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
|
생에 감사해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
Gracias a la vida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
노랫말 번역: 우석균ㆍ정승희 |
|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하지만 비올레타 파라에게는 덧없는 세월이었다. 처음 상경했을 때부터 비올레타 파라는 민속음악을 보존, 재창조,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가슴 한 구석이 늘 허전했다. 그러다가 니카노르 파라의 권유로 1953년부터 민속음악을 채집하면서 그녀의 삶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비올레타 파라는 공책과 연필만 달랑 들고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혼자서 칠레대학 민속연구팀보다 더 많은 노래를 채집하는 억척스러움을 발휘했다. 1953년은 또한 그녀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은 해이기도 하다. 근대화와 도시화로 잊혀져 가던 민요가 비올레타 파라의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되자 감격에 찬 청취자들의 편지가 쇄도했다. 이 감격의 순간을 회고하며 비올레타 파라는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진짜 인생은 서른다섯 살이 넘어야 시작돼요.”라고.
1955년 민속 부문에서 칠레의 예술 대상인 카우폴리칸 상을 수상했을 때, 비올레타 파라의 삶은 평탄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그녀의 열정이 너무나 컸다. 폴란드에서 국제민속대회 초청장이 날아들자 비올레타 파라는 주저 없이 유럽행을 선택하였다. 칠레 민속음악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리겠다는 포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고 얼마 후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9개월짜리 딸이 갑자기 죽어버렸다. 비보를 접한 비올레타 파라는 그 아픔을 달래려고 미친 듯이 음악에 몰두하지만, 이런 행동이 결국은 두 번째 이혼의 발단이 되었다.
비올레타 파라의 유럽 생활은 궁핍함의 연속이었으나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 파리에서 <칠레의 노래>라는 다큐멘터리 성격의 음반을 취입하고, 인류박물관과 유네스코에 칠레의 소리를 기록으로 남기고, 칠레 민속을 소개하는 책을 발간하고, 루브르 박물관 부속 전시실에서 자신이 만든 수공예품을 전시했다. 또 영국에서도 방송에 출연하고 BBC방송국 자료실에 자신의 노래를 보존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비올레타 파라가 최종적으로 칠레로 돌아온 것은 ‘파라 페냐’(Peña de los Parras)가 문을 연 다음이었다.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사벨 파라와 앙헬 파라가 파리의 상송 카페에 영감을 얻어 1965년 산티아고 시내에 연 라이브 카페다. 페냐는 예기치 않은 성공을 거두었고, 사회성과 서정성을 조화시키는 데 성공한 노래운동인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ón)의 모태가 되었다. 뒤늦게 유럽에서 돌아와 카페의 성공을 두 눈으로 목격한 비올레타 파라는 가슴이 설레었다. 드디어 칠레 사회가 전통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녀가 자살한 장소에 천막을 치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속음악의 전당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내디딘 그 발걸음은 비올레타 파라를 깊은 수렁으로 빠뜨려버렸다. 산 |
|
<생에 감사해>는 아르헨티나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신화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와 미국의 포크가수이자 저항운동가인 존 바에즈(Joan Baez)가 부르면서 라틴아메리카 대중음악의 명곡으로 꼽히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이 <생에 감사해>를 즐겨 부른 것은 단지 곡의 내력이나 비올레타 파라의 치열한 삶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노래가 무엇보다도 전 세계 사람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보편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비올레타 파라는 분명 민속음악으로 음악의 길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빅토르 하라(Víctor Jara) 같은 누에바 칸시온의 기수들에게 대모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통 음악의 도시화를 추구하고, 칠레 음악의 국제화를 시도하고,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음악 전통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가령, 오늘날 안데스 전통 악기와 선율을 내세워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인티 이이마니(Inti Illimani) 같은 칠레 그룹의 존재는 비올레타 파라의 선구적인 실험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힘들다. 물론 전통과 도시와 국제성을 조화시킨다는 것은 비올레타 파라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굳이 그녀의 음악 경향을 구분해야 한다면 아무래도 전통 음악에 더 가깝다. 그러나 <생에 감사해>를 비롯한 몇몇 곡들은 선율도 노랫말도 모두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충분히 공감을 얻을만한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생에 감사해>가 라틴아메리카 대중음악의 명곡으로 꼽히는 것이다.
칠레인들에게는 <생에 감사해>가 아주 특별한 곡이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주도한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칠레 사회는 죽음의 그림자에 휩싸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실종되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 삶은 형편없이 쪼그라져 들었다. 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해준 희망의 노래가 바로 <생에 감사해>이었다. 참혹한 최후를 맞은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울 때도, 실종된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랄 때도, 혹독한 탄압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때도 이 노래를 부르며 삶의 희망을 부여잡으려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생에 감사해>는 늘 기억될 것이다.
첫댓글 빠라의 말이다. '나는 박수를 받기 위해 기타를 잡지 않는다. 나는 분명한 것과 그릇된 것 사이에 있는 차이에 대해서 노래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래하지 않는다' 글이든 노래든 그림이든 예술이 가야한 한 길을 잘 말해주고 있다. 때론 그들이 되고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