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어느 가을날,
전남 영암군 신북면에 있는 여석산 기슭을 한 스님이 걷고 있었다.
고개를 오르느라 숨이 찬 스님은
고갯마루에 앉아 숨을 돌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장삼자락으로 닦다가
건너편에 서 있는 커다란 감나무에 시선이 닿았다.
스님은 바랑을 짊어진 채
그 감나무에 올라 감을 한 개 따서 입에 넣었다.
『별미로군.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감은 처음이다.
하늘에 천도가 있다더니 그 맛이 이럴까.』
달콤한 감 맛에 취한 스님은
한 가지에 열린 감을 모두 따먹고는 자기도 모르게 다음 가지로 옮아갔다.
가지를 옮기는 순간 와지끈 소리와 함께
감나무 아래 샘물 속으로 빠져 버렸다.
깊은 샘물은 스님을 삼킨 채 옥빛으로 맑았고
스님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
이듬해였다.
모내기를 마친 그 마을엔 비가 내리지 않았다.
『허, 이게 무슨 징조인고. 70평생에 이런 가뭄은 처음이야.
늙은이들은 이런 흉변을 보기 전에 세상을 떠나야 하는 건데!』
마을 노인들은
긴 담뱃대에 잎담배를 담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이들은 여석산에 있는 그 샘물을 떠다가
갈라진 논바닥에 물을 대느라 바빴다.
남자들은 물을 푸고.
아낙들은 물동이로 물을 날랐다.
『거북이다. 거북』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물을 푸던 청년이 외치는 소리에
잠시 샘가에 앉아 쉬고 있던 젊은이들은 일제히 샘을 들여다보았다.
『와! 굉장히 큰 거북이로구나.
허리 앓는 사람에게 먹이면 약이 된다던데…』
마을 사람들은 산개구리를 낚시에 꿰어
거북을 낚아 올리는 순간 또 한번 일제히 놀랐다.
그 거북의 넓적한 은회색 등 한복판에는
임금 「왕」자가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
사람들은 「보통 영물이 아닐 것」이라며
마을 청년 명수에게 거북이를 넘겨주었다.
『자네가 낚아 올렸으니 자네 집에 가지고 가게.
집에 두어도 별일이 없거든 약에 쓰게나.』
명수는 왠지 입맛이 없었다.
마지못해 거북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물 담긴 항아리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
바로 그날 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창호지에 스밀 무렵
곯아떨어진 명수의 귓가에 목탁소리가 들렸다.
비몽사몽간에 잠을 깬 명수의 눈앞에
웬 스님이 목탁을 치며 다가왔다.
『여보, 젊은이 들으시오.
나는 지난해 샘가의 감나무에서 감을 따먹다 샘에 빠져 죽은 불제자요.』
『예? 샘에 빠져 죽었다구요?』
『그렇소. 나는 거북이로 환생하여 그 샘에 살고 있던 중
오늘 당신 집까지 오게 되었으니 어서 나를 샘에다 갖다 놓아주오.』
『아, 정말 모를 일이군요.』
『그 샘 속엔 용궁이 있어 그 용궁에서 유유자적 노닐고 있었는데
오늘 문득 바깥 세상이 그리워 물위로 나왔다가 변을 당하고 말았소.』
『스님, 하지만 전 오늘 당신을 맡았을 뿐
제 마음대로는 하지 못합니다.』
명수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사정했다.
☆☆☆
그러자 스님은 격한 호통을 쳤다.
『젊은이, 만일 나를 풀어주지 않으면
마을에 큰 변이 있을 것이니 그리 아시오.』
스님은 말을 마치자
「나무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목탁을 세 번 친 후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스님! 스님!』
『아니 여보 웬 잠꼬대가 그리 심하세요.』
『아! 꿈인가 생시인가.』
명수의 이마엔 구슬땀이 맺혀 있었다.
『여보, 거북이를 놓아줍시다.』
『참 당신 두 무슨 꿈 타령이세요.
몇 해째 허리를 앓고 계신 친정아버님께 갖다 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시겠어요.』
아내는 남편의 꿈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
날이 밝자마자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다.
『여러분, 이 거북이는 약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스님의 화신입니다.』
『뭐 스님의 화신, 별소릴 다 듣겠네.』
『흥 혼자서 약에 쓸려고, 허튼 수작 하지 말게.』
『그 거북이가 스님의 화신이라면 중생을 긍휼히 여길 게 아닌가.
그러니 어서 내놓게.』
『안됩니다. 이 거북이를 잡으면 변이 일어날 것입니다.』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영물을 얻더니 얼이 빠져 실성을 했나 보군.』
마을 사람들은 명수의 말을 믿지 않았다.
☆☆☆
순간 명수는
항아리 속의 거북을 가슴에 안고 뛰기 시작했다.
『저 놈을 잡아라.』
마을 사람들이 뒤를 쫓았다.
헐레벌떡 샘가에 이르렀을 때
바싹 따라온 마을 청년이 명수의 발을 걸었다.
나가떨어지면서 명수는 거북을 샘물에 던졌다.
순간 거북이 물에 뛰어들기가 무섭게
그토록 맑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일고 뇌성벽력과 함께 비가 쏟아졌다.
『앗! 비다. 비가 온다.』
명수는 빗발이 튀기는 황토 흙 위에 엎드려 외쳤다.
『스님, 감사하옵니다. 스님, 감사하옵니다.』
☆☆☆
그 후 이 마을은
늘 우순 풍조하고 풍년가 소리가 높았다.
『이게 모두 자네 덕일세.
하마터면 큰 죄를 지을 뻔했네.』
마을 사람들은 명수를 치하했고
그 샘을 용궁샘이라 불렀다.
명주실 세 꾸리가 들어간다는 용궁샘.
지금도 푸르고 차게 넘실대고 있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