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을 빈집은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끝내 대문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당 깊은 곳까지 어둠이 차오르면 빈집은 눈을 들어 별자리를 더듬는다 식구들이 몰려 간 서남쪽 하늘 별이 기울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들쥐가 들어앉아 새끼를 낳았다 이따금 달빛이 새끼들의 털을 핥아주고 갔다 들쥐는 빈집의 뒷다리를 갉아 먹으며 자라고 집은 제자리에서 우물처럼 늙어간다 빈집의 늑막 아래로 어둠이 점점 차오른다
전북일보 2022 신춘문예 당선 시인 박수봉 시인의 '빈집'입니다. 어쩌다 보니 이전에 감상했던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와 같이 '빈집'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신춘문예의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농촌의 인구 소멸로 인해서 노인 인구만 남고 젊은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없는 현실에 관한 시가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한 번 감상해 볼까요?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빗속에 집이 잠겨도 집은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서 있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글은 시골집에 홀로 남은 어머니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홀로 빈집을 지키는 어머니와 빈집을 빗대어 엮어가는 서사입니다. 어머니는 퇴행성관절염에 어깻죽지까지 굳어있는 모습입니다. 집이 기울어 가는 것이나 어머니의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것이나 두 모습이 아릿함을 자아냅니다. 곧 무너져도 아무렇지도 않게 시를 이끌어 갑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허옇게 바랜 집'은 또다른 빈집이니까 아마도 어머니의 오래된 친구분이시겠지요. 고생한 옛이야기를 나누시는군요. 집에 가두어진 유폐는 아니지만 홀로 남겨지신 어르신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제 우물터에는 잡초들이, 장독대에는 바람만 웅웅웅 부는군요.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을 빈집은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끝내 대문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빈집에 대한 묘사가 뛰어납니다. 죽은 참가죽나무,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 미지근한 어둠을 눈을 닦는,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 정말 시인은 몇 날 며칠 빈집만 바라보았지 싶어요. 빈집의 느낌이 너무 쓸쓸합니다.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는 누군가가 찾아와 주길 바라면서 하루 종일 열리지 않은 대문을 쳐다보며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마당 깊은 곳까지 어둠이 차오르면 빈집은 눈을 들어 별자리를 더듬는다 식구들이 몰려 간 서남쪽 하늘 별이 기울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밤이 깊었습니다. 어머니는 식구들 생각에 별자리를 하나둘 헤아려 봅니다. 식구들이 몰려 간 쪽으로 눈을 향합니다. 아무런 기척이나 소식도 없어도 어머니는 밤새 자식 걱정에 눈을 떼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들쥐가 들어앉아 새끼를 낳았다 이따금 달빛이 새끼들의 털을 핥아주고 갔다 들쥐는 빈집의 뒷다리를 갉아 먹으며 자라고 집은 제자리에서 우물처럼 늙어간다 빈집의 늑막 아래로 어둠이 점점 차오른다
이제 시골의 빈집들은 자연의 차지가 될까요? 달빛이 들쥐의 새끼들을 돌보고 집은 오래된 우물처럼 늙어갑니다. 어머니의 늑막에 물이 차오릅니다. 참 쓸쓸합니다.
옛집은 활기가 차고 시끄러웠겠지요.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빈집이 되었지만 마지막까지도 들쥐의 집이 되어주고 뒷다리를 내어줍니다.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수많은 시골의 어머니들은 이 밤도 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자식 걱정을 하고 있으실 거예요. 마당에 나섰다가 괜히 하늘의 달을 보고 두 손을 모으시는 어머니들이 보이는 시입니다. 도시화는 속도를 더하고 시골의 빈집들은 늘어갑니다. 해결책이 없을까요? 마음이 짠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