 천거되고, 1694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태릉참봉(泰陵參奉)·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직장(直長)·종부시주부를 거쳐, 형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700년 봄 정랑(正郞)에 승진되었으나 곧 이어 영산현감(靈山縣監)으로 부임하여 풍속을 크게 교화시켰다.
숙종(肅宗) 36년(1710) 문과에 급제, 성균관직강·전라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그 뒤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이변이 있자, 사직 상소를 올려 시정(時政)의 잘못에 대해서 논하였다.
1717년 영남에서 1만 여인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릴 때 그 상소문을 기초하였다.
1721년 경종이 즉위하자 고산찰방(高山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 귀향하였다.
1723년(경종 3)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 뒤 수찬이 되어 시정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문장이 뛰어났는데, 특히 시에 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산천의 형세, 인물의 출처(出處), 세대의 변혁, 동방군신(東方君臣)의 현부(賢否), 정치의 득실(得失) 등에도 예리한 안목이 있었다.
저서로는 《창설집》이 있고, 편서로는 《퇴계선생언행록 退溪先生言行錄》과 《도산급문제현록 陶山及門諸賢錄》이 있다.
*권두기(權斗紀)1659년(효종 10)∼1722년(경종 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장(叔章), 호는 청사(晴沙).
좌찬성 벌(橃)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유(濡)이다.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의 동생
1687년(숙종 1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96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1701년 예조좌랑을 지낸 뒤 잠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가 다시 해운판관(海運判官)을 지냈다.
1707년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어, 시사를 논하다가 파직, 유배된 수찬 김세흠(金世欽)의 억울함을 상소하였으나 왕의 노여움을 사 해남으로 귀양갔다.
1711년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정언으로 복직되었다.
*권 주(權霔):1627(인조 5, 정묘)~1677(숙종 3, 정사).
본관 안동(安東). 자는 덕우(德雨). 호는 남계(南溪).
증조부는 청암(靑巖) 동보(東輔). 조부는 래(來). 아버지는 세충(世忠).
외조부는 나재(懶齋) 신열도(申閱道)
1660년(현종 1) 진사시 합격, 1675년(숙종 1) 식년문과 급제.
성균관 학유(學諭) 역임.
*권성구(權聖矩)1642년(인조 20)∼1708년(숙종 3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서여(恕余), 호는 구소(鳩巢).
찬성 충재 벌(橃)의 후손이며, 조부는 승경(承慶) 아버지는 뇌(賚)이다.
백졸암(百拙庵) 유직(柳稷)의 문인이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전적·병조정랑을 지냈다.
1688년 진산현감으로 나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한때 모함을 당하여 벼슬을 떠나 귀향하였다가, 1692년 직강(直講)으로 복직하였다.
이듬해 병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1699년 강진현감에 임명되었으나 그때 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갔다.
저서로는 《구소선생문집》 4권 2책이 전한다.
*권두굉(權斗紘):1668(현종 9, 무신)~1747(영조 23, 정묘).
본관 안동(安東). 초명은 두휘(斗徽). 자는 소장(少章). 호는 서암(西岩).
조부는 석충(碩忠). 아버지는 유(儒). 형은 창설재 두경(斗經). 처부는 조계윤(趙啓胤)
1710년(숙종 36) 생원, 진사양시에 합격하고. 1713년(숙종 39) 문과 급제.
승문원 정자. 그가 죽자 ‘南中失宰相’이라 할 정도로 당시 京鄕에서 重望을 받았다.
묘지명은 눌은 이광정(李光庭)이 찬하였다.
*권일기(權一蘷):1683(숙종 9)~1767(영조 43).
본관 안동(安東). 자는 요경(堯卿). 호는 치암(恥庵).
아버지는 두벽(斗璧)
1721년(경종 원년) 增廣문과 급제. 승문원정자 .
*권만(權萬)1688년(숙종 14)∼1749년(영조 2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일보(一甫), 호는 강좌(江左).
증조부는 석충(碩忠). 조부는 유(濡) 아버지는 두굉(斗紘). 외조부는 조계윤(趙啓胤)
1721년(경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1728년 정자로 재직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장 유승현(柳升鉉)을 도와서 반역을 꾀한 무리들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영조(英祖) 22년(1746) 병조좌랑으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병조정랑이 되었다.
어전(御前)에서 『근사록(近思錄)』을 통강(通講)하여 왕의 칭찬이 있었으나 영진에 뜻을 끊고 향리에 돌아와서 독서와 저술에 힘썼다.
정조 때 창의의 공으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강좌집》이 있다. 행장은 해좌 정범조가 찬하였다.
*권병(權炳) 1723(경종 3)∼1772(영조 4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회(景晦), 호는 약재(約齋),
조부는 태형(泰衡). 아버지는 세해(世楷)이며, 어머니는 전주유씨(全州柳氏)로 득시(得時)의 딸이다.
권구(權榘)의 문인으로, 이상정(李象靖)·이종수(李宗洙) 등과 함께 학문을 하며 교유하였다. 과문(科文)이나 문장보다는 심성(心性)·이기(理氣) 등 성리학의 요체를 연구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원래 과거에 급제해서 출신하는 것은 뜻이 없었으나 연로하신 모친과 백씨의 강권에 못이겨 1763(영조 39)문과에 급제하고 1764년에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올랐으며 1772년 여름 병이 악화되어 사직(辭職)하였다.
행장은 이종수가 지었다.
*권문도(權文度) 1740(영조 16)
본관은 안동(安東).
조부는 정국(正國). 아버지는 사겸(思謙). 외조부는 김중흠(金仲欽)
정조(正祖) 4년(1780) 식년 문과급제.
승정원주서. 정조 20년 사간원정언. 정조 23년 사헌부지평.
*권방(權訪) 1740(영조 16)∼1808(순조 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계주(季周), 호는 학림(鶴林),
아버지는 도(濤). 외조부는 김원열(金元烈). 대산 이상정(李象靖)문인
그는 1763년(영조 39) 생원시에 합격하고, 1767년(영조 43) 석채(釋菜)로 헌납한 일 때문에 하동(河東)에 유배되었다. 1783년(정조 7)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이듬해 소녕원수(昭寧園守)에 제수되었다. 1787년 종부사주부(宗簿寺主簿)를 거쳐 창릉령(昌陵令)이 되었으며, 1788년 부친상을 당하고 복(服)을 마친 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1793년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제수되었으며 사퇴한 후 학가산(鶴駕山) 남쪽에 집을 짓고 `학림`이라 자호(自號)하며 산수를 즐겼다. 1807년 전라도사(全羅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권 회(權襘)1769(영조 45)
본관 안동(安東). 자는 유극(幼極). 아버지는 생원 상윤(相允)
정조(正祖) 19년(1795)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809년(순조 9) 증광문과 급제 승정원주서를 지냈다.
*권달준(權達準) 1782(정조 6)~1865(고종 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립(公立). 호는 포재(苞齋).
아버지는 약회(若會). 외조부는 김태섭(金台燮). 奉化 立石의 權氏入鄕祖
1816년(순조 16) 문과 급제. 지평· 봉화현감· 봉화군수· 장령· 돈녕부도정 역임.
*권종헌(權宗憲):1795(정조 19, 을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야옹(野翁).
아버지는 시달(時達). 외조부는 석취원(石就遠)
1819년(순조 19) 문과 급제. 성균관 典籍 역임
*권교준(權敎準)1803(순조 3,)~1864(고종 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달가(達可). 아버지는 약규(若奎). 외조부는 박정혁(朴廷爀)
헌종(憲宗) 12년(1846) 문과 급제. 승문원 분관. 철종 1년 지평. 철종 6년 장령.
*권영하(權泳夏)1810(순조 10, 경오)~1879(고종 16, 기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유(聖遊). 호는 퇴일헌(退逸軒).
아버지는 재대(載大) 생부는 재원(載遠). 외조부는 김지원(金之源)
사마시를 거쳐 철종(哲宗) 1년(1850) 문과 급제. 홍문관수찬·교리·
고종 1년 동부승지. 대사성 고종 5년 대사간. 고종 9년 이조참의.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墓碣銘」(金興洛 撰)
*권노연(權魯淵):1845(헌종 11, 을사)~1878(고종 15, 무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원(聖源). 호는 하석(霞石).
충재 후손. 조부는 재경(載經). 아버지는 명하(命夏). 외조부는 이종순(李鍾淳)
사마시를 거쳐 철종(哲宗) 6년(1855) 문과 급제. 홍문관교리를 거쳐 1876년 승지 역임
*권호연(權好淵)1824(순조 24)~1865(고종 2).
본관 안동(安東). 자는 희안(希顔). 호는 이산(二山).
아버지는 예안현감 수재(修齋) 택하(宅夏)
헌종(憲宗) 14년(1848) 진사시 합격. 철종(哲宗) 10년(1859) 문과 급제.
철종 10년 승문원분관. 초계문신. 가주서. 고종 2년 승정원주서. 겸춘추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역임.
*권재철(權載喆)1826(순조 26)~1884(고종 21).
본관 안동(安東). 자는 치운(致雲).
두응(斗應)의 후손. 조부는 사임(思任). 아버지는 구도(球度). 외조부는 금여관(琴汝觀)
철종(哲宗) 12년(1861) 식년시(式年試) 생원 1등(一等) 3위로 합격하고,
고종(高宗) 6년(1869) 문과에 급제. 고종 7년 사간원 정언. 고종 19년 홍문관 수찬.
기개가 호탕하고 성품이 곧아 직언을 서슴지 않아 흥선대원군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권유하(權有夏) 1852(철종 3)~1922.7.31
본관은 안동(安東). 본명은 권내하(權內夏). 호는 죽파(竹坡).
아버지는 수적(秀적). 생부는 수현(秀玹)
고종(高宗) 29년(1892) 별시 문과 을과 1위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를 지내고,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재야 유생층이 1904년 8월 서울에서 조직한 충의사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강릉김씨 1명
*김팔원(金八元) 1524년(중종 19)∼1589년(선조 22).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순거(舜擧) 또는 수경(秀卿), 호는 지산(芝山).
아버지는 삼척훈도(三陟訓導) 적(績)이며, 어머니는 영춘이씨(永春李氏)로 자운(自芸)의 딸이다.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신재 주세붕(周世鵬)· 퇴계 이황(李滉) 문인.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에는 선생이 시를 지어 그의 훌륭한 문장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목(趙穆)·구봉령(具鳳齡) 등과 산사에 모여 학문을 강마하였으며, 조목과 함께 〈인심도심도 人心道心圖〉를 만들기도 하였다.
1555년(명종 10) 사마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562년 학록(學錄)에 임명된 뒤 박사·전적·예조좌랑을 거쳐 용궁현감 등을 지냈다.
옥계서원(玉溪書院)·보구서원(洑邱書院) 등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지산문집》이 있다.
순천김씨 5명(2)
*김유온(金有溫) 고려말 조선초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아버지는 좌정승을 지낸 평양 부원군(平陽府院君) 김승주(金承霔)이다.
정종 때 문과에 급제. 공조정랑. 지안산군사. 세종 29년 형조참의. 문종 1년 예조참의.
만년에 안동 구담에 은거하였다. 부인은 검교첨의평리 최안도(安道)의 딸이다.
*김희열(金希說) 생몰년 미상.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상경(商卿), 호는 가정(柯亭). 아버지는 약평(若枰)이다.
1519년(중종 1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고, 1525년 지평에 임명된 뒤 문학을 거쳐 헌납이 되었다.
1527년에는 병조정랑·부교리를 거쳐 교리가 되었고, 이어서 장령·응교·사인(舍人)을 거쳐 1533년에는 사간·집의·동부승지를 역임하고, 1537년 한성부우윤이 된 뒤, 병조·예조·호조의 참판을 차례로 거쳤다. 1540년 개성유수, 1542년 한성부좌윤에 이어서 전주부윤 등을 역임하였고, 1551년(명종 6)에는 경주부윤을 지냈다.
*김윤안(金允安) 1562년(명종 17)∼1620년(광해군 12).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이정(而靜), 호는 동리(東籬).
아버지는 현감 박(博)이다.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 때 김해(金澥) 휘하에서 형 윤명(允明)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604년 생원으로 상소를 올려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으나, 선조가 이언적(李彦迪)의 사적에 미심쩍음이 많다고 하여 부당하다는 전교를 내렸다.
1612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대구부사·대사간을 역임하였다.
특히 대구부사로 있을 때, 백성을 관대하게 다스리고 권세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동계 정온(鄭薀)이 영창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제주로 유배될 때에는 시를 지어 그를 위문하였다. 학봉 김성일의 아들 애경당 집과 경당 장흥효와 같이 학봉선생의 행장을 한강 정구에게 위촉하였다.
*김하세(金夏世) 1630(인조 8)~1712(숙종 38)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일세(逸世). 호는 상양(徜洋)
증조부는 동리 윤안(允安). 아버지는 여회(如晦)
숙종(肅宗) 1년(1675) 문과급제. 숙종 7년 성균관 학록. 다음해 학정, 박사가 되고,
숙종 9년 봉상시주부. 숙종 10년 정의현감(旌義縣監)으로 나갔다. 숙종 15년 사헌부 감찰.
숙종 16년 1월 예조정랑이 되고. 3월에 영월현감으로 나갔다가 숙종 19년 예조정랑이 되고
숙종 20년 선공감부정. 장악원 정을 역임하였다.
*김기황(金基璜) 1841(헌종 7)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취담(翠潭)
동리 김윤안의 후손. 아버지는 성건(性健)
고종(高宗) 20년(1883) 문과급제. 정언
안동김씨 16명(12)
*金益精 太祖朝文魁官吏參
김익정(金益精) 미상∼1436년(세종 1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비(子斐). 아버지는 한성윤 휴(休).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하여 1409년(태종 9) 장령이 되었다.
그 뒤 헌납·예문관직제학·승정원우대언을 역임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가 충청·전라·경기의 삼도 감사를 지냈다. 내직으로 돌아와서 1422년 승정원지신사가 되어 군정(軍政)의 확립을 건의하였으며, 1425년 대사헌에 올랐다.
1430년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으며,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과 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이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고, 이조좌참판이 되었다.
1435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김돈(金墩) 1385년(우왕 11)∼1440년(세종 22).
본관은 안동(安東).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의 후(厚)이며, 아버지는 칠양(七陽)이다.
1417년(태종 17)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직제학과 승지를 거쳐 벼슬이 참판·좌승지·인순부윤(仁順府尹)에까지 이르렀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의 이름을 듣고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급제하자 임금이 “내가 경을 보고자 하였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제는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라고 기뼈하였다 한다.
1428년(세종 10) 왕명으로 《서한이하역대보계도 西漢以下歷代譜系圖》를 찬진하고, 종학박사와 사성을 역임하였다.
1434년 집현전직제학으로 동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는 집현전부제학으로 불교의 폐단에 대하여 왕에게 상소하고, 그뒤 부승지가 되었다.
1438년 도승지가 되었으며, 탐라에 있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여러 차례 외직을 원하였으며, 특히 역마를 보내어 탐라에 있는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봉양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편, 천문관측에 정통하여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도 참여하였다. 한때 귀양가는 이숙번(李叔蕃)이 순금띠를 주면서 자신의 구출을 의뢰하자, 여러 방법으로 구출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세종의 명으로 김조(金兆)와 함께 천추전(千秋殿) 서편 뜰에다 흠경각(欽敬閣)을 창설하고, 종이를 뭉쳐서 산을 만들되 높이가 일곱자 되게 하고, 또 그 안에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여 바퀴물로써 돌게 하였는데, 해의 도수와 그림자 누수(漏水)의 시각이 하늘의 운행과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고 한다.
산의 사방에는 사시(四時)의 경물(景物)과 사람·새·짐승·초목의 형상을 만들어 그 절후에 맞추어놓아 백성이 농경의 어려움을 알도록 하였다.
또, 누기(漏器)를 설치하고 이름을 ‘보루각’이라 하고 이층으로 만들어 삼신(三神)을 그 위에 설치하였는데, 시간을 알릴 때는 종을, 경(更)을 알릴 때는 북을, 점(點)을 알릴 때는 징을 울리게 만들었다.
승지로 7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논변이 상세하고 분명하였으며, 집현전출신으로 박학다식하고, 특히 과학기기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이었다.
*김질(金礩) 1422년(세종 4)∼1478년(성종 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
증조부는 개국공신 사형(士衡),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종숙(宗淑), 부인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딸이다.
1450년(문종 즉위) 문과급제. 좌익공신. 승지. 병조참판. 평안감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우참찬. 경상감사. 우의정. 좌의정.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2등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김수령(金壽寧) 1436년(세종 18)∼1473년(성종 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이수(頤叟), 호는 소양당(素養堂).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었던 숙(潚)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안숭선(安崇善)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집현전수찬에 승진되고 이어 병조좌랑·헌납·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부터 1462년까지 함길·평안·강원·황해·충청 5도의 체찰사인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이 되어 세조의 변방정책 수행에 주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1463년 집의에 오르고 그뒤 동부승지, 1465년에는 좌승지를 거쳤다.
1468년 호조참의로 세조의 《주역구결 周易口訣》 간행에 참여하였다.
1469년(예종 즉위) 공조참의가 되고 이어 형조·호조의 참의를 거쳐 1470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 재직시에는 성종에게 경연을 권고하는 명상소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1471년 성종을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뒤에 공조참판과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사재(史才)가 있어서 1458년에는 《국조보감 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고, 1463년에는 양성지(梁誠之)·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편찬하였으며, 성종 초기에는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김뉴(金紐) 1420년(세종 2)∼미상.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취헌(翠軒)·쌍계재(雙溪齋)·관후암(觀後庵) 또는 상락거사(上洛居士).
아버지는 중엄(仲淹)이고, 어머니는 조준(趙浚)의 손녀이며 대림(大臨)의 딸이다.
1464년(세조 10) 문과에 급제. 호조좌랑이 되고 등준시에 급제하여 예문관직제학.
동부승지. 공조참판. 충청감사. 대사헌. 이조참판
행서와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 하여 ‘3절(三絶)’이라 불리었고 그림 또한 잘 그렸다. 글씨로는 해동명적(海東名跡)·초로관주(草露貫珠) 등에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김작(金碏) 1427년(세종 9)∼1488년(성종 1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위경(衛卿), 호는 상곡(相谷).
증조부는 좌의정 사형(士衡), 할아버지는 승(陞), 아버지는 종숙(宗淑)이다.
1447년(세종 29) 생원이 되고, 문음 선공감녹사. 전농시직장. 종부시소윤. 장령을 지내고
1477년(성종 8) 첨정으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대사간 등을 두루 역임하고, 1482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경기관찰사를 거쳐 1484년에 병조참판·수지중추부사, 1487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효소(孝昭)이다.
*김수동(金壽童) 1457년(세조 3)∼1512년(중종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미수(眉叟), 호는 만보당(晩保堂).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사형(士衡)의 후손이며, 첨지중추부사 적(磧)의 아들이다.
1474년(성종 5) 생원시에 합격. 1477년에 문과급제
예문관주서·홍문관정자·의정부사인. 사헌부장령 전한(典翰)· 직제학·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 승정원동부승지를 제수받고, 이듬해 좌승지를 거쳐, 그해 여름에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다시 이듬해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성학심법 聖學心法》 4권을 구하여 왔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이조참판·경기관찰사·형조판서 겸 지춘추관사·홍문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1504년 47세 때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해 갑자사화 때 그는 폐비윤씨의 회릉추숭(懷陵追崇)을 주장, 시행함으로써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506년 어머니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물러났으나, 왕명으로 단상(短喪)으로 마치고 3개월 만에 우의정에 부임하였다.
이때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좌의정에 오르고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연산군에게 충실하였다고 사림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1510년 영의정에 올라, 그때 일어난 왜변의 진압을 총지휘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품성이 단정하였으며, 청탁을 모두 거절하고 검약한 생활을 즐겼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계행(金係行) 1431년(세종 13)∼1521년(중종 16).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아버지는 비안현감 삼근(三近)이다.
1447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익혔다.
그 뒤 성주·충주의 향학교수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하고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어 직언을 잘하였다. 이어서 고령현감이 되어 선정을 펴고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부수찬이 되었으며, 그뒤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1498년(연산군 4) 대사간에 올라 권간(權奸)을 극론하였으나 훈구파에 의해 제지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풍산사제(蘴山笥堤) 위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하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니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 불리었다.
김종직 등과 교유한 것으로 말미암아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큰 화는 면하였다.
1706년(숙종 32) 지방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에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김영(金瑛) 1475년(성종 6)∼1528년(중종 2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영지(英之), 호는 삼당(三塘). 장령 영수(英銖)의 아들이다.
1506년(연산군 12) 별시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로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이듬해에는 대교에 올라 김흠조(金欽祖)·정충량(鄭忠樑) 등과 더불어 사신의 정도를 내세우며 사초문제(史草問題)로 빚어졌던 무오사화의 피화인(被禍人)의 신원을 상소하였다.
그 뒤 수찬·정언·홍문관교리·사헌부장령 등 청요직을 지냈으며, 1518년(중종 13)에는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災傷敬差官)이 되었다가 곧 김제군수로 외직에 나갔다.
사헌부장령. 동부승지. 이조참의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문집으로 《삼당집》이 있다.
*김희수(金希壽) 1475년(성종 6)∼1527년(중종 2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몽정(夢禎), 호는 유연재(悠然齋).
조부는 감사 자행(自行)이며, 아버지는 숙연(叔演)이다.
1507년(중종 2) 참봉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듬해 검열 권벌(權橃), 봉교 이희증(李希曾)·김영(金瑛), 대교 윤인경(尹仁鏡) 등과 함께 무오사화에 대해 논계(論啓)하고 김종직(金宗直)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또, 왕은 천륜에 따라 덕치정치를 행하여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측근의 신하들이 필요하고 간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언하기도 하였다.
그 뒤 1509년에 정자·박사가 되고, 이어 지평·검상이 되었다.
1514년 장령을 지냈으며, 1517년 집의·참찬관 등을 거쳐 1520년 우부승지, 이듬해 좌부승지가 되었으며, 1524년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 대사헌과 경상도감사로 나갔다.
그때 그곳의 사송(詞訟)이 적체되었다 하여 중앙에서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1527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해서(楷書)에 능하였다.
동래의 낙안서원(樂安書院)에 제향되었다.
*김번(金璠) 1479년(성종 10)∼1544년(중종 3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문서(文瑞).
아버지는 장령 영수(永銖)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로 현령 박(博)의 딸이다.
1498년(연산군 4) 진사에 합격하고, 151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군자감직장을 거쳐 성균관전적·예조좌랑·병조좌랑·경기도사·헌납·이조정랑·병조정랑·예조정랑·제용감첨정·평양서윤·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전적 때 관북 지방에 가뭄과 메뚜기 피해로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삼남(三南)의 곡식을 조운할 마땅한 사람을 고르지 못할 때 낮은 관직으로 뽑혀 명성과 경륜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평양서윤이었던 1523년 관서 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자, 둔전책(屯田策)을 건의하고 농업에 힘쓰고 민식(民食)과 창름(倉廩)을 넉넉히 하며 군졸에게 잡다한 세(稅)를 없애주어 백성의 주거를 편안하게 하였다.
*김상헌(金尙憲) 1570년(선조 3)∼1652년(효종 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중년 이후 楊州 石室에 退歸해 있으면서 사용)·서간노인(西磵老人: 만년에 安東에 은거하면서 사용).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극효(克孝)의 아들이며, 우의정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중에 보인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부수찬·좌랑·부교리를 거쳐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安撫御史)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복명, 고산찰방(高山察訪)과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 문과중시에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교리·응교·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였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이 발생,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김상헌의 아들 光燦이 김제남의 아들 𤥵의 사위가 됨.)로 인해 파직되자 집권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하여 안동군 풍산으로 이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是非)와 숙특(淑慝: 善惡)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6년(인조 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 데 반대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예조판서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수업하고, 성혼(成渾)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으며, 이정구(李廷龜)·김유(金楺)·신익성(申翊聖)·이경여(李敬輿)·이경석(李景奭)·김집 등과 교유하였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61년(현종 2)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계광(金啓光)1621년(광해군 13)∼1675년(숙종 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겸(景謙), 호는 구재(鳩齋).
아버지는 학(學)이며, 어머니는 전주유씨(全州柳氏)로 우잠(友潛)의 딸이다.
어려서 외조부로부터 배웠고, 학사 김응조(金應祖)에게 수학하였다.
경학과 성리학에 밝았다.
1654년(효종 5)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시작으로 가주서(假注書)·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성균관직강 겸 춘추관편수관을 거쳐 풍기군수가 되었다.
그가 가주서로 있을 때는 경연에 입시, 강의기록을 잘 하여 왕으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으며, 풍기군수로 재직할 때는 백운서원(白雲書院)에서 선비들을 가르쳐 유학을 크게 진작시켰다. 뒤에 고을 사람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그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저서로는 《구재문집》 4권이 있다.
*김하윤(金夏鈗)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위중(威中)
증조부는 동리 윤안(允安). 아버지는 여만(汝萬)
숙종(肅宗) 19년(1693) 문과급제. 가주서. 한림. 찰방
*김양근(金養根)1734년(영조 10)∼1799년(정조 2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선오(善吾), 호는 동야(東埜).
제순(濟淳)의 아들이며, 첨지중추부사 우순(宇淳)에게 입양되었다.
1763년(영조 39) 사마시를 거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보직되고 이듬해 만녕전별검(萬寧殿別檢)에 이어 전적과 병조낭관 등을 지냈다.
1773년 시폐(時弊)를 논하는 상소를 올려 문제가 되자, 낙향하였다가 이듬해 지평에 복직되었다.
1786년(정조 10)에는 옛 사람의 선행을 그린 그림을 세자에게 바쳐 모범으로 삼도록 하여 정조의 칭송을 받았다. 뒤에 현풍·음죽(陰竹)의 현감을 역임하였고, 1799년 통정대부에 가자되어 형조참의를 지냈다.
문집으로 《동야집》 14권 6책이 있다.
*김장한(金章漢) 1833(순조 33)
본관은 안동(安東). 아버지는 정진(鼎鎭). 외조부는 조영식(趙英植)
철종(哲宗) 12년(1861) 문과급제. 철종 13년 정언
예안김씨 1명
*김낙주(金樂周) 1778(정조 2)
본관은 예안(禮安). 아버지는 영립(永立). 외조부는 정필복(鄭必復)
순조(純祖) 10년(1810) 문과 갑과로 급제. 승정원가주서. 순조 20년 사헌부지평
순조 24년 낭천현감(狼川縣監). 순조 33년 사간원정언
의성김씨 38명 (당상관 14명)
김한계(金漢啓) 1414년(태종 14)∼1461년(세조 7).
본관은 의성(義城).자는 형운(亨運), 아버지는 현감 김영명(金永命)이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451년(문종 1) 좌정언(左正言)이 되었으며, 경연(經筵)에 출입하여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직제학을 거쳐 1454년(단종 2) 성균관직강이 되고 이어 승문원교리를 겸하였으며, 또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여 《세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승정원부승지를 지내고 다시 정언이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하여 사직하고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같은해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으나 사양하였다.
*김극일(金克一) 1522(명종 7)∼1585(명종 18). 천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峰).
증 통례 만근(萬謹)의 증손으로, 조부는 증 좌승지 예범(禮範)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진(璡)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병절교위 세경(世卿)의 딸이다.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커서는 아우 명일(明一)·성일(誠一)과 함께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 뒤 수의부위·사용을 거쳐, 1551년에 승문원정자·저작·박사가 되었다.
1553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얼마 뒤 형조좌랑·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홍원현감(洪原縣監)을 역임하였다.
1556년 청홍도도사(淸洪道都事)를 거쳐, 1558년 성균관직강·형조정랑·예조정랑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경상도도사를 거쳐, 1560년에 다시 예조정랑이 되었다. 얼마 뒤 군기시첨정과 평해군수를 역임하였다.
1566년에는 사재감첨정을 거쳐 다시 예천군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569년(선조 2) 성균관사성과 사도시정(司歸寺正)을 거쳐, 외직으로 성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성주목사 시절 ≪계몽익전 啓蒙翼傳≫을 간행해 스승 이황으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1575년 밀양부사에 임명되고, 1582년 내자시정, 이듬해에는 사헌부장령을 겸하였다.
그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했고,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다. 문장은 고결하고 창고(蒼古)해 한 글자도 진부한 말이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시에 뛰어나 시인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저서로는 약봉일고 (藥峰逸稿)가 있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성일(金誠一)1538년(중종 33)∼1593년(선조 26). 천전 /금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진(璡)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이어서 검열·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端宗의 陵)으로 봉축하고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진언하였으며,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이듬해 전적과 형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고, 이어서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쳐 다시 정언이 되어 변장(邊將)으로부터 초피덧저고리〔貂裘〕를 뇌물로 받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탄핵하였다.
이듬해 이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돌아와 이듬해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삼수·길주·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으로서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 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鄭見龍)·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宣傳官)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尹仁涵)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民寃)의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林氏)·나씨(羅氏)간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우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 이황의 《자성록 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이 되고, 이어서 봉상시정·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예빈시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복명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하였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그 뒤 경상우도병마절도사·초유사·경상우도관찰사 겸 순찰사 역임하다가 진주(晋州)에서 병사하였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海槎錄)》·《상례고증》 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복일(金復一) 1541년(중종 36)∼1591년(선조 24). 천전/ 예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
아버지는 생원 진(璡)이며, 관찰사 학봉 김성일(誠一)의 아우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學諭)·전적(典籍)을 역임하고, 형조·호조·공조의 낭관을 지냈다.
그 뒤 전라도어사로 나가 탐학한 관리들을 숙청하였으며, 1587년 울산군수에 이어 창원부사가 되어 폐단이 심한 그곳을 잘 다스렸다. 이어 경주교수(慶州敎授)가 되어 학생들을 경학으로써 인도하여 도의를 크게 일으켰으며, 성균관의 사예·사성 및 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용(金涌) 1557년(명종 12)∼1620년(광해군 12). 천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찰방 수일(守一)의 아들이며,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옮겼다가 천연두가 발병하여 사직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의 검열·봉교, 성균관의 전적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헌납·부수찬·지평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수행하여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교리에 재임중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가 군량미 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이루어져 후원하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서인에 의하여 축출되자, 탄핵을 받아 선산부사로 체직되었다.
이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문교에 힘썼다. 이후 계속되는 대간의 탄핵을 받으며 경직과 외직을 전전하였는데, 일시 제용감정·필선(弼善)·집의 등 경직에 머물다가 예천군수·상주목사·홍주목사 등의 외직을 지내면서 오직 보민(保民)과 흥학(興學)에 힘썼다.
1609년 봉상시정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를 지내고, 1616년에 여주목사로 나갔는데, 이때 나이 이미 60세였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므로 맏아들의 죽음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왔다가 4년 뒤에 죽었다. 안동 덕봉서원(德峯書院)·묵계서원(默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운천집 雲川集》·《운천호종일기 雲川扈從日記》(보물 제484호) 등이 있다.
*김시권(金是權)1583년(선조 16)∼1634년(인조 12). 금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자중(子中), 호는 봉파(鳳坡).
조부는 문충공(文忠公) 학봉 김성일(金誠一)이고, 아버지는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지낸 애경당 김집(金潗)이다. 외조부는 유종례(柳宗禮)이고, 처부는 변경회(邊慶會)이다.
조부 학봉 선생의 문인인 호양(湖陽) 권익창(權益昌)의 문인이다.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합격하고, 1630년(인조 8)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냈다. 1634년(인조 12)에 성균관의 학유·학록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8세 때 어머니가 악성 종기로 인한 통증으로 밤새 고통스러워한 일이 있었는데, 그도 아픔을 못이겨 그치지 않고 소리를 지르니 아버지가 그 까닭을 묻자, “어머니가 통증을 견디지 못하시니, 저 또한 아픈 소리가 저절로 나옵니다. 아픈 곳이 있어서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11세 때 조부 문충공 학봉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50리 길을 슬피 울며 따라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대간(大諫) 고경명(高敬命)이 그 가족을 부친 애경당(김집)에게 의탁하였는데, 애경당이 분상을 가면서 열 살을 겨우 넘긴 공에게 돌보아주도록 하니 공이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 고경명이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례를 치르도록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니, 사람들이 역시 학봉 선생의 손자라고 일컬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등과 의병을 일으켜 조령을 넘으려는 즈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갔다.
*김시주(金是柱) 1575(선조 8)∼1617(광해군 9). 천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이립(以立). 호는 개호(開湖).
조부는 귀봉 수일(守一)이고, 아버지는 운천 용(金涌)이며, 어머니는 진보이씨(眞寶李氏) 첨정(僉正) 준(寯)의 딸이며, 퇴계 이황(李滉)의 손녀이다. 처부는 옥봉 권위(權偉)이다
1609년(광해 1)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1613년(광해 5) 문과에 급제,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발탁되었으며, 병부랑(兵部郞)에 이르렀다. 어버이에게 효심이 지극하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저서로는 ≪개호유고 開湖遺稿≫ 1책이 있다.
*김방걸(金邦杰)1623년(인조 1)∼1695년(숙종 21). 지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흥(士興), 호는 지촌(芝村).
증조부는 약봉 김극일(金克一). 조부는 김철(金㯙) 아버지는 표은 시온(是榲)이다.
외조부는 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 처부는 부사 정언굉(鄭彦宏)아들 정이무(鄭以武)이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75년 지평, 이듬해 정언을 거쳐 장령이 되어 이서(吏胥)들의 방납(防納)으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를 상소하였다.
그뒤 부수찬·수찬 등을 지내고 1689년 사간이 되었으나, 그해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위되자 간관(諫官)으로 왕의 과오를 사전에 방지하지 못한 데 책임을 느껴 낙향했다.
이듬해 승지가 되었으며 1692년에 대사간, 이듬해 대사성을 지냈다.
1694년 당쟁에 의하여 동복(同福)으로 귀양갔으며 다음해에 유배지에서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지촌문집》이 있다.
*김학배(金學培)1628년(인조 6)∼1673년(현종 14). 천전
본관은 의성(의성). 자는 천휴(天休), 호는 금옹(錦翁).
조부는 시경(是檠) 아버지는 암(黯)이다.
표은 김시온(金是榲)의 문인으로 1651년(효종 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663년(현종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68년 정자, 저작, 박사에 올랐다.
1671년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하였다. 그 해 5월에는 고성현령에 제수되었다.
이휘일(李徽逸)과 이현일(李玄逸)과 교유하였다.
*김성구(金聲久)1641년(인조 19)∼1707년(숙종 33). 해저
본관은 의성. 자는 덕휴(德休), 호는 팔오헌(八吾軒) 또는 해촌(海村).
고조부는 부제학 개암 우굉. 조부는 득가(金得可). 아버지는 용양위부호군 추길(秋吉)이다.
외조부는 유화(柳華). 처부는 참봉 권목(權霂)이다.
1662년(현종 3) 생원시에 합격하고 현종(顯宗) 10년(1669)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전적·무안현감·직강·지평·수찬·정언 등을 지냈다. 수찬 재직시 국가재정에 관하여 각사(各司)의 비용과 내탕비(內帑費)를 줄여 진휼비에 보충하는 일과, 경사(經史)를 열심히 강론하여 치도(治道)를 구하는 일 등 수천언의 상소를 올렸고, 정언 재직시에는 당시 형조판서 남구만(南九萬)이 진휼비를 탕감했다고 고발하였다.
1679년(숙종 5) 장령 재직시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누어지면서 논핵(論劾)되어 정의(旌義: 지금의 제주도) 등의 벽지로 쫓겨났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복관되어 대사성·집의·헌납·좌승지·강원도관찰사·병조참지 등을 거쳐 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그 뒤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득세하자 향촌에 물러나서 서사(書史)를 즐기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관직생활에 있어서 공사를 분명히 하였다.
안동의 백록사(柏麓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팔오헌집》이 있다.
*김여건(金汝鍵)1660년(현종 1)∼1697년(숙종 23).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천개(天開).
아버지는 감사 성구(聲久)이고, 외조부는 권목(權霂)이고, 외숙은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이다. 처부는 이휴명(李休命)이다
1687년(숙종 1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지평을 역임하였고, 1693년에는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수찬(修撰)이 되었다.
1690년 정언으로 재직중 세자책봉하례(世子册封賀禮)에 참석하지 않은 영돈령부사 조사석(趙師錫)을 “교만하고 인신(人臣)의 예(禮)가 없다.”고 탄핵하여 귀양보냈다.
그런데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숙종의 미움을 받아 실각하고 소론이 득세하자, 파직당하여 명천(明川)으로 귀양갔다.
저서로는 《북천록 北遷錄》과 잡저(雜著)가 전한다.
*김세흠(金世欽)1649년(인조 27)∼1721년(경종 1). 천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천약(天若), 호는 칠탄(七灘).
고조부는 운천 용(涌). 조부는 임(恁). 아버지는 주부 태기(泰基)이다.
1673년(현종 14) 진사가 되고 1687년(숙종 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93년 홍문록·도당록에 올랐다. 부수찬·지평 등을 역임하고 1698년 교리가 되어 붕당(朋黨)·기강(紀綱)·기근(飢饉) 등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1707년 수찬으로 상소가 지나쳐 장벌을 받아 죽게 된 이잠(李潛)의 구명을 간하다 관작을 삭탈당하고 흥양(興陽)에 유배되었고, 유배에서 풀려나서는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가 독서로 소일하였다. 묘갈명은 김대진(金岱鎭)이 지었다.
*김세호(金世鎬) 1652(효종 3, 임진) ~ 1722(경종 2, 임인) 천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백(京伯). 호는 구주(龜洲).
운천 용(涌)의 현손. 조부는 임(恁). 아버지는 익기(益基).
1681년(숙종 7) 생원시 합격하고, 1690년(숙종 16) 문과에 급제했다.
예문관 검열(藝文舘檢閱). 봉교(奉敎). 경상좌도암행어사(慶尙左道暗行御史)를 거쳐
병조정랑. 사간원사간을 역임했으며, 종형(從兄) 세흠(世欽). 창석(昌錫) 등과 동시에 이름을 날려 ‘의성 김씨 삼학사(義城金氏三學士)’로 칭해졌다. 경사(經史) 및 음양(陰陽)•복서(卜筮)에 정통했으며, 숙종이 경연 때 주역의 뜻을 묻자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는데 그가 정연하게 풀이했다. 문장은 격조가 높고 건실하여, 당대의 명사들이 모두 ‘금석문(金石文)의 일인(一人)’이라고 추중(推重)했다. 저서에 『장고세고(長皐世稿)』가 있다. 묘갈명은 우고 김도행이 지었다.
*김창석(金昌錫) 1652(효종 3)~1720(숙종 46)) 천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천여(天與), 호는 월탄(月灘),
운천 용(涌)의 현손. 조부는 임(恁). 아버지는 이기(履基)
168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있을 때 `재약(齋約) 6조`를 지었다.
1690(숙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겨울에 제원찰방(濟原察訪)으로 옮겨 청렴하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이듬해에 아계찰방(丫溪察訪)으로 옮겼다가 1692년에 박사(博士)가 되었다. 이어 전적(典籍)으로 승진한 후 곧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그 후 부모가 연로하여 고향으로 돌아와서 `몽선각(夢仙閣)`을 짓고 부모를 평안히 모셨다. 이후 전라도사(全羅都事), 충청도사(忠淸都事), 강원도사(江原都事)에 제수되었으며, 특히 강원도사 부임시 『금강일록(金剛日錄)』을 지었다.
*김성탁(金聖鐸)1684년(숙종 10)∼1747년(영조 23). 천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진백(振伯), 호는 제산(霽山).
증조부는 표은 시온(是榲). 조부는 방열(邦烈) 아버지는 태중(泰重)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로 호군 여만(如萬)의 딸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에는 의병을 일으키고, 창의소(倡義所)에서 토역문(討逆文)을 각 지방의 유문(儒門)에 보내어 의병에 가담할 것을 적극 권하였다. 그 공로로 인하여 안핵사(按覈使)의 추천을 받아 참봉에 임명되었다.
1734년 어사 박문수(朴文秀)와 이조판서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다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감진어사(監賑御史) 이종백(李宗伯)의 추천으로 사과(司果)에 기용되어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를 역임하였다.
또한 상소하여 치국평천하의 도를 건의하고 왕도정치를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이어서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 교리등을 역임하였다.
1737년 스승 이현일(李玄逸)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정의(旌義)에 유배되었고, 그 뒤 광양으로 이배되어 배소에서 졸하였다. 문장가로 조정의 총애를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퇴계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지지하였다.
저서로는 《제산문집》 16권이 있다. 묘갈명은 영의정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김경필(金景泌):1701(숙종 27, 신사)∼ 해저
본관 의성(義城). 자는 원중(源仲). 호는 학음(鶴陰).
조부는 관찰사 팔오헌 성구(聲久). 아버지는 여당(汝鏜)
1726년(영조 2) 생원시 합격. 1735년(영조 11) 문과 급제.
영조 19년 황산찰방(黃山察訪) 영조 21년 예조좌랑. 영조 24년 병조좌랑.
시를 잘 지어 화산오룡(花山五龍)이라 하였다.
유고로 학음집(鶴陰集)이 있다. 묘갈명은 입재 정종로(鄭宗魯)가 지었다.
*김응렴(金應濂):1710(숙종 36, 경인)∼1761(영조 37, 신사). 금계
본관 의성(義城). 자는 성희(聖希).
학봉 성일(誠一)의 후손. 조부는 두기(斗基). 아버지는 이도(以鍍). 외조부는 금치(琴緻)
1750년(영조 26) 문과 급제. 영조 29년 휘릉별검. 영조 32년 사헌부감찰.
司憲府掌令 역임
*김이상(金履常) 1718(숙종 44)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무숙(懋叔). 호는 수와(睡窩)
개암 우굉 후손. 조부는 경렴(景濂). 아버지는 국채(國采). 외조부는 강유해(康有楷)
영조(英祖) 32년(1756) 문과급제. 영조 32년 승정원 가주서. 영조 40년 자여도찰방.
영조 41년 승문원정자. 42년 저작. 성균관전적. 예조좌랑. 43년 예조정랑겸춘추.
영조 51년 사헌부지평.
*김한동(金翰東)1740년(영조 16)∼1811년(순조 11).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한지(翰之), 호는 와은(臥隱).
개암 우굉(宇宏) 후손 아버지는 좌랑 경필(景泌)이다.
1763년(영조 39) 진사가 되고, 1781년(정조 5) 경릉참봉이 되었다.
1787년 대륜차(大輪次: 과거의 불합격자에게 다시 보이는 시험)에서 부(賦)에 수석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받았으며, 1789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다.
이듬해 부교리·지평·정언을 거쳐, 1791년 헌납이 되어 수해를 당한 영남지방 재해민의 기곤(饑困)함을 들어 환곡(還穀)의 환수를 연기하여줄 것을 진언하였다. 이어서 수찬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 1794년에는 순천부사를 지냈다.
1796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파직되었다가 1799년에 다시 대사간에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승지를 지냈다.
1802년(순조 2) 천주교를 신봉, 각종 제례에 참석하지 않아 지평 정언인(鄭彦仁)의 탄핵을 받고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
그 뒤 흡곡(歙谷)으로 이배되었다가 1805년에 풀려났다.
*김굉(金㙆) 1739년(영조 15)∼1816년(순조 16) 안동 귀미
본관은 의성. 자는 자야(子野), 호는 귀와(龜窩).
아버지는 생원 광헌(光憲)이다. 대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
1773년(영조 49) 생원시에 합격하고 1777년(정조 1) 문과에 급제하였다.
1781년에 스승 대산 이상정이 죽자 스승의 유문(遺文)을 정리하였다.
1787년 전적을 거쳐 지평·정언. 홍문관교리을 역임하였고 단양군수에 제수되었으며, 시강원문학을 거쳐 승지. 이천부사. 한성우윤.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재직 시에는 서리(胥吏)를 엄단하고 위정염간(爲政廉簡)하여 군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으며, 문학에 남달리 뛰어났고 필법이 높아 능히 한 체제를 이룰 만하였다.
스승 대산 선생의 증직을 예조참판 때 청하였다.
유고로 귀와집(龜窩集)이 있다.
*김희성(金熙成) 1741(영조 17)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성지(誠之)
개암 우굉(宇宏) 후손. 아버지는 택동(宅東). 외조부는 식산 이만부(李萬敷)
정조(正祖) 1년(1777) 생원시에 합격하고, 정조(正祖) 14년(1790)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분관되었고, 순조 3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김희직(金熙稷) 1742(영조 18)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
개암 우굉(宇宏) 후손. 아버지는 호동(虎東). 외조부는 조선상(趙善常)
정조(正祖) 1년(1777) 문과급제.
정조 1년 가주서. 명릉별검. 효릉별검. 정조 16년 홍문관수찬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뒤 교리. 황해도사. 헌납. 지평. 교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김희주(金熙周)1760년(영조 36)∼1830년(순조 30).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공목(公穆), 뒤에 왕명에 의하여 성사(聖思)로 고쳤으며, 호는 갈천(葛川).
개암 우굉 후손. 조부는 경학(景㶅).아버지는 증이조참판 시동(始東)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로 효술(孝述)의 딸이다.
처음에는 권사민(權思敏)에게 수학하였으나 뒤에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 되었다.
1789년(정조 13) 생원시에 합격하고, 정조(正祖) 19년(1795) 단풍정친시(丹楓亭親試)에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으로부터 병조와 예조의 좌랑과 정랑 등을 지냈다.
또한 영해부사·안주목사·우승지·형조참판·한성좌윤·사간원대사간·함길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98년 홍문관교리 때에는 시폐(時弊)를 상소하여 왕의 가납(嘉納)을 받았고, 1800년에는 교리에 실록편수관(實錄編修官)을 겸하여 《영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806년(순조 6)에는 안악군수(安岳郡守)로서 교육제도가 부실하여 정교(政敎)가 미치지 못하는 것을 개탄하여, 사재(私財) 수백냥을 투자하여 강소(講所)를 신축, 군내의 영재들을 교육하였다.
만년에 재산(才山)의 갈산리(葛山里)에 갈천정(葛川亭)을 짓고, 덕봉(德峰) 아래에는 덕봉정사(德峰精舍)를 지어서 자제들의 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갈천집》 10권이 있다.
*김희락(金熙洛)1761년(영조 37)∼1803년(순조 3).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명(淑明).
개암 우굉 후손. 조부는 경온(景溫).
아버지는 이조참의에 증직된 두동(斗東), 어머니는 전주유씨로 세원(世源)의 딸이다.
대산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92년(정조 16) 생원시에 합격, 도산(陶山) 응제(應製)에서 장원 직부 전시되어.
정조(正祖) 18년(1794) 문과 급제. 1794년 규장각 강제문신(講製文臣)으로 뽑혀 그의 족형인 희주(熙周)와 함께 궁중을 출입하며 여러가지 과제(課製)와 《사서》 조대(條對)에서 자주 장원하였다.
1794년에서 1800년 사이에 삼조(三曹)의 낭관(郞官)과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지내는 동안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말년에는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자원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문장과 학식이 뛰어나 정조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았고 많은 강제문과 응제문을 지어 올렸으며, 편수관으로서 《해동인물고 海東人物攷》·《영남명신록》·《홍재전서 弘齋全書》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저서로 《고식 故寔》 5권 3책이 있다.
*김호운(金虎運) 1768(영조 44)∼1811(순조 11) 천전
본관은 의성(義城). 초명은 적운(迪運), 자는 치길(穉吉), 호는 우간(雨澗),
운천 후손. 아버지는 시홍(始弘)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高靈申氏)로 사주(思柱)의 딸이다. 동암 유장원(柳長源). 우고 김도행(金道行) 문인.
1804년(순조 4)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순조(純祖) 9년(1809)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김용락(金龍洛) 1795년(정조 19, 을묘)∼1864년(고종 1, 갑자). 금계
자는 여운(汝雲). 호는 춘고(春皐). 진국(鎭國)의 아들. 학봉선생 손자 시권 후손
1819년 문과 급제. 弘文館修撰·校理·司憲府掌令·執義·종부시정 역임. 천릉의 공로로 통정계에 올라 병조참의·참지·승정원동부승지를 역임함. 순조실록 편수에 참여함.
「墓碣銘」(金興洛 撰)
*김두명(金斗明) 1789(정조 13)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낙와(樂窩)
개암 우굉 후손 조부는 택동(宅東). 아버지는 희용(熙鏞)
생원시에 합격하고, 순조(純祖) 25년(1825) 문과 급제. 사헌부 장령.
*김여서(金驪書) 1789(정조 13)~1837(헌종 3)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자는 중연(仲淵), 호는 담운(澹雲).
개암 우굉(宇宏)의 후손. 조부는 소암 진동(鎭東). 아버지는 희질(熙質).
생원으로 순조(純祖) 27년(1827) 문과에 급제하여 그해 승문원에 분관.
순조 32년 정언. 헌종 1년 지평. 헌종 3년 양산군수 재임 중 임지에서 졸하였다.
*김건수(金建銖)1790년(정조 14)∼1854년(철종 5).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공립(公立), 호는 만회(晩悔).
개암 우굉 후손. 아버지는 호군(護軍) 재인(在仁)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종해(宗海)의 딸이다. 가학을 이어받았다.
1830년(순조 30)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2년 뒤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고, 1834년 명릉별검(明陵別檢)에 제수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2월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에 임명되었고, 이때 왕명을 받들어 칙사(勅使)를 영접하였다.
그뒤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장악원판사·현풍현감 등을 지냈다. 현풍현감에 재직하면서 아울러 창녕·청도·양산·영산의 4군을 다스릴 때, 밀양포(密陽浦)에 육로로 수송해온 세미(稅米)를 둘러싸고 밀양의 관리들이 농간을 부리자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여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847년(헌종 13)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고, 홍문관응교·김해부사·승정원우부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한때 경연에서 임금에게 정치의 요체와 중농정책·교육의 진흥 등에 관해 상주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만회헌문집》이 있다.
*김진우(金鎭右) 1805년(순조 5, 을축)∼1861년(철종 12, 신유). 영월영감 금계
자는 국원(國元). 학봉 선생 10세 손. 증조부는 주석(柱碩). 조부는 종찬(琮燦).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기수(驥壽)이고, 어머니는 선성이씨 광일(光一)의 따님이다.
1834년(순조34)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분관되고,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을 지내고, 헌종8년(1842) 홍문관 부교리 문신겸 선전관, 홍문관 교리가 되고, 다음해 겨울에(1843)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현풍현감으로 나갔다. 헌종11년 돌아와 사간원 정언이 되고, 다음해 수릉천봉 시 도청(都廳)이 된 후 통정대부에 올라 돈녕부 도정, 공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내고, 철종 6년(1855) 우부승지, 좌부승지가 된 후 사직상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철종7년(1856) 영월도호부사로 나갔다. 다음해 우부승지가 되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 강원도 암행어사 이경호(李京鎬)의 탄핵으로 삭탈관직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철종9년(1858) 직첩을 돌려받았다. 이때 부친 첨추공을 위해 옛집(검재 용암고택)을 증축하였으니 부친을 편히 모시고자 함이었다. 철종11년(1860) 첨추공이 돌아가시자 슬픔으로 몸을 상하여 철종12(1861)년 3월 26일 타계하시니 향년 57세이다.
*김우수(金禹銖) 1804(순조 4)~1874(고종 11)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내석(乃惜), 호는 학포(鶴浦)이다.
개암 우굉(宇宏)의 후손. 조부는 희소(熙紹). 아버지는 재선(在善). 외조부는 박항경(朴恒慶)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1834년(순조 34)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 분관. 헌종 9년 지평. 헌종 10 홍문관 수찬.
철종 14년 교리. 장령. 고종 1년 예안현감. 고종 3년 장령. 고종 7년 당상에 올라 돈녕부 도정. 예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鶴浦集>이 있다.
*김달연(金達淵):1809(순조 9, 기사)∼1856(철종 7, 병진). 금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이활(而活). 호는 병오(甁塢).
학봉 후손. 조부는 태수(泰壽) 아버지는 진락(鎭洛). 외조부는 김현규(金鉉奎)
헌종(憲宗) 6년(1840) 식년문과 급제. 승문원 정자를 거쳐 철종 3년 사헌부지평 역임
*김진형(金鎭衡) 1801년(순조 1, 신유)∼1865년(고종 2, 을축). 초산영감 금계
자는 덕추(德錘). 호는 청사산인(晴蓑散人) 겸와(謙窩). 학봉 10세손.
연풍현감 종수(宗壽)의 아들. 외조부는 문원공 회재 이언적 선생의 후손인 담양부사(潭陽府使)순암(順庵) 이헌유(李憲儒)이다.
경술년(1850년 철종 1)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바로 6품관이 제수되고, 또 바로 조봉대부(4품)가 되어 성균관 전적이 되고, 신해년(1851년 철종2)에 통훈대부(정3품 당하관)로 승진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사간원 사간,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임자년( 철종3) 홍문관 교리겸 지제교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이 되고. 자리를 옮겨 의금부 낭청 문신겸 선전관이 되고, 다시 홍문관의 수찬과 교리가 되었다.
철종 계축년(철종4) 이조판서(서기순)의 비리에 대한 상소를 올려 탄핵하자, 수찬으로 있던 남종순이 부군을 탄핵하니, 바로 삭탈관직 되어 함경도 명천으로 귀양을(7월 6일) 가서 석 달 만에 귀양에서 풀려나와, (9월8일) 홍문관 응교 지제교겸 경연시강관 춘추관 편수관으로 승진하였다. 갑인년(철종5) 다시 사헌부장령이 되고, 얼마 뒤 다시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을묘년(철종6) 장악원 정(장악원의 으뜸 벼슬)이 되고, 병진년(철종7) 중시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에 특별승진을 하여 부호군이 되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이 되고, 정사년(철종8)에 좌부승지가 되고, 무오년(철종9) 초산도호부사겸 초산진 병마수성독진관이 되었다. 기미년(철종10년)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갑자년(1864고종1년) 고종이 등극하자 시정의 폐단을 상소하였는데, 조대비(趙大妃)의 비위에 거슬린 구절이 있어서, 삭탈관직되고, 전라도 강진현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다음해 고종2년(1865) 오월에 귀양지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5세였다. 조정에서 바로 복관시켰다. 저서로는 북천록과 남천록, 청사만고 등 6권이 집에 소장되어있다.
*김두병(金斗秉) 1849(헌종 15) 천전
본관은 의성(義城). 표은 시온(是榲) 후손. 조부는 진건(鎭健). 아버지는 규락(奎洛).
고종(高宗) 13년(1876) 문과급제. 승문원 분관. 가주서. 겸춘추.
고종 18년 정언. 고종 24년 사헌부지평. 고종 32년 시독(侍讀). 웅천군수(熊川郡守)
광무 1년 황제로 칭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김우영(金羽永) 1846(헌종 12)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함(景咸)
개암 우굉(宇宏) 후손. 조부는 두명(斗明). 아버지는 진수(震銖)
고종(高宗) 7년(1870) 진사시 합격. 고종(高宗) 8년(1871) 문과급제.
사간원 헌납을 지냈다
*김진의(金鎭懿) 1856(철종 7)~1926.3.8 금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미경(美卿). 호는 학운(鶴雲).
학봉 김성일 후손 아버지는 평수(平壽)
고종(高宗) 19년(1882) 문과급제. 정언. 비서승(승지)를 지냈고
2차 안동의진에 가담하여, 척후장(斥候將)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는 옹천(甕川)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후 포장(砲將) 김회락(金繪洛)과 함께 학봉 종가 다락에 숨어 든 다음날, 즉 1896년 7월 22일(음 6.12) 새벽 안동부 병대(兵隊)에 체포되어 끌려갔다. 이때 김진의는 옥에 갇혔고, 김회락은 총살당하였다. 묘는 남후면(南後面) 고곡에 있다.
*김규영(金奎永) 1852(철종 3)~1896(고종 33)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화국(華國)이고 호는 월암(月巖)
부제학 개암 우굉(宇宏)의 후손. 아버지는 원수(原銖)
고종(高宗) 22년(1885) 문과급제. 승정원 주서
*김홍락(金鴻洛) 1863(철종 14)∼1943 금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우경(羽卿), 호는 모계(某溪), 아버지는 진억(鎭嶷)이다.
12세 때 부친을 여의고 서산 김흥락 문하에서 연구를 거듭하여 경사에 일찍이 박학하였다.
1889년(고종 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관 중 왕명으로 관생이 제진한 중에 우수작이 되어 『대학』 1부를 하사받았다. 1894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로는 더욱 덕성을 도야하고 의리를 강론하다가 스승 김흥락이 죽자 다시 척암 김도화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7년에 비서감랑(秘書監郞)으로 임명되어 영친왕(英親王) 가례에 제진관(製書官)으로 일을 본 결과 홍문관시독(弘文館侍讀)으로 승진되었다. 그 뒤 비서감기주(秘書監記注)로 옮겨졌다가 곧 선조관(宣詔官)이 되어 통정으로 승계하였다.
풍산김씨 8명(3)
*김양진(金楊震) 1467년(세조 13)∼1535년(중종 30). 미동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백기(伯起), 호는 허백당(虛白堂).
아버지는 진산군수 휘손(徽孫)이다.
1489년(성종 20)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497년(연산군 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저작에 임명되었다.
1503년 부수찬으로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묘호추존(廟號追尊)을 극력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예천에 정배되었다.
1506년의 중종반정 후 귀양에서 돌아와 형조좌랑으로 기용되었고, 이어서 사간원헌납·사헌부집의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면서, 당시 고리대금의 폐단이 큼을 지적하여 그 개선을 도모하였다.
1513년(중종 8) 역학에 밝다 하여 김안국(金安國)·이행(李荇) 등과 더불어 사유(師儒)로 뽑혔으며, 1517년 남곤(南袞)의 추천으로 승지가 되었으나, 천거과(薦擧科)의 불편을 말했다가 사림들의 탄핵을 받아 영해부사로 전출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남곤 등이 정권을 장악하자, 형조참의로 불리어들어가 바로 대사간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는데, 때마침 도내에서 그의 사위 김윤종(金胤宗)이 죄를 범하고 도주하여 체포의 문제가 있었으나 무난히 임기를 마쳤다.
이어서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를 거친 다음, 이조·예조의 참의를 각기 역임하였다.
이때에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부마로서 흉년임에도 불구하고 호화저택을 짓는 공사를 벌이자, 그 불가함을 극론하다가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황해도관찰사로 전출되었다.
그 뒤 잠시 공조참판과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대체로 한직(閑職)에 머물렀다.
1535년 왕이 송도에 행차했을 때, 유도재상(留都宰相)으로 숙위(宿衛)에 임하다가 죽었다. 성품이 파당을 싫어하고 꾸밈을 좋아하지 않았고, 음주를 즐기며 학문에 밝아 이행·정희량(鄭希良)·권달수(權達手) 등과 교유가 깊었다.
그의 학문은 특히 역학·음양 및 복서(卜筮)에 통달하였다. 중종 때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안동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의정(金義貞)1495년(연산군 1)∼1547년(명종 2). 미동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공직(公直), 호는 잠암(潛庵) 또는 유경당(幽敬堂).
아버지는 공조참판 양진(楊震)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서(瑞)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26년(중종 21) 별시(別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임명되고, 이어 수찬·정언·시강원사서에 이르렀다. 왕의 두터운 총애를 받자 김안로(金安老)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갔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처형되자 다시 공조좌랑에 임명되고, 이어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을 역임하였다. 뒤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정간(靖簡)의 시호를 받았다가 문정(文靖)으로 고쳐졌다.
저서로는 《잠암일고》 5권이 있다.
*김봉조(金奉祖) 1572년(선조 5)∼1630년(인조 8).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백(孝伯), 호는 학호(鶴湖).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추증된 대현(大賢)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찬금(纘金)의 딸이다.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도시직장(司䆃寺直長)에 임명되었으며,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단성현감(丹城縣監)으로 재임중에는 선정을 베풀어 그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경상도도사·익산군수·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성균관직강이 되었으며,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승진되었다.
특히, 문예에 조예가 깊어 동생 망와 영조(榮祖), 학사 응조와 함께 영남에서 문명을 떨쳤다. 저서로는 《학호집》 3권이 있다.
*김연조(金延祖) 1585(선조 18)~1613(광해군 5)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희석(希錫), 호는 광록(廣麓),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추증된 대현(大賢)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찬금(纘金)의 딸이다.
부모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고 형제간에 서로 교회(敎誨)하며 가정이 화목하였다.
서애 류성룡 문하에 와서 배웠는데, 선생이 그의 영민·호학(穎敏·好學)을 크게 칭찬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1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선되었으며 한림(翰林)에 천망(薦望)이 올랐던 중 29세를 일기로 병졸하였다. 임종에 백형(伯兄)에게 말하되 “우리 형제가 부모를 잘 봉양치 못하였고 다년 근독(勤讀)하여 입신양명을 하렸더니 다행히 등과는 했으나 몸이 또 불행하니 명이 아니겠습니까”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 김숭조(金崇祖) 1598년(선조 31)∼1632(인조 10).
본관 풍산(豐山). 자는 효달(孝達). 호는 송설당(雪松堂).
유연당(悠然堂) 대현(大賢)의 아홉째 아들.
인조 2년(1624) 진사시 합격하고. 인조(仁祖) 7년(1629) 문과 급제하여.
1632년 承政院注書에 제수되어 仁祖의 총애를 받았다. 痘疫에 걸리자 仁祖가 內醫를 명하여 치료케 했지만 35세의 일기로 졸하였다. 유고로 송설집(雪松集)이 있다.
형은 봉조(奉祖). 영조(榮祖). 창조(昌祖). 경조(慶祖). 연조(延祖). 응조(應祖). 술조(述祖) 염조(念祖)이다
*김간(金侃) 1653년(효종 4)∼1735년(영조 1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행(士行), 호는 죽봉(竹峯).
증조부는 심곡(深谷) 경조(慶祖). 아버지는 필신(弼臣)이며, 어머니는 예안이씨로 통덕랑 천표(天標)의 딸이다. 고산 이유장(李惟樟)의 문인으로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701년 김장생(金長生)을 성묘(聖廟)에 배향하는 데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인하여 2년 동안 광양에 유배되었다.
숙종(肅宗) 36년(1710) 58세로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이듬해 황산찰방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그가 떠난 뒤 송덕비가 세워졌다.
그 뒤 이수익(李壽益)의 천거로 사재주부에 임명되었다가 예조좌랑·예조정랑이 되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유승현(柳升鉉)을 장수로 삼아 의병을 일으켰다가 난리가 평정되어 파하였다.
그 뒤 사예·병조정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732년 품계가 통정대부에 오르고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가 바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다.
1788년(정조 12) 이진동(李鎭東) 등이 이인좌의 난에 공을 세우고 포상받지 못한 31인의 치적을 상소할 때에 제일 앞에 놓였다. 낙연서원(洛淵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죽봉문집》 2책이 있다. 행장은 청대 권상일이 찬하였다
*김종규(金宗奎):1765(영조 41, 을유)∼1830(순조 30, 경인).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성문(聖文). 호는 독산(獨山).
아버지는 상진(相辰)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계중(啓中)의 딸이다.
김계원(金繼源)의 문인이다. 1810년(순조 10)에 사마시와 동당초시(東堂初試)에 합격, 성균관전적에 오르고, 이어 사헌부감찰에 오르고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1829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중용』·『대학』의 주서(朱書) 등을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는 특히 『심경』·『근사록』을 깊이 연구하여 「심경질의(心經質疑)」·「용학질의(庸學質疑)」를 기술하였다. 저서:『獨山集』. ▣「墓碣銘」(李晩佐 撰)
*김두흠(金斗欽) 1804(순조 4)~1877(고종 14) 미동
아버지는 중우(重佑). 생부는 중남(重南)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문일(文一). 호는 낙애(洛厓)
헌종(憲宗) 9년(1843) 문과급제. 현풍현감. 사간원헌납. 고종 1년 부교리. 고종 2년 사간원 사간. 고종(高宗) 3년(1866) 중시에 급제 통정대부가 되고 승지가 제수되었다.
영양남씨 6명 (1)
*남복규(南復圭) 1559(명종 14)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여용(汝容).
증조부는 항년(恒年). 조부는 서구(瑞龜), 아버지는 호인(好仁). 외조부는 권해(權海)
선조(宣祖) 21년(1588) 생원시에 합격하고, 선조(宣祖) 33년(1600) 문과에 급제
선조 37년 평안도 평사. 형조좌랑. 예조좌랑. 선조 38년 예조좌랑(이때 검간 조정는 호조좌랑. 옥봉 권위는 강진현감이 되었다). 경상도사가 되었다. 다음해 다시 예조좌랑이 되고 바로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형조정랑이 되었다(이때 장곡 권태일이 성균관 사성이 되었다).
선조 40년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다시 형조정랑이 되었다. 선조 41년 사헌부 장령이 되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경경의 사사와 더불어 갑산으로 귀양가서 적소에서 졸하였다
*남연(南碝)1598년(선조 31)∼1664년(현종 5).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연부(鍊夫), 호는 무망재(无妄齋). 아버지는 이다.
조부는 정원(庭元). 아버지는 융달(隆達). 외조부는 정원묵(鄭元默). 처부는 배득인(裵得仁).
1624년(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그 뒤 형조정랑·대동찰방(大同察訪)을 거쳐 예안현감(禮安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정사를 엄정히 하였다.
1636년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상감사를 따라 종군하였다. 때마침 사천 수령이 죽자 가수령(假守令)으로 부임하여 민심을 격려하고 난에 대처할 계획을 세웠으나 임금이 항복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 계획을 중단하였다. 이어 공조정랑·성균관직강을 거쳐 김세렴(金世濂)막하의 보조관이 되고, 또 독운사(督運使) 홍무적(洪茂績)막하의 참모가 되었다.
그 뒤로도 벼슬을 거듭하고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에 이르렀는데, 아버지 상으로 물러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증직은 도승지이다. 저서로는 무망재유고. 사천일기가 있다.
*남천한(南天漢)1607년(선조 40)∼1686년(숙종 12).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장우(章宇), 호는 고암(孤巖).
조부는 융건(隆建). 아버지는 잡(磼). 외조부는 권종선(權宗善).
숙부는 무망재(无妄齋) 연(碝). 동생은 승지 태암(苔巖) 천택(天澤)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하고 164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지평·장령 등을 거쳐 1675년(숙종 1) 집의·대사간으로 승진하고 이듬해부터 여러 차례 승지를 역임한 뒤 1680년 호조참의가 되었다.
예론에 밝아, 민신(閔愼)이 병든 아버지를 대신하여 할아버지의 복을 입으려는 것을 논란 끝에 막은 일이 있다.
또, 예송(禮訟)에 깊이 참여하여 남인의 입장을 앞장서 천명하였다.
특히,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장령으로 재직하면서 가장 먼저 송시열(宋時烈) 유배와 송준길(宋浚吉)의 관작추탈을 주장하였다.
그 뒤 숙종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나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호조참의 재직 중 삭탈관직되었다.
*남천상(南天祥) 1631(인조 9) ~ 1679(숙종 5)
본관 영양(英陽). 자는 서오(瑞吾).
수의교위(修義校尉) 의량(義良)의 후손. 조부는 융달(隆達). 아버지는 생원 자(磁).
1662년(현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1년(1675)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숙종 2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남용진(南龍震) 1708(숙종 34)∼1786(정조 10).
본관 영양(英陽). 자는 국보(國輔).
업의 현손. 조부는 금미(金美). 아버지는 이욱(以煜). 생부는 우벽(宇璧). 외조부는 한호(韓㦿)
영조(英祖) 11년(1735) 문과급제. 영조 15년 승문원 부정자로 분관.
승정원 주서. 영조 25년 성균관전적. 영조 26년 예조좌랑. 겸춘추.
*남상천(南相天)1702(숙종 28)∼1776(영조 52).
본관 영양(英陽). 자는 경중(擎仲). 호는 욕천(浴川).
황(煌)의 현손. 아버지는 도명(圖溟). 외조부는 宣城 김태일(金台一). 처부는 진성 이정형(李廷衡) 1744년(영조 20) 문과 급제. 예조좌랑 곡성현감 역임. 縣監 在任시에 善政을 베풀어 治績을 남겼다. 저서:『江都詩集』•『浴川集』
전주류씨 15명(당상관 6)
*류숭조(柳崇祖) 1452년(문종 2)∼1512년(중종 7).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종효(宗孝), 호는 진일재(眞一齋). 서령 지성(之盛)의 아들이다.
진사로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정자 사간원정언·홍문관부교리·사헌부장령을 역임하고, 1504년(연산군 10) 국왕의 어지러운 정치를 직간하다가 미움을 사서 원주로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직되어 네 자급(資級)을 뛰어 판결사에 등용되었고, 공조참의로 전직되어 삼공(三公)들의 주청으로 경연관을 겸임하였다.
곧이어 성균관대사성·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성리학의 학통을 새롭게 젊은 문신들에게 전수하였고,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장(師長)의 자리를 그가 아니면 지킬 사람이 없다는 삼공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재임되었다. 그는 18년 동안의 벼슬길을 거의 성균관에서 보내면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유림을 다수 배출시켰으며, 성리학의 학풍을 크게 북돋우었다. 《서경》·《역경》·《예기》에 밝았고, 특히 천문·역상(曆象)에 통달하여 그 자신이 손수 혼천의를 만들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진일재문집》 4권, 《대학잠 大學箴》 1권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류정립(柳貞立)1616(광해군 8, 병진)∼1663(현종 4)
본관 전주(全州). 자는 공간(公幹). 호는 경은(耕隱).
5대조는 진일재 숭조. 증조부는 형(炯). 조부는 란(瀾). 아버지는 인무(仁茂)
1646년(인조 24) 식년문과 급제하여. 인조 25년 성균관학유, 학록, 효종 즉위년에 학정이 되었다. 효종 1년(1650) 성균관전적, 감찰. 병조좌랑. 효종 7년 무안현감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선성 김원(金源)이 지은 묘갈명에서
유고로 경은유고(耕隱遺稿)가 있다.
*유정휘(柳挺輝)1625년(인조 3)∼1695년(숙종 2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겸(仲謙).
증조부는 복기(復起) 조부는 우잠(友潛)이고, 아버지는 숙(橚)이며, 직(稷)의 조카이다.
1651년(효종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작은아버지 직이 일찍이 성균관에 있을 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양인을 문묘에 종사(從祀)함은 합당하지 않다고 소척(疏斥)하였다는 연유로 오랫동안 관례에 어긋나게 관직을 자주 옮기게 되었다.
1690년(숙종 16)에 장령을 역임한 뒤 정언·직강을 거쳐 목사에 이르렀다.
*류경립(柳經立)1622(광해군 14, 임술)
본관 전주(全州). 자는 문수(文叟). 호는 일원(逸園).
5대조는 진일재 숭조. 증조부는 형(炯). 조부는 란(瀾). 아버지는 인무(仁茂)
경은(耕隱) 류정립(柳貞立)의 동생
효종(孝宗) 5년(1654) 생원시에 합격하고.1654년(효종 5) 식년문과 급제하여.
바로 성균관 전적이 되고, 효종 6년 3월 예조좌랑, 8월에 하동현감, 1664년(현종 5)에 예조좌랑으로 돌아왔다가 그해 윤 6월에 고성현령으로 나갔다. 현종 9년 4월에 병조좌랑으로 돌아와 9월에 보령현감이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자 의금부에 투옥되고 유배되었다,
1670(현종 11) 직첩이 환급되고, 다음 해 성균관 직강이 되고, 숙종 2년 성균관 사예가 되었다가. 2월에 영해부사가 되고, 다음해 3월에 사헌부 장령이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8월에 부호군으로 체직되었다. 숙종 4년 11월 장악원 판사, 다음해 홍문록에 오르고, 사헌부 장령이 제수되었으나 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유지(柳榰) 1626년(인조 4)∼1701년(숙종 27).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오(重吾), 호는 괴애(乖厓).
조부는 복기(復起).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희잠(希潛)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원(元)의 딸이다.
1646년(인조 24)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4년(효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춘추관기사관과 사헌부의 지평· 장령, 사간원의 정언, 상의원정(尙衣院正)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결성·단성 등지의 현감, 밀양부사·능주목사·길주목사 등을 역임하였고 1693(숙종19) 경주부윤이 되었다.
정언으로 있으면서 당시 병조판서로서 군신을 이간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여 김석주(金錫胄)를 논핵, 좌상 민희(閔熙)로부터 언책(言責)을 다한다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고, 효종이 죽었을 때에는 복제수의(服制收議)에 있어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朞年說)에 대하여 반론을 들고 후일 예송(禮訟)이 있을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그가 죽자 숙종은 제문을 내려 치제하였다.
저서로 《괴애집》 2책이 있다.
*유경시(柳敬時)1666년(현종 7)∼1737년(영조 1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흠약(欽若).
증조부는 우잠(友潛). 조부는 학(㰒). 아버지는 동휘(東輝). 처부는 황창술(黃昌述)
1694년(숙종 20)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분관. 숙종 27년 성균관 학록. 승정원 가주서.
성균관전적. 숙종 42년 문신겸선전관. 예조좌랑. 7월 황해도사. 숙종 44년 평안도사.
1721년(경종 원년) 용강현령. 경종 3년 한산군수. 1725(영조원년) 풍기군수. 1727(영조 3)
양양부사등 외직을 지내다가 1732년(영조 8) 사헌부장령에 올라 김정(金)·김시발(金時發)의 옥사를 변명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같은해 9월 국휼(國恤)에 불참하였다 하여 사직(司直) 이재(李縡)의 탄핵을 받아 이하원(李夏源)·이광도(李廣道) 등과 함께 불서용(不敍用)의 처벌을 받았다.
*유승현(柳升鉉)1680년(숙종 6)∼1746년(영조 2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允卿), 호는 용와(慵窩).
조부는 진휘(振輝). 아버지는 봉시(奉時)이며, 어머니는 아주신씨(鵝洲申氏)로 통덕랑 이징(以徵)의 딸이다.
1719년(숙종 45) 문과 급제, 예조좌랑과 정랑을 역임하다가 곧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박곡〔瓢谷〕이라는 곳에서 지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 그 여파가 영남에 미치자 격문을 내어 의병을 일으켜 출동하려 할 때 관군에 의하여 역적이 잡혔다는 전갈을 받고 해산하였다.
1729년 다시 병조정랑이 되고, 사헌부장령을 거쳐 종성부사가 되었다.
그 뒤 장례원판결사와 영해부사를 역임하고, 1745년 공조참의가 되었다.
1746년 풍기군수가 되어 임지에 도착하였을 때 흉년이 극심한 것을 보고 곧 상관에게로 달려가 구황책(救荒策)을 건의하고 돌아와 임소에서 졸하였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용와집》 4권 2책이 있다.
묘갈명은 번암 채제공이 찬하였다.
*유관현(柳觀鉉) 1692년(숙종 18)∼1764년(영조 4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용빈(用賓), 호는 양파(陽坡).
조부는 진휘(振輝) 아버지는 봉시(奉時)이며, 어머니는 아주신씨(鵝州申氏)로 통덕랑 이징(以徵)의 딸이다. 형 승현(升鉉)에게 수학하였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급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형 승현이 외직으로 나갔다가 죽자 벼슬을 버리고 하향하였다.
1753년 경성판관에 등용되어 사간·필선 등을 역임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뒤에 장령과 형조참의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경성판관으로 있을 때 초하루와 보름의 점고에 빠진 남정(男丁)들로부터 받는 세금과 무세(巫稅)로 바치는 포(布)를 감면해주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흉년에 1,000여석의 양곡으로 기민(飢民)을 구제하였다.
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시강관(侍講官)으로 있을 때 〈역도촬요 易圖撮要〉를 만들어 세자에게 《주역》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양파집》 2권이 있다. 행장은 대산 이상정(李象靖)이 지었다
*류정원(柳正源) 1703년(숙종 29)∼1761년(영조 37).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백(淳伯), 호는 삼산(三山).
복기(復起) 후손 아버지는 석구(錫龜)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천린(天麟)의 딸이다.
1729년(영조 5) 생원시를 거쳐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오랫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749년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자인현감(慈仁縣監)이 되어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이듬해 홍문록에 올랐다.
1751년 3월 안동에 귀향하여 윤광소(尹光紹)와 함께 향음주례(鄕飲酒禮)를 실시하고,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 회강(會講)하였다.
1752년 정우량(鄭羽良)의 천거로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고, 그뒤 수찬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4년 필선이 되었고, 이때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보도에 능력을 발휘하여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같은해 수찬·사간을 거쳐 교리에 임명되었다가, 통천군수로 나가서는 백성의 진휼에 힘썼다.
1756년 원인손(元仁孫)과 채제공(蔡濟恭)의 추천으로 부교리가 되어 조정에 돌아온 뒤 왕의 특명으로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758년 춘천현감에 부임하였다.
1760년 형조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판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간·호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경학에 능하고 여러 학자들의 주석에도 밝아 으뜸가는 경연관으로 영조와 여러 신하들의 신임을 받았다.
문집으로 《삼산문집》, 저서로 《역해참고 易解參考》·《하락지요 河洛持要》가 있다.
묘갈명은 영의정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유지원(柳之源) 1750(영조 26)
본관은 전주(全州). 조부는 분시(賁時). 아버지는 정현(正鉉). 외조부는 김준하(金浚河)
정조(正祖) 13년(1789) 문과급제.
정조 13년 승문원부정자. 별검
*류치명(柳致明) 1777년(정조 1)∼1861년(철종 1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백(誠伯), 호는 정재(定齋).
아버지는 진사 회문(晦文)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외증손으로 외가인 안동의 소호(蘇湖)에서 출생하였다.
이상정의 문인인 남한조(南漢朝)·유범휴(柳範休)·정종로(鄭宗魯)·이우(李瑀)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세자시강원문학 등을 거쳐 1831년 전라도 장시도사(掌試都事)가 되었다.
1832년 홍문관교리에 발탁된 뒤, 1835년(헌종 1)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초산부사·공조참의를 거쳐 1847년 대사간이 되고, 1853년(철종 4) 가선계(嘉善階)에 오르고 한성좌윤·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55년 장헌세자(莊獻世子: 思悼世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대사간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상원에 유배되었고, 이어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가 그해에 석방되었다.
1856년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나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857년 제자들이 지어준 뇌암(雷巖)의 만우재(晩愚齋)에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뒤 1860년 동지춘추관사가 되고, 다음해에 85세로 졸하였다.
초산부사로 있을 때에는 진정(賑政)에 힘쓰고 환곡(還穀)·전결(田結)에 따른 시폐(時弊)를 교정하는 등 여러 가지 치적을 쌓아 그곳 사민(士民)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짓기도 하였다.
그는 경학(經學)·성리학·예학(禮學) 등 여러 분야에 정통하여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성리설에 있어서는 이상정의 학설을 계승하여 이(理)를 활물(活物)로 보고 이의 자발적 동정(自發的動靜)에 의하여 기(氣)가 동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있어서는 기발이승(氣發理乘)을 주장한 이이(李珥)의 학설을 공격하였다. 이는 능동능정(能動能靜)하는 신용(神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의 자발적 동정으로부터 음양오행의 기가 나오며, 이가 우주의 무체적인 실재(實在)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황(李滉)―김성일(金誠一)―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아 이진상(李震相)·유종교(柳宗喬)·이돈우(李敦禹)·권영하(權泳夏)·이석영(李錫永)·김흥락(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 및 편서로는 《정재문집》·《예의총화 禮疑叢話》·《가례집해 家禮輯解》·《학기장구 學記章句》·《상변통고 常變通攷》·《주절휘요 朱節彙要》·《대학동자문 大學童子問》·《태극도해 太極圖解》·《대산실기 大山實記》·《지구문인왕복소장 知舊門人往復疏章》 등이 있다.
*류양회(柳養晦) 1770(영조 46)
본관 전주(全州) 조부는 익창(益昌). 아버지는 인춘(寅春). 외조부는 박필선(朴弼善)
순조(純祖) 28년(1828) 문과급제. 승문원 분관. 순조 30년 사간원 정언
*류치호(柳致好) 1808(순조 8)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공암(孔庵)
조부는 범휴(範休). 아버지는 수정재 정문(鼎文). 외조부는 김희천(金熙天)
철종(哲宗) 3년(1852) 문과급제. 철종 3년 승문원분관, 가주서.
철종 9년 사간원정언, 철종 13년 지평. 고종 3년 홍문관부수찬. 수찬. 4년 장령. 부교리. 고종 5년 장악원정. 승지. 형조참의 역임
*유장호(柳章鎬) 1823(순조 23)
본관 전주(全州) 조부는 소문(少文). 아버지는 치윤(致潤). 외조부는 이야순(李野淳)
철종(哲宗) 12년(1861) 문과급제. 승정원주서 역임
*류성표(柳星杓) 1816(순조 16)
본관 전주(全州) 호는 양진재(養眞齋),
眞一齋 崇祖의 후손. 조부는 시회柳時晦). 아버지는 양몽(養蒙). 외조부는 장우경(張宇擎)
고종 2년(1865)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 사헌부장령을 역임하였다
풍산류씨 16명 (당상관 12)
*류양춘(柳陽春) 세조, 성종 때 문신.
본관 풍산(豊山). 자는 운경(雲卿). 호는 춘당(春塘).
서운정(書雲正) 개(開)의 현손. 창수(昌壽)의 아들. 1467년(세조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468년 문과에 급제했다. 관은 1471년(성종 2)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ㆍ형조정랑(刑曹正郞)ㆍ청송부사(靑松府使)를 거쳐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다. 시로써 세상에 이름높았으며, 풍천(豊川) 지곡촌(枝谷村 : 現 佳谷里)에 살았다.
*류공권(柳公權) 1485(성종 16)∼1539(중종 34,).
본관 풍산(豐山). 자는 평경(平卿) 자온(子溫)의 아들
1528년(중종 23) 문과 급제. 공조정랑. 지평 역임. 1539년(중종 34) 書狀官으로 明나라에 갔다가 北京에서 졸하였다. 증직은 호조참판.
*유중영(柳仲郢) 1515년(중종 10)∼1573년(선조 6).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언우(彦遇), 호는 입암(立巖).
아버지는 간성군수 공작(公綽)이며, 어머니는 증이조참의 이형례(李亨禮)의 딸이다.
영의정 서애 류성룡(成龍)의 아버지이다.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지성균교수(知成均敎授)가 되었다.
이어 황주·상주·양주·안동의 훈도(訓導)를 역임하면서 지방교육에 큰 힘을 기울였다.
1546년(명종 1) 양현고직장(養賢庫直長)을 겸하였으며, 이듬해 박사가 되었으나 파직되었다.
1549년에 전적·감찰·공조좌랑을 거쳐, 1553년에는 장령·사복시정·사간·장악원정이 되었다.
이듬해 의주목사로 나가 국경지방의 밀수행위를 조절하고 생산을 권장하여 크게 치적이 있었다.
1564년에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가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등 선정으로 알려졌다.
1560년에 정주목사로 부임해서도 교육의 진흥과 민생의 안정에 힘썼다.
1572년(선조 5)에 승지를 거쳐 예조참의·경연관 등을 역임하였다.
천성이 충신(忠信)스러우며 모든 일에 성의를 다하고 대소공사에는 힘을 다하며 명예와 지위에 뜻을 두지 않았다.
저서로는 《입암집》이 있다.
*류경심(柳景深) 1516년(중종 11)∼1571년(선조 4).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태호(太浩), 호는 구촌(龜村).
정랑 공권(公權)의 아들이다.
1537년(중종 3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4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홍문관정자를 지냈고, 1546년(명종 1) 승정원주서로 문과중시에 장원하고, 1547년 예조좌랑·홍문관수찬이 되었다.
이해에 정미사화(文定王后와 李芭를 비방한 壁書가 전라도 良才驛에서 발견되어, 부제학 鄭彦懿의 고발로 20여명이 처형당한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51년 다시 기용되어 회인현감 등을 거쳐 1558년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백성을 부역시켜 언전(堰田)을 개간하려는 윤원형(尹元衡)에 반대하다가 종성부사로 전출되었다.
1560년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고, 1568년(선조 1) 호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예조참판·대사헌을 거쳐 1571년 병조참판·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평안도관찰사 재직 중 병으로 상경 도중 장단에서 졸하였다.
저서로는 《구촌집》이 있다.
*류성룡(柳成龍) 1542년(중종 37)∼1607년(선조 40).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공작(公綽)의 손자로, 황해도관찰사 중영(仲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학봉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검열이 되었다. 1569년(선조 2)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감찰, 전적 등의 벼슬을 거치고 양관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도학과 문장과 덕행을 겸했다 하여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시호는 문충(文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류세명(柳世鳴)1636년(인조 14)∼1690(숙종 16).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능(爾能), 호는 우헌(寓軒).
증조부는 겸암 운룡(雲龍), 조부는 기(䄎). 아버지는 원리(元履).
졸재(拙齋) 유원지(柳元之)의 문인이다.
1660년(현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1675년(숙종 1)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1678년에는 검열을 지내고, 이어 사관(史官)·이조좌랑을 거쳐 1689년에 지평· 부수찬. 교리· 헌납을 역임하고, 그해 12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한때 공충도도사(公忠道都事)로 있을 때 서천군수의 비행을 탄핵하여 파면시키어 도내가 숙연하였고, 교리로 있을 때는 부교리 민창도(閔昌道)와 함께 노론의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김석주(金錫胄)에 대한 엄벌과 민정중(閔鼎重)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차자(箚子)를 올려 민정중을 뒷날 벽동(碧潼)으로 유배하게 하였다.
유고로 우헌집(寓軒集)이 있다.
*류상조(柳相祚) 1763(영조 39)~1838(헌종 4)
본관은 풍산(豊山), 자(字)는 이경(爾敬), 호(號)는 일우(逸愚)이며,
서애(西厓) 성룡(成龍)의 8대손이며 조부는 운(澐). 아버지는 종춘(宗春)
정조(正祖) 18년(1794) 문과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歷任)하고 1824년 채번암문집(蔡樊巖文集) 간행(刊行)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병조판서(兵書判書)가 되고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에 올랐다. 연(連)4대 봉군(封君)을 입었다.
시호는 정간(貞簡), 풍안군(豊安君)으로 습봉(襲封)되었고 유고(遺稿)가 전한다.
*류이좌(柳台佐)1763년(영조 39)∼1837년(헌종 3).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현(士鉉), 호는 학서(鶴棲).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사춘(師春)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예조판서 억지(億之)의 딸이다.
1794년(정조 18) 정시문과에 급제, 승정원가주서가 되고 주자서(朱子書) 3책을 하사받았다.
1796년 경연에서 주자서와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진강하였고, 1800년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가 곧 부여현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북평사가 되어서는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썼다.
이듬해에 성균관사성을 지내고, 1807년(순조 7)에 안변부사가 되었을 때 화재로 소실한 무기고와 병기를 복구하였다.
1810년 군자감정과 홍문관교리를 지내고, 1820년 예조참의, 1822년 동부승지, 1829년 부총관·우승지·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향리에 돌아가 후진을 가르치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견해를 따랐으며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로 《학서문집》 20권 10책이 있다.
*류치목(柳致睦)1771(영조 47)∼1836(헌종 2).
본관 풍산(豐山). 자는 정오(定吾). 호는 애운(厓雲).
아버지는 헌조(憲祚). 외조부는 황재대(黃載大). 처부는 강종흠(姜宗欽)
순조(純祖) 14년(1814) 문과 급제. 병조좌랑. 사서. 사간원헌납. 홍문관교리. 응교
1830년 통정대부에 올라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형조참의. 우승지를 지냈다
*류벽조(柳璧祚)1778(정조 2)∼1823(순조 23).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중옥(仲玉). 아버지는 형춘(亨春)
순조(純祖) 4년(1804) 생원시 합격.
순조(純祖) 17년(1817) 문과 급제. 기린도찰방(麒麟察訪) 역임
*류광목(柳光睦) 1813(순조 13)
본관)은 풍산(豊山),
아버지는 주박(周朴), 조부는 장춘(長春), 증조부는 형(瀅), 외조부(外祖父)는 신필교(申必敎)
헌종(憲宗)9년(1843년) 식년시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이 제수되었으나 부친의 병환으로
사임하고 헌종 14년 지평, 정언을 거쳐 철종 6년 홍문관부수찬이 되고 철종 8년 결성현감으로 나갔다. 철종 13년 홍문관부교리. 사헌부장령, 14년 부응교에서 통정에 오라 동부승지가
되고, 고종 1년 공조참의, 대사간이 되었다.
*류진한(柳進翰) 1798(정조 22, 무오)∼1856(철종 7, 병진).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경석(景奭). 아버지는 성조(星祚). 생부는 상조(相祚)
헌종(憲宗) 3년(1837) 진사시 합격. 헌종(憲宗) 10년(1844) 문과 장원급제하여.
바로 사헌부 지평이 제수되고, 홍문록에 올라 부수찬, 수찬이되고 헌종 14년 교리. 응교. 사간. 집의가 되었다. 철종 4년 당상관이 되어 우승지를 역임하였다.
*류도창(柳道昌)1802(순조 2)∼1862(철종 13).
본관 풍산(豐山). 자는 문여(文汝). 호는 죽하(竹夏).
조부는 참판 학서 이좌(台佐). 아버지는 조목(祚睦). 외조부는 정상진(鄭象晋)
철종(哲宗) 12년(1861) 문과급제.
철종 12년 승정원주서. 고종 8년 부교리. 교리 역임.
*류도휘(柳道彙) 1826(순조 26)~1897(고종 34)
본관(本貫)은 풍산(豊山), 자(字)는 여경(茹卿), 호(號)는 석고(石皐).
증조부는 대춘(大春). 조부(祖父)는 응조(應祚),아버지는 의목(義睦), 외조부는 이득수(李得秀)
철종(哲宗)2년(1851년), 별시(別試) 을과1(乙科1)에 급제. 철종 3년 승문원분관, 가주서.
철종11년 정언. 12년 홍문관교리. 고종1년 사간원헌납. 장령. 실록청 낭청. 고종3년 승지
고종26년 대사간. 승지.
*류지영(柳芝榮) 1828(순조 28)~1896(고종 33)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수옹(秀翁). 호는 지산(志山)
조부는 치목(致睦). 아버지는 도봉(道鳳). 외조부는 정구령(鄭龜齡), 처부는 이도상(李悼祥)
철종(哲宗) 8년(1857)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승정원 가주서. 주서. 철종10년 정언.
홍문관수찬. 강제문신. 철종11년 병조참지. 12년 승지. 13년 대사간. 고종5년 안동부사
고종7년 승지. 9년 대사간. 고종 21년 승지.
*류도위(柳道緯) 1849(헌종 15)∼1920.
본관 풍산(豐山). 자는 문가(文可). 호는 추정(秋汀).
조부는 석조(碩祚). 아버지는 진발(進發). 외조부는 신덕(申㯖)
고종(高宗) 13년(1876) 문과급제.
승문원에 분관. 주서. 정언. 장령. 홍문관 교리 역임
고령박씨 2명
*박민수(朴敏樹) 1792(정조 16)
본관은 고령(高靈). 조부는 계영(繼榮). 아버지는 경운(慶雲). 외조부는 정래경(鄭萊慶)
순조(純祖) 27년(1827) 문과급제. 순조 33년 사헌부지평. 34년 사간원 정언
*류도해(柳道海):1806(순조 6, 병인)∼1858(철종 9, 무오).
본관 풍산(豐山). 자는 종원(宗源). 호는 학포(鶴浦)
조부는 찬조(纘祚). 아버지는 형목(馨睦). 외조부는 남정표(南正杓)
헌종(憲宗) 6년(1840) 문과 급제. 승문원 분관. 사헌부지평 역임
반남박씨 1명
*박종범(朴宗範)1778(정조 2)∼1862(철종 13).
본관 반남(潘南). 자는 경서(景叙). 호는 소와(所窩).
조부는 박형운(朴亨運) 아버지는 회원(會元). 외조부는 이효삼(李孝三)
순조(純祖) 14년(1814) 문과 급제. 승문원에 분관되고.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김천참례찰방, 돈령부도정 동부승지 역임
흥해배씨 10명(2)
*배환(裵桓) 1378년(우왕 4)∼1448년(세종 30).
본관은 흥해(興海). 판사 상지(尙志)의 아들이다. 조용(趙庸)의 문인이다.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호군(護軍)을 거쳐 1423년(세종 5) 의주삭주도경차관(義州朔州道敬差官)으로 나갔다.
1432년 예문관직제학으로 선위사를 겸직, 광주(廣州)에 가서 일본 사신을 접견하였다.
1434년 우사간을 거쳐 다음해 병조참의로 선위사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이듬해 황해도관찰사, 1438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공조참의, 1442년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448 판진주목사(判晋州牧事)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배소(裵素)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흥해(興海). 상공(尙恭)의 아들이며, 권진(權軫)의 사위이다.
1408년(태종 8) 문과에 급제, 1417년 사재감주부(司宰監注簿)가 되었다. 이어 풍해도(豊海道) 수안(遂安)의 잠소(蠶所)에 파견되었고, 경상도 양잠채방판관(養蠶採訪判官)을 지냈다.
1427년(세종 9) 강원도도사를 지냈으며 뒤에 이조정랑에 이르렀다.
*배남(裵楠) 조선 초기 문신
본관은 흥해(興海). 조부는 배전(裵銓). 아버지는 배상지(裵尙志). 외조부는 권희정(權希正)
태종(太宗) 11년(1411) 생원으로 문과급제.
성균관 학유를 지내고, 세종 4년 봉상시주부로 경상우도 구휼 경차관으로 나갔다.
사헌부 감찰과 이조정랑을 지냈다.
*배강(裵杠)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흥해(興海). 고려의 평리(評理) 전(詮)의 손자이며, 판서 상지(尙志)의 아들이다.
형 환(桓)과 함께 조용(趙庸)에게서 배웠다.
1426년(세종 8) 교도(敎導)로서 식년문과에 진사로 급제하고, 1428년 성균직학(成均直學)이 되었다.
1431년 주서를 지내고, 1435년 이조좌랑,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배효숭(裵孝崇) 조선 초기 문신
본관은 흥해(興海).
조부는 배상지(裵尙志). 아버지는 배환(裵桓). 외조부는 김정용(金貞用)
진사로 세종(世宗) 29년(1447) 문과급제.
사간원 헌납. 부사를 지냈다.
*배삼익(裵三益)1534년(중종 29)∼1588년(선조 21).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여우(汝友), 호는 임연재(臨淵齋).
충좌위부사과(忠佐衛副司果) 천석(天錫)의 아들이다. 안동에서 세거하였으며,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이 되고, 156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의 학유·학록·학정·박사를 거쳐 호조좌랑이 되었다.
1575년(선조 8) 성균관전적·형조정랑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외직인 풍기군수와 양양부사를 지내고, 1583년 사헌부장령·성균관사예를 지냈다. 뒤에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사간원정언, 헌납 겸 춘추관기주관 등을 역임하였다.
1585년 겨울,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이래 상호군이 되었다.
1587년 진사사(陳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다음해 황해도에 흉년이 들자,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가 구황에 힘쓰다 병이 깊어 사직하고 돌아오는 길에 졸하였다.
대성(臺省)에 있으면서 같은 성씨끼리의 혼인을 금할 것을 주청하여 조정에서 한때 찬반론이 격렬하였으며, 황해도관찰사 시절에는 병든 몸을 위하여 올리는 쇠고기를 금육(禁肉)이라 하여 끝내 사양하는 강직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외직에 있으면서 특히 석채(釋菜) 등의 사사(祀事)에 정성을 기울여 그가 지내는 기우제에는 효험이 곧잘 나타났었다. 장서가로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겼으며, 필법이 힘찼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임연재선생문집 臨淵齋先生文集》 6권이 있다.
*배용길(裵龍吉) 1556년(명종 11)∼1609년(광해군 1).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명서(明瑞), 호는 금역당(琴易堂) 또는 장육당(藏六堂).
관찰사 임연재 삼익(三益)의 아들이다. 외조부는 남신신(南藎臣)이며, 비지 남치리(南致利)
의 생질이다.
1585년(선조 18)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594년 세마(洗馬)의 직을 받고 이어 시직(侍直)·부솔(副率)을 지내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화의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
160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후 예문관의 검열과 대교(待敎),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한 뒤 1608년 충청도도사를 지냈다.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어 서애 유성룡(柳成龍)· 월천 조목(趙穆)·비지 남치리(南致利) 등을 사사하였다.
천문·지리·율력(律曆)·병전(兵典)·의약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역리(易理)에 밝았다고 한다.
저서로는 《금역당집》이 있다.
*배상규(裵相奎) 1811(순조 11)
본관은 흥해(興海). 조부는 행경(行卿). 아버지는 유진(維震). 외조부는 이호(李琥)
헌종(憲宗) 9년(1843) 문과급제. 철종 원년 승문원 분관.
철종 3년 지평. 철종 4년 정언. 7년 지평. 고종 2년 정언.
*배상현(裵象鉉):1814(순조 14, 갑술)∼1884(고종 21, 갑신).
본관은 흥해(興海). 초명 상연(相璉). 자는 이옥(耳玉). 호는 오산(浯山).
조부는 중인(重仁). 아버지는 담(曇). 외조부는 정덕빈(鄭德彬)
1847년 진사시 합격. 헌종(憲宗) 15년(1849) 문과급제. 철종원년 승문원분관.
별검.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성균관직강. 이조정랑. 고종 1년 정언.
저서:『菊窓盥錄』•『浯山集』.「墓碣銘」(金興洛 撰)
*배한주(裵漢周) 1849(헌종 15)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순조(順朝), 호는 번은(樊隱). 아버지는 현팔(顯八)
고종(高宗) 29년(1892) 문과급제. 승정원주서. 사간원 정언
원주변씨 1명
*변영청(邊永淸) 1516년(중종 11)∼1580년(선조 13).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개백(開伯), 호는 동호(東湖).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 광(廣)의 아들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6년(명종 1)에 진사가 되고, 1549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쳐 남원부사·대구부사·상의원정(尙衣院正)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1570년(선조 3) 8월에는 선정을 하여 왕으로부터 말 안장을 받기도 하였다.
柳景深(류경심). 장문보(張文輔)와 함께 화산삼걸(花山三傑)이 일컬었다.
저서로 시집인 《동호집 東湖集》이 있다.
대구서씨 3명(1)
*서성(徐渻)1558년(명종 13)∼1631년(인조 9).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현손으로, 해(嶰)의 아들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가 되었다.
이어 인천부교수(仁川府敎授)·검열·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을 거쳐, 감찰과 예조좌랑을 지냈다. 병조좌랑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로 길을 바꾸었다가 국경인(鞠景仁)에 의하여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황정욱 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加藤淸正)에게 가게 되었으나 탈출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지평·병조정랑·직강(直講)을 역임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다시 지평과 직강을 거쳐 삼남지역(三南地域)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 전수(戰守)의 계책을 아뢰었다. 이로 인하여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고, 경상감사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바뀌었다.
그뒤 경상우도감사로 내려가 삼가(三嘉)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다시 병조참의·도승지·황해감사·함경감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아가 당시 평양의 아전들의 환심을 얻었다.
이어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신구(伸救)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어 판윤(判尹)으로 비변사와 훈련도감의 제조를 겸하고, 형조판서·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함경감사로 나갔다. 다시 호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경기감사가 되고, 그뒤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11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이어 형조판서·대사헌·경연성균관사를 겸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하였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이호민(李好閔)·이귀(李貴) 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하여 역학(易學)을 토론하였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약봉집 藥峯集》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서유기(徐有沂)1751(영조 27)∼1820(순조 20).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성유(聖遊). 성(渻)의 후손.
1780년(정조 4) 문과 급제. 헌납. 이조정랑. 사간원정언. 장령. 집의. 사간. 좌통례 1805년(순조 5)에 통정대부에 올라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서광보(徐珖輔):1796(정조 20, 병진)∼1857(철종 8, 정사).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치옥(穉玉). 호는 호음(湖陰).
아버지는 유락(有洛). 외조부는 김정근(金正根). 강필효의 문인.
순조(純祖) 22년(1822) 생원시 합격. 순조(純祖) 31년(1831) 식년 문과 급제.
사간원 헌납. 정언 및 경기도사를 거쳐 통훈대부로 통례원좌통례에 올라 20여년에 걸쳐 淸職을 지냈다. 「墓碣銘」(洪贊裕 撰)
평산신씨 3명(1)
*신직(申)1743년(영조 19)∼미상.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명승(明昇), 호는 백하(白下).
조부 신진(申鎭)이고 아버지는 신사억(申思億)이다.
1770년(영조 46) 급제하여 관직이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신복(申馥) 1753(영조 29)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영백(英伯)
아버지는 사각(思珏). 외조부는 강숙(姜潚)
정조(正祖) 7년(1783) 진사시에 합격하고, 정조(正祖) 7년(1783) 문과에 급제
정조 9년 정언. 지평. 정조 10년 홍문관부교리. 초계문신. 집의. 응교 역임.
*신태관(申泰觀) 1826(순조 26)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석기(錫基)
철종(哲宗) 3년(1852)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가주서. 철종 12년 사헌부 지평. 고종 4년 장령
고종 12년 홍문관교리. 좌통례. 당상관 승진. 13년 돈녕부도정. 승지. 병조참의.
영월신씨 1명
*신홍립(辛弘立)1558(명종 13)∼1638(인조 16).
본관 영월(寧越). 자는 공원(公遠). 호는 추애(秋厓).
조부는 신중곤(辛仲坤). 아버지는 신내옥(辛乃沃). 외조부는 남구수(南龜壽.)
선조(宣祖) 15년(1582) 진사시 합격하고. 광해군(光海君) 4년(1612) 문과 급제.
무안군수. 용인현감을 지내고 나주목사.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세고인 낙양세고(洛陽世稿)가 있다.
순흥안씨 7명(1)
*안수(安琇) 미상∼1555년(명종 10).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근부(瑾夫). 호는 니산(尼山)
증조부는 안돈후(安敦厚)이고 조부는 안장(安璋)이며 아버지는 울진훈도(蔚珍訓導) 안처정(安處貞)이다. 죽계(竹溪) 안처성(安處誠)이 그의 종숙(從叔)이다. 금원복(琴元福)의 딸과 결혼하였다. 1507년(중종 2)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1위로 합격하고,
1525년(중종 20) 문과에 급제하였다. 1555년(명종 10)에 전 헌납(獻納)으로서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출전하여 영암(靈巖)에서 왜구와 싸우다 전사하였다. 증직은 좌승지이다.
*안 제(安霽)1538(중종 33)∼1602(선조 36).
본관 순흥(順興). 자는 여지(汝止). 호는 동고(東皐).
조부는 안처정(安處貞). 아버지는 안수(安琇). 외조부는 금원복(琴元福). 처부는 권서운(權瑞澐). 퇴계 이황(李滉) 백담 구봉령(具鳳齡) 문인.
1561년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80년 문과 급제.
성균관학유, 감찰, 형조좌랑, 충청도사, 용굴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에 창의한 공으로 原從勳에 책록되었다. 증직은 예조참의이고,
노봉사(蘆峰祠)에 제향되었다. 묘갈명은 권춘란이 찬하였다.
*안담수(安聃壽) 1552(명종 7, 임자)∼1628(인조 6, 무진).
본관 순흥(順興). 자는 군소(君邵). 호는 정봉(定峯).
조부는 안순(安恂). 아버지는 안경노(安景老). 서애 류성룡(柳成龍) 문인.
선조(宣祖) 15년(1582) 생원시에 합격하고, 선조(宣祖) 36년(1603) 문과에 급제하여
성현도찰방, 예빈시직장, 사헌부감찰, 성균사예, 예안현감을 역임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14년 병산서원(屛山書院) 창건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院長을 역임하였다. 스승인 서애선생의 문집을 교정하였다.
洗馬로 제수되었을 때 광해군이 폐모를 강행하자 상소하여 慈殿의 位號복구를 청하였다가 삭탈관직되어 낙향하였고 掌樂院 僉正으로 재임시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해임되었으며, 仁祖反正(1623)으로 大司諫에 除授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안동의 賢士들과 鶴駕山 廣興寺에서 壬癸會(壬子•癸丑生)를 결성하였으며, 당시 그린 契會圖가 전한다.
*안여석(安如石) 1630년(인조 8)∼1695년(숙종 21).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주국(柱國).
유(裕)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수성(壽星), 동생은 여악(如岳)이다.
1666년(현종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0여년이 지난 뒤 주서를 비롯하여 대간에 들어가 장령·사간·집의 등을 거쳤고, 1677년(숙종 3)에는 변무사(辨誣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바 있으며, 이후에는 승지로서 오래도록 봉직하였다.
1689년에는 충홍도관찰사(忠洪道觀察使)를 역임하고, 1694년에는 병조참판을 지낸 뒤 이듬해 죽었다.
인품이 성실하여 당시 당쟁이 반복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편당(偏黨)에 치우치지 않고 본분에만 충실하였으므로 높은 관직에 오르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크게 화를 당하지도 않았다.
*안연석(安鍊石) 1662년(현종 3)∼1730년(영조 6).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보천(補天), 호는 보만당(保晩堂).
조부는 헌(櫶). 아버지는 중현(重鉉). 외조부는 위솔 장영(張銢)
숙종(肅宗) 9년(1683)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임금에게 진강(進講) 중 민폐를 진언하고 이의 구제책을 주청(奏請)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김일경(金一鏡)일파의 왕세제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의 위해(危害)시도가 있자, 세제를 옹호하여 소론의 미움을 샀다.
그 뒤 양산군수로 나아갔으나 사단(事端)이 생기어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의 탄핵을 받아 진주에 유배되었다. 증직은 예조판서. 묘갈은 도암 이재(李縡)가 찬하였다
*안복준(安復駿)1698년(숙종 24)∼1777년(정조 1).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자초(子初), 호는 택헌(擇軒). 안동 출생.
아버지는 예조판서에 추증된 연석(鍊石)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도제(道濟)의 딸이다.
1728년(영조 4)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
그 뒤 정릉령(貞陵令)·이조정랑을 거쳐 1737년 부안현감이 되어 많은 업적을 이루었으나, 어사 남양근(南養根)의 무고로 고생하다가 풀려났다.
1753년 사헌부지평이 되고 이듬해 장령에 올랐으나 또 무함을 받아 울산부사가 되었다. 흉년에 세금을 감면하고 창고를 풀어 기민을 먹였으므로 군민이 감동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그 뒤 내직으로 승차하여 성균관사성과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1760년 홍주목사를 지내고, 1769년 호조참의를 거쳐 1775년 지중추부사에 오르고 특진관(特進官)이 되었다.
1776년 해곡(海谷)이 지은 〈진학도 進學圖〉를 교간하였다.
.저서로는 《택헌문집》 6권이 있다.
*안윤시(安潤蓍):1786(정조 10, 병오)∼1867(고종 4, 정묘).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윤직(允直). 자는 정숙(正淑). 호는 치재(恥齋.)
조부는 견구(見龜). 아버지는 원(愿). 외조부는 권경도(權慶度)
1814년 사마시 합격. 순조(純祖) 29년(1829) 문과급제
승문원 분관. 정언, 집의. 장악원정을 거쳐 대사간, 병조참의 역임. 淸白吏에 오름.
저서:『恥齋集』
의령여씨 1명
*여상규(余尙珪) 1595(선조 28)~l664(현종 5) 봉화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휘언(輝彦) 호는 양졸재(養拙齋)
조부는 여인(余寅). 아버지는 여우정(余友靖).
광해 9년(161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 인조 5년(1627)에 문과에 급제하여
인조 9년 금교찰방. 인조 15년 성균관직강. 형조좌랑을 거쳐 朝奉大夫 해미현감(海業縣監)을 지냈다.
경주이씨 1명
*이종준(李宗準)미상∼1499년(연산군 5).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민(太庭逸民)·장육거사(藏六居士).
대사헌 승직(繩直)의 손자이며, 홍준(弘準)의 형이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1등 3인으로 급제하였고, 의성현령으로 있으면서 〈경상도지도〉를 만들었다.
1493년에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그는 풍류로 명성이 있어 일본호송관 또는 북평사(北評事)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고, 의정부사인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역을 지나다가,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 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 이승건(李承健)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譏弄)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였다.
마침내 연산군은 그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 국문 도중 죽었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부제학으로 추증되었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유고》가 있다.
고성이씨 7명(1)
*이굉(李浤) 1440년(세종 22)∼1516년(중종 11).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심원(深源), 호는 귀래정(歸來亭).
좌의정 원(原)의 손자이며, 현감 증(增)의 아들이다.
1464년(세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급제,
전적(典籍). 군위현감·세자시강원문학·사간원헌납·사헌부지평·공조정랑·청도군수·사재감첨정·봉상시부정 등을 지냈다.
1500년(연산군 6)에는 사헌부집의를 거쳐 예빈시정·승문원판교·상주목사를 역임한 뒤, 1504년 갑자사화에 김굉필(金宏弼) 일당으로 몰려 관직이 삭탈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뒤 다시 기용되어 충청도병마절도사·경상좌도수군절도사·개성부유수 등을 지냈고, 1513년(중종 8)에 나이가 많아 사직한 뒤 고향인 안동에 내려가 귀래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풍류생활을 하였다.
시문에 능하였다.
*이주(李胄) 1468년(세조 14)∼1504년(연산군 10).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주지(胄之), 호는 망헌(忘軒).
좌의정 원(原)의 증손으로, 현감 평(泙)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허추(許樞)의 딸이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8년(성종 19) 별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로 귀양갔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전에 궐내에 대간청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김굉필(金宏弼)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성품이 어질며 글을 잘하였고, 시에는 성당의 품격이 있었으며,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직언으로 유명하였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이여(李膂) 1484(성종 15)~1512(중종 7)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강재(强哉).
조부는 이증(李增). 아버지는 이평(李泙). 외조부는 허추(許樞)
연산군(燕山君) 7년(1501) 생원. 진사양시에 합격하고,
중종(中宗) 5년(1510)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으로 사가독서 하였고. 수찬을 지냈다. 29세로 졸하였다
*이후영(李後榮) 1649(인조 27)~1711(숙종 37)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사구(士久). 호는 청옹(淸翁)
조부는 종배(宗培). 아버지는 분(蕡). 외조부는 참의 고암(孤巖) 남천한(南天漢)이고,
외조부는 관찰사 반초당(反招堂) 이명익(李溟翼)이다.
1673년(현종 14) 생원시 합격하고. 1684년(숙종 10) 문과 급제.
숙종 15년 성균관학유, 봉상시봉사. 숙종 16년 성균관학록, 가주서가 되고, 숙종 17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해 7월 황해도사로 나갔다가 숙종 19년 다시 병조좌랑이 되고, 그해 고성군수로 나갔다. 그후 黨爭으로 어지러운 정국을 꺼려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낙향. 문학과 덕행으로 사림의 중망을 받았다
*이지원(李枝遠) 1660(현종 1)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자장(子長)
아버지는 여우(汝愚) 숙종(肅宗) 16년(1690) 문과급제. 찰방을 지냈다.
*이시항(李時沆)1690(숙종 16, 경오)∼1749(영조 25, 기사).
본관 고성(固城). 자는 태초太初(一初). 호는 팔회당(八懷堂).
適의 현손. 아버지는 후식(後植). 숙부는 군수 청옹(淸翁) 후영(後榮)
1721년(경종 원년) 문과 급제. 마전군수. 성균관전적.공조정랑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倡義하여 原從功勳 一等에 錄選됨.
1730년(영조 6)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저술로 戊申勤王時日錄이 있다. 대산 이상정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이주정(李周禎) 1750(영조 26)∼1818(순조 18)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한백(翰伯), 호는 대계(大溪),
팔회당(八懷堂) 시항(時沆)의 증손으로 대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정조(正祖) 19년(1795) 문과에 급제하여 결성현감(結城縣監)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개성경력(開城經歷)에 재임중 졸(卒)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선정을 하여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고 배움은 항상 행동에서 일속되지 않을까 근심하면서 예의를 근본으로 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에 노력하도록 자손들에게 훈계하였다.
예안이씨 2명
*이공(李珙) 1533년(중종 28)∼1583년(선조 16).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공보(共甫), 호는 율원(栗園).
조부는 이영(李英). 아버지는 이숙인(李淑仁). 외조부는 정목번(鄭穆蕃)이다
1567년(명종 2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학문과 실천을 겸비하고 높은 덕과 절의로 당대인의 믿음과 존경을 받았다. 도사·교리·지평 등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당시 정계가 혼란하고 조신들이 당파싸움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음을 보고 이를 거절하였다.
풍암(楓巖)의 이사(里社)에 향사되었으며 저서로 《율원문집》이 있다.
*이경유(李敬裕)1747(영조 23)∼1807(순조 7).
본관 예안(禮安). 자는 의협(義夾.) 호는 양고(陽皐).
조부는 민정(敏政). 아버지는 광(光)
1774년(영조 50) 문과급제. 승문원에 분관. 예조정랑, 이조정란. 구례현감 사헌부지평.
전의이씨 1명(1)
*이산두(李山斗)1680년(숙종 6)∼1772년(영조 48).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앙(子仰), 호는 나졸재(懶拙齋).
명길(鳴吉)의 손자로, 필(泌)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칭(安偁)의 딸이다.
1714년(숙종 40) 생원에 합격하고 1732년(영조 8)에 유생으로 강경거수(講經居首)가 되어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혜를 받았다.
영조(英祖) 9년(1733)문과급제 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758년에 판결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1767년에는 참판에서 지중추부사로 추천을 받아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일찍이, 시위(試闈)에 들어가 강(講)을 하였는데 한 자를 잘못 읽었음을 깨닫고 강이 끝나면서 이 사실을 실토하자, 대관이 놀라면서 남이 알지 못하는데 스스로 밝히려 하느냐고 하였다.
그는 남이 비록 알지 못한다고 하여 나 자신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겠는가라고 하여 듣는 이들이 경탄하였다. 남포군수(藍浦郡守)로 천거되어 외직으로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에는 겨우 초옥 몇 칸만 남게 되었는데, 남들은 그가 새로 관직을 떠난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기로소에 들어갔을 때 영조는 그를 자주 볼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공인에게 그의 도상(圖像)을 그려 오라 하고, 원손에게 ‘九十歲像’이라는 네 글자를 쓰게 하였다.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전주이씨 4명
*이계(李棨) 1632(인조 1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위부(衛夫). 유(柔)로 개명
조부는 이방헌(李邦憲). 아버지는 이윤형(李允馨)
현종(顯宗) 1년(1660) 문과급제. 성균관학유. 사헌부감찰. 황주판관. 예조좌랑 역임
*이선(李瑄) 1640년(인조 18)∼1687년(숙종 1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봉언(奉彦), 호는 허직(虛直).
태종의 왕자 온령군(溫寧君)의 후손으로 조부는 영기(榮基). 아버지는 시항(時恒).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합격하고, 1679년(숙종 5)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에 제수되었다.
문장이 명백하고 전아하였으며, 성격은 강직하였다. 봉사 재직시 관곡(官穀)을 녹봉으로 나누어주고 남은 것은 관례에 따라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경재(卿宰) 중에서 달라는 이가 있으면 응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말을 듣지 않아 파직되었다.
숙종(肅宗) 9년(1683) 문과에 급제하여 숙종 11년 예조좌랑이 되고. 숙종 12년 2월 강원도 은계찰방으로 나갔다가 숙종 13년 2월 임지에서 졸하였다.
*이장(李槳) 1696(숙종 22)~1737(영조 1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숙통(叔通), 호는 호산(毫山).
추만의 후예이다. 아버지는 인부(仁溥).
숙종 45년(171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경종 3년(1723)에 문과 급제하여 全井道察訪, 典籍, 直講을 거쳐 輪對官으로 입시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날 이렇듯 훌륭한 관리가 있었겠느냐?” 하니 답하기를 “신은 牛山君 踵의 후손으로 안동사람이 되었고 大父 瑄이 宏詞科에 올랐으나 한 일은 없다.” 하니 “그대는 김성탁(金聖鐸)과 같은 고향이니 함께 공부하였는가?” 하니 “상종은 좀 했으나 공부한 적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은 주위를 돌아보며 “사람쓰기가 어렵구나. 안동에도 이장 같은 인물이 있을 줄이야.”라고 하였다. 곧 예조, 병조좌랑, 전라도도사를 거쳐 호남시사(湖南試士)를 지냈다.
*이면주(李冕宙)1827년(순조 27)∼1910년.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석우(錫宇). 자는 윤래(允來), 호는 계은(桂隱)·하계(霞溪).
태종의 별자(別子) 온양군(溫陽君)의 후손으로 치두(致斗)의 아들이다.
김숙(金熽)의 문인이다.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순강원수봉관(順康院守奉官)에 제수되었다가 전적·지평·이조좌랑을 역임한 뒤 1860년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이 되었다.
1862년 간신배의 모함에 빠져 무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특사로 풀려났다.
1864년 정언·장령, 이듬해 부수찬, 1866년 부교리·좌부승지·동부승지, 1879년 병조참의, 1891년 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그 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에 국치를 당하자 음독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진성이씨 8명(1)
*이봉춘(李逢春) 1542(중종 37)∼1625(인조 3).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근회(根晦), 호는 학천(鶴川).
아버지는 처사인 희성(希聖)이고, 어머니는 양근김씨(楊根金氏) 어모장군(禦侮將軍) 세필(世弼)의 딸이며, 익성군(益城君) 이갱(以戡)의 손녀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족자(族子)로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75년(선조 8)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로 임명되어 전적(典籍)에 이르렀으나 오랫동안 친환(親患)을 돌보느라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1581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 후 벼슬에 뜻이 없어 오랫동안 산림에 묻혀 살았고, 영덕현감(盈德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했다. 만년에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으나 스스로 세인과 어울리지 못함을 알고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 양성에 전렴하였다. 그는 성품이 대범하고 관대하여 평생 동안 이론을 제기해 높은 체하거나 시속을 따라 지조를 더럽히는 일이 없었다.
저서로는 ≪학천유집≫ 1책이 있다.
*이돈(李燉) 1568년(선조 1)∼1624년(인조 2).
본관은 진보(眞寶). 초명은 향(享), 자는 광중(光仲), 호는 호봉(壺峰).
참봉 원회(元晦)의 아들이다. 이공(李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1년(선조 3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형조정랑·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사간원헌납을 역임하였으며, 헌납으로 있을 때 정인홍(鄭仁弘)을 논척하다가 경상도 영해부사로 좌천되었다.
1612년(광해군 4)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돌아가 형 혁(爀), 동생 환(煥)과 한방에서 동거하면서 화락(和樂)하게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성균관직강이 되었고,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영천군수에 재직 중 병사하였다.
*이회보(李回寶) 1594년(선조 27)∼1669년(현종 10).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문상(文祥), 호는 석병(石屛).
조부는 참봉 원회(元晦) 아버지는 헌납 돈(燉)이다.
1629년(인조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호조좌랑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를 주장, 주전론을 펴다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가 체결됨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그 뒤 다시 관직에 나가 병조좌랑·의정부사인·공조좌랑을 역임하였는데, 이때 시폐를 논한 〈기축봉사 己丑封事〉를 올렸다.
1650년(효종 1) 장문의 상소를 올려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여, 무군부도(無君不道)의 대역죄인으로 규정하고, 그의 횡포와 간계를 낱낱이 지적함과 아울러 사헌부나 사간원 등 대간의 기능이 불엄(不嚴), 부실하여져 역신을 처벌하지 못하고 있음을 공격, 결국 김자점의 죄상이 드러나 사형당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말직에 있으면서도 직간하는 위국충정이 뛰어나다 하여 1652년 사복시정에 특진되었고, 이때 응지소(應旨疏)를 올려 더욱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 뒤 정평부사가 되어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와 군사력 증강에 노력하다가 1655년(효종 6)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저서로 《석병집》이 있다.
*이이송(李爾松)1598년(선조 31)∼1665년(현종 6). 의성 출신.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수옹(壽翁), 호는 개곡(開谷).
조부는 득춘(得春). 아버지는 종묘서직장 의준(義遵)이며, 외조부는 현감 유연당 대현(大賢). 외삼촌 학사 김응조(金應祖)의 문인이다.
1632년(인조 10) 추천으로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635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바로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공조좌랑·예조좌랑·병조좌랑·성균관직강·예조정랑·춘추관기주관·병조정랑을 거쳐 1643년 함평현감으로 나갔다가, 1647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정랑을 제수받았다.
그 뒤 풍기군수로 나가서는 어떤 호족의 모함으로 파면되었다가, 1652년(효종 3)에 다시 예조정랑으로 서용되었으나 이듬해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나서는 벼슬길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에 들어가 낙고초당(洛皐草堂)을 짓고 학문을 닦았다.
1656년에 부름을 받고 나가 성균관전적을 거쳐,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에 올랐으나 사양하였다.
1665년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제수되어 숙배(肅拜)를 나갔다가 서울 객관에서 죽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에는 정랑의 신분으로서 인조가 내원(內苑)에 별전(別殿)을 지으려는 것을 끝까지 만류하였고, 함평·풍기의 외직에 있을 때에는 고을백성들에게 칭송을 들었다.
저서로는 《개곡문집》 4권이 있다.
*이동표(李東標) 1644년(인조 22)∼1700년(숙종 26).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군칙(君則)·자강(子剛), 호는 나은(懶隱).
운익(雲翼)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후기(金厚基)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진사가 되고, 1677년 증광회시에 장원하였으나 파방(罷榜)되었다가 1683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87년 창락도찰방(昌樂道察訪)에 임명되었으며, 1689년 왕명으로 한림을 뽑을 때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의 천거로 수천(首薦)이 되었다. 성균관전적을 거쳐 홍문관부수찬에 제수되었으나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여 죄를 입은 박태보(朴泰輔)·오두인(吳斗寅) 등을 신구하다가 양양현감으로 좌천당하였다.
그 뒤 사간원헌납·이조좌랑·홍문관교리 등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사직하고 귀향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소퇴계(小退溪)라 일컬었다. 낙향한 뒤에도 계속하여 사헌부집의·호조참의·삼척도호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사직의 상소와 함께 그때마다 직언으로 시정의 개선책을 건의하였다.
1741년(영조 17)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845년(현종 11) 예천의 원산서원(元山書院)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나은문집》이 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제겸(李濟兼)1683(숙종 9)∼1742(영조 18).
본관 진성(眞城). 자는 선경. 사원善慶(士遠). 호는 두릉(杜陵).
조부는 운익(雲翼). 아버지는 나은(懶隱) 동표(東標). 외조부는 권협(權鋏)
1714년(숙종 40) 진사시 합격. 1725년(영조 1) 문과 급제. 사헌부감찰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姜必信의 무고로 인해 平安道 宣川으로 流配되었다가 解配되어 춘양 노루골에 은거. 산수를 벗하고 詩書로 自適함.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저서:『喪禮節要』•『杜陵集』. 묘갈명은 정재 류치명(柳致明)이 찬하였다
*이계로(李啓魯):1828(순조 28, 무자)∼1886(고종 23, 병술).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성건(聖建). 호는 석림(石林).
아버지는 회상(會相). 외조부는 홍태근(洪泰根). 허전(許傳) 문인
철종(哲宗) 3년(1852) 25세로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가주서. 철종 13년 홍문관 부수찬.
교리. 고종 2년 사간원정언. 실록청 낭청. 장령. 병조참지. 3년 승지. 5년 대사성. 7년 이조참의. 9년 좌승지. 병조참판. 10년 동의금. 11년 경연특진관. 병조참판. 12년 한성좌윤. 20년 예조참판. 병조참판. 이조참판 역임. 저서:『石林集』.
*이유로(李有魯) 1831(순조 31)
본관은 진보(眞寶). 아버지는 건상(健相). 외조부는 전주 유소문(柳少文)
철종(哲宗) 9년(1858)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고종 4년 예조좌랑.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한산이씨 5명(2)
*이상정(李象靖)1711년(숙종 37)∼1781년(정조 5).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아버지는 태화(泰和)이며, 어머니는 재령이씨(載寧李氏)로 이조판서 현일(玄逸)의 손녀이며 재(栽)의 딸이다. 14세에 외할아버지 이재를 사사하였다.
1735년(영조 11)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39년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제자교육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1753년 연일현감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퇴도서절요 退陶書節要》·《심동정도 心動靜圖》·《이기휘편 理氣彙編》·《경재잠집설 敬齋箴集說》 등 사상적 기초를 정립한 여러 저술을 남겼다.
38세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던 중에 《사례상변통고 四禮常變通攷》와 《약중편 約中編》을 편찬하였다. 연일현감으로 있을 때는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데 진력하였다.
2년2개월 만에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그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그 뒤로는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아 사우들과 강론하고, 제자를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다.
그의 학문적 흐름은 아우인 광정(光靖)과 남한조(南漢朝)를 통하여 유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진상(李震相)에 이르러 유리론(唯理論)으로 전개되었으며, 한말에 이르러서는 곽종석(郭鍾錫)으로 계승되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참지·예조참의 등에 발탁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봉안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현정(李顯靖)1721년(경종 1)∼1789년(정조 13).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맹휴(孟休), 호는 약와(約窩).
조부는 석보(李碩輔). 아버지는 명화(命和)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사국(金師國)의 딸이다. 재화(再和)에게 입양되었다.
1747년(영조 23) 생원시에 합격하고, 176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84년(정조 8)에는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같은해 교리가 되었다.
교리로서 왕에게 많은 소를 올려 자신의 주장을 정책으로 펴는 데 진력하였다. 특히 그는 언로를 개방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당시 펼쳐야 할 정책사항으로 여섯가지를 들어 왕에게 올렸다.
즉, ① 징토(懲討)를 엄히 할 것, ② 실학에 힘쓰게 할 것, ③ 수성(修省)을 부지런히 할 것, ④ 구활(救活)에 급선무를 둘 것, ⑤ 현재(賢才)를 등용할 것, ⑥ 검약을 숭상할 것 등이 그것이다. 그는 또한 조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여 국고를 부유하게 하고, 민력을 고되지 않게 하도록 진언하였다.
그는 학문에 게으르지 않았으며, 대인관계에도 항상 온후하고, 정치일선에서는 왕에게 직언을 잘하였다.
*이완(李埦) 1740(영조 16) 안동 소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치도(致道)
조부는 태화(泰和). 아버지는 대산 상정(李象靖)
영조(英祖) 47년(1771) 생원시에 합격하고, 영조(英祖) 50년(1774) 문과에 급제하여
정조 즉위년 후릉별제, 1787(정조 11)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정조 13년에 특별히 홍문관부교리가 제수(特除李埦爲副校理 中批也 敎曰聲名稔知不及見之尙以爲歎其子之向來臺職意在欲見而上來未易且其家之人必異他人文學人品曾亦習聞欲置之顧問之列以觀所存前正言 李埦 副校理除授仍令乘馹上來察任 일성록)되고, 바로 교리가 되었다.
*이돈우(李敦禹) 1807(순조 7)∼1884(고종 21)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돈영(敦榮), 자는 범약(凡若) 또는 윤공(允恭), 호는 긍암(肯庵),
득일(得一)의 손자로 첨지중추부사 상두(相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사선(金思善)의 딸이다. 상형(相衡)에게 입양되었다. 1827년(순조 27)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
옥당을 거쳐 관직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항상 청백한 것을 좋아하여 연꽃을 사랑한다는 「연설보 (蓮說補)」를 지어 자신의 뜻을 펼쳤다.
*이돈욱(李敦煜) 1824(순조 24)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치정(致禎). 호는 기와(企窩)
조부는 병현(秉鉉). 아버지는 수득(秀得)
고종(高宗) 13년(1876) 문과급제. 승문원에 분관.
고종 14년 사헌부 지평. 고종 28년 장령.
풍천임씨 1명
임명태(任命台)1677(숙종 3, 정사)∼1744(영조 20, 갑자).
본관 풍천(豐川). 자는 응삼(應三). 호는 서파(西坡).
권(權)의 후손. 아버지는 세중(世重). 외조부는 금양신(琴養神)
1715년(숙종 41) 생원시 합격. 1726년(영조 2) 식년문과 급제.
영조 6년 성균관전적. 성환도찰방. 사헌부지평 역임.
순천장씨 2명
*장문보(張文輔) 1516(중종 11)∼1566(명종 21).
본관 순천(順天). 자는 백훈(伯勳). 호는 성남(星南). 아버지는 장간(張侃)
1546년(명종 1) 문과 급제. 명종 10년 형조정랑이 되고, 명종 18년 장령이 되고, 성균관 사성. 1565년(명종 20) 진주목사로 부임하여 善政을 폄으로써 칭송이 높았는데 이듬해 진주 官衙에서 병사하였다.
일찍이 변영청(邊永淸), 柳景深(류경심)과 함께 龜尾에 龜潭書堂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여 당시 화산 삼걸이라 일컬었다.
현재 그 서당이 一直面 蘇湖里에 남아 있다. 서애 류성룡이 묘지명을 찬하였다.
*장인환(張仁煥) 1835(헌종 1)
본관 순천(順天) 호는 력파(櫟坡)
조부는 장광진(張光瑨). 아버지는 장수정(張守正). 외조부는 유강조(柳江祚)
고종(高宗) 8년(1871) 문과급제. 성균관 학유. 남학훈도. 지평 역임
동래정씨 2명(1)
*정유일(鄭惟一) 1533년(중종 28)∼1576년(선조 9).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중(子中), 호는 문봉(文峰).
목번(穆蕃)의 아들이며,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이 되고, 155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진보·예안의 현감을 거쳐 영천군수 등을 지냈다.
그 뒤 설서·정언·직강·지평·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70년(선조 3)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이듬해 사인으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뒤 직제학. 형조, 예조 참의. 대사간· 동부승지· 우승지. 좌승지등을 지냈다.
시부(詩賦)에 뛰어나 명망이 높았으며, 또한 성리학에 있어서도 사문(師門)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주자학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함으로써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이 사단(四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이것을 타는 것이 칠정(七情)이라 주장한 퇴계설을 추종, 발전시켰다.
관직을 물러난 뒤 《한중록 閑中錄》·《관동록 關東錄》·《송조명현록 宋朝名賢錄》 등을 저술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안동의 백록리사(栢麓里祠)에 봉안되어 있다.
저서로는 《문봉집》, 편서로는 《명현록》이 있다. 증직은 이조판서이다.
*정석태(鄭錫台) 1713(숙종 39)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진경(晋卿)
조부는 동원(東源). 아버지는 리상(履祥). 외조부는 이이일(李爾一)
영조(英祖) 29년(1753) 문과급제. 영조 36년 승문원부정자.
영조 37년 승문원박사. 승정원가주서. 봉상시직장. 영조 38년 성균관전적.
청주정씨 2명(2)
정사신(鄭士信) 1558년(명종 13)∼1619년(광해군 11).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부(子孚), 호는 매창(梅窓) 또는 신곡(神谷).
조부는 언보(彥輔) 아버지는 두(枓). 현감 사성(士誠)의 아우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저작·박사·감찰·정언·예안현감·병조정랑·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전적·예조정랑·수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지평으로서 왕을 따라 평양으로 피난중 반송정(盤松亭)에서 이탈하였다 하여 삭직당하였다.
그 뒤 강원도 지방에서 의병을 모아 많은 왜적을 무찌른 공으로 1594년 경상도도사, 1595년 선산군수가 되고 1609년(광해군 1)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선계변무(璿系辨誣)의 공으로 광국원종(光國原從)의 훈(勳)에 책록되고, 장례원판결사·밀양부사 겸 경상도중도방어사에 이르렀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매창집》이 있다.
*정내성(鄭來成)1744년(영조 20)∼1835년(헌종 1).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기서(岐瑞), 호는 사헌(思軒)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로 추증된 중섭(重燮)이며, 어머니는 권만원(權萬元)의 딸이다.
1780년(정조 4)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벼슬길에 올라서는 전적과 좌랑이 되었는데, 그는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여가가 있으면 언제나 문을 닫아놓고 책읽기를 좋아하였다.
1785년 전라도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어버이가 연로하였으므로 사양하고 고향에 내려가 인근 마을의 자제들을 불러모아 경서를 강의하였다.
그 뒤 다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와 종묘서령(宗廟署令) 등을 지내다가 1800년에 사직하고 귀향하여 부모상을 치렀다.
그 뒤 다시 병조참판·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한양조씨 5명
*조원승(趙元升)1687(숙종 13, 정묘)∼
본관 한양(漢陽). 자는 구숙(久叔).
증조부는 덕수(德秀). 조부는 명한(鳴漢). 아버지는 봉징(鳳徵). 외조부는 이진탁(李振鐸)
1744년(영조 20) 진사시 합격. 1747년(영조 23) 문과 급제.
승정원 주서. 영조 26년 성균관 전적. 동년 8월 사헌부감찰
*조보양(趙普陽)1709년(숙종 35)∼1788년(정조 12).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인경(仁卿)·현경(見敬)이고, 호는 팔우헌(八友軒).
증조는 명한(鳴漢)이고, 조부는 봉징(鳳徵)이며,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원익(趙元益)이다.
외조부는 예안(禮安) 이기만(李基晩)이며, 형제로 규양(葵陽)·득양(得陽)·의양(宜陽)·몽양(夢陽)이 있다.
1747년(영조 23)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1773년(영조 49) 문과에 급제하였다.
소은(小隱) 이경익(李景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과 나졸재(懶拙齋) 이산두(李山斗)는 직접 만나서 학문에 대한 질정을 받았다.
1747년(영조 23)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고 예조좌랑(禮曺佐郞)이 되었으나, 예조참판 정후겸(鄭厚謙)이 자신의 부임 때 나와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을 시켜 매질을 하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781년(정조 5)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자마자 바로 다시 돌아왔으며, 1788년(정조 12)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오위장(五衛將)을 제수받았으나 나이가 많아 부임하지 못하였다.
문집으로 《팔우헌문집(八友軒文集)》 7권이 있다.
*조석회(趙錫晦) 1727년(영조 3)∼1802년(순조 2).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이성(而晟), 호는 일봉(一峰).
아버지는 규양(葵陽)이며, 어머니는 풍산김씨(豊山金氏)로 달룡(達龍)의 딸이다.
1773년(영조 49)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그해 문과에 급제하여 1781년(정조 5) 예조좌랑이 되고, 다음해 특지로 만경현령에 제수되었다.
1788년 정언으로서 유곡찰방(幽谷察訪)을 겸직하다가 이어 장령이 되었고, 그 뒤 황해도수군우후(黃海道水軍虞候)와 사간원의 사간·헌납을 거쳐 1800년 우승지에 올랐다.
만경현령으로 있을 때 녹봉으로써 기민을 구제하고, 적체되어 있던 의옥(疑獄)을 소방(疏放)하고, 학재(學齋)를 중수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황해도수군우후 때에도 과목을 설정하여 무사들에게 제술(製述)을 권려하였다.
저서로는 《일봉문집》 3권이 있다.
*조현휴(趙顯休) 1778(정조 2)∼1832(순조 32).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조(懷祖), 호는 남계(楠溪).
조부는 지양(之陽). 아버지는 석상(錫商). 외조부는 성혜인(成惠寅)
순조(純祖) 17년(1817) 문과 급제. 사간원정언 역임. 저서:『楠溪集』.
*조용래(趙龍來):1790(정조 14, 경술)∼1848(헌종 14, 무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의응(犧應).
증조부는 득양(得陽). 아버지는현호(顯浩). 외조부는 김중현(金重鉉)
순조(純祖) 25년(1825) 문과 급제. 승문원에 분관.
헌종 11년 사헌부 지평. 경학에 밝고 行檢이 있었음
남양홍씨 1명
홍 우(洪楀):1661(현종 2, 신축)~
본관 남양(南陽). 자는 천경(天擎).
아버지는 진사 거원(巨源)
1687년(숙종 13) 생원시 합격. 1699년(숙종 25) 문과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
부림홍씨 1명
*홍종섭(洪宗涉) 1765(영조 41)
본관은 부림(缶林). 호는 호봉(湖峰)
아버지는 규적(圭績). 외조부는 이기룡(李基龍)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 문인
정조(正祖) 13년(1789) 문과급제. 승문원에 분관
정조 15년 순릉원수봉관. 정조 22년 전경문신. 정조 23년 장릉령. 순조 19년 정언
禮安縣
문과급제자 61명
안동권씨 2명. 봉화금씨 3명. 광산김씨 5명. 순천김씨 1명. 안동김씨 2명. 예안김씨 3명. 의령남씨 1명. 영천이씨 2명. 예안이씨 1명. 전주이씨 1명. 진성이씨 40명
안동권씨 2명
권수익(權受益):1452(문종 2, 임신)~1544(중종 39, 갑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허(子虛).
증조부는 이(彛). 조부는 구령(龜齡). 아버지는 겸(謙)
1486년(성종 17) 문과 급제. 영산(靈山) 영덕(盈德) 개천(价川) 인동(仁洞) 등 네 고을의 원을 거쳐 호조참판 및 同知義禁府使를 지냈다.
권 수(權洙):1522(중종 17, 임오)~1579(선조 12, 기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학원(學源).
아버지는 영노(永老) 퇴계 이황(李滉) 문인.
1552년(명종 7) 문과 급제. 承文院 正字로 분관된 후 성균관 학유로 病死하였다
봉화금씨 3명
금업(琴(心+業) 1557(중종 22)~1638(인조 16)
본관(本貫)은 봉화(奉化).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수재(晩修齋),
아버지는 성재(惺齋) 난수(蘭秀), 조부는 헌(憲), 외조부는 조대춘(趙大椿)이다.
외삼촌 월천 조목에게 배웠다
생원으로 선조(宣祖)34년(1601년),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였다.
선조 36년 사간원정언. 39년 예조좌랑. 광해군 1년 병조정랑. 부사. 승지
금개(琴愷) 1562(명종 17) ~ 1629(인조 7)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언강(彦康). 호는 망월헌(望月軒)
아버지는 성재(惺齋) 난수(蘭秀), 조부는 헌(憲), 외조부는 조대춘(趙大椿)이다.
외삼촌 월천 조목에게 배웠다
선조(宣祖) 24년(1591) 생원시에 합격. 선조(宣祖) 34년(1601) 문과급제
선조 36년 승정원주서. 광해군 7년 사헌부장령. 헌납. 10년 통례원좌통례
광해군 11년 통정대부 여주목사.
금시술(琴詩述) 1783(정조 7)∼1851(철종 2)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계문(繼聞), 호는 매촌(梅村),
이야순(李野淳)에게 수학했으며, 지조가 곧고 단정하고 문장에 능하였다. 또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아버지 5형제가 한울타리 안에서 의식을 같이 하며 살았다.
헌종(憲宗) 10년(1844)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과 전적(典籍)을 거쳐 1851년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부임치 않고 같은 해 10월에 세상을 떴다.
광산김씨 5명
김연(金緣)1487년(성종 18)∼1544년(중종 39).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적(子迪) 또는 자유(子裕), 호는 운암(雲巖).
조부는 회(淮). 아버지는 생원 효로(孝盧). 외조부는 이지(李持). 처부는 조치당(曹致唐)
1510년(중종 5) 생원시·진사시 양시합격하고, 1519년 33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1524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 당시 권신으로 횡포를 부리던 김안로(金安老)의 비행을 논박하여 파직시켰다. 그리고 자신도 노부모 봉양을 구실로 귀양(歸養)을 요청하여 근읍의 수령으로 나갔다.
그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는데 이때 김안로일당인 심언광(沈彦光)·채무택(蔡無擇) 등이 김안로를 복직시키려 하자,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이를 끝까지 반대하여 김안로의 미움을 샀다.
1531년 김안로가 다시 실권을 잡으면서 반대파를 제거할 때 경성통판(鏡城通判)으로 좌천되었다.
중종(中宗) 33년(1538) 탁영시(擢英試)에 급제하여,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이어 1542년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및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하면서, 국왕의 측근에서 특히 농정(農政)에 관심을 보였다.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어 당시 한발이 심해 폐단이 많았던 영동 지방에 대한 구황사업(救荒事業)에 힘써 도내의 백성들이 모두 그의 치적에 감복하였다.
1544년 경주부윤에 임명되어, 임지에서 졸하였다.
김해(金垓) 1555년(명종 10)∼1593년(선조 26).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달원(達遠), 호는 근시재(近始齋).
관찰사 연(緣)의 손자이며, 부의(富儀)의 아들이다.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고 조신(朝臣)의 천거로 1587년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여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89년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으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를 지내고, 한림(翰林)에 선발되어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그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11월 사국(史局)에서 사초(史草)를 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 예안(禮安)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안동·군위 등지에서 분전하였다.
이듬해 3월 좌도병마사 권응수(權應銖)와 합세하여 상주 당교(唐橋)의 적을 쳐서 큰 전과를 거두고, 4월 서울에서 부산으로 철수하는 적을 차단, 공격하여 대승하였으며, 5월에는 양산을 거쳐 경주에서 이광휘(李光輝)와 합세하여 싸우다가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1595년 홍문관수찬이 증직되고, 1893년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로 《근시재집》이 있다.
김령(金坽)1577년(선조 10)∼1641년(인조 19).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 예안 출신.
아버지는 현감 설월당 부륜(富倫)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로 부호군(副護軍) 수민(壽民)의 딸이고. 처부는 문과급제 승문원정자 홍사제(洪思濟)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나이 17세에 유성룡(柳成龍)의 막하로 자진 종군하여 당시 명나라의 총병사 오유충(吳維忠)과 유격장 노득공(盧得功) 두 사람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을 정도로 학식이 숙성하였다.
그 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주서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관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두문불출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한양으로 인조를 찾아나섰으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요형(耀亨)을 시켜 소를 올리게 하고서 돌아왔다. 뒤에 신하로서 아들을 시켜 상소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났다는 격렬한 상소가 있었으나 인조가 이를 모두 무마시켰다.
그 뒤로도 학덕을 잊지 못한 인조가 장령·보덕·헌납·사간 등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번번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병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가산을 모두 털어 의병들의 군량미로 충당하였으며, 끝내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비분강개한 시 수 편을 남겼다.
벼슬에서 물러나 죽을 때까지 처음에는 제자들과 경승지(景勝地)를 찾아 마음을 달래었으나, 마지막 20여년간은 문밖 출입을 삼가하며 오가는 사람도 방에 앉아 영접하고 보내, 세상에서 영남 제1인이라고 불렀다.
1689년(숙종 15)에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는 원액(院額)이 하사되었다.
저서로는 《계암집 溪巖集》 6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총(金𤧚) 1633년(인조 11)∼1678년(숙종 4).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명보(明寶) 또는 중휘(仲輝), 호는 우헌(迂軒).
아버지는 광술(光述)이며, 어머니는 풍천임씨(豊川任氏)로 경진(慶進)의 딸이다.
1652년(효종 3)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1660년(현종 1) 승문원정자에 제수된 후 저작·박사를 거쳐 1666년 의금부도사·예조좌랑을 역임하고, 1667년 우현감으로 외직에 나갔다.
1673년에 중앙관에 복귀하여 성균관직강·병조좌랑·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사헌부장령·집의(執義)·지제교(知製敎)·지공거(知貢擧) 등을 역임하였다.
1678년(숙종 4) 차왜접위사(差倭接慰使)로 동래에서 왜사(倭使)의 예경(禮敬)을 받았다.
그는 시문에 능하여 〈창랑대기 滄浪臺記〉 등 다수의 시문을 남겼으며, 옥구현감 시절에 지은 여러 편의 기우문(祈雨文)은 우국애민의 충심이 엿보인다.
저서로는 《우헌문집》 4권이 있다.
김성응(金聲應) 1737(영조 13)~1787(정조 11) 예안
본관 광산(光山). 호는 반와, 부인(富仁)의 7대손
증조부는 익휘(益輝). 조부는 광(洸). 아버지는 김약형(金若衡). 외조부는 조수태(趙壽台).
정조(正祖) 4년(1780) 문과 갑과 급제. 정조 5년 중부도사(中部都事). 정조 6년 사직서 령.
정조 7년 평안도사.
순천김씨 1명
김응상(金應商) 1686(숙종 12)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응(士應)
조부는 정추(鼎秋). 아버지는 이곤(以袞)
숙종(肅宗) 37년(1711) 생원시 합격. 숙종(肅宗) 43년(1717) 문과급제.
승정원주서.
안동김씨 2명
김명원(金鳴遠) 1591(선조 2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이(道而). 호는 한사(寒沙)
증조부는 생명(生溟). 아버지는 계종(繼宗). 외조부는 유빈(柳贇)
광해군(光海君) 4년(1612) 생원시 1등 2위로 합격하고,
인조(仁祖) 13년(1635) 문과급제. 인조 14년 하동현감. 26년 병조좌랑. 성균관직강
효종 5년 양산군수.
김진원(金震遠) 1601(선조 3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이(德而)
조부는 기보(箕報). 아버지는 곤(袞). 생부는 계종(繼宗). 언업(彦𢢜)
인조(仁祖) 17년(1639) 문과급제. 인조 16년 성균관학유. 승정원주서.
봉상시봉사. 인조 21년 오수찰방. 선조 24년 성균관전적. 예조좌랑. 병조좌랑.
25년 예조좌랑. 안주판관. 효종 2년 연서찰방. 효종 3년 개성부경력.
영국공신(寧國功臣) 일등훈(一等勳)에 책록되었다.
예안김씨 3명.
김흠조(金欽祖) 1461(세조 7)~1528(중종 23)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경숙(敬叔).
조부는 미손(尾孫). 아버지는 효우(孝友)이다.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급제, 검열 등을 지내고 1507년(중종 2) 예문관봉교로서 정충량(鄭忠樑)·이희증(李希曾) 등과 함께 상소하여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한 김종직(金宗直)·김일손(金馹孫) 등의 신원(伸寃)과 유자광(柳子光) 등의 처벌을 주청하였다.
1509년 언양현감으로 시폐칠조(時弊七條)를 개진하였고, 1521년 상주목사를 거쳐 1525년 제주목사가 되어 이진(移鎭)과 점마관(點馬官) 파견의 금지를 주청하였고, 이듬해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다.
김윤석(金潤石)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중수(仲粹)
조부는 효우(孝友). 아버지는 판결사 흠조(欽祖)
중종(中宗) 5년(1510)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中宗) 23년(1528) 문과급제.
중종 29년 승정원주서. 30년 시강원사서. 33년 병조정랑. 사헌부지평. 35년 장령을
지내고 부사를 역임하였다.
김택룡(金澤龍)1547년(명종 2)∼1627년(인조 5).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시보(施普), 호는 조성당(操省堂). 와운자(臥雲子).
아버지는 참봉 양진(楊震)이다. 퇴계 이황. 월천 조목(趙穆) 문인
선조(宣祖) 9년(1576) 진사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거쳐,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 급제하여 세자시강원·문학을 역임하였다.
1595년 병조좌랑이 되고, 이어 선조 앞에서 《주역 周易》을 강의하였다. 같은해 헌납·성균관직강을 거쳐 이듬해 지평·세자시강원 겸사서를 역임하고, 전라도 광양·운봉에서 적을 무찌른 공으로 공적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600년 전적을 거쳐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전라도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의령남씨 1명
남숭(南崧)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인(伯仁). 아버지는 노(老).
중종(中宗) 32년(1537) 문과급제. 성균관 전적. 현감
영천이씨 2명
이현보(李賢輔) 1467년(세조 13)∼1555년(명종 10). 예안 출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鬢翁).
조부는 효손(孝孫). 아버지는 참찬 흠(欽). 외조부는 권겸(權謙). 처부는 권효성(權孝誠)
연산군(燕山君) 1년(1495) 생원시 합격.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그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李滉)·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 漁夫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孝嚬歌〉·〈농암가〉·〈생일가 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하고 있다.
1612년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가 1700년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농암문집》이 전한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이중량(李仲樑) 1504년(연산군 10)∼1582년(선조 15).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공간(公幹). 아버지는 숭정대부행지중추부사. 농암 현보(賢輔)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충순위(忠順衛) 효성(孝誠)의 딸이다.
1528년(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에 임명되고, 곧 예문관에 선임되어 1536년까지 검열·대교·봉교를 역임하였다.
1537년 세자시강원설서·승정원주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인 아버지 현보의 관하 수령이 명사를 위한 지대물(支待物)진상을 상찰(詳察)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장계를 보고하지 않았다고 파면되었다.
1539년 어머니의 상을 마친 뒤 예문관봉교에 복직되고, 곧 성균관전적에 승진, 이후 예조좌랑·정언을 역임하였다.
1541년 11월 사헌부지평에 승진되었고, 곧 병조정랑·경기도도사를 거쳐, 1542년 황해도도사에 개수되었으며, 이듬해 양친(養親)을 위하여 영천군수를 자원하였다.
1549년(명종 4) 종부시첨정으로 입조한 뒤 삼척부사로, 1550년 청송부사에 체직되었으며, 1554년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면서 안동대도호부사가 되었다.
1557년 아버지의 상을 마치고 사헌부장령에 복직되고, 이후 사간·집의를 거쳐, 1559년 특명으로 홍문관에 선임되어 교리·전한·직제학을 역임하였다. 그해 11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자하면서 승정원동부승지에 발탁, 이후 1561년까지 우부승지·예조참의·좌부승지·우승지·5위장을 지내고, 1562년 상주목사로, 1563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 뒤 경주부윤에 체직되었고, 1564년 경주부의 군액이 많이 결핍되었다 하여 파직되었다.
1567년 행영해부사로 복직되고, 1570년(선조 3) 공조참의,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성품이 과묵하고 겸손하였으며, 효행과 학행이 뛰어났다.
20여년간 외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고, 특히 영해부사가 되어서는 유민정착에 힘써 칭송을 받았다.
예안이씨 1명
이명(李蓂) 1496년(연산군 2)∼1572년(선조 5).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요서(堯瑞), 호는 동고(東皐).
조부는 신(愼). 아버지는 연산현감 보간(輔幹). 외조부는 윤혼(尹渾)
1525년(중종 20) 사마시에 합격,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예문관검열을 거쳐 봉교로 승진하였다.
1531년 성균관전적으로 옮겼다가 병조·예조의 좌랑이 되었고, 1537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가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옥당(玉堂)에 들어가 교리·응교·집의를 지냈다.
1544년 직제학·동부승지·우부승지가 되었으며, 1547년(명종 2)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부제학에 올랐다. 당시 권신 이기(李芑)가 권력을 휘둘러 사류(士類)를 죽이거나 몰아내니 사람들이 모두 모른체하였는데,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대사헌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이기를 탄핵하였다.
1549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2년 대사헌이 되었고, 특별히 대사성을 배(拜)하였다.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어 특진관으로 입시,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사람의 신원을 주장하여 왕의 승낙을 얻고 그날로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호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57년 좌참찬이 되어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하였다.
1559년 좌찬성, 1564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나이 70이 되어 사직할 것을 청하여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566년 좌의정이 되었다가 선조 즉위초 나이가 많아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명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전주이씨 1명
이기동(李起東) 1841(헌종 7)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인백(仁伯). 아버지는 경의(景儀)
고종(高宗) 10년(1873) 진사시 합격. 고종(高宗) 17년(1880)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가주서. 고종 20년 사간원정언. 22년 사헌부지평. 장령. 23년 홍문관수찬
고종 27년 부교리. 교리
진성이씨 40명
이우(李堣)1469년(예종 1)∼1517년(중종 12).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재(松齋).
진사 계양(繼陽)의 아들이며, 이황(李滉)의 숙부이다.
1492년(성종 23) 생원이 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어 예문관검열·대교·봉교를 거쳐 1501년 성균관전적에 올라 사간원정언·이조좌랑·사헌부헌납·병조정랑 겸 지제교·사헌부장령 겸 춘추관기주관·봉상시첨정·사간·군기시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지제교와 춘추관수찬관을 겸하였다가 마침 입직하던 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협력하였고, 그 공로로 정국공신(靖國功臣)4등에 녹훈,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지고 우부승지로 벼슬이 승진되어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겸하였다.
1508년(중종 3) 부모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희망, 진주목사로 부임하여 청렴과 검소를 위주로 백성을 다스려 왕으로부터 특별히 표리(表裏)를 하사받았고,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전임,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형조참판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양친봉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뒤 영해·김해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앞서 반정공신 책봉 당시에 그를 녹훈시키는 문제로 물의가 있었는데, 1514년에 와서 입직승지로서 신절(臣節)에 어긋나게 행동하였다는 비난을 받아 삭훈되었다가 이듬해 안동부사로 서용되었다.
문장이 맑고 전아(典雅)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특히 시에 뛰어나 산천의 명승을 읊은 것이 《관동록 關東錄》·《귀전록 歸田錄》에 전하고 있다. 최숙생(崔淑生) 등의 사류(士類)와 친하였다.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송재집》 1권이 있다.
이해(李瀣) 1496년(연산군 2)∼1550년(명종 5).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진사 식(埴)의 아들이며, 퇴계 황(滉)의 형이다.
어려서 숙부 송재 우(堣)에게 글을 배웠다.
1525년(중종 20)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3년에 사간·정언 등을 거쳐 1541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좌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에 첨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을 지내고, 이해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탁용(擢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1547년에 황해도관찰사, 1549년에 청홍도관찰사를 거쳐 1550년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 주위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으며, 마침 김안로(金安老)가 인근에 살았으므로 권세로 이끌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그러나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나, 귀양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의 삼봉서원(三峰書院),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4).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증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2세에 숙부 송재 우(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 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 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27세(1527)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 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 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 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 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蓬)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愁 :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명익(李溟翼) 1617년(광해군 9)∼1687년(숙종 13).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만리(萬里), 호는 반초당(反招堂).
증조부는 빙(憑). 조부는 일도(逸道). 아버지는 지형(之馨). 처부는 권상충(權尙忠)
1649년(인조 27) 별시문과에 급제.
이듬해 검열로 등용되고, 곧 설서가 되었다.
1657년과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실록을 태백산·오대산 사고에 각각 봉안하고 돌아왔다. 현종 때 정언이 되고, 이어서 지평을 거쳐 옥당. 사간·집의를 역임하였다.
1675년 승지, 다음해 대사간이 되어 언로(言路)의 기강을 세웠고, 1677년 외직인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세곡(稅穀)의 수송을 편리하게 하는 방법을 시행하게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게 하였다.
또한, 대동법을 시행하여 부역과 세공에 의한 백성들의 피해를 덜게 하였다.
*李世震 守約子性重厚簡默孝友謙謹英廟文司書
이세진(李世震) 1680(숙종 6)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형백(亨伯)
퇴계 후손. 조부는 회(櫰). 아버지는 수약(守約). 외조부는 강자(姜鄑)
영조(英祖) 11년(1735)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가주서. 영조 14년 병조좌랑
세자시강원사서.
이세사(李世師) 1694(숙종 20)~1754(영조 (30)
본관은 진보(眞城), 자는 성백(聖伯), 호는 만화헌(晩花軒).
퇴계 8대손. 조부는 회(櫰). 아버지는 수약(守約). 외조부는 강자(姜鄑). 세진(世震)의 동생.
1744년(영조 20)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분관. 영조 22년 정언이 되고 홍문록에 올라.
23년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 부수찬으로 탕평책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참의등의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영조 49년 숭록대부 지중추부사에 올라 기로소에 들어갔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세태(李世泰)1698년(숙종 24)∼1760년(영조 36). 예안 출신.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계통(季通), 호는 동병(東屛).
퇴계 황(滉)의 8대손으로, 조부는 회(櫰).아버지는 수경(守經). 외조부는 안노석(安老石).
1744년(영조 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주서를 거쳐 1747년 지평을 지냈다. 주서로 있을 때 그 청명(淸名)을 날렸다.
1754년 정언이 되고 장령을 거쳐 뒤에 판결사가 되었다. 남포현감으로 있을 때 어사 채제공(蔡濟恭)이 왕에게 아뢰기를, “세태는 3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월봉을 저축하여 민역(民役)을 보충하고 궁핍함을 다스렸으므로 이민(吏民)이 깊이 신뢰하고 있다.”고 하였다.
왕이 형조참의를 제수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그가 세상을 떠난 뒤였는데 조정이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이세택(李世澤) 1716년(숙종 42)∼1777년(정조 1). 예안 출신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맹윤(孟潤), 호는 조은(釣隱).
퇴계 황(滉)의 8대손, 조부는 경(檠). 아버지는 감역 수항(守恒). 외조부는 안노석(安老石)
영조 26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1753년(영조 29) 정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검열·교리를 거쳐 1762년에 우부승지에 오르고 그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을 제수받았을 때, 신임사화의 죄인인 이광사(李匡師)를 정계(停啓)하지 않았다 하여 삼사 모두가 유배당하였다.
도승지 홍명한(洪名漢), 병조판서 이지억(李之億) 등이 임금의 뜻에 따라 정계에 응할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채제공(蔡濟恭)이 서찰을 내어 그가 정계에 응하지 않았음을 칭찬하였다 한다.
1768년 인동부사로 있을 적에 살옥(殺獄)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였다고 탄핵을 받고 단양에 유배되었는데, 이때부터 시파(時派)로서 벽파(僻派)의 탄압을 받았다.
그뒤 정조가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벽파 정후겸(鄭厚謙) 등을 규탄하여 죄상을 밝혔고, 이어 《명의록 明義錄》을 편찬할 때에 찬집당상이 되었다.
시문집으로 《조은유고》가 전한다.
이급(李級) 1721(경종 1)~1790(정조 14)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자명(子明), 호는 농은(聾隱).
아버지는 민정(敏政), 생부는 담룡(聃龍), 조부는 재광(再光), 증조부는 빈한(彬漢), 외조부는 홍익상(洪翊相)이다.
영조(英祖) 29년(1753)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가주서.
예조좌랑, 사간원정언, 사헌부집의 역임.
저서:『壟隱遺集』•『朱子書節要箚疑』•『性理通篇』.「墓碣銘」(李仁行 撰)
이세백(李世伯) 1726(영조 2)
본관은 진보(眞寶). 퇴계 7대손
증조부는 신철(信哲). 조부는 유(柔). 아버지는 수성(守聖). 외조부는 박휘도(朴徽道)
정조(正祖) 22년(1798) 73세로 문과급제. 바로 돈녕부 도정이 제수되었다.
이귀운(李龜雲) 1744(영조 20, 갑자)∼1823(순조 23, 계미).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응서(應瑞).
퇴계 황(滉)의 8대손. 수졸당(守拙堂) 기(岐)의 5대손. 조부는 수원(守元). 아버지는 세익李世翊). 외조부는 의성 김경헌(金景瀗).
1786년(정조 10) 문과 갑과 급제. 승문원 분관. 가주서. 병조정랑. 정조 11년 사포서직장.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사헌부지평, 정조 13년 수찬. 부교리, 정조 18년 교리. 19년 사헌부장령. 집의. 의정부검상. 부응교. 응교. 정조 23년 응교. 집의. 24년 사간. 응교. 순조 초 양산군수. 순조 10년 교리. 12년 응교. 15년 사간. 집의. 16년 통정대부 호조참의. 18년 대사간. 순조 24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태순(李泰淳) 1759년(영조 35)∼1840년(헌종 6).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내경(來卿), 호는 초암(草庵).
수약(守約)의 증손자이며, 세관(世觀)의 손자이며, 첨추(僉樞) 구원(龜元)의 아들이다.
1783년(정조 7) 생원이 되고, 1801년(순조 1) 문과에 급제 , 1806년 2월 홍문록에 올라
교리가 되고, 1810년 장령이 되었을 때 정사습(正士習)·금사치(禁奢侈)·택사목(擇司牧)·휼민막(恤民瘼)의 시무4조를 진소(陳疏)하여 왕으로부터 가납을 받기도 하였다. 1718년 정약용(丁若鏞)의 사학지원(邪學之寃)을 소론(疏論)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1823년 대사간이 되었다. 특히, 선조의 유훈을 지켜 지나친 욕심을 삼가하였고 관직은 1838년(헌종 4)에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가순(李家淳) 1768년(영조 44)∼1844년(헌종 10).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학원(學源), 호는 하계(霞溪).
이황(李滉)의 9대손. 조부는 만화헌(晩花軒) 세사(世師). 아버지는 경기전참봉 구서(龜書),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정랑 오응(五應)의 딸이다.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정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참봉으로서 1813년(순조 13) 문과에 급제하여, 1814년 통사랑으로 임명되고, 1820년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1821년 시강원설서 등을 역임하였다. 1822년에 인신(印信)을 소홀히 하였다는 무고로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가 1823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사과·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31년 선전관에 이어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교리. 사헌부장령, 응교, 사간 등을 역임하면서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데 노력하였다. 《주역》과 시, 고금의 역사공부에 힘을 기울였고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는 《하계문집》이 있다.
이언순(李彦淳) 1774년(영조 50)∼1845년(헌종 11).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관(景寬), 호는 농와(聾窩).
퇴계 황(滉)의 9대손. 조부는 세협(世浹). 아버지는 구용(龜容). 외조부는 光山 김약일(金若鎰)
1804년(순조 4) 문과에 급제한 뒤 수찬·응교를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공조참의·동부승지를 거쳐 춘천부사로 있을 때는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는 칭송을 들었으며, 1822년 암행어사로 지방 수령들의 부정을 철저하게 다스려 강직한 인사로 이름이 높았다.
그 뒤 대사간이 되고, 1833년 영흥부사·대사성을 지내고, 이어 1835년(헌종 1) 사은부사(謝恩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0년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또 근면하고 민첩하였다. 그가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새벽에 일어나서 촛불을 밝히고 사무를 처리하였으며, 세납(稅納)에 기한을 어긴 적이 없었다. 평소에 독서를 매우 즐겨 서가에 가득한 서책이 어느 것이나 손때가 묻어 있을 정도였다.
한편, 국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어 정사와 야사를 두루 섭렵한 결과 역대의 연혁·치란(治亂)과 인물의 선악을 널리 알고 있었다.
이동순(李同淳) 1779(정조 3)~1860(철종 11)
본관은 진보(眞城), 자는 의경(義卿).
퇴계 9대손. 증조부는 수증(守曾). 조부는 세학(世學). 아버지는 구천(龜天).
외조부는 이지묵(李之默)
순조(純祖) 7년(1807) 문과에 급제. 순조 8년 승문원 분관. 순조 15년 시강원설서. 사간원정언. 16년 사헌부지평, 군위현감. 19년 사헌부장령이 되었고. 순조 21 홍문관 수찬. 1826년 장악원정을 거쳐 필선이 되어 교문을 반포할 때, 예모관으로 통정계에 올라 호조참의, 승정원동부승지, 우승지, 헌종 10년 형조참판. 11년 동지부사로 북경에 다녀와서 호조참판, 한성좌윤.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효순(李孝淳) 1789(정조 13, 기유)∼1878(고종 15, 무인).
본관은 진보(眞보). 자는 원백(源百).
퇴계 9내손. 조부는 세습(世習). 아버지는 구정(龜鼎). 어머니 의성김씨는 표은 김시온의 현손인 첨중추 김득행(金得行)의 딸이다.
1822년(순조 22) 문과 장원급제. 성균관전적. 예조좌랑. 사간원정언, 장악원정. 홍문관교리 를 지내고, 1842년 영해부사에 부임하여 간사한 아전의 농간이나 청탁과 뇌물 등을 엄격히 단속하는 등 청렴한 치적을 남겼다. 이후 형조참의. 병조참판. 좌승지 1855년 형조판서. 지의금부사에 제수되고 1858년 耆社(기로소)에 들어갔다
이휘규(李彙圭) 1786(정조 10, 병오)∼1854(철종 5, 갑인).
본관 진보(眞寶) 자는 심수(心受). 호는 서계(西溪).
퇴계 10대손. 몽재 안도(安道) 8대손. 조부는 구몽(龜蒙). 아버지는 명순(明淳)
외조부는 박창주(朴昌周)
1831년(순조 31) 문과 급제. 성균관전적. 병조좌랑.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홍문관교리
집의. 동부승지 등을 거쳐 회양부사로 나갔다. 회양부사로 재직 시, 교학을 일으키고 孝悌를 장려하는 등 밝은 치적을 남겼다. 홍문관에 있을 때 극도로 문란한 三政의 폐단을 상소하여 가납되기도 하였다. 墓碣銘은 회당 張錫英 撰
이휘승(李彙承) 1807(순조 7, 정묘)
본관 진보(眞寶) 자는 경천(擎天). 호는 신옹(信翁).
퇴계 10세손. 조부는 구길(龜吉). 아버지는 행순(行淳). 생부는 재순(在淳)
헌종(憲宗) 15년(1849) 문과갑과 급제. 철종 1년 승정원주서. 3년 정언. 4년 지평.
철종 6년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 철종 7년 승 당상 승지. 10년 우승지. 고종 3년 도정.
승지. 병조참지. 8년 대사간. 고종 23년 병조참판. 고종25년 한성좌윤
이만규(李晩奎) 1798(정조 22, 무오)∼1863(철종 14, 계해).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림(景休).
조부는 형순(馨淳). 아버지는 휘장(彙章). 외조부는 고몽린(高夢麟)
순조(純祖) 28년(1828) 문과급제. 헌종 6년 정언. 철종 6년 헌납. 8년 장령.
철종 9년 홍문관교리.
이만송(李晩松) 1805(순조 5)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공무(公茂)
황(滉)의 11세손. 아버지는 휘성(彙成)
헌종(憲宗) 6년(1840) 진사시에 합격. 철종(哲宗) 11년(1860) 문과급제
철종 11년 승문원분관. 12년 사간원정언. 고종 9년 사헌부지평.
이만덕(李晩德) 1809(순조 9)
본관은 진보(眞寶).
조부는 태순(泰淳). 아버지는 휘운(彙運). 외조부는 유회문(柳晦文)
헌종(憲宗) 12년(1846) 문과장원 급제. 바로 사간원정언이 제수되고, 헌종 13년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이만운(李晩運) 1815(순조 15, 을해)∼1886(고종 23, 병술). 개남
본관 진성(眞城). 자는 눈오(文五). 호는 쌍취(雙翠).
퇴계 후손. 조부는 언순(彦淳). 아버지는 휘정(彙廷). 처부는 문충공 학봉선생의 주손인 능주목사 김진화이며. 공의 처남은 서산 김흥락이다. 계배(繼配)는 문충공 서애선생의 후손이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문인. 1843년 생원시 합격. 이듬해 증광 문과 급제.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헌납이 장령되고 . 철종 6년 통정대부가 되어 대사간병조참의. 이조참의가 되고, 좌승지 한성우윤. 경부부윤. 이조참판. 병조참판.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고종 11년 경상좌도 암행어사 박정양(朴定陽)이 1875년 경주부윤 때의 일로 모함하여
무주(茂州)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낫다.
고종 14년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공은 전후 7차례에 걸쳐 대사간을 역임하였으니
가히 공의 강직함을 알 수 있을 겄이다
경주부윤으로 재임할 때 김유신의 구기에 유허비를 세우고 비문을 지었다
行狀 향산 이만도(李晩燾) 撰
이휘병(李彙秉) 1819(순조 19, 기묘)
본관은 진보(眞보). 자는 문칙(文則). 호는 괴와(槐窩).
퇴계의 11세손. 조부는 구천(龜天). 아버지는 중순(仲淳). 외조부는 신치도(申致道)
헌종(憲宗) 15년(1849)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가주서. 철종 11년 정언. 지평. 헌납.
고종 2년 홍문관수찬. 고종 4년 헌납. 장악원정. 고종 15년 승지. 병조참의.
이휘상(李彙相) 1835(헌종 1, 을미)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공우(公佑).
퇴계의 10세손. 조부는 구운(龜運). 아버지는 응순(應淳). 외조부는 풍산 유동조(柳同祚)
고종(高宗) 10년(1873) 문과급제. 승문원 정자
이휘준(李彙濬) 1806(순조 6, 병인)∼1867(고종 4, 정묘).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심부(深父), 호는 복재(復齋).
퇴계 10대손. 증조부는 세사(世師). 조부는 구서(龜書). 아버지는 가순(家淳). 외조부는 강침(姜𣝔) 이용석(李龍錫)의 문인으로 1856년(철종 7) 문과 급제, 이듬해 성균관 전적이 되고 1858년 사간원정언과 사헌부지평을 지내고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1861년 부교리가 되어 옥당(玉堂)에서 진강(進講)할 때 실정을 진언하고 대책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다시 사헌부장령을 지내고 헌납을 거쳤다. 1863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고, 이듬해에 대사간·호조참의·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1866년 대사성에 올랐다. 「교황해도관찰사홍순목서(敎黃海道觀察使洪淳穆書)」는 왕을 대신해서 황해도관찰사 홍순목에게 내린 글로, 황해도는 서울이 가까워 문물이 번창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곳이므로 민정을 잘 살펴서 관폐가 없도록 할 것이며, 숨은 인재를 발굴하여 치정에 도움이 되게 할 것을 지시하였다. 「영남변무소(嶺南辨誣疏)」는 진주민란이 있은 뒤에 안핵사(按?使)로 나갔던 박규수(朴珪壽)가 사건의 조사를 공정하게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이의 시정을 주장한 글이다. 박규수가 당리와 당략에 따라 편파적으로 일을 처리함으로써 영남의 사림들을 모함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하고,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영남의 사림을 이에 연관시켜 그 진취를 막는 일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척사통문(斥邪通文)」에서는 신임사옥 뒤에 나라에서 천주학을 배척한 일은 잘한 일로 하늘의 지시임을 강조하면서, 선비들이 뜻을 모아 천주학을 배척하여 이단의 침입을 막고자 요구하였다.
저서:『復齋集』. 「墓碣銘」(權承夏 撰)
이만유(李晩由) 1822(순조 22, 임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도여(道汝). 호는 목재(穆齋).
퇴계의 11대손. 조부는 정순(程淳). 아버지는 휘명(彙明). 외조부는 이창발(李昌發)
철종(哲宗) 9년(1858) 문과 급제. 철종 14년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고종 6년 홍문관부교리. 고종 10년 병조참지. 11년 승지. 18년 영해부사. 고종 19년 승지. 고종 23년 대사간
이만형(李晩瀅) 1825(순조 25)
본관 진보(眞寶).
퇴계의 11세손. 조부는 보순(保淳). 아버지는 휘진(彙震). 생부는 휘인(彙寅)
철종(哲宗) 6년(1855)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고종 1년 사간원정언. 고종 3년 헌납.
고종 10년 부수찬. 부교리. 11년 장령. 집의. 14년 사간원사간. 홍문관교리
이만기(李晩耆) 1825(순조 25, 을유)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덕로(德老). 호는 신암(新巖).
퇴계의 11세손. 조부는 민순(民淳). 아버지는 휘정(彙正). 외조부는 신학모(申學模)
철종(哲宗) 3년(1852) 문과급제. 고종 1년 홍문관부교리. 고종 9년 대사간. 우부승지
초산부사 때 선치로 생사당이 지어졌다.
이만로(李晩魯) 1827(순조 27, 정해)
본관 진보(眞寶). 자는 중달(仲達). 호는 해암(海巖).
퇴계의 11세손. 조부는 연순(延淳). 아버지는 휘상(彙祥). 외조부는 금희술(琴熙述)
고종(高宗) 7년(1870) 문과 급제. 고종 13년 사간원정언. 14년 사헌부지평
이휘림(李彙林) 1829(순조 29)
본관 진보(眞寶). 호는 일암(逸岩)
퇴계의 10세손. 조부는 구복(龜福). 아버지는 장순(長淳). 외조부는 김건수(金鍵秀)
철종(哲宗) 6년(1855) 문과급제. 고종 3년 사헌부지평. 고종 11년 홍문관수찬. 교리
대원군을 도성으로 모실 것을 청하는 상소로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고종 19년 풀려났다.
이만정(李晩正):1830(순조 30, 경인)∼1902(광무 6, 임인).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계연(啓衍). 호는 언물대(言勿臺).
퇴계의 11세손. 아버지는 휘철(彙撤). 외조부는 星州 이원우(李源祐)
고종(高宗) 19년(1882) 문과 급제. 1883년 성균관전적.
이어 持平에 올랐으며 1887년 사헌부장령. 1890년에 홍문관부교리. 1893년 홍문관응교가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만용(李晩容)1831(순조 31, 신묘)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景燁. 호는 東壁.
퇴계의 11세손. 조부는 경순(畊淳). 아버지는 휘시(彙詩). 외조부는 김도상(金道常)
고종(高宗) 4년(1867) 문과 급제. 고종 13년 사헌부지평. 홍문관부수찬. 부교리
교리, 수찬, 고종 28년 부응교, 응교, 사간을 역임하였다. 「墓碣銘」(李從鎬 撰)
이만현(李晩鉉) 1832(순조 32, 임진)
본관 진보(眞寶) 자는 영옥(英玉)
퇴계의 11세손. 조부는 주순(朱淳). 아버지는 휘면(彙면). 외조부는 강옥성(姜玉成)
고종(高宗) 13년(1876)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14년 사간원정언. 16년 홍문관부수찬.
부교리. 고종 16년 언양 현감. 고종 30년 홍문관교리.
이중두(李中斗) 1836(헌종 2, 병신)∼1914.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운경(運卿). 호는 소계(小溪).
퇴계 12세손. 아버지는 만백(晩栢)
고종(高宗) 11년(1874) 생원시 합격. 고종(高宗) 17년(1880) 문과 급제.
승문원분관. 고종19년 주서. 22년 홍문관교리. 27년 응교. 고종 27년 승 당상 병조참의
28년 좌우부승지를 거쳐 고종 31년 이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낙향. 경술국치 이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향리에서 독서로 소일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이만도(李晩燾) 1842년(헌종 8)∼1910년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퇴계 후손. 조부는 가순(家淳). 아버지는 휘준(彙濬). 외조부는 야성 송재헌(宋在憲)
1866년(고종 3)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가 이윽고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고, 이로부터 10년간 홍문관부수찬으로서 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하고, 또 대신(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였으며, 부교리·장령·지평·우통례(右通禮)·병조정랑·충청장시도사(忠淸掌試都事)·교리·응교·사간·집의·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역임하는 동안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시강(侍講) 및 빈대(賓對)때에 그가 상주하는 말을 고종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다.
1876년에 일본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와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의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동공박을 받았는데, 그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부당하다고 말소하였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뒤 다시 복직되고,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가을에 양산군수에 제수되어 기민의 구휼과 탐관오리 소탕에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하고, 1882년에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세상이 어수선하므로 환로를 단념하였는데, 당시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놓고 경적을 연구하며 날을 보내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박한 상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그해 8월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고결(告訣)한 뒤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李中彦 詠道后號東隱高廟文正言乙巳上疏有實記
이중언(李中彦)1850년(철종 1)∼1910년.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중관(仲寬)·소자(小字)·문석(文錫), 호는 동은(東隱).
퇴계 후손. 조부는 휘제(彙濟). 아버지는 만우(晩佑). 외조부는 김진두(金鎭斗)
1879년(고종 16) 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880년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1882년 정국이 혼란하자 봉화의 임당산(林塘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1895년 8월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시해가 자행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김도현(金道鉉)이 안동·영양 등지를 중심으로 창의하자 이에 가담하여 전방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간신배들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집 밖에 좁다란 방 한칸을 마련하고 외부와 접촉을 끊고 때때로 을사조약 체결 때 상소하였던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고, 선조의 사당과 묘를 참배한 뒤 수십일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무렵 일본경찰 몇명이 와서 음식을 먹도록 권하라고 식구들을 협박하자, 때마침 베개를 의지하고 졸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벼락 같은 호령을 하고 나서,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똑바로 앉아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李晩煃 晩燾弟號柳川高廟進文校理除禮安不就杜門養老以篤孝稱有遺稿權相翊撰狀
이만규(李晩煃) 1845(헌종 11)~1920 예안 하계
본관 진보(眞寶), 자(字)는 순칙(順則), 호(號)는 유천(柳川),
퇴계 11대손. 아버지는 휘택(彙澤). 생부(生父)는 휘준(彙濬). 향산 만도(晩燾)의 동생.
고종(高宗) 16년(1879) 생원시에 합격하고, 고종(高宗) 20년(1883) 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부교리(副校理).동학교수(東學敎授)가 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사직하였다. 1896년 예안군수로 재직하였지만 사직하고, 입산 은둔으로 단식(斷食)하며 일본에서 주는 은사금을 거절하였다. 1919년 고종의 인산에 참석하고 심산 김창숙(金昌淑), 면우 곽종석(郭鍾錫) 등과 협의하여 파리만국평화회의에 유람단 대표로 독립청원서를 발송한뒤 검거되어 성주(星山)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문집이 있다. 건국포장(1995년)이 추서되었다.
*李中燦 守淵后高廟文正字
이중찬(李中燦) 1862(철종 13)
본관 진보(眞寶) 퇴계의 12세손. 수연(守淵) 후손. 아버지는 만종(晩琮)
고종(高宗) 30년(1893) 문과급제. 正字
*李文求 弘重后高廟文秘書丞
이문구(李文求)
본관 진보(眞寶) 퇴계의 14세손. 아버지는 면호(冕鎬)
고종(高宗) 31년(1894) 문과 급제.
한림관(翰林官)과 1907(광무 11) 비서승(秘書丞)이 되었다.
*李中泰 晩胤子號陶雲高廟文秘書丞乙巳上疏被逮旋宥
이중태(李中泰) 1822(순조 22)
본관은 진보(眞寶). 퇴계 11대손. 아버지는 만윤(晩胤)
고종(高宗) 28년(1891) 문과급제. 가주서.
35년 비서원 낭. 37년 승 통정대부 비서원 승(秘書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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