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의 예감>
그의 종아리는 딴딴하게 여문 가을무 같았다. 그 종아리가 드러나는 헐렁한 검은 바지를 자주 입었다. 삐죽한 눈매에 작은 동공은 매서운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악당 두더지’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다른 소년들보다 여드름을 크게 앓고 있던 그의 얼굴은 울긋불긋하거나, 지난 여드름의 흔적으로 구멍이 송송 나 있었다. 헐렁한 바지를 유니폼처럼 입고 다니는 여느 남자애들처럼 눈썹을 다듬는 법이라곤 몰랐던 그였기에, 이마를 덮던 앞머리가 나부낄 때면 부리부리한 눈썹이 매서운 눈매와 만나 한층 악당 두더지다운 얼굴이 됐다.
그럼에도 그가 좋았던 이유는 교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소설, 철학 도서를 성실하게 꺼내보는 -같은 공간 내 거의 유일한-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투덜거리는 말만 쏘아낼 것 같던 입은 웃을 때면 눈에 띄게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시원하게 벌어졌다. 저녁을 먹고 미술실에서 만난 걔 입가에선 항상 상쾌한 치약향이 났다. 자기공간이라곤 없는 기숙사 학교 생활에서 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는 모습이 남다르게 고요해보였다. 영어로 된 노래들을 들려주었다. 편지를 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의 나는 ‘진짜 사랑’을 한 번 경험해보고 싶어 안달난 상태였다. 겨울방학을 앞둔 기대감과 ’진짜 사랑‘의 때가 임박했다는 어떤 예감은,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연말의 조명과 함께 반짝 빛났다. 그러니 축제 무대에 올라 춤추는 후줄근한 악당 두더지를 보고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 뛰기 시작한 건 예정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여러 특별활동 선택지 중 ‘벽화그리기’에서 또 만났다. 미술 선생님은 언제나 볼이 발그레했다. 선생님이 늘 풍기던 묵은 알콜 냄새가 붉은 볼의 근원이었을 것이다. 반쯤 취하거나 그보다 덜 취한 상태로 호탕하게 웃으시던 미술 선생님이 사탕처럼 쥐어주는 자유시간의 달콤함이 좋았다. 대부분은 아이들을 트럭 뒤에 태우고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부둣가에서 오뎅 사먹고 돌아오는 식의 자유였다. 이정도면 직업 정신이 있으신 상태셨다.
그 날의 자유는 남달랐다. 벽화를 그리기로 한 컨테이너 앞에 모여 선생님을 기다렸지만, 기다려도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았다. 일과 중 핸드폰 사용이 안 됐기에, 벽화를 그리러 모인 사람들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까 머리를 맞대는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까먹으신 모양이다, 학교에 알리지 말자! 이 또한 선생님이 주신 사탕 같은 자유시간으로 생각하기로 말을 맞추고, 더 길게 얘기할 것도 없이 모두들 뽀로로 흩어졌다. (훗날 숙취 때문에 못온 거라고 고백하셨다.)
모두가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자 컨테이너 앞에는 나와 두더지만 남았다. 우리는 학교 밖으로 산책을 다녀오기로 했다. 짝사랑 1년 차에 접어들고 있던 나는 그에 관해서라면 모든 시간과 체력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논둑을 따라 걸었다. 때때로 흘깃흘깃 망을 보며 걸었다. 걸음마다 한 뼘 넘게 자란 풀들이 발목을 간지럽힌다. 드디어 둘만의 사건이 생긴다. 내 마음은 모험의 긴장감과 함께 잔뜩 들떠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마을 길을 쭉 따라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계곡이었다. 처음 걸어보는 길 주변으로는 깔끔하게 관리된 집들이 늘어섰다. 내 마음만 빼고는 시시하고 평온하기 그지 없는 풍경이었다. 감나무가 아슬아슬 손이 닿을 듯 닿지 않을 듯한 높이에 탐스러운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그는 짧은 몸통에 긴 팔을 가지고 있었다. 나무 타기에 적합한 몸이었거나, 나무 타는 모습이 잘 어울리는 몸이었거나, 아님 둘 다 였거나, 아무튼 그랬다. 그는 훌쩍 나무에 매달려 푹 익어서 건드는 족족 과육을 흘리는 감을 따와 내게 건넸다. 달았다. 끈끈해진 손을 쪽쪽 빨고 옷에 닦으며 산책을 이어 갔다. 그래서 결국 계곡에 갔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로 한동안 그림의 구석에 주황색 둥근 것을 그려 넣었던 건 기억난다.
이 탈출극 2년 뒤, 나의 애인이 된 그는 이 날을 기억했지만 나만큼이나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그저 답답하고 지루한 일상에 작은 모험이 필요했던 걸 수도 있다. 그건 그의 평가처럼 그저 쉬이 손 닿지 않는 곳에 있던 감이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날의 탈출극에서 나에게 분명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 날 건네 받은 물렁한 감 하나에 우리에게 벌어질 미래의 일들이 담겨 있었다고 믿는다. 그가 나무에 훌쩍 매달려 감 한 알을 따오며 우리 사이 첫 이야기가 만들어졌으니까. 그 감에는 비 같은 첫 눈이 내리던 겨울날 버려진 박스를 머리에 이고 함께 달리는 순간이 담겨 있었고, 제주도 여행 중 서리한 귤 몇 알도 담겨 있었다. 어쩌면 만나는 날이면 날마다 먹었던 떡볶이도, 헤어짐의 순간도, 돌이킬 수 없음을 받아들이던 긴 날들도, 애매하게 덜 큰 상태로 다시 만났던 그 날도, 결국 하고 싶던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던 쭈볏쭈볏함까지도 담겨 있었을지 모른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추억에도 내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줄기차게 그리던 주황색 둥근 것은 스케치북 바깥으로 밀려났다. 요즘은 저 나무에 달린 감은 단감인가 대봉인가, 곶감은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나중에 내 집이 생긴다면 감나무를 심을 것인가 말 것인가 따위의 생각을 앞서지 못한다. 감의 예감은 효력을 다 했다. 그저 가끔은 지난 날처럼 탈출극을 찍으면서 갈 필요가 없어진 그 마을길을 따라 걸어보고 싶다. 나는 다시 마주칠 그 감나무를 알아볼 수 있을까? 내가 알아보지 못한대도 같은 자리에 서서 또 다른 누군가와 우연히 마주치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을 감나무를 상상한다. 감 한 알에 담길 어떤 예언같은 이야기를 상상한다. 이 세상에 이야기가 영원히 만들어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