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마르 12,28ㄱㄷ-34
그때에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마르 12,28ㄱㄷ-34) |
◆기발한 우화들로 가득한 「장자」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어느날 장자가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까치 한 마리가 밤나무에 앉았다. 장자는 화살을 들어 까치를 겨냥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까치는 나무에 붙어 있는 사마귀를 노리고 있었다. 사마귀를 자세히 보니 사마귀는 건너편 가지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풀벌레를 노리고 있었다. 모두 다 먹이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자기 목숨이 위험에 빠진 것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장자는 문득 깨우치고 급히 밤나무 숲을 빠져 나왔으나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밤나무집 주인에게 붙들려 실컷 욕을 얻어먹었다는 얘기다. 몇 해 전 외국인들과 함께 경기도 수원에 있는 한 박물관을 간 적이 있었다. 이곳저곳을 돌다가 몽골 유적지를 전시한 곳을 지나고 있는데 때마침 해설자가 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큰 벽걸이 그림이 네 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번째 것은 어른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여드는 장면이고, 두번째 것은 입관을 하는 장면, 세번째는 시신을 들것 위에 놓고 야산으로 옮기는 장면, 마지막 것은 들짐승과 새들이 주위를 맴돌며 시신을 나누어 먹는 그림이었다. 해설자가 “이런 장례는 우리의 효와 윤리 개념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몽골 장례에서는 ‘더불어’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살아 있을 때는 짐승과 새들을 잡아먹었지만 죽어서는 내 살을 저 짐승과 새들에게 나누어준다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시베리아에는 축지족이 살고 있다. 그들은 야생 순록의 무리를 따라 이동하며 그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는데 그 장례 방법이 특이하다. 누군가 죽으면 시체를 들로 옮겨놓은 다음 다른 동물들이 먹기 좋게 배를 갈라놓고는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시체 주위를 돌며 까마귀 소리를 낸다. 까마귀를 부르는 의식이다. 그 다음에는 모두 데굴데굴 구르는데, 이것은 늑대를 부르기 위한 의식이다. 축지족 역시 인간은 살아서 동물들을 먹고 살기 때문에 죽어서는 자신들의 몸을 동물의 먹이로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개하고 야만스런 풍속이라고 할지 모르나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앞서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싶어 반갑다.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나은 것이 바로 제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박순웅 목사(홍천 동면 감리교회) |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