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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탄사선생과 전 치사박사
이 홍사
두 사람이 다녀갔다.
열흘이 넘게 머물다 간 사람은 감 탄사선생과 전 치사박사다. 지난밤에 공항까지 배웅하고 들어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새벽에 거실 겸 사무실에 나오니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가 썰렁하고 숙소는 정물처럼 고요했다. 일단, 사무실에 딸린 방에서 전 치사박사의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전 치사박사의 코를 고는 소리는 과히 웅대하고 장엄해서 허술하게 지은 아파트의 천정과 벽이 울릴 지경이었고 감 탄사선생의 코고는 소리는 육질이 쫄깃해서 전 치사박사의 코골이에 추임새를 넣었는데 오늘 새벽은 거짓말처럼 조용하다. 두 사람의 코골이는 하모니를 이루며 박자가 척척 맞아 사람이 사는 것 같았는데, 새벽의 숙소가 조용한 걸 보니 그들이 지난밤에 떠난 것 분명하다. 또 달라진 것은 새벽에 나오면 늘 거실 탁자 위에 뒹구는 빈 소주병, 내용물이 말라붙은 안주 접시, 꽁초가 수북한 재떨이가 어지럽게 늘려있었는데 오늘 새벽은 깔끔하다. 너무 깔끔해서 섭섭할 지경이다.
대충 시간을 짚어보니 어젯밤에 떠난 그들이 인천공항에 도착할 시간이다. 직항으로 뜨는 대한항공은 이곳 시간으로 자정이 다 되어 출발한다. 두 시간 반의 시차가 있으므로 한국 시간으로는 첫 새벽에 출발하는 셈인데 다섯 시간 넘게 날아가서 아침에 승객을 부려놓는다. 늘 그 항공기를 이용하기에 도착시간을 나는 정확하게 안다.
둘 다 어떤 소득을 얼마나 건져 가는지 모르겠다.
감 탄사선생은 시를 구하러 왔다고 적확하게 말했고 전 치사박사도 글감을 구하러 온 셈이다. 시인인 감 탄사선생은 감탄이 나올만한 자리에서는 들고 다니는 수첩에 메모를 하는 것을 보았고 민속학 박사인 전 치사박사는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메고 다니는 캐논카메라에 대상이나 순간을 포착하여 저장하는 걸 보았다. 열흘이 넘는 여행기간이었지만 나랑 다닌 건 고작 나흘이다. 경미한 사고도 없이 여행을 잘 마쳐준 것이 주관한 나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여행계획을 세운 건 석 달 전이었다.
감 탄사선생은 만날 때마다 입에 달린 소리가 ‘형! 미얀마 한번 데려가요.’ 라는 말이 인사가 되었고, 전 치사박사는 매일 만나는 술친구인데, 술자리에서 미얀마 얘기가 나오면 ‘공사가 완료되어 내 집이 생기면 짬을 내서 한번 가자. 경비는 걱정하지 말고.’ 라는 말을 내가 버릇처럼 해서 나로서는 숙제로 여겨지는 여행이었다.
애당초 나의 계획은 술친구 삼총사인 형 용사교수랑 같이 가기로 했다. 셋은 내가 한국에 있으면 거의 매일 만나서 술을 먹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나로서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구역할을 톡톡히 하는 친구들이다.
술자리에서 한 약속은 우리 집이 완공되면, 이라는 조건이었는데 공사가 완공되기 전에 숙소에 빈방이 하나 생겼다. 데리고 있던 총괄매니저가 그만두고 싱가포르에 국적을 둔 해운회사 미얀마 지점장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숙소에 빈방이 하나 생긴 것이다. 총괄매니저를 하나 구하고 싶지만 마땅한 인물이 없어 현지매니저에게 맡겨두고 내가 자주 들락거리기로 마음먹으니 빈방이 생긴 것이다. 짓고 있는 건물이 완공되려면 중간에 열대몬순기후의 넉 달이 넘는 우기가 있으니 일 년은 더 걸려야 분양을 시작할 것 같아 지난 연말에 들어가 내가 먼저 제의를 했다.
숙소에 빈 방이 하나 생겼으니 신년 연휴를 이용하여 한 열흘 시간을 내라고 했다. 전 치사박사는 앉은 자리에서 흔쾌히 그러자고 했는데 형 용사교수가 난색을 표했다.
-방학인데 왜?
신입생 면접이 있어 시간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땅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줄 알았던 형 용사교수가 그렇게 나오자 방법이 없었다. 전 치사박사는 이미 앉은 자리에서 자축의 박수를 쳤는데 입장이 난처했다.
미얀마 여행을 패키지로 오지 않고 자유여행으로 오면 적어도 둘이 와야 경비가 절감되고 내가 일일이 붙어 다니지 않아도 된다. 직업으로 뛰는 여행가이드는 비싸고 말이 많다. 영어만 조금 구사하는 먹고 노는 현지인 하나를 붙여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걸로 스케줄을 짜서 한 바퀴 돌리면 주마간산 도느라고 성가시지 않고, 기억에 고이 챙겨두는 여행이 될 것이다. 관광과 여행에는 오묘한 차이가 있다. 내 경험에 의하면 패키지로 훑어보는 관광보다 자유여행으로 고생을 많이 한 여행이 기억에 더 오래 남고 건질 것이 있었기에 그런 루트를 계획했는데 형 용사교수가 불발을 선언하자 입장이 난처했다. 전 치사박사는 혼자서라도 따라오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어렵게 말은 뱉었는데 결과는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앉아있으니 술이 넘어가지 않았다. 어떡한다?
그날 저녁 소주를 간단히 마시고 불참을 선언한 형 용사교수는 학생들과 약속이 있다며 먼저 일어났다. 전 치사박사는 언제 출발할 것인지 저어기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사람이 정해져야 세부계획을 세우는데 언제쯤 가자고 할 수가 없어 가급적 말을 아꼈다.
생고기집에서 간단하게 마시고 도로 건너편 파리바게트로 자리를 옮겼다. 생고기집에서 소주만 마셨지 저녁을 먹지 않았음으로 간단하게 빵조각으로 저녁을 때우고 입가심으로 커피를 마시기에 분위기가 괜찮은 곳이고, 무엇보다 가격대비 커피가 맛있어 자주 이용하는 집이다.
거기서 미얀마에 한번 데려가라고 만날 때마다 인사를 하던 감 탄사선생을 떠올렸다. 감 탄사선생은 영주에 살고 있다. 둘 다 개성이 강한작자들이라 붙여놓으면 어울릴지 그게 문제였다. 그렇더라도 일단 전화를 해서 의향을 물어보는 게 순서다 싶어 빵조각을 물고 전화를 때렸는데 의외의 반응이 나타났다. 동행이 누구라도 상관없다며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그럼 비자를 내는데 필요하다며 여권과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고 감 탄사선생이 요구하는 데로 우편물 받을 주소를 메시지로 날려주었다. 상세한 일정은 추후에 연락하기로 하고 전 치사박사에게 작가회의 사무국장을 하고 있는 감 탄사선생을 아느냐고 물었다. 이름만 들었지, 자세히는 모른다고 했다. 초면에 같이 동행해도 불편함을 이기겠냐고 다시 물었다. 누구든 상관없다고 했다. 그럼 됐다. 커피를 느긋하게 마시고 근처에 있는 전 치사박사 아파트까지 따라가서 여권과 사진을 받았다.
다음날부터 여행 세부계획을 짰다. 말을 꺼낸 이틀 후, 늦은 오후에 익일 특급으로 보낸 감 탄사선생의 여권과 사진을 받았다. 둘의 여권을 확보하고 나서 관광 비자가 나오는 기간과 내가 들어와서 일을 해야 할 시점에 맞추어 항공편을 예약했다. 같이 왔다가 같이 나가는 게 아니다. 나는 일을 해야 하므로 더 있어야 하니 한 달로 예약하고 둘은 열흘 일정으로 끊고 여권과 사진을 여행사로 보냈다. 관광비자의 최대 체류기한은 4주다. 그 정도면 넉넉하다.
미얀마는 도착비자가 통용되는 나라다. 우리 회사 직원이나 방문객으로 만들어 내가 만든 초청장에 사인만 하면 도착비자가 되는데 공항에서 비자비가 비싸고 도착하여 비자를 받는데 이십 분 넘게 기다려야 하니 입국신고 줄을 가장 뒤에 서야 한다. 그러면 최소한 다른 사람들보다 삼십 분 늦게 입국수속을 마치는데 그 동안 담배를 참는 게 보통 고역이 아니다. 하여 시간이 있으면 관광 비자를 미리 받아 놓는 게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이득이다.
미얀마 여행은 겨울에 하는 것이 좋다. 봄가을 날씨처럼 선선하고 비가 오지 않기에 세계의 여행객이 몰리는 시기다. 혹한의 겨울에 잠시 다른 계절로 들어가 반바지차림으로 돌아다는 재미도 보통이 아니다. 내 일과 맞추어 정초 연휴 마지막 날인 1월 3일 출발하는 것으로 날을 잡았다. 감 탄사선생에게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을 빠짐없이 일러주었다. 겨울옷은 입고 가는 것 외에는 가져오지 말 것, 구두는 금물이고 슬리퍼나 샌들이 있으면 꼭 챙길 것, 가방에 여유가 있으면 플라스틱으로 된 소주 큰 병을 잔뜩 넣을 것. 등이다. 미얀마로 전화를 해서 매니저에게 만달레이와 바간으로 두 명이 여행으로 동행한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감 탄사선생은 영주에서 출발하기에 우리가 사는 구미로 오는 게 아니라 인천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안동에서 출발하여 영주를 거쳐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이 바로 있다는 걸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알았다. 전 치사박사와 나는 구미에서 인천공항으로 바로 가는 리무진버스를 이용했는데 연휴 마지막 날이라 고속도로 곳곳에서 정체되는 바람에 예정보다 두 시간 늦게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감 탄사선생은 인천공항에서 거의 세 시간을 혼자서 기다려야 했다. 우리가 인천공항으로 향하고 있는데 전화가 세 번이나 왔다. 첫 번째 전화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는 전화고 두 번째 전화는 어디쯤 오고 있느냐는 전화고 세 번째는 정말 오고 있느냐는 짜증 섞인 전화였다. 스케줄대로라면 감 탄사선생이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한 시간 남짓 기다리면 우리가 도착해야 하는데 그날은 고속도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버스가 너무 지체되어 그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조바심이 들 지경이었다.
연휴라 그런지 공항도 북새통이긴 마찬가지였다. 공항에 도착하여 감 탄사선생에게 두 번이나 전화를 하여 만나고 탑승수속을 하려고 보니 평소보다 서너 배 줄이 길게 늘어져있었다. 줄 맨 뒤에 서서 기다리니 탑승마감 시간이 다 되었는지 우리가 타는 항공기를 이용하려는 승객은 먼저 앞으로 나오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 방송을 듣고 셋은 새치기를 하여 탑승수속을 마쳤다.
그날따라 비행시간도 엄청 늘어졌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다섯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데 여섯 시간 반이나 걸렸다. 내 옆에 앉은 전 치사박사는 이렇게 어렵고 힘든 길을 한 달에 한 번씩 다니느라 고생이 많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 자신이 힘들다는 다른 표현으로 간주하면서 자주 다니고 길이 들면 견딜만하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미얀마 공항에서 전 치사박사는 또 불평을 늘어놓았다. 입국수속이 더디다는 것이다. 한국보다는 출입국 관리소에서 입국수속이 더딘 건 사실이다. 나는 버릇이 되어 모르겠지만 전 치사박사는 한 사람 입국수속을 마치는데 시간을 재어보니 딱 삼 분이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비교적 앞쪽에 섰으니 삼십 분 정도에 입국수속을 마쳤지만 줄 뒤에 선 사람들은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입국 수속을 마치니 전 치사박사는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짜증을 낸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어지간히 급했는데 줄을 서서 늦어터진 수속을 기다리니 환장하겠던 모양이었다. 화장실을 알려주고 감 탄사선생과 나는 탁송으로 부친 짐을 찾았다.
짐을 찾아서 청사 밖으로 나오니 후덥지근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이야! 동남아에 온 게 실감나네!
전 치사박사의 말이었다. 셋은 약속이나 한 듯이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밤이지만 어지간히 더워 입고 있던 옷이 몸에 칭칭 감기기 시작했다.
-택시 타고 가는 거요? 형님?
-여기 서있으면 택시기사가 온다.
그 말을 마치자 택시기사로 보이는 론지를 입은 젊은이가, 택시? 하면서 다가왔다. 미얀마의 택시는 미터기가 없다. 타기 전에 무조건 흥정을 해야 한다. 양곤에서는 택시를 타려면 뒤에 차가 아무리 밀려도 차창너머로 흥정을 하고 탄다. 택시 기사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 붙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우리가 가야할 곳을 말하고 흥정을 시작했다. 말은 통하지 않아 미얀마 말과 밍글리쉬라는 영어, 한국말을 섞고 거기다가 보디랭귀지를 동원해서 흥정을 했다. 한 명과 흥정을 하자 택시기사 한 명은 포기를 하고 다른 팀에게로 갔다. 시내에서 타는 택시보다 공항에서 타는 택시비는 약간 비싸다. 늦은 시간이고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터라 그 점은 감안해야 한다. 적당한 선에서 오케이 하자 택시기사는 택시를 가지러 갔다. 택시를 공항 입국장 입구에 세워두지 못한다. 지금 신청사를 짓고 있는데 공항입구가 복잡한 탓이다. 타거나 내리면 차부터 빼야한다. 택시를 가져올 동안 애연가 수준을 넘어서 골초 반열에 드는 세 명은 캐리어에 걸터앉아 담배를 한 대씩 더 피웠다.
-여기서는 택시 안에서 담배를 피워도 돼.
-참! 환상적인 나라군.
캐리어에 걸터앉은 전 치사박사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대답했다. 시내버스 기사가 담배를 물고 운전하는 나라다. 애연가로서는 정말이지 환상적인 나라다.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보면 알겠지.
택시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고 집 부근에 와서 가사도우미에게 전화를 했다. 오 분 후에 도착한다고. 손님 둘과 동행한다는 얘기는 한국에서 했으니 세 명이 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서 내가 숙소로 쓰는 라인에 닿자 가사도우미 둘이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캐리어와 손가방을 기사도우미들과 나누어서 들고 숙소에 들어오니 밤 열두 시가 넘었다. 한국과는 두 시간 반의 시차가 있으므로 한국 시간으로 따지면 새벽 두시 반이다.
모두들 몸에 칭칭 감기는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리고 간단히 한잔하고 자자고 전치사박사가 제의했다. 가사도우미를 불러 술상을 차리게 했다. 술상은 거실 겸 사무실 탁자에 차려졌다. 술은 인천공항에서 사온 한국소주다. 소주를 마시며 겨울이라는 계절에서 바로 여름으로 넘어왔으니 모두들 설레었는지 잠을 잘 생각을 하지 않고 얘기에 또 다른 얘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지간히 마셨다 싶어 시계를 보니 세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감 탄사선생이 무슨 말인가 하는데 내가 잘랐다.
-한국 시간으로는 다섯 시 반이다. 밤 세웠다. 자자. 아침은 일곱 시에 먹는다.
내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 탄사선생이 전 치사박사에게 격의 없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친해진 모양이다. 술좌석에서 그렇게 만들어졌다. 둘이 붙여놓아도 문제가 없겠다. 가사도우미들은 자는지 술상을 치우러 나오지 않았다. 둘이 한 방을 쓰라고 하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몇 시에 자던 아침 여섯 시면 일어난다. 잠이 모자라면 아침 먹고 한숨 더 자는 형편이다.
침대에 누우니 천정이 빙 도는 기분이 들었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여섯 시가 되어 일어나 대충 씻고 거실 겸 사무실에 나오니 어지럽게 늘려있던 탁자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가사도우미들이 일어난 모양이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코골이 소리가 허술하게 지은 아파트 문을 뚫고 거실까지 들린다는 점이다. 전 치사박사의 코골이 소리 중간에 감 탄사선생의 코골이 소리가 끼어들어 그럴듯한 하모니를 형성하고 있다. 코골이 소리를 들으며 기도를 하고 두 사람이 자는 방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에어컨이 그대로 켜져 있다. 리모컨을 찾아 에어컨을 껐다. 그대로 켜두면 한국에서도 걸리지 않던 감기가 열대지방에 와서 걸리기 십상이다. 둘은 내가 방으로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곯아떨어졌다. 코골이 소리를 들으며 노트북을 부팅시켜 그날 계획을 세우고 아침이 준비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 박사와 선생을 깨웠다.
둘 다 푸석한 얼굴이었다. 전 치사박사는 원래 아침을 먹지 않는다. 그게 버릇이 되었다. 겨우 계란구이 두 개로 아침을 때우는 형편이다. 반면에 점심은 열두 시 칼이다. 조금만 늦으면 못 참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전 치사박사를 위해 특별히 계란구이가 아닌, ‘빼구’라고 불리는 오리알구이가 상에 올랐다. 사육하는 오리가 아닌 야생 오리알구이다. 전 치사박사의 식성을 아는 내가 특별 주문한 것이다.
감 탄사선생은 먹성을 보니 채식위주였다. 손님 왔다고 특별한 밥상이 되어 노릇하게 구운 삼겹살 구이가 올랐지만 전 치사박사는 물론이고 감 탄사선생은 젓가락도 대지 않았다.
-아침부터 삼겹살 구이를 보니 이상하네요.
-이상할 것 없다. 여긴 미얀마다. 전번에는 아침부터 비빔국수를 해주더라.
삼겹살을 상추쌈에 싸서 두 점 먹은 이는 나뿐이었다. 한 번도 젓가락이 가지 않는 반찬은 다시는 밥상에 오르지 않는다. 하여 맛이 있건 없건 골고루 다 맛을 본다. 아침을 먹고 거실에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이제 주무실 시간이다. 매니저가 출근하면 일어날 거다. 여행계획은 매니저가 다 세워놨어. 한숨 자든지 마음대로 해.
평상시에도 아침을 먹으면 나는 한숨 잔다. 새벽에 세 시에 일어나서 하루를 계획하고 책을 보다가 아침을 먹고 한숨 자는 게 습관이 되어 있다. 자는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남짓이다.
자고 나오니 담배연기가 자욱한 거실에서 둘이 책을 보고 있었다. 미얀마 여행가이드북이다. 창을 열면서 물었다.
-안 잤어?
-잠이 와야 자지? 아파트 뒤에 재래시장 보고 왔어.
벌써 미얀마 냄새를 맡으로 한 바퀴 돈 모양이다.
-오늘은 가볍게 시내 관광하고 오늘 밤에 야간 버스로 떠나. 한 바퀴 돌려면 오 일에서 일주일은 걸릴 걸. 나는 매니저 데리고 현장 체크해야 돼.
-둘이서 시내를 돌아요?
감 탄사선생이 물었다.
-매니저가 나오면서 가이드 하나를 데려올 거야. 나갔다가 오면서 환전해 올 테니 그리 알고.
가이드를 데려오기로 했던 매니저, 때쑤는 혼자서 출근했다.
-이야! 까무잡잡한 게 맛있게 생겼는데?
때쑤를 본 감 탄사선생의 말이다.
-껄떡거리지 마라. 한국말 다 알아듣는다.
그 말로 감 탄사선생의 입을 막자, 서로 격의를 갖추고 인사를 하고 때쑤는 제 책상 앞에 앉아 여행 계획을 세우고 경비가 얼마쯤 들것인가를 뽑았다. 만달레이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차를 대절하고 경비를 묻고, 바간으로 가는 여정도 전화를 해서 알아보며 바쁘게 여행계획을 세웠다. 야간 버스로 만달레이를 가서 삐울린을 돌아보고 바간으로 돌아서 오는 여정인데 육박칠일 정도 걸리며 경비는 백이십만 짯이 든다고 하며 여행계획을 한 장의 종이에 모두 적었다.
-백이십만 짯이면 청소하는 가정부 열 달 월급이다 아껴 써.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넉넉하게 백오십만 짯 정도를 환전해주면 되겠다. 그런 계획을 뽑고 있을 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열어보니 미스터 한이다. 미스터 한은 미얀마 말로는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지만 한국말로는 제매, 그러니까 때수 여동생의 남편이며 한국에서 이 년간 근로자로 일을 한 바가 있어 아주 간단한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안다. 내가 알기로는 마누라보다 다섯 살 어리다. 미스터 한이 동행시킬 모양인데 적당한 작자다. 미스터 한 수고비는 갔다 오면 따로 불러서 주어도 무방하다.
미스터 한이 들어오자 둘은 불러서 앉혀놓고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 시멘트 공장에 있었다. 얼마나 있었느냐? 이 년 있었다. 돈은 좀 벌었느냐? 별로 벌지 못했다. 결혼은 했느냐? 했다. 아이가 몇이냐? 둘이다. 어눌한 한국말이 오고 갔다. 미스터 한은 한국말을 듣는 건 제대로 듣는데 구사하는 건 영 어눌하다.
내 차로 같이 나가서 시내 입구에 내려주고 우리는 우리대로 볼일을 보면 되겠다. 들어오면서 환전을 하고 만달레이로 가는 차표를 예매하면 될 것이다. 가지고 있던 미얀마 돈으로 그 날 하루 쓸 돈 십만 짯씩 전 치사박사와 감 탄사선생에게 주고 다섯 시까지는 들어오라고 했다. 버스를 타던 택시를 타던 무조건 다섯 시까지 들어오라고 하고 내 전화기를 감 탄사선생에게 주었다. 나에겐 미얀마 전화가 두 대다. 미얀마도 이동 통신사가 여러 곳이다. 시내에선 다 괜찮은데 지방으로 나가면 기지국 탓인지 MPT가 잘 터지는 곳이 있고 TL이 잘 터지는 곳이 있어 미얀마 사람들은 거의가 전화기를 두 대씩 들고 다닌다. 감 탄사선생에게 준 준화기 뒤에 내가 가지고 있는 전화번호를 써서 테이프로 붙여주고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번호로 전화를 하라고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그 전화뿐이 아니라 미스터 한에게도 전화가 있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전화기를 건네면서 감 탄사선생에게 미얀마에서의 전화기 사용법을 일러 주었다. 그건 될 때까지 통화를 시도하라는 것이다.
다섯 명이 모두 슬리퍼를 신고 숙소를 나왔다. 내 차를 타고 가다가 시내 입구 택시 타기 좋은 곳에 내려주고 우리는 현장을 돌았다. 그리고 환전을 하고 만달레이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하고 들어오다가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정비공장엘 들어갔다. 브레이크 라이닝이 다 닳아서 브레이크가 밀리며 경고등이 들어오기에 한국에서 들어오며 부품을 사왔다. 사고내기 전에 빨리 조치해야할 항목이다. 때쑤는 숙소로 걸어서 들어가라며 정비공장 앞에 내려주었다. 여행을 위해서 온 일행들이 출발하는 것을 보고 퇴근시킬 생각이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정비는 예상했던 시간에 끝나지 않았다. 브레이크 패드는 부품을 맞는 것을 준비했으니 잠시 갈았지만 정비사가 엔진의 소리를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시키지 않았지만 몇 차례시동을 걸어보더니 흡입 스로틀밸브를 청소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도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아 대수롭잖게 그러라고 했다. 헌데 이놈의 자식이 엔진에 붙어 있어 공구가 잘 들어가지 않아 뜯어내는데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감 탄사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어디인가 물으니 방금 숙소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다행이다. 저녁을 먼저 먹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차표와 환전한 돈은 내 가방에 들어 조수석에 실려 있었다. 설상가상, 마음은 바쁜데 스로틀밸브를 뜯어내는 과정에서 그곳으로 연결된 냉각 호스가 찢어졌다. 정비를 돕던 한 녀석이 그 호스를 들고 같은 걸 사러 다른 부품가게로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는데 종무소식이다. 그렇다고 시간이 흐르지 않는 건 아니다. 그 동안 뜯어낸 부품을 청소하고 연신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때수가 허겁지겁 공장으로 찾아왔다. 지금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수석에 던져둔 전화기를 보니 감 탄사선생에게 준 전화번호가 여러 번 찍혀 있었다. 때쑤에게 환전한 경비와 차표를 건네고 주의사항을 잘 일러주라고 했다. 때쑤는 알았다며 돈과 차표를 들고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다. 때쑤가 사라지고 한 시간이 더 걸려 정비가 끝이 났다. 맞는 호스가 없어 비슷한 모양과 크기의 호스를 양쪽을 좀 잘라내고 제작해서 넣은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니 때쑤도 퇴근하고 없었다. 저녁을 먹고 있으니 감 탄사선생으로부터 차를 다 고쳤냐고 전화가 왔다. 어디인가 물어보니 버스를 타고 출발한다고 했다. 새벽에 만달레이에 도착하면 때쑤가 미리 예약한 차가 기다릴 것이라고 하며 잘 다녀오라고 했다. 때쑤가 예약한 차주의 전화번호는 여행 계획서에 적혀있다. 때쑤랑 나랑 지원할 수 있는 사항은 거기까지였다. 그 다음부터는 미스터 한과 상의해서 알아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숙소를 정하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전화를 쥐어서 보내놓고 나니 감 탄사선생이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했다. 호텔에 들어갔다는 전화고 삐울린으로 출발한다는 전화였다. 어디에 가면 뭐가 좋고 어디에 가면 뭐를 유심히 보라고 했다. 나는 이미 일 년 전에 그곳을 두 번이나 여행했으니 대충 알고 있다.
그들을 보내놓고 나는 나대로 바빠 날자가는 줄을 몰랐다. 매일 현장을 둘러보고 설계가 변경되는 부분을 체크하고 늦어터진 공사에 잔소리하는 게 일이었다. 그 동안 감 탄사선생으로부터 전화는 두어 통 왔지만 바쁘게 보내다 보니 그들이 돌아올 날이 언제인지 잊어버렸다.
그렇게 닷새가 지났나, 엿새가 지났나?
아마 오늘이나 내일쯤 양곤에 들어오리라고 짐작하며 새벽에 일어나 인터넷으로 한국을 읽고 있는데 여행을 마친 그들이 새벽에 숙소로 들이닥쳤다. 밤새 바간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고 했다. 왜 전화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배터리가 다 되었다고 했다. 전 치사박사는 그 동안 면도를 한 번도 하지 않았는지 수염이 가지를 치기 직전이었다. 셋 다 잠을 설쳐서 초췌한 얼굴에 고생한 티가 줄줄 흘렀다. 그들이 들어와 거실이 왁작거리자 가사도우미들이 일어났다. 빨리 아침을 준비하라고 시키고는 아침부터 먹고 오늘은 푹 자라고 했다.
미스터 한은 아침을 먹고 가라고 했더니 밥보다 잠이 먼저라며 제 할 일은 다 마쳤다는 듯이 제 집으로 갔다. 잠이 바쁜 건지 신혼인 마누라 보는 게 급한 건지 모르겠다. 아침상은 급하게 차려졌다. 전 치사박사는 역시 아침을 계란구이로 때우며 소주를 반병 비웠다. 잘 참이니 해장술도 괜찮다. 감 탄사선생은 김치를 보고 환장을 했다. 그 동안 현지식이 입에 안 맞았던 모양이다. 아침을 먹고 둘이서 교대로 씻고 자러 들어갔다. 커튼을 쳐주고 에어컨을 틀어주었다. 문밖에 내어놓은 빨래거리가 산더미였다. 그들이 들어가는 걸 보고 나도 들어가 토끼잠을 자고 나오니 때쑤가 출근해 있었다.
때쑤에게 날짜를 계산해서 양곤과 가까운 바고를 돌아보는 일정을 짜라고 했다. 양곤은 가이드 없이 택시로 돌리고 차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바고는 휴일에 내 차로 다녀올 생각이라고 일러주었다. 방안에서 코고는 소리가 거실까지 들렸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때쑤가 짜고 있는 계획서를 보니 양곤은 전부가 파고다를 둘러보는 여정이었다. 마지막 날은 일을 제쳐두고 때쑤가 가이드가 되어 시내버스와 순환열차 투어도 하자고 했다. 골동품 시장도 돌아보고 보석 시장도 돌아보는 걸로 일정을 짜라고 했다. 나도 양곤에서 시내버스를 딱 한번 타보았고 순환열차는 지나다니는 것만 보았지 타보지 못했다. 가이드북에는 시속 30킬로미터로 가는 순환열차를 타고 느림을 체험하는 것도 괜찮다고 나와 있는데 그런 체험을 해보지 못했다. 원님 덕에 나발을 불어볼 생각이었다. 방안에서 들려오는 둘의 코골이는 조화가 잘 맞았다. 듣기 괜찮은 하모니다.
-배리 굿 하모니!
그렇게 표현하자 때쑤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둘이 일어난 건 점심상이 차려지고 나서였다. 스스로 일어난 게 아니라 점심상이 차려지고 내가 들어가서 깨웠다.
점심을 먹으면서 오후 여정을 일러주었다. 우리가 나가면서 쉐도먓 파고다에 내려줄 터이니 그곳을 둘러보고 가까운 거바예 파고다까지 걸어가서 구경하고 택시를 타고 들어오라고 했다. 가이드북에 나와 있으니 가이드북을 가지고 가서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을 파악하며 둘러보라고 했다. 우리가 사는 숙소 주소는 감 탄사선생이 들고 다니는 다이어리에 미얀마글씨로 적혀 있다. 얼마냐고 묻는 말도 한글로 적혀있다. 택시기사에게 그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흥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안전장치로 휴대폰 하나를 가지고 있으니 문제될 게 없다. 점심상 앞에서 그 날 여정을 발표하자 감 탄사선생은 이렇게 여유 있고 자유분방한 해외여행은 처음이라고 좋아했다. 그 동안 패키지여행만 따라다녔다고 했다. 패키지를 영어로 풀이하면 꾸러미다. 꾸러미처럼 엮여서 따라다닌다고 그렇게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여행과는 달라야지. 아무렴, 당연히 달라야지. 이런 기회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니 실컷 즐기라고 했다.
점심을 먹고 바로 출발이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내 차를 타고 가다가 쉐도먓 파고다 입구에서 둘을 내려주었다.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가이드북을 보면서, 역사를 배워가며 좋은 여행을 하겠지.
둘을 내려주고 우리는 현장으로 차를 몰았다. 현장은 다섯 군데라 격일로 둘러보지만 갈 때마다 어느 현장이건 잔소리 할 거리가 있다. 그날은 한 현장의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하는 날이었다. 레미콘이 아니라 인력으로 콘크리트 작업을 하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콘크리트 작업을 마감하는 걸 보고 숙소로 들어오니 가사도우미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둘이 먼저 와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거기에 끼어 저녁도 거르고 술을 마셨다. 술이 어지간 하자 또 거실로 자리를 옮겨 술상을 차렸다. 그건 순전히 전 치사박사의 술버릇이다. 입가심이라며 꼭 자리를 옮겨서 이 차를 해야 하는 것이다. 주방에서 일 차 거실에서 이 차가 되는 셈이다. 말리면 밖으로 나가는 수가 있다. 거실에 술상이 차려지는 걸 보고 자러 들어갔다.
새벽에 나오니 거실 탁자 위에 술상이 어지럽게 늘려있었다. 밤늦도록 술추렴을 한 모양이다. 그날은 토요일이라 바고 여행을 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물론 때쑤는 출근하지 않는다. 내가 가이드가 되어야 하며, 내 차로 다녀와야 한다. 바고에는 세계 최대의 와불상이 있다. 바고왕국 때 조성된 것이지만 밀림에 묻혀 있다가 1977년 바고에서 만달레이로 가는 철로 공사를 하면서 발견되었다고 가이드북에 기술되어 있다. 또 부근의 파고다도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 보다 높이가 이십 미터 높은 탑이 있다. 가는 길가에 수박을 파는 곳이 여러 곳 있다. 쉬엄쉬엄 쉬어가며 수박을 먹어가며 당일치기에 딱 좋은 곳이다. 한국에서는 1월에 수박 맛을 보기가 쉽지 않다. 먹더라도 당도가 여름 수박과는 다르다. 그러나 미얀마는 사철 잘 익은 과일이 넘쳐난다.
아침을 먹으며 바고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했다. 미얀마를 여행하는 동안에 잊지 말고 보아야할 것은 어디서 보든지 미얀마 소녀의 순박한 눈망울이라는 말도 했다. 감 탄사선생은 가이드북에서 읽었다면서 눈여겨보았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푸념했다. 그건 순수함이 희석된 관광지만 돌아다녀서 그렇겠지만, 잘 보면 도처에 늘려있다며 순박한 눈으로 보아야지 보이지 욕망으로 점철된 눈으로 보니 보일 리가 없다며 퉁을 먹였다. 혹시라도 보이거든 그 눈망울에 빠지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하루 걸리니 늦게 출발해도 문제가 없다며 잘 시간이라고 하고는 숟가락을 놓고 바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일상이 되어버린 토끼잠을 한숨 자고 나오니 전 치사박사는 카메라를 정비하고 감 탄사선생은 얼굴에 선크림을 바르며 출발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출발이다.
시내를 벗어나서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우는데 뒷좌석에 탄 감 탄사선생이 잠깐만, 하고는 내렸다. 뭔 일인가 싶어 보니 주유하는 아가씨 눈망울에 빠져버린 것이다. 아가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런 눈망울은 사진으로 담는 것이 아니고 가슴에 담는 것이야.
그날 바고를 다녀오면서 수박 세 덩이를 샀다. 세 덩이를 샀다는 말은 세 군데서 수박 파는 아가씨들과 노닥거렸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 길을 달리다보면 수박을 도로가에 쌓아놓고 파는 노점이 곳곳에 있다. 한 덩이를 사면서 사기 전에 쪼개놓은 수박을 맛본다. 그냥 맛만 보는 정도가 아니고 염치없이 쪼개놓은 수박 반통을 다 먹어치웠다. 세 곳 다 그랬다. 셋이서 그렇게 먹었으니 사는 양에 맛보는 양이 버금갈 정도이다. 그러나 수박 파는 처녀들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냥 외국인에게 대접하는 걸로 여기는 듯했고 더 맛을 보라고 멀쩡한 수박을 쪼개기까지 했다. 할머니들이 파는 곳도 있었지만 감 탄사선생이 제 나이는 생각하지 않고 아가씨가 파는 곳을 택해서 차를 세우게 했다. 한국 수박은 동그란데 반해 미얀마수박은 종자가 틀리는지 럭비공처럼 길쭉하다. 그게 신기했던지 전 치사박사는 수박을 카메라에 담았다. 물론 수박 파는 아가씨들도 감 탄사선생의 카메라 렌즈에 고스란히 담겼다. 동물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미얀마에 돌아다닌 지 일주일이 넘으니 둘 다 서툰 영어와 보디랭귀지로 아가씨들과도 별로 불편함 없이 소통을 넘어 농담까지 주고받고 있었다. 정작 주요 볼거리인 파고다의 불탑과 전설이 담긴 사면불, 와불상은 주마간산 훑어보고 럭비공처럼 생겨먹은 수박을 한통씩 안고 해거름에 숙소로 돌아왔다. 그날은 가이드가 아니라 운전사노릇만 한 셈이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아침을 먹으며 오늘은 하루 집에서 쉬자고 했다. 그 말을 하고 보니 전 치사박사의 눈에 쌍심지가 살짝 올라갔다. 아까운 시간을 탕진할 수 없다며 양곤이 아닌 시골 촌락을 구경하고 싶다 것이었다. 어느 나라를 가나 가장 큰 볼거리가 그 곳 사람 사는 모습인데 옳게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디를 갈까 궁리를 하다가 숟가락을 쥔 채 가사도우미 중에서 주방 일을 맡고 있는 퓨퓨를 불렀다. 퓨퓨의 고향은 양곤인데 그녀의 부모들이 양곤에서 가까운 촌락으로 이사를 가서 농사를 짓고 있다. 가끔 그곳에서 나오는 채소와 시골 촌닭과 강변에서 주워 모은 야생 물오리 알을 보내오곤 했으니 말이 난 김에 퓨퓨 부모님이 어떻게 사는지 보면 싶어 제안했더니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내가 듣기로는 섬이어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된다고 했다. 나도 퓨퓨의 부모님이 어떻게 사나 궁금하던 참이었다. 퓨퓨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우리는 아파트 상가로 내려가서 퓨퓨 부모님에게 드릴 선물을 샀다. 담배와 술을 마시지 않는다니 주로 과자와 음료수종류였다. 한보따리를 사서 올라와 출발채비를 하니 퓨퓨가 모두 반바지를 입고 가야한다고 하며 반바지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이유는 배에서 내리면 무릎까지 빠지는 갯벌을 밟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보다 더 설레는 이는 모처럼 부모님 댁에 가는 퓨퓨인 모양이다. 반바지에 반팔티를 갈아입고 나오자 윗도리는 긴팔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햇빛이 강렬해서 피부가 탄다고 했다. 또 들어가서 긴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나왔다.
퓨퓨 부모님 집은 양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에오와디강 하류의 섬, 삼각주 평야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양곤을 벗어나 약 이십 분 쯤 달리자 조수석에 탄 퓨퓨가 농로로 우회전하라고 했다. 농로로 들어서서 위태롭기 짝이 없는, 삐걱거리는 나무다리 하나 건너니 바로 에오와디강 지류의 강기슭이다. 차가 더 들어갈 곳이 없다. 모래야적장이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거기에서 배를 타야 된다고 했는데 강을 보니 배가 다닐 것 같지 않았다. 강 하류라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지 물은 없고 온통 갯벌이었다. 퓨퓨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서 뭐라고, 뭐라고 하더니 그곳은 안 된다며 둑길을 따라서 하류로 내려가자고 했다. 비포장 둑길을 따라서 한참을 내려가니 퓨퓨가 강을 살피더니 차를 세우라고 했다. 그리고 슬리퍼는 모두 차에 벗어놓으라고 했다. 좁은 둑길에서 겨우 차를 돌려 갓길에 세워두고 강기슭에서 기다리니 조그만 조각배가 한 척 건너오고 있었다. 다 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배였다. 본래 영업하는 배가 있는데 물이 빠져서 움직일 수가 없으니 집에 비상용으로 묶어둔 배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배를 저어온 사람은 퓨퓨 아버지가 아니라 젊은 사람이었고 열댓 살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타고 있었다.
우리가 올라타자 배의 뱃가죽이 바닥에 닿았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아이가 무릎까지 빠지는 갯벌에 내리더니 배를 힘껏 밀어서 갯벌을 벗어나게 하고는 냉큼 뱃머리에 올라탔다. 갯벌이 미끄러워 배는 예상보다 쉽게 밀렸다. 배는 물길을 따라 강기슭으로 난 지류를 따라서 들어갔다. 베트남 밀림전이 상상되는 순간이었다. 저 밀림에 사람이 살까 의심이 들었다. 눈치로 미루어 강 하구의 퇴적된 섬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모양이다. 한참을 들어간 배는 조그만 오솔길이 보이는 밀림에 배를 세웠다. 또 갯벌을 걸어야 한다. 내려서니 종아리까지 빠지는 갯벌이었다. 전부 깔깔거리며 갯벌을 걸어서 섬에 닿았다. 열대림이 빼곡한 정글의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자 농토가 보이고 거기에 원두막 같은 나무로 만든 집 하나가 있었다. 전형적인 미얀마 농가였다.
퓨퓨 아버지 어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집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물통에 있는 물로 종아리와 발을 씻는 일이었다. 퓨퓨 부모님이 정성스레 황송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가지로 물을 퍼서 발을 깨끗이 씻어주셨다. 그런 대접을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이 층으로 올라가니 손님맞이 채비가 되어 있었다. 치킨구이와 풍성한 열대과일 그리고 술로는 테에니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시큼한 막걸리와 맛이 흡사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망고로 만든 전통 술이란다. 전 치사박사는 그게 맛있다며 연거푸 따라 마셨다. 치킨은 양계장 닭이 아니라 마당에 노니는 닭을 잡은 것이라 그 맛을 명확하게 형용할 수는 없지만 쫄깃하고 특별했다. 섬에는 딱 두 가구가 농사를 짓고 있었다. 외국손님 왔다고 옆집식구들이 구경을 온 모양이다. 사람이 귀한 곳이라 대접이 더 풍성했다. 알고 보니 퓨퓨는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노처녀가 시집을 가지 않고 외국인 집에서 일하고 있으니 부모님들 속이 타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연한 이치, 퓨퓨의 엄마가 영어를 섞어 손짓발짓을 동원해서 한국의 참한 신랑감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했다. 늙은 노인이 영어를 하니 감 탄사선생이 감탄했다. 이상할 것이 없다. 옛날 버어마는 영국 지배를 백 년 이상 받아서 노인들도 영어가 되는 나라다. 창밖에는 뻗으면 손이 닿을 듯 푸르고 싱싱한 망고가 달린 가지가 휘늘어져있었고 1월임에도 불구하고 햇병아리들이 마당에 노닐고 있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신선이 그렇듯 그 집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밭가에 둘러선 갈대밭이 모두 화장실이라고 퓨퓨가 웃으며 얘기했다. 울안에 화장실이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파리를 멀리 하려고 일부러 화장실을 만들지 않는단다.
풍성하게 먹고, 웃고, 즐기다가 떠날 채비를 하니 인심이 후덕한 퓨퓨 부모님이 가져갈 것을 바리바리 싸주셨다. 열대과일부터 술, 잡은 닭까지 넷이 들기에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나올 적에는 만조가 되어 강에 물이 그득했다.
그날 하루는 그렇게 때웠다. 저녁에 반주로 소주파티를 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나는 자러 들어가고 감 탄사선생과 전 치사박사는 마지막 밤이라며 거실에 술상을 차렸다.
다음날, 그러니까 어제는 시내 관광으로 스케줄을 잡았다. 승용차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시내버스를 타고 나가서 순환열차를 타고 들어오는 루트로 미얀마를 깊숙이 맛보기로 했다. 때쑤의 어제 업무는 가이드다. 나도 양곤에서 시내버스를 한 번도 타보지 않았고 순환열차도 타보지 않아서 나도 여행객으로 편승되었다.
콩나물시루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시내버스. 때쑤가 현지인들 사이에 끼어서 내 얼굴을 보더니 눈을 깜빡이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웃어주었다. 때쑤는 모른다.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우리의 체험 강도는 높아진다는 것을. 현지인들과 그야말로 피부로 접촉하며 시내버스로 차이나타운까지 가서 내렸다. 복잡한 시내는 걸어 다니며 구경하기로 했다.
시내를 천천히 걸어 다녔다. 전자상가에서 베트남에서 만들었다는 용량이 큰 USB 하나 사고, 보석 시장과 농산물 시장, 골동품 노점에서 이것저것 신기한 물건을 만져보며 구경을 하다가 감 탄사선생이 오래된 오메가 주머니 시계를 하나 샀다. 골동품 시장의 묘미는 무엇보다 밀고 당기고 흥정하는 재미다. 서점에 들러 글씨를 알 수 없는 중고서적을 뒤적이다가 육교 밑에서 콩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미얀마의 최고급 건물로 상징되는, 경비가 삼엄한 사쿠라 타워에 들어가 현대식 화장실을 이용했다. 사쿠라 타워에 들어간 우리의 의도를 나중에 안 때쑤는 폭소를 자아냈다. 길거리에서 파는 포도와 아이들 주먹만큼 큰 대추를 사서 먹으며 인근 순환열차 역으로 갔다. 순환열차 이용 요금이 우리 돈으로 삼백 원 남짓,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여대생들과 수다를 떨고 매표원 아가씨에게 대추를 나누어주다 보니 정말 미얀마 속살 깊숙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당도한 열차는 전쟁터에 다녀왔는지 멀쩡한 차창이 하나도 없었다. 의자는 나무의자, 전 치사박사는 열차에 타자말자 담배를 물었다. 전 치사박사는 가이드북에서 담배를 피워도 무방하다는 글을 읽은 모양이다. 나도 담배를 꺼내 무니 감 탄사선생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감 탄사선생은 그 모습을 조 동사선생에게 보여주며 자랑할 거라고 했다. 조 동사선생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내 심정의 조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조 동사선생도 미얀마에 한 번 데려가라고 만날 때마다 얘기했지만 이번 기회에 챙기지 못했다. 순환열차의 최고 속도는 시속 삼심 킬로, 느림의 미학을 체득하며 수다를 떨며 담배를 세 대 피우고 나서야 내렸다. 내려서는 ‘싸이카’라고 불리는 인력거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숙소로 들어왔다.
저녁은 마지막 날이니 외식을 하기로 했다.
순전히 고생한 가사도우미들을 위한 자리였다.
강 건너의 전원주택단지 안에 위치한 태국 음식점, 그곳에는 소주를 싸게 파는 까닭에 내가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아무리 푸짐하게 먹어도 가격은 한인식당의 사분의 일 수준이다.
푸짐한 만찬을 느긋하게 즐기고 그 자리에서 고생했다며, 감 탄사선생과 전 치사박사의 쌈짓돈을 빼앗아 가사도우미에게 나누어주었다.
숙소로 들어와 짐을 싸는 동안 나는 공항에서 제출할 출국카드를 작성했다. 짐을 다 싸고 둘은 샤워를 했다. 한국에 가면 며칠간은 목욕탕에 가지 않을 정도로 깨끗이 씻으라고 했다. 씻고 나온 두 사람은 들어올 때 입고 온 겨울옷으로 중무장을 했다. 한국엔 한파가 기승을 부린다는 소식을 인터넷으로 접한 감 탄사선생은 내의를 두 벌이나 껴입었다.
공항까지 전송하고 오니 자정이 다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거실 탁자 위에 빈 소주병이 뒹굴지 않아 서운했다.
다시 시계를 본다.
지금쯤 두 사람은 인천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하고 있을 게다.
도착하면 바로 메일을 보낸다고 했는데 둘은 뭘 건져갔는지 물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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