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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의 삶은 꿈속에서조차 처연하고 신산하다. 객향에서 부초 같은 나그네의 삶을 살아온 지 어느덧 반백 년. 일월은 강물처럼 쉬이 흘러갔고 지난했던 삶은 청춘을 지나 초로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도 그리고 백조의 호수도 수몰민들의 정서에는 언제나 그리운 스와니 강물일 뿐이었다.
가을 깊은 날 잔뜩 여물었던 태양이 지고 황혼이 피는 석양 나절에 쏟아지는 금빛 낙조를 받으며 고향으로 무리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가족들이 참으로 부럽구나. 영혼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안식처로 돌아가는 평화로운 날갯짓과 노래소리가 우거에서 환향을 간망하는 나그네의 심금을 울린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고 했던가.
강물 속에 깊이 잠든 동네는 말이 없다. 그리고 그 강물 바깥 세상으로 반세기나 되는 많은 세월이 쉬이 지나갔다. 옛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다. 일월도 영원 속으로 흘러간 뒤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새는 날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고 하는데 어찌 사람들은 기억 속으로 흐르고 있는 망각의 강을 쉬이 건너지 못하는가.
망향가를 부르며 부평처럼 살아온 일월은 무상했다. 위안이라면 오랜 세월 동안 상처받은 영혼이 슬픔의 미학으로 승화되어 세상을 작게나마 관조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많은 시간을 감내해서 얻어진 산물이었다. 이는 수필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선물이자 관념이었다. 아프고 아린 것들이 정화되어 비련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세월이 소요된다. 그 꽃망울 속에는 여전히 아픈 씨앗이 존재한다. 그러나 세월은 상처받은 씨앗을 꽃잎으로 감싸주고 보듬어주는 인후한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수몰된 구예안이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억의 유산은 복잡하다. 선인들의 얼과 문화가 고스란히 퇴적되어 있는 고색창연하고 아늑했던 예안향교와 선성현객사, 송곡고택, 용암정(영락정), 석빙고 그리고 예안국민학교 교사 등은 선성인들이라면 꿈속에서 조차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유산이었다. 장방형의 길다란 휘장으로 둘러싼 듯한 천방둑 안에 소복이 모여 있는 가옥들의 형상은 하늘에서 보면 흡사 거대한 정원 속에 탐스럽게 얼굴을 드러낸 연화처럼 보였다. 고즈넉한 고풍의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마치 연꽃 봉오리처럼 몽실몽실 솟아나 있었다. 연꽃 군락들 밖에는 연못 같은 낙동강이 빙 둘러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장터에는 세월을 얼기설기 살아온 파란의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렸고 널부러져 있는 각양의 만물들은 지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과 뒤엉켜서 마치 장날에 운명을 같이하는 듯 보였다. 예끼마을 선성수상길에 강물이 빠져 나가면 반세기 동안 잠자고 있던 전설의 유산들이 일순간 폼페이의 유적처럼 살아나서 슬금슬금 기어나올 것만 같다.
시끌벅적했던 장마당은 "메일꽃 필 무렵"의 허생원과 조선달이 누비던 봉평 장터와 흡사했다. 더운 햇발 아래 벌려 놓은 끈적한 좌판 속에 온갖 잡동사니들이 장꾼들의 시선을 흥미롭게 홀기는 그런 열탕이었다. 와룡 오룡 감애 월곡 나소 녹전 구룡 도촌 미질 부포 천전 삼계 정산 신남 인계 도산골 봉화 등 사통팔달 곳처에서 무수한 장사꾼들과 장꾼들이 몰려들었다. 장날이 되면 장터는 분가한 형제자매들이 부모와 친지들을 기약없이도 기별없이도 상봉할 수 있는 도탑고도 애틋한 만남의 광장이 되었다. 예안으로 향하는 한길과 신작로는 장꾼들과 장사꾼들로 빼곡히 메워졌다. 이고 지고 들고 앞세우고 오고 가는 장꾼들의 길다란 행렬은 휘영청한 여름달이 보광사 앞산에서 떠올라 영락정 위에서 빛을 잃을 때야 끝이 났다. 번화가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는 향촌민들에게 예안은 도회지의 흉내를 야릇하게 풍기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적지 않는 사람들이 할 일 없이 거름을 지고 장에 따라가는 맥장꾼들도 있었다.
삼재가 없는 살기 좋은 편안한 땅 예안이 고구려 장수왕의 남정 때 매곡현(買谷縣)이라는 명칭으로 역사와 지도에 얼굴을 내밀며 고려 태조(선성宣城
및 예안禮安 지명 출현 : 예안은 "살기 좋은 편안하고 기름진 땅"을 뜻함) 이래 장대한 세월 동안 숱한 전설과 유산을 축적해왔지만 강물 속으로 온 터전을 망실하는 데는 찰나에 불과했다. 신령스러운 조물주가 만든 편안하고 기름지고 신성한 땅에 선성인들이 쌓아 온 유구한 명가의 문화가 격랑의 현대사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반도 지도에서 사라지며 낙강洛江 속에 묻힌 것은 두고두고 애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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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사진 종합 설명(caption)
수몰된 구예안이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억의 유산은 복잡하다. 세월을 얼기설기 살아온 파란의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렸고 장터에 널부러져 있는 각양의 만물들은 지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과 뒤엉켜서 마치 장날에 운명을 같이하는 듯 보였다.
시끌벅적하던 장마당은 "메일꽃 필 무렵"의 허생원과 조선달이 누비던 봉평 장터와 흡사했다. 더운 햇발 아래 벌려 놓은 끈적한 좌판 속에 온갖 잡동사니들이 장꾼들의 시선을 흥미롭게 홀기는 그런 열탕이었다. 와룡 오룡 감애 월곡 나소 녹전 부포 도산골 등 사통팔달 곳처에서 무수한 장사꾼과 장꾼들이 몰려들었다.
장날이 되면 장터는 분가한 형제자매들이 부모와 친지들을 기약없이도 기별없이도 상봉할 수 있는 도탑고도 애틋한 만남의 광장이 되었다. 번화가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는 향촌민들에게 도회지의 흉내를 야릇하게 풍기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적지 않는 사람들이 할 일 없이 거름을 지고 장에 따라가는 맥장꾼들도 있었다. 삼재가 없는 살기 좋은 편안한 땅 예안은 고려 태조 이래 장구한 세월 동안 숱한 전설과 유산을 퇴적해왔다.
[사진 출처 :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 "한국 근현대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1960~1970년대 생활사 광경이다. 옛날 수몰 전 구예안 장터와 동네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판박이 같다. 진한 그리움을 불러내는 정겹고도 애틋한 전경이다(2024.6.22). 필자가 촬영]
■ 아래 사진 종합 설명(caption)
아래 첫 번째 사진은 수몰 전 예안 장터 실제 전경이다. 천방둑을 따라 안쪽으로 길다랗게 형성돼 있는 우시장과 장터, 두꺼비상회, 술도가, 정류소, 옹기전 등이 보인다. 사진 오른편 아래 예안중학교 교사도 일부 눈에 들어온다. 사진 중앙 저 멀리 산 아래로 낙동강 강변을 따라 청고개(청현)와 부포로 가는 길이 선명하게 보인다. 낙동강 위에는 희미하지만 천전가는 섶다리도 걸쳐져 있다. 정겹고도 그리운 옛길이다.
아래 두 번째 사진은 동부동 새촌마을 전경이다. 선성산 오른편 둑방너머에도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만촌다리를 건너 올라가면 만촌마을이 나온다. 만촌은 동부동에서 가장 큰 동네이다. 사진에서 일부 보이는 새촌마을(새터ㆍ신기ㆍ통시모래)은 골내 남쪽 지역에 1890년경 새로이 조성한 동네이다. 새천나들녘 주변에는 동네 가운데로 조그마한 개천이 흘렀다. 만촌을 지나서 완만한 언덕길을 계속 올라가면 현재 수몰되지 않은 지역에 건립한 산림과학박물관 앞길과 만나는 지점이 나왔다. 지금도 이곳에 옛길을 더듬을 수 있는 교차로가 있다. 이 고갯길을 송티재라고 불렀다. 송티재 잿마루에서 우측으로 낙동강까지 내려가면 농암 선생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서 살았던 필자의 고향인 분강촌(분천동)이 자리하고 있었다(송티재를 넘어 직진하면 도산서원 입구에 이은 마당재가 또 나오고 이 고개를 넘으면 온혜이다). 현재 송티 고갯마루에는 옛날 분강촌 수몰 후 이곳으로 이사해 온 일부 가구가 살고 있다. 그리고 도산서원 입구 아래에 있는 넘티 마을에도 수몰 후 이전해 온 세 가구가 있다. 송티, 넘티 두 곳 마을의 행정 지명은 모두 분천동이다.
옛날 퇴계 선생이 온혜에서 마당재를 넘어 분강촌에 있는 농암 선생 종택에 종종 들러서 학문과 문학을 담론하고 둘이서 헤어지던 장소가 이곳 넘티재였다. 도산서원 입구에서 안으로 100여 미터 들어가면 오른편 산모롱이에 농암 선생의 "농암가" 시비가 있다.
두 번째 사진에서 보이는 지역은 행정상으로 볼 때 선성산 오른쪽에 위치한 동부동 새촌마을에 속한다. 아래 두 개의 사진 모두 1975년경 이태원 선생이 촬영했다. 두 번째 사진은 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출품하여 소장돼 있다.
1976년 6~7월경부터 수일 동안 이어진 장맛비로 안동댐에 적수된 강물이 급속히 불어나면서 상류 지대를 빠르게 침수시켜 나갔다. 필자의 고향인 분강촌(분천동, 부내) 동네와 지근거리에 있는 예안은 8월15일 오후 4시경에 천방둑이 터지면서 온 동네가 삽시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물을 보며 넋이 나간 사람... 알지못할 고함을 지르는 사람... 쌍욕을 내뱉는 사람... 물속에 잠기는 남편의 묘를 보며 울부짓는 아낙네... 대대손손 살아온 터전에서 갈 곳이 없어 차일피일 하다가 간신히 요긴한 것만 갖고 산비탈로 줄달음쳐서 선성산으로 기어 올라가는 사람...
산더미만한 엄청난 흙탕물이 천방둑을 넘나들며 선성(예안) 마을을 마구 집어삼키는 수악한 모양새가 마치 우람한 아구를 딱 벌린 채 모든 것을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는 공포스러운 괴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야말로 거대한 아나콘다 떼들이 이골 저골에서 우글거리며 빠르게 기어올라오는 바로 그런 형상이었다. 순식간에 읍내를 통째로 침몰시키며 예안 땅을 역사 속에서 완전히 지워나가고 있었다.
아! 선성현의 전설이여~ 그리운 구예안~
■ 사진 종합 설명(caption)
사진1는 수몰 전 1970년대 초반 권상길 선생이 보광사 앞산에서 구예안 전체(서부리 예안 장터 및 동네 모습)를 담은 전경이다. 사진 속 왼편 상단 하얀 점 지대가 현재 신예안(예끼마을 : 예술에 끼가 있는 마을)이 들어선 자리이다. 그리고 왼편 상단에 있는 예안중학교(하늘색 지붕 건물) 뒷편 산 아래 지역이 이구섬 마을이다. 지금의 예끼마을 산 아래에서부터 선성산 앞에 있는 예안국민학교의 옛터를 지나 새터교(다리)를 건너 골짜기 밑에 까지 부교인 선성수상길이 놓여져 있다. 하얀 점 우측 두 번째 산(선성산) 아래 큰 건물이 예안국민학교 전경이다. 그림1은 사진1의 건물들을 자세히 표시해 놓은 모습이다. 사진과 그림의 출처는 예끼마을(신예안) 오른편에 있는 선성산 바로 앞 선성수상길 중간 지점에 설치한 옛날 예안국민학교의 위치 표시판에 부착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왼편 상단에 수몰 후 조성한 한국국학진흥원과 예끼마을도 함께 존재 한다. 그림 속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사진2는 신규원 선생이 수몰 전 1970년대 중반 보광사 앞산에서 구예안 서부동 마을을 바라보며 촬영한 전경이다. 사진 오른편 동부동에 있는 새터교에서부터 구예안이 끝나는 서부동의 이구섬까지를 가로지르는 중앙통 길이 시원하게 뚫려져 있다. 수몰 한 해 전인 1975년경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예안국민학교와 예안중학교는 이미 이전한 탓에 공터만 남아 있다. 사진1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떠나가는 집"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동부동 지역에 가로로 길게 나 있는 천방둑너머와 새터교 아래 개울가에 운집해 있던 집들도 보이지 않고 밭으로 변해 있다.
사진3은 1970년대 선양리에서 촬영한 구예안 전경이다(출처 및 사진 작가 미상). 사진 중앙 저 멀리 구예안과 오른편 산 아래로 부포와 청고개로 가는 길이 아련히 눈에 잡힌다. 사진 왼편 중앙 지점에 있는 선양다리(시역다리)를 건너면 이구섬 마을이 나온다. 선양다리 아래로는 엿그랑물이 흘렀다. 이구섬은 구예안 서부동의 노송골 남서쪽에 있었다. 사진 속 이구섬의 초가집들 뒷편에는 저수지가 자리했었다. 다리 오른쪽으로 보이는 안동 방향 도로로 조금만 나가면 지금의 포장 도로와 만나는 시역 부근이 나온다. 사진4가 지금의 그 주변 사진이다. 사진4는 옛날 안동에서 예안 동네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위에서 언급한 시역이라는 곳이다. 안동에서 신예안으로 가다가 보면 신예안 5백여 미터 못 미쳐서 큰다리가 놓여 있고 그곳에서 안동 방향으로 2백여 미터 나오면 산 아래 보트 선착장이 보인다. 이곳에서 다시 안동쪽으로 2~3백여 미터 나오면 옛날 구예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사진4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수몰과 비수몰이 경계를 이루는 넓은 늪과 같은 물섶 지역이다. 수몰 전 구예안 당시 읍내를 관통하는 서부동 중앙로와 이구섬을 지나 계속해서 나가면 지금의 아스팔트 도로와 만나는 접경 부근이라고 보면 된다. 지금 이 지역에서 수몰된 구예안 방향으로 3백여 미터 지점, 오른쪽 강물 위에 있는 작은 산이 옛날 영락정이 있던 위치였다. 요즘도 이곳에서 영락정이 자리했던 그 산이 강물 위에 솟아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사진5는 예안중학교 왼편 낙동강 건너 강가 바위 위에 있던 영락정 전경이다. 1913년 신태봉 선생이 창건한 영락정은 예안면 선양리 낙동강 강가 암석 위에 있었다. 네 귀에 추녀를 달고 기와로 지붕을 인 팔작와가이다.1940년 신응인 선생이 인수하여 용암정이라 개칭했다. 사진은 1975년경 이태원 선생이 낙동강 강변에서 촬영한 전경이다. 수몰 한 해 전인 1975년 신예안 서부리로 이건했다. 현재 예끼마을(신예안) "선성현 문화단지" 뒷산에 있는 송원정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위로 올라가면 영락정(용암정)이 있다. 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출품한 사진이다(출처: 경북기록문화연구원). 사진6은 신예안 전체 전경이다. 출처는 안동뉴스(기사제목 : 안동 유교문화관광의 메카 서부단지 : 2018.3.26) 기사 속에 있는 사진이다. 사진7은 현재 신예안 동네를 가까이서 조명한 전경이다. 출처는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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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사진과 그림과 캡션은 제외)은 분강도(1992)를 그린 종친 화가 이택(李澤) 선생[79ㆍ전 교육자ㆍ장학관 및 경주 화랑교육원 원장ㆍ농암종택 15대 종손 이용구 선생의 조카, 예안국민학교 근무(초임 : 1969.3.1~1970.4.24)]이 구예안(선성宣城 : 예안禮安의 옛 지명)이 수몰될 당시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본 목격담에 관한 처연한 글이다. 이택 선생은 1970년대 초반 예안국민학교에서 초임으로 봉직한 바 있으며 필자와는 족친간이다. 필자는 농암 선생의 16대 손이다. 이택 선생이 필자에게 보내온 글을 대폭 축약시켜 최근 맞춤법과 문맥에 맞게 수정하여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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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년 전 우리 고향인 분강촌과 예안이 수몰되던 현장이 꿈결처럼 어슴푸레하게 떠오른다. 1976년은 역사적인 안동댐이 완성되던 해였다. 그 해 8월15일 예안과 도산은 오후 4시경부터 차례로 수몰이 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맞았다.
수몰 날을 기준으로 3개월 전부터 늦장마 비가 계속해서 오랫동안 내린 탓에 국토관리부가 예상했던 수몰 시기가 몇 년이나 앞당겨졌다. 예안면이 수몰되던 날은 공교롭게도 대구의 집에저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공일날이었다.
1976년 8월15일 일요일 새벽, 고향에 사는 어느 일가의 급보를 받고 나는 부랴부랴 안동 예안으로 향했다. 이날 "예안이 수몰된다"는 청천병력 같은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워낙 긴박한 소식이라 예안으로 가는 버스를 이리저리 무조건 갈아타고 예안으로 향했다. 안동에서 예안행 버스를 타고 가는 오전 10시경에 도로에는 이미 수많은 빈 트럭들이 줄을 지어 예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시급히 이삿짐을 운반하기 위해 동원된 트럭 행렬이었다. 당시는 안동에서 예안면까지가 시내버스가 아닌 시외버스 노선이었다.
수자원개발공사와 낙동강 댐공사 현장 관계자들은 오랫동안 내리고 있는 장맛비를 예측하여 아직 이주하지 않은 주민들에게 10여 일 전부터 속히 집을 비우고 이주할 것을 종용했으나 일부 주민들은 “물이 차려면 3년은 되어야 한다는데 이게 말이 되느냐? 정말 강물이 들어올까?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며 대대손손 내려온 가구를 고집스럽게 그대로 지키며 버티는 집이 수십 채나 되었다.
당시 구예안은 안동와 대구 등 외지에 사는 건축업자들이 고가를 사서 다른 곳에 옮겨 짓거나 혹은 목재로 쓰기 위해 여러 채의 기와집을 매입한 상태여서 여기저기 빈 건물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예안으로 가는 버스는 장사진을 이룬 상태로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이리저리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한여름 더운 습기로 가득찬 버스 안에서도 여러 말들이 무성하게 오갔다. 숫제 "수몰이 된다 혹은 안된다"라며 옥신각신 계속해서 말을 주고 받으며 수몰 이야기로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벌써 3년 전에 모든 보상이 끝이 나서 대부분의 주민들이 떠나갔지만 형편이 어렵거나 보상이 적은 사람들은 물이 들 때까지 버티겠다며 그때까지도 여전히 농사를 짓고 있었다. 시외버스 안에서 이런저런 수몰에 관한 얘기들을 들으며 새롭게 이전한 신예안 서부동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정오가 다 된 시각이었다. 아침부터 오던 비는 한층 더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수자원공사는 아직까지도 구예안에 남아 있던 일부 사람들을 위해 임시 대피소를 급히 마련해 놓았다. 지대가 높은 선성산 곳곳에는 이미 텐트가 수없이 쳐져 있어 전쟁을 치르고 있는 피난민촌을 방불케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안동댐 공사기관과 국토관리청에서 지대가 높은 구예안 뒷산인 선성산 전면 일부와 얕은 산등성이를 깎아서 마련한 소규모의 부지에 새로운 면 소재지를 이미 건설해 두어서 급한 불은 그나마 끈 상태였다. 사람들은 이곳을 이른바 "신예안"이라고 불렀다. 신예안에는 옮겨온 행정 사무소들과 초ㆍ중학교, 우체국, 약국 등과 일부 주민들의 주택 및 상가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때만 해도 이미 신예안이라고 부른지가 3년이나 되었다. 나도 더러 고향인 분강촌을 갈 때면 이곳을 거쳐 지나갔다. 하지만 선성현문화단지에 옛 한옥 건물과 출입문을 옮겨 놓기는 했지만 3년이란 세월이 지났어도 생소한 소재지에다가 구색이 맞지 않는 어색한 분위기만 풍길 뿐 향촌민을 포근히 감싸주던 그 옛날 고색창연하고도 고즈넉한 풍경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어 큰 슬픔과 허망함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그냥 보존을 위해 급조해서 옮겨 놓은 단순한 건물의 집결지로만 다가와서 서먹함과 함께 밀려오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긴 장마로 강물이 엄청나게 불어난 탓에 낙동강을 끼고 있는 임하 월곡 예안 그리고 도산면 일부가 3년을 앞당겨 수몰된다는 믿을 수 없는 기막힌 예고 방송이 결국 이때에 터져 나오고 말았다. 아침 지방 방송에서도 오랜 장마로 인해 안동댐 수위가 급격히
상승하여 상류 지역까지 수몰이 불가피하다는 예고 방송이 연신 흘러 나왔다. 6백여 년 동안 대대손손 세거지를 이루어왔던 결코 변할 수 없는 불변의 현상들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시간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그날이 광복절 휴일이라 예안이 강물 속으로 묻힌다고 하니 외지로 떠났던 옛 주민들이 수없이 몰려와서 선성산 일대와 신예안 주변은 큰 혼잡을 이루었다.
수몰을 목전에 두고 아직 퇴거가 안 된 사람들의 세간살이를 우선 들어내어 이삿짐을 높은 지대에 임시로 마련한 천막까지 실어 날라야 하는 것이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여러 대의 트럭은 물론 많은 면민과 면사무소 및 수자원개발공사 직원들과 그리고 경찰관들이 투입되어 그야말로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이 급하다 보니 세간들을 이것저것 되는대로 다그치듯이 산 위로 마구 옮겼다. 예안에서 선성산만 넘어 오 리 정도만 가면 도산서원 아래 동네인 고향마을인 분강촌(분천동, 부내)이 있었다. 물길로는 이십 리 거리였다. 다행히 분강촌 사람들은 이미 외지로 이사를 갔거나 혹은 산너머로 이주를 안 한 집이 없어서 수몰이 당장 된다고 해도 그곳 걱정은 일단 덜 되는 상황이었다.
옛날 예안현에 속한 도산면 입구 동네인 고향 분강촌은 농암 이현보의 고조부인 고려말엽 군기시소윤을 지낸 이헌 공이 입향시조가 되는 마을로 6백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농암 선생의 후손들이 살아온 세거지였다. 당시 60여 호가 넘는 주민들은 대부분 영천이씨들로 구성된 집성촌이었다. 큰집인 농암 종가는 이미 1여 년 전에 종택과 여러 정자들을 모두 철거한 상태였다. 종가는 일부만 단촐하게 안동시 옥정동에 축소하여 옮겨 놓았으며 나머지 문화재급 건물인 사당과 신도비각, 긍구당, 애일당 등은 이미 분강촌을 떠나 애일당은 고시빠로 옮겼고 나머지는 운곡 등 이곳저곳으로 산재시켜서 이건해 놓은 상태였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그렇게나마 이전해 놓은 것은 불행 중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일가들이 살던 분강촌은 이미 보상이 마무리 되어서 주민들이 모두 떠난 폐허 상태로 있었다. 여러 이유로 동네를 떠나지 못한 일부 일가만 분천동 뒷산너머 지대가 높은 곳인 송티와 넘티로 이전하여 작은 마을을 만들어서 농사를 지으며 옛 터전을 이어가는 상황이었다.
1976년 광복절날 아침에 구예안이 갑자기 수몰된다는 급보에 신예안이 생긴 이후 최대의 인파가 몰려왔다. 초조하고도 분망하게 기다리는 동안 점점 강물이 불어나서 지금의 월곡을 지나 예안으로 물길이 잡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왔다. 사람들이 앞다퉈 신예안 뒷편에 있는 선성산 높은 곳으로 일제히 모여들었다. 이삿짐을 옮기는 일도 경찰의 통제하에 모두 중단되었다. 살림을 죄다 올려놓지 못한 가구도 여전히 여러 집이 있었지만 경찰이 안전상 더 이상은 접근을 못하게 하니 이곳저곳에서 옥신각신 마찰이 일어나며 마구 승강이질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산 위에서 바라보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지고 긴장이 하늘을 찔러 쓰러질듯 초조한 순간인데 수몰을 당하는 주민들의 허망함과 참담함과 황망함은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온갖 갖은 상념이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가운데 점점 시간이 흘러갔다.
"곧 닥쳐 올 강물은 과연 어떤 몰골로 이곳을 집어삼킬 것인가! 어디서부터 어떤 형상으로 강물이 차오를 것인가!" 숫제 엄청나게 밀려오는 공포로 인해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때만 해도 세상 경험이 짧은 나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수몰의 현장인지라 "어떻게 물이 들어와서 어떤 모습으로 수많은 건물을 덮칠 것인가"에 대한 오만상 상상이 발동되는가 하면 또한 "저 넓은 들판은 어떻게 강물에 잠겨질 것인가?" 등등 그야말로 궁금하기 짝이 없기도 했다.
옛날 구예안은 알다시피 수해를 막아주는 방천둑이 읍내를 둘러싸며 강변 쪽으로 길게 나 있었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쌓은 천방이었다. 트럭이 다닐 만큼 철옹성 같이 넓고 튼튼해서 어떤 수해에도 꿈쩍 않고 수백 년 동안 예안을 거뜬히 지켜온 방패막이었다. 수몰 전 예안 인근의 낙동강은 그 깊이가 평상시에는 불과 발목이나 무릎을 가릴 정도여서 아랫도리를 걷고 물건을 머리 위로 올려 그냥 건너다니기도 했던 얕은 강물이었다. 그래서 섶다리를 놓아 강 건너 섬촌 주민들이 마음대로 넘나들었던 만만한 강이기도 했다. 내가 예안국민학교에 근무했던 당시에도 비가 많이 오는 우기에는 학생들의 등하굣길을 젊은 교사들이 윤번제로 섶다리를 지켰던 기억이 생생하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얕은 강물에 그렇게 대충 놓은 섶다리인지라 비가 많이 와서 큰물이 나면 떠내려가기가 일쑤여서 장마가 끝나면 새롭게 만들어 세우곤 했다.
초조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오후 4시경 무렵, 강물이 예안 동네 천방둑너머까지 왔다는 소식이 급히 전해졌다. 그때까지도 이주가 덜 된 집으로 황급히 보내는 핸드 마이크 소리가 요란하게 반복되었다. 긴급 방송과 급박한 사이렌 소리가 합쳐져 들리는 가운데 물길이 천방둑까지 오고 있다는 마이크 소리가 곧이어 다시 들려왔다. 일순 모든 사람들의 눈길은 둑방을 향했고 이윽고 모두가 깊은 침묵에 빠졌다. 몇백 년 동안 얕은 물이 감질나게 흐르던 낙동강 강변을 휘둘러서 저 멀리로부터 강물이 마구 차오르고 있는 것이 아스라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돌차간에 거친 몸짓을 하고 쳐들어오는 강물의 모양새는 마치 천방둑을 향하여 거대한 아나콘다 떼들이 사막을 가로질러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올라오는 바로 그런 형상이었다. 무시무시했다.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차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산덩이 같은 괴물이 서서히 이동하여 제방 쪽으로 다가와서는 바위에 부딪히는 듯 철썩하더니 그 큰 대가리통으로 힘껏 방축을 들이받는 것이었다. 순간 "쏴아~"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물줄기가 하늘 높이 치솟으며 물보라를 일으키는 가운데
한동안 몸뚱아리가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이윽고 다시 또 더 크고 더 많은 물줄기를 모아서 가까이 올수록 몇 배나 커진 거대하고도 사나운 아나콘다 형상으로 무섭게 돌진해오는 속도와 몸짓에 모든 사람들이 일순간 엄청난 공포에 휩싸이며 경악했다.
이렇게 다시 한 번 제방둑을 강타하며 "쏴아~" 하는 큰 소리를 내면서 동시에 물굽이가 하늘로 높이 치솟는가 싶더니 바로 이어 또 한 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세 번째 공격을 여지없이 가해오기 시작했다. 해마다 맞이한 태풍과 장마에도 끄떡없이 견뎌냈던 그토록 두텁고 단단했던 천방둑도 결국에는 더 버티지 못한 채 힘없이 나가떨어지자 이때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거대한 아나콘다 떼들이 거침없이 구예안 안으로 마구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넓고도 많았던 구예안 골목골목 구석구석을 대형의 아나콘다 떼들이 수많은 새끼 아나콘다 떼들을 거느리고 이 골목 저 골목을 파고들고 누비며 삽시간에 장악하는 모양새가 계속해서 이어지더니 이내 그 넓디넓은 구예안 동네가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한 가운데 활개를 치던 수많은 아나콘다 어미들과 새끼들이 시커먼 강물 속으로 일순간에 사라지는 공포스러운 형국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구예안의 허약하고도 낮은 지대부터 잠식한 먹이 사냥이 불과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모든 구예안 마을 전체를 전광석화처럼 무지막지하게 삼켜버리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서 그것도 찰라에 일어난 것이다.
강물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미처 철거하지 못한 수십 채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한순간에 지붕만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높아진 수량을 감당하지 못해
이리저리 마구 비틀되더니 결국 "휙! 휙! 휙!~" 하는 단말마 같은 마지막 비명을 지르며 거대한 아나콘다들의 입 속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유구한 세월 동안 전설을 만들며 읍내 곳곳에 남아 있던 유서 깊은 나무들도 무지막지하게 뽑혀 흙탕물 속으로 휩쓸려 사라지는 참혹한 광경이 벌어졌다. 황토빛 물결처럼 생긴 날름거리는 사악한 혓바닥으로 수백 년 동안 읍내를 호젓하게 도배했던 온갖 나무들을 일순간 예주륵 집어삼키는 무서운 모습들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말문이 막혔던 사람들도 마침내 비명을 지르며 탄식과 한숨이 섞인 신음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상한 발광에 가까운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울분인지 저주인지 그리고 누구에게 퍼붓는 것인지도 모를 쌍욕을 하며 고함을 지르는 갖가지 기괴한 행동들이 동시다발로 표출되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하늘도 무심해라~ 우리는 이제 어찌 하노~ 이를 어쩔꼬!" 하며 비탄에 찬 울부짓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좌중은 말그대로 원망과 눈물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연세 높은 어른들은 “아이고~ 아이고~ 어매요~ 아배요~”를 연신 부르며 실성한 듯 땅을 치며 통곡했다. 조금 전만 해도 두 눈으로 보았던 대대손손 살아왔던 고향 터전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현실 앞에 망연자실한 사람들은 절망에 이어 이번에는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이 크게 울기 시작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눈물바다가 된 가운데 그동안 울음을 참고 있던 한 여인이 끝내 대성통곡을 하자 여기저기서 더욱 큰 흐느낌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구예안은 이렇듯 마지막이고도 영원한 작별을 고하 듯 서너번 얼굴을 다시 강물 밖으로 슬프게 조금 내 밀더니 이내 출렁이는 물결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1976년 준공된 안동댐은 지역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식수난 및 농-공업용수 해결, 댐 주변지역 환경정비 그리고 물을 매개로 하는 레저 및 관광산업 등 물산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하지만 댐 건설과 함께 나타난 자연환경의 변화, 적지 않는 문화재 손실, 급조되어 제 역할을 온전히 못하는 빈약한 동네의 출현과 수많은 실향민들의 눈물겨운 사연은 쏜살같이 흘러간 세월의 무상함 속에 죄다 묻혀졌다. 퇴계 선생의 흔적과 발자취가 깊게 남아 있는 아름다운 도산9곡도 최상류 9곡인 청량곡과 8곡인 가송리 고산정, 7곡인 단사곡 그리고 6곡인 천사곡의 일부만 남겨둔 채 모두 낙강 속으로 사라졌다. 안동댐 건설로 안동시 일부와 안동군 와룡면, 예안면, 도산면, 임동면 일대 54개 자연부락의 2만여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실향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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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사진 종합 설명(caption)
안동 다목적댐은 1976년 10월 28일 준공식을 가졌다. 착공한 지 5년 6개월만에 완공시킨 대역사(1971.4~1976.11)였다. 안동댐 건설로 안동시 일부와 안동군 와룡면, 예안면, 도산면, 임동면 일대 54개 자연부락의 2만여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실향민이 되었다. 안동댐은 지역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식수난 및 농-공업용수 해결, 댐 주변지역 환경정비 그리고 물을 매개로 하는 레저 및 관광산업 등 물산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하지만 댐 건설과 함께 나타난 자연환경의 변화, 적지 않는 문화재 손실, 급조되어 제 역할을 온전히 못하는 빈약한 동네의 출현과 수많은 실향민들의 눈물겨운 사연은 강물처럼 흘러간 세월의 무상함 속에 죄다 묻혀졌다.
첫 번째 및 두 번째 사진은 안동댐 준공식 장소로 이동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이 탄 승용차 행렬이다. 도로 옆으로 환영 인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다. 사진 속에 차량 행렬과 사람들이 있는 장소는 현재 안동댐 아래 다리 건너기 전 식당가와 넓은 주차장이 있는 곳이다. 첫 번째 사진 중앙 상단에 안동댐으로 가는 다리와 다리 위로 하얀 돌로 길다랗게 옆으로 쌓은 웅장한 댐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은 [대한뉴스 제 1106호 - 안동댐 준공식 : 1976.10.28] 동영상 속의 광경을 순간 캡쳐한 것이다.
세 번째 사진을 자세히 보면 표지판 위에 [이 지역은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구 입니다. 안동군수]라고 적은 글자가 있다. 가슴 아린 문구이다. 필자가 유년시절 살던 경북 안동군 도산면 분강촌(분천동) 마을 한복판에 안동댐 준공(1976)을 목전에 두고 안동군에서 세운 표시판이다. 사진은 1974년12월 당시 안동농업고등학교 2학년이던 분강촌 아랫마(아래마을)에 살던 재술이 아재(당시 18세ㆍ운호 할배 자제)가 일제 코니카 반자동 흑백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다. 필자가 쓰고 있는 "이종구교수 에세이" 속에 삽입하는 부내 사진의 대부분은 당시 재술이 아재가 찍어 놓은 것들이다. 상당수 사진을 재술이 아재가 족친인 필자에게 직접 보내주었다. 그리고 재술이 아재는 또한 이 사진들을 안동에 있는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출품을 해서 그곳에서도 보관을 하고 있다. 사진 속 사람들은 아재의 가족분들과 친척분들이다. 분천동 동사무소 앞이다. 수몰을 앞두고 산너머 예안에 가서 가족 및 친척분들과 함께 마지막 기념 사진을 찍기 위해 안동가는 아침 7시 첫 차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네 번째 사진은 안동댐 준공 바로 전 해인 1975년 봄에 정부 차원에서 분강촌(분천동, 부내) 수몰지역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단체 관광을 가서 촬영한 광경이다. 분강촌의 입향 시조는 지금으로부터 670여 년 전인 1350년경 고려말엽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낸 농암 선생의 고조부인 이헌(李軒) 공이다. 영천이씨 625년의 세거지인 분강촌이 현대사의 격랑을 극복하지 못한 채 하루 아침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진을 끝으로 분천동 사람들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수몰 전 부내 동네 사람들끼리 함께 한 마지막 나들이이자, 이별을 위한 기념 여행이었다. 이렇듯 단체 여행의 내막을 알고 보면 참으로 애잔한 사연을 담고 있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사진 속 전경은 속리산 법주사이다. 세월이 유수처럼 반백 년이 흘러 이제 사진 속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과 택호만 남긴 채 별이 되었다. 사진 속 제일 어렸던 누님(이분자)의 나이도 이제 일흔을 눈앞에 두고 있다.
첫 번째 그림은 수몰 전 1970년대 분강촌을 그린 풍경화이다. 필자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분강촌, 부내, 분천 등은 모두 같은 지명이다. 이는 농암 선생 시대에도 그대로 사용했던 전설적인 동네 이름이다. 세 개 명칭에서 나오는 "부" 또는 "분"은 "클 분" 자에서 유래된 말이다. 클 분의 훈은 크고 넓고 많고 성하다는 뜻이다. 즉, 강이 크고 넓고 물이 많고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네 앞을 흐르는 낙강을 이곳에서는 "분강"이라고 불렀다. 그림은 1992년 이택 선생이 수몰 전 1970년대의 분강촌 전경을 그린 "분강도"이다. 넘티 농암종택 긍구당肯構堂 분강서원 비각 애일당 농암바위 영지산 분강 일대를 그렸다. 오른쪽으로 5백여 미터 소나무 가로수 신작로를 따라 강둑길을 걸어서 올라가면 퇴계 선생의 도산서원과 강 건너 섬마에 있던 시사단이 나온다.
두 번째 그림은 분강촌을 실물처럼 옮겨 놓은 유산 김영환 선생의 "분천마을도(2014)"이다. 필자가
1970년대 도산국민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의 분강촌을 그대로 재현한 아름다운 산수화이다. 그림이지만 수몰 전 분강촌과 진배없는 매우 정밀하고도 사실적인 실물화이다. 왼편 상단에 분강 아래로 여울져서 부포로 흘러가는 구여울의 전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분강촌은 1976년 8월15일 오후 4시30분경부터 수몰되었다. 구예안이 오후 4시경에 수몰 된 후 바로 이어 진행됐다. 당시 예안과 분강촌의 거리는 신작로 길로는 불과 오 리 정도에 불과했지만 물길로는 족히 이십 리나 되었다. 하지만 수몰의 속도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다섯 번째 사진은 두 번째 그림인 분강촌(분천마을도)이 강물 속에 잠겨 있는 최근의 모습을 촬영한 전경이다. 2023년10월21일, 옛날 분강촌에 살았던 족친 승철이 할배가 촬영해서 보내준 사진이다. 사진을 촬영한 위치는 아랫마(아랫마을)에서 고시빠로 올라가는 첫 모퉁이를 도는 지점이다. 안동댐을 막아놓아서인지 최대 수위로 만수된 광경이다.
여기서 1976년 8월 15일 오후 5시경, 분강촌이 수몰되는 장면을 목격한 이택 선생의 당시 심경을 그대로 옮겨 본다.
"예안의 수몰 현장을 보고는 큰집인 종가집 생각이 나서 분강촌으로 종종걸음 쳐서 내달렸지~ 송티재를 넘어서 고시빠를 지나 이전한 애일당 앞으로 내려가서 보니 이미 물이 가득하게 차 오르고 있었어~ 천방둑너머에 있던 감퇴바위와 분천바위도 잘 안 보였고~ 그래서 고시빠를 돌아서 넘티재로 올라와서 곤재에서 다시 동네를 내려보았더니 이미 망망대해야... 시간으로 보았을 때는 오후 5시경 정도였던 것 같은데... 예안이 오후 4시경에 수몰되고 그동안 이동하는 시간도 있고... 그렇다면 부내가 수몰된 시간은 대충 오후 4시30분경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네~ 그때 그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리~ 630여 년 동안 농암 선생의 후손들이 터전을 일궈 살아왔던 영천이씨들의 세거지가 한순간에 흔적없이 사라지는 모습에 기가 막히고 앞이 깜깜해졌어~ 오랜 장마 때문에 수몰시기가 앞당겨지는 바람에 갑자기 침수된거야~ 거대한 흙탕물 바다~ 내 눈에는 피눈물 바다로 보였어~"
우리 가문의 세거지인 도산골 분강촌은 6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동네로 조선 중기 학자인 권시중의 선성지에 의하면 “조물주가 특별히 만들어 놓은 땅이며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별천지”라고 했고 조선 후기 택리지 저자인 이중환도 "우리나라 최적의 가거지지(可居之地 : 살기에 아주 좋은 땅)로 두 곳을 거론했는데 바로 그곳이 도산과 하회"라고 적은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옛날 분강촌도 안동댐 강물 속으로 사라진지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다. 농암종택은 2천년대 초에 농암 선생 유적 복원사업으로 현재 도산8곡 지역인 가송리 고산정 아래 강변에 이건해서 재현시켜 놓기는 했지만 옛 분강촌 풍경이 갖고 있는 유려한 아름다움의 깊이와 정취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안동댐 수몰로 농암 선생의 후손들이 6백여 년 동안 살아왔던 유서 깊은 고향 분강촌을 떠나오던 날, 대종손인 용헌처사(농암종택 15대 종손 이용구 선생)께서 조상에게 고유제를 올리며 통곡할 때 모든 일가 친척이 함께 통곡하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마지막 발길을 돌리며 애석해 했던 당시의 광경이 슬프게 아련히 떠오른다.
댐이 준공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부 마을에 대한 단편적인 자료와 학술연구차원의 보고서 그리고 마을지가 발간된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수몰지의 흔적과 수몰민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낸 자료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현재 수몰 마을의 1세대들은 대부분 사망했거나 남아있는 사람들도 고령화로 인해 그들의 기억과 삶의 이야기들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수몰 당시 그곳에 살았던 이들을 대상으로 옛날 향촌문화를 채록하고 사진 등 기록 자료들을 수집하는 일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댐 건설로 인해 사라진 마을과 주민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것이야말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질 안동인의 스토리를 완성해나가는 작업이 될 것”이며 더하여 “수몰되기 전에 행해졌던 풋구 먹고, 지신 밟고, 동제 지내고, 화전 놀이하던 풍속들과 그리고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부모님을 떠나보내던 수몰민들의 애환을 담은 지역 향토사를 기록하는 것만큼 소중한 자산은 없다"고 하며 안동댐 수몰 마을의 대백과를 발행한 경북기록문화연구원 원장의 발언이 실로 가슴을 깊이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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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예안 서부동 자연마을인 노송골 남서쪽에 있던 이구섬(일명 이기섬·이기도吏起島)에 살다가 수몰 한 달 전인 1976년 7월 초순경에 신예안인 예끼마을로 겨우 이사한 진수선(秦壽先) 선생(61ㆍ예안국민학교 65회 졸업ㆍ수몰 당시 13세)이 전하는 수몰 당시의 처연한 목격담이 심금을 울린다. 맑디맑은 동심의 나이 때 상처받은 어린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
"장방형의 장막을 휘돌아 쳐 놓은 것 같은 길다란 천방둑 안쪽 선성산 바로 앞에 예안국민학교가 있었지~ 학교 정문 앞 중앙로를 기준으로 왼편 서부동과 오른편에는 새촌 마을인 동부동이 아늑하게 자리한 가운데 영락정 맞은편 강 건너 둑방 아래에 있던 예안중학교에 이어 우시장과 곡물-야채-어물시장 그리고 두꺼비상회 술도가 정류소 옹기전 등이 나란히 자리했던 정겨운 장터의 모습이 어제처럼 눈에 선하다네~ 수몰을 목전에 두고도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미적거리자 수자원개발공사 관계자들이 몰려와서 어찌나 독촉하던지 겨우 신예안으로 허겁지겁 거처를 옮겨 갔던 급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 수몰 하루 전에 어머님(천후불 여사ㆍ82)이 다듬이돌을 못가져왔다고 하시길래 이튿날 이른 아침에 이구섬에 있는 초가집으로 갔더니 동네 어른들이 죄다 모여서 천방둑 터졌다며 마구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어~ 둑방 주변으로 옅게 깔린 물안개 속으로 시커무리한 강물이 밀물처럼 밀려오자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안타까운 비명과 탄성을 일제히 동시에 내질어댔어~ 넘실거리는 강물은 예안중학교의 앞뜰을 득달같이 지나 우리 초가집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며 곧바로 저수지를 한 입에 집어삼켜 버렸어~ 그때의 충격과 슬픔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당시 내 나이가 불과 국민학교 6학년밖에 되지 않았던 열세 살이었는데... 아득하고 꿈같았던 반세기 전의 일들이 육순을 앞둔 흐릿한 눈속으로 그리운 고향 산천과 어머님의 여위신 모습과 함께 떠오르니 실로 가슴이 아려오네~ 천방둑 넘어 낙동강 모래사장에서 친구들과 멱감고 물장구 치고 뛰어놀던 그 시절을 생각하니 지난 세월이 그저 일장춘몽 같이 무상해지네. 조상님들의 흔적과 부모님들의 땀과 우리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퇴적해 있던 이구섬 동네를 꿈속에서조차 어이 잊으리~ "
안동댐 건설에 대해 이제와서 득실을 따져보는 것은 다 부질없는 일이다. 하지만 수몰민들에게 복원될 수 없는 고향 산천과 한이 서린 뒤안길의 이야기는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아픔을 더하는 그리움의 깊이는 오히려 더욱 절절하게 두터워져가고만 있다. 이 세상의 실향민 가운데 애수와 향수를 달고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수구초심의 마음이 깊어져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어느 하루인들 고향 봄날에 온 동네에 만발하던 참꽃과 살구꽃과 복상꽃과 배꽃과 그리고 동구밖길에 눈송이처럼 하얗게 휘날리던 아카시아 꽃을 잊어본 적이 있으랴~ 오늘처럼 뜨거운 오뉴월이면 넓고 푸른 분강에서 멱을 감고 원두막에서 수박을 깨어 먹으며 거렁지 무성한 구당나무와 새당나무 아래에서 멍석과 돗자리를 펴고 계절을 만끽하던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일전에는 꿈속에서 어느 깊은 가을날 통소 아래 구여울가에서 섬마에서 서리해 온 땅콩을 구워먹던 추억과 또 어느 한겨울날 분강에 어름배를 둥둥 띄워 타고 강태공 놀이를 하며 고기를 잡던 기억들이 되살아나 깨어난 뒤에도 한동안 넋을 놓았었다♧.
■ 사진 설명(caption)
1960년대 예안 서부리 장터 전경이다(출처 및 사진 작가 미상). 오른편 중간에 길다란 하얀색 건물이 예안중학교 교사이다. 건물 오른쪽에는 정문이 있었고 정문 앞에는 선양동으로 가는 큰길이 있었다. 정문에는 문방구와 석유집(어름집)을 같이 하는 상점이 위치했다. 학교 좌측으로 길다란 둑방길이 보인다. 분천동과 부포를 빠져나온 낙동강은 다시 예안 동네와 영락정 앞을 지나 도산1곡 지대인 운암으로 나아갔다. 당시 예안 마을 천방둑너머로 흐르던 낙동강의 깊이에 따라 12단으로 나눈 소沼가 있었다.
동부동 만촌다리 아래 천방둑너머가 12단 소였고 예안중학교 좌측에 있는 둑방길이 우회전을 하는 천방둑너머가 1단 소였다. 4단 소가 가장 깊었다고 한다. 예안중학교의 좌측 둑방 안쪽 밑에는 위에서부터 소각장과 철봉대 그리고 소사 선생님이 기거하는 사택이 있었다. 중학교 둑방너머에 있던 1단 소도 꽤 깊어서 더러 익사 사고가 나기도 했다. 사진 속 우측 상단 둑방길이 우회전하는 안쪽에 편평한 지대가 보이는데 이곳이 앞들이다. 사진을 보면 둑방너머로 굽이지어 흘러가는 낙동강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강 건너 보이는 산 위에는 영락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 우측 상단에 예안중학교를 빙 둘러싼 천방둑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정면 중앙 둑방 안쪽 밑에는 우시장이 있었다. 사진 속에 사람들이 새까맣게 운집해 있는 곳이 우시장이다. 왼편으로 내려가면 곡물-야채-어물 등을 파는 시장(장터)과 두꺼비상회, 술도가, 옹기전 등이 차례대로 자리했다. 이 장터에서부터 우시장과 예안중학교 왼편을 안고 완만히 우회전하는 천방둑 사이(1단 소 지대)가 터지면서 불어난 강물이 미친듯이 몰려와서 구예안 동네를 순식간에 침몰시켰다. 이택 선생의 생생한 목격담을 다시 옮겨 본다.
"무지막지한 황토색 검붉은 강물은 예안중학교 주변의 둑방과 그 아랫 지대인 우시장과 장터와 두꺼비상회, 술도가, 옹기전 등의 바깥쪽을 막고 있던 철옹벽 같던 천방둑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며 예안 동네 전체를 송두리째 물바다로 만들었다. "쏴아~ 쿵~" 하는 공포의 소리를 연신 내지르며 선성인들을 경악시켰다. 천방둑이 터진지 불과 채 10여 분도 되지않아 예안 마을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천지는 다시 조용해졌다."
구예안은 이렇듯 마지막이고도 영원한 작별을 고하 듯 서너번 얼굴을 다시 강물 밖으로 슬프게 조금 내 밀더니 이내 출렁이는 물결 속으로 총총히 떠나갔다.
■ 사진 종합 설명(caption)
산너머에 있는 농암과 퇴계와 육사("청포도"의 시인, 독립운동가 이원록 선생, 도산국민학교 1회 졸업생)의 고장인 도산골과 함께 수많은 애국지사와 국가의 동량을 배출한 경북 북부지방의 명가 선성현. 유서 깊은 예안향교와 선성산의 정기를 물려받은 명문 공립 학당인 예안국민학교의 1970년대 전경이다.
이인화(李仁和) 선생이 1909년4월, 후진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을 위해 사재를 털어 사립 선명학교를 만든 후 1912년4월 공립으로 개편하면서 예안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 이후 1938년3월, 예안공립소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41년 일본의 국민학교 개편령으로 인해 일본과 한국이 모두 "국민학교" 명칭으로 통일하면서 예안공립국민학교로 개명했다. 수몰 전의 예안국민학교는 광복 후에 다시 개칭한 교명이다. 정부는 1996년3월1일부터 식민사관 청산차원에서 대한민국 방식인 "초등학교"를 사용하면서 예안초등학교가 되었다. 하지만 수몰과 이농현상으로 인해 취학 아동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1999년9월1일, 온혜초등학교 예안분교장으로 축소되었다가 2009년3월, 결국 폐교되었다. 만약 지금까지 존재했다면 올해로 개교 112주년이 된다. 예안국민학교는 97여 년 동안 경북 북부지역의 문명을 선도하고 창달하는 등불이었으며 예안향교의 얼과 문화가 면면히 흐르는 고매한 학당이었다(사진 출처: 신예안 선성수상길 중간 지점에 옛날 예안국민학교 위치 표시판에 설치해 둔 옛 사진들을 필자가 촬영했다).
■ 사진 종합 설명(caption)
(사진 출처: 필자가 촬영 2024.1.5)
사진1.2는 신예안(예끼마을) 선성수상길 중간 지점에서 선성산을 바라보며 촬영한 전경이다. 수몰 전 구예안에 있었던 예안국민학교의 바로 뒷산인 선성산의 현재 모습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부교의 데크 아래 학교가 있었다.
옛날 예안현의 동헌東軒 자리는 선성산宣城山 바로 앞에 있던 예안국민학교 위치였다. 동헌, 객사客舍, 향교鄕校는 지방 관아의 핵심 건물이다. 실제 수몰 전 예안국민학교 바로 우측에 "선성현 객사" 건물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선성산은 예안 마을의 전설로 통한다. 선성산과 동헌에 관한 내력을 요약해 보았다.
[선성산은 예안현의 진산(鎭山)으로 북산성(北山城)이라고도 불렀는데 높이 약 121m, 둘레 약 348m 되는 석성과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동헌 앞에 있는 소나무는 용의 뿔처럼 생겨 용각송(龍角松)이라 하는데 1592년(선조 25) 현감으로 온 김양수(金良遂)가 심었다고 한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 안동문화대전, 서부리)]
사진3은 예끼마을 끝에서 선성산을 바라보며 촬영한 전경이다. 저 멀리 보이는 선성산 뒤로는 수몰 전 새촌마을인 동부동 마을이 있었다. 사진4는 선성수상길 중간 지점, 옛날 예안국민학교 위치에서 수몰된 동부동과 동부동 강변에 있던 천방둑 방향을 바라보며 촬영한 전경이다. 사진5는 옛날 예안국민학교 위치에서 수몰된 서부동과 장터, 서부동 강변에 있던 천방둑 방향을 바라보며 촬영한 광경이다. 사진6은 옛날 예안국민학교 자리에서 신예안(예끼마을)을 바라보며 촬영한 전경이다. 사진 중앙 선성수상길 끝에 신예안인 예끼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7은 중앙일보 송의호 기자가 촬영한 사진이다[기사제목: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42): 2019.2.16]. 선성산 앞 선성수상길 중간에 수몰 전 예안국민학교의 위치를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조형물이다. 이 조형물 아래 강물 바닥에 학교가 있었다. 사진 왼편에 "예안국민학교"라는 글씨와 함께 교가가 보이고 추억 속에 울려 퍼졌던 풍금도 있다. 오른편에는 고풍이 물씬 풍겼던 옛날 예안국민학교 전경 사진이 부착돼 있다. 사진8과9는 선성현문화단지에서 이제는 강물 속에 전설로 남은 구예안 동네를 내다보며 촬영한 전경이다. 사진9의 망망대해 오른편 봉긋하게 솟아오른 산 위에 용암정(영락정)이 있었다. 수몰 전에는 예안중학교 좌측 둑방너머 낙동강 건너 강가 암석 위에 위치했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주로 영락정이라고 불렀었다.
"아~ 만경창파로다
망망대해로구나
명가의 선인들은 다 어디로 가고
물새만 안개 속에 구슬피 우는가
전설이 된 선성현의
애달픈 눈물들이
강물바다가 되어 출렁이네"
2024.6.27.탈고(이종구)
첫댓글 대대손손 정든 삶의 터전을 졸지에 수장 당하고 다급히 피신해야하는 허망한 마음을 상상이 아닌 사실을 근거한 논픽션 글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더 이해가 되고 당시의 모습이 그려지네~
정말 디테일하게도 표현하고 자료수집등 많은 노력이 깃들어 있네~
그당시만 해도 나라에서 하는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못내는 시대인지라~
애잔하다~~정말
글 잘보고 있어 고마워~^.^♡
탈고에
우리 함께 헤이리 마을 소풍 가서 촬영해 온 옛날 사진들을 넣으니 참 좋다~
헤이리 박물관 옛광경 사진이 이글 삽화에 여러모로 정말 딱이네 딱이야~ 멋져부러~~
(구)예안에서 거주하다가 실향민이 된 이주민이 이글을 읽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