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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04>
違順相爭 是爲心病 不識玄旨 徒勞念靜
위순상쟁 시위심병 불식현지 도로염정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양력으로 갑진년 새해를 맞이하고 처음 맞는 초하루법회입니다.
새해가 되면 여러분들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느낌과 동시에 새로운 각오와 소원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제가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면 여러분들이 세우시는 소원 속에 ‘발심해야지, 신심을 굳게 가져봐야지’ 하는 각오와 소원도 더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세우신 소원 속에 발심과 신심이 씨앗(因)이 되어 적당한 조건(緣)을 만나면 언젠가 꽃을 피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발심과 신심이 씨앗이 되어 인연이 무르익으면 우리는 모두 본래부처로 깨어나실 때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부탁을 드립니다.
그런데 본래부처로 깨어나는 일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왜 어려울까? 둘로 나누어서 분별하는 마음 때문에 어렵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 분별하는 마음만 여의게 되면 본래부처로서 깨어날 수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분별하는 마음을 잘 여읠 것을 신심명은 간절하게, 고구정녕(苦口叮寧)하게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신심명을 통해 본래부처로 깨어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주제는 신심명 내용 중 ‘위순상쟁 시위심병 불식현지 도로염정’을 내용으로 법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위순상쟁 시위심병(違順相爭 是爲心病)
위(違)는 어긋난다는 뜻이고 순(順)은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어긋남과 따라감이 서로 다투는 것이 병(病)이라는 겁니다. 즉 둘로 분별하는 마음이 병(病)이라는 겁니다.
‘무시해야 하나 따라가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것이 마음의 병이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분별하는 것이 마음의 병이라는 말입니다.
그럴 때가 많죠. 어떤 경계가 오면 우리는 늘 이거든 저거든 어떤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분별심입니다.
중생의 분별하는 마음을 분별심이라고 하지요. 분별하는 마음 때문에 부처로 살아가지 못하지요.
물론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분별이 필요합니다. 자아 중심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나에게 유리할까를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분별함으로 우리가 쌓은 많은 지식으로 과학과 문명이 발전하는 등 이로움도 많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지식이 쌓여 분석, 해석하여 개념도 생겨나고 삶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식이나 문명 과학 학문이 우리에게 도움은 주었지만 행복을 안겨줬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안겨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이 분별을 떠나면 됩니다. 분별을 떠나면 도(道)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본래부처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가장 큰 병을 신심명에서는 간택심 증애심 순역심 위순심 등으로 분별심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마음이 어떻게 해서 생길까? 분별심 때문에 생긴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분별하는 마음은 무엇 때문일까? 무명(無 明), 어리석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스스로 잘 살펴보면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좋으면 취하고 싫으면 배척하고 그렇게 하지요? 좋거나 싫으면 그쪽으로 마음이 쏠립니다. 좋고 싫은 쪽으로 쏠리면서 거기에 자리 잡고 머물게 됩니다.
오래 머물다 가는지 바로 흘러가는지 이런 것들을 봐야 합니다.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보거나 들으면 마음이 변하기 시작하는데 옳다 그르다 득(得)이 되겠다 실(失)이 되겠다 구분하여 득이 되면 집착할거고 그렇지 않으면 미워하고 내치는 쪽으로 자리를 잡겠죠.
낚시꾼이 미끼를 바다에 던지면 고기가 그것을 콱 물어버리죠? 그것과 똑같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잡고 취하고 보이는 것, 들리는 것에 휩쓸려 가면 독(毒)이 됩니다. 집착해서 머물면 병(病)이 됩니다.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보면 분별과 집착을 떠나 본래 이 자리에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신심명은 중도를 잘 드러내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간관계에서 혹은 물질로 인해 정신적인 피해를 입는 경우 경계를 따라가면 병이 됩니다. 욕이 욕이 아닌데 그 말뜻에 따라가면 엄청나게 기분이 나빠지잖아요.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는 줄 아셔야 하는데 오랜 시간 배운 지식으로 말에 뜻이 붙으니 기분 나쁜 소리가 되어 화가 나는 겁니다. 개념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배워서 알고 있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소설을 쓰니 괴로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본래 없는 줄을 아시고 괴로움에서 풀려나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그 가르침을 신심명에서 아주 간절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도 실체가 없는 줄 알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집착하지 않는 안목, 중도적인 안목을 가질 때 본래부처로 깨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달리 보면 본래부처로 깨어나야 중도적인 안목을 갖출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중도적인 안목을 비유하자면 어떤 사물이든지 사물을 거울에 비추면 거울은 어떤 사물이든지 분별없이 다 비추어 줍니다. 거울에 비추어진 사물은 인연이 있어 거울에 나타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거울에서 사라지지만 거울은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늘 여여하게 있습니다. 우리가 거울에 비추어진 사물에 집착하면 병이 되고 중생이 되지만 모든 사물을 비추어주는 바탕이 되는 거울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면 중도적인 안목이 됩니다.
불식현지 도로염정(不識玄旨 徒勞念靜)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헛되이 생각만 고요하게 하고자 애쓴다. 라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수행을 살펴보시면 알거에요.
수행을 하다보면 참선이나, 용맹정진 기도를 통해 어떤 경지에 올라야 하지 않겠느냐 아니면 끊임없는 정신집중으로 삼매, 선정이라는 경지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지요?
불교라면 참선이나 기도 같은 정신집중 수행을 항상 염두에 두기 때문에 마음을 가라앉혀라, 그래서 선정에 들어가라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죠?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혀라’ 할 때 다음과 같은 비유도 많이 하지요? 흙탕물이 있는 그릇을 가만히 두면 탁한 물이 가라앉아서 위는 맑은 물이 된다고 들으셨죠? 화두를 들고 선정에 들어가서 깨달아야 된다고 이야기를 주로 하곤 합니다.
그런데 신심명에서는 ‘불식현지 도로염정(不識玄旨 徒勞念靜)’이라고 합니다. 생각을 고요하게 하면 흙탕물이 가라앉듯이 일시적인 선정으로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렇다고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헛된 수고로움만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만 고요히 하는 것은 허망한 짓이라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이런 것을 통해서 어떤 경지에 오른 뒤에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원리가 이 중도라는 사실에 깨어나는 게 현지(玄旨)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중도의 원리에 의해서 존재되고 있는 이 상태가 현지(玄旨)입니다. 현지는 분별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기 이전부터 본래 있었고 지금도 늘 있는 것입니다.
구지선사가 손가락을 내세운다든지, 불법(佛法)이 뭐냐는 질문에 마삼근(麻三斤)이라 대답하고, 개(犬)에게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니 무(無)라고 대답하는 이것이 바로 현지(玄旨)입니다. 그냥 이것뿐인 것입니다.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이게 바로 중도입니다. 그런데 이해가 잘 안되시죠? (손으로 책상을 치며) 이게 중도라는 것이 와 닿습니까? 본래 그 자리에는 옳다 하는 것도 없고 그르다 하는 것도 없고 위순(違順)도 없어요. 어긴다 따른다는 것이 없단 말이에요. 이 자리가 바로 현지(玄旨)라는 거예요. 현지를 모르고 생각만 고요하게 잠재우려 노력하는 자체가 무리가 따른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정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본질을 바로 보는 안목을 열라는 이야기입니다.
흙탕물을 가라앉혀 맑은 물인데 그런데 그릇이 움직이거나 막대기로 휘저으면 다시 흙탕물이 됩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이 마음을 잘 보면 그냥 번뇌가 일어납니다. 몇 십 년을 해도 일어납니다. 번뇌, 망념을 없애고 깨닫는다는 말이 맞겠습니까? 파도가 완전히 없어질까요? 바람 불면 인연 따라 물결이 일어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엄청난 정보들이 내 속에 있으면서 인연 따라 일어납니다. 일어나는 그것을 고요하게 하려 애쓰면서 도(道)라고 하면 안 됩니다. 파도가 일어나고 있는 바탕(바닷물)에 깨어나야 하고, 그 바탕(바닷물)을 바로 보고서는 일어난 그 파도가 그대로 바닷물인줄 알고 그 파도 그대로가 바닷물과 둘이 아니고 하나인줄 아시면 되거든요. 그렇게 알지 못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즉 파도만 보고 바닷물을 보지 못하면 둘로 나누어서 보는 중생소견이 됩니다.
앞에서 흙탕물 예를 들었죠? 집중해서 망상을 가라앉히는 것이 염정(念靜)입니다. 이렇게 깊은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앉아있을 때는 잠깐 조용하다가 금방 흔들립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부일까요?
부처님이 출가하셨을 때 ‘알라라 깔라마’라는 스승을 찾아가서 ‘무소유처정’을 증득하셨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깨달음이 아닌 줄 아시고 ‘웃다까 라마뿟따’를 찾아가서 ‘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가셨죠? 그 높은 경지의 선정에 들어가셨던 거예요. 그러나 나오면 흔들리는 거예요. 흙탕물이 가라앉아 맑아졌는데 흔들리면 다시 흐려지는 것과 같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곳을 떠나 6년 고행을 하셨습니다. 일주일에 좁쌀 1알로 연명하며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고행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고행도 아님을 아시고는 ‘수자타’라는 여인이 주는 유미죽을 드시고 기력을 회복하셨습니다. 갠지스강에서 목욕까지 하셨습니다. 당시의 수행 풍토로서는 타락한 사문이라는 비판을 받는 일이었지만 모두 벗어던진 것입니다. 거기에 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선정에 들어 샛별이 반짝반짝하는 것을 보고 깨어나신 거예요. 선정에서만 깨어난 게 아니라 그 선정 속에서 본래 부처가 작용하는 거기에서 깨어났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이 죽비를 들어 보이거나 주장자를 들어 보이거나 ‘할(喝)’ 하거나 문답할 때 ‘무(無)’라고 대답을 하는 거예요. 보고 듣고 하는 본래부처는 원래 그와 같이 작용하는 거예요. 한시도 나를 떠난 적이 없고, 여읜 적이 없이 인연이 되면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런 작용을 하는 그 속에서 깨어나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대상을 향해 가 있던 마음이 자기로 돌아오면서 깨어나는 겁니다. 자기 부처가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느낄 줄 아는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거예요.
그래서 새벽별 보고 깨달았다 이야기하시잖아요. 그렇게 깨닫고 나서 5비구에게 법을 설하셨습니다. 교진여를 비롯한 5비구는 불과 며칠 만에 깨달았지요. 몇 년 동안 같이 고행을 하셨지만 부처님의 설법에 며칠 만에 바로 깨달았습니다. 5비구가 모두 아라한이 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5비구를 만난 뒤 야사를 만나 법을 전했는데 야사도 바로 깨닫습니다. 그 뒤에 1,250아라한이 나오잖아요. 이렇게 법문 들으면서 깨달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부처님이 한 평생을 법을 설하시고 다니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셨는데 그 이치를 아셔야 합니다.
어떤 분이 연구를 하셨는데 ‘니까야’속에 깨달은 사람이 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40년간 법을 설하시는 동안 깨달은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거예요.
불교가 부처님 돌아가신 뒤 교학적으로 발전하면서 가라앉았습니다. 도인(道人)이 안 나오고 부처님 가르침을 두고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면서 20개 부파가 생겨나면서 부파불교가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달마 스님이 중국에 오셔서 선법을 전하셨고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선법이 전해졌는데, 달마스님은 본래 성품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깨어나라(直旨人心 見性成佛) 이런 이야기를 하셨던 것입니다.
현재 저희들에게 가장 어려운 점이 동정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 통과해서 8식에서 일어나는 미세망념까지 다 없애버려야 깨닫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단계의 체험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이러한 단계의 수행을 계속 잡고 있는 겁니다. 이건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쪽으로 가면 안 되는 것을 이쪽으로 가고 있으니 돌려야 하는데 어려워진 겁니다.
단계를 두면 둘로 나누어져서 본래 부처를 등지게 됩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 성품을 보아서 부처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의 성품은 양변을 여읜 바로 이것! 뿐입니다. 화두는 사량 분별로서는,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말입니다. 화두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양변을 여읜 부처의 성품입니다. 그러니 부처의 성품을 담고 있는 화두를 통해서 바로 지금 당장 깨달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단계를 나누는 수행방법을 통해서는 본래부처로 깨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당송시대를 선(禪)의 황금시대라고 말합니다. 육조 혜능, 남악 회향, 마조 도일, 백장 회해, 황벽 희운, 임제 스님으로 내려오면서 도인들이 많이 나왔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후 확 줄었어요. 많은 도인들이 나오면서 선사들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국가의 지원이 많아지고 그러다보니 관료들과 교분을 두터이 해야 하고, 선사들은 학인들을 지도할 수 있는 시간들이 줄어들고 방편이 나오면서 도인들이 많이 줄어드는 병폐가 나타난 겁니다.
본래 그 자리는 동정(動靜)이 늘 여여한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동(動)이나 정(靜)이나 같습니다. 깨달음의 자리는 동정(動靜)이 다 떠나 있는 한결같은 자리 그렇게 보셔야 됩니다.
대상을 향해서 분별해 나가는 이 마음을 하나로 되돌리면서 본래 부처로 깨어날 수 있도록 하셔야합니다.
불식현지 도로염정이라는 승찬 스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수행을 통해서 헛되이 생각만 고요하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그 뜻을 살려 내셔야 합니다.
‘옳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내가 만들어 놓은 내 상(相)에 묶여 요지부동이 되는 이 수행의 풍토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공부가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여러분들도 다시 잘 살펴보아야 하는 부분이 ‘내가 내 공부의 방법을 틀로 짜놓고 있지 않은가’입니다. 틀이 짜이면 상에 묶여있는 거예요. 상에 묶여도 묶인 줄도 모르고 옳다고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상(相)을 버리라고 하셨고 금강경에서도 일체 모든 상을 떠날 때 여래라고 이름 한다(離一切諸相 卽名諸佛) 했습니다. 그 어떤 상도 다 버리라고 금강경에서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상(相)이 있음을 알고 깨어나야 하는데 한 번 굳어지면 다른 이야기들이 안 들어와요. 법화경에서도 일불승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을 때 더 들을 것이 없다면서 5천명이 퇴석하였지요? 결국은 못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들어갑니까? 남아있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나간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나간 거거든요. 우리 스스로도 한 번 잘 살펴보셔야 됩니다. 거기에 깨어있어야 법의 안목이 열리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여러분들 생각에 꽁꽁 묶여 있으면 진짜 하 세월입니다. 오래 걸린다는 말입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어떤 것도 실체가 없는 줄 알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집착하지 않는 안목, 중도적인 안목을 가질 때 본래부처로 깨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대상을 향해 가 있던 마음이 자기로 돌아오면서 깨어나는 겁니다. 자기 부처가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느낄 줄 아는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