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최초 시인 동아리 "남계회"를 소개 한다.
인묵 /김형식
남계계회 경진춘 (南溪契會 庚辰春)
繽絲繚亂眼開靑 社友相逢俯瞰汀
빈사요난안개청 사우상봉부감정
麥起波瀾浮小屋 花欺玉雪覆名亭
맥기파란부소옥 화기옥설복명정
詩魂遊寂忘言笑 酒量隨時任醉醒
시은유적망언소 주량수시임취성
暮境分張怊悵事 爲吾幾日幾宵停
모경분장초창사 위오기일기소정
하얀 수염 매만지며
푸른 봄을 즐기고 있네
시벗들 서로 만나
남계수를 바라보고 있네
청보리밭 일렁이니
작은 정자는 물위에 떠 있는 듯
꽃잎은 떨어져 흰 눈인 양
정자를 덮어 버렸구려
고요히 앉아
시상에 잠기며
술을 즐겨 보지만
우리인생 늙어 감은 어쩔 수 없네
날 저뭄도 우리 인생 같아
헤어짐이 서글프도다
벗이여 이 세월 우리를 위해
몇 주야나 기다려 줄까
이 시는 고흥출신 우헌(遇軒) 이영순(李永恂)(1882.2.10~1954.7.29)시조시인의 시다. 선생은 구한말 남계리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 과거를 준비 하다가 갑오개혁(1894~1896)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되고 한일 합방으로 시국이 어수선 해 지자 입신양명의 뜻을 꺾고 명의 신의구 한의사의 제자가 되었다. 그후 그는 고흥읍 봉황산 앞 남계천 언덕에 감초당(甘草堂)한의원을 설립하고 일평생 가난한 향민들에게 청의 (淸醫)로 덕을 쌓으신 분으로, 1930년대 부터 근동인 보성, 순천 등지의 문인들과 친교 하면서 '남계회' 라는 시인 동아리를 결성 하였다.
회원으로는 춘정 ,유성, 춘강 정석모, 봉산 김상천,백천 신태우, 운담 박노호, 서천 신문휴, 학산 김민수, 일농 김상희, 해사 정형래,벽소 이민영, 성암 김상유, 송천 신영규 등 20 여명이었고, 준회원으로는 이따금 고흥 방문시 시모임에 동참했던 보성의 문인, 소파 송명회, 설주 송운회, 순천 성석 이성규,서병규,진주 서예가 성파 하동주가 있다.
남계회 회원들은 주로 고흥의 람휘루(覽煇樓), 향로재,인근 수도암에서 자주 모여 한시를 짓고 시여아관 (是如我觀)이라는 문학, 시국, 사상, 담론용 서첩을 만들어 회독하며 자립(自立) 자중(自重) 자신(自信)이라는 삼자정신(三自精神)을 모토로 삼고 당시 암울 했던 일제 강점기의 분위기를 삭히며 광복을 기다리며 오로지 동아리 활동에만 열중 하였다는 사실이 2002년 9월 우헌 선생의 3남 이상완이 선친의 유고, 우헌집에서 일부를 발췌 하여 "남계천 따라 백로와 함께"라는 우리말 번역본을 발간 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흥 최초 시 동아리 모임을 주도한 우헌 이영순 선생은 기품이 백로처럼 고고하며 때로는 어린아이 처럼 순진하여 토속적이고 서정적인 한시를 많이 남기셨다.
선생의 시와 사상은 우리 후배 문인들에게 귀감이 되리라 생각되며 특히 타지역보다 먼저 시 동아리 모임이 결성되었다는 것은 우리 고흥 문인들에게 참으로 자랑 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우리 문학계에서는 1936년 서정주를 중심으로한 동아리 시인부락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 시기인 1930년대에 내고향 고흥에서 시인 동우회 남계회가 결성되어 활동했다는 사실은 우리문학계가 주목 해야 할 사안이며 향토문학사에 조명을 요하는 특이 사안이라 사료된다.
앞으로 남계회 활동의 조명은 학계 및 우리 후배들의 향토문학사 연구의 과제로 접어두고 이 소중한 자료가 한국문인 협회 고흥지부 창간호에 싣게 됨에 큰 의미를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