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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에 대한 예화 모음
▣ 성숙을 위한 고난
앨프리드 월리스의 자연과학 수필 중에 나오는 고전적인 이야기가 있다. 누에나방이 번데기에서 고치를 뚫고 나와 나비로 변하는 과정이다. 고치에는 바늘구멍만한 틈이 있다. 그 틈으로 나방이 나오기 위해 꼬박 한나절을 애쓴다. 그 힘든 과정을 치르고 나와 화려한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좁은 구멍을 어렵게 나오려고 하던 나비는 영롱한 빛을 비추며 나는데, 쉽사리 구멍을 벗어난 나방은 날지 못하고 떨어져 죽는다. 왜? 좁은 구멍을 나오려는 발버둥과 몸부림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힘든 고난이 날개 근육을 강하게 만든 것이다. 대만에는 10개 소수 민족이 있다. 시간이 갈수록 더 세력이 약화되어가고 있다. 왜?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기 때문이다. 학비도 면제이고, 여러 보조금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약해지고,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대만만의 문제는 아니다. 북미의 인디언들도 보조금을 받는다. 여러 가지 특혜를 누린다. 그들에게 넉넉함은 있지만, 자립은 없다. 그래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도와주면 망한다. 사회적 약자는 도와야 한다. 왜? 그들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분히 자립할 수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은 그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불쌍하다고 생각없이 돕는다. 왜? 내 양심이 편하기 때문이다. 약한 모습만 보이면 돕는다. 왜? 내 마음이 흐뭇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이다. 자기 중심적인 구제는 독이 될 수 있다. 상대의 유익은 생각지 않는 지극히 이기적인 접근이기 때문이다. 도와서 설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홀로 부딪쳐서 설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상대가 설 수 있는 길로 도와야 한다. 돈으로 도울 수 있다. 기도로 도울 수 있다. 그리고 지켜보는 것으로 도울 수 있다. 제자 양육을 하거나 자녀를 키울 때, 도와주는 사랑은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도움 받는 곳에서는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진짜 사랑은 지켜보는 사랑이다. 기다리는 사랑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가 외국에서 망할 줄 알았다. 그러나 쥐엄열매 체험을 통해서 얻는 가치와 힘을 무시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켜보고 기다렸다. 그래서 탕자의 회복과 성장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도우려고만 하면 기도가 없어진다. 그러나 절제하고 지켜보는 사랑을 할 때는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된다. 기다릴 때 깊어지고, 지켜볼 때 성숙해진다. 기다림과 지켜봄이 성숙과 열매를 가져다 줄 것이다. ▣ 영적성숙 이 세상에는 귀중한 것 치고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어떤 경기에서 이기려면 모든 기술을 완전히 익히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때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훈련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 숙련된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아주 쉽게 하여 마치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바친 수고와 노력의 대가이다. 천재란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무서울 정도로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영적 성숙도 우리의 노력 없이는 절대로 성숙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냥 대가없는 영적 성숙을 바란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건강식품 건강기구가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디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는 범사에 형통하고 강건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영혼이 잘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엡4:15). 여러분의 영적 상태가 건강해지면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최홍준 목사(호산나교회)
▣ 고난의 뜻
파도가 일지 않는 바다는 없다. 항해하는 데 문제는 파도의 유무가 아니라 파도가 크냐 작냐의 문제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살이의 문제도 고난의 유무가 아니라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목회를 해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고난을 보고 7가지 결론을 내려 보았다.
첫째, 고난이 심한 것은 뭔가 새로운 것이 일어날 징조다. 둘째, 때때로 고난은 인생의 지름길이 된다. 셋째, 육적 고난 속에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부요가 피어난다.
넷째, 고난 없이 얻은 승리나 성공은 오래가지 못한다. 다섯째, 고난은 선한 사람에게도 찾아온다는 것이다. 여섯째, 이 세상에 극복하지 못할 고난이 없다. 일곱째,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인생들을 돌아보신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 끝이라고 할 때 끝이지, 사람들이 나를 버린다 해서 끝이 아니다. 실패했을지라도 기도할 믿음과 하나님을 따를 양심이 있다면 분명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 때는 외롭고 아프지만 용기를 내야 한다. 더욱 믿음을 일으켜야 한다. 바람이 불면 꺼져버리는 불도 있지만 도리어 더욱 세차게 타오르는 불도 있다.
최승일 목사(서울 상도교회)
▣ 고난의 과정
한 형제가 해 준 이야기가 있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 아버지가 예쁜 강아지를 한 마리 사오셨다. 그는 아버지께 꼬리가 없으면 더 좋겠다고 했더니 주머니칼 하나를 주시며 강아지를 데리고 나가 칼로 꼬리를 잘라내라고 하셨다. 그러나 고통에 신음할 강아지가 불쌍해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래도 꼬리 없는 강아지를 가지고 싶었다. 곰곰히 생각을 하다 매일 조금씩 잘라내면 훨씬 마음 편하게 강아지 꼬리를 잘라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만 견디면 모든 과정이 완성되는데 그 고난을 인내로 받기를 거절한다. 결과적으로 더 늘여서 긴 고통의 과정을 선택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한 임재 속에 사는 자녀가 되기까지 우리를 문제에서 구해주지 않으신다. 나에게도 실업자가 되어 일자리를 찾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좌절과 수치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나님, 저에게 일자리가 필요함을 아시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찾아다녀야 합니까?
왜 좀 쉽게 빨리 일자리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주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취업을 위해서 내가 아직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지혜와 능력이라는 우상을 버리고 포기할 때까지 기다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상황 속에 우리를 넣으시면서 자신을 의지하는 것을 온전히 포기하도록 이끄신다.
하나님의 임재와 기도 / 마이클 웰스
▣ 고난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당신이 괴로워할 때도 하나님은 계시는 걸까요? 그 질문의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할 때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한가운데 계십니다.
질병과 비극과 재난과 기근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 분은 그들의 고통을 함께 극복하기 위하여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며 다가가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8,19).
고통의 와중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위로를 받아들여본 사람이라면 이 말씀이 진리임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나찌 독일의 악명 높은 수용소인 라벤스부르크에서 죄수로 지낸 바 있는, 유명한 코리 텐 붐 여사는 라벤스부르크의 악몽이 있은 이후 33년 동안 개인의 안식처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85세의 고령이 되었을 무렵, 몇몇 친구들이 그녀를 위해 캘리포니아에 사랑스런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녀의 집에 머물면서 말했습니다.
"코리, 너에게 이런 아름다운 처소를 주신 것을 보니 하나님은 선한 분이신가 봐?"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라벤스부르크에 있었을 때도 역시 하나님은 선한 분이셨어. "
크리스천 모범 텍스트 / 제임스 에모리 화이트
▣ 황제의 투사 씨름꾼
로마의 네로 황제 밑에는 ‘황제의 투사 씨름꾼’이라는 정예부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 베스파시안이 이끄는 그 부대에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황제는 베스파시안에게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처형하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백부장이 부대원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인들은 나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무려 40명이나 되는 투사들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베스파시안은 천막 앞에 큰 불을 피워놓고는 40명의 군인들에게 옷과 신발을 벗게 한 후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로 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불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면 용서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늘 황제 앞에서 부르던 노래의 가사를 고쳐 이렇게 합창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40명의 투사! 주 예수를 위해 싸우고 주님이 주실 면류관을 받아 쓸 40명의 투사!’ 밤이 지난 후에야 한 명의 군인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불 곁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때 백부장 베스파시안은 지휘관의 옷을 벗고 장하게 죽음을 맞고 있는 그리스도인 부하들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있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고통보다 큰 영광을 이미 맛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롬 8:17-18).
▣ 국민일보에 실린 이광호 목사의 글
24년 전인 1986년 경기도 반월공단의 지하 59㎡(18평) 작은 교회에서 처음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창이 없는 지하이다 보니 모든 생활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단의 많은 노동자들이 교회에 등록하면서 장소가 매우 협소해졌습니다. 그러나 400만원의 전세금을 가지고는 지상으로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우리 교회가 지상으로 올라가 예배 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없었고 오히려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독재 시절 많은 사람이 고난에 신음할 때 나 역시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교인들도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하나님은 돕는 이들의 손길들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나의 통장에는 2000만원이 넘는 위로금이 모였고 우리는 교회를 이전해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고난을 준비하신 하나님은 오히려 그 고난을 응답의 기회가 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호2:21)
▣ 사자만 보지 말고 철장도 보라
한 남자아이가 아버지와 동물원에 갔습니다. 사자 굴 앞을 지나갈 때, 포효를 지르며 어슬렁거리는 사자에 놀라서 그 남자아이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얘야 무슨 일이 있니?" 새파랗게 질린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아빠, 저 사자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철장도 함께 보고 있단다." 당신은 사자를 보고 무서워하는가? 아니면 철장을 보고서 마음을 편안히 가지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재판을 받았고 유죄 판결을 받아서 패배한 사탄을 감금하고 다룰 수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서양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누구나 불화살을 압니다. 인디언들의 불화살은 건물과 창고와 건초 더미 등에 불을 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전술의 의도는 적진에 불을 놓아 정신없게 함으로 방어를 소홀히 하게 하는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사탄은 우리가 정면적인 맹공격에 관심을 쏟지 못하게 하려고 불화살을 쏘면서 공격합니다. 우리가 불에 마음이 다 빼앗긴다면 공격하기에 쉬운 표적이 될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를 잊지 마십시오. 방패는 든든하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당신은 빗발치는 화살을 방패로 쉽게 막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께 똑바로 집중되었다면, 이 믿음이 아무리 작더라도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실하다면, 설사 사탄이 불을 놓을 때조차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계속 바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소화기를 열어서 던져주실 것입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119:114)
▣ 명품이 나오려고
뱅앤올룹슨’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스피커와 이어폰 같이 음향기기와 가전제품을 만드는 회사인데, 뛰어난 품질과 고가의 브랜드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80년 이상이나 오랜 전통을 지닌 내실 있는 회사입니다.
이 회사에서 만드는 제품들은 뛰어난 음질로 매우 유명합니다. 대부분의 다른 회사에서 나오는 스피커는 집안의 가구 위치나 방의 크기에 따라 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위치가 바뀌고 음질이 변합니다. 그러나 ‘뱅앤올룹슨’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가구의 위치나 방의 크기에 상관없이 어떤 위치에서나 뛰어난 음질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또한 품질 검사도 철저해 리모컨은 로션이나, 물이 묻은 손으로 3000번 이상을 눌러보고, 티브이나 오디오는 1000번 이상 떨어뜨린 후에도 고장이 나지 않아야만 합격점을 받는다고 합니다. 비싼 돈을 주면서도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찾는 소비자들을 품질로 실망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장인정신이 또 하나의 명품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명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처럼 까다롭습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뛰어난 제품이 탄생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또 때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오히려 그 고난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명품’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인 고난이 찾아올 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 기도: 주님! 고난을 감내하고 주님의 은혜를 알게 하소서!
* 묵상: 더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고난에 감사하십시오.
/김장환 목사
▣ 고난도 은혜 가운데 하나
본문: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어느 몹시 추운 겨울에 미국 뉴욕에서 석탄운반을 하는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하여 뉴욕시에는 석탄이 들어오지 않아 불을 피울 수가 없어서 각 학교는 거의 보름간이나 임시 휴교를 하게 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교실에서 편하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그들의 생활이 석탄 나르는 노동자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가장 감미로운 음악은 언제나 슬픔에서 생겨나는 것이다"고 한 것처럼, 만약 이 학생들이 이런 아픔의 고통을 모르고 자란다면 그들은 영혼의 섬세한 감정을 모르는 잔인하면서도 둔감한 인간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듯이 모든 고통으로 인해 우리가 성숙해 질 수 있다면, 고통에 있어 우리는 겸손하여 지고 타인에 대해 동정적이 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해 보려는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구하려고 그리고 가능하면 그 고난의 시간을 줄여볼려고 발버둥치곤 합니다.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엎드리면서도 말입니다.
정말 어찌하여야 '고난도 은혜라'는 바울의 고백을 주님께 드릴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고난가운데 있을 때 진정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참 쉽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고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므로 주님의 자비를 구하며 기다려야 한다고 배우지만, 믿음이 연약한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자된 우리 삶의 기쁨 중의 하나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면, 고난가운데 있을 때 주님을 찾고, 기도하고, 매달리고, 회개함으로써 주님과 밀접해지게 되니 바울의 고백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우리를 지극히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스러워 할 때 함께 아파하시며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으니, 고난의 시간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으로 선용하는 지혜 또한 주실 거라 믿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소금에는 정제염과 천일염이 있습니다. 정제염은 전기분해 등 바닷물을 인공적인 방법을 사용해 만듭니다. 가정에서 많이 쓰는 소금입니다. 천일염은 바닷물을 햇볕과 바람으로 자연 증발시켜 만든 소금입니다. 여기에는 염화나트륨 이외에 칼슘, 마그네슘 등이 들어 있는데 예전에는 이런 미네랄 성분을 불순물로 생각해서 천일염을 식품이 아닌 광물로 45년 동안이나 간주해왔습니다. 식품으로 인정받지 못해 시장에서 음성적으로 유통되었고, 용도도 배추를 절이거나, 생선을 보존하는 데 쓰였습니다.
그러던 천일염이 최근에 식품으로 재분류됐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건강식품으로 고가에 팔리고 있습니다. 재분류가 재발견을 낳았습니다.
우리 삶에 은혜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난도 은혜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난 받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을 통해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시편은 말합니다(시 119:71).
▣ 전반기의 고난
본문: 시119: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LA영락교회를 시무하시는 박희만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0년 전에 에티오피아 선교사로 가서 2년 동안 고생하고 난 후로는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가 커서 그만큼 짐이 되고 어렵고 힘들지만 에티오피아를 생각하고, 처음 미국 가서 유학하며 고생스러웠던 삶을 생각할 때 그저 하루하루의 삶이 감사하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전반기의 삶은 여러 가지로 고난을 경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후반기의 삶이 감사의 생활, 영광스러운 생활, 형통한 생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 10)
다윗과 사울 모두 하나님의 왕국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폭군으로 전락했고 다윗은 성군으로 추앙받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울은 어렸을 때 유력한 가문에 태어나 아무 어려움 없이 자랐고, 다윗은 어려서부터 목동일을 하며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어려서 고난을 겪지 않은 사람은 감사함을 배우기 어렵고, 쉽게 교만하여 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수준으로 인도하시려고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즉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 고난 훈련
미국 원주민들의 풍습을 보면 소년이 성인으로 될 때 여러 가지 훈련 과정이 있는데 훈련의 마지막 과정은 혼자 어둠 속에서 참을 수 있는 인내력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아주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장작으로 불을 피워주고는 “아침이 될 때까지 이 불을 꺼지게 하지 말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심조심해야 아침까지 필 만큼의 장작을 준 다음 밤이 새도록 혼자서 있게 합니다. 밤이 되면 맹수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스쳐 소리가 날 때마다 아이는 깜짝깜짝 놀랍니다.
어린아이가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밤에 혹시 맹수가 나올까 봐 불을 열심히 피웁니다. 조그마한 소리가 들려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그 어두움, 그 무서움 속에서 참고 인내하는 것을 배웁니다. 이제 아침이 밝아옵니다. 그런데 저 나무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납니다. 깜짝 놀라서 보니까 그곳에 아주 키 큰 어른 한사람이 서 있습니다. 알고 보니 밤새 아버지도 돌아가지 않고 그 아들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 아들에게만 고통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밤새 고통을 당하면서 그 아들이 커가는 모습, 성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가난한 장사꾼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방직공장에서 고생하며 틈틈이 공부하여 미개한 나라 선교를 위해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아프리카의 개척 선교사 리빙스턴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의 가난과 고생이 아프리카 선교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내가 죽어 만일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역시 가난한 집에 태어나 고생하며 자라고 싶습니다.” 가난한 집 자녀로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언제인가는 리빙스턴처럼 역경을 이기는 법을 배워 누군가를 위해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성경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해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고난을 얼마나 지혜롭게 극복하고 그 고난 속에서 무엇을 배웠으며, 그 배운 바를 얼마나 잘 후손에게 전수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그림책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 일화
자녀들에게 고생의 떡을 먹이며 남다른 생의 철학을 가지고 사셨던 가나안농군학교의 설립자이신 김용기 장로님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1년 365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구보로 시작되는 고된 생활에 지친 김 장로님의 세 아들과 큰딸은 “하루 새벽쯤 잠 좀 실컷 자보자”고 몰래 끼리끼리 약속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큰아들이 부친되신 김 장로님께 “일이 고되어 죽을 지경이니 잠 좀 자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을 했으나 “자고 싶은 잠 다 자면 일은 언제 하느냐”며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새벽 4시,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김 장로님께서 산소통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날 같으면 두세 번 산소통을 두들기면 총알같이 일어나 나오던 자식들이 한 명도 일어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자식들의 비밀스런 반란을 미쳐 눈치채지 못한 김 장로님은 몇번 더 산소통을 두드려도 일어나지 않자 잠깨기를 기다리며 찬송을 소리내어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김 장로님은 난감해졌습니다. 이미 고된 생활에 지친 들째아들은 두 번씩이나 가출했던 전력도 있었던 터라 하나님 앞에 순간 지혜를 달라는 기도 외에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때마침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김 장로님은 계속 찬송을 반복해 부르셨습니다. “어둠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즉시 일어나 해 돋는 아침 될 때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다...”
이미 습관이 된지라 잠이 깨었지만 은밀한 자기들만의 약속을 따라 문틈으로 아버지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던 자녀들은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에서 찬송을 부르시는 흠뻑 젖은 아버지의 모습에 더 견디지 못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나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어느 아버지인들 이런 자녀들을 쉬게 하고픈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김 장로님은 가나안농군학교를 통한 농촌을 살리는 이 운동은 적어도 자신에게서 자식에게로, 또 손자에게로 이어져야만 한다는 투철한 사명감이 있었기에 이토록 모질어 보이는 고난의 훈련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김 장로님은 하늘나라, 그의 본향으로 가셨지만, 그의 네 자녀와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들이 긍지를 가지고 농촌을 살리는 일에 전심전력하고 있습니다.
▣ 우물에 빠진 당나귀의 교훈
당나귀가 빈 우물에 빠졌습니다. 농부는 슬프게 울부짖는 당나귀를 구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마침 당나귀도 늙었고 쓸모없는 우물도 파묻으려고 했던 터라 농부는 당나귀를 단념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우물을 파묻기 위해 제각기 삽을 가져와서는 흙을 파 우물을 메워갔습니다. 당나귀는 더욱 더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웬일인지 당나귀가 잠잠해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궁금해서 우물 속을 들여다보다가 놀라고 말았습니다. 당나귀는 위에서 떨어지는 흙더미를 털고 털어서 바닥에 떨어뜨리며 발밑으로 흙이 쌓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흙더미를 타고 점점 높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당나귀는 자기를 묻으려는 흙을 이용해서 무사히 그 우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당나귀처럼 곤경의 우물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때로는 환경이 흙더미로 나를 덮어 오지만 오히려 지혜로움과 인내로 용기를 가지면 자신이 더 성장하고 높아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 13)
▣ 사탄의 시험 당할 때 십자가 앞에 나가면
열다섯 살 때 허리를 다쳐서 40년 동안이나 침상에 누워 지내는 사람을 무디 선생이 방문했다. 그가 한번 움직이려면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에, 40년 동안 고통을 느끼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이렇게 고통을 겪는 성도를 방문한 무디 선생은 하나님께 제일 가까이 지내는 성도를 만난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다. 그렇게 빛나는 얼굴을 본적이 없었다고 했다.
무디 선생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해본 적이 없었습니까?” “물론 마귀가 때때로 시험한 적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건강하게 뛰어 노는 것을 창문으로 내다보노라면 사탄은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선하시다면 왜 너만 그렇게 집안에 드러눕게 하느냐? 왜 갑갑하게 누워서 다른 사람의 신세만 지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렇게 시험할 때 형제는 무어라고 대답하느냐는 물음에 “저는 그 사탄을 데리고 십자가 앞에 갑니다. 그러면 그만 무서워서 도망치고 맙니다.”라고 대답했다. 우리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이다.
▣ 고난의 십자가는 내가 건널 다리가 되어 줍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주여 , 너무도 힘듭니다! 주여 너무 힘듭니다!" 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의 자기 십자가는 이미 손아래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며 예수님을 찾았지만 이미 소용은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자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쫓아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그 자매는 이에" 아멘! 아멘!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고난은 필수적입니까? 불행히도 그것은 "예"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몸소 그것의 본을 세우셨습니다. 고난은 축복의 기회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고난이 힘들어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했던 자매의 모습, 하지만 이 역시 우리에게 남의 일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브린클리의 벽돌 교훈
유명한 뉴스 캐스터였던 데이비드 브린클리는 “신은 가끔 우리 앞에 빵 대신에 벽돌을 던져놓기도 하는데 어떤 이는 원망해서 그 벽돌을 걷어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그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집을 짓기 시작한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고난이라는 벽돌은 다루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행복의 기초가 될 수도 있고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존 매칼과 석유 개발
존 매칼은 대학교에서 지질학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그는 후에 전 재산과 빚을 내어 석탄이 나오지 않는 폐광을 인수하였고 그 광산의 석유 개발에 투자 했습니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 200미터 가까이 파내려 갔지만 석유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식구와 친척들과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빚 독촉을 견디기 어려워 자살을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차피 죽을 목숨, 끝장을 봐야 겠다고 생각하여 20미터를 더 파내려 갔습니다. 그러자 그곳에서 엄청난 석유가 터져 나왔습니다. 마지막 한 순간을 인내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포기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마지막 한 번을 더 인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 고난 속에 잉태되는 부활의 생명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부활이라는 생명을 잉태시키고 계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운행의 법칙이다. 우리는 그 고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쓰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에 함께하시고 이 고난을 부활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때 인간은, 역사는 성장하게 되어 있다. 아브라함 마슬로우는,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하느냐는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이겨 왔느냐와 비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없이 위대한 사람을 생각하기 어렵다.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부활의 진리가 숨어 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기 자신에게, 가정에, 교회에, 민족에게 어떤 시련이 와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하나의 깨어진 꿈은 모든 꿈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의 부서진 희망은 모든 희망의 마지막이 아니다. 폭풍우와 비바람 저 너머로 별들은 빛나고 있으니 그대의 성곽이 무너져 버릴지라도 다시 성곽 짓기를 계획하라. 수많은 꿈들이 재난에 무너져내리며 고통과 상한 마음이 세월의 물결 속에서 그대를 넘어뜨릴지라도 그래도 신앙에 매어달리라. 그리고 그대의 흐르는 눈물 속에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기를 힘쓰라.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 정태기
▣ 알렉산더의 단잠
세계 정복 길에 나섰던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그의 신하가 만족한 듯한 웃음으로 기지개를 켜며 잠에서 깨어난 알렉산더 대왕에게 물었습니다.
“폐하, 이 위험한 전쟁터에서 어떻게 그처럼 마음 놓고 깊이 잠을 주무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은 빙긋이 웃으며,
“그거야 나의 충실하고도 용감한 수행원인 파르메니오 장군이 내가 자는 동안 줄 곧 깨어서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지.”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가장 신뢰하는 장군이 밤새도록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자기를 지킬 것을 믿을진대 어찌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를 지키시는 분은 우리의 산성이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우리들이야말로 이 알렉산더 대왕보다 더욱 든든하지 않겠습니까?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시32:7)
▣ 하나님께로 나오게 하는 고난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John Bunyan)은 인생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깊은 수렁을 지나 마지막 벼랑 끝에 섰을 때에 자기의 삶의 처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나를 맞으실 때 칼을 들고 나오실 지라도 나는 그분의 발 아래에 내 몸을 던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나의 최후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고난의 극한 상황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절박한 신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하지 않고도 그 분을 신뢰하고 믿는 것을 더 복되고 귀한 신앙으로 평가하십니다. 그러나 평범한 가운데 사는 사람이나 절망의 깊이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폭풍우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폭풍우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자 은총의 손길입니다.
그래서 C. S. 루이스(C. S. Lewis)는 “고난이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 야고보서 5:13
▣ 고난의 가치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주여 , 너무도 힘듭니다! 주여 너무 힘듭니다!" 이렇게 말할 정도 였습니다. 어느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의 자기 십자가는 이미 손아래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턱썩 주저 앉아 엉엉 울며 예수님을 찾았지만 이미 소용은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자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쫓아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그 자매는 이에" 아멘! 아멘!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고난은 필수적입니까? 불행히도 그것은 "예"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몸소 그것의 본을 세우셨습니다. 고난은 축복의 기회라는 야기기도 있습니다. 고난이 힘들어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했던 자매의 모습, 하지만 이 역시 우리에게 남의 일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 고난에서의 승리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보통 고통스런 현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다.
소설가 스티븐슨은 결핵 말기의 고통 속에서 명작을 집필했다.
테레사 수녀는 평생 자신을 괴롭힌 만성두통을 참아내며 인류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파스칼은 청년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힌 온몸의 통증을 이겨내고 ‘팡세’를 남겼다.
베토벤은 청각장애의 고통 속에서 불후의 명곡을 만들었다.
선교사 마틴은 폐결핵과 악전고투하며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프랑스 화가 르누아르는 류머티즘으로 고통을 겪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가 붓을 한번 움직일 때마다 얼굴에 고통의 땀방울이 맺혔다.
구세군운동을 주도한 캐더린 부드는 “내 삶에 있어서 단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고난은 사람을 새롭게 복구시키는 힘이 있다. 고난을 통해 사람은 보다 완전해진다. 고난을 통해 죄인이 구원을 받는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시련이 닥칠수록 더욱 용기를 가져야 한다.
▣ 고난과 성공
한 신문기자가 구세군 집회현장을 취재하고 있었다. 기자는 어른과 소년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소년은 급히 층계를 오른다. 그만 계단에서 넘어졌다. 그는 피가 흐르는 무릎을 만지며 엉엉 울었다. 그때 뒤따라오던 어른이 울고 있는 소년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얘야, 어서 ‘할렐루야’라고 말하렴”
소년은 눈물을 닦으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계속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외치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기자는 그때 비로소 구세군의 정신은 패배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다.
시련이 닥칠 때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다. 고난은 용기 있는 사람에게는 일시적 통증에 불과하다.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역경을 ‘매력적인 산’으로 여긴다. 고난과 성공은 항상 함께 다닌다. 고난 없는 성공은 없다.
▣ 청어의고난
북해에 청어가 많이 잡혀서 런던 사람들 미각을 돋우었습니다.
어부들 관심은 북해산 청어를 어떻게 하면 런던까지 싱싱하게 운반하느냐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잘 운반해도 배가 런던에 도착하면 청어가 반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어부는 북해산 청어를 싱싱한 산 채로 가져와 큰 재미를 보았습니다.
동료 어부들이 이상해서 그 어부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비밀이라고 하며 그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의 많은 압력에 못이기는 척 그 비밀을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청어를 잡아넣은 통에다 상어를 한 마리씩 집어넣습니다."
친구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상어가 청어를 잡아먹지 않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통쾌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상어가 청어를 잡아먹지요!
하지만, 그놈은 청어를 두세 마리밖에 못 잡아먹지요.
대신 통 안에 있는 수백 마리의 청어들은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쳐 다녀요.
런던에 올 때까지 모든 청어들은 마치 올챙이들처럼 열심히 도망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면 런던에 도착해도 청어들은 여전히 살아서 싱싱합니다.
다 살아 있거든요!"
그렇습니다.
고난은 상어와 같은 것입니다!
아니, 시험은 우리 성도들을 싱싱하게 살아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고난 겪고 회개
어느 목사님의 딸이 안 믿는 남자와 연애를 했습니다. 아버지되는 목사님이 눈물로 극구 말리는데도 그 딸은 듣지 않고 기어이 자신이 뜻대로 결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10여 년 동안 그녀 자신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물론 교회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녀의 외아들이 병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지 않고 끝끝내 불신앙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결국 그 아들이 죽자 그녀는 그제서야 교회를 찾아가서 너무나 괴롭고 답답한 마음을 목사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회개는 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을 합니다. 자기가 목회자의 자녀라는 사실도 고백하면서 갖은 넋두리로 원망을 늘어 놓았습니다. 듣다못해 목사님이 한 마디 했습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은 그 정도 얻어터져야 10년만에라도 교회에 나오는 걸 어떡합니까?"
웬만하면 좋은 말로 위로하고 싶었는데 줄곧 못된 말로 원망하는 것을 보고 신중하게 꾸짖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고는 당신이 제 발로 교회를 찾아오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을 취하신 것입니다."라고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 여인은 그제서야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 기도: 참회의 눈물을 아름답게 보시는 주님, 영육 간에 병든 것이 없게 지켜 주시고 회개할 것이 있을 때 미루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사랑의 매를 감사합니다. 사랑의 매를 맞으면서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게 도와 주옵소서. 항상 나의 마음이 영적으로 민감하시며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과 임재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고난을 이기게 하는 꿈
팻 노드버그(Pat Nordberg)라는 여성은 뇌수술을 받다가 잘못하여 뇌에 손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양소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고난을 견딜 수 없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햇볕이 따뜻한 어느 날 오후였습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요양소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어린아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이를 보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애정이 느껴졌습니다.
그 아이 역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아이를 데려다 자기 옆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한 번도 그처럼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절이 눈물겹도록 고맙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단지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준 것으로 이 아이의 마음을 이렇게 기쁘게 해줄 수 있다면
내가 더 많은 어린이들의 상처를 치료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알 것 같았습니다. 마음에 꿈이 생겼습니다.
자신의 고난이 절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대학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공부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루 세 시간 밖에 자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뇌의 상처 때문에
처음에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뇌수술을 받은 지 14년 되던 해 마침내 그녀는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현재 그녀는 고난을 이겨내고
유능한 기독교 아동 심리학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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