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회 마음공부 그물코 잡기
안녕하세요. 마음공부를 안내하는 가이드 최경도 교무입니다. 반갑습니다. 이제 마음공부 안내를 마무리해야 하는 때가 다가왔다. 어부가 고기 잡는 그물의 그물코를 끌어 올리면 그물이 하나로 따라 올라 오듯이 이제 공부인이 마음공부 하는 공부법의 그물코를 찾아 끌어 올려야 할 일이 남았다. 정산종사는 옛날 한 선비는 평생 소학만 읽었다 하니, 우리는 평생 ‘일상 수행의 요법’만 읽고 실행하여도 성불에 족하리라.’ 하였다. 마음공부를 하나로 엮으라 하면 일상수행의 요법으로 묶을 수 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일상수행의 요법 1조 2조 3조 자성의 정 혜 계 세우기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원불교 교리 가운데 4은4요와 3학8조는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로 신앙과 수행의 강령이다. 또 사은사요와 삼학팔조를 아홉 개 문장으로 정리하여 신앙과 수행 교리를 실행하도록 강령적으로 만든 교강 9조의 다른 이름이 일상수행의 요법이다. 이 일상수행의 요법 9조를 모두 챙기고 대조하면 광의의 원불교 마음공부가 되고 1 2 3조만 챙기며 공부하면 협의의 마음공부가 되는 데 여기서는 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에 한정하겠다.
앞의 72회에서 대강 설명한 바 있는 일상수행의 요법 1조 2조 3조는 1.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 하였다. 이는 공부의 요도 삼학을 실행하는 조목이다.
심지는 심전과 같은 의미로 자성인 성품을 시각화하였다. 또 심지는 마음을 땅에 비유한 표현으로 만물이 원래 아무 것도 없었던 땅에 의지하여 형체가 나타나듯이 마음바탕에는 원래 의식 생각 감정이 없는데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마음이 나타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하고 표현 하였다. 그러므로 경계를 따라 있어진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는 것은 원래 요란함이 없는 심지를 회복하자는 의미이며 원래 없었는데 경계를 따라 있어졌으니 원래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2조와 3조의 어리석음과 그름도 마찬가지로 자성의 혜와 자성의 계를 세우자 하였다.
공부인이 마음공부 하는 목적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함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행복하고자 한다 생각할 수 있으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과 행복한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같지 않다. 행복하려면 고통이 없는 가운데 행복하다고 느껴야 하기 때문에 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 직장에서 본인이 하지 않은 부당한 일을 했다고 지적하는 상사가 있으면 당사자는 자신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며 한 일이 없다고 해명할 것이다. 그러나 해명을 해도 직원들이 오해하고 뒤집어씌우면 억울해서 몹시 괴로워진다. 이때 억울하여 오해가 풀릴 때까지 설명을 하지만 상대는 이해하지 않고 더욱더 오해가 깊어진다. 그러면 상대방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게 되며 괴로움 또한 더욱 심해진다.
그동안 마음공부를 해 왔다면 경계를 알아차리고 내가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공부심을 챙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면서 일어나는 원망이나 과거의 일 등으로 더욱 계교사량과 분별 망상으로 발전하여 잠을 이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일의 상황으로 봐서 오해하고 있는 일을 해명한다고 해결되지 않으니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에 안정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평소 수양의 힘이 부족하면 안정을 얻는 일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묵은 업으로 돌리고 참회하고 기도하여도 화나는 일은 가라앉지 않는다.
이때 일상수행의 요법에 의지하여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 지나니’ 하는 부분을 ‘심지는 원래 오해가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오해가 있어졌으니’ 하고 바꾸어 생각해 보면 ‘그들이 어떻게 오해를 할 수 있어?’ 하고 생각했던 것이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하였으니 ‘그래 오해를 할 수도 있지’ 하고 바꾸어진다.
처음에 오해한다는 부분에 ‘그럴 수는 없다’고 화가 나고 좌절하였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하게 되니 내 스스로 화가 줄어든다. ‘그럴 수는 없어’가 ‘그럴 수도 있어’로 바뀐 것뿐인데 사람의 마음은 미묘하여 생각이 바뀐다. 이것을 처세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으나 금강경에도 ‘원래 정해진 것은 없다’고 부처님께서 설한 법문이 있다. 원래 정해진 것은 없는데 ‘그럴 수는 없다’ 정해놓고 괴로워한 것이다.
신기하게도 일상수행의 요법 1조에 대입해서 ‘심지는 원래 오해가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오해가 있어지고 미워지고 괴로와 지나니’ 하고 생각을 바꾸어 먹으면 오해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고 괴로워 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1조에서 2조 3조까지 살펴보면 어리석음과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와 계를 세우자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자성에 요란함이 없는 것이 자성 정이요 자성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 혜요 자성에 그름이 없는 것이 자성 계이다. 자성의 정과 혜와 계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이기에 하나여서 따로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다만 마음이나 행동으로 나타날 때 요란함 어리석은 그름으로 구분하여 이름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착 없는 자리를 알아서 요란하지도 어리석지도 그르지도 않게 하면 세 가지가 하나이다.
자성은 인간 개개인에 있는 원래의 나를 지칭하는 성품을 말하지만 자성은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제불 조사 범부 중생의 성품이기에 언어의 도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멸한 절대 자리이다. 그러므로 심지는 원래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다 하였다. 원래 없는 자리에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있어지는 것이기에 오해도 있을 수 있고 모함도 있을 수 있다. 다만 인과보응의 이치 따라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지 않고 콩을 심지 않은 밭에 콩이 나지 않는다.
이제까지 마음공부 하며 많은 말을 하였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꿰어지는 것이 마음이니 마음을 알아서 마음의 자유를 얻자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에 욕심을 떼고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에 자유자재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로 끊임없이 경계 따라 있어지는 내 마음을 없게 하여 자성의 정과 혜와 계를 세워야 한다.
마음공부를 마무리 할 때가 되어 공부인이 마음공부 하는 공부법의 그물코를 일상수행의 요법 1조 2조 3조인 자성의 정과 혜와 계를 세우는 것으로 정리 하였다. 이것이 마음공부의 핵심이자 마음공부 하는 그물코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 하면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응용하는 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하는 것이다.
오늘은 마음공부 방법의 그물코인 자성의 정과 혜와 계를 세우기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다음은 마음공부 마지막 시간으로 마음공부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내용을 간단히 정리 하겠다. 오늘도 마음공부 잘 하여서 새 세상의 주인 됩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