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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성성한 노인을 아래 세대가 업은 모습이에요. 실천적으로 그림이 그려지잖아요. 그의 사람됨이 누군가를 모실 줄 알아요. 그것이 무엇이 되는가에 대한 규정은 나중에 나오겠지요. 일단은 모실 줄 알아요.
그리고 제(弟)예요. 동생 제라고 그러지만 이 제라는 글자는, 이렇게 뭔가 기둥 같은 게 있어요. 이게 사람일 수도 있고요. 그러면 여기에 여기다 이렇게 끈을 묶어버리는 거예요.
가죽 같은 것으로 끈을 묶어요. 옛날에 지금도 남아 있는 일부, 문명이 조금 덜 교류가 됐던 데 가면 허리띠를 많이 쓰죠. 허리띠 쓸 때 가죽을 많이 써요. 근데 각반도 그렇고 순서가 있잖아요. 맬 때 위에서부터 아래로 매든, 아래서부터 위로 매든 순서가 있을 거예요.
즉 순서라는 뜻이어요. 순서에 해당된다는 것은 첫 번째가 아니고, 두 번째 이하라는 거죠. 제라는 것은 동생 ‘제’로 쓰기도 하지만, 크게 보면 순서를 지키는 것이고, 순서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은 낮춤이에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자기를 낮추는 겁니다. 근데 누군가를 모시고 자기를 낮춰야 되는데, 두 가지 중에 하나만 하면 사이비가 되죠.
그래서 높임과 자기 낮춤이 공존하는 걸 말하죠. 효제라는 것은 그림으로 누군가를 업을 수 있는 모습이고, 또 그림으로 순서를 지키는 거예요. 크게 봐서 누군가를 업어 모실 수도 있고 순서를 지킨다는 건 양보예요. 양보일 수도 있고, 순번을 따라주는 거예요. 순번을 따라주지 않으면 그때부터 공존이 안 되는 거지요.
그래서 누군가를 모시고, 또 만남에 있어서 내 순서를 따를 수 있다면, 사람이 그렇다면, ‘기위인야(其爲人也)’ 즉, ‘그의 사람 노릇됨이, 그의 사람됨이, 그가 사람 짓을 하는 것이’ 이렇게 말하고 설명을 이어갑니다.
(여기서) 위(爲)라는 것은 의도적으로 하는 걸 말해요. 원래는 코끼리를 끌고 가는 모습이에요. 길 안든 코끼리를 길들이는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뭘 하는 것인데, 뜻은 ‘행위하다’라고 하죠.
(그렇지 않고) 자신이 저절로 그렇게 되면 공자의 70대 모습이죠. 그냥 아무렇지 않게 하는데, 다 그게 공존의 틀에 맞아 들어가더라! 70이 되니까 내 하고 싶은 대로 했는데 그게 공존의 틀이더라! 그때는 위(爲)가 아니고 이룬 거죠. 스스로 득(得)한 거죠. 그런데 그전에는 인위적으로 하라는 거죠.
어떤 손님이 오시잖아요. 그러면 웃어야 되는데 안 웃으면서, ‘그래 진심을 다하는 게 중요하지 꼭 웃어야 됩니까?’ 그러시죠. 웃어야죠. 위(爲)해야죠. 화장실에 가서 거울 보고라도 웃는 법 배워야죠. 배우고 따라해야죠.
아무튼 그의 사람 노릇을 함이, 내가 사람 노릇을 해보겠다라고 의도하면서 하는 일이 놓치고 있는 것도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그가 의도해서 하는 것은 늘 누군가를 모실 수 있고, (그 모시는 대상은 이제 얘기가 나와야겠죠. 기준도 나와야겠죠.) 그리고 순서를 따를 수 있다면!
그리고 호작난자(好作亂者)라 그랬어요. 作은 지을 작(作)이고, 난(亂)이라는 게 뭘까요? 난 글자를 보면 오른쪽 옆에 있는 이 글자는 실(絲)이어요. 실 앞에 있는 것은 뭘까요? 여기 실이 하나 있어요. 실에 위선이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가운데에 옹이가 하나 있겠죠. 그러면 여기 위를 손으로 잡아요. 여기 아래도 손으로 잡아요. 서로 반대편에서 실을 잡고 당겨요. 어떻게 되죠? 질서가 어긋나서 떨어지죠.
양쪽에서 (반대편)가닥을 잡고 손(手)으로 (글자 상하에 있는 것은 손이니까요) 당겨버리는 거죠. 그러면 뚝 떨어지죠. 그래서 이렇게 떨어지게 된 거죠. 이게 亂(난)이에요. 난은 자기가 한 짓이에요. 그래서 누군가를 모실 수 있는 사람이, 순서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이런 짓을 안 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떨어지게 하는 건 파괴이잖아요.
기위인야효제 이호범상자(其爲人也孝弟, 而好犯上者)
뒤에 있는 범(犯)부터 보면, 범이라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은 짐승이고 뒤에 있는 것은 사람이에요. 말 그대로 짐승이 사람한테 대드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짐승이 사람한테 대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르게 해석을 더하면 짐승적인 것이 사람적인 것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거예요.
사람 됨을, 사람 되지 못함이 파괴하는 게 犯이에요. 그렇게 해서 지어진 것이 범죄(犯罪)죠. 범죄의 범이라는 게 그런 뜻이어요. 사람답지 못함이 사람다움을 공격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 犯이죠.
호범상(好犯上)이라고 그랬는데, 上(상)은 옛날에는 (그림처럼) 이렇게 평행 선 위에 점이 있죠. 방향이죠. 또는 이렇게 평행선 위에 괄호 모습과 부호를 쓰기도 하죠.
그러면 여기서 上은 무얼 까요. 우리는 그냥 넘어가거든요. 윗사람이라고 하고 그러고 넘어가요. 그럼 뭐가 윗사람일까요? 그 시대 그 사람들이, 공존을 위해서 표명한 그 윗사람의 말에서 상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나와야겠죠. 그에 대해서는 여기선 안 나와요. 처음부터 다 나올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서 논리적 정합성을 계속 갖춰가요. 사람 노릇을 하는 것! 앞에 삶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도 사람 노릇을 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사람답게 살아보려는 데 제일 먼저 내세운 조건이 모심과 차례 지킴이에요. 높임과 낮춤이에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인간적인 것을 공격하는 일은 드물다!”라는 거죠. 있기는 간혹 있다는 얘기이죠. 그러면 왜 선의(鮮矣)라는 표현을 썼을까? 鮮矣라는 건 ‘드물다’인데요. ‘공자라는 분은 말을 조심하고, 함부로 극단적인 판정을 내리지 않는구나!’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랬는데 아니어요. 생각해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자기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비인간적인 것을 어떻게 해결한다고 하는데, 조금 더 자기 삶의 영역이 확대되고 보니까 반대였던 거예요. 모실 줄 알고 순서 시킬 줄 알았다면, 다만 확률은 낮아진다! 왜, 鮮矣냐? 아직 완전하지 않으니까요. 노력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우리 삶을 어떻게 볼까
공자는 우리 삶을 뭐로 보느냐? 어떻게 보면 우리 삶은 참 간단해요. 누군가가 이 자기의 삶터를 지옥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삶은 지옥을 사는 거죠. 이 삶터를 무대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그는 연극을 하고 사는 거죠. 이 삶터를 시장판이라고 생각하면 평생 장사 놀이하고 사는 거죠. 그냥 놀이터라 생각하면 놀다 가는 거고요. 그러니까 자기 생각한 것에 따라 자기 삶이 달라지잖아요.
삶터를 무어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그러니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맞는지도 몰라요.
내 삶터를 뭐라고 규정하는 순간, 삶터가 관광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관광객이 되고 나그네가 되는 거죠. 삶터가 일터라고 생각하는 순간 일꾼으로 살다 가는 거죠. 그는 잠시 휴식을 바라게 되죠. 삶터가 관광지라고 생각하고, 어떤 여행지라고 생각하면 여행객으로서 조금 쉬기를 원하는 게 자기 삶의 바람일 수도 있죠. 장사터라고 생각하면 장사하는 것에서 좀 덜 장사하는 어떤 인간적인 것을 좀 바랄 수가 있죠.
어쨌든 자기가 삶터를 무어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삶이 규정되요. 그런데 (공자 등) 이분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삶터가 그냥 마을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을에는 다 있어요.
삶터를 마을이라고 보았던 그때 그 사람들
그래서 그 마을이라는 전제하에서 이제 위라는 것도 나와요. 그것이 없이 나오면, 예를 들어 장사꾼으로 나오거나 돈 버는 걸로 나오면 돈 많은 사람이 위일 수도 있고, 그 다음에 관광지라 생각하면 경험 많은 나그네가 위일 수도 있고 그러잖아요. 무대라고 하면 선임 배우가, 전쟁터라고 생각하면 싸우는 데 싸움 경험 많고 싸움 능력 높은 사람이 위이겠죠. 마을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마을에 정말 다 있어요. 그래서 <논어>에서의 삶터는 마을이다!
늘 리(里)예요. 이 里를 어떻게 할 것인가? 里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모습의 일단을 보여준 게 10편 향당(鄕黨) 편이에요. 그래서 (이번에는) 향당 편은 꼭 하겠다는 말씀드리는 거고요. 그 위라는 건 엄밀하게 말하면 그 가치와 상관되는 거긴 한데요.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2편쯤 가서 차례대로 말씀드릴 게요. 그렇게 비인간적인 것으로 인간적인 걸 공격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아까 란(亂) 자 했잖아요. 작난(作亂)을 하는 경우!
우리 혼란(混亂)이라 그러죠. 亂은 자기가 만드는 거예요. 실을 뜯듯이, 반대 방향으로 실이 올을 뜯어 제키니까요. 서로 이렇게 잡아당기는 것도 문제인데 일방향으로 가는 것도 문제죠.
아무튼 혼(混)은 섞을 혼이지만 상형된 모습은 달라요. 이건 해가 뜨는 거예요. 왼쪽의 이건 물이 있는 거예요. 그 밑에 사람들이 막 있어요. 이 사람들이 어찌할 줄 모르겠는 거예요. 우산을 써야 될지, 양산을 써야 될지, 일을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갈팡질팡하는 거예요.
이 밑에 있는 것은 맏 곤(昆)자하고 달라서 이것은 사람들이어요. 3개 그려도 되고 2개 그려도 돼요. 상형시대에 3개가 많아요. 이것 3개가 나중에 글자로 완성되면 무리 중(衆)자가 되죠. 그래서 지금도 중국에서 이렇게 간체자로 사람 3개 그려놓죠. 아무튼 이건 사람들 무리예요. 사람들에게 주어진 조건이 너무 달라요. 극단적이에요. 도대체 어느 장난에 춤을 춰야 될지,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갈팡질팡하는 것을 혼((混)이라 하고, 내부적으로 자기가 질서를 깨는 것을 란(亂)이라고 해요.
이렇게 뜻이 다른 건 대개 붙여 쓰죠. 왜 붙여 쓰느냐? 헷갈리니까요. 混인지 亂인지 헷갈리니까요. 예를 들어서 恒常(항상)이라는 표현을 제가 자주 쓰지만, 恒은 심리적으로 ‘늘'이고 常은 내 심리를 떠나서 ‘늘’이어요. 그러니까 상과 항이 현실적으로 구분이 잘 안 돼요. 그래서 항상이라고 그래요.
建康(건강)도 建은 내 구조가 멀쩡한 것이고 康은 내 에너지가 멀쩡한 건데요. 이게 또 섞여 있지 하나가 되지 않아요. 구분이 안 떨어지죠. 康健이라고도 하죠. 옛날에는 에너지를 먼저 보니까. 현대 와서 구조가 먼저니까 건강이 되죠. 이렇게 쓰지만 나누기 어렵다는 거죠. 그래서 이 混亂도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질서가 무너진 것인지, 내부적으로 질서를 깬 것인지 분간이 안 될 때가 있기 때문에 합해서 쓰는데 여기서 명백하게 썼어요.
‘질서를 깼다!’라는 표현을 다시 볼 필요가 있어요. 과거에 살기 어려워 창칼 들고 일어난 소위 민중들의 저항에 亂 자를 붙이는 건 너무 억울해요. 질서를 깨려고 한 게 아니라, 깨진 질서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친 거거든요. 질서를 깨려는 게 아니거든요. 근데 무슨 무슨 亂이라고 붙이는 건 그렇죠. 이 亂이라는 글자를 알고 난 다음에는 붙이기 어려워요.
(본문으로 가서) ‘질서를 깨는 일은 있지 않다!’ 모심을 좋아하고 모실 줄 알고, 자기를 낮출 줄 알고 즉, 다시 말해서 누군가를 높이고 나를 낮춰서 차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런 질서를 스스로 깨는 일은 있지 않다! 질서라는 건 이때 뭐죠? 공존이죠. 공존의 틀이고, 공존의 원칙이겠죠.
공존의 원칙! 그러니까 다양한 삶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공존의 틀을 깨는 것을 亂이라고 해요. 그냥 그 행위의 무질서함이 아니어요. 그래서 ‘난을 일으키는 사람은 있지 않았다!’ 군자무본(君子務本)! 앞서도 나오고 2절에서도 나오는 군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군자(君子)
옛날에 이렇게 네 글자 天君之子가 있어요. 이 중에서 이 두 글자 天子를 따면 황제가 돼요. 天子가 되죠. 하늘 아들이 돼요. 이것이 정치적으로 쓰였잖아요. 사실은 하느님이죠. 그 하느님이 무어라고 여기서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하느님이죠. 한님이죠. 곧 천자는 한님의 아들이고 딸이어요. 자(子)가 성별을 나누는 개념은 아니니까요.
하느님의 아들인데, 가만히 보니까 천자라고 줄여서 쓰고 있거든요. 공자는 같은 뜻이지만 정치적 의미가 아닌 인간적인 의미에서 하나 글자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걸 君子로 따다 붙였어요. 그래서 공자가 지향하는 君子라는 것은 공존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그 상황을 지향하는 자를 말해요. 또는 거기에 일정 정도 근접한 자를 말해요.
그래서 군자라는 개념이 임금 아들이 아니고 원래는 천군의 아들인데요. 천군(天君)은 북방계 언어를 중국식으로 번역했을 때 이런 게 나와요. 하라니가 번역이 된 거예요. 하라니가 번역이 돼서 천군이 됐어요. 그래서 하늘의 아들이라는 말을 정치적인 왕들이 막 써먹고 있으니까 공자가 그게 못 마땅한 거예요. ‘그래 걔들은 쓰라 그래. 그들은 하늘을 대신해서 힘을 행사하고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그게 아니야! 이 우주가 스스로 강해서 돌아가는 이유는 스스로 강한 이유는 공존하기 때문이야!’
모든 별들과 별자리들이 공존하니까 강한 거죠. 스스로 돌아가서 쉬지 않죠. 그래서 그렇게 되는 그 질서를 추구하는 이, 우리는 그를 군자라 부르기로 한다!
이게 공자의 약속이고 선언이에요. 군자라는 개념은 선언적으로 그런 거예요. 나는 이 우주를 닮아가는 사람이 될 거야! 우주를 닮아가려는 이! 우주의 공존을 닮아가려는 이! 그 공존을 배우고 배워서 내 삶을 저 우주만큼 넓히려고 하는 이! 그 사람에게 군자라 붙여준 것이어요. 그러니 공자가 웬만한 데 군자라고 붙여주겠어요?
자기가 자기를 군자라고 안 하는데요. ‘흑백요리사’에서 안성재 셰프가 자기 음식에도 90점 이상 안 준다고 하잖아요. 공자는 더 하지 않았겠어요. 자기를 군자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누구를 평가해도, 그러니까 저 사람이 하는 게 仁을 행하는 행위에 가깝다 하는 정도였죠. 이 사람은 무얼 잘한다! 이 사람은 무얼 잘한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인(仁)합니까? 다시 물으니 “그건 모르겠다.” 그러시죠. 거기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했죠.
어쨌든 목표를 추구하는 인간형이라는 거죠. 목표는 공자가 생각하는 목표이겠죠. 그걸 제자의 권리라고 해서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군자는 바탕에 바탕에 힘을 써라!”(君子務本).
그러면 그 바탕이 무어냐!
군자는 바탕의 힘을 써라! 바탕이 세워지면 길은 저절로 생겨난다! 바탕이 있고 서야 길이 있다! 길이 있고서 바탕에 있는 게 다!
뿌리가 보면 그렇죠. 뿌리가 처음에 생기는데 뿌리가 점점 강해지면 뿌리 줄들이 점점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되죠. 땅에 박아 위로 자기 줄기를 뻗어낼 길도 찾아가고, 바탕이 서면 뿌리도 점점 제 길을 찾고 줄기도 제 길을 찾고 꽃도 제 길 따라 피는 거죠. 그걸 本立而道生(본립이도생)이라고 표현하는 거죠. 그럼 이 本에 해당되는 게 무얼까? 바로 높임과 낮춤이다! 높임과 낮춤이라는 건, 그러므로 사람 노릇하는 것에 근본이 아닐까! 바탕이 아닐까!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교(巧)라는 것은 이 工(공) 두 개가 붙인 거예요. 뒤에 있는 이것은 나중에 붙였다지만 만든다는 거죠.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있던 걸 이용해서 만들어내는 것은 工(공)이죠. 이렇게 만들어내는 것을 굳이 두 개나 붙인 이야기는 과하게 만들어내는 거죠.
巧言令色(교언영색)할 때 巧는 바로 억지로 지나치게 만들어내는 거죠. 무엇으로? 말로! 그리고 말로 만들어내는 건 소용없다는 거예요. 실제 공존하는가 아닌가 이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리고 令은 우리가 명령하다 할 때처럼 뭐를 시키는 거죠. 뭐가 시킬까요? 자기의 생각이 시키는 거죠. 뭐를? 色을!
色이라는 글자는 오늘날 보면 여색(女色)할 때도 쓰이고 칼라 할 때도 쓰이는데요. 이 色이라는 글자의 밑에 있는 것은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에요. 앞에 있는 이것은 이렇게 칼 같은 게 있는 거예요. 그러다 이 칼 같은 것이 위로 올라간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色(색)이 된 거예요.
즉 色 아래에 있는 이거는 원래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던 거예요. 사람이 앉아 있고 또 하나 글자는 칼 刀 자예요. 앞에 있는 칼이어요. 끊어버린다는 의미와도 비슷해요. 끊을 切(절) 자와 뜻이 비슷하죠. 원래 같은 글자였어요. 일부 다르다고 하는 견해도 있어요.
어쨌든 칼같이 딱 표정을 바꿔가는 것이어요. 표정을 말하는 거예요. 갑자기 웃고 갑자기 울고.. 어쨌든 표정에 나타나는 모습을 그걸 색이라고 하죠. 엄밀하게 보면 얼굴색에만 쓰이는 말이 나중에 전체적으로 얼굴 이쁜 사람을 가리키고 칼라를 가리키는데요. 원래 말은 얼굴에 드러나는 빛 즉 살벌한 빛이나 온화한 빛 등을 말하죠.
(교언영색이니) 그러니까 생각이 얼굴을 시키는 거죠. 얼굴에게 단호하게 해! 연극이죠. 연극이라기보다는 그냥 꾸밈이죠. 연극은 서로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고 하는 거지만 이건 그냥 꾸미는 거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겠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하는 게 뭐죠? 자기를 안 낮추려고! 순서를 안 지키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경우에는, 여기에 선의인(鮮矣仁) 이라 하여 갑자기 인(仁)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데, 이 인이 드물다! 공존이라는 것은 드물다! 진짜 공존을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얼굴빛으로서, 생각을 갖고 얼굴빛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공존이 아니고, 나를 더 유리하게 하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말도 억지로 만들어낸다! 이 모습들도 10장에 나오니까 그때 자세히 말씀드릴 게요.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한 장에 글자 하나씩은 얘기하네요. 그 다음에 증삼이랑 이름을 가진 증자(曾子)로 이렇게 높여진 사람이 이야기를 해요. (나라고 하는) 吾(오)는 인식으로서의 ‘나’예요. ‘나’라는 인식이 있는 나예요. 我(아)는 인식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나예요. 我와 吾는 뜻이 달라요. 나 我자는 내가 나라고 인식하든 말든 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한 표현이에요. 吾는 나라고 인지하는 나예요.
그래서 吾는, 스스로 인지하는 나는 날마다 삼성(三省)을 하는데, 여기서 세 가지 기준일 수도 있고 세 번일 수도 있겠지만 뒤의 내용을 봤을 때는 세 가지 기준이 맞다고 봐요. 그래서 나는 날마다 세 가지 기준에 따라서 내 처신을 돌아본다! 신체(身體)라고 그러잖아요. 身이 吾예요. 我를 대표하는 물질은 뭐냐 내 몸뚱이예요. 吾를 대변하는 건 身이에요.
우리가 그러죠. 처신(處身)이라고 하지, 처체(處體)라고 하진 않죠. 인지하고 내가 무언가를 운용하는 운용 시스템으로서의 몸이죠. 제가 늘 영어로 그렇게 표현하죠. System of movement of body라고! 그게 신(身)이에요. 이 身을 움직이는 것이 음가는 원래 같아요. 정기신의 신(神)이에요. 이 體는 나중에 생겼어요. 이 體는 어느 순간 이 무언가 다른 것을 통합하는 개념으로도 쓰여요.
그러면 이 體에 해당되는 개념은 뭐냐? 이게 기(己)예요. 몸 己예요. 몸 己는 그냥 육체적으로 주어져 있는 나예요. 육체적으로 주어져 있는 관성이 지배하는 나예요. 이 己는 극복의 대상이에요. 그래서 克身復禮(극신복례)라고 하지 않고 克體復禮라 하지 않고 克己復禮라고 불러요. 극복의 대상이에요.
그리고 이 몸 身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뭐냐? 이게 이 氣(기)예요. 같은 음가예요. 같은 기이고, 같은 신이에요. 원래는 음가에서 넓게 유지되다가 뜻이 갈라져 나왔다는 얘기인 거죠. 같은 음가를 유지하고 뜻의 공통 공약수를 유지하면서 뜻을 좀 더 분할시키다 보니까 氣가 되고 己가 되었고 그리고 身이 되고 神이 되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나중에는 이 두 개를 합해서 신체라고 그러기도 해요. 완전체라고 할 때 그러면 體는 과연 기능을 뺀 껍데기일까? 관성 덩어리일까? 아니잖아요. 그래서 체는 나중에 뜻이 확장돼서 그렇게 되긴 해요.
아무튼 초기 단계에서는 몸뚱이를 대표하는 것은 我고, 나의 움직임 즉 이 몸뚱이의 운행 시스템을 그것으로 대변하는 것은 吾예요. 그런 면에서 身은 우리 말로는 몸이죠. 동사 ‘뮈다’는 ‘움직이다’를 뜻하고 ‘뮈다’의 명사형으로 ‘몸’이 되죠.
따라서 원래부터 그런 움직임이죠. 그래서 나의 처신이라고 봐야죠. 내 몸의 움직임 내 몸의 운행이죠. 내 몸뚱이의 운행이죠. 내 몸 즉 내 몸뚱이의 운행을 어떻게 하느냐? 省(성)한다고 했습니다. 省의 밑에 있는 글자는 이게 눈알이어요.
눈 위에 이렇게 少(소)가 있으면 글자가 달라져요. 이렇게 된 게 덜 省자라는 건데, 좁게 보는 거예요.
눈을 고정시키는 거예요. 눈 희번덕거리면서 여기저기 막 눈치보고 이게 아니라 눈을 최대한 적게 쓰는 거예요. 눈을 적게 쓰는 대신에 많이 들어요. 들을 聽(청)이라는 것을 보면, 귀하고 입이 있어요. 옛날에 사람 귀가 이렇게 생겼다고 봐요. 그리고 여기에 입으로 말하는 것이 막 들어와요. 이게 나중에 한자로 발전하면 뭐가 될까요? 이게 들을 聽(청) 자예요. 들을 聽자의 초기 글자가 이거예요. 우리가 청각할 때 그것은 아무튼 적게 봐요.
적게 보는 것은 다양한 것을 이렇게 막 보면서 하는 게 아니라, 많이 본 것 중에서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반성하여 돌아봄이라는 것은 많이 본 것 가운데서 버려버리는 과정을 말해요. 내 몸 내 몸의 움직임, 내 처신을 하면서 이것저것 볼 때 최소한의 기준을 한번 봐 봐라. 최소한의 기준으로 돌아보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성신(省身)으로 보는 거고요.
그래서 나는 날마다 세 가지 기준에 따라서 나의 몸뚱이의 움직임을 간소화시켜 본다. 그 세 가지가 무엇이냐?
먼저, 爲人謀而不忠乎(위인모이불충호)?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모의를 할 때, 무언가를 획책을 할 때 불충호(不忠乎)! 마음 가운데 적중하는 거죠. 내 마음에서부터 나온 거죠. 따라서 내 마음에서부터 나오게끔 했던가?
여기서 다른 이를 위해서 모의하는 게 뭐죠? 공존의 방법이에요. 배려예요. 공존의 방법은 배려에서 시작한다는 거예요. 배려 없는 공존은 압박이에요. 배려 없는 소통도 압박이에요. 배려가 공존의 시작이라는 거죠.
그래서 타인을 위해서 뭔가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곧 타인을 배려함에 있어서 진심이었던가? 이런 얘기죠. 마음에서 우러 나온 것 가운데 간단한 1번 기준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 다음 두 번째, 與朋友交而不信乎(여붕우교이불신호)?
여기서 왜 붕과 우를 같이 썼을까? 朋은 어쩌다 보니 같이 매달려 있는 거예요. 곶감 널어놓은 것처럼, 영광굴비 걸어놓은 것처럼 말이죠. 友라는 것은 같은 게 둘이 있어요. 이 友는 스스로 무리를 짓는 거예요.
앞에 있는 朋은 매달려져 있는 거예요. 동무라는 것은 태어나 보니까 동네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朋은 동무라고 해야 되고 벗이라고 하지 않는데요. 이 友는 자기가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왜 만들겠어요? 무언가 통하니까 만들겠죠. 뭔가 가는 길이 비슷하니까 만들겠죠.
그래서 友는 자기가 만들어 나가는 사람 관계에 대한 개념이고, 이 朋은 만들어져 있는 개념이에요. 어릴 때 동료 집단이라든가 이런 것은 동무에 해당돼요. 그래서 ‘벗아 놀자!’가 아니라 ‘동무야 놀자!’가 맞아요. 살다 보니까 동네에서 만나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과 상관없이 뭔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있잖아요. 나는 이런 식으로 살고 싶어! 이런 사람들이 바로 友예요. 그리고 유유상종(類類相從)할 때 類죠. 어떤 개성의 공통점에 의해서 만난 거죠. 남을 배려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징이 개성이라고 그랬지만 그게 비슷한 거예요.
이런 식으로 나는 해결하고 싶어! 이런 식으로 풀어가고 싶어! 푸는 방향과 푸는 느낌이 통하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들을 한자로 번역할 때 뭐라고 그러죠? 길이 같은 사람이라고 번역을 해요. 동도자(同道者)라 그래요. 불교 같은 데서는 도반이라고 표현해요. 그게 友예요. 그러니까 友라는 것은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아픔을 풀어가는 방식 비슷한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잖아요. 남을 배려하는 것, 즉 友를 버리기 시작해요. 점점 朋으로 가요. 그냥 주어진 조건 속에서, 그냥 원래부터 관성에 의해서 주어졌던 편안한 조건만을 자꾸 따져요. 나이 들수록 그래요. 그래서 어렸을 때 초등학교 친구 찾아가고, 동네 친구 찾아가고 그래요. 왜 그러냐 하면, 友를 만나는 것이 힘들어요.
우리가 朋友라고 하잖아요. 朋은 그냥 주어져 있는 거예요. 붕은 그냥 즐겁고 그래요. 즐거움의 대상이 내 삶에 확장은 돼요. 붕우를 통해서 확장해 왔어요. 友는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자기가 만나서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예요. 그러니까 이게 헷갈리죠. 근데 朋인지 友인지 어떻게 분간할 거예요?
회사에서 만났는데 만나가지고 보니 같이 낚시도 좋아하고 등산도 좋아하고 같이 만나고 이게 헷갈리는 거예요. 그냥 주어진 조건에서 만난 朋인지 友인지 헷갈리는 거예요. 그럴 때 뭐라 그러죠? 동료(同僚)!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 동사자(同事者)!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 아무튼 붕우라고 해서 友에 초점을 맞출게요. 마을이 삶의 대상이다 보니까 朋이 없을 수가 없고요.
그 과정에서 友가 생기는 거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붕당(朋黨)이라 그러죠. 우당(友黨)이라는 표현은 없어요. 友는 당파를 만들지 않아요. 사귀는 우인(友人)은 있어도 우당(友黨)은 만들어지지 않아요. 관성에 의해서, 주어진 조건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이해관계를 맞춰서 만나는 게 붕당이죠. 정치를 하면 붕당이 생기지 우당이 생기질 않아요. 우인들이 있을 뿐이죠.
그래서 벗들과 또는 동무들과 사귐에 있어서 불신호(不信乎)! 信을 말 그대로 할게요. 나중에 信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니까요. 내가 말을 하고 헛말을 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信이라는 것은 헛말이 아닌 것을 말해요. 말을 하면 말에 빛이 나는 거예요. 말이 이루어지는 것! 말에서 빛이 난다고 과거분들이 표현했어요. 말이 빛이 나려면 말은 이루어져야 돼요. 이루어지지 않을 말을 허언(虛言)이라고 하죠. 비었으니까 빛이 날 수 없어요. 허언이 아니면 말에 광채가 있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정말 이루어질 헛말이 아닌 것들을 했던가?
그리고 傳不習乎(전불습호)?
그 다음에 傳(전)이에요. 저는 위 문장에서 傳을 일단 동사로 보고 불습(不習)을 목적으로 보기도 했었는데요. 이번에는 옛날 식으로 가 볼 거예요. “전해준 것을 익히지 않았던가?” 예전에는 “익히지 않은 것을 전하지 않았던가?” 이렇게도 풀었어요. 이번에는 바꿉니다. 또 언젠가 바뀔지 모르지만요.
傳이라는 건 뭐냐? 이 글자를 보면 전의 뜻이 뭔지 알 수 있어요. 이게 북방 쪽에서 만들어진 글자인데요. 이렇게 쓰는 것이 傳 예요. 이게 역참이에요. 옛날에 이렇게 가면 역참이 있잖아요. 말을 바꿔 타는 역참에 가면 여기에 무언가를 가지고 왔겠죠. 그럼 역참에서 이 사람한테 다시 무언가를 보내주는 거예요. 손 터치하는 거예요. 이제 바톤을 터치하는데, 가지고 간 물건이 있을 것 아니에요. 그 물건을 넘겨주겠죠. 그리고 다른 물건을 받겠죠.
우리는 傳하다는 것을 시간적인 개념으로 많이 이해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전하다의 원래 뜻은 공간의 개념이 많습니다. 재밌는 것은 북방 기마민족의 관념이 들어간 한자까지 포함한 언어권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있지 않아요. 시간과 공간은 거의 비슷한 개념이에요. 앞에 제가 표현하기 위해서 시간적으로 삶의 영역을 확장한다면 그리고 공간적으로 확장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구분이 잘 안 돼요.
그러다 보니까 이런 개념이 있어요. 이것이 전할 傳자예요. 이게 역참이고요. 이게 손이에요. 사람이랑 상관없어요. 그냥 이쪽은 받는 손이고 이쪽은 주는 손이에요. 반대일 수도 있죠. 어느 쪽이 주는 손일지 모르지만 줘요. 주면 받아야죠.
그러니까 이 전해준 것을 시간적으로 확장한다면 내가 이렇게 받았어요. 바톤을 터치했어요. 바톤 터치한 것을 실행했는가 안 했는가? 최소한 다음 바톤을 터치할 때까지 가지고는 가야 될 것 아니어요. 그것을 풀어서 내 것을 했는가 안 했는가는 별개의 문제라 치더라도 말이죠. 가지고 가야 될 것 아니어요. 그래서 이렇게 전해 받은 것, 나에게 넘어오면, 누군가를 통해서 내게 넘어온 것, 과거의 시대를 통해서 오늘의 나에게 넘어온 것! 그것을 나는 지켜내고 실현하고, 최소한 다시 바톤 터치시켜서 넘겨줘야만 되는 거죠.
뒤집어 말하면 나는 시간적으로 나의 삶을 확장했을뿐더러, 나는 다음 세대의 시간적 확장에 기여해야 되는 자예요. 다음 세대에 그게 교육이겠죠. 다음 세대에 시간 확장에 기여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를 먼저 실행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1절부터 4절까지 쭉 보면 이어져 있죠. 그래서 논어를 만주어로 뭐라 그러는가? 만주어로 번역을 ‘러우런 기수런 빅터’라고 번역을 해요. 러우런 기수런만 보면, ‘러우런’은 널려 있는 것이고, ‘기수런’은 조직하는 것입니다. 널려 있는 것들을 잘 꿰어 공존하게 하는 것이죠. 그냥 널려 있는 존재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죠.
군집명사가 집합명사화 되는 것이죠. 어떤 것으로? 사람이라는 집단으로 말이죠. 진화 과정 속에서 사람답지 않은 것을 쳐내고, 그 사람답지 않은 건 뭐냐? 지독한 경쟁과 투쟁과 폭력과 혼란 등이죠. 그게 아닌, 공존과 평화로 꿰는 것이죠.
그게 사람답다고 본 겁니다.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집합명사로 사람이 된다고 보는 거죠.
그 이전까지는 사람의 모양을 갖춘 짐승이라고 본 거죠. 짐승이라는 게 어떤 계급의 문제가 아니고, 동물 발전 진화의 순서가 아니라 공존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죠. 그 공존은 우주를 닮아가는 것이고, 그 공존을 향해 가는 사람들로, 모두가 다 하느님의 아들처럼 살자는 선언이죠.
어떻게 보면 아무런 너무 느낌이 없고 너무 먼 이야기 같을 수 있어요.
근데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너무 먼 이야기고 실현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여러 가지 잔꾀를 내서 살아오다가 수천 년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해요. 마음먹으면 단박에 되는 거예요. 우리 세대 77억이 단박에 하는 게 제일 쉬워요. 77억 가지의 방법을 찾아서 공존하는, 그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봐야 답이 없다는 것이 5천년 역사의 증명이에요.
돌아가지 말고 바로 부딪히자!
이 사람 얘기 한번 들어보자! 못 들어볼 게 뭐가 있나! 그런데 우리는 지레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지레 겁먹고 미리 아니라고 생각하고, 안 된다고 생각하고 되는 잔꾀를 찾아가다가 결국은 돌고 돌아가지고 5천년을 돌아오고 말았어요.
제가 이 얘기를 다시 하는 건, 지금 어쩌면 우리에게는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을지도 몰라요.
‘러우런 기수런’이 되는 게 아니라, 끼워 맞추는 기술이 있다! 우리에게 기수런 할 수 있는 게 있다!
그런데 기수런이 오히려 해체돼서 더 러우런이 되어가고 있어요. 그게 급격하게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이미 그런 짓을 반복했는지도 모르죠.
우리는 마치 그 혹성탈출의 원숭이들처럼 이미 한 번 반복했는지도 모르죠. 어쨌든 지금 또 그런 정도의 느낌이 와 있었어요. 저는 이 얘기를 한 번 꺼내 보고, 돌아 가지 말자! 해보자! 못할 게 뭐 있어요?
77억이 그냥 일시에 대오 각성하는 게 빠르지, 잔꾀를 내가지고 77억 공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증명해 온 건데, 여전히 거기에 매달리고 방법을 찾으려고 그래요. 주의와 사상과 논의로서 안 돼요. 안 된다는 걸 증명해 왔습니다. 여전히 그게 될 것 같은 착각을 해요.
그게 안 되는 이유는, 그것마저 안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짐승질을 하니까! 안 높이고 안 낮추고 하는 그런 전제하에서 방법을 찾죠.
그런데 서로 높이고 순서를 따르버리잖아요. 그러면 논의를 해도 그게 그거고요. 바로 실행하는 거고요.
제일 근본은 우리가 못 낮추고 못 높이는 거예요. 내 안에 그 무슨 덩어리가 있다고요. 아무것도 아닌데, 밥 한 끼보다도 못한 자존심, 무언가의 자존심, 자존이 짐승의 마음이라는 그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런 얘기를 그때 3천 년 전에 저 사람은 어떻게 얘기했나? 3천년은 안 되지만 그런 얘기를 하려고 다시 논어를 낡은 책갈피에서 조금 꺼냈습니다.
(농담으로 드리면) 제가 아주 잘하는 게 용두사미여서 1장과 2장을 하고 그 다음에 10장을 하려고 합니다. 11장부터는 왜 안 하느냐? 제가 논어를 수천 번 읽었겠죠. 이건 누군가 짜맞춘 거다! 진짜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10장이 결론이고 거기서 더 나갈 게 없어요. 더 나갔는데 보면 이거 맹자스러워요. 공자스럽지 않고 11편부터는 맹자스러운 후대인의 느낌이어요. 형상이 그려지지 않는 너무 철학적이고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느낌이 11장부터는 그냥 꽉 차 있어요.
10장까지는 그림이 안 그려지는 문장이 없어요. 공자는 언어 특징에서 그림이 안 그려지는 것을 최소화시켰습니다. 孝 자 같은 건 우리가 지금 현재 그림을 못 그리고 있죠. 그런데 공자는 그림 그렸죠. 그대로 지켜가는 게 제일 좋아요.
앞에 배우면서 그걸 그때그때 맞춰서 풀어본다면 입꼬리가 벌어지지 않을까! 멀리서 동무가 찾아왔는데 내 얼른 거문고 함께 할게요. 그때 거문고 들고 나가 튕기면서 노래 부르고 싶지 않을까! 그러면 됐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그 조건에 의해서 내가 흔들릴 거 뭔데!
유자도 이렇게 얘기를 해요.
사람으로 하는 것, 사람으로서 뭔가 행위를 하는 것은 누군가 있으면 높여주고, 순서에 따라 내 순서 지켜주고 그러는 사람이 위를 범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 공존의 원칙을 깰 이유가 있을까?
공존의 원칙을 깨지 않는 사람이 억지로 그렇게 파괴를 할까? 그러니까 결국 바탕에 힘써야 될 것 같아! 뿌리가 자기 길을 찾아가든 줄기를 펴내서 꽃을 피워 가든 그 길을 찾아야 될 것 같아! 나는 그게 높임과 낮춤이라고 봐!
그러면서 이제 공자의 말을 들어보고 있죠.
억지로 그렇게 말을 과하게 지어내고, 생각을 갖고 표정을 만들어낸다면 그건 더불어 사는 공존의 길이 아니야, 그건 너의 욕심이지. 그래서 나는 오히려 공존을 위해서 수많이 본 것들 중에서 본 것의 기준을 뚜렷하게 하지.
그렇게 해서 보는데 그것이 세 가지야. 첫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배려를 할 때 내가 정말 마음에 적중하게끔 했을까? 동물들이나 흙들과 이렇게 사귈 때 나는 정말 허언하지 않고 이렇게 뻥치지 않고 지냈을까? 어디서 내가 이렇게 전해 받은 게 있다면 그걸 내가 어떻게든 나에게 주어진 전해 받은 것에 대한 일을 다 해야 되는 거 아니었을까?
공자가 이렇게 일단 하고 나니, 그 다음 이야기가 이제 이어지겠죠.
오늘은 이렇게 줄이겠습니다. (1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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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소 따라 하려는
오롯한 마움은 아룸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