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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풍경과 문학
포항 내연산에서 빚어진 한시
아름다운 내연산
밤이 와서 서늘한 잠자리에 들었다. 꿈에 파뿌리 같은 허연 수염을 한 스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 합장을 하는데, 말을 하려고 하자 입에서 연기가 났다.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서역에서 왔는데 이 산 속에 거울을 묻고서 곧 이 산의 주인이 되어, 이 산에 찾아온 많은 시인과 현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신선경의 이 산을 함부로 잘못 평하였습니다. 천추의 내연산을 주왕산과 비교하는 것도 수치인데, 하물며 저 청량산 따위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또한 이 산을 매번 청량산의 아래라고 합니다. 다행히도 산이 당신들 두 시인 묵객을 만나서 한 마디로 저들의 망령된 평을 깨어버리시는군요.”
내가 이에 천천히 대답하였다. “그대의 말씀인즉 옳습니다. 주왕산은 내연산과 비교하여 산수가 대략 비슷하여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렵지만 서로 장단점은 있으니, 산이 있는 곳이 드러나고 숨은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청량산은 이렇게 평하기가 어렵습니다. 산이 있는 곳이 인현(仁賢)한 마을에 가까운데, 곧 퇴계 선생이 이 산에 깃들어 숨어 살며 스스로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 한 뒤로 산 이름이 더욱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아무 봉우리, 아무 암자가 빼어나다는 점은 명산의 둘째가는 조건일 뿐입니다. 주왕과 내연, 이 두 산에는 일찍이 선현의 발자취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내연산에 이름을 써 놓은 사람들을 보자니 모두가 서울에서 왔더군요. 연달아 찾아오는 벼슬아치들 때문에 산의 그윽하고 조용한 맛이 다 깨어지고, 참선하는 스님들이 아득히 떠나 가버렸습니다.” 그리고서 나도 또한 놀라서 잠에서 깨어났다.
-유도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안동 사람인 노애(蘆厓) 유도원(柳道源, 1721-1791)이 친구 단사(丹砂) 김성필(金聖弼)과 1773년 9월 18일부터 28일까지 주왕산과 내연산 등지를 여행하고 쓴 장편 기행시, <동유기행(東遊紀行)>의 한 대목이다. 그는 내연산을 유산(遊山)하고 보경사에서 청하현감 엄구(嚴球)와 만나 이야기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런 꿈을 꾸었던 것이다.
<사진1. 관음폭과 학소대>
<관음담>
<내연산 은폭>
규장각 학사요 문장가였던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은 흥해군수로 부임하여 1783년에 경상관찰사 이병모(李秉模, 1742-1806)와 내연산을 유산하고 암자의 선방에서 묵어갔다. 밤에 별빛과 달빛이 산에 가득하였고 새벽에 비가 조금 뿌렸다고 하였다. 민가 열 몇 집이 계곡 가에 있고, 개 짖는 소리, 닭 울음 들리는 은폭 주변이 도연명이 묘사하는 무릉도원과 같다며 가을날에 그곳으로 꼭 한 번 가고 싶어 하였다. 그는 내연산은 봉우리가 기이하지는 않지만, 물과 돌이 아름답고, 밝고 빼어난 기운이 있으며, 사람을 고무시키는 힘이 있어서 명산임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지구 생성의 46억년 시간이 빚은 내연산은 예로부터 열두 폭포가 있다는 동해 바닷가의 명산이다. 또한 내연산은 작은 금강산으로 불리었고, 봉화 청량산, 청송 주왕산과 더불어 대구경북지역의 명산이다. 보경사에서 연산폭포까지는 물론이고, 은폭에서 경상북도수목원까지의 계곡에도 그윽한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기후를 보이는 내연산에는 동식물이 풍부하고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다. 내연계곡의 최상류에까지 버들치와 갈겨니가 살고, 물까마귀가 서식하며, 수달도 눈에 띈다. 개구리와 도롱뇽과 현호색과 얼레지, 은방울꽃, 참나무, 단풍나무 등의 풍부한 동식물 생태계가 보존되어 있다.
이토록 경관이 수려하여 내연산은 역사 속에서 인간의 아낌을 받아왔다. 불교문명이 꽃피었던 신라, 고려 시대 이래로 보경사와 암자들을 짓고 수행자가 머물고, 세상살이에서 상처를 입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신행 도량이 되어왔다. 유교문명이 국가와 사회의 지도 이념이 되었던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들이 유산을 하며 치세의 덕성을 함양하였다. 민중들은 산이 베푸는 은덕에 감사하며 산을 숭배하며 살아왔다.
문명의 역사가 1,500년을 헤아리는 내연산에 어떤 인문학적 내용과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시대에는 포항 사람들조차 잘 모른다. 내연산의 역사와 경관 명소들을 날줄로 하고 그 속에서 창작되었던 시문을 씨줄로 하여 내연산에서 꽃피어났던 인간의 무늬를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내연산에서 빚어진 많은 시문 중에서 사연이 깊은 시들을 선별해 소개한다.
내연산의 명칭
신경준의 <<산경표(山經表)>>에 의하면, 낙동정맥의 울진 백암산은 영천 보현산으로 이어지고, 보현산에서 동쪽으로 온 산줄기가 바닷가 청하에서 솟아 응봉(鷹峰)이 되었다. 응봉에서 다시 동쪽으로 내연산과 신귀산((神龜山, 천령산), 두 줄기 산이 굽이치며 그 사이에 내연계곡 30리를 열었다.
<중국 시안 종남산>
부석사, 화엄사와 같이 보경사도 화엄종 사찰이다.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적광전이 금당인 보경사가 창건되면서 내연산 이름을 종남산(終南山)이라 하였다.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유학하여 화엄종 2조 지엄 스님 문하에서 화엄학을 공부하던 지상사가 있고, 신라의 유학승들이 수행하던 중국 불교의 명산이 종남산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왕경, 금성을 침공하자 신라의 국왕과 신하들이 내연산으로 피란 온 뒤로 종남산을 내영산(內迎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영오랑과 연오랑’, ‘영일과 연일’의 경우처럼, ‘영(迎)’과 ‘연(延)’의 글자 모양과 소리가 닮아서 조선시대에 내영산을 내연산으로도 불렀고, 대체로 20세기에 들어서는 내연산만 남게 되었다. 내연산의 향로봉은 류숙의 1624년 시에 나타난다.
1224년의 <원진국사탑비문>에는 내연산을 신귀산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문헌과 지도에는 내연계곡 남쪽 산줄기를 신귀산, 북쪽 산줄기를 내연산이라고 하였지만, 연산폭 서쪽 내연산을 신귀산이라고 표기한 지도도 있다.
내연산은 경관이 수려하여 소금강산이라고도 불렀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배우는 자들은 자기를 위하여 배웠고, 지금의 배우는 자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배운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고 하였다. 1587년에 내연산 산놀이를 하였던 황여일은 ‘금강산’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배우는 사람에, ‘신귀산’은 내면의 덕성을 기르는 ‘위기(爲己)’의 배움을 추구하는 사람에 비유하며, 군자가 과연 내연산의 어느 이름을 좋아할 것인지를 물었다.
내연산에 꽃 피어난 불교문화
보경사 창건 연기 설화에 의하면, 중국 남조 진나라에 유학 갔던 신라의 지명 법사가 귀국한 이듬해인 603년에 중국에 처음 불교를 전파한 섭마등(카샤파마등), 축법란(달마트라)이 전하게 한 8면 보경을 불법이 불멸할 명당인 종남산 아래 깊이가 백 척인 못을 메워서 묻고서 그 자리에 금당을 짓고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신라시대의 석탑, 석등, 신방석, 주춧돌이 남아 있으며, 현존하는 4개의 암자는 물론이고 6세기 후반의 신라시대 유물까지 출토되는 암자터를 포함하여 10개가 넘는 암자터들이 확인된다.
<사진2. 보경사>
‘보경사’의 ‘보경(寶鏡)’은 둥근 청동거울을 말하고, 청동거울은 보름달이나 해의 메타포다. 한글창제 이후에 세종대왕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서처럼 달은 부처님의 진리를 비유한다. 팔면 보경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팔정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예천 하가산(下柯山, 鶴駕山) 보문사에서 경론을 열람한 보조국사 지눌은 1190년에 팔공산 거조암에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짓고 새로운 불교운동의 기치를 들었다. 몰려드는 수행자로 순천 송광사의 전신인 수선사로 옮겼다. 지눌의 제자인 원진국사가 보경사의 주지로 오래 머물다가 입적한 뒤에, 그 제자들을 위하여 보경사의 적광전 금당에서 수선사의 2세 법주인 진각국사 혜심이 법문을 하고 읊은 게송에는 보경사 창건 연기 설화의 ‘보경’을 끌어와서 ‘해’와 ‘불성’을 이중으로 비유하며 그 의미를 확장시킨다.
구월 초이일에 보경사 원진국사 문도의 청으로 상당법문을 하고 스님이 읊은 게송
九月 初二日 寶鏡圓眞國師門徒請上堂 師云
오늘 아침에 장마 비가 개어, 今朝宿雨初晴
탁 트인 허공이 끝이 없구나. 廓落太虛無際
누가 말했던가, 보경이 티끌에 묻혔다고 誰云寶鏡埋塵
영원한 그 광명이 항상 세상을 비추는데. 自有常光照世
<보경사 원진국사비>
보경사에 보물로 지정된 원진국사 승탑과 탑비가 있다. 탑비는 테두리에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연화당초무늬가 새겨져 있어서 고려 불교 문명의 세련되고 국제적인 미감을 보여준다. 승탑은 절 뒤의 산 중턱에 있으며 완형이 남아 있다.
1215년 보경사 주지가 된 스님은 몽골군에 쫓겨 고려에 들어와 청도 운문사를 점거하고 도적 떼가 된 거란족 무리에게 <<육조단경>>을 강설하여 교화시키고, 기도를 하여 가뭄에 비가 내리게도 하였다. 춘천 청평산 문수원에서 이자현 거사의 <문수원기>를 읽다가 <<능엄경>>의 중요성을 알고 열람하였다. 1221년 7월에 팔공산 염불사로 옮기고 9월 2일 의자에 앉아 입적하기 전까지 보경사에서 제자들에게 <<능엄경>> 강의를 멈추지 않았다.
한국불교사에서 <<능엄경>>을 널리 알린 이는 원진국사인 것이다. 제자들이 다비를 하고 사리를 보경사에 모셨다. 문필가 이규보가 표문을 지어 올리고 고종이 원진(圓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국자감 대사성 이공로(李公老)가 비명을 짓고, 안동 사람인 김방경 장군의 아버지인 보문각 교감(校勘) 김효인(金孝印)이 글씨를 썼다.
보경사에는 10세기 경 조성된 미려한 비로자나삼존불상, 18세기의 <비로자나후불도>, <관음보살괘불도>, <팔상도>를 비롯한 많은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다. 1742년에 뇌현(雷現) 등의 화승이 그린 적광전의 <비로자나후불도>는 통도사 성보박물관장 범하 스님이 각고의 노력으로 집성한 40권의 조선시대 불화집 중에서 선별하여 간행한 <<한국불화명품선집>>의 표지화가 될 정도로 조선시대 불화를 대표한다.
지금 보경사 대웅전 뒤에 놓여있는 커다란 통나무 구유는 밥통도, 물통도 아니다. 조선시대의 제지도구인 지통(紙桶)일 뿐이다. 조선 중기의 기록에는 보경사 주변에는 온통 닥나무 밭이었다고 한다. <보경사사적기>(1792)에는 보경사는 산이 좋아 양반 관료들의 산놀이에 스님들이 가마꾼이 되고 절은 숙식을 제공하는 여관이 되며, 물이 좋아 종이 제조 노역에 시달리는 어려움이 있다고 하였다.
<<산중일기>>에 의하면, 1688년 5월 6일에 원주의 대학자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일행이 보경사에 도착하여 공루(空樓)에 올라서 태웅(太雄) 스님이 준비한 저녁식사를 하였다. 8일에는 암자에서 보경사로 와서 공루에서 수좌 신환(信環) 스님이 내온 송차(松茶)를 대접받았고, 답례로 붓 한 자루를 주었다. 이 공루의 이름은 원조루(圓照樓)이며, 적광전 남쪽의 장방형 누각이다. 현재 원조루에는 편액이나 시판이 없다.
<<영일읍지>>(1929)에는 경상도관찰사 김세익(金世翊, 1634-1698)이 1698년에 고을을 순시하며 지은 시와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이 1604년 안동부사 시절에 보경사에서 지은 시를 원조루 제영시(題詠詩)로 실어두고 있다. 김세익은 내연산을 유산하고 보경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다음해 봄에 내연산에 다시 오고 싶어 하였지만 순시 중 청송에서 숨지고 말았다.
갑진년(1604) 2월 청하현 보경사에서 짓다 甲辰二月。淸河縣寶鏡寺作
바닷가 봄날이 아직도 작은 추위를 띠었고, 湖上春陰帶小寒。
누대는 아스라이 있는 듯 없는 듯하네. 樓臺縹渺有無間。
풍류객 좋은 구경 다시 애석한데, 風流勝賞還堪惜。
초승달은 처음 올라 다시 보아라하네. 新月初昇要再看。
*<<모당집>>에 ‘寶敬寺’라고 하였으나 여기서는 ‘寶鏡寺’로 정정함.
-홍이상
동녘의 십여 고을을 돌아보다가 東巡歷遍十餘州
나랏일로 내달려 잠시도 쉬지 못했네. 王事馳驅不暫休
오늘 새벽에야 고요한 절에서 풍경 소리 처음 들으니, 今曉初聞蕭寺磬
삼각산에서 독서하던 가을날이 꿈만 같구려. 怳如三角讀書秋
명승지를 두루 밟는데 아침 해가 개이고, 踏遍名區朝日晴
절에 돌아와 자니 꿈이 오히려 맑다. 歸來僧寺夢猶淸
죽장망혜로 노닐 생각이 나니, 留將竹杖芒鞋意
내년 봄에는 다시금 와야겠네. 要帶明春再度行
-김세익
오암 스님과 농수 선생의 교유
가을 풍광을 읊음 諷吟秋光
천지에는 예와 이제 없건만, 天地無古今
인생은 비롯함과 마침이 있구나. 人生有始終
묵묵히 자연의 이치를 관찰하니 黙然觀物理
시냇물에 떠 내리는 서리 맞은 단풍잎. 霜葉下溪楓
-의민
<사진3. 오암당 의민 스님 진영>
조선시대에 보경사에 머문 스님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오암당(鰲巖堂) 의민(毅(義)旻, 1710-1792) 스님이다. 포항 청하면 월포리 오두촌(鰲頭村)에서 아버지 김준(金浚)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모친이 달을 머금는 태몽을 꾸었다. 세종 때 청하로 귀양 온 개성유수 김운(金芸)의 후손으로 효행과 우애로 남해현감에 천거되고 보경사 입구에 학산서원(鶴山書院)을 세운 김석경(金錫慶)이 스님의 조부이다. 나이 스물두 살에 모친을 여의는 슬픔을 당하여 친척 되는 보경사의 각신(覺信) 장로 스님 밑으로 출가하였고, 계영(桂影) 강백의 법을 이어 서산대사의 9세 법손이 되었다. 스님은 내연산 삼용추(삼폭포) 위 대비암에 젊은 시절부터 오래 머물며 후학을 길렀다. 불교계에서는 스님을 영남의 ‘으뜸가는 어른(宗丈) 스님’으로 불렀다. 스님은 진각국사의 <<선문염송>>에 게송을 덧붙였다. 스님의 아름다운 승탑과 벽옥(碧玉) 탑비가 지금 서운암에 있다.
자하가 여쭈어 말하였다: “‘어여쁜 웃음 보조개 짓고, 아리따운 눈동자 흑백이 분명하니, 흰 것으로 광채를 내도다!’ 하니, 이것은 무엇을 일컬은 것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것을 뒤로한다.” 자하가 말하였다: “예가 제일 뒤로 오는 것이겠군요?”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를 깨우치는 자, 상(商, 자하의 이름)이로다!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겠구나.”(子夏問曰: “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
-김용옥, <<논어한글역주>>2 <팔일(八佾)> 제3
1787년에 흥해군수로 재임하던 문장가 성대중이 77세의 시승(詩僧)인 오암 스님의 문집, <<오암집>>에 쓴 서문은 내연산과 오암 스님의 인품과 오암 스님의 시를 연계하며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 예술론을 적용하여 오암 스님의 시를 평하고 있다.
<사진4. 통신사 시절의 성대중(1764년, 33세)>
성대중은 내연산이 바닷가에 서리어 있는데 겉으로 보면 범상하지만 웅장한 기운이 하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미르와 범을 갈무리하고 구름과 비를 지어내기에 족하여 동쪽 영남의 진산(鎭山, 주변을 거느리는 산)이 된다고 하였다. 삼용추(三龍湫, 연산, 관음, 잠룡 세 폭포)의 특출한 경관은 오히려 그 아름다움의 말단에 지나지 않으며, 회관(誨寬), 우홍(宇洪)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한 오암 스님이 머물기에 산이 더욱 더 중후하다고 하였다.
유가 집안 출신의 스님은 시를 좋아하여 백편의 시들을 손 가는대로 지었는데, 시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스님의 시들이 투박하고, 쉽게 지었다고 헐뜯었다. 청성은 스님의 시가 정말로 질박하지만 시가 싣고 있는 기운이 두텁고, 취하고 있는 소재가 넓어서 빈곤하고 꾸밈이 많은 것과는 많이 다르며, 쉽게 시를 쓴 것은 그만큼 내면에 축적한 공부에서 시가 유래함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스님의 시를 헐뜯을 게 못된다고 평하였다. 오히려 스님을 보면 사람됨이 ‘넓고(宏) 크고(碩), 법도에 맞고(典), 두터워서(厚)’ 옛날의 후덕한 스님의 풍모인데, 시가 과연 그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청성은 자신의 벗인 현천(玄川) 원중거(元重擧, 1719-1790)로부터 오암 스님과 농수(農叟) 최천익(崔天翼, 1712-1779)은 영남 좌도(嶺南左道, 낙동강 동쪽의 영남 지방)의 위인들이라는 말을 들은 지 오래되었는데, 흥해 군수로 부임해와 오암 스님을 뵙고 보니 과연 듣던 것과 같았다고 하였다. 다만, 농수는 이미 고인이 되어 만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지만, 자신이 농수의 묘지명을 짓고, 오암 스님의 문집에 서문을 쓰는 인연이 있음을 뜻 깊게 생각하고 있다.
청성은 시는 진실로 문장의 한 기교에 지나지 않으나 모든 문체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시를 오직 기교나 꾸미는 것만으로 시평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논어>>에 ‘회사후소’라고 한 것처럼, 인품의 바탕이 아름다운 뒤에야 재능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스님을 이야기할 때, 풍만하고 후덕한 그 인품을 말하여야지 한갓 그 시만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삼용추가 웅장한 기세를 가진 내연산을 다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내연산을 보면 내연산의 주인인 스님의 인품을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스님의 시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라고 물으며, 스님과 농수는 진실로 동쪽 영남 지방의 빼어난 인물들이라고 하였다.
현천 원중거와 농수 최천익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야겠다. 현천은 이덕무(李德懋), 성대중(成大中),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홍대용(洪大容), 황윤석(黃胤錫), 남공철(南公轍), 윤가기(尹可基)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옛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고 세속의 명리와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기질과 지사적인 삶은 연암그룹의 젊은 지식인들로부터 어른으로 존대 받았다.
<사진5. 통신사 시절의 원중거(1764년, 46세)>
그는 또한 시인으로 뛰어난 역량을 보였는데, 그의 시는 성당(盛唐)의 넉넉한 시풍과 청신한 시어를 특징으로 하였다. 시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결국 그를 조엄(趙曮)을 정사로 하는 1763년 계미통신사행의 부사(副使) 서기로 일본에 들어가게 하였다. 이 때 성대중도 정사(正使) 서기로 동행했다.
1770년에 내연산이 있는 청하현의 송라도찰방(松羅道察訪)으로 부임해와 60일 만에 교체되었다. 이 때 오암 스님과 농수 최천익과 교유하였다. 그는 송라도찰방을 그만 둔 뒤에 가난에 쪼들리게 되었고, 결국 선영이 있는 용문산 아래에 은거하였다. 1776년(영조 52) 무렵에 장원서주부(掌苑暑主簿)를 맡게 되었고, <<해동읍지(海東邑誌)>>의 편찬에 연암그룹의 인물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대학자 병와 이형상은 어린 최천익을 세상의 신동이라고 하였다. 최천익 진사는 흥해군의 향리였으며, 여항(閭巷) 시인으로서 서울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조선을 대표하는 문장가로 통신사의 서기관으로 일본에 다녀오고 <<해유록(海遊錄)>>이라고 하는 탁월한 여행기를 남기기도 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한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은 영일현감 재임시절에 제자가 되기를 원하며 찾아온 농수에게 외우(畏友)로서 존대하였다. 신유한은 농수에게 자신의 책, <<삼가호백(三家狐白)>>에 서문을 붙이도록 하였다. 일본의 문사들과 논평한 글인 <<삼가호백>>은 당송팔대가에 드는 북송의 문장가 구양수(歐陽脩), 소식(蘇軾), 왕안석(王安石)의 문장 33편에 대해 각각 저자의 간략한 평을 가한 글이다.
병조판서를 역임한 섭서 권엄은 흥해군수로 좌천되어 와서 농수를 용전옹이라 경칭하며 <<농수집>> 서문에 선조 때의 여항시인으로 유명하였던 유희경(劉希慶, 1545년-1636)에 비유하였다.
<사진6. 농수 최천익의 간찰>
홍문관 교리 이중구(李中久)는 농수의 고결한 인품을 두고 “도정절(陶靖節)의 시 <의고(擬古)>에는 동방에 한 선비가 있어 옷이 언제나 남루하나 얼굴은 늘 좋더라고 하였는데, 동녘 바닷가 고을에 사는 농수야말로 영락없이 그런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농수는 사암(思庵) 최기대(崔基大), 소수재(蔬水齋) 류인복(柳寅福), 이계(耳溪) 장사경(張思敬), 라천(羅泉) 이학해(李學海) 같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바닷가의 궁벽진 고을, 흥해(興海)가 문사(文士)의 고을이 되게 하였다.
농수가 죽은 지 10년이 못되어 제자가 시집을 간행하고자 하여 흥해군수로 왔던 문장가 성대중에게 산정을 요청하였다. <촉석루에서-청천 신유한(申維翰)의 시에 차운함(矗石樓 次申靑泉韻)>를 시집에 넣고 싶은데, 그 셋째 구에 나오는 ‘두월(斗月)’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목이 메이고 차가운 강물은 흐르고 싶어하지 않고, 咽咽寒江不肯流
홀로 남겨진 세 비석만이 빈 고을을 굽어보고 있네. 獨留三碣頫虛洲
남아는 수양성에서 전사한 장순이 있고, 男兒騈死睢陽堞
우주에는 촉석루가 높이 솟아 있다. 宇宙仍高矗石樓
달과 빛을 다툰 것은 당시의 일이요, 斗月光爭當日事
산하의 기운 일어나 어두운 하늘까지 뻗쳤네. 山河氣作亘雲愁
낡은 옷깃 가득 눈물 적시며 난간에 기대 오래 있자니, 滿襟衰淚憑欄久
아름다운 계절에도 즐겨 놀고 싶은 마음 없네. 佳節無心辦勝遊
류인복이 꿈에서 스승에게 이 시를 시집에 넣을 지 말지를 고심하고 있다고 하자, 농수는 “나도 성에 차지 않아서, 그 구를 ‘매서운 기세로 쇠뇌를 당기니 일월과 빛을 다투고(日月光爭張弮怒)’로 고치고 싶었는데 미처 원고에 쓰지 못했네.”라고 하였다. 청성은 시인이 시를 다듬는 습관은 죽어서도 변하지 않으니, 두보가 소양직(蘇養直)의 꿈에서 자신의 시, <팔진도(八鎭圖)>의 ‘유한실탄오(遺恨失呑吳)’를 잘못 해석하는 것을 고쳐준 일만 그러하겠느냐고 하였다.
최기대가 시집을 간행할 때 목판의 두 글자가 일그러져 어떻게 교정할까 걱정하자 역시 스승이 꿈에 나타나 ‘회(灰)’자를 쓰며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는 일화도 손만익(孫萬翼)이 쓴 농수의 행장에 나온다.
농수 최천익은 내연산 보경사 대비암에 머문 의민 스님과는 성속을 뛰어넘는 영혼의 벗이었다. 한 분은 흥해 고을 용전리에서 태어나 공자님을 스승삼은 고결한 선비로서 향리로 살았고, 한 분은 이웃한 청하현 오두촌에서 나시어 글을 읽다가 어머니를 여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출세간에 머물렀다. 그들은 서로 시와 편지를 주고받았고 서로의 제자들까지 격려하고 아꼈다. 생사의 경계를 넘어서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엎드려 은혜로운 문안 편지를 받자오니 감개무량하오. 봄부터 여름에 이르도록 은적암의 스님이 오가며 그대가 평안하고 잘 계시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을 듣고 저도 마음 절절이 기쁘고 위로가 되었지만, 한 자의 문안 편지도 보내지 못하였음은 손님들이 어지러이 찾아와 틈이 없었나 보오. (......) 의민은 머리가 흰 아우가 있어서 산과 들에서 형제가 서로 의지 하였소. 갑자기 아우를 잃는 아픔을 당하여 내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아서 그 아픔을 어찌 다 형용하겠소. 어린 조카가 집안을 이어 근근이 허술한 집을 지키고 있어서 산소 쓸 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장례는 아직 생각지도 못하고 있소. 이 일이 걱정이 되니 저는 세상 밖의 인정을 잊은 사람으로 자처하기가 어렵군요. 일찍이 한 번 왕림하기로 하신 기약이 있어서 마음속으로 애타게 기다렸다오. 삼복더위가 자꾸 치성하여 오실 날을 말없이 손꼽아 보며 정의를 바꾸지 못하였다오. (......) 틈이 나시거든 가을과 겨울 사이에 암자로 은혜로운 왕림을 한 번 하여 주오. 산 중 암자의 창가에 고요히 앉아 서로 시를 논하고 도를 강하면 몸이 쇠약해져 가는 이 노년에 쉬이 얻을 수 없는 좋은 인연이지 않아요.”
*은적암: 포항 신광면 비학산 법광사의 암자
-보경사 대비암에 머물던 의민 스님이 최천익 진사에게 보낸 편지
“가을 기운이 고결한 것을 살피고 배움의 발걸음이 진중하여 저를 찾아와 진리를 찾는 모범을 보여 주심에 구구히 감사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소. 중추가 지났고 또 서리 맞은 단풍잎도 졌으니, 비록 세속 살이에 골몰하여 그렇다 할지라도 맑게 노닐 연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오. 나뭇잎은 지고 산은 텅 비었는데, 어찌 시월 보름을 기다리겠소. 그 때가 되면 암자에도 재를 베푸느라 번거로워 평온한 대화가 방해될 듯하니, 열흘 여드레간에 신을 들메하고 소나무 사립문을 두드리면 응당 동자로 하여금 구름 깊은 산 속을 가리키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보경사 대비암에 머물던 의민 스님이 최천익 진사에게 보낸 편지
관아의 국화를 읊조림 詠官菊
남녘 하늘 시월에 샛노란 국화 피었네, 南天十月黃花在
이 매헌(梅軒)에 마음을 두니 흥이 참으로 풍요롭다. 賴此梅軒興正饒
비바람 치는 밤에 벗과 마주하여 지새는 듯하고, 如對故人風雨夜
눈서리 내린 아침에 회포를 풀 것 같다. 欲論懷抱雪霜朝
저정(滁亭)의 물색은 쓸쓸함이 더해가고, 滁亭物色添蕭爽
팽택(彭澤)의 술잔은 적요하지 않다. 彭澤杯樽不寥寂
분외(分外)의 시골 늙은이 왔다가 문득 취했으니, 分外村翁來輒醉
성문을 나가면 마을 아이들 조롱을 사겠지. 出城嬴得市兒嘲
*매헌: 흥해군 관아에 있는 건물 이름.
*저정: 안휘성 저현의 취옹정을 말한다. 구양수(歐陽修)가 이 고을의 태수로 와서 고을의 낭야산에 승려 지선(智僊)이 지은 정자를 취옹정이라 이름하고 자신을 취옹이라 칭하며 <취옹정기(醉翁亭記)>를 씀.
*팽택: 도연명이 집안이 빈한하여 가족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었는데 숙부의 도움으로 집에서 백리 떨어진 강서성 팽택의 현령이 되어 술잔을 기우릴 정도의 경제적 안정은 얻었지만, 천성이 세속 일을 싫어하여 80여 일 만에 전원으로 돌아가며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남김.
-최천익
농수 선생이 흥해군 고을 관아에서 향리로 일할 때 선생이 남긴 시다. 의민 스님은 늘그막에 먼저 저승 사람이 된 농수를 그리워하며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농수의 국화 시 운에 거슬러 차운함 追次農叟菊韻
선리(仙吏)의 매헌에 일찍이 국화 피어났으니, 仙吏梅軒曾有菊
기쁜 손님인양 대작하니 흥이 서로 풍요로웠다네. 喜賓對酌興相饒
외로운 절개 서리에 맞서는 밤을 끔찍이도 어여삐 여기고, 偏憐孤節凌霜夜
남은 꽃잎 이슬에 젖는 아침을 가장 아꼈다. 崔愛殘葩浥露朝
어질던 관리를 우러러하지만 천리나 멀고, 敬慕甘棠千里遠
남긴 글 낭랑히 읊조리건만 구천은 적요하기만 하다오. 朗吟遺詔九泉寥
뜬 인생 팔십 인연은 얇기만 한데, 浮生八十塵緣薄
세상 밖 영령은 나를 조롱하지나 마소. 世外英靈莫我嘲
*선리: 신선처럼 고상하고 깨끗한 아전.
-의민
의민 스님에게 드림 寄旻師
흰 납의 입고 궁벽한 마을을 찾아서, 白衲尋窮巷
푸른 눈동자 반가운 얼굴로 옛 정을 나눈다. 靑眸話舊情
스님은 돌아가고 가랑비에 젖는 땅, 送歸霑小雨
스님 생각에 잠겨서 밤 깊도록 앉았다. 回憶坐深更
티끌 묻은 책상에 시를 남기고 떠나고, 塵榻留詩去
가을 산에 들어 청량한 꿈에 들겠지. 秋山入夢淸
이전의 기약 멀지 않은 것을 알고, 前期知不遠
지팡이 하나 짚고서 가벼이 올 날을 헤아린다. 料理一笻輕
-최천익
의민 스님의 시에 차운함 次毅旻上人韻
운수(雲水)를 집으로 삼고 雲水爲家計
여러 해 산을 내려오지 않네. 多年不下山
삼폭(三瀑) 위에서 잠들고 일어나며, 寢興三瀑上
백화(百花) 사이에서 가고 머문다. 行住百花間
백법(白法)은 사람들이 묻지 않고, 白法無人問
단제(丹梯)는 내가 오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丹梯許我攀
벗이 왔다가 돌아갈 것을 잊으니, 偶來仍忘去
한가함을 잠시 훔치려는 것이 아닐세. 非爲暫偸閑
*삼폭: 의민 스님은 내연산 삼용추(잠룡폭, 관음폭, 연산폭) 위의 대비암(大悲庵)에 머물렀다.
*백법: 부처님의 가르침. 청정한 선법(善法). 상대어는 흑법. 흑법은 외도의 가르침.
*단제: 신선의 세계로 오르는 사다리.
-최천익
농수를 그리워하며 懷農叟
어느 곳 귀한 집 아이로 다시 태어났을까, 回生何處貴家兒
응당히 전생 숙업의 일을 생각할 테지. 應念前生宿業爲
나를 아끼더니 어이하여 날 버리고 갔소, 愛我胡然捐兒去
그리워도 보지 못하매 그대의 시만 읊조릴 뿐이라오. 思君不見誦君詩
지난날 달 밝고 바람 맑은 밤에 함께 노닐었고, 舊遊月白風淸夜
짙붉은 꽃피고 단풍잎 지는 시절을 늦도록 완상을 하였건만, 晩感花紅葉落時
오는 세상에도 서로 어울려 한없는 뜻을 나누며, 來世相從無限意
땅 끝 하늘가까지 밟아 보세. 窮尋地角與天涯
-의민
최진사를 추억하며 憶崔上舍
삼월이라 봄빛이 좋건만, 三月春光好
옛사람은 어이 오지 않는고. 古人胡不來
억지로 숲 속에 앉아보건만, 强要林下坐
어울려 깊은 술잔 권할 이 없어라. 無與勸深杯
-의민
사대부들이 산놀이 온 내연산
1167년 주자가 38세에 친구 남헌(南軒) 장식(張栻), 택지(擇之) 임용중(林用中)과 어울려 형산 축융봉을 오르고 <남악유산후기(南嶽遊山後記)>, <동귀난고서(東歸亂稿序)>를 지었다. 이 때 3인이 지은 57수의 시들과 서(序)․발(跋) 문을 합하여 1500년에 명(明)의 등회(鄧淮)가 <<남악창수집(南嶽唱酬集)>>을 엮었다. 장식의 <남악창수서(南嶽唱酬集序)>는 광활한 시계(視界)와 바람의 기세, 청정한 기운을 강조하였다. 주자는 남악을 유산한 뒤에 주정(主靜)적 공부를 버리고 인간 본성의 역동성에 주목하는 변화를 겪었다고 한다.
조선의 이행(李荇, 1478-1534)은 1531년에 주희와 장식의 7일 산행을 본받아 7일 만에 <<남악창수집>>의 시 50수에 차운하였다. 조선에서는 1585년 이전에 경주에서 이 책을 복각하였다. 주자학을 받아들인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남악창수집>>을 자주 참조하였다(심경호,<<산문기행>>).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산(遊山) 문화는 주자의 남악 형산 축융봉 유산과 그 시문집인 <<남악창수집>>의 전래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주자의 시, <취하축융봉(醉下祝融峰)>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애송하였다.
경주부윤에서 퇴임한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이 1700년 봄에 영천 호연정(浩然亭)에서 장현광이 명명한 현재의 포항시 죽장면의 입암 28경을 4박5일 동안 탐방하고 남긴 여행기, <입암유산록立(巖遊山錄)>에서 언급하듯이 내연산을 주자가 유산(遊山)한 중국의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비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내연산을 동남 제일의 산으로 여겼다.
황여일은 1587년 내연산을 유산하며 사자폭포 아래의 너럭바위에서 쉬어갔다. 황여일은 갓을 벗고 머리를 감았고, 황여일의 숙부 황응청, 청하의 유생 김득경(金得鏡), 보경사의 시승(詩僧) 학연(學衍) 스님은 솥발처럼 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전복껍질로 만든 술잔으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황응청은 평소 즐겨 음미하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를 읊조렸다. 유산 문학으로 유명한 동진(東晉)의 손작(孫綽, 314-371)이 지은 시문이다. 그들은 내연산을 중국의 천태산에 비유하였고, 열흘간의 여행에서 45수의 시를 지었다.
불교와 도교의 명산으로서 유교의 산으로는 알려지지 않던 천태산은 <유천태산부>로 인하여 명산이 되었다. 내연산도 신라, 고려 시대 이래로 불교와 도교의 산으로서 조선시대의 사대부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산이었다. 봉화의 청량산이 퇴계가 아끼며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의미 있는 명산이 된 것처럼 내연산이 조선시대 사대부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황여일의 <유내영산록>에는 보경사 학연 스님의 대답을 전하고 있다.
처음으로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문학의 소재로 삼은 사람은 청하현감으로 왔던 당대의 문장가 백운거사(白雲居士) 옹몽진(邕夢辰)이다. 옹몽진은 순창 옹씨의 시조이고 자는 응용(應龍)·응기(應祈)이다. 1546년 진사시, 1553년 별시문과, 1556년 중시문과에 급제하고 음성, 청하, 운산(雲山), 황간의 현감, 충청판관, 예조좌랑, 병조정랑, 동지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전원(田園) 생활의 담담함을 문학으로 표현하였던 도연명(陶淵明, 365 -427)을 자처하며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찾아왔다가 동해 바닷가의 내연산을 발견하였다.
구암 이정을 배향한 경남 사천 구계서원
옹몽진이 귀향하며 퇴계의 문인이기도 하였던 경주부윤 구암(龜巖) 이정(李楨, 1512-1571)에게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사대부 사회에서 명망이 높던 이정은 중국문학사에서 산수의 아름다움을 본격적으로 문학의 제재로 삼았던 사령운(謝靈運, 385-433)의 산수 탐방과 주자의 형산 축융봉 산놀이를 재현하였다. 그가 1562년에 내연산을 찾은 뒤부터 조선시대 사대부 사회에서 내연산은 유산의 명산이 되고, 많은 시문의 창작 공간이 되었다.
이정이 내연산을 찾아와서 지은 시는 응봉에서 발원하는 내연계곡을 보며 인생과 학문의 연원을 생각하는 주제를 표현하였다.
내영산에 노닐며 遊內迎山
오늘 아침 구름 안개 활짝 개어, 今朝雲翳豁然開
종일토록 냇물의 근원을 찾아 푸른 이끼를 밝았네. 盡日窮源踏翠苔
꽃과 버들 산에 가득한데 누가 있어 그 뜻을 헤아릴까? 花柳滿山誰會意
한 줄기 계곡물, 바람과 달만이 홀로 서성이는 것을. 一川風月獨徘徊
내영산에 노닐며 遊內迎山
냇물이 돌고 골이 굽으며 길이 층층이라, 川回谷轉路層層
힘을 다해 걷고 끌며 차례로 오르네. 盡力躋扳次第登
열두 폭포 흘러흘러 쉼이 없어도, 十二瀑流流不息
근원의 샘물 한 줄기는 본래 맑다. 源泉一脈本淸澄
청하 내영산을 다녀와서 過內迎山在淸河
골짜기 입구에 눈과 얼음 쌓여 있어서, 洞門積氷雪
병든 나그네 다시 찾아가기 어렵구나. 病客難重尋
다른 날 나를 받아준다면, 他日如容我
근원을 찾아 산 속 깊이 가길 마다않으리. 窮源不厭深
1562년 구암의 내연산 유산으로 조선의 사대부들은 앞 다투어 내연산의 진달래꽃과 단풍을 찾아 왔다. 그들은 경관에 이름을 부여하며 명소들이 주는 의미와 감흥을 문학으로 표현 하며 몸을 닦았다.
1688년 내연산의 암자들을 찾아왔던 원주의 대학자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은 삼용추에 산의 기운이 모두 모여 있어서 금강산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곳이 사랑스러워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다. 삼용추에 산놀이 왔던 시인 묵객들은 붓으로 바위에 이름과 시를 적었고, 벼슬아치들은 정으로 이름을 파고 붉은 칠을 하였다. 바위벽에 새겨진 이름들은 360여 개가 된다.
그 가운데에는 류몽인의 조카 류숙, 일본에 통신사로 가서 고구마를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조엄, 추사 김정희의 생부인 김노경, 경주부의 기생 달섬(達蟾)도 눈에 띈다. 청하현을 비롯하여 흥해, 경주, 영천, 영덕, 하양 등의 지방관들이 기생을 동반하여 내연산에서 산놀이를 하였다. 내연산 명소들 중 기화대, 기하대, 기화담, 기화봉 같은 속칭들이 생겨난 까닭이다.
황응청은 울진에서 동해안 길을 남하하여 1567년에 하문수암(下文殊庵) 서쪽 벽면에 시를 썼다. 1623년에 내연산을 유산한 류숙은 바위가 빗물에 씻기자 바위에 새겨진 이름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자신도 암자 벽에 시를 썼다고 하였다. 그는 1632년에 문수대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계곡 바위 위에 글씨를 붓으로 썼다.
1571년 가을에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의 양부(養父)인 서형(徐浻, 1524-1575)이 내연산을 찾아와 바위벽에 붓글씨를 남기고 시와 유산록(遊山錄)을 남겼지만 임진왜란 때 원고가 불타버렸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제자인 서사원은 1603년에 내연산을 찾아와 그 부친이 바위에 쓴 붓글씨 흔적을 이틀 동안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다. 서사원과 함께 내연산을 유산했던 청하 사람 윤락(尹洛, 1568-1644)이 1605년에 가야산을 유산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구 금호강가의 솔숲에 서재를 짓고 살던 서사원의 집을 찾아가 1571년 서형이 학연 스님의 시축에 차운한 시를 전해주었다.
<사진7. 서사원의 간찰>
송담(松潭)‧탄은(灘隱) 채응린(蔡應麟, 1529-1584)과 서사원은 ‘달성십현(達城十賢)’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서사원은 퇴계의 제자였던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1532-1585), 채응린을 통하여 퇴계학을 계승하였고, 여헌 장현광, 정구와 함께 당시 대구‧경북 지역의 세 명유(名儒)였다. 내연산을 유산했던 서형, 서식(徐湜, 1530-1593) 형제, 채응린, 서사원 등은 금호강(錦湖江) 가에 정자를 짓고 살며 교유하고, ‘강안문학(江岸文學)’을 꽃피운 대구의 유학자들이었다.
계묘년 구월 가을 내연산을 유산하며 선친의 흔적을 찾았으나 보지 못하고 지음
癸卯九月之秋。遊內延。尋先人遺跡。不見而作。
신미년 늦가을 선친께서 杪秋辛未先君子。
채 송탄과 함께 이 산을 찾아오셨다. 偕蔡松灘過此山。
이틀이나 머물며 적은 시를 찾지 못하여 兩日留題尋不得。
소자는 눈물 쏟아지는 것을 금치 못했습니다. 小兒難禁涕汍瀾。
-서사원
청하 내연산에 노닐며 학연 스님의 시축에 차운하여 적다
遊淸河內延山 次題僧學衍詩軸。
부생의 심사는 인간 세상에 매여 있고 浮生心事繫人間。
망중한에 산을 찾아왔지만 한가하지 못하다오. 忙裏尋山不是閒。
다음날 돌아가는 길에 공연히 슬프게 바라볼 것인데 明日歸途空悵望。
다른 해 꿈속에서 산을 그리고 싶소. 他年幾作夢中山。
余自追竹郡到此。中途値雨。到寺乍止。作意登山。探入下龍湫。師言日暮當及下歸。
故不得盡見上龍湫。是師亦知我輩牽俗速歸之意也。故及之。辛未季秋初吉。達城蓮亭稿。
내가 죽군(현재 포항시 죽장면(竹長面)?)에서 거슬러 여기에 도착했는데 중도에 비를 만나 절에 도착하여 잠시 쉬다가 등산하기로 마음을 먹고 하용추(잠룡폭)로 찾아 들어갔다. 스님이 ‘해가 저물려고 하니 절로 내려가시어야 합니다.’고 하였다. 그래서 상용추(연산폭)를 미처 다 보지 못하였는데 이 스님 또한 우리들이 속세에 얽매여 빨리 돌아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지은 것이다. 신미년 가을 초하루 달성의 연정 지음.
-서형
차운 송탄 次 松灘
절은 푸른 이내 속에 있고, 寺在靑嵐杳靄間。
동쪽을 유람하는 객들은 누워 한가롭다. 東遊客子卧來閒。
절경을 찾고 싶지만 앞길이 보이지 않고, 欲尋絶境迷前路。
어둠이 내리는데 어디서 종소리 울린다. 薄暮鐘鳴何處山。
-채응린
차운 남간 次 南澗
모퉁이 따라 돌부리 사이로 오솔길 오르는데 攀緣微路石牙間。
한가히 머무는 암자의 스님들 보이네. 始見庵僧住着閒。
제일가는 봉우리에서 폭포를 보고, 第一峯頭看瀑布。
아름다운 이름 여산만 자랑하지 말아라. 佳名不獨擅廬山。
-서식
후서
연정(蓮亭)은 나의 선친이고, 남간(南澗)은 나의 중부이며, 송탄(松灘)은 나의 고향 어른 채 진사이시다. 이 분들은 지난 신미년(1571) 가을에 함께 바다와 산을 유람하였다. 선친의 유산록이 있었는데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에 불타고 말았다.
그 뒤 33년이 되는 계묘년(1603)에 불초가 내연산을 선친을 이어서 유산하며 이틀 동안 선친의 산놀이 흔적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해 빠질 때 산을 내려오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치 못하고 보경사의 벽에 시를 남겼다.
을사년(1605) 가을 청하 사람 윤락(尹洛)이 가야산을 유산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의 미락재(彌樂齋)를 방문하였다. 그는 계묘년 가을에 나와 함께 내연산을 유산하였다. 소매 자락에서 선친의 내연산 유묵을 꺼내주었다. 나는 울면서 그것을 받아서 꿇어앉아 읽는데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눈물을 거두고 우러러 시를 지어서 뒷날 나를 닦는 자료로 삼고자 한다.
[後序] 蓮亭乃吾先君子也。南澗乃吾仲父也。松灘乃吾鄕長蔡上庠也。去辛未秋。同遊海山。先君子乃有遊山錄。備記之矣。辰巳兵火失之。後三十三年癸卯。不肖孤繼作內延之遊。兩日探討山中。終不得見先人留題可考之跡。下山之夕。不禁涕出。而留小詩于壁間矣。歲乙巳杪秋。淸河人尹洛遊伽倻而還。訪余于彌樂齋。乃癸卯秋同作內延之遊者也。袖出辛未年先君子遊內延遺跡。拜受而跪閱之。殆不任其涕淚之橫逬也。仍收泣而仰賡。以爲後日修己之資也。
선친의 을사년 내연산 유산 운을 절하며 보고 피눈물 흘리며 엎드려 차운하다
乙巳拜見先君子遊內延韻。泣血伏次。
선친이 돌아가시고 많은 해를 세간에 머물렀는데, 見背多年住世間。
동해바다 노을 지는 골에서 옛날 한가함을 훔쳤네. 東溟霞洞昔偸閒。
근원을 찾아가도 선친의 유묵은 보지 못하고, 窮源未見先遺墨。
슬픈 눈물 허공에 뿌리고 산은 만첩이었다. 哀淚空揮萬疊山。
선경에 노닌 계묘년을 손꼽아보니, 屈指仙遊癸卯間。
그동안 물과 구름 사이로 날아온 꿈이었다. 邇來飛夢水雲間。
어찌 오늘에야 솔숲 오두막 속에서 볼 줄을 알았겠는가, 那知此日松窩裏。
바닷가의 산에서 지은 선친의 시를 울며 보네. 泣見先詩出海山。
-서사원
내연산의 명소와 시의 탄생
동석암에 묵으며 宿動石庵
높고 낮은 나무꾼들의 길이 맑은 계곡물을 둘러싸고, 高低樵路繞淸泉
절은 단풍 비단 숲가에 있다. 寺在丹楓錦繡邊
스님과 뜬 구름은 지는 해로 돌아가고 僧與浮雲歸落日
객은 호학산을 따라서 신선의 세계로 들어간다. 客從呼鶴入諸天
천년의 동석이 새로운 얼굴을 만나고, 千年動石逢新面
하룻밤의 등잔불 아래 대화에 숙세의 인연을 안다. 一夜懸燈認夙緣
종소리 몇 번이나 어디서 일어나는가, 鐘磬數聲何處起
앞 봉우리가 지척인데 신선이 있다. 前峯咫尺有眞仙
-류숙
국가가 편찬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내연산에 대․중․소의 세 바위가 솥발모양으로 벌려있는데, 사람들이 삼동석이라고 한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두 손으로 흔들면 꿈쩍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삼동석(三動石)은 내연산의, 삼용추(三龍湫-연산, 관음, 잠룡 세 폭포)는 신귀산의 랜드마크로 여겼다. 포항에는 내연산이 있고, 내연산의 상징 경관은 삼동석이고, 대표 경관은 삼용추인 것이다.
<사진8. 삼동석>
조선시대 오백 년 동안 삼동석을 방문하고 유일하게 시문을 남긴 사람은 취흘(醉吃) 류숙(柳潚, 1564-1636)이다. 인조반정 뒤에 조카의 광해군 복위운동이 발각되어 <<어우야담>>으로 유명한 숙부 류몽인은 처형당하고 취흘은 연루되어 60세에 청하로 귀양 와서 죽는 해까지 열네 해를 살았다. 그가 1625년 단풍철에 산림보호표지석인 봉표석이 있는 호학산을 넘고, 삼동석 곁의 암자, 동석암에서 묵었다. 1636년 봄에 청하현감 심동귀와 삼동석을 다시 찾았다. 그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열람하고 삼동석을 찾았고, 교유하던 사람들에게 늘 삼동석이야말로 내연산의 상징물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삼동석이 단풍숲가에 있고 큰 종 모양이라고 하였다.
<사진9. 주연>
필자는 그의 시문을 읽고 2013년 3월 10일 아침 일찍 보경사에서 출발하여 경북도립수목원 부근의 선바위까지 삼동석과 동석암 암자터, 주연(舟淵)을 찾아서 내연계곡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아직도 잔설이 있고 그늘에 얼음이 있었다. 계곡 가의 속칭 선바위와 두 바위가 삼각형으로 상중하에 벌려 있고, 부근에 2곳의 암자터가 있고, 그 하류에 주연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취흘이 찾아와 암자에 묵어 간 이래로 거의 400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마음에서 잃어버린 삼동석을 되찾는 실로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산을 돌아내려오며 일주문 앞에 서서 우러러본 밤하늘에 별들이 치렁치렁하게 빛나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삼동석이 솥발 모양으로 3곳에 벌려있어서 별칭이 삼정석(三鼎石)이다.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문인으로서 대산 이상정,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등과 교유하였던 봉화 닭실마을(酉谷里) 사람 강좌(江左) 권만(權萬, 1688-1749)은 청하현감으로 부임하는 당질이자 제자인 소산(小山) 권정택(權正宅, 1707-1765)을 1746년 가을에 송별하며 내연산을 함께 찾자고 약속하였다. 당시에 권만이 지은 시와 내연산을 찾지 못하고 이듬해 초봄에 돌아간 권만을 위하여 권정택이 쓴 제문에 삼정석이 나타난다.
황여일의 행장을 지은 권만은 그의 <유내영산록>을 읽고 ‘소금강’이라고 하는 내연산 산놀이를 오매불망 기다려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당질이 청하현감으로 부임하고 자신은 양산 군수직에서 물러나며 나귀를 사서 작은 거문고를 싣고 시 주머니를 걸고서 청하현감인 권정택과 내연산을 찾아서 100편의 시를 지어도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때 내연산의 상징경관인 삼동석을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기고, 청하현을 다스리는 조카를 위하여 삼동석에서 소, 돼지, 양을 희생으로 바치는 큰 제사를 지내고 싶어 하였다.
청하사군을 보내며 送淸河使君
청하현은 바닷가에 있고, 淸河縣在海天涯
너를 보내며 선조*의 시를 다시 읊조린다. 送爾重吟先祖詩
다스리고 보살핌이 악어 길들이듯 하는 날을 보고, 治理行看馴鰐日
가을 벼가 태풍의 피해 입었다는 것이 차라리 거짓이었으면. 秋禾寧被颶風欺
높고 높은 내연산의 가을빛은 빛나는데, 內延秋色逈崢嶸
이제 청하태수를 길 떠나보낸다. 今送淸河太守行
신선이 삼정석에 있음을 아노니 知有仙人三鼎石
그대를 위하여 함께 머물며 큰 제사를 베풀리라. 爲君留與供三牲
*선조는 청하현감 권윤경(權允經)으로 추정됨. 연산폭 남쪽 피우석에 권윤경의 인명 각자가 있음.
-권만
제문
전년 가을에 소자가 관직에 부임할 때 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따라 오셔서 저를 백암(栢巖)(김륵(金玏), 1540-1616)) 선생의 묘 앞(봉화군 상운면 운계리에 김륵의 묘가 있음)에서 전송하였습니다. 소자가 길에서 인사를 드리니 선생님께서는 말을 세우고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청하가 비록 10실(室)의 작은 고을이지만 사직과 백성이 있으니 적다고 할 수 없다. 너는 수령으로 고을을 다스리기를 부지런히 하여라. 청하의 내연산은 바닷가의 명산이다. 소금강이라는 별칭이 있으니 나는 오매불망 가고 싶은 것이 오래다. 이제 너가 그곳의 주인이 되었고 나 또한 올해(1747, 60세) 새로이 양산 군수 관직을 벗고서 작은 노새 한 마리를 사서 명승지 구경할 도구를 갖추었다. 너의 행정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내년 늦봄에 짧은 거문고를 싣고 시 짓는 종이 주머니를 매달고서 너를 따라 삼정석(三鼎石)과 열두 폭포의 경치 속에서 내가 시를 읊고 네가 화답하여 100편의 시를 읊어도 또한 시원하지 않을 것이다. 가거라. 이렇게 산신령에게 아뢰고 기다려라.”
소자는 ‘예’하고 대답하고서 길을 떠났습니다. 청하에서 업무를 본지 며칠이 지나서 말을 타고 내연산의 산문(山門)에 이르러 산신령에게 아뢰었습니다. 내연산의 바위와 골이 아득하고 그윽하며 폭포가 쏟아지는 암벽은 맑고 웅장하고 기이하고 빼어났습니다.
우리 고향 봉화의 청량산을 보았고 청송 주왕산을 가보았지만 모두 저의 필력으로는 그 빼어난 경치를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내연산이 일찍이 선생을 만나 그 아름다움을 읊은 시를 얻어서 산문이 기운을 토해내지 못함을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내년 봄이 그렇게 멀지가 않아서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번민하는 한이 오히려 있었습니다. 어찌 4순이 못되어 선생님께서 초연하게 돌아가실 줄을 뜻하였겠습니까.
선생님이 전에 여러 날을 편찮으시며 학을 타는 꿈이 있었는데 정말 오늘 일이야말로 꿈인가 합니다. 선생님의 영혼이 돌아가심과 함께 다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수레를 타고 찬바람을 몰며 3산(봉래, 방장, 영주 3개의 신선이 사는 산) 10주(州)에 노닐며 뭇 신선과 어깨를 부딪치고 크게 웃으실 것을 제가 모르겠습니까마는, 또한 시간이 나시면 이른바 내연산이라는 곳으로도 내려오시어 묵은 빚을 갚으셔야 합니다. 저와 작별하며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말입니다.
아니면 청하고을의 해월루(海月樓)에 오르시어 소자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어떠한 지 살피시고 가만히 저를 달래어서 그윽한 가운데 도움의 말씀을 해 주십시오.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하지만 선생님의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하오니 소자가 어찌 길이 통곡하고 깊이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하여도 선생님께서 병석에 계실 때 소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씀하셨습니다. ‘큰 한계가 이미 굳어졌다. 죽음의 두려움은 모르겠다. 삶과 죽음의 변화를 살피니 또한 텅 비어서 죽음을 애달파하는 생각도 없다’고 하신 것은 선생님이 이미 생사가 나누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제사지냅니다. 감히 공사(公私)의 근심을 다하는 아픔과 생사의 슬픔과 고통의 말로써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지는 않으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 내연산 산놀이 가자던 그 약속은 말씀드리옵니다. 선생님께서 소자의 말 밖의 다하지 못하는 깊은 슬픔을 헤아려 주실 것이라 엎드려 생각하옵니다.
-권정택
보경사에서 출발하여 첫 길목으로, 산신제단이 있는 곳의 높이 치솟은 바위가 낙호암이다. 청하현의 유생 김득경(金得鏡)은 황여일 일행의 유산에 동행하여 ‘범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고 안내하였다. 그 오년 뒤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곽재우 의병장이 지휘하는 의령 정암진 전투에서 김득경 부자는 전사하였다.
문수암과 보현암이 갈라지는 곳에 가로세로로 갈라진 마당 바위가 문수대이다. 그 아래 벼랑 밑이 협암(挾巖)이다. 보경사에서 문수대까지 이르는 계곡이 무풍계(舞風溪)이다. 문수대에서 수십 걸음 거리에 벼랑길 오르막이 나오고 길가에 난간이 이어지고 바위 사이의 절벽 허공에 나무다리를 놓아두었다. 승선교(昇仙橋)인데, 태평교나 낙하교(落霞橋)로도 불렀다. 옛날에는 소나무로 잔교(棧橋)를 걸쳐 놓았는데, 근심걱정 없고 노을 지는 신선계의 태평한 시공으로 들어간다는 뜻의 이름이다.
<사진10. 사자폭포>
<사자담>
내연계곡의 첫 쌍둥이 폭포가 사자폭이다. 이른바 상생폭은 20세기에 쌍폭이라서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그 아래의 깊고 푸른 못이 사자담(구연(龜淵), 기화담)이다. 사자담 남쪽에 네 줄의 층암이 병풍처럼 솟아 있다. 그 중에 서쪽 끝의 것이 기생과 선비가 올라가 놀다가 기화담에 떨어져 죽었다고 하는 기화대(妓花臺)이다. 쌍둥이 폭포 사이에 못으로 기어 내려오는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낙구암(落龜巖)이고, 폭포 위의 시원하게 뚫린 계곡이 활연문(豁然門)이다. 폭포 옆으로 바위벼랑에 돌을 쌓아 겨우 사람이 다니는 길을 내었는데, 이 모퉁이가 사자항(獅子項)이다. 소동파의 게송처럼 사자폭포는 밤낮으로 사자후를 토한다.
조정을 비난하였다는 시를 지었다는 필화를 입어 황주(黃州)로 귀양 가 동쪽 언덕을 갈아 농사지으며 네 해 동안 살던 송나라의 소동파가 신종 원풍 7년(1084)에 황주를 떠나 여주(汝州)로 유배지를 옮겨가면서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벗, 상총(常總) 선사를 만났다. 두 사람은 등잔불을 걸고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소동파는 선불교의 공안(公案)인 ‘무정설법(無情說法)’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어서 게송을 지었다.
동림사 상총 장로 스님께 드림 贈東林總長老
계곡의 물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장광설(長廣舌)이니, 溪聲便是廣長舌
산의 빛깔이 어찌 청정한 몸이 아니겠는가. 山色豈非淸淨身
밤이 오자 팔만사천 게송을 설하니, 夜來八萬四千偈
훗날 남에게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他日如何擧似人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후라고 한다. 상생폭이라고 인식하는 오늘 우리는 사자폭포의 우렁찬 사자후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가. 밤낮으로 흐르는 내연산 계곡물이 팔만사천 게송을 설법하는 부처님의 장광설이고, 계절마다 볼 수 있는 찬연한 산색이 법신불의 청정한 몸임을 알아차릴 눈이 있는가. 사자항, 사자폭(獅子瀑), 사자담(獅子潭)은 오늘에 되찾아야할 보배롭고도 귀중한 이름들이다.
사자 바위 獅巖
괴석을 사자라 이름 하였으니, 怪石名獅子
으스대며 머리를 들려 하네. 憑凌首欲擡
끊어진 벼랑에 굽은 길을 여니, 斷崖開路曲
바위틈으로 사람이 다닐 수 있구나. 巖隙許人來
계곡물이 넘치면 배를 띄우기 좋고, 溪漲船宜泛
솔이 자라면 대들보 할만하다. 松長棟可栽
누구에게 되던져 법을 전 하리, 爲誰傳反擲
말없이 산모퉁이에 섰노라. 無語立山隈
-의민
사자쌍폭을 지나서 보현폭이 병풍에 둘러싸여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채, 물소리만 바위벽에 울려 메아리친다. 여기서 계단의 중간쯤에 오르면 신라시대 창건된 하문수암터 돌축대가 화살대숲 사이로 북쪽에 보인다. 하문수암터에서 동쪽으로 백 걸음 가면 견상암(見祥庵, 견성암(見性庵))터가 나온다. 그곳의 노송이 자라는 암대가 견성대이다.
계단을 다 오르면 보현암으로 오르는 길목에 암반이 계곡 가 벼랑 위에 있는데, 습득대이다. 그 위의 보현암 자리가 한산대이다. 주변에는 늠름한 노송들이 좋다.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은 중국 당나라 때 천태산 국청사의 두 선승(禪僧)으로 저서로 <<삼은시집(三隱詩集)>>(일명 한산시집) 이 전해진다. 한산·습득의 전설은 송대(宋代) 선의 유행과 더불어 애호되어 자주 선화(禪畵)의 소재가 되었다.
보현암을 서쪽으로 돌아가면 나무 정자가 있는 쉼터가 있다. 주변에 기와조각들이 흩어져 있으며, 건물 토대가 보인다. 적멸암터다. 그곳의 길목이 적멸항이다. 황여일은 적멸암에서 묵어가며, 여행기에 이렇게 썼다.
“외로운 연기가 석양에 오르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졌다. 불당에 들어가 베개를 높이하고 누우니 바람과 냇물이 세차서 골을 울리는데, 바람소리의 울림이 영롱한 음성이었다. 사람으로 하여금 뼈를 차게 하고, 혼은 벌써 깨어나게 하였다. 밤은 일경인데 달이 산봉우리에 걸렸고, 달그림자가 못 가운데에 떨어졌다. 성글게 돋아난 별이 빛나고, 은하수가 비껴 돌았다. 적막하여 한 마리 새도 울지 않으니, 참으로 산중의 절경이었다. 팔월 칠일 갑자. 잠든 객들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숲 끝에 이미 붉은 해가 걸렸다.”
-<유내영산록>
적멸항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면 길가의 바위에 사람 하나가 앉을 만한 구멍이 있다. 풍혈(風穴)이다. 삼용추에 이르러 하용추인 잠룡폭을 굽어보고, 동쪽 위의 암벽 아래로 올라가면 커다란 굴이 있고, 그 앞에 석축이 있다. 황여일이 서하굴(栖霞窟)이라고 명명했다. 현수교 아래 쌍폭이 중용추인 관음폭이고 그 아래가 관음담(일명 감로담)이며, 움막 같은 두 바위굴이 관음굴이다. 관음폭 위의 웅장한 폭포가 상용추인 연산폭(내연폭, 여래폭, 용추)이고, 그 아래 못이 용담이다. 용담 아래에 또 다시 못을 이루며 물은 관음폭을 이룬다. 용담의 북쪽 암벽이 학소대이고, 학소대의 동쪽 위쪽에 길이가 일 미터 정도 되는 장방형의 감실이 있는데, 학의 둥지라는 학소두(鶴巢竇, 학소, 청학소)이다. 노을은 신선경을 말하고, 청학은 신선이 타고 다니는 새이다. 선인들은 삼용추를 신선경(神仙境)으로 여겼다.
용담 남쪽 암벽 아래에 물이 고인 바위 구덩이가 있고, 암벽에도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어서 비를 피할 만하다. 류숙이 상용추 위의 수리더미 중턱에 있던 내원암에서 묵고, 다음날 구기자술을 마시고 계곡 주변에서 약초를 캐다가 비를 만났다. 그는 물의 신령스러운 기운, 미르(용)가 깃들어 사는 용담 곁의 이 움푹 들어간 공간에서 비를 피하였다. 함께했던 승려들의 요청으로 그 공간을 피우석(避雨石)이라 하여 미르의 영험스러움을 드러내고, 장자(莊子)에 부끄럽지 않다는 의미를 붙여 상용추를 적선담(謫仙潭-적선은 이백의 별칭)이라고 하였으며, 약초를 캐고 구기자술을 마시며 신선술을 연마한 사람들이 노닐었다고 삼용추 계곡을 구기동(枸杞洞)이라 명명하였다.
<사진11. 류숙(바위 각자)>
늦봄에 내연산에 노닐며 고문수암에 묵으며 설희 스님과 황정경을 토론하고서 시를 지어 스님에게 줌
暮春遊內延山 宿古文殊 與雪煕上人討論黃庭經 仍以詩贈之
삐걱대는 가마타고 허공으로 들어가고, 伊軋藍輿入半空
선경이 멀리 저녁 놀 속에 있구나. 諸天遙在暮雲中
산은 봉래산을 갈무리하여 연꽃이 희고, 山藏蓬島蓮華白
땅은 무릉도원을 숨기고 있어 비단 물결 붉구나. 地祕桃源錦浪紅
여기서부터 고승이 도의 기운 많은데, 自是高僧多道氣
누가 귀양객이 또한 신선 늙은이인줄 알리오. 誰知謫客亦仙翁
황정경 강론을 마치니 향연이 일고, 黃庭講罷香煙起
쌍학이 너울너울 저녁 바람에 춤추는구나. 雙鶴蹁躚舞晩風
-류숙
조선시대에 유교와 불교를 소통 시킨 언어는 노장 사상과 도교 문화이었다. 계조암과 문수암은 영일만과 주변 지역이 굽어 보일만치 전망이 좋다. 계조암에는 경사(經史)에 밝고 <<장자(莊子)>>에 통달한 덕경(德瓊) 스님이, 문수암에는 신선술을 닦으며 도교 경전인 <<황정경(黃庭經)>>에 조예가 깊은 설희(雪熙) 스님이 머물렀다. 류숙은 이 두 스님과 시를 주고받으며 유불도, 삼교의 경계를 넘어 근원의 지평에서 그들과 만나 고달픈 귀양살이의 벗으로 삼았다. 그는 덕경과 설희 스님에게 주는 시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청하가 길이 끊어지고 아주 멀리 있음은 한유(韓愈)가 귀양 가 승려 태전(太顚)과 사귀었던 조주(潮州)에 밑지지 않고, 유종원(柳宗元)이 유배가 승려 호초(浩初)와 벗이 되었던 용성(龍城)의 빼어난 경치가 내연산에 높지 않는다. 그들 당시의 방외(方外)의 사귐과 사령운(謝靈運)이 나막신에 밀랍을 칠하고 산수를 즐긴 일과 소동파(蘇東坡)가 등잔불 켠 선방에 묵어간 일과 비교할 수 있다. 혹은 꽃과 달로 서로 기약하고,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하고, 호사를 칭찬하여 베풀고, 늙은 나이에 우아하게 노닐어 나로 하여금 거친 곳에 즐겁게 머물게 하고, 그 귀양살이를 편안하게 하며, 그 근심을 풀어내게 하는 것은 실로 이 두 분의 도움이니, 남들이 비록 벗이 아니라고 하여도, 나는 반드시 벗이라고 이를 것이다.”
여름철, 비가 내리고 수량이 풍부하면 웅장한 소리를 밤낮으로 울리며 용담에는 시퍼런 물이 울컥울컥 소용돌이친다. 놀랍게도 그 물 속에 피라미가 물을 거슬러 헤엄치고 있다. 경이로운 생명력이다. 연산폭포 물줄기가 용담에 쏟아지며 사방으로 튀는 미세한 물 알갱이들에 햇빛이 비추어 들면 무지개가 선다.
1626년, 청하 고을에 입하 뒤로 칠십 일 동안 가뭄이 들자, 류숙은 기우제 제문을 짓고 현감 이립(李砬)은 용담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그날 밤, 이립은 용담 가의 바위에서 한데 잠을 자며 자신의 부덕을 참회하고 근신하였다. 목민관의 정성에 용신이 감응하여 이튿날 비가 흡족히 내렸음은 물론이다.
관음담가의 서쪽 암벽이 월영대(月影臺)이다. ‘청풍명월’에서 밝은 달에 짝할 맑은 바람이 없어서 월영대 입구의 돌문을 청풍문이라고 해월이 명명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홀연히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고 사람들은 바람신이 있어서 해월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해월은 그곳이 ‘달이 뜨고 솔 그늘에 달빛 그림자 지면 불국정토를 이루어 산의 한 승경이라’고 하였다. 낙재는 대비암에서 저녁밥을 먹고 월영대에 올라 교교한 달을 보며 밤을 지새고, 아침해를 맞았다. 관음담 주변에 바위 감실이 숭숭하여 월영대는 중허대(中虛臺)라고도 하였다.
취하여 축융봉을 내려옴 醉下祝融峰
만 리 길을 바람 타고 와서 보니, 我來萬里駕長風
골짝의 뭉게구름이 가슴을 틔워준다. 絶壑層雲許盪胸
탁주 세 사발에 호기가 솟아, 濁酒三杯豪氣發
낭랑히 읊조리며 축융봉을 날듯이 내려온다. 朗吟飛下祝融峰
-주희
영남 퇴계학의 정맥을 잇는 대학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연일현감으로 부임하여 1754년 봄에 농수 최천익, 의민 스님과 함께 학소대 위쪽의 계조대에 자리 잡은 계조암에서 <<논어>> 몇 장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계곡물을 건너서 남쪽의 대비암으로 가다가 월영대에 올라서 대 이름을 물었다. 기하대라고 하자, 대산은 주자가 벗들과 어울려 형산(衡山) 축융봉을 유산하고 지은 시, <취하여 축융봉을 내려옴(醉下祝融峰)>의 제4구 ‘朗吟飛下祝融峰(낭음비하축융봉)’을 들어보았느냐며 의민 스님에게 물었다. 이 시구의 ‘비하’에서 이름을 취하여 명명하였지만 소리가 와전되어 ‘기하(妓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며, 비하로 대 이름을 고치도록 하였다. <
사진12. 월영대(비하대), 상용추(연산폭)>
이들은 그날 대비암에서 대산이 제시한 하평성 (下平聲) 침(侵)운의 심자(心字)에 압운하는 시를 지었다.
대비암에 올라서. 운을 부르는데 심자를 얻었다. 上大悲庵。呼韻得深字
한 뜰 솔 그림자에 그늘이 짙고, 一庭松檜影陰陰。
천 길 산비탈 깊이 암자가 있다. 千仞岡頭佛院深。
꽃은 지려하는데 새가 지저귀고, 花事欲闌時鳥語。
호젓이 종일토록 무심히 앉았다. 悠然終日坐無心。
-이상정
차운하는 시를 최진사 천익에게 주다. 2마리. 次韻贈崔進士 天翼 二首
시냇가 나무 들쑥날쑥하고 저녁 해가 넘어가고, 澗樹參差翳夕陰。
흐르는 물 따라 가서 깊은 근원으로 들어간다. 行隨流水入源深。
그날 지팡이 짚고 참됨을 찾아 갔지만 倚筇當日尋眞興。
오묘한 곳은 원래 다만 이 마음에 있다. 妙處元來只此心。
두 해를 바삐 보내며 세월을 썼고, 二年奔走費光陰。
고요한 곳에서 무단히 감개가 깊다. 靜處無端感慨深。
말 한마디도 진중하게 서로 벗이 되었고, 珍重一言相許地。
세한에도 저버리지 않을만한 마음이다. 可能毋負歲寒心。
-이상정
심자(心字)
여래의 마음이 중생의 마음이고, 如來心是衆生心
어리석음과 깨달음은 하나의 마음에서 나누어진다. 迷悟爰分一箇心
옷 가운데에 참된 보배 있음을 알지 못하고, 不識衣中眞寶在
종일 남의 보배를 세느라 헛되이 애쓴다. 數他終日謾勞心
-의민
청하현감으로 부임한 이상정의 손자 이병원은 <<농수집>>을 읽고서 이 사실을 알고 65년 뒤인 1818년 3월 15일에 형제와 가족들과 함께 비하대에 올라 조부의 발자취를 어루만지며 감격에 젖었다.
내연산에서 하산하던 이병원은 봉화에서 경주 옥산서원으로 유람을 가던 유학자 강필효(姜必孝)와 만나서 보경사에서 묵고 다음날 다시 비하대에 올랐다. 이병원은 친구인 그에게 부탁하여 ‘大山先生命名 飛下臺(대산선생명명 비하대)’라고 하는 큰 글자를 받아서 석공으로 하여금 바위 윗면에, 동행했던 이병원 형제, 아들, 친구의 이름을 바위 동면에 새기게 하였다.
<사진13. 강필효의 비하대 글씨>
그리고 이듬해 이병원은 대비암을 찾아와서 조부의 시, 현판을 보고 차운하는 시를 지었다.
삼가 조부의 대비암 시에 차운하다. 敬次王考大悲庵韻
대산 선생은 영조 계유년(1753)에 영일현감으로 부임하여 을해년(1755)년에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선생의 시 가운데 ‘두 해를 바쁘게’라고 한 것은 마땅히 이 시가 1754년에 지은 것이라야 한다. 지금부터 66년 전이다. 선생의 발자취를 어루만지니 선생의 높은 인품을 더욱 간절하게 사모하게 된다. 삼가 시를 지어 절의 벽에 걸어둔다. 다음이 지은 시이다.
先生以元陵癸酉宰延烏。乙亥謝還。詩中謂二年奔走則當是甲戌年間所作。距今六十六載。摩挲遺躅。益切高山景行之思。謹拈出揭之寺壁。仍次其韻。
암자 뜰은 깊고 깊어서 여름 나무가 그늘지고, 庭院沉沉夏木陰。
우연히 불경을 만나서 깊은 산에 이르렀네. 偶逢經釋到山深。
절에는 예부터 관심이 없었고, 西林自古無端意。
당시를 아득히 기억하자니 도심을 얻었다. 緬憶當年證道心。
동해 바닷가 봉우리들마다 땅거미가 묻어오고, 亂峯東畔欲斜陰。
등불 아래 옛 부처님 모신 깊숙한 암자 하나 있다. 古佛燈明一院深。
여기서 신령스런 샘물은 그치지 않고 흘러가고, 自是靈源流不舍。
유연히 냇가의 공자님 마음을 깨닫는다. 悠然會得在川心。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님이 냇가에서 흐르는 물을 보시면서 말씀하시었다.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도다!”(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고 하였다.
-이병원
<울진 기성면 사동 해월헌>
울진 사동(沙銅) 해월헌에서 포항 청하현 해월루(海月樓)와 월포 조경대(釣鯨臺)를 거쳐서 내연산을 유산한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 1524-1605)과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은 1587년 8월 6일 영해부사 최경회와 청하읍성의 동문(부옹문) 앞에서 작별을 하고서 내연산을 이틀 동안 유산하였다. 최경회는 임진왜란 진주성 혈전의 영웅이다.
황여일의 내연산 여행기, <유내영산록(遊內迎山錄)>은 단행본으로도 유통되었을 만큼 기행문학의 백미이다. 뛰어난 문학성과 세밀한 기록성을 지니고 있어서 인문학의 공간인 내연산을 읽는 고전이 된다. 내연산이 있어서 이토록 빼어난 글이 탄생하였고, 이렇게도 아름다운 문장이 있어서 우리는 내연산의 마음을 읽고 감동에 젖을 수 있다. 그는 적멸암(寂滅庵)과 삼용추(三龍湫)와 월영대(月影臺)와 선열대(禪悅臺)에서 슬프도록 깊은 아름다움과 장쾌한 감흥을 유감없이 표현하였다.
삼동석과 삼용추를 비롯하여 내연계곡에서 필자는 약 50개의 명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 잊히고, 와전되고, 잃어버린 내연산의 명소들과 암자들을 <유내영산록>을 읽고 거의 되찾을 수가 있었다. ‘삼동석 곁에는 두 승암(僧庵)이 있으며 그곳에는 ‘입에서 물을 뿜는’(도교 신선술 수련) 자들이 산다. 주연이 삼동석 십리 하류에 있으며, 측량하지 못할 정도로 깊다. 보경사 금당 뒤에 지장전이 있고, 지장전 뒤에 관음각이 있다.’고 하는 등의 정보는 <유내영산록>에만 유일하게 등장한다.
황여일 일행은 월영대 남쪽, 잠룡폭 곁에 장엄하고 웅장하게 치솟은 바위봉우리, 선열대에 보경사 학연(學淵), 계조암 신오(信悟), 대비암 신전(信全) 스님들의 안내로 올랐다. 황여일이 묘입문(妙入門)이라고 명명한 월영대 남쪽의 바위문을 지나면 사방이 닫혀 감옥처럼 깊은 바닥이다. 그곳에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황여일이 충소문(沖宵門)이라고 명명했다. 다리를 건너 다시 가파른 벼랑에 난 조도(鳥道)를 기어서 올라가면 그곳에 두 암자터가 있다. 정상의 정방형의 넓은 백운암터, 그 남쪽 아래의 장방형의 좁은 운주암터가 있다. 백운암과 운주암을 합하여 선열암이라고 하였다. 신라․고려시대 이래로 수행자들이 머물며 선열에 잠겨 깊은 수행을 하였던 속세를 초탈한 도량이었다. 겸재의 <청하내연산폭포도>에 두 암자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속칭 선일대(仙逸臺)라고 하지만 선열대의 와전이다.
백운대에 붙임 題白雲臺
푸른 하늘에 치솟은 금빛 연꽃 봉우리요, 靑天削出金芙蓉
꼭대기에서 곧바로 쏟아지는 두 줄기 흰 폭포수이네. 絶頂直垂雙白龍
옛 절벽이 가파르고 가파른데 참선하는 스님 야위었고, 古壁巉巉道骨瘦
가을 못은 고요하고 고요하여 신령스런 바람피리 소리 비었다. 秋潭寂寂靈籟空
동해바다가 지척이고 해가 백운대의 겨드랑이에 솟고, 東溟咫尺日生腋
북두칠성 아래의 하늘 가슴에는 구름이 소용돌이친다. 北斗低仰雲盪胷
다시 층층 발아래에 월영대이고, 更下層層月影石
외로운 연기 올라오는 암자에서 맑은 종소리 들려오네. 孤烟蘭若送淸鍾
-황여일
해월과 숙부 대해 선생은 선열대에서 암자의 스님들이 지은 푸른 채소 반찬에 흰밥을 먹고 머루주를 걸러 마셨다. 높고 높은 선열대 위에서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었다. 발아래 삼용추가 한 방울 물이고, 보경사가 메추라기 둥지처럼 작게 보이더라고 하였다. 동해 만경창파에 씻고서 밤낮으로 해와 달이 뜨고 지며, 은하수가 흐르는 우주를 관조하였다. 때맞추어 청하현감 매당(梅堂) 조정간(趙廷幹)이 시를 보내왔고, 이 시에 차운하여 대해와 해월은 선열대에서 시를 낭랑히 읊조리며 산놀이의 감흥을 유감없이 표현하였다.
<사진14. 선열대>
원운 原韻
그대가 가을산 속으로 들어가고, 君去秋山裏
가을산은 정말로 찾아 갈만 하여라. 秋山正可尋
폭포는 바위 아래서 울고, 泉流巖下咽
노송은 학 가에 그늘진다. 松老鶴邊陰
시상은 일천 가지 모습을 담고, 詩思籠千態
신선의 발걸음은 일만 고개를 넘는다. 仙蹤度萬岑
지은 시들 주머니에 모두 담으시고, 奚囊收拾盡
나머지는 부쳐서 이 늙은이 크게 읊게 하시라. 餘寄老夬吟
-조정간
조매당의 시에 화답하여 차운하다 次酬趙梅堂
옛날부터 듣던 호학산 풍경, 昔聞鶴山景
오늘에야 멀리 찾아왔네. 今日遠來尋
스님과 솔은 함께 늙어가고 僧與松同老
하늘은 골짝 따라 그늘진다. 天隨壑共陰
그대는 번거롭게 푸른 옥 지팡이 만들어 주고, 煩君綠玉杖
나는 흰 구름 고개를 넘는다. 度我白雲岑
절경은 시로 읊고 그림 그리기 어렵고, 絶勝難聲畫
풍경 만나 종일 시를 읊조린다. 臨風盡日吟
*녹옥장(綠玉杖):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말하는데, 녹옥의 가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청하읍성 동문 앞에서 청하현감 매당 조정간은 황응청과 황여일에게 해월루 앞의 대나무를 잘라 만든 지팡이를 선물하였다.
-황응청
조매당의 시에 차운하다 次趙梅堂韻
갈선은 어제 벌써 떠나갔고, 葛仙昨已別
봉래산에 가을이 다시 찾아왔네. 蓬島秋更尋
구동은 노을이 오래되었고, 龜洞丹霞古
용담은 흰 해에 그늘진다. 龍潭白日陰
열두 폭포는 우레치고, 雷霆十二瀑
일천 봉우리는 칼과 창처럼 솟았다. 劒戟一千岑
조물주는 다함없이 갈무리하였고, 造物藏無盡
천지간의 나는 이렇게 읊조리네. 乾坤我此吟
*갈선(葛仙): 포박자(抱朴子) 갈홍(葛洪, 284-363)이다. <<포박자>>, <<신선전>> 저자로 알려져 있다. 단사(丹砂 : 유화수은)가 현재의 베트남에서 산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갈홍은 베트남을 향해 가던 도중 잠시 광주(廣州) 지방에 들르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의 장관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머물러 달라는 제안을 했다. 갈홍은 하는 수 없이 그곳에 있는 나부산(羅浮山)에 들어가 연금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 속에 있던 갈홍이 광주의 장관 앞으로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먼 곳에 있는 스승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장관이 급히 산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갈홍은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 후 갈홍은 시해선(尸解仙)이 되었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았다고 한다.
*구동(龜洞): 낙구암, 구연이 있는 사자폭 주변을 말하는 것으로 보임.
-황여일
해월은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흰 구름이 허리에 걸리는 선열대를 백운대로 개명하였다. 선열대는 삼용추에서 올려다보면 암봉이기에 선열봉이라고 하였고, 운주암이 있기에 운주봉(雲住峰)이라고도 하였으며, 속칭 기화봉(妓花峰)이다.
오암 스님은 내연산의 이러한 풍경 속에서 출가 수행승으로 사는 당신의 내면 풍경을 시로 읊었다.
나의 넋두리 自諷
운주봉으로 붓을 삼고, 雲住峯爲筆
용추로 벼루를 만들어, 龍湫作硯池
일만 겹으로 펼쳐진 바위 병풍에, 巖屛開萬疊
뜻 가는대로 나의 시를 쓰리라. 隨意寫吾詩
-의민
진경산수화 속의 내연산
원백의 청하 부임에 줌 贈元伯之任淸河
미원장 늙어 미쳤다 성내지 말게 不忿元章老且顚
가는 곳마다 비단과 먹 싣고 배를 띄웠네. 縑煤隨處載行船
겸옹의 이 걸음도 좋은 물건 없고, 謙翁此去無長物
주역도 오직 옛날에 강하다 남은 헌책뿐이라. 羲易惟殘舊講篇
영남 사람 응당 사또 이름 알 테니, 嶺人應知使君名
복사꽃 오얏꽃 산에서 피고 학이 춤추며 맞으리라 桃李山開舞鶴迎
해당화 피고 백사장 다 밟고 나서 멀리 배를 부르게, 踏盡棠沙遙喚艇
죽서루 위에는 우리 형님 계시니 竹西樓上有吾兄
*도리산은 청하 봉수대가 있는 산
*호학산은 청하읍 진산
-이병성(李秉成, 1675-1735)
퇴계의 성리학 이해가 무르익고 율곡이 조선 성리학 사상을 열어나가자 조선 고유의 문화가 탄생하였다. 글씨는 석봉 한호, 문장은 간이 최립, 시는 사천 이병연 형제, 그림은 겸재 정선이 진경문화를 창조하였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겪고 명이 만주족 오랑캐에게 망하자, 천하에 유교 문명의 빛은 이제 조선에만 있다고 여긴 사대부들은 우리 땅이야말로 천지의 밝고 맑은 기운을 머금은 참된 경치, ‘진경(眞景)’이라고 자부하였다.
인왕산 아래에 세거하던 율곡의 학통을 이은 서인 노론 세력의 백악사단(白岳詞壇) 중에 좌의정 조문명, 경상감사 조현명 형제, 영조의 사돈이고 추사 김정희의 고조부인 우의정 김흥경의 후원으로 죽서루가 있는 삼척에는 사천 이병연을, 내연산이 있는 청하에는 겸재 정선을 보내어 진경을 시와 그림으로 짓고 그리도록 영조는 배려하였다.
<사진15. 겸재 정선>,
<사진16. 고사의송견남산도>
58세의 겸재가 1733년 봄에 부임하여 1735년 5월 모친의 별세로 60세에 떠날 때까지 겸재는 청하현감으로 재임하며, 내연산과 경상도 일대의 산수를 사생하는 여행을 하였다. 이 시기에 <내연삼용추도>(2점), <청하내연산폭포도>, <고사의송견남산도(高士倚松見南山圖)>, <청하성읍도>를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는 <내연삼용추도>는 삼용추의 깎아지른 바위 절벽을 서릿발 같은 상악준과 도끼로 길게 내리 쪼개는 듯한 장부벽준으로 장쾌하게 그리고, 미가산법(米家山法)으로 삼용추 절벽 위의 솔숲을 물기 있게 그려서 흙산을 표현하였다. 그림은 음양이 조화되어 기운이 생동한다. 59세가 된 겸재의 진경화법은 이 시기에 원숙한 경지에 들어가 <금강전도> 1점을 그리고, 내연산의 삼용추라는 신선경을 만나 피우석에 ‘鄭敾 甲寅 秋’라는 각자를 남겼다(최완수,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
<사진17. 내연삼용추도(호암미술관)>,
<사진18. 내연삼용추도(국립중앙박물관)>,
청하 내연산폭포도
<사진19. 정선 갑인 추 탁본>
맺으며
언어로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은 이름으로 자연 경관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를 통하여 정신을 고양시키고, 성정을 보존하고 키우며, 문명을 가꾸어 나간다. 상생폭은 사자폭으로, 선일대는 선열대로 어서 이름을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시대는 과연 우리 선조들만큼 내연산을 알고, 내연산의 경관에서 의미를 깊게 읽어내는가? 선열대에서 계조암터까지 길이 200미터의 현수교를 놓고, 보경사에서 삼지봉까지 케이블카를 설치하여 관광 수입 올리려는 계산을 하고 있는 현실이 한없이 슬프다.
대구·경북의 명산, 내연산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 하나, 물고기 한 마리까지 사랑하고 아끼자. 이런 연후에야 억만년토록 묵묵하게 그곳에서 뭇 생명을 품고 사는 내연산이 우리 인간에게도 무한한 은혜를 베풀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정신>>34(2015), 대구경북작가회의
첫댓글 선생님의 가르침에 많은 것을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보경사와 내연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배우는 우리들에게는 좋은 정보지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혹시해군수를 역임한 성대중은 1732년(영조8)에 태어나1812년(순조)때 사망한것이 아닌가 했어 물어봅니다.
(내연산 은폭 설명 내용에서...)
네, 박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오타입니다. ^^
자세한 설명에 항상 감탄만 나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