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사진찬(自寫眞贊) : 나의 초상에 쓰다.
俯視李賀 優於海東 騰名謾譽 於爾孰逢
부시이하 우어해동 등명만예 어이숙봉
이하(李賀)도 내려 볼 만큼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形至眇 爾言大閒 宜爾置之 丘壑之中
이형지묘 이언대동 의이치지 구학지중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네.
너를 두어야 할 곳은
금오산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 산골짝은 경주 남산 삼릉게곡.
- 김시습
※ 김시습 년보
1454년(단종 2년) 20세 때,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
1455년(세조 1년) 21세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변보를 듣고 문을 닫고
3일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던 서적을 다 불에 태우고 거짓 미친 채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지었다.
1458년(세조 4년) 24세 때, 관서지방을 여행하였다.
가을에 <탕유관서록후지>를 저술하다.
1463년(세조 9년) 28세 때 방랑 여행으로 호남지방을 여행하였고
그해 가을에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하였다.
가을에 서적 구입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를 받아 열흘 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교정하다.
1465년(세조 11년) 31세 때, 경주(慶州)에 정착하였고,
봄에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 용장사 아래 계곡에 금오산실을 지어 살았다.
1468년(세조 14년) 34세 때,
겨울에 금오산에 거처하고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저술하다.
경주 남산의 주봉이 금오산이다.
이즈음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다.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를 모방하여
인귀교환설화를 수용하여 ‘신화’라 붙이다.
1471년(성종 2년) 37세 되던 해
봄에 금오산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 도성 동쪽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를 짓고 은거하다.
1476년(성종 7년) 42세 때,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저술하다.
1481년(성종 12년) 47세 때, 다시 속인이 되었다.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며 안씨(安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
1482년(성종 13년) 48세 때,
이 해 이후부터 세상이 쇠진해짐을 보고는 세상일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중략 …)
1493년(성종 24년) 59세 때,
3월에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현재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無量寺)에서 입적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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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서원은 1703년(숙종 29)에 경상도 유학 곽억령(郭億齡) 등이
조려(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의 병향(幷享)을
사육신의 예에 따라 이루어짐이 마땅함을 국왕에게 상소하여
윤허를 받고 여섯 사람의 제향을 위하여 창건한 서원이 되었다.
사육신(死六臣)은 성삼문(成三問:1418~56)·하위지(河緯地:1387~1456)·
이개(李塏:1417~56)·유성원(柳誠源:?~1456)·박팽년(朴彭年:1417~56)·
유응부(兪應孚:?~1456) 등을 일컫는다.
단종 복위 꾀하며 불의에 저항하다 수레에 팔다리를 묶여
문자 그대로 사지를 찢겨 죽임을 당한 분들이 사육신이시다.
모든 이들이 겁에 질려 있을 때
김시습은 분연히 나서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 주셨다.
유가에서는 유자니 불자니 말이 많지만
그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충격을 받고 과거시험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포기하고
삼각산 사찰에서 하산하여
경주 용장사에서 승려가 되어 <금오신화>를 집필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