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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요10조 답글
태풍이 끝나 비가 멈추어 시간이 나기에 대승공 자취를 찾아 오다련 후손인 나주오씨 선조들 비문을 보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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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률사 상량문에서 질문에 대한 훈요10조 답글입니다.
※고려 개국공신 최지몽(최응,영암) 신숭겸(곡성)과 903~914년 나주해전에서 도와준 영암청해진(완도가 당시는 영암임) 후예들이 왕건을 도와 삼국통일을 했는데 차령이남 중에서 전라도 사람은 등용하지 말라는 해석은 틀리다는 내용임(대승공류차달 등은 황해도 무역상으로 서남해안호족과 연합하여 해적으로 부터 보호함) .
1. 훈요10조 : 932년(태조 26년)에 태조 왕건이 후대의 왕들에게 남긴 유언
① 국가의 대업이 불교의 호위와 지덕에 힘 입었으니 불교를 숭상할 것
② 절의 쟁탈과 마구 만들어 내는 것을 금할 것
③ 왕위 계승은 적자적 손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어질지 못할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
④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배격할 것
⑤ 서경(西京)을 중시할 것
⑥ 연등회·팔관회 등의 중요한 불교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⑦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을 것
⑧ 차령산맥 이남으로서 공주강 바깥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⑨ 백관의 기록을 공평히 정해줄 것
⑩ 옛일을 거울삼아 지금을 경계할 것
※ 답변 내용일 길어 새창에 답변합니다(출처 : https://blog.naver.com/assah1/20059481311 내용 발췌)
2, 훈요10조에서 ⑧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銜統合之怨, 犯 生亂, 且其僧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奸巧言語, 弄權亂政, 以致 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3. 여기서 문제가 되는 車峴以南, 公州江外의 지역은 어디인가?.
한자를 보면 車峴의 ①峴은 볼見에 뫼山이 옆에 붙어있는 고개/재 峴자로 산이 눈높이에 보이는 높지않은 지역를 뜻하는 글자다. ②嶺이란 거느릴領에 뫼山을 머리에 이고있는 글자로 산들을 거느리고 있는 높은 지역을 뜻하는 글자다. 낄夾에 뫼山이 옆에 붙어있는 ③峽[협]은 높은 산과 산사이에 있는 낮은 지역을 뜻한다.
4. 훈요십조를 원문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원문의 峴이란 글자를 嶺으로 바꿔치기하여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峴자를 嶺자로 바꿔치기하는 것도 모자랐는지 한술 더떠서 종적개념인 峴자를 산맥처럼 길다란 횡적개념인 산맥으로 왜곡하여 원문의 車峴以南을 車嶺山脈以南으로 조작 왜곡함으로써 원문의 뜻이 완전히 달라지도록 만드는 사람이 있다.
車嶺山脈 명칭은 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가 처음 만들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 일제시대 이전의 산경도나 지리서에는 없는 명칭이다.
훈요십조의 차현이남을 차령산맥이남으로 왜곡하여 해석하면 차령산맥이 지나는 지역 아래지방인 강원도 남부이남과 경기도이남 전체가 된다. 훈요십조의 峴을 嶺으로 왜곡 변형하여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훈요십조 8항 車峴以南, 公州江外의 公州江外는 어디이고 公州江內는 어디인가. 錦江과 公州江은 같은 개념인가.
고지도와 조선시대 山經表등을 보면 白頭大幹의 淸北正脈과 淸南正脈사이에 있는 강을 淸川江이라 하고, 漢北正脈과 漢南正脈사이에 있는 강을 漢江이라 하고, 錦北正脈과 錦南正脈사이에 있는 강을 錦江이라 하며, 洛東正脈에 있는 강을 洛東江이라 했다.
錦北正脈과 錦南正脈사이에 퍼져있는 강 전체를 뜻하는 錦江과 公州고을을 흐르는 公州江은 다른 개념이다.
왕성이나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동서남북 방위 대신에 外를 써서 표기한 예는 없다. 外를 以南으로 조작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은 근거를 찾아볼수 없는 잘못된 해석이다.
훈요십조가 기록된 고려사를 보면 936년 태조 왕건 19년에 후백제를 평정하고 후백제 지역을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였는데 安은 長安의 뜻으로 왕이 있는 개경을 뜻하며 安南은 개경의 남쪽 지역이란 뜻이다. 또한 경주(慶州)를 개경의 동쪽지역이라 하여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개경의 서쪽지역 해주(海州)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라 하였다. 또한 거란의 침입으로 훈요십조 원본이 불타기전인 고려 6대왕 성종 995년에 지방 행정구역을 공주,대전지역의 공주강 남쪽지역을 하남도(河南道), 전북지역을 강남도(江南道), 전남지역을 해남도(海南道)라 하였다. 개경에서 봤을 때 공주강 남쪽에 있으면 河南道, 江南道라 하였고 개경에서 봤을 때 백두대간 남쪽에 있으면 嶺南道, 동쪽에 있으면 嶺東道라 하였다. 왕이 있는 개경에서 봤을때 명칭이다.
통일신라 5소경 명칭을 보면 중앙의 충주 中原京, 북쪽의 원주 北原京, 서쪽의 청주 西原京, 남쪽의 남원 南原京이라 명명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봤을때 전라도는 금강 남쪽이란 뜻의 湖南, 경상도는 백두대간 남쪽지역이라하여 嶺南, 강릉지역은 嶺東, 원주지역은 嶺西라 하였다. 위의 경우처럼 고려 태조 왕건부터 조선말까지 公州江以南 지역은 개경과 한양에서 봤을때 남쪽이므로 南이란 단어를 넣어서 기록하였다. 태조 왕건이 생전에 公州江以南을 개경에서 봤을 때 남쪽이라 하여 南을 써서 표기했고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등 우리 조상들이 기록한 정사에 公州江以南 지역을 개경이나 한양에서 봤을때 南으로 표기했지 外라는 희한한 표기는 없다.
지역주의자들 방식대로 훈요십조의 차현이남이 차령산맥이남이라면 강원도 중남부 오대산에서 내려와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인 차령산맥이남 지역은 강원도 남부, 충청도이남 전체가 된다. 그럼에도 직접 해당지역인 충청도는 빼고 멀리 떨어진 전라도설을 주장하는 이유가 뭔가. 지리적, 인문적 소양 부족이나 사악한 정치적 목적이 아니면 주장할수 없는 비학문적이고 비양심적인 주장이다.
궁예는 변란을 피해 차현고개 인근의 칠장사에서 유아때부터 10여세까지 보낸 연유로 칠장사에서 가까운 서원경이 있었던 청주지방 일대는 궁예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으며 궁예가 청주출신 사람들을 각별히 신임하여 중용하였고 왕권강화를 위해 청주사람들을 철원으로 이주시켜 왕조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왕건일파의 반란으로 나라를 빼앗긴 궁예의 추종세력들은 크나큰 분노와 반감을 가졌고 궁예의 정치적 고향이자 왕조의 기반이었던 청주지방을 중심으로 임춘길, 이흔암, 선장형제 등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서 왕건이 그지방 호족들에게 동물의 성씨를 내리면서까지 탄압하였고 일부 세력은 후백제에 투항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왕건은 청주인들의 반란이 계속되자 청주인들이 집단이주한 철원지역을 피해 자기의 고향인 송악으로 수도를 옮긴다. 고려중기 청주 남쪽에 있었던 천민주거지역 명학소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차현이남 공주현 외곽지역은 적극 호응하였다.
왕조를 찬탈하면 이전 왕조의 기반이 되었던 지역은 새왕조에서 경계하게되고 이전 왕조의 기반이 되었던 지역은 옛 영화를 되찾고자 틈만 나면 도발함으로 왕건이 궁예의 기반이었던 청주지방을 경계하라는 유훈을 남긴 것으로 보여진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왕조의 기반인 개성사람들을 많이 살상하고 과거를 못보게 했던 기록이 있는데 같은 맥락이다.
후삼국시대 말에 풍수도참설을 완성시키고 고려,조선의 정책과 일상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던 풍수의 宗師이자 國師로 추증된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 왕융에게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지시켰고 송악산에 솔나무를 심고 왕성의 기반을 다지도록 하였으며 송악 명당론을 주장하고 경주는 명당이 아니라고 하여 민심을 경주로부터 떠나게 하여 신라의 근간을 흔들어 왕건의 창업을 도왔다. 또한 전라북도 성수산(聖壽山)이 산세가 천자가 조례를 받는 천자봉조지상(天子奉朝之像)으로 왕기가 서린 지역이라 하여 초야에 묻혀있던 왕건을 데려다 성수산에서 107일간 기도하게하고 고려를 건국하도록 훈육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이방원등도 성수산에 와서 조선 건국을 위한 기도를 올리거나 근처에서 사냥을 한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고 성수산 上耳庵에 친필유적이 남아있다.
스승인 도선에게서 풍수의 영향을 크게 받은 왕건은 청주인들의 반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고 쿠데타로 몰아낸 궁예의 정치적 기반이자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를 건국한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를 멸망시킨 김유신의 출생지역이기도 한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이 풍수적으로 꺼려졌을 것이다.
스승 도선의 고향이자 청년시절 개국의 기반을 닦았던 전라도에 대해 왕건이 마음과 권력을 모두 주었는데 말년을 함께 보낸 부인들이 전남 승주출신이고,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고 장성한 큰 아들 왕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불교숭양 및 훈요십조2항에 스승 도선의 지도에 따르도록 유훈을 남겼고 도선은 여러 곳에 비보 사찰을 세웠다.
훈요십조 車峴以南은 車嶺山脈以南이고 公州江은 錦江이라고 왜곡 조작하면서도 차령산맥이남, 금강유역에 직접 속하는 충청도 지역은 훈요십조가 가리키는 지역이 아니고 차령산맥과 공주강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도지역이 훈요십조가 가리키는 지역이라며 훈요십조 전라도설을 주장한 사람이 누구인가. 자료에 의하면 일제강압기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편수관 이마니시(今西龍)에 의해 그 해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기 시작하였다.
이마니시는 구한말까지도 우리의 역사로 가르쳤던 단군조선을 신화로 규정하여 우리 역사의 기원을 일본보다 아래로 만들고 임나일본부설을 주입시켰으며 한사군의 위치를 조작하려 점제현비를 조작하고 식민지배에 장애가 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일부 내용을 부정하는 등 일제 식민지배를 위해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 조작했던 핵심인물이다.
차현이남 공주강외 뜻를 왜곡 변형한 이마니시는 그러나 전라도는 차별받지 않았으므로 훈요십조는 조작됐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마니시의 수제자 이병도는 이마니시 해석은 계승하고 조작설은 부인하였다. 해방후 이병도는 국사학계를 장악하고 이마니시의 식민지사관에 입각한 주장들을 그대로 계승하여 우리 역사를 가르쳤으며 훈요십조 8항 해석도 이마니시의 주장 그대로 1948년에 발표된 자신의 논문에 넣으면서 유포됐다.
연세대 설성경 교수는 전라도지역은 전혀 차별받지도 않았고 왕건은 삼한 통합에 매진했으며 公州江外를 公州江以南으로 해석한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건국대 신복룡 명예 교수는 "일찍이 ‘고려사’ 태조 편이 편찬되어 있었지만 현종 시대(1010-1011)에 거란군 40만 명이 쳐들어 왔을 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 그래서 태조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서 ‘고려사’를 다시 편찬했다. 이때 최제안(崔齊安)이라는 인물이 최항(崔沆)의 집에 있는 문서를 가지고 와서 왕건의 유서라고 하며 실록에 끼워 넣었다.(‘고려사’ 열전 최승노·제안 조) 최항은 경주 황룡사(黃龍寺)의 중창(重創)을 주장하고 이를 수행한 인물로서 신라의 후예였다. 최제안은 고려 초기의 중신이었던 최승노(崔承老)의 손자이며, 최승노는 경주 출신으로 신라에서 고위 벼슬을 지낸 최은함(崔殷含)의 아들이다. 이미 불타고 없었던 훈요십조가 8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복원되었고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신라 구신(舊臣)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훈요십조의 진위가 의심스럽다. 왕실의 그토록 중요한 문서가 어떻게 사가(私家)에 보관되어 있었을까?" 라며 훈요십조 진위에 의문을 제기했다.
옛 신라지역 출신인 정몽주는 백제지역 왕조출현에 강한 거부감을 표했고, 영남출신으로 부관참시당한 김종직과 영남 남인과 같은 남인계열로 당시 전라도 광산김씨가 주도했던 권력싸움에 패해 가문이 큰 고초를 겪었고 자신을 훈육한 부모같은 친형이 장살당한 아픈 기억으로 평생 야인생활을 했던 이익과 이익의 종친, 제자들 중 이중환,안정복 등이 개인 저서에서 훈요십조 전라도설을 주장했으나 고려/조선왕조 인사정책과 관련없는 개인적인 주장일뿐이다. 조선초기 전라도 반남박씨에게 권력싸움에서 패한 경상도 청송심씨는 가훈으로 반남박씨와 통혼1)을 하지말것을 가훈으로 남겼는데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나올수 있는 개인적 주장이나 가문간의 다툼이 반영된 주장을 지역주의로 왜곡 악용해서는 안된다.
※주1 : 반남박씨와 통혼 : 대승공 22세, 23세 윗대 시대 모산부자성승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에 반남박씨와 하정공후 모산에 문화류씨와 반남박씨 통혼은 집안일이기에 여기에서는 생락하고 기회가 마련되면 소개하겠습니다.(필자 주석임)
5. 고려초기에 백제지역 호족,귀족들이 중앙에 대거 진출하여 권력의 핵심이 되었고, 8대왕 현종은 공주강이남에서 태어난 공주의 김은부 세딸과 전주 박온의 딸을 왕후와 후궁으로 삼아 김은부의 딸이 낳은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고려중기 17대왕 인종의 비 공예왕후 임씨가 전라도 장흥에서 출생하여 왕비가 되면서 이후 고려가 멸망할때까지 공예왕후계열에서 왕들을 배출했다. 또한 고려후기 26대왕 충선왕이 왕실과 통혼이 가능한 '누대의 공신이요 재상의 우두머리'인 당대 1급 가문들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는데:
언양김(彦陽金), 정안임(定安(장흥)任, 시조 임호), 경원이(慶源李), 파평윤(坡平尹), 안산김(安山金), 철원최(鐵原崔), 해주최(海州崔), 공암허(孔岩許), 평강채(平康蔡), 청주이(淸州李), 당성홍(唐城洪), 황려민(黃驪閔 ), 횡천조(橫川趙), 평양조(平壤趙), 전주김(全州金, 시조 完山君 김태서)" 위의 15개 본관들을 보면 경기도 7개, 황해도 2개, 강원도 2개, 전라도 2개(정안임,전주김), 충청도 1개, 경상도 1개이다. 충청/전라/경상의 하삼도중에서 전라도가 충청도/경상도보다 많다.
또한 불교국가인 고려에서 국사는 왕을 계승할 권한이 있는 태자가 왕위를 버리고 승려가 되어 국사2)가 될 정도로 고귀한 지위이자 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기도 하는 자리였으며, 사대부들의 나라인 조선이 세도정치와 서원의 폐단으로 국력이 약화된것 처럼 불교의 나라인 고려는 승려들의 횡포와 사원의 폐단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조선에서 억불숭유정책을 채택하는 부작용을 겪기도 한다. 최상류층인 승려들을 통솔하는 국사가 사찰이 전라도보다 훨씬 많은 경상도,충청도 지역보다 전라도지역에서 대거 배출된 것은 개성/서경 세력에 이어 전라도지역이 제2의 권세를 누렸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주2 승려가 되어 국사 : 대승공 10세 정신공 陞의 큰아들 仁修(중문지후사공)의 2남 연온(衍昷)은 대선사(大禪師) 3남 약언(約言)은 천태판사(天台判事,天台宗高僧)으로 출가하여 왕에 버금가는 지위 뿐 아니고 어느 학자보다 관직보다 훌륭한 문화류씨 선조였으나 1남 정(靖) 후손들이 宗事를 이어 와 종원수가 적습니다(필자주석임).
6. 이병도는 조선을 팔아먹은 우봉 이씨 이완용의 종친으로 일제 총독부가 만들고 한일병합의 주동자 이완용,권중현이 고문으로 있던 조선사편수회에 적극 참여하여 일제의 조선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이론을 만들고 주입시킨 인물이다. 이병도는 종친인 이완용이 팔아먹은 조선에 대해 부정적일수밖에 없었고 구한말의 강력한 항일 의병전쟁 및 일제강압기 광주학생운동같은 전라도지역의 조직적이고 극렬한 반일운동,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을 정면비판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백남운 및 서재필,김성수,송진우,김병로등 학계와 정계,재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라도출신들의 항일투쟁으로 신상의 위협과 자신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식민정책 시행에 가장 큰 걸림돌인 전라도지역에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공신이었으나 해방후 역적이 된 친일파 이완용의 종친 이병도는 시대가 바뀌자 종친인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지우려 원광대에 있던 이완용의 자료를 훼손하였으며 친일파들을 배척하지 않은 이승만/박정희정권에서 문교부장관 및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으로 국사학계를 장악한 이병도는 고조선,삼한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일본의 식민사학자 이마니시와 자신의 이론들을 국사책에 넣었으며 이병도의 제자들 및 일부 사학자들이 이러한 이론들을 인용하고 있다.
7. 조선왕조에서 전라도는 조선왕조 스스로 왕조의 본향이라 하였으며 풍패지향이라 불렸고 전라도 감영이 있던 전주성은 풍패를 따서 남문은 풍남문,서문은 패서문,귀빈들이 머무는 객사인 풍패지관과 조선왕조의 시조묘인 조경단,역대 성군들을 모신 경기전등이 있다. 왕조의 본향이라는 자부심은 왜란/호란같은 국난시에 가장 많은 군사들과 의병들을 배출했고 구한말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궐기한 의병의 40%를 차지했다. 호란때 조선왕조에 반감이 심했던 지역에서 모병활동을 하지 않았던 예만 보아도 왕조의 지역적 기반 및 자부심, 충성심의 지역적 차이를 알수있다.
8. 전라도 지역은 고려초부터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가장 영향력이 큰 왕후장상 및 권력가들을 상대적으로 많이 배출하였고 훈요십조에 따라 전라도가 차별받았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경기도빼고 권세를 가장 많이 누린 지역이 전라도지역이다. 또한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첫장 태조실록에 보면 조선왕조의 朝家가 전주에서 나왔다 하였고 영남유학의 시조 점필제 김종직은 그의 문헌 점필제집에서 조선왕조는 전주에서 나왔다 하였으며 실학의 거두 성호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聖朝가 전주에서 나왔다며 신성시 하였다.
훈요십조를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위의 기록들을 해석하면 고려,조선왕조 일천년은 전라도가 여당이었고 가히 전라도 정권이라고 할만하다.
역사를 왜곡 폄훼하여 전라도 차별 운운하는 것은 마치 거지가 부자 걱정하는 것처럼 어이가 없다. 또는 추악한 정치적 의도로 보여진다.(이상은 불로그 주인 의견임)
9. 필자가 필명 문의왕(출처 블로그 주인장) 글을 읽고 느낀 점 : 고구려 신라 백제에서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고구려 백제를 멸망 시킨 신라 충청 출신 김유신(진천 吉祥祠는 충북기념물1호로 김유신 사당임)과 신라 영천출신 정몽주가 백제권력에 거부감을 표한 것은 그렇다치고 반남박씨와 광신김씨들에게 정치적으로 피박 받아 보복한 것은 이해하지만 왕건 훈요10조를 위조하고 대한민국건국후 단군신화를 조작(熊族과 虎族의 부족결합으로 桓雄 단군의 건국신화)하는 짓거리는 순종의 두 번째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숙부인 윤덕영이 조카 황후치마속에 숨긴 옥새를 빼앗아 이완용에게 준 행동을 한 자들과 전라도 백성을 비교해 봅니다.
의병장 최경회(崔慶會,1532~1593)장군이 진주성이 왜군에 포위되어 있을 때 참모들이 출병하면 죽는다고 말하니 영남도 조선 땅인데 왜적에게 내줄 수 없다고 출병하여 전사하셨는데 호남백성들이 일부 세력에게 공격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배려하여 함께 가면 안되는가?합니다.
도선국사가 왕륭에게 경주는 쇠락한 땅이고 송악을 부풀린 것은 풍수지리적으로 맞는 이론인지 모르나 고려초 백제 나주지역호족이 권력 핵심이었고 조선조는 왕조의 본향이라해서 국난때마다 호남에서 나라를 구하는 의병이 다수 나왔고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도 많이 배출한 것 때문에 일부 세력들이 왕건의 훈요10조를 위조하면서까지 국가를 흔들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려 6대 성종(成宗)때 경주 출신 유학자 최승로(崔承老)가 상소한 것이 28조에 달하는 시무책(時務策)은 태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5대조의 치적을 평가한 뒤, 구체적인 시무책을 제시합니다. 핵심은 유교 정치 이념을 확립하고 불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 내용 대부분을 받아들여 유교 정치사상을 통치의 근본 이념으로 삼고 여러 제도를 정비하게 되며 太祖廟를 시작으로 宗廟 개념과 諡號가 나오는데 고려 개국공신들은 대부분 이때 시호를 받게 되지만 대승공은 祠堂 諡號가 없는 분입니다.
최승로 손자 최제안이 없어진 할아버지 세무책이라면서 최항집에 있는 것을 가져와서 왕건의 유서인 훈요10조라고 실록에 끼워 넣었다니 꼭 이렇게 해서 왕건을 도와 삼국통일을 한 주역인 나주호족을 비하해야 했나 하는 느낌입니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