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廟 李世玧 李奎煥 李秉健 創建興學堂 李挺柱 成爾鴻 愛民奬學 趙明勖 任安世 宋輝明 兪彦宗
李復祥 移建興學堂 閔百能 李昌遠 善治 宋溥淵 李應重 柳光翼 韓文洪 李星會正廟善政 尹晦東 李性重 趙祥逵 李釆 有碑 李秉淳 徐惇修 蘇洙中純廟善治 李光斗 金熙臣 朴祖壽 金益秀 李龜星 李鼎耉 安廷喜 李羲升 宋錫老
洪淳謨 有碑 洪膺疇
한문홍(韓文洪,1736~1792) [진1765] 본관 청주, 字원례(元禮). 한성거주
■가계
>1 한광진(韓光鎭)
>0 한문홍(韓文洪,1736~1792)
■관력
1768영릉참봉, 1770제용부봉사, 1771상서부직장, 1776순안현령, 1780경릉령, 1787사도첨정, 마전군수, 1790장성부사
■기록
○승정원일기 1383책 (탈초본 77책) 정조 즉위년 6월 13일 임자 20/27 기사 1776년
噫, 凡此十條, 特其橫斂之事, 而擧其最甚者耳, 其他殘忍之政, 苛刻之實, 所可言也, 言之長也。惟彼道臣, 職在觀察, 而逐考年年, 比邑上上, 其可下等不過十室之殘, 萬戶之卑耳。是可忍也, 是可忍耶? 道臣之自犯厥躬, 無怪其以賊諱賊, 而至於繡衣之奉命, 又何其無聲無聞也? 替行州縣, 苛政之耳聞何如密察閭巷, 民愁之目覩何如。顧乃藏風斂威, 埋頭沒角, 徒勞驛郵之候卒, 徒費草料之傳食, 國家之體貌, 從此益損, 守宰之放縱, 益無所憚, 又何柳義養之嗜利無恥, 一至其醜耶? 褒啓鄭錫達之治, 則尙州之氓, 欲食其肉, 結囚韓文洪之縣, 則列邑之錢, 公行如市, 連守令, 勞於輜重之潛運, 到處官婢, 愁於衣襲之疾縫。至今南土之人, 坐必言及, 言必先唾, 近來繡衣, 無一可觀, 而至於此輩而極矣。
일성록 정조 원년 정유(1777) 10월 19일(신해)
의금부가 아뢰기를, “시수죄인 성대중, 정국인(鄭國仁), 한문홍(韓文洪) 등은 창고에 남겨 두어야 할 환곡 중에서 가분한 양이 이미 절반을 넘었으니 각기 도삼년(徒三年)으로 정배해야 하나 공률로 수속(收贖)하고 풀어 주며, 홍수보, 홍검(洪檢), 윤수검(尹守儉), 이인빈(李仁彬), 이휘원(李徽遠), 유효원(柳孝源), 심기태(沈基泰), 이홍원(李弘遠), 한용화(韓用和), 김헌주(金獻柱), 이윤겸(李潤謙), 이길배(李吉培), 이득영(李得永) 등은 가분한 것이 절반을 넘지 않으니 고신을 추탈하고 각기 장팔십(杖八十)에 해당하나 공률로 수속하고 풀어 주소서.” 하였다.
○비변사등록 정조 12년 1788년 04월09일(음)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경기감사 서유방(徐有防)의 장계로 인하여 마전군(麻田郡)의 군액(軍額)을 이정(移定)하는 일을 초기(草記)로 품처하라신 명이 계셨습니다. 그 장계를 가져다가 보니 본군의 군수 한문홍(韓文洪)의 첩정(牒呈)을 낱낱이 들어 말하기를 ‘응역(應役)할 민호(民戶)는 겨우 3백 호인데 양천(良賤)의 군액은 꼭 1천 명이니 도고(逃故)를 충정(充定)할 길도 없고 유망(流亡)은 줄을 이으므로 지금 당장 변통하지 않으면 고을이 없어지고야 말겠으니 그중에서 30명만 대충대충 조금 손을 쓸 만한 고을로 나눠서 보내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근래에는 군정(軍政)의 어려움이 마치 팔도(八道)의 통환(通患)처럼 되어 백성은 적고 군액은 많은 폐단이 거의 고을마다 다 일반이니 이럴 때에 이정하는 것은 실로 중난한 일이나 도신이 기왕 본군의 고폐(痼弊)로 등문(登聞)하기에 이르렀고 이정해 달라는 수효도 그리 과다하지 않으니 지금에 바로잡아 주는 도리가 없을 수 없겠습니다. 그러니 장청한 대로 마전군의 군액 30명을 양민(良民)과 상천(常賤)을 참반(參半)하여 도신으로 하여금 직접 들고 나서 도내의 민호와 군액을 비교 분석하여 이정함으로써 마전 백성에게 조금이나마 폐단을 덜어주게 하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한문홍은 1789년(정조 13) 음력 12월 마전 군수로서 경내에 있는 고려 태조의 사당인 숭의전(崇義殿)을 중건한 후 그 부근 잠두봉(蠶頭峯)에 그가 지은 ‘중작숭의전(重作崇義殿)’이라는 칠언율시가 새겨져 있다.
重作崇義殿
마전군수 한문홍(韓文洪,1736~1792)
麗組祠宮四百秋, 여조사궁사백추 숭의전을 지은 지가 4백년이 되었는데
誰敎木石更新修, 수교목석갱신수 목석으로 다시 수리하기를 누가 가르치는가.
江山豈識興亡恨, 강산기식흥망한 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오
依舊蠶頭出碧流, 의구잠두출벽류 의구한 잠두봉만 강물위에 떠 있네.
往歲傷心滿月秋, 왕세상심만월추 지난 세월 상심하며 가을달을 바라보며
如今爲郡廟宮修, 여금위군묘궁수 지금은 군수되어 묘궁을 수리하네.
聖朝更乞麗生石, 성조경걸려생석 조선은 생석을 갖추어 고려왕을 제사하니
留與澄波萬古流, 유여징파만고류 징파강과 더불어 오래토록 이어지리
*한문홍(韓文洪) :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1736년에 태어났다. 1765년 진사 급제 이후, 벼슬은 1787년에서 1790년까지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재임하는 등 주로 지방관으로 전전한 듯하다. 그의 몰년은 1792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편지로 미루어 보면 1794년이 아닌가 한다. 연암과는 젊은 시절에 같이 과거 공부를 했던 친구였다. 《연암집》 권3 ‘대은암에서 창수한 시의 서문〔大隱菴唱酬詩序〕’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