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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The collapsed foundation of the 2,520-year calculation
B-3: 2520년 계산의 근거가 붕괴됨
As was shown in Chapter 1, the calculation that the “seven times” represented a period of 2,520 years is founded upon the so-called “year-day concept.” 제1장에서 살펴 보았듯이, '일곱 때'가 2,520년의 기간을 나타낸다는 계산은 이른바 '하루-일년 개념'에 근거한 것이다. This concept is no longer accepted as a general principle by the Watch Tower Society. It was taken over by Pastor Russell from the Second Adventists, but was abandoned by the Society’s second president, J. F. Rutherford, in the 1920’s and early 1930’s.31 The 2,300 evenings and mornings (Dan. 8:14), and the 1,260, 1,290, and 1,335 days (Daniel 12:7,11, 12; Revelation 11:2, 3; 12:6, 14), earlier held to be as many years, have since then been interpreted to mean days only. 이 개념은 워치타워 협회에서 더 이상 일반적인 원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러셀 목사가 재림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지만 제2대 협회장인 J. F. 러더포드는 그 개념을 버렸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에 러더포드는 2,300 주야, 그리고 1,260, 1,290, 1,335일 (다니엘 12:7, 11, 12; 요한계시록 11:2, 3; 12:6, 14)에 대해서 애초에는 '하루-일년 개념'에 근거하여 해로 믿어 왔으나 이후에는 단순히 문자 그대로 날로만 해석하였다. The two texts in the Bible which earlier were quoted in proof of the year-day principle (Numbers 14:34 and Ezekiel 4:6) are no longer understood as stating a universal principle of interpretation, although they are still cited in support of this particular 2,520-year calculation. As was shown in Chapter 1, note 2, it is not even likely that the year-day rule should be applied to the “seventy weeks” of Daniel 9:24–27. That prophecy does not speak of days, but “weeks” or, literally, “sevens.” So, rather than calling for a conversion of the “weeks” into days and then applying a “year-day principle,” the contextual connection with the “seventy years” at verse 2 strongly supports the prevalent conclusion that the angel was simply multiplying those seventy years by seven: “Seven times [or: sevenfold] seventy [years] are decreed.” 앞서 하루-일년 원칙(민 14:34와 겔 4:6)의 증거로 인용된 성경의 두 본문은 이러한 2,520년 계산을 특별히 뒷받침하기 위해 현재도 여전히 인용되고 있지만, 더 이상 보편적 해석원칙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제1장 각주 2에서 보듯이 다니엘 9:24~27의 "70주"에 하루-일년 규정을 적용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 예언은 날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週)"가, 즉 문자 그대로 "7들"을 말한다. 따라서, "주"를 일 단위로 변환하여 "하루-일년 원칙"을 적용하는 것 보다, 2절의 "70년"과의 문맥적 연관성에서 천사가 70년 자체에 7을 곱하는 것, 즉 "7 곱하기[또는 7겹] 70년으로 정해진다"는 점이다. Even the adherents of the year-day theory themselves find it impossible to be consistent in their application of the supposed “principle” that in biblical time-related prophecies days always mean years. For example, when God told Noah that “after seven more days, I will send rain on the earth forty days and forty nights” (Genesis 7:4, NASB), they do not interpret this to mean that “after seven more years, I wil1 send rain on the earth forty years” Or when Jonah told the inhabitants of Nineveh that “yet forty days and Nineveh will be overthrown” (Jonah 3:4), they do not understand this to mean that Nineveh should be overthrown after forty years. Many other examples could be given.32 심지어 하루-일년 이론의 신봉자들도 성경적 시간 관련 예언에서 날짜가 항상 해를 의미한다는 "원칙"의 가정을 일관되게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노아에게 "7일이 더 지나면 땅에 사십일을 밤낮으로 비를 보내겠다"고 하셨을 때(창세기 7:4, NASB) 그들은 이 말을 "7년이 더 지나면 내가 땅에 비를 내리게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또는 요나가 니네베의 거민들에게 "40일만 지나면 니네베가 무너질 것이다."(요나 3장 4절) 그들은 니네베가 40년 후에 무너질 것이라고 이해하지 않았다. 그외에도 다른 많은 사례들을 제시할 수 있다.32 To apply the year-day principle to the “seven times” of Daniel 4, then, is evidently quite arbitrary, and this is especially true if those doing the applying no longer apply that principle to other prophetic time periods. 다니엘 4장의 "일곱 때"에 하루-일년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매우 자의적인 것이며, 이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다른 예언적 기간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면 특히 그러하다. Like other adherents of the 2,520-year calculation, the Watch Tower Society argues that the “seven times” (the period of Nebuchadnezzar’s madness) are 2,520 days, because at Revelation 12:6, 14 “a time and times and half a time” (3 1/2 times) are equated with 1,260 days. (The validity of this reasoning will be discussed in the section below.) But while the 2,520 days are interpreted to mean a period of 2,520 years, the 1,260 days are understood to mean just 1260 literal days. As the interpretation of the “seven times” is derived from the three-and-a-half times (1260 days), why is not a consistent interpretation given to both periods? How do we know that the supposed 2520 days mean years, but that this is not the case with the 1,260 days?33 2520년 계산의 다른 신봉자들과 마찬가지로, 워치타워 협회는 '일곱 때'(느부갓네살 광기의 기간)가 2520일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요한계시록 12장 6절,서 14절에서 "한때 두때 반때"(세때 반)가 1260일과 같다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 추론의 근거는 아래 섹션에서 논의될 것이다.) 그런데 2,520일은 2,520년의 기간을 의미하지만, 1,260일은 1260일의 문자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일곱 때'의 해석은 세때 반(1260일)의 해석에서 도출되는 것인데, 왜 두 기간 모두에 일관된 해석이 주어지지 않는가? 2520일로 추정되는 날짜는 해를 의미하지만 1,260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떤 근거로 알 수 있는가?33 Obviously there is no real basis for the conclusion that “seven times” mean 2,520 years. "일곱 때"가 2,520년을 의미한다는 결론에 대한 실질적인 근거가 없음은 분명하다. |
Nebuchadnezzar’s “seven times” of madness are often understood as a period of seven years. However, anyone acquainted with the reign of Nebuchadnezzar knows there are great problems with this understanding. It is difficult to find a period of seven years within his reign of 43 years when he was absent from his throne or inactive as ruler. 느부갓네살은 광기의 일곱 때를 흔히 7년의 기간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통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이해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 재위 43년 기간 동안, 왕위를 비웠거나 통치자로 활동하지 않았던 7년의 기간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Where, then, during Nebuchadnezzar’s 43 years of rule, can we find a period of seven years when he was absent from the throne and not involved in royal activities of any kind? The accompanying table on the following page lists the years when the Biblical and extra-Biblical sources show Nebuchadnezzar still actively ruling on his throne. 그렇다면 느부갓네살 집권 43년 동안 왕좌를 비워 왕실의 활동에 관여하지 않았던 7년의 기간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다음 면의 동봉된 표는 성서와 성경 밖의 자료들이 느부갓네살이 여전히 왕으로서 활발하게 통치하는 것을 보여주는 기간 동안의 목록이다. As can be seen, the documented activities of Nebuchadnezzar appear to exclude an absence from the throne for any period of seven years. The longest period for which we have no evidence of his activity is from his thirty-seventh to his forty-third and last year, a period of about six years. This period ended with his death. It should be remembered, however, that Nebuchadnezzar, after his “seven times” of madness, was re-established on his throne and evidently ruled for some time afterward.―Daniel 4:26, 36. 보다시피, 느부갓네살은 문서화된 활동에서 7년 동안 왕좌에 앉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때는 없다. 그의 활동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가장 긴 기간은 그의 서른 일곱 번째부터 마흔 세 번째 이자 마지막 해까지 약 6년이다. 이 해에 그는 죽음으로 끝났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점은, 다니엘서에 의하면 분명히 느부갓네살은 광기의 일곱 때 후에 왕좌에 다시 앉았고, 그 후 얼마 동안 통치했다는 것이다.(다니엘 4:26, 36.) So what about the “seven times”? Do they necessarily refer to years, as is often held? 그러므로 "일곱 때"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꼭 연수를 가리키는가? Actually, the word for “times” in the original Aramaic text of Daniel (sing. ‘iddan) commonly means “time, period, season” and may refer to any fixed and definite period of time. 34 Admittedly, the view that at Daniel chapter four, verses 16, 23, 25, 32 it refers to years is not restricted to the Watch Tower Society. This understanding can be found in ancient sources. 사실, 다니엘서의 아람어 원문에서 "시간"을 뜻하는 단어(단수, 'iddan)는 흔히 "때, 기간, 계절"을 의미하며, 어떤 한정된 기간을 나타낼 수 있다. 34 다니엘 4장 16, 23, 25, 32절에서 "때"가 년을 지칭한다는 견해는 워치타워 협회의 해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해는 고대 자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
문서로 남아 있는 느부갓네살 통치의 업적들 | ||||
활동 및 업적 | 참고 성경과 문헌 | 즉위년 | 기원전으로 환산 | |
갈그미스 전투, 유다의 침략과 첫 포로 | 렘46:2;25:1;단1:1f | 즉위년 | 605 | |
BM21946 | 즉위년 | 605/04 | ||
하투에서의 캠패인 | BM21946 | 1년 | 604/03 | |
신상에 대한 느부갓네살의 꿈 | 단 2:1f. | 2년 | 603/02 | |
하투에서의 캠패인 | BM21946 | 2-6년 | 603-599/98 | |
느부갓네살의 건설활동 | 왕실 비문 (Berger, AOAT 4:1, p. 108)* | 7년 | 598/597 | |
두 번째 포로, 여호야긴을 바빌론으로 데려옴 | 왕하24:11-12; 역대하36:10; 렘 52:28; BM21946 | 7년 | 597 | |
하투에서의 캠패인과 느부갓네살의 군대에서 티그리스 반란, 유다에 흩어진 유배자들의 반란 계획 | BM21946 | 8-9년 | 597-596/95 | |
BM21946; 렘 28:1f; 29:1-3,4-30 | 10년 | 595/94 | ||
하투에서의 캠패인 | BM21946 | 11년 | 594/93 | |
느부갓네살의 건설활동 | 왕실 비문(Berger, AOAT 4:1, p. 108)* | 12년 | 593/92 | |
예루살렘이 2년 반 동안 포위되어 멸망되고 세 번째 유배됨 | 왕하 25:1f,렘 32:1-2, 52:4-16 | 15-18년 | 589-87/86 | |
에스겔이 두로가 포위될 것을 예언하다 | 겔 26:1, 7 | 18년 | 587 | |
느부갓네살이 두로를 13년간 포위하다 | 요세푸스의 ’ Ant. X:xi,1; Ap. 1:21 | 19-32년 | 586-573/72 | |
에스겔이 두로의 포위가 끝날 것을 확인하다. | 겔 29:17, 18 | 33년 | 572/71 | |
느부갓네살이 예언된대로 이집트를 공격하다. | BM 33041 (렘 43:10f.; 겔 29:1–16, 19–20) | 37년 | 568/67 | |
느부갓네살이 죽고 에윌 므로닥이 즉위하다. | 렘 52:31-34; 왕하 25: 27-30 | 43년 | 562/61 | |
*AOAT 4:1 = Alter Orient and Altes Testament, Vol. 4:1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1973.) |
Thus, the Septuagint (LXX) version of Daniel translated the word as “years,” and so does Josephus in Antiquities X:x,6. But the LXX text of Daniel was rejected by early Christians in preference of the Greek version of Theodotion (usually dated to about 180 C.E.) which says “times” (Greek kairoi), not “years” in Daniel chapter four.35 따라서 다니엘서의 70인역(LXX)은 이 단어를 "년"으로 번역했고, 고대 유물 X:x,6에서 요세퍼스도 그렇게 번역했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LXX 본문은 다니엘 4장에서 "년"이 아니라 "때"라고 번역하는 그리스어 데오도션역(서기 180년경에 기록됨)을 선호하는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35 That some Jews at an early stage interpreted the “times” of Daniel chapter four as “years” can also be seen in the so-called “Prayer of Nabonidus,” a fragmentary Aramaic document found among the Dead Sea scrolls at Qumran, Cave 4, and dating from ca. 75–50 B.C.E. This document says that Nabonidus was stricken with a “pernicious inflammation ... for seven years” in the Teman oasis.36 번역의 초기 단계에서 일부 유대인들이 다니엘 4장의 "때"를 "년"으로 해석했다는 사실은 기원전 75년에서 50년 사이에, 쿰란 동굴에 있는 사해 두루마리에서 발견된 아람어 문서의 파편인 소위 "나보니더스의 기도"라는 글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문서는 나보니더스가 테만 오아시스에서 "7년 동안. . . 치명적인 염증"에 걸렸다고 밝히고 있다.36 What are the other alternatives? Realizing that the literal meaning of the Aramaic word iddan is not “year” but “period” or “season,” Hippolytus of the third century says that some viewed a “time” as one of the four seasons of the year. Hence “seven seasons” would be less than two years.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3세기의 히폴리투스는 아람어 iddan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년'이 아니라 '기간' 또는 '계절'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떤 이들은 '때'를 1년의 사계절 중 하나로 보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7 계절"은 2년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Bishop Theodoret of the fifth century, however, noted that people of ancient times, such as the Babylonians and Persians, spoke of only two seasons a year, summer and winter, the rainless and the rainy seasons.37 This was also the custom among the Hebrews. In the Bible there are no references to spring and autumn, only to the summer and winter seasons. According to this line of reasoning, the “seven seasons” of Nebuchadnezzar’s madness meant three and one-half years. Some of the most highly regarded conservative Bible scholars of recent times, such as Carl F. Keil and Edward J. Young, either reject or feel strong doubts about the theory that the “seven times” of Daniel chapter four refer to seven years. The Assyriologist Donald J. Wiseman even suggests that the “seven times” should be understood as “seven months.”38 Any of these last-mentioned viewpoints would be in acceptable agreement with the information we have on the rule of Nebuchadnezzar. 그러나 5세기의 데오도르트 주교는 바빌로니아인과 페르시아인과 같은 고대인들은 1년에 여름과 겨울, 비가 없는 계절과 우기라는 두 계절만을 말한다고 언급했다.37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관습이기도 했다. 성경에는 봄과 가을에 대한 언급이 없고 여름과 겨울에만 언급된다. 이 같은 방식의 논리에 따르면 느부갓네살 광기의 '7 계절'은 3년 반을 의미했다. 칼 F. 케일과 에드워드 J. 영 같은 최근 가장 높이 인정되는 보수 성서 학자들 중 일부는 다니엘 4장의 "일곱 때"가 7년을 언급한다는 사실을 거부하거나 적어도 강한 이의를 제기한다. 아시리아 언어학자인 도널드 J. 와이즈먼은 "일곱 때"를 "7개월"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38 이 중 마지막으로 언급된 관점은 우리가 느부갓네살 통치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과 일치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Some, of course, will point to Revelation chapter twelve, arguing that since the 3 1/2 “times” in verse 14 correspond to the 1260 days (= 3 1/2 years) of verse 6, seven times must mean 2520 days, or seven years. 물론 어떤 이는 요한계시록 12장을 가리키면서 14절의 세때 반의 "시간"이 6절의 1260일(=3과 1/2년)과 일치하기 때문에 일곱 때는 2520일, 즉 7년을 의미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There is, however, no reason to conclude that the way “times” is used in Revelation chapter twelve must automatically apply also in other contexts. The fact remains that, since the Aramaic word ‘iddan simply means “time, period, season,” it could refer to periods of different lengths. It does not refer to the same, fixed period everywhere it is used. The context must always decide its meaning. And even if it could be shown that the “time, and times and half a time” at Daniel chapter seven, verse 25, mean three and a half years, this still would not prove that the “seven times” or “periods” (New American Standard Bible), or “seasons” (Rotherham, Tanakh), at Daniel chapter four, verses 16, 23, 25 and 32, mean “seven years.” The two chapters deal with two very different events and periods and therefore should not be confused. 그러나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시간"이 사용되는 방식이 다른 문맥에서도 자동으로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 아람어 'iddan'은 단순히 "때, 기간, 계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길이가 다른 기간을 지칭할 수 있다는 여지가 남아 있다. 그 용어가 사용되는 모든 곳에서 동일한 고정된 기간을 언급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문맥에 따라 항상 그 의미를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다니엘 7장 25절의 "한때 두때 반때"가 3년 반을 의미한다고 해도, 이것은 다니엘 4장 16절, 23절, 25절과 32절의 "일곱 때" 또는 "기간"(NASB,신 미표준역 성서) 또는 "계절"(로더함, 타나크)이 "7년"을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두 장은 매우 다른 사건과 기간을 다루므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In the discussion above it has been shown that the Gentile times of Luke 21:24 cannot be proved to be an allusion to the “seven times” of Daniel 4. Nor is there any evidence to show that Nebuchadnezzar’s “seven times” of madness prefigured another period, amounting to 2,520 years of Gentile dominion. Finally, it was demonstrated that the “seven times” cannot even be proved to mean seven years. These identifications are obviously no more than a guesswork without solid foundation in the Bible itself. 위의 논의에서 요한복음 21장 24절의 이방인의 때가 다니엘 4장의 '일곱 때'를 암시하는 것임을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또한 느부갓네살의 '일곱 때의 광기'가 2,520년간의 이방인의 통치를 의미하는 기간으로 확대 적용했다는 증거도 없다. 결과적으로, "일곱 때"가 7년을 의미한다고 단정될 수조차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러한 해석들은 성경 자체의 확실한 근거가 없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
As was pointed out in Chapter 1 of this work, Pastor Russell’s predictions for 1914 were not fulfilled. When the First World War ended, the Gentile nations still ruled the earth instead of Christ’s Kingdom, and Jerusalem in Palestine was still occupied by a Gentile nation. Evidently, the time for the events expected could not be right. But to draw this simple conclusion was not an easy thing. Additionally, something had happened: the World War. So it was felt that the time was right after all. Russell’s followers, therefore, concluded that they had been expecting the “wrong thing at the right time.”39 이 책의 1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14년에 대한 러셀 목사의 예측은 실현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여전히 이방인 국가들은 그리스도의 왕국 대신 지상을 통치했고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방인 국가가 점령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사건들의 시간이 맞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간단한 결론이더라도 그것을 도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무언가가 일어났다: 세계 대전. 그래서 결국 때가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따라서 러셀의 추종자들은 "시기는 정확했지만 예상한 것은 빗나갔다"고 결론지었다.39 |
C-1: Failed expectations—wrong things at the right time?
C-1: 예상이 빗나가다—시기는 정확하나 잘못된 것을 기대했는가?
Gradually a new apocalyptic pattern emerged. The World War with the many crises following it came to be regarded merely as a beginning of the overthrow of the Gentile nations. In 1922 J. F. Rutherford, the new president of the Society, explained: 점차 새로운 종말론적 패턴이 나타났다. 많은 위기가 뒤따른 세계 대전은 단지 이방인 국가를 타도하는 시작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1922년, 협회의 신임 회장인 J. F. 러더포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God granted to the Gentiles a lease of dominion for a term of 2520 years, which term or lease ended about August, 1914. Then came forward the Landlord, the rightful Ruler (Ezekiel 21:27), and began ouster proceedings. It is not to be expected that he would suddenly wipe everything out of existence, for that is not the way the Lord does things; but that he would overrule the contending elements, causing these to destroy the present order; and that while this is going on he would have his faithful followers give a tremendous witness in the world.40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통치권을 2520년의 기간 동안 부여해 주셨고, 그 부여된 기간이 1914년 8월경에 끝났다. 그리고 정당한 권리의 통치자인 이 온 땅의 지주 앞으로 나와 퇴진 절차를 밟기 시작했으나(겔 21:27), 주께서 갑자기 모든 것을 말살할 것이라고는 예상할 수는 없다. 그분이 행하시는 방식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다툼의 요소들을 제압하여 현재의 악한 질서를 멸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충실한 추종자들은 세상에 엄청난 증거 활동을 펼치게 될 것이다.40 This reminds us of later explanations of the 1934 failure by the Pastoral Bible Institute editors discussed above. The setting up of Christ’s kingdom had earlier been seen as a process which began in 1878 and which would culminate in 1914 with the destruction of the Gentile nations.41 But in 1922 the starting-point of this process was moved forward to 1914 and the overthrow of the Gentile nations was expected to take place in the near future. This new view was presented by J. F. Rutherford at the Cedar Point Convention of September 5–13, 1922 in his address,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이는 위에서 논의한 1934년 목회자 성경연구소 편집자들의 실패에 대한 이후의 해명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왕국의 설립에 대한 구상은 일찍이 1878년에 시작되어 1914년 이방 민족의 멸망과 함께 절정에 달할 과정으로 여겨졌다.41 그러나 1922년 이 과정의 출발점은 1914년으로 앞당겨졌다. 가까운 미래에 이방인 국가들의 타도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 새로운 견해는 J. F. 러더포드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는 1922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열린 시더 포인트 대회에서 "하늘 왕국이 다가왔다"라는 연설을 했다. Three years later, in the article “Birth of the Nation” in The Watch Tower, March 1, 1925, a new interpretation of Revelation 12:1–6 was presented in accordance with the new understanding of the setting up of Christ’s kingdom, to the effect that the kingdom had been “born” in heaven in 1914. That year Jesus Christ “took unto himself his great power and began his reign: the nations were angry, and the day of God’s wrath began. —Ezekiel 21:27; Revelation 11:17, 18.”42 3년 뒤인 1925년 3월 1일 파수대에 실린 '나라의 탄생' 이라는 기사에서 요한계시록 12:1-6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제시되어, 1914년 하늘에서 나라가 탄생했다는 취지의 그리스도의 왕국의 설립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부합시켰다. 그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위대한 힘을 친히 가지시고 통치하기 시작했다: 열국이 분노하였고,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시작되었다. —겔 21:27, 계 11:17, 18."42 |
C-2: The “downtrodden” city of Jerusalem relocated
C-2: "짓밟힌" 예루살렘 도시가 새로이 서다
But what about the trampling of Jerusalem by the Gentiles? At the end of 1914 the city of Jerusalem was still occupied by a Gentile nation, the Turkish Empire. In an attempt to “explain” this embarrassing fact, Pastor Russell argued that the persecution of the Jews at that time seemed to have practically stopped all around the world, and he saw in this a confirmation of his belief that the Gentile times had expired.43 하지만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예루살렘이 짓밟히리라는 말씀은 어떠한가? 1914년 말에도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방인 국가인 터키 제국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러셀 목사는 이 난처한 사실을 '해명'하기 위해 당시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전 세계적으로 멈춘 것 같다는 주장으로 설명했고, 이를 통해 이방인의 때가 끝났다는 자신의 믿음을 확인시켰다.43 However, in December, 1917, more than one year after Russell’s death, an interesting thing happened. On December 9, 1917, the British under General Allenby in alliance with the Arabs captured Jerusalem and thus made an end of the nearly seven-centuries-long Turkish occupation. This event was looked upon by many Christians as a very important sign of the times.44 하지만 러셀이 죽은 지 1년 이상이 지난 1917년 12월에,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1917년 12월 9일, 아랍인들과 연합하여 알렌비 장군 휘하의 영국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이로써 거의 7세기 동안 지속된 터키 점령을 종결시켰다. 이 사건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시대의 중요한 신호로 여겨졌다.44 The deliverance of Jerusalem from the Turks in 1917, together with the so-called Balfour declaration of November 2, 1917 which proclaimed that the British Government supported the establishment of a Jewish National Home in Palestine, drastically accelerated Jewish immigration to Palestine. Thus, from October, 1922, to the spring of 1929 the Jewish population of Palestine doubled from 83,794 to about 165,000. 1917년 터키로부터 예루살렘을 인도받은 것은 1917년 11월 2일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고향 설립을 지지한다고 선언한 이른바 밸푸어 선언과 함께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획기적으로 가속화시켰다. 따라서 1922년 10월부터 1929년 봄까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83,794명에서 약 165,000명으로 두 배가 되었다. At that time Palestine was still administered by a non-Jewish or Gentile nation (England) and the Jews still constituted only a minority (about twenty percent) of the population in Palestine. To all appearances, Palestine and the city of Jerusalem were still controlled by the Gentiles. Yet the Watch Tower Society’s president, J. F. Rutherford, in his book Life, published in 1929, insisted that the Gentile times spoken of by Jesus at Luke 21:24 had expired in 1914, arguing that the accelerating Jewish immigration to Palestine was the tangible proof of the conclusion that this prophecy had been fulfilled. 당시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비유대인 또는 이방인 국가(영국)에 의해 통치되었고 유대인은 여전히 팔레스타인 인구의 소수(약 20%)를 구성했을 뿐이다. 아무리 보아도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방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인 J. F. 러더포드는 1929년 출간된 그의 저서 <삶(Life)>에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이 가속화된 것이 이 예언이 실현되었다는 결론의 가시적 증거라고 주장하며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방인의 때가 1914년 만료되었다고 주장했다. But shortly after the publication of Life, this whole idea was abandoned; the return of the Jews to the Promised Land was no longer seen as a fulfillment of Bible prophecies. Since 1931 such prophecies have been applied to spiritual Israel.45 The logical consequence of this change could only be that the end of the treading down of Jerusalem was no longer applicable to the literal city of Jerusalem: 그러나 <삶> 출간 직후 이 모든 생각은 버려졌다. 유대인을 약속의 땅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더 이상 성경적 예언의 성취로 보이지 않았다. 1931년 이후 그러한 예언은 영적인 이스라엘에 적용되어 왔다.45 이러한 변화의 논리적 결과는 예루살렘이 짓밟히는 때가 끝난다는 것은 더 이상 문자 그대로의 예루살렘 도시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해석 밖에 내릴 수 없었다: The present-day city of Jerusalem over in Palestine is not the city of the Great King Jehovah God, even though Christendom calls certain places over there “holy”. That city is doomed to destruction at the end of this world. But the true Jerusalem will live forever as the capital of Jehovah’s universal organization. We mean the New Jerusalem, of which Jesus Christ gave a symbolic vision to the apostle John on the isle of Patmos. . . . Jesus Christ is the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over that true Jerusalem. At the close of the Gentile times in 1914 he was enthroned as acting Ruler in the “city of the great King”, Jehovah. Thus, after an interruption of 2,520 years by Gentile powers, Theocratic Government over earth rose again to power in the New Jerusalem, never to be trodden down by the Gentiles.46 오늘날 팔레스타인에 있는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국이 그곳을 "성스러운 곳"이라고 부르지만,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도시가 아니다. 그 도시는 이 세상의 종말에 멸망될 운명이다. 그러나 진정한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우주 조직의 수도로서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에게 파트모스 섬에서 상징적인 환상으로 보여주신 새로운 예루살렘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위에 있는 진정한 예루살렘의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이시다. 1914년 이방인의 때가 끝나자 그는 "위대한 왕의 도시"에서의 통치자 여호와의 권한대행으로 즉위했다. 그리하여, 2,520년 동안 이방 열강들에 의해 통치가 중단된 이래, 지상을 다스리는 신권 정부는 다시는 이방인들에게 짓밟히지 않고 새예루살렘에서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다.46 What, exactly, was this “New Jerusalem”? The Watchtower book Your Will Be Done On Earth (1958) explains on page 94: 이 "새로운 예루살렘"은 정확히 무엇인가? 워치타워의 서적 <당신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1958년)는 94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Back in 607 B.C. the Jerusalem that was overthrown stood for the kingdom of God because it had the typical throne of Jehovah on which the anointed one of Jehovah sat as his king. Likewise, the Jerusalem that is trampled upon by worldly nations stands for the kingdom of God. . . . So the end of the trampling down of Jerusalem at the complete fulfillment of the “appointed times of the nations” would mean the rising again of the symbolic Jerusalem, namely, the kingdom of God. 기원전 607년에 멸망된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앉는 여호와의 보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도 세속 나라들에 의해 짓밟히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국가들에게 정해진 시대'가 온전히 차게된다는 것은, 상징적인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왕국이 다시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Thus the end of the trampling down of Jerusalem was interpreted to mean the installation of Jesus Christ on Jehovah’s throne in the heavenly Jerusalem in 1914.47 But this relocation of the “downtrodden Jerusalem” from earth to heaven created other questions, discussed below, which never have been satisfactorily answered.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짓밟히는 때가 끝난다는 것은 1914년, 하늘 예루살렘의 여호와의 보좌 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47 그러나 이 "짓밟힌 예루살렘"이 땅에서 하늘로 옮겨진다는 해석은 아래에 논의될 다른 의문들을 발생시켰고, 결코 만족할만한 대답이 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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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For a thorough refutation of the year-day concept, see pp. 111–126 of Samuel P. Tregelles , Remarks on the Prophetic Visions in the Book of Daniel, originally published in 1852. Reference here is to the seventh edition (London: The Sovereign Grace Advent Testimony, 1965).
31 하루-일년 개념에 대한 철저한 반박은, 1852년 처음 출판된 사무엘 P. 트레겔레스의 저서 <다니엘서의 예언적 환상에 대한 견해> 111–126 면을 참조하라. 여기서 7판을 참조하였다(런던: 1965년 주권자의 은총 재림 증언, 1965년)
32 For additional examples, see Milton S. Terry, Biblical Hermeneutics (Grand Rapids: Academic Books, 1974; reprint of the 1883 edition), pp. 386–90.
32 추가 예는 밀튼 S. 테리의 저서 <성경 해석학>(그랜드 래피즈: 그랜드 래피즈: 학술서적, 1974년; 1883년판 재인쇄), 386–90면.
33 C. T. Russell was at least consistent in claiming that both periods were years, “for if three and a half times are 1260 days (years), seven times will be a period just twice as long, 2520 years.”— Studies in the Scriptures, Vol. II (originally published in 1889), p. 91.
33 C. T. 럿셀은 적어도 두 기간 모두 "세때 반을 1260일(년)으로, 일곱 때는 2520년"으로 주장함으로써 적어도 일관성을 나타냈다.—<성경 연구> II권(1889년에 처음 출판됨), 91면.
34 Compare the use of the same word in Daniel 2:8 (”time is what you men are trying to gain”), 2:9 (”until the time itself is changed”), 2:21 (”he is changing times and seasons”), 3:5,15 (”at the time that you hear the sound”), 7:12 (”there was a lengthening in life given to them for a time and a season”), and 7:25 (”they will be given into his hands for a time, and times and half a time”).
34 다니엘 2:8 (너희가 시간[time]을 벌려 하는구나), 2:9 (상황이 바뀔 때까지), 2:21 (그분은 때와 시기를 바꾸시고), 3:5,15 (너희들이 그 소리를 들을 때), 7:12 (하나의 계절 동안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 길어질 때), 7:25 (그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그의 손에 넘겨질 것이오.)에서 같은 단어을 사용한다는 점을 비교해 보라.
35 As a number of citations from Daniel in the New Testament agree with Theodotion’s Greek text of Daniel against LXX, Theodotion’s translation is thought to have been based on an earlier, pre-Christian textual tradition, which may have been either independent of or a revision of LXX.—John J. Collins, Daniel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pp. 2–11. See also Peter W. Coxon, “Another look at Nebuchadnezzar’s madness,” in A. S. van der Woude, op. cit. (see note 25 above), pp. 213–14.
35 신약성서의 다니엘서를 인용한 많은 부분이, LXX와는 다른 테오도션역의 그리스어 본문에 따라 번역함으로써, 테오도션역은 LXX와 독립적이거나 개정되었을 수도 있는,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전통에 근거한 것으로 생각된다.—존 J. 콜린스, 다니엘(미니애폴리스: 포트리스 출판부, 1993년), 2–11면. 앞서 인용한 A.S. 반 데어 우드의 저서에서 피터 W. 콕슨의 "네부카드네자르의 광기에 대한 또 다른 견해"를 참조하라. (각주 25 참조), 213–14면.
36 For a recent reconstruction and translation of the text, see Baruch A. Levine and Anne Robertson in William W. Hallo (ed.), The Context of Scripture, Vol. I (Leiden: Brill, 1997), pp. 285–86. Most scholars suppose that the story about the “seven times” of madness originally dealt with Nabonidus and that the “Prayer of Nabonidus” reflects an earlier state of the tradition. The book of Daniel, it is held, attributes the experience to Nebuchadnezzar because he was better known to the Jews. However, there is no evidence in support of this theory, and it is quite as likely that the “Prayer of Nabonidus” is a late, distorted version of Daniel’s narrative.—Compare the comments by D. J. Wiseman, op. cit. (see note 28 above), pp. 103–105.
36 본문의 최근 재구성 및 번역은 Baruch A. 리바인과 앤 로버트슨, 윌리엄 W. 할로(편집인)의 저서 <성경의 문맥> 1권 (라이던: 브릴, 1997년), 285–86면을 참조하라. 대부분의 학자들은 광기의 "일곱 때"에 대한 이야기가 원래 나보니더스를 다루었고 <나보니더스의 기도>라는 책은 그러한 견해의 초기 상태를 나타낸다고 추측한다. 다니엘서는, 느부갓네살이 유대인들에게 더욱 잘 알려졌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을 느부갓네살에게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으며, <나보니더스의 기도>는 다니엘의 이야기를 뒤늦게 왜곡시킨 버전일 가능성이 높다.—D. J. 와이즈먼의 해설 비교(위의 각주 28 참조), 103–105면.
37 E, J. Young, op. cit. (see note 23 above), p. 105. Dr. H. Neumann confirms that in Mesopotamia there are only two seasons: “a cloudless and dry summer from May to October, and a cloudy and rainy winter from November to April.” —Heinz Neumann in Wiener Zeitschrift für die Kunde des Morgenlandes, Vol. 85 (Wien 1995), p. 242.
37 E, J. 영의 앞서 인용한 저서 (위의 각주 23), 105면. H. Neumann 박사는 메소포타미아에는 단 두 계절만 있다고 확인하였다. "5월부터 10월까지 구름 한 점 없고 건조한 여름, 11월부터 4월까지 흐리고 비가 오는 겨울." —Wiener Zeitschrift fürdie Kunde Morgenlandes, Vol. 85 (Wien 1995년), 242면.
38 Donald J. Wiseman in J. D. Douglas (ed.), New Bible Dictionary, 2nd edition (Leicester, England: Intervarsity Press, 1982), p. 821. Dr. Wiseman explains that this understanding of ‘iddan at Daniel 4 “arose from my view that a ‘month’ might be an appropriate ‘period’ since the nature of Nebuchadrezzar’s illness . . . is unlikely to have been a recurrent one.”—Letter Wiseman-Jonsson, dated May 28, 1987. Compare Wiseman’s discussion of Nebuchadnezzar’s illness in B. Palmer (ed.), Medicine and the Bible (Exeter: The Paternoster Press, 1986), pp. 26–27.
38 J.D. 더글러스(편집인)의 저서 <새 성경 사전>, 제2판(영국 레스터: 인터바스티 출판부, 1982년), 821면에서, 도널드 J. 와이즈만 박사는 '다니엘 4장의 때(‘iddan')에 대한 이해는, "느부갓네살의 질병의 성격상. . . 재발했던 것 같지 않으므로 '월(月)'이 올바른 이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내 견해이다"라고 설명한다.—1987년 5월 28일자의 와이즈만-존슨의 편지. 와이즈먼이 B. 팔머(편집인), <의학 및 성경>(엑세터: 패터노스터 출판부, 1986년), 26–27면에서 느부갓네자르의 병에 대해 와이즈만이 논의한 내용을 비교해보라.
39 A. H. Macmillan, Faith on the March (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Inc., 1957), pp. 48–49.
39 A. H. 맥밀런의 저서 <3월의 믿음> (뉴저지주 엥글우드 해변의 절벽, 프렌티스홀, 1957년), 48~49면
40 The Watch Tower, May 1, 1922, p. 139; also published in the booklet The Bible on Our Lord’s Return (Brooklyn, N.Y.: International Bible Students Association, 1922), pp. 93–94. (Emphasis added.)
40 1922년 5월 1일 파수대, 139면; 또한 소책자 <우리 주의 돌아오심에 관한 성서 내용> (뉴욕 브루클린: 국제 성서 연구생 협회, 1922년), 93-94 면.
(강조는 추가됨.)
41 See the article “The Setting Up of Christ’s Kingdom” in The Watch Tower of June 1, 1922, which still has the 1878 date.
41 1922년 6월 1일호 파수대에서 1878년 연도를 여전히 지지하는"그리스도 왕국의 설립" 기사를 참조하라.
42 The Bible on Our Lord’s Return (1922), p. 93.
42 <주의 돌아오심에 대한 성경>(1922년), 93면.
43 The Watch Tower, November 1, 1914, pp. 329–30; Reprints, p. 55–68.
43 1914년 11월 1일호 파수대, 329–30면; 재인쇄, 55–68면.
44 Christian commentators of several different denominations regarded this event as a sign of the times. It will be remembered that as early as 1823, John A. Brown, in his The Even-Tide, ended the “seven times” in 1917. In his opinion 1917 would see “the full glory of the kingdom of Israel . . . perfected” (Vol. 1, pp. xliii f.) Later in the same century the British expositor Dr. Henry Grattan Guinness, too, pointed forward to 1917 as a very important date: “There can be no question that those who live to see this year 1917 will have reached one of the most important, perhaps the most momentous, of these terminal years of crisis”—Light for the Last Days, London, 1886, pp. 342–46. Aware of these predictions, eight well-known English clergymen, among whom were Dr. G. Campbell Morgan and Dr. G. B. Meyer, issued a manifesto which among other things declared: “FIRST. That the present crisis points towards the close of the times of the Gentiles. . . . FIFTH. That all human schemes of reconstruction must be subsidiary to the second coming of our Lord, because all nations will be subject to his rule.” The manifesto was published in the London magazine Current Opinion of February 1918 and subsequently republished by other papers throughout the world. Although this manifesto has been cited several times in Watchtower publications in support of the 1914 date, it was actually issued in support of the 1917 date and resulted from Allenby’s “liberation” of Jerusalem in the latter year.
44 서로 다른 교파의 기독교 주석가들은 이 사건을 때의 징조로 여겼다. 이미 1823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존 A. 브라운은 그의 저서 <해질 무렵>에서 1917년에 '일곱 때'가 끝났다고 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그의 의견으로는 1917년에 "이스라엘 왕국의 완전한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 하였다. 헨리 그라탄 기네스도 1917년을 매우 중요한 날로 꼽고서 이렇게 말했다: "살아서 이 1917년을 보게될 사람들은 이 위기의 마지막 중 가장 중요하고 아마도 가장 극적인 시기에 이르렀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ㅡ<마지막 날의 빛>, 런던, 1886년, 342-46 면. 캠벨 모건 박사와 그리고 G. B. 마이어 박사를 포함하여 이러한 예측을 알고 있는 8명의 유명한 영국 성직자들은 모든 다른 것들 중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문을 발표했다: "첫 번째", 현재의 위기가 이방인들의 시대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은. . . 다섯 번째, 인간의 모든 재건 계획은 주님의 재림과 맞추어 보조되어야 한다. 모든 민족이 주님의 통치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선언문은 1918년 2월의 런던 잡지 <현재의 견해>에 실렸고 그 후 전 세계 다른 신문에 의해 다시 실렸다. 1914년 날짜를 지지하는 워치타워 출판물에서 이 선언이 여러 차례 인용되었지만, 실제로는 1917년 날짜를 지지하기 위해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그해 후반기에 알렌비가 예루살렘을 "해방"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45 The Watch Tower, 1931, pp. 253–54; J. F. Rutherford, Vindication, Vol. II (Brooklyn, N.Y.: Watch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1932), pp. 258, 267–69.
45 1931년 파수대 253–54면; J. F. 러더포드의 저서 <입증> II권(뉴욕 브루클린, : 워치타워 성서 및 책자 협회, 1932년), 258, 267–69면.
46 The Watchtower, November 1, 1949, pp. 330–31.
46 1949년 11월 1일 파수대, 330~31면.
첫댓글 표의 맨 하단의 약어와 독일어 고유명사들은 그 표가 나오는 출처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