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집 속집 제1권 /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 / 신청송당(愼聽松堂)에게 제영(題詠)을 부치다.
소당이 지어진 곳에는 흰 구름이 깊을 것이니 / 小堂開處白雲深
골짜기 가득한 푸른 솔이 저녁 그늘 보내오리 / 滿壑靑松送晩陰
청송당을 지은 뜻은 천석의 주인이 되려 함이고 / 經始要爲泉石主
낙성한 뒤에는 길고 짧은 시를 넉넉히 얻었으리 / 落成贏得短長吟
반평생을 분주히 다니느라 시를 짓기 어려웠고 / 半生奔走詩難就
천리 밖에 갇힌 신세라 눈물이 옷깃에 젖는구려 / 千里拘囚淚在襟
재주가 다하여 훌륭한 필치에 화답할 수 없으니 / 才盡不堪追健筆
간곡한 정만 펼쳐서 지음에게 사례할 뿐이라오 / 只披情曲謝知音
[주-D001] 신청송당(愼聽松堂) : 1533~1624. 청송당은 신복행(愼復行)의 당호(堂號)로,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北上面) 농산리(農山里)에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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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군 북상면(北上面) 농산리(農山里)에 있다.->거창군 북상면(北上面) 농산리(農山里)에 있었다. 후손이 이건하여 지금 수승대 경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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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천면지 제1장 유현(19명) 신복행(慎復行)
선생의 자는 성지요 호는 청송당이며 적은 거창으로 요수권의 셋째아들로 서기1533년에 황산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소학으로 몸가짐을 닦아 효제지성을 다하였고 경사에 통달하였으며 성리학의 정미한 곳까지 연구하였다. 문장과 덕망이 일세의 사표가 되었고 훈육일성이 “지나친 자랑과 헛된 찬성을 조심하라”하였다.
동계 정문간공의 시에 한자를 사랑하는 마음 늙을수록 깊고 나 위하여 정사를 열어 청음을 저장하네. 일생의 정직은 자못 서로 같구나. 반세의 한정은 스스로 시를 읊네. 새벽에 술이 깨니 별이 달을 움직이고 빈창에 졸음을 파하니 시원한 바람 옷에 가득하네. 만일 야윈 학이 당중에 있지 아니하면 어느 곳 송림에 이 소리가 있으랴 하였으니 이 시를 보면 가히 선생의 정직이 솔과 더불어 서로 같아 티끌에 난 청표가 야윈 학을 닮았음을 알만하니 선생은 가히 간세의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문효공 노옥계가 감사로 있을 때 선생을 천거하여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불취하였고, 위수북 나산 밑에 청송당을 지어 다섯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자호하였다.
서기1624년에 수전으로 통정계자하고 그해 3월16일에 향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서기1783년에 정충사에 배향하였다. 선생의 봉안문에 호문부자 정가제형이란 8자가 있다. 송나라 호문의 문 정공 안국이 아들 3형제를 두었으니 모두 어진선비였고, 정씨가문에 형제가 있었으니 명도선생과 이천선생이다.
선생의 숭고한 행적을 기리는 기적비가 수승대 국민관광지 경내 청송당 뜰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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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천면지 제2장 재실(齋室) 31. 청송당
위천면 황산리 768번지 수승대 국민관광지 경내에 있다. 청송당 신복행의 강학지소로 서기1610년에 사라산 하복지에 친히 세웠던 것을 서기1987년에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겼다.
청송당 이건기
공의 성은 慎氏요 휘는 復行 자는 盛之 호가 聽松堂으로 본관은 居昌이다.
고려수사도 좌복야 시호는 恭獻公이요 휘는 修를 시조로 모시었다. 조의 휘는 友孟으로 승훈랑인데 부군께서 영암으로부터 이거 안음 황산에 정착하시었다. 고 휘 權은 즉 樂水先生이니 선생의 5남 1녀 중 3남으로 서기1533년 5월11일에 탄생하시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질이 정수하고 도량이 넓고 쾌활하였으며 어버이를 섬기는 효성과 어른을 모시는 예절을 소학의 법도로 삼으셨다. 인근에 계시는 외숙 갈천선생 임훈에게 학문의 난의를 문의하시곤 하였다. 그 재질이 비범함을 아신 요수선생께서 과거에 나아가기를 권유하시었으나 공은 말씀하시기를 자신을 내세우고 이름을 얻는 것은 효도의 마지막이라 하시며 두문불출하시고 성리학탐구에 전념하시었다. 옥계노전이 관찰사로 있을 때 조정에 천하여 참봉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아우 휘 復振 호 夜川先生과는 정의가 유별하시어 앉으면 무릎을 맞대고 누우면 한 이불 밑에서 생활하시며 학문의 깊이를 항상 상의하시었다. 야천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형님의 학문의 깊이와 행실의 준행함을 가히 우리들이 어찌 측량할 수 있으리오. 문장과 덕망이 일세의 자랑으로 향당들이 존경하며 이에 따랐다. 중년에 이거 갈천지서 위수지북 사라산하 북상면 농산리하고 서기1610년 선생은 77세의 노령으로 재실을 짓고 뜰에 다섯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청송당이라 현판하시면서 자호로 삼았다. 또한 강학지소로 후인훈육에 일생을 다하셨다. 사후에 증직으로 사통정대부하여 선생의 품격을 추존하였다. 세태의 흐름에 따라 후손들이 향리를 떠나 재실의 유지관리가 어려워 종인이 상의하여 서기1987년에 수승대로 이건하면서 서기1966년에 세운 청송선생기적비도 담장 안으로 이건하였다. 서기1996년 월 일 12대손 철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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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천면지 제1장 비판(碑版) 20. 청송 신선생 기적비 신복행(慎復行, 1533~1624)
황산리 768번지 수승대 국민관광지 경내 청송당 담장 안에 있다. 1966년 구연서원 경내에 세웠던 것을 1987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청송당 신복행의 행적을 기리는 비다. 청송당 신복행은 효행이 지극하였고, 우애가 남달랐으며 학문이 장하였다.
역문 청송 신선생 기적비 옛날에 한문공이 동생원의 행장을 지을 때 먼저 회수와 동백산을 칭한 것은 그 산수가 현인군자와의 관련이 있음이니라. 아음의 원학동 수승대는 낙동강 상류의 큰 명승지이다. 신씨 선조가 영암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사현을 배출하였으니 우연한 일이 아니리라. 산수 암대의 기운과 정기를 받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선생의 성은 신씨이요 휘는 복행이며 자가 성지이고 관향이 거창이다. 고려 좌복야 공헌공 휘수가 그의 시조이며 대대로 벼슬을 하였음은 국사에 소상하다. 육세조 휘가 이충으로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아림부원군 양열공이고 조부의 휘가 우맹이며 승훈랑으로 이곳 안의에 처음 들어오셨다. 아버지의 휘가 권이니 곧 요수선생이라 대의 서편에 정자를 지어 요수정이라 하고 장수지소로 삼았다. 어머니는 덕은임씨이니 진사 득번의 따님이다. 1533년에 선생이 황산에서 출생하여 성품이 청수하고 기량이 넓었으며 일찍이 학업에 힘써 몸가짐의 법도를 소학으로 삼았다. 어버이 섬기는 효성이 극에 달했으니 부친상에 이르러 흐느끼며 죽 먹기 3년을 하였고 어머니상을 맞아서도 전과 다름없었다. 항상 동기간에 화합하였고 학문에 힘써 경사를 달통하고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대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그의 아우 야천공이 늘 중씨의 학문을 추앙하였다. 하니 선생의 학덕을 후학으로서 어찌 말로 평하랴. 항상 아들과 조카들에게 당부하기를 부질없는 자랑과 헛된 재조는 사람들의 뜻을 그르치기 쉬우니 너희들은 삼가라 하였다. 문장과 덕망이 당대의 근본으로 향리에서 자랑하니 옥계 노 문호공이 고을 현감으로 와서 조정에 천거하여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평생토록 자장의 녹에는 뜻이 없고 안연의 누항에 처함을 달게 여겨 도연명의 소나무를 사랑하는 취미를 초월하였다. 중년에 위수의 북녘(현용수막) 덤불산 밑에 작은 재실을 짓고 뜰에 다섯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가로되 청송당이라 하였으며 자신의 호로 하였다. 자신이 사운이수를 지었으니 그 뜻이 가상하여 동계 정 문간공이 시한수를 써 가로되 빈한한 모습도 즐거워하는 늙은이에 나이가 더해가니 깨끗한 집에서 맑은 나날이 더해가네. 일평생 정직만이 생각에 감겼고 반평생 할미처럼 앉아 읊조렸다. 새는 밤에 취중에서 잠깨어보니 별과달이 자리를 옮겼고 섬세한 창가에서 잠깨어 보니 차가움이 옷깃에 스며드네. 학과 곳집 인연이 아니로되 선생 집 가운데 앉았으니 솔숲이라 하여도 어느 곳에 이 읊조림 있으랴. 이 시를 보면 선생의 정직한 성품과 티 하나 없는 욱욱청청 군자절의 솔 그리고 곳집속의 학으로 비유하였으니 흔히 나는 인물이 아니리라. 그 재주 특출하였고 그 뜻은 항상 탁함을 물리치고 맑음을 택하였다. 명산을 밟으며 넉넉히 노닐면서 읊조렸지만은 뜻하던바 어찌 다했으랴. 만력 갑자에 수직으로 통정 벼슬을 받고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니 정조계묘년이다 향중 선비들이 정충사에 모셨으니 봉안문에 호문부자 정가제형의 여덟 글자는 백세토록 새길 어구이다. 후손 종의가 경양산방까지 나를 찾아와 선생의 행장을 내어 놓으면서 선조의 행의는 진실 그대로 후대에 전수토록 해야 하는데 세월이 갈수록 누락이 걱정되니 비로소 실상을 기록하기로 의논이 되었다 하며 나에게 글을 요청하므로 내 비록 능하지 못하나 거절 할 수 없어 그 행장문을 안찰하여 기술하였다. 단기4299년 병오3월 일 하동 정도현이 찬하고 해주 정원진이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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