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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점쟁이 할아범에게도 가을철은 비수기였다. 사주나 신수를 보러 오는 손님이 없어 하릴없이 곰방대로 담배나 죽이며 파도소리로 무료를 달랬다. 노인은 심심풀이로 그 곱상한 소년의 사주를 공책에 적다 말고 따가운 햇볕과 모래열기에 눈이 부셔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승주가 풀죽은 모습으로 모래를 툭툭 차며 사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승주는 노인 옆으로 와서 시나브로 포개져 몰려오는 파도의 눈꽃송이를 보며 신규호 사장을 만날 생각에 골몰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신규호 사장은 탤런트 아무개 아저씨처럼 포근한 인상이었다. 그는 바빠 보였고 뭔가 마음대로 되지 않은 듯 신경질적인 표정이었다. 시기를 잘못 잡아 온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사장실로 냅다 쳐들어가 볼까? 사장실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지.
그 청년이 식당 앞에 지켜서서 소년이 오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었다. 그 청년의 주먹이 무섭지는 않았다. 얻어맞더라도 엄마의 편지를 그분께 드려야지. 그러면 내 의무는 끝나는 거야. 서울로 돌아가 주경야독을 하며 내 꿈을 키우면 된다. 일류 요리사 자격증 가진 큰 식당의 주인이 되는 게 승주의 꿈이다. 요리사 겸 사장 되는 꿈. 절대로, 절대로 엄마의 친구란 남자에게 의지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내 엄마의 유언을 따르려는 거지. 헌데 저렇게 문지기가 버티고 앉아 있으니 어떻게 편지를 전한담?
해는 서녘으로 기울어 뉘엿거리고 바닷물은 썰물에서 밀물로 바뀌어 우렁차게 밀려온다. 속초 바다는 황홀하리만큼 아름답다. 여기에서 살고 싶다. 엄마가 좋아하는 바다에서, 엄마의 친구란 남자 가까이 살고 싶어. 그저 인간의 따뜻한 정이 그리워서지 다른 이유는 없다. 그 남자를 볼 때마다 엄마의 그리움이 더 깊어지겠지.
상처와 추억은 별개이다. 엄마의 추억이 없다면 이 바다도 서글픈 풍경으로만 느껴질 게다. 아픈 상처는 꼭꼭 싸서 망각 속에 묻어 두고 그리운 추억만 생각하자. 엄마가 늘 내 곁에 있다는 생각을. 엄마의 넋이 어딘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면 힘이 나고 바다를 찾게 된다. 바다에는 엄마의 사랑의 언어들이 살아서 철썩인다. 착한 사람 되라고.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승주는 콧물을 훌쩍 삼키고 모래바닥에 주저앉아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 엄마가 그리던 어떤 남자의 얼굴을. 신규호 씨의 얼굴을. 그 따뜻한 마음을……
“에헴!”하는 기침소리에 승주는 할아범 쪽을 돌아보았다. 노인은 곰방대에 엽초를 말아넣고 라이터 불을 당겼다. 바람 때문에 담배에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승주가 가서 재킷으로 바람을 가려 주었다. 구수한 담배 연기가 코끝으로 날아왔다.
“제기, 사장이 날 본 체 만 체했단 말예요. 일이 잘 될 거라더니, 이게 뭐예요. 할아버지 사주는 엉터리예요 엉터리! 치!”
승주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럴 리 없는 데, 그럴 리 없는데……”
노인은 중얼거리며 노트장에 적은 사주를 찢어 승주에게 주었다. 동짓달에는 손재수가 있으니 쓰리꾼 조심하고 섣달에는 교통사고 날 위험이 있으니 오토바이를 조심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승주가 너무 좋은 사주를 타고났다고 극구 칭찬했다.
“할아버지, 사주가 좋은데 이렇게 고생해요? 엄마도 죽고……”
“자네 자당님은 복이 없어 타계하신 게 아니다. 자네 같은 잘난 아들을 남겼지 않은가? 자네 마음 속에는 항상 엄마의 혼이 살아 있지 않은가? 심장이 뛰면 엄마의 숨소리라고 생각하게.”
“알았어요. 할아버지를 무시한 건 아니예요. 화가 나서 그런 거니 용서하세요.”
7
승주는 사주종이를 곱게 접어 재킷 호주머니에 담았다. 엄마는 미신을 즐겨해서 걸핏하면 점쟁이를 찾아갔다. 점쟁이는 희망적인 말을 해 주지 않고 엄마의 팔자가 사나워서 고생한다는 틀에 박힌 말만 했다. 승주는 그 점쟁이가 싫었다. 엄마는 점쟁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지요, 제 팔자소관이지요. 팔자가 좋으면 이렇게 살겠어요?
그래도 아들 하나는 잘 둬서 말년에 용상에 앉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이 엄마에겐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용상이 꽃상여가 될 줄은 몰랐다. 꽃상여는 단명을 의미하고 꽃과 문상객도 없이 영구차에 실려 쓸쓸히 공원묘지에 잠든 엄마였다. 승주는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엄마가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고 믿는 신념이었다. 엄마는 정말 죽은 게 아니다. 이렇게 아들의 피와 영혼 속에 존재하고 있다.
승주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서울 친구의 전화였다. 친구의 전화는 의기소침했던 승주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만나긴 했는데 편지를 전하지 못했어. 내가 바보지. 그래서 방법을 연구 중이다. 해 질려면 아직 멀었으니 아직 시간은 있다고 본다. 실망하지 않고 부딪쳐 볼 테야. 이 편지를 전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세상 사람들이 웃을 걸. 그리고 엄마 볼 면목도 없지. 엄마는 돌아가신 게 아니니까. 그래, 전화해 줘서 고맙다. 일이 되면 내가 전화할게 걱정하지 마.”
승주가 전화하는 소리를 듣고 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야지. 젊은 사람이 실망하면 쓰나? 나이 열 일곱 살이면 아직 병아리다 병아리. 꽃으로 말하면 봉오리고. 꽃이 피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뭐가 걱정인가? 내 손자는 대학 졸업반인데 부모가 있어도 부모 구실을 못하고 손자가 돈을 벌어서 학비를 충당하지. 자네는 엄마 사랑을 듬뿍 받았으니 행복한 사람이야. 그 사랑이 어디로 가겠나? 사랑은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인 거야. 사랑은 죽음을 초월하지. 힘을 내서 더 열심히 살라고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워 준 거야. 인생은 잠시 잠깐 왔다가 가는 바람 같은 거지.”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말씀 낮추세요. 저 열 일곱 살이예요.”
“자네는 나이의 곱절을 산 전쟁터의 전사야. 결국엔 승리할 걸세.”
“할아버지가 칭찬하셔도 아까 깎은 오천원은 안 드릴 거예요. 차비는 넉넉하지만 오늘 밤 여기서 잘지도 모르겠어요. 여긴 모텔비가 비싸겠지요.”
“피서철이 아니라 아주 싸네. 이삼만원짜리 방이 수두룩해.”
“이삼만원이 적은가요 뭐.”
“이삼천원보다는 많지.”
“그럼 또 가 봐아겠어요. 사장님이 언제 호텔에서 나올지 모르거든요. 오늘 못 만나면 내일 만난다는 보장이 없어요. 안 그래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가 보라고 했다.
“재미 보세요 할아버지.”
“그 사람은 양심적인 사람이니까 자네 같은 사람을 괄세하지 않을 걸세. 힘을 내라고.”
“할아버지 말씀 명심할게요.”
승주는 큰소리쳤지만 그 호텔로 다시 갈 용기가 없었다. 호텔에서 멀리 떨어진 송림 숲 속에서 호텔 계단을 바라보며 긴가민가했다. 사장님의 승용차는 호텔 주차장에 해질녘까지 주차되어 있었다. 그 승용차는 부부의 차 같았다. 부부가 사장이고 그 차를 함께 사용한다.
운전사는 따로 두지 않고 사장이 직접 차를 운전한다. 멋진 사장 부부였다. 그런데 아까 승용차에서 내릴 때 몹시 다투는 걸 보니 두 사람 사이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사업 문제로 다퉜거나 가정적인 일로 다퉜는지 모른다. 사장의 마음이 풀리기를 바랬다.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편지를 전해 주면 읽지 않고 버릴 수도 있다.
아주 하찮은 편지인 줄 알고 읽지 않고 휴지통에 버린다면? 승주는 걱정되었다. 그 편지를 사장이 꼭 읽어 줘야 한다. 그 속에 엄마의 마음이 담겨 있으니. 먹피 같은 엄마의 사랑이. 그래, 엄마는 그래서 죽은 거야. 사랑이 한이 돼서 죽은 거라고. 아들인 내가 그 마음을 전해야 한다.
편지 봉투에 땀이 배어서 촉촉했다. 승주는 송림 숲 속을 어슬렁거리며 호텔 계단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가끔 드나드는 손님이 있을 뿐 사장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여섯 시가 넘어 황혼이 짙게 내렸을 때에야 사장 부부는 호텔에서 나왔다. 그들은 현란한 네온사인 불빛을 받으며 바삐 승용차로 걸어갔다. 이때다 하고 승주는 사장 앞으로 달려갔다.
8
여자 사장이 먼저 호텔 계단에서 나오고, 신규호 사장이 잠시 후에 뒤따라 내려왔다. “멋대로 할 테면 해 봐!” 남자 사장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사장은 들리지 않게 욕설 같은 대꾸를 하고 나서 주차장으로 핑핑 걸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다른 승용차에 올라앉아 헤드라이트를 켰다. 승용차가 주차장을 돌아 송림 쪽으로 우회전할 때 호텔 쪽으로 달려오던 승주를 치일 뻔했다. 승주는 재빨리 차의 불빛과 반대쪽으로 몸을 피했다.
신 사장은 황혼 속으로 멀어지는 승용차를 바라보지도 않고 아까 타고 왔던 승용차로 향해 천천히 걸어가서 담배를 꺼내 피웠다. 승용차의 차문만 열어 놓고 담배가 다 탈 때까지 허공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승주는 사장 옆으로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여 다가갔다. 승주를 보고 사장이 더 화가 날까 봐서 사장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한 행동이었다. 승주는 사장에게 불청객이었다. 호텔 식당 앞에 앉아 있던 청년이 승주를 보고 주차장으로 달려왔다. 청년은 승주를 끌고 가려고 하고 승주는 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사장은 혀를 쯧쯧 찼다.
“자네 이 아이에게 차비를 주지 않았구나.”
“글쎄, 이 자식이 차비를 줘도 안 받고 사장님을 만나겠다고 고집을 피우지 뭡니까?”
“나를 만나겠다는 이유가 뭐냐?”
사장이 승용차에 앉아서 차문을 닫기 전에 슬쩍 물었다.
“이 편지를 전하려고 왔어요.”
“편지?”
“예, 편지요.”
승주는 재킷 양복 호주머니 안에 고이 간직한 하얀 편지 봉투를 꺼내어 사장에게 내밀었다. 사장은 편지를 보지도 않고 운전석 앞에 던져 두고 차문을 닫았다. 사장의 승용차는 시내 쪽으로 멀어졌다. 도로에 어둠이 짙게 내렸다. 호텔 네온사인이 현란하게 주차장과 도로를 비췄다. 주차장엔 청년과 소년만 남아 있었다.
“너 이 자식, 아주 고단수로 노는구나? 편지로 취직을 부탁하면 써 줄 줄 알고? 어림없다. 우리 사장님은 너 같은 애숭이에게 신경 쓸 새가 없이 바쁘시다. 강릉에 이만한 호텔이 또 하나 있고 주문진에 큰 배도 갖고 계셔. 다 여사장님 꺼지만 부부니까 네것 내것이 있겠냐? 그런다고 헛물켜지 마 임마. 우리 호텔에 종업원이 넘쳐서 너 같은 애숭이는 쓰지도 않는다고. 알것냐?”
“체!”
“뭐가 체야 임마. 어른이 말하면 고분고분할 것이지 콧방귀나 뀌고. 이게 아주 모로 터졌다니까.”
청년은 승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승주가 피하는 바람에 모자만 벗겨지고 머리는 맞지 않았다. 소년의 긴 머리가 해풍에 춤을 추었다. 밤이 되니 바람이 차가워졌다. 파도소리가 드세게 들려왔다. 청년은 식당 앞으로 돌아가고 승주는 시무룩한 얼굴로 파도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사장님이 그 편지를 읽지 않고 버릴 것만 같아 불안했다. 편지를 더 나중에 전할 걸 그랬나? 사장님의 화가 풀리고 마음이 가라앉았을 때 줄 걸 그랬다. 발길에 채이는 모래를 툭툭 차며 아까 그 자리로 돌아오니 점쟁이 노인은 보이지 않고 좌판을 치운 자국만 남아 있었다.
승주는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아 밀려오는 저녁 파도를 바라보았다. 저녁 파도를 즐기는 사람들과, 해변에서 불꽃놀이하는 아이들. 바다는 고깃배의 뱃불도 보이지 않고 깜깜했다. 어둠 속에 섬이 거뭇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피융!”하고 폭죽이 승주의 머리 위로 날아와서 떨어졌다. 승주는 깜짝 놀라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러자 또 한 방이 “피융!” 날아왔다. 백사장이 환해졌다.
승주는 재킷을 벗어 머리 위로 둘러썼다. 폭죽은 계속해서 날아왔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불꽃은 승주의 머리 위를 지나 허공 높이 바다 위로 떨어졌다. 불꽃의 목표가 자기가 아니란 걸 알고 승주는 마음을 놓았다.
배가 몹시 고팠다. 그러고 보니 아침과 심을 모두 굶었다. 얼마동안 팔베개를 하고 누워 하늘의 별을 바라보다가 입 속으로 엄마의 자장가를 불렀다. 자장가를 부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목이 메어서 노래를 부르다 말고 눈물을 씹었다. 엄마의 품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서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지만 눈물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소리없이 흘러나왔다. 엄마에게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었더니, 오늘 밤을 속초에서 자고 내일 서울로 돌아가라고 했다. 엄마 말씀대로 하기로 했다. 터미널에 가면 서울행 고속버스가 있겠지만 웬지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사장님이 편지를 읽었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은 승주의 의무였다.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식사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모텔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승주는 아주머니를 따라서 식당에 가서 저녁밥을 사 먹고 이만 오천원을 내고 모텔에 투숙했다. 아주머니가 아들 같다고 하면서 삼만원에서 오천원을 깎아 주었다. 텔레비전과 침대가 있는 넓은 방에서 네 활개를 펴고 아침까지 푹 잤다. 눈을 떠 보니 날이 훤히 새어 있었다.
9
사람들이 동해의 해돋이를 구경하려고 해변 가에 몰려 나와 있었다. 승주는 사람들 속에서 동해의 장엄한 해돋이를 바라보았다. 날씨는 구름 한점 없이 쾌청했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날 속초에 왔다는 건 행운이었다. 엄마의 친구라는 그 남자를 만나고 편지를 전해 주었으나 속초가 너무 좋아서 떠나기 싫었다.
그냥 여기에 눌러 살아 버릴까? 친구는 어서 서울로 돌아오라고 하지만 속초에 고양이처럼 정이 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편지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했다. 사장이 아직도 읽지 않았는지 읽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분의 양심에 맡기고 내 할 일을 할까? 일자리나 찾아 보자. 속초엔 생활정보지 같은 게 없나? 아 저기 있다 생활정보지가.
도로변에 놓여 있는 생활정보지 박스가 눈에 띄었다. 구인 광고란엔 일자리가 많이 있었다. 건강하고 착실하니까 무슨 일이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다. 식당 일이 가장 자신 있었다. 웬만한 요리도 할 줄 알았다. 주방에서 심부름하면서 등너머로 배운 지식이었다. 요리사 자격증이 있어야 주방장이 될 수 있으니까 우선 그 자격증을 따야 한다. 대입 검정고시 준비도 해야 하고 그는 할 일이 많았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모든 걸 그가 혼자 다 해야 한다.
“아직 안 갔구나.”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에 돌아보니 신규호 사장이 옆에 서 있었다. 사람들 속에 혹시 그 아이가 있지 않나 찾았다고 하면서 어제와는 딴판으로 친절하게 대했다. 아침밥을 먹지 않았다고 하니까 해변에 있는 자그만 식당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해장국 집이었다. 사장이 사 주는 국밥을 승주는 맛있게 먹었다. 사장도 함께 먹었다.
“네가 준 편지 잘 읽었다.”
사장이 뜨거운 국물을 훌쩍훌쩍 마시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승주는 사장의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사장은 좋은 사람이었다. 어제는 심기가 불편해서 먼 길 오신 손님을 푸대접해서 미안하다고 정중히 사과도 했다. 승주는 과분해서 몸을 꼬며 수줍어했다.
“저는 손님이 아닙니다. 그냥 편지 심부름 왔어요.”
“그 여자를 많이 닮았는데, 혹시 김혜라 씨 아들 아니냐?”
“예, 김혜라 씨가 제 엄마예요.”
“그래, 네가 아기였을 때 덕수궁에서 한번 본 적이 있지. 아기가 하도 예뻐서 한번 안고 뽀뽀해 준 적이 있다. 네가 바로 그 아기구나. 참 많이 컸다. 늠름한 청년이 됐어. 엄마가 널 키우느라고 고생했겠어.”
덕수궁이란 말에 승주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엄마는 덕수궁을 좋아했고 덕수궁에 갈 때는 꼭 아들을 데리고 갔다. 처음에 살던 집이 덕수궁 근처에 있어서 덕수궁은 자연 엄마와 아들의 산책 코스가 되었다. 덕수궁 직원이 집주인이어서 덕수궁에 갈 때는 그분 이름을 대면 무료로 들여보내 주었다. 엄마는 드라마에서와 똑같이 임금님과 왕비 흉내를 내며 슬프고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얘기를 승주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 눈물이 나도록 슬픈 궁궐의 이야기들을.
특히 임금의 집무처였던 즉조당과 신하들의 접견처였던 준명당 뒤켠의 울창한 숲은 엄마가 즐기던 산책로였다. 승주가 열 두 살 되었을 때 엄마는 일터가 가까운 과천 쪽으로 셋방을 옮겼다. 그곳은 포장마차 장사가 잘 되는 곳이었다. 과천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살다가 엄마가 병이 나자 병원 가까운 김포로 또 이사했다.
덕수궁이 멀어서 그전처럼 자주 갈 수는 없었지만 엄마는 그 아픈 몸으로 덕수궁 나들이를 하시곤 했다. 덕수궁의 직원들이 바뀌어서 요금을 내고 들어갔다. 하루종일 덕수궁 숲길을 걷고 돌담길을 걷고 밤이 되어 전동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서 파김치가 되었다. 걸음을 걸을 수 없어 아들의 등에 업혀서 집에 돌아왔다. 그래도 엄마는 덕수궁을 잊지 못했다.
10
덕수궁엔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토록 덕수궁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까? 그것은 엄마만 아는 비밀이었다. 엄마는 덕수궁 숲이나 연못 가에 앉아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히 엄마가 기다리는 사람은 이 세상의 실존 인물이고 엄마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 병이 더 악화된 것이었다.
“엄마는 잘 계시냐?”
“돌아가셨어요.”
“죽었다고?”
사장은 믿어지지 않는지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물었다. 승주는 엄마가 병이 나서 중학교 2학년 때 중퇴하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승주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엄마의 병은 날이 갈수록 더 깊어갔다. 의사는 엄마가 석 달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러나 엄마는 2년 간을 버텼다.
승주가 스무 살이 되는 걸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면서, 엄마는 죽어서도 너를 지켜 주마고 약속했다. 네가 가는 곳 어디에나 엄마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엄마는 그 약속을 지켰다. 두 달 전 엄마 장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승주가 탄 버스가 절벽에서 추락하여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으나 승주는 한 군데도 다치지 않았다.
며칠 전에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 옆에서 달려드는 차를 피하려다 오토바이가 전신주를 들이받았다. 오토바이는 산산조각 나고 승주는 달려오는 차 밑으로 굴러갔다. 그러나 약간 찰과상만 입었을 뿐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엄마가 지하에서 돌봐주신 것이었다. 승주는 엄마의 존재를 믿고 엄마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뿔싸! 내가 큰 죄를 졌구나. 내가 큰 죄를 지고 말았어.”
사장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부르짖었다. 식탁 위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네 엄마가 그렇게 빨리 죽을 줄 몰랐다. 내 일이 정리되고 자리가 잡히면 김혜라 씨를 찾으려고 했다. 그렇게 아픈 줄 알았다면 병원에라도 한번 찾아갈 걸. 돈이 없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겠구나.”
식당에서 나와 백사장으로 걸어가면서 사장은 펑펑 흐느껴울었다. 회한과 가책의 눈물이었다. 두 사람은 모래 위에 앉아 소리치며 밀려오는 동해 바다를 바라보았다. 승주는 슬피 우는 사장님을 가슴에 꼭 안아 주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너무 가슴이 작았다. 승주도 울먹거렸다. 사장은 담배 골초인 듯 식사하다가도 담배를 피웠는데 울면서도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덕수궁 옆 골목에 아담한 식당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김혜라 씨를 처음 만났다. 나는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버릇이 있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한두 바퀴 돌면 답답증이 해소되곤 했다. 아마 덕수궁의 맑은 공기 때문이었을 거야. 덕수궁은 고전이 잘 보전된 거대한 궁궐이었다. 그 안에 간직된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큰 희망의 상징이었지. 그 돌담도 그중 하나이다. 나는 퇴근 시간이면 전철을 타고 덕수궁에서 내려 산책을 하고 그 식당에서 저녁밥을 사 먹었지. 내가 그 식당을 찾는 이유는 음식이 맛있고 값이 저렴하기 때문이었지.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내가 가면 친절한 아가씨가 밝은 미소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사장은 일어서서 물가를 거닐었다. 파도는 시나브로 밀려와서 백사장에 하얀 꽃잎들을 뿌리고 돌아갔다. 파도의 꽃이었다. 해는 수평선 위에 높이 솟아서 바다를 은색으로 물들였다. 사람들은 소리치며 물가로 달려가기도 하고 물속에 들어가 물장난을 하기도 했다. 승주는 사장의 큼직한 구두 발자국을 따라가며 그 아가씨가 엄마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제법 큰 목재회사 사장이었는데 불경기로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다. 외국에서 수입한 물건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고 은행에서 빚독촉장이 날아왔다. 은행 부채를 얻어 수입품을 사 들였기 때문이다. 회사를 처분하자니 그동안 공들인 노력이 아깝고 헐값에 내놔도 인수할 사람이 없었다. 나는 술로 울분을 풀었다. 아가씨는 과음하는 나를 걱정하며 내 옆에 와서 자꾸 그만 마시라고 소근거렸다. 그만 마시고 사모님이 기다리는 즐거운 나의 집으로 어서 돌아가라고. 내가 두 번이나 이혼한 불쌍한 놈이란 걸 모르고 그 벌판 같은 내 집으로 돌아가라는 거였어. 그 아가씨가 김혜라였다.”
혜라의 편지엔 그들이 몸을 섞었단 내용이 없었다. 한마디의 원망도 없었다. 그저 끝없는 그리움과 기다림의 단어들로 한 페이지 가득 채워진 기도의 편지. 사랑의 독백들. 편지엔 써 있지 않았지만 승주가 신규호의 씨앗이란 걸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사장은 승주가 그의 아들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11
승주는 모래밭에 몸을 묻고 드러누워 한 시간 동안 잤다. 신 사장은 정오가 되어도 호텔에서 나오지 않았다. 금방 해변으로 돌아온다는 약속을 잊은 모양이었다. 우렁찬 파도소리에 눈을 떴다. 바닷물이 발밑까지 밀려와 있었다. 승주는 일어서서 백사장을 어슬렁거렸다. 나무 벤치에 두 남녀가 앉아서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신 사장과 여자 사장이었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내가 어디로 가건 당신이 상관할 것 없잖은가?”
“걱정이 돼서 그래. 어디로 가는지 좀 가르쳐 줘요.”
“강릉이나 포항으로 갈까 한다.”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으로 가세요. 포항은 너무 멀어.”
“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야지.”
“그렇게 내가 보기 싫어요?”
“내가 없으면 모든 일이 더 잘 되겠지. 맘에 맞는 사람과 잘해 보라고.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경포대 해수욕장에 우리 공동 명의로 된 호텔이 있어요. 낡은 거지만 그걸 관리하세요.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 그 호텔을 살려 봐요. 당신은 능력 있는 사람이야.”
“우리가 헤어지는데 공동 명의가 무슨 소용 있겠어? 낡아빠진 호텔 욕심도 안 나고 내 것이 아니니까 갖고 싶지도 않네.”
“그럼 뭘 해 먹고 살아요? 저 아이는 누구예요? 왜 어제부터 당신 근처에서 어슬렁거리죠?”
“내가 좋아했던 여자의 아들이야. 자, 그럼 나는 떠나겠소. 이렇게 빈손으로 홀가분하게 떠나오.”
“당신 몫은 가지고 가셔야죠. 왜 그렇게 깨끗한 척해요? 깨끗하게 산다고 옷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 이거 가지고 가세요. 주식을 모두 수표로 바꿨어요.”
여자는 핸드백에서 수표가 든 봉투를 꺼내 주었다. 사장은 봉투를 보지 않고 이글거리는 해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돌려 저만치 앉아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사장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슬픔이 담긴 행복이었다.
사장은 벤치에서 일어서서 소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여자는 울상을 짓고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승용차만 갖고 가겠어. 낡아서 내가 안 타면 누가 사용하지도 않을 테니까. 다음에 만났을 때 이런 꼴은 아니었으면 좋겠소.”
여자는 달려가서 사장의 몸을 끌어안았다.
“여보, 사랑해요. 떠나지 말아요.”
사장은 살며시 여자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가 다시 돌아선다면 소년과의 약속이 물거품이 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에겐 소년이 더 중요했다. 그는 아들을 가져서 행복했다. 그것은 열 채의 호텔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자산이었다. 그는 돈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의 수갑을 차기를 원했다.
사장은 소년과 함께 손을 잡고 모래사장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여자는 풀죽은 모습으로 벤치에 앉아 있다가 호텔로 천천히 걸어갔다. 세 사람이 떠난 모래밭에는 가을 햇볕이 아지랑이를 만들며 눈부시게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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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김승주(17)……엄마의 편지를 전하려고 속초에 간다
신규호(53)……선화호텔 사장
김혜라(37)……승주의 엄마
여자 사장
점쟁이 노인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