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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기술 1 /
내 힘을 빼고, 악의 문을 걸어 잠그는 싸움 기술
- ‘스스로 하듯’ 이라는 영적 원리에 대한 오해
DP 278
‘우리가 지옥의 공동체에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내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신성한 섭리의 법칙들에 따르는 것뿐이다.
그 법칙들 중 하나는
우리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하고,
그곳에서 나가기를 원해야 하며, '
마치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처럼(as if of our own power)'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TCR 457
‘인간은 스스로 의지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한 어떠한 선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이 능력이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다.
인간이 이것을 자유 안에서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듯 행할 때,
그 선은 그 사람에게 귀속되고
결합을 가져오는 상호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능동과 수동의 관계,
그리고 능동의 결과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동의 협력과 같다.’
인간은 스스로 영적인 힘을 만들어낼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외부에서 오는 자극과 에너지를 넘겨받아
안으로 담아내는 영적인 그릇, 즉 수용체일 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인간의 영혼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선한 영향력과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한 영향력을 받아들이는 위치에 서 있다.
이처럼 늘 주님이 부어주시는 힘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는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는 '수동'의 상태가 된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수동의 상태는
로봇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비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지옥이 밀어붙이는 압력과 천국이 당기는 인력을
영혼 내밀한 곳에서 완벽하게 맞물려 상쇄해 주신다.
이로 인해 인간의 내면에는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영적 평형 상태', 즉 자유의지가 수호된다.
주님이 마련해 주신 이 안전한 평형의 공간이 있기에,
본래 수동적인 그릇에 불과한 인간은
비로소 주님이 공급하시는 선한 권능을 전해 받아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된다.
만약 인간이 그저 수동적인 그릇이라는 사실만 내세우며
아무런 의지적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님이 영혼 내부로 부어주시는 능동적인 구원의 유입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그대로 흘러가 버리고 말 것이다.
아무리 좋은 에너지를 채워주어도
그릇이 반응하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주님은 당신의 능동적인 힘을 인간에게 전해주시며,
인간이 그 위임받은 능력을 주도적으로 사용하기를 바라신다.
인간 스스로 마치 자기 자신의 힘을 꺼내어 쓰듯이
단호하게 악을 거부하고 선을 선택하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인간이 영적 평형 상태 안에서 주님이 주신 이 권능을 무기 삼아
강력하게 의지를 발동하여 악에 저항하는
이 실천을 가리켜 바로 '수동 편에서의 협력'이라고 부른다.
싸울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주님이라는 능동의 원천'에서 흘러나왔지만,
그 힘을 받아 실제로 악을 막아내는 주체는 '인간이라는 수동의 그릇'이 되어
단호하게 움직이는 구조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 인간이 맺는 정밀한 신인(神人) 협력의 참된 모습이다.
어떤 결합도 한쪽의 일방적인 밀어붙임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내면으로 끊임없이 유입시키실 때,
인간 역시 자유의지 안에서 능동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유입되는 악을 거절하고
진리로 맞서 싸우는 반작용을 보일 때에야,
비로소 인간의 영혼은 천국의 올바른 질서 안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 편에서 주체적인 결단력을 발휘하여
주님의 뜻에 응답하는 역학을 '상호적인 반응'이라 한다.
이러한 상호적 작용이 삶 속에서 실제로 일어날 때,
주님의 구원 권능은 인간의 영혼과 비로소 온전히 맞물려 일하기 시작한다.
그때 비로소 영혼을 짓누르던 자아의 낡은 지옥적 관성이 끊어지고,
그 자리에 주님이 친히 빚으신 천국적 자아가 안정되게 안착한다.
그러나 정작 인간이 영적 전투의 치열한 경계선에 서면,
이토록 정밀한 협력의 원리를 까맣게 망각한 채
고질적인 피로감과 절망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무력감이 반복되는 원인은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행하라'는 영적 원리를 오해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주님의 전능하심을 시인하면서도,
실제 유혹이 닥치는 삶의 현장에서는
매 순간 자신의 지각과 힘으로 모든 상황과 감정을 저울질하며
스스로 무게를 짊어지다가 지쳐버리는 것이다.
이는 행동의 주체성과 힘의 소유권을 명확히 분리하지 못하고,
자아의 오래된 염려의 관성에 다시 종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저서의 면밀한 법칙에 따르면,
주님은 인간을 지옥의 결박으로부터 이끌어내기 위해
반드시 인간 편에서의 치열한 노력을 요구하신다.
인간이 마치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고군분투하며 투쟁하는
능동적인 협력의 자리가 있어야만,
주님의 구원 능력이 흘러 들어갈 영적 통로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명령의 참된 의도는
인간의 유한한 역량으로 싸움의 최종 결과나 완벽한 악의 멸절까지
책임지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인간은 유혹이나 시련이 닥칠 때
내가 내 의지와 결단력으로 이 부정적인 상태를
완전히 통제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조급한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이 순간, 주님이 열어두신 신성한 협력의 통로는
'내 힘으로 모든 무게를 감당하려 드는' 교만과 염려의 짐으로 변질된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스스로의 정신적 에너지를 급격히 소모하며
깊은 피로 속에 침전되고 만다.
참된 의미에서 스스로 하듯 행한다는 원리는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니다.
행동의 외형은 인간의 주체적인 결단에 의거하여 단호하게 손과 발을 단속하되,
그 싸울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기원함을
매 순간 가슴 깊이 동시에 시인하는 철저한 의탁의 실천이다.
여기서 인간이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행하라’는 표현을
어떻게 오해하기 쉬운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그 분별이 더욱 명확해진다.
첫 번째 오해는, 인간이 발휘하는
능동적인 주체성 자체를 죄악시하는 태도이다.
지독한 유혹이나 무력한 감정이 엄습할 때,
인간이 '내 힘과 의지로 이 악을 끊어내겠다'고 다짐하는 것 자체를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영적 오류이자 교만이라고 규정하는 시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겉보기에는 공로주의를 경계하고
주님의 주권을 높이는 순수한 신앙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간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 낙인찍는
또 다른 왜곡에 불과하다.
이 오해에 사로잡히면 유혹이 올 때
스스로 결단하여 악에 저항하려 하지 않고,
주님이 대신 해결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방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는 결국 영혼의 문을 열어둔 채 지옥의 유입에 내맡기는
심각한 영적 나태를 낳는다.
TCR 457항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이 악과 투쟁할 때 마음속으로 '이 싸움의 힘은 내 것이다'라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공로주의의 오류이다.
그러나 실제 투쟁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은 힘을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힘인 것처럼 주체적으로 꺼내어 써야 한다.
격렬하게 의지를 발동하여
'내가 오늘 마주한 이 악한 행동을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단호하게 다짐하고 결단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단순히 '자신의 힘으로 끊으려 드는 다짐은
오만이다'라고만 정의 내려버리면,
유혹 앞에서 손발을 묶어두는 외적 단속마저 포기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속에서 악한 충동과 흔들림이 올라올 때,
인간은 자아의 나태함을 탓하며 소극적으로 서 있기보다,
마치 자신의 생명을 지키듯 강력하게 의지를 발동하여
행동을 제어하고 나아가야 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유일한 오류는,
그 승리의 결과와 결단의 지혜가
자신의 순수한 도덕적 우월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 교만뿐이다.
그러므로 행동의 외형은 나 자신이 하듯
단호하게 악을 밀어내고 손과 발, 혀를 제어하되,
내면의 중심에서는 이 결단력과 거부의 지혜가
오직 주님께서 평형 상태를 통해 실시간으로 공급해 주시는
신성한 권능임을 인정해야 한다.
상호적 결합을 위해 임시로 허락하신 협력의 능력임을
매 순간 시인하며 공로의 원천을 주님께 돌릴 때,
인간은 지쳐 고갈되지 않고 참된 영적 전투의 승리를 맛보게 된다.
두 번째 오해는, 인간의 태생적 무력함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태도이다.
즉, ‘인간은 태생적으로 온통 악뿐이기에
결심이나 결단력 등 자기 의지의 힘으로는 지옥의 결박을
결코 끊어낼 수 없다’고 단정하는 시각이다.
이러한 표현이 자칫 인간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피동적이고 무력한 존재로 오해하게 만드는 이유는,
힘의 ‘소유권’과 ‘능동적 사용권’을 명확히 분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그 자체는 태생적으로 악뿐이기에
지옥의 결박을 끊어낼 만한 선과 진리의 힘을
자기 자신 안에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이 공급해주신 능력을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as if from oneself)' 꺼내어 쓰듯
주체적인 결단력을 발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구원 법칙이다.
주님은 힘의 소유권을 당신께 두시되, 인간에게는 그 힘을
능동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완벽하게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영적 평형 상태 안에서
주님의 능력을 넘겨받아 마치 스스로 하듯 결단력을 발휘하여
악을 끊어내는 것은 영적 원리에 부합한다.
외관상으로는 인간이 스스로의 결단력으로
악한 습관을 끊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제 현상은
인간이 주님의 유입을 받아들여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라는 자유 안에서
주체적 선택권을 완벽하게 실행해 낸 거룩한 결과이다.
인간이 스스로 하듯 결단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권능 역시
영혼 내부에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겉으로 손을 묶어두지 않고
행동과 생각을 단호히 단속하며 악을 밀어내되,
내면의 중심에서는
‘지금 이 악을 거부하고 멀리할 수 있는 의지와 지혜는
오직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임을 확고히 인지해야 한다.
내가 싸우는 것처럼 능동적으로 몸부림치면서도
승리의 공로를 즉시 주님께 돌려 자아의 교만한 개입을 배제하는 것은
정밀한 신인(神人) 협력의 질서다.
그러나 이 질서가 깨어질 때,
인간은 다시 모든 영적 부하를 홀로 짊어진 채
깊은 절망과 피로 속에 지쳐가게 된다.
인간이 자신의 허약한 상태를 바라보며
지쳐가는 근본적인 이유는
겉 사람의 기억과 유전적 본성에 남아 끊임없이 떠오르는
악한 즐거움과 흔들림의 상태를 자신의 패배로 오인하기 때문이다.
속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변화되어 천국의 궤도에 진입했을지라도,
육체와 뇌의 물리적 관성은 삶의 구체적인 순간마다
지옥의 하강 인력과 반응하며 끊임없는 유혹을 발생시킨다.
이때 내면에 일어나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바라보며
‘왜 나는 여전히 이 모양인가’라며
스스로 영적 상태의 결과값을 계산하고 판단하려 들면,
영혼은 지옥이 파놓은 자책과 정죄의 늪에 빠져들게 된다.
지옥으로부터 유입되는 악한 생각과 성향들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유전적 악의 토양을 자극하여
동요를 일으키지만, 인간이 그것에 동의하여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결코 영혼에 귀속되지 않는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 따르면
유입 자체는 인간의 소유가 아니며,
오직 의지가 그것을 즐거워하고 승인할 때만 인간의 죄로 고착된다.
따라서 벌어지는 상황과 지옥의 유입 자체를
자신의 힘으로 완전히 통제하거나 전멸시키려 지치지 말고,
영적 평형 상태 안에서 그 외적 동요에 동의하기를 거절하는
주체적 거부권을 실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이 삶의 구체적인 국면마다 지켜내야 할 실천은,
유입되는 악에 대한 내면의 동요를 거부하는 상태를
일상 속에서 완강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거부의 자리를 지킬 때,
주님께서는 영혼의 심층에서 묵묵히 지옥의 결박을 끊어내고
정화의 질서를 친히 실행하신다.
인간이 이처럼 동의하기를 거절하며 문을 걸어 잠그는 행동은,
역설적으로 ‘주님께서 이 악을 친히 제거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온전히 믿기 때문에 가능한 최고의 의탁이다.
지옥의 영향력으로 인해 악한 생각이 떠오를 때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즉시 소멸시키거나 완전히 전멸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유입은
지옥의 공동체로부터 끊임없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발휘해야 하는 구체적인 거부권은
'그 생각과 감정에 동의하지 않고 동조하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내면에서 악한 즐거움이나 낙심의 동요가 일어날 때
의지적으로 ‘이것은 내가 원치 않는 지옥의 유입이다’라고
명확히 선을 긋고, 생각의 방향을 말씀의 진리로 돌려
행동을 단속하는 것이다.
외적으로 흔들림이 일어나는 상태 자체를
자신의 힘으로 통제하려다 지치는 것이 아니라,
그 흔들림이 영혼의 승인(동의)을 얻지 못하도록
의지의 문을 걸어 잠그는 상태가 바로 거부권을 유지하는 실천이다.
지옥이 유입될 때 인간의 내면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흔들림과 통증,
즉 그때 인간이 느끼는 가혹한 감정과 심정 상태는
인간의 통제 권한 밖의 영역이다.
따라서 이를 자신의 유한한 힘으로 장악하고 억누르려 드는 것은
올바른 전투 자세가 아니다.
그것은 겉모습만 신앙적 투쟁일 뿐,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자아의 교만이다.
반면, ‘내가 동의하기를 거절하고 이 자리를 지키면,
주님께서 정화해 주신다.’는 약속을 신뢰하는 사람은
결과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오직 거부의 실천에만 집중한다.
인간이 '마치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처럼'
단호하게 동의를 거부하는 수동 편에서의 협력을 수행할 때,
비로소 주님의 능동적인 구원 권능이
영혼 내부로 흘러 들어올 수 있는 합법적인 통로가 열린다.
결국 인간이 자기 몫인
'동의의 거부'를 철저히 고수하는 능동적 결단은
주님의 신성한 섭리를 온전히 신뢰한다는 증거이다.
영혼의 심층을 청소하고 새 자아를 정착시키시는 주님께
모든 결과값을 맡겨드릴 때,
비로소 가장 정밀하고 실천적인 영적 의탁이 완성된다.
이제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
앞서 배운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자.
많은 이들이 주님의 전능을 인식하면서도
영적 무력감과 피로를 겪는 것은
매 순간 마주하는 상황과 그때 일어나는 내면의 감정을
주님의 유입과 섭리에 의존하기보다,
자기 안의 제한된 기준, 판단, 감각 등으로 가늠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적 전투의 경계선에서 마주하는 가장 깊은 고뇌인데,
이러한 무력감과 피로가 반복되는 근본 원인은
주님의 명령을 오해하는 데 있다.
즉,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행하라'는 지침을 오독한 나머지
영혼의 중심 위에 스스로의 노력과 염려의 무게를
과도하게 얹어두는 탓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구체적인 국면마다 낙심하게 되고
이는 투쟁의 결과와 도덕적 성취까지도
오롯이 자신이 책임지려 하기 때문이다.
원래 천국과 지옥의 거대한 압력을 상쇄하여
영혼 내밀한 곳을 완벽한 평형 상태로 붙들고 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아울러 내면의 무게중심을 맞추고
영계의 균형을 조절하시는 분 역시 주님이시기에,
이 역동적인 평형 상태 안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몫은 명확하다.
그것은 오직 주님이 허락하신 평형 안에서
말씀의 진리를 무기 삼아 적극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단속하고,
악에 대항하여 저항하는 실천적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혹이나 시련이 닥칠 때
인간은 주님이 마련해 두신 평형의 질서를 신뢰하지 못한 채,
자신이 직접 내면의 균형을 통제하여 악을 단번에 전멸시키려 든다.
이처럼 스스로의 제한된 역량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결과까지 책임지려 하다가
내재된 정신적 에너지를 급격히 소모하게 되며,
결국 주님의 권능이 흘러 들어와
역사하실 수 있는 영적 통로는 차단된 채
영혼은 깊은 피로감에 침전되고 만다.
참된 의미에서 스스로 하듯 행한다는 것은
결코 행동을 멈춘 채 방관하라는 뜻이 아니며,
그렇다고 자신의 힘으로 승리를 완전히 쟁취하라는 뜻도 아니다.
도리어 치열하게 악을 미워하고 생각과 행동을 제어하되,
싸울 수 있는 의지와 진리의 지식, 그리고 최종적인 승리의 동력이
전적으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음을 매 순간 인정하는
철저한 의탁의 기술이다.
따라서 유혹이 올 때 ‘내가 이 악을 반드시 버려야겠다.’고
단호하게 다짐하는 것은, 영적 평형 상태 안에서
반드시 발휘해야 할 능동적인 결단력이라 하겠다.
다만 이러한 결단의 순간에는 정밀한 영적 질서가 요구된다.
행동의 외형은 자신에 의거하여
단호하게 행동을 단속하며 악을 거절하되,
내면의 중심에서는 오직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만
이 악을 밀어낸다고 고백하며
공로의 원천을 주님께 돌려야 하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행동의 주체는 나 자신인 것처럼 움직이지만
힘의 근원은 오직 주님뿐임을 시인하는
유기적인 신인(神人) 협력의 질서가 깨어질 때,
인간은 다시 자아의 낡은 관성에 속아
스스로 모든 무게를 짊어진 채 지쳐가게 된다.
그러므로 결과에 대한 모든 염려를
주님께 온전히 넘겨드리고 자아의 개입을 비워낼 때
비로소 영혼을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벗겨지며,
주님이 친히 이끄시는
참된 자유와 안식이 내면 깊은 곳에 안착하게 된다.
주님은 인간이 유혹 앞에서 단순히 연약함을 탓하며
소극적으로 방관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도리어 말씀의 진리를 무기 삼아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행하듯
용기 있게 일어나 결단력을 발휘하기를 바라시며,
이처럼 인간을 이끄시는 자유의지의 은혜야말로
주님이 주신 가장 거룩한 사랑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자아의 관성과 염려의 무게에 속아 방관하지 않고
주님의 전능을 신뢰하며
오늘 마주한 악과 결연히 맞서 싸울 때,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인간의 내면에 새로운 자아를 정착시키시어
마침내 가장 깊고 정결한 천국의 안식과 평강의 질서로
영혼을 인도하실 것이다.
- 영적 투쟁은 지적인 자각이나
일시적인 정서적 슬픔만으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관념 속에서는 거룩한 질서를 논하나
실제 삶의 적용에서는 지독한 유혹과 악의 관성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괴리가 발생한다.
마음의 미세한 자각이나 일시적인 가책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정서적 떨림에 그칠 뿐,
실제 삶에서 악을 씻어내고 천국의 선을 실행할 실체적인 힘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면의 자각이 구체적인 행동의 제어와
영적 전투로까지 이어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아를 속이는 가짜 위안이자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
이 치명적인 무력함의 문제를 해결하고
실제 삶에서 주님 구원의 권능이 작동되게 하려면
단순히 감정으로 후회하는 것을 넘어
말씀의 지식으로 명확히 악을 지목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영적 전투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DP 278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어떠한 악도 정화할 수 없고
지옥으로부터의 유입을 거부할 수 없으며,
만일 그가 주님을 우러러보지 않는다면 결코 그것을
정화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주님 없이는 악이 정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을 우러러보며 악을 죄로 보고 멀리하는 사람은
주님과 결합하고, 주님과 결합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AC 8391
'진정한 회개는 자신이 악 안에 있음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고 부끄러워하며 슬퍼하는 것,
그리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죄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삶 속에서 악을 행하기를 그치고
악을 미워하며 그것으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는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매일,
그리고 그가 유혹에 빠질 때마다 다시 마음을 돌이켜
주님을 우러러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려 시도하는 사람이며
이러한 시도 속에 주님의 능력이 서서히 유입된다.'
저서의 원리는 주님과의 신성한 결합이
인간 편에서의 실천적 의무를 절대적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악을 죄로 보고 멀리하는 행위는
인간이 결코 손을 놓고 방관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내면에 떠오른 이기심과 악한 충동을
말씀의 질서에 반하는 죄로 명확히 인지하고
행동을 제어하여 멀리할 때만 주님과의 실체적인 결합이 성립된다.
이러한 영적 투쟁은
지적인 자각이나 일시적인 정서적 슬픔만으로는
결코 성취될 수 없으며,
반드시 삶 속에서 악을 행하기를 그치고 돌아서는
적극적인 거부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인간이 유혹에 직면할 때마다
낙심하지 않고 자발적인 투쟁을 지속할 때,
주님께서는 그 투쟁의 통로를 통해 지옥의 권세를 이길
천국의 능력을 영혼 내부에 서서히 유입시키신다.
TCR 530
'사람이 일주일에 한두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씩
자기 삶의 악들을 성찰하고 자신이 지은 죄들을 인지한 후
주님 앞에서 그것들을 행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
이것이 실제적으로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구체적인 악들을 지목하여 멀리하지 않고
그저 자신을 죄인이라고 일반적으로 고백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며 아무런 효력도 갖지 못한다.'
DP 151
'악이 즐거움으로 의지에 다가올 때
인간은 그것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지 말고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이성으로 숙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 즐거움을 잠시 멈추고
그것이 주님께 반하는 죄임을 생각하여 거부할 때
주님께서는 은밀히 인간의 내면에서 역사하시어
그 악을 분리하시고 천국의 선을 유입시키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삶에서 영적 원리가 작동하려면
마음의 자각에만 머물지 말고
지옥의 유입에 대항하는 실제적인 거부를
구체적 행동으로 실행해야 한다.
유혹이 올라올 때
자신의 도덕적 노력으로 참으려는 교만을 버리고,
내면의 무력함을 겸손히 시인하며
마주한 죄의 상태를 주님 앞에 정직하게 시인해야 한다.
지나친 걱정이나 분노, 나태와 같은 악의 충동이 짓누를 때
자아의 힘으로 이를 뿌리 뽑으려 하는 순간
영혼은 패배의 질서로 침전된다.
인간의 본질적인 의무는
악을 스스로의 힘으로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평형 상태 안에서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혹의 순간마다 말씀의 기준을 깨워
지금 일어나는 욕망이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구체적인 죄임을 명확히 시인하고 제어하려 애써야 한다.
이러한 태도가 인간 편에서의 공로를 지우고
주님의 전능한 권능을 영혼 내부로 유입시키는
실제적인 의탁의 영적 태도가 된다.
영적 정화의 중심 과제는
악의 본능을 단번에 전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찾아오는 유혹의 기류에 동의하지 않는
주체적 거부권을 실행하는 데 있다.
영계의 질서에서 심판의 기준은
악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
의지가 그 악을 기쁨으로 승인했는가에 달려 있다.
외적인 삶이나 오랜 관성 때문에 순간적으로 넘어졌을지라도,
내면의 속사람이 진리를 붙들고 끝까지 악에 동의하기를 거절한다면
그 악은 영혼의 핵심과 영구 결합하지 못하고
외적인 영역에만 머무는 불순물로 격하되어
사후에 온전히 분리된다.
더불어 마음으로 악을 거부했음에도
현실의 삶이 당장 완전하게 바뀌지 않는
거듭남의 시차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속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수정되었을지라도,
육체와 기억 속에 굳어진 수십 년간의 외적 습관이
천국의 질서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기까지는
점진적인 과정과 오랜 시간의 흐름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당장의 흔들림을 구원의 실패로 오인하여 낙심하는 행동은
이미 시작된 내면의 정화 질서를 불신하는 행위이므로,
지금의 반복은 낡은 관성이 멈추기 전의
잔여 영향력일 뿐이라는 영적 사실을 확신하며
매일의 실천적 전투를 묵묵히 견뎌내야 한다.
DLW 425
'인간의 의지는 사랑에 속하고 지성은 지혜에 속한다.
의지는 지성 없이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지성 역시 의지 없이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의지가 지성과 결합하지 않거나,
지성이 의지와 결합하지 않으면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지성이 의지와 결합하여 진리를 비출 때에만
의지의 사랑은 행할 실제적인 방법을 보게 되며,
의지가 지성의 진리와 결합할 때에만
그 진리는 실제적인 생명을 얻게 된다.'
AC 9336
'주님께서는 인간 내부의 악들을
단 한 순간에 한꺼번에 제거하지 않으신다.
만약 그것들이 한꺼번에 제거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파괴될 것이며 인간은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악들은 조금씩, 그리고 점진적으로,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물러나게 된다.
이는 인간이 그 점진적인 정화의 과정 속에서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신성한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외적인 변화가 즉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영적인 투쟁은
단순히 의무감으로 참는 고통이 아니라,
지성과 의지를 결합하여 주님과의 신성한 사랑을
수호하는 거룩한 과정이다.
지성이 진리를 비출 때에만
의지의 사랑은 행할 실제적인 방법을 보게 되며,
의지가 그 진리와 결합하여 실천할 때에만
비로소 진리는 관념을 넘어 실체적인 생명을 얻게 된다.
주님께서는 홀로 지옥의 거대한 폭동을 완벽히 제압하시어
우리 영혼 내부에 자유로운 저울의 평형 상태를 지켜주고 계신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이 유혹 앞에서 단순히 무력감을 느끼며
소극적으로 방관하거나 마음의 눈으로만
빛을 바라보는 상태에 머물기를 원치 않으신다.
인간이 자신의 이기심을 죄로 여겨 미워하고,
손을 묶어두지 않은 채 생각과 행동을 제어하며
치열하게 투쟁하는 실천의 자리에 설 때에만 비로소
주님의 천국 영향력은 실체적인 구원의 권능으로 역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자아의 본능적인 중력과 오랜 습관의
어둠에 속아 낙심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전능을 신뢰하며
마주한 악과 결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의 독성을 조금씩 점진적으로
분리하고 계시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가
마침내 영혼을 짓누르는 지옥의 결박을 끊어내시고,
인간의 내면에 천국적 고유속성인 새로운 자아를 정착시키시어
가장 깊고 정결한 천국의 안식과 평강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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