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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은 왜 싸우는가?>
- 박정욱 (지식프레임, 2018)
Scene 10. 유대인 국가를 세우다 - 이스라엘의 건국
유대인 공동체
-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2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세계 곳곳의 이방인으로 살아옴.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지에 흩어져 살면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지킴. 유럽에서는 유대인 공동체를 ‘게토’라고 부름. 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에서 게토는 박해와 따돌림의 상징. 중동 이슬람 제국은 소수 종교공동체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중동의 유대인들은 유럽에 비해 안정적인 터전.
- 각 지역 유대인들을 뭉칠 수 있도록 해준 구심점은 그들의 종교, 유대교였다. 유대인 공동체가 유대교를 지킨다는 것은 곧 동일한 역사적 기억을 공유한다는 의미. 역설적으로 유럽과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유대인들은 유대교 경전인 <토라>를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많지 않았다. 언어도 다르고, 관습도 다르고, 예배 방식이나, 지키는 절기, 유대교 교리도 각자 달랐다. 유럽의 유대인들은 유럽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따랐고, 서아시아 유대인들은 그 지역의 문화에 동화.
팔레스타인 이주의 시작
- 유럽의 유대인들은 비교적 경제적으로 성공. 로스차이드가처럼 큰 부를 일군 사람도 있고 높은 교육열과 사업 수완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이들도 많았다. 유럽사회가 안정적이었다면 유럽의 유대인들은 그대로 유럽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유럽에 불어 닥친 민족주의 열풍이 유럽인들에게는 열광과 희망의 바람이었다면 유대인에게는 엄혹한 시련의 바람이었다. 유럽 어디서나 소수세력이던 유대인들은 민족주의의 희생자가 됐다.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유럽 곳곳에서 반유대주의 풍조가 일어났고, 유대인들은 더 이상 유럽에서 안심하고 살 수 없었다. 어딘가 자신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이상적 나라를 꿈꾸게 됐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이 속속 민족국가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들도 민족국가를 세우고 싶은 열망이 커져갔다.
- 이런 열망을 공론화시킨 인물이 유대계 오스트리아의 언론인 테오도어 헤르츨. 그는 유대인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시오니즘’ 창시자.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드레퓌스 사건.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패배. 전쟁 패배의 희생양으로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 프로이센과 내통했다는 혐의. 근거는 부족했으나,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은 그를 범인으로 몰아갔다. 드레퓌스 자신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거의 없는 완벽히 동화된 프랑스인이었다. 혁명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조차 반유대주의가 커지는 것을 본 헤르츨은 유대인들만의 민족국가를 건설해야겠다는 생각.
- 헤르츨의 저서 <유대인 국가>는 유럽의 유대인 사회에 커다란 파장. 이 책이 나오고서 시오니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 스위스 바젤에서 창설된 세계시오니스트기구를 중심으로 조직화. 유대민족기금을 설립, 돈을 모금.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면 우선 그 지역을 땅을 사야했기 때문.
- 시오니즘을 유대교를 기반으로 한 종교적 운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20세기 초 시온주의자들은 유대교를 깊이 신봉하지 않았다. 당시 유럽 사회는 탈종교와 세속화 바람이 강했으며, 마르크스주의 같이 아예 종교를 거부하는 이념도 유행.
만약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지 않았다면 조상들 땅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은 영향력 있는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
커지는 갈등
- 1917년 벨푸어 선언은 유럽의 유대인 사회를 고무시킴. 당시 최강대국 영국의 외무상 아서 벨푸어가 영국 유대인 커뮤니티의 지도자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일을 돕겠다고 약속한 것.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영국 정부가 유대인들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시오니즘 지지’라는 미끼를 던진 것.
영국의 ‘유대인 국가 건설’약속은 1922년 7월 국제연맹이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결정하는 문서에 다시 한 번 명시. 아랍인들은 분노.
- 유대인들의 이주가 늘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들의 인구 비중도 늘어났다. 이주 시작 전인 1882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4%. 1922년에는 13%, 유럽에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된 1935년에는 28%로 늘었다. 1947년에는 30%이상.
- 1920년대 초부터 시작된 아랍인과 유대인간의 갈등은 점점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 1921년 충돌로 유대인 200여 명과 아랍인 120여 명이 사망하는 참사.
- 1936년에는 아랍민족주의 단체들이 영국 위임통치 정부에 대항해 총파업에 무장공격까지. 거대한 아랍의 반란에 대응해 영국은 공포정치로 맞섬. 3년간의 아랍반란은 실패, 아랍인 5000명이 사망, 1만 명이 부상. 하지만 영국정부도 더 이상 팔레스타인을 통치할 의욕을 잃음.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중재안
- 아랍 반란이 한창이던 1937년 영국은 아랍인과 유대인을 중재하기 위한 방안, 필 보고서.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영토와 아랍인 영토로 나누되 인구수와 거주지를 고려해 분할하지는 것. 유대인은 ok. 아랍인은 반대.
- 1939년 백서, 중재안. 유대인 이주자의 상한성을 정해 유대인 인구가 팔레스타인 인구의 35%수준을 넘지 못하도록 하고, 유대인의 토지 매입도 제한. 10년 내로 아랍과 유대인 공동정부 관할 아래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출범시키는 방안. 양쪽 다 반대.
- 팔레스타인은 대영제국이 인도로 이어지는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지정학적으로 중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아니었고, 팔레스타인의 지정학적 중요성도 사라짐. 엄청난 비용을 부담해가며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 주둔할 이유가 사라짐.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 팔레스타인 문제는 UN으로 넘어감.
이스라엘의 건국
- 유엔은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를 구성.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아랍인 대표단에게 위원회에 참여할 것을 제안. 유대인은 참여, 아랍인은 참여거부. 결과적으로 유엔이 내놓은 중재안에 아랍인의 목소리가 들어갈 기회가 사라짐.
- 위원회는 필 보고서와 유사한 해법제시, 체스판 형식으로 팔레스타인 분할하고 예루살렘은 양측 모두에서 분리해 유엔의 관할구역으로 남겨두겠다는 것. 양측 모두 불만이었지만, 시온주의자들은 국가가 없는 것보다는 작은 영토라도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에 뜻을 모음. 아랍의 반대에도 유엔 중재안이 유엔 총회에 넘겨졌고, 1947년 9월 29일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유엔 총회에서 통과.
- 유엔 분할안에 따르면 136만 명의 아랍인이 6920km2의 영토를 차지, 68만의 유대인들은 9173km2의 영토를 할당받음. 유대인들의 영토가 더 넓었으나 그 영토 안에는 황무지인 네게브 사막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실제로 유용한 토지는 아랍인들에게 더 많이 할당.
Scene 11. 건국과 동시에 시작된 전쟁 -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제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건국 이전 시기의 팔레스타인 내전
-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새로 태어났음을 알린 직후 중동은 전쟁으로 치달음.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랍인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했고 유대인들 역시 이에 대해 무장병력으로 반격했기 때문. 내전은 잔혹했고,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 반복.
-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내전으로 흉흉해지자 겁을 먹은 중산층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떠나 이웃 아랍국가로 이주하기 시작. 곧이어 이스라엘이 건국하면서 발발한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더 많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게 됨. 이때 떠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 숫자는 75만 명. 유대인 지도부는 고향을 등진 아랍인들의 집을 새로 이주한 유대인들에게 주었음.
전쟁의 시작, 전세의 변화, 그리고 휴전협정
- 건국을 선포한 후 이스라엘을 둘러싼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 이미 이집트, 요르단 등은 ‘유대인 국가의 건국을 선포할 경우 곧바로 전쟁에 돌입할 것’이라고 경고. 아랍 연맹군은 전쟁 준비를 마치고 공격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음. 건국이 선포된 날 밤 11시 30분, 영국의 마지막 고등판무관은 영국행 배에 몸을 실었고, 영국의 위임통치가 막을 내린 것.
- 아랍국가들은 영국인들이 다치지 않을까 눈치 볼 필요 없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은 자신을 도와줄 외부세력 없는 상태에서 홀로 아랍 연합군과 싸워야 했음.
-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샬은 ‘이스라엘 건국 선포시 미국은 그 결과에 책임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 그는 신생 이스라엘이 친소 성향을 띤 사회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건국을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공식 인정)
- 건국 다음날 5월 15일 아랍 연합군은 요르단 강 서안 지역으로 진격 개시. 이스라엘 2만9천명의 병력, 아랍 연합국은 2만 3500명의 정규군.
- 전쟁 개시후 첫 3주 동안 이스라엘이 열세. 이스라엘 병력은 이주해 오는 유대인과 이주자가 아님에도 이스라엘군에 자원 입대하는 해외 거주 유대인 덕분에 강화. 6월의 휴전기간 동안 무기 구입을 통한 전력 강화로 이스라엘쪽으로 유리해짐.
Scene 12. 아랍 민족주의의 절정 -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가 통합
나세르의 등장
- 1940년대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이념은 아랍 민족주의. 아랍인들은 영국과 프랑스라는 서구 제국주의와 독립투쟁을 벌이면서 연대의식이 고양. 자주적이며 세속적이고 근대화된 아랍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내세움.
- 신생 아랍국가의 젊은 군 장교들이 큰 영향을 받음. 이집트의 나세르도 그 중 한명. 그는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당시 이집트군 장교로 참전. 패배의 과정을 직접 목격하면서, ‘무능한 정치’ 때문에 전쟁에서 패했다고 생각.
- 군부 내에 자유장교단이라는 결사체를 조직해서 1952년 7월 23일 쿠테타 감행. 쿠테타가 성공하자 파루크 국왕은 해외로 망명. 군부가 이집트의 권력을 장악.
- 나세르는 혁명평의회를 설치하고, 일체 정당 활동 금지시키고, 과감한 토지개혁 추진해서 인구 대다수였던 농민들 지지를 이끌어냄. 그의 과제는 경제개발과 군비 증강, 산업화를 위해 전기 공급을 위한 아스완 댐 건설 추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에즈 운하 국유화.
수에즈 위기, 제2차 중동전쟁
- 운하는 19세기 프랑스 정부가 주도하여 건설, 이후 영국정부가 운하법인의 주식을 사들여 최대 주주.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힘으로 해결하고자, 이스라엘을 끌어들여 이집트 공격.
-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군사작전 개시, 영국과 프랑스도 이집트 공격하면서 수에즈 전쟁이 시작. 공격은 성공적이었고 이집트군은 궤멸상태.
이집트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민병대 조직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맞서 싸움.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 희생, 국제 여론은 프랑스와 영국을 비난.
- 미국은 나토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제명시키겠노라 경고. 소련도 이집트를 지지하면서, 군사적 개입 운운. 결국 1956년 11월 7일 영국과 프랑스는 유엔의 정전 요구를 받아들여 국사작전 중단 후 철수, 이스라엘도 시나이 반도에서 물러남.
- 영국과 프랑스는 전투에 승리하고도 전쟁에서 패한 것과 같았음. 운하도 얻지 못하고, 전 아랍권의 민심도 잃음. 영국의 총리는 사임.
이집트 군은 한 차례 전투에서 승리도 못했지만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침략에 맞서 수에즈와 영토, 정치적 명분까지 모두 지켜내면서, 아랍은 나세르에게 열광하게됨.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가 통합
아랍연합공화국의 붕괴
Scene 13. 아랍 민족주의의 패배 -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전쟁을 주도하는 나세르
- 나세르가 부르짖는 ‘하나의 아랍’이라는 대의명분은 상당한 호소력. 1967년 나세르는 예멘 내전에 개입하고 있었다. 사우디와 서방국가의 지원을 받는 왕당파에 맞서 이집트의 지원을 받는 공화파가 치열한 무력충돌을 벌임.
- 이런 상황에서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충동을 벌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세르는 지난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당한 치욕을 갚는 것이 자신의 중요한 임무라고 여김.
- 소련이 잘못된 정보(이스라엘이 시리아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를 나세르에게 전해줌으로써 전쟁이 촉발되는 계기.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의 국경분쟁을 보던 나세르는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을 응징하는 군사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심. 1967년 5월 16일 나세르는 시나이 반도에 이집트 군대 10만 명을 파견. 5월 23일 이집트는 티란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선언. 시리아 역시 탱크 200대 전투기 100대, 6만 명의 병력을 골란고원에 배치.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도 병력을 파견, 아랍국가들이 대대적으로 뭉쳐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모양새.
전쟁 개시와 이집트의 패배
- 이스라엘 군지도부는 확실한 대응태세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우왕좌왕. 국민들은 아랍국가에 포위된 채 세계로부터 고립됐다고 여겼다.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유대인들은 또다시 처참한 대규모 살육을 경험할 거의 분명했다.
- 국방장관 모세 다얀과 이츠하크 라빈 참모총장은 선제공격이라는 예상하지 못한 작전계획을 수립.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 군기지를 기습해서 선제폭격으로 대성공. 이스라엘 지상군이 시나이 반도로 진격, 이집트군은 무질서하게 후퇴.
- 요르단과 시리아도 일방적으로 패배
전쟁의 결과
- 1967년 6월 11일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와 휴전협정. 이스라엘로서는 꿈같은 승리로 열광의 도가니가 됨. 전쟁전 이스라엘 영토는 2만km2였으나 6일 전쟁이 끝난 후에는 8.8만km2로 무려 4배나 땅이 늘어났다.
- 아랍인들은 나세르가 병력을 시나이 반도에 배치할 때까지만 해도 이집트와 아랍국가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 목격한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게 패한 이집트와 아랍군대였다. 아랍 민족주의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6일 전쟁을 보면서 아랍민족주의가 아닌 다른 해답을 찾기 시작.
- 아랍인들이 모색한 새로운 해답 중 가장 강력하게 대두한 것은 ‘이슬람주의’였다. 이슬람을 단지 종교적 가르침이 아닌 정치적 이념 또는 국가 운영 원리로 믿고 현실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이슬람주의다. 20세기 들어 다시 조직화되어 등장한 것은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이었다. 나세르 집권기 강력한 탄압을 받았으나 6일 전쟁의 결과로 나세르와 아랍 민족주의의 위세가 시들자 이를 대체할 경쟁세력으로 퍼져나갔다.
Scene 14. 하산 알 반나, 무슬림형제단을 세우다 - 현대 이슬람주의 운동의 성장
한 초등학교 교사의 신념
- 하산 알 반나는 1906년 이집트 카이로 출생. 이슬람 법학파 중에서 보수적인 한발리 학파의 이맘이었던 아버지 영향으로 독실한 무슬림으로 성장. 알 반나는 유럽 문화의 영향을 보면서 성장, 근대식 사범학교에 들어갔다. 신식교육을 받으면 그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제국주의적 간섭에 대해 강하게 분노. 당시 동일한 현실을 보면서 그 해답으로 유럽식 근대화를 추구했던 민족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는 오히려 순수한 이슬람에서 대안을 찾고자 했다.
무슬림형제단의 성장
- 자신을 찾아온 6명의 노동자들과 무슬림형제단을 결성한 후에도 그의 활동은 그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슬림형제단 회원들과 함께 모스크와 커피하우스뿐 아니라 개인 주택까지 찾아다니면 개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활동.
- 무슬림형제단에 가입하는 이들이 늘자 활동 방향을 전환. 찾아다니는 것이 아닌 찾아오도록 만드는 전동활동 시작. 자신이 있던 지역에 모스크와 학교를 세웠고 소년 클럽과 지역사회 봉사단체를 만들었다. 마드라사 같은 기존의 전통 이슬람 교육시설이 아닌 근대화된 사교모임이나 봉사단체를 통해 이슬람을 전파한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도 많았다.
- 근대화된 사회기관의 모습 통해 이슬람을 전파하는 시도는 순식간에 이스마일리야를 넘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감.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을 모든 인간사의 원리로 지키도록 촉구하고 동시에 밀려드는 서양문화와 사상, 라이프 스타일에 대항해 싸우는 것을 목표로 삼음.
- 그들은 이슬람 가치를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난 근대화된 형식에 담아냄으로써 기존의 나약하고 뒤진 이슬람 문화에 실망한 대중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 그들은 1928년 창설된 이래 20년 동안 눈부신 성장, 1940년대 중반, 산하조직이 2천개에, 회원은 60만.
- 무슬림형제단은 서구의 사상과 가치에 맞서 이슬람과 근대화를 조화시키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이집트의 이슬람 근본주의 사상가이자 사회개혁운동가인 무함마드 압두의 영향을 받음. 그는 서양의 침탈을 극복하고 과거 이슬람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
- 하지만 이때 되돌아가는 이슬람은 현재의 이슬람이 아니라 순수한 ‘본래의 이슬람’이다. 본래의 이슬람은 이성과 합리성의 전통을 지녔고 인권의 가치도 담고 있었다. 서양이 발전한 이유가 기독교 때문이 아닌 이러한 이슬람 문명의 우수한 점을 먼저 발견해 수용한 덕분이었고, 반대로 이슬람 국가들은 우월한 본래의 이슬람으로부터 멀어져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본래의 이슬람으로 돌아간다면 이집트를 비롯한 이슬람 국가들이 다시 찬란한 발전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주장.
- 하산 알 반나는 이렇게 주장 : “프랑스 혁명은 인권을 선언하고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었다. 러시아혁명은 계급 철폐와 사회 정의를 선포했다. 그러나 위대한 이슬람혁명은 이미 1300년 전에 이 모든 것을 선언했다.”
사이드 쿠틉과 이슬람주의
- 이슬람 근본주의는 삶이 원리를 <꾸란>과 <하디스>에 근거해 이슬람의 가르침대로 운영해야 한다는 사상. 여기는 국가 운영의 원리뿐 아니라 개인의 사생활과 사고방식까지 포함.
- 이슬람주의는 보다 현대적인 현상.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실정법화하여 국가의 통치원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이념.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세속주의 세력이나 외세에 대한 군사적으로 대결을 벌이거나 무력투쟁도 정당화한다. 이슬람주의 시초는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이슬람혁명 이론가 사이드 쿠틉에서 비롯.
- 무슬림형제단은 온건한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으로 시작. 하지만 이집트 파루크 왕정의 탄압과 대결하면서 점차 급진 무장투쟁을 옹호하는 이슬람주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
- 왕정에 이어, 나세르도 무슬림형제단을 탄압. 무슬림형제단 원로들은 여전히 온건정책을 지지했지만 젊은 조직원들은 ‘무장봉기로 정권을 타도하자’는 주장에 동조. 사이드 쿠틉이 그런 부류.
- 사이드 쿠틉에게 이슬람이란 혁명의 목표이자 수단. 사이드 쿠틉은 나세르 정권이 볼 때 위험천만한 존재. 그는 급진적 사상을 계속 전파, 결국 1966년 체제 전복을 획책한 혐의로 쿠틉은 교수형에 처해짐.
아랍 민족주의의 몰락과 이슬람주의의 확산
- 1960년대 후반 사이드 쿠틉의 사상에 따르는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이슬람혁명 사상으로 무장한 이들은 이집트 바깥으로 나가 급진 이슬람주의를 전파했다. 6일 전쟁에서 패한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나세르는 1970년 심장마비로 돌연사. 뒤를 이어 집권한 사다트 대통령은 이슬람 세력에게 초기에 유화적. 이후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악화.
- 이집트 밖에서는, 1970년대를 거치면서 이슬람권 전역에서 급진 이슬람주의가 힘을 얻었다. 사이드 쿠틉의 제자들이 먼저 도착한 곳은 사우디. 나세르의 탄압으로 추방된 이슬람주의 사상가들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 이렇게 입국한 이집트의 이슬람주의자들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침. 사우디 청년들에게 이슬람주의 사상을 주입. 이때 가르침을 받은 학생 중에 훗날 알 카에다의 지도자로 오사마 빈 라덴이 있다.
왜 중동 사람들은 이슬람주의에 매력을 느낄까
- 중동의 이슬람주의는 단순한 종교적 광신이 아니다. 이슬람주의는 실패한 근대화 모델을 대신할 대안.
- 국가가 종교를 포섭한 기독교와 달리 이슬람은 종교공동체가 확장되어 국가로 발전. 시작부터 국가는 종교와 한 몸이었고 이후에도 계속 그런 상태로 존재. 사실상 종교적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음.
- 따라서 서구에서 들여온 제도나 사상이 신통한 성과를 내지 못하자 오랫동안 몸에 밴 종교로부터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나타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Scene 15. 찢겨진 정체성의 모자이크 - 레바논공화국의 비극
프랑스의 위임통치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자 레반트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의 손에 들어갔다. 시리아와 레바논을 통치한 나라는 오랫동안 이 지역과 교류해온 프랑스였다.
프랑스 위임통치 정부는 중동 지역에 기독교 국가를 세우려 했다. 그래서 시리아로부터 레바논 해안 지역과 마운트 레바논을 분리해 독자적인 영토를 부여했다. 무슬림이 대부분이던 시리아와는 달리 프랑스 위임통치 정부는 레바논 지역에서 마론파 기독교도들을 주요 파트너로 삼았다. 그들은 이슬람 정부가 들어설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프랑스 통치를 환영.
- 프랑스는 레바논에 근대적 교육기관을 세웠다. 신식학교의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였고 각급 학교에서는 프랑스어 교육에 열을 올렸다. 레바논 학생들은 프랑스인으로 교육받았을 뿐 새로 만들어진 ‘레바논 국민’으로서의 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다.
이질적인 정체성을 가진 여러 집단들이 모여 새 나라를 만든 상황이었음에도 공통의 정체성을 함양하는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국민협약의 체결
-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레바논의 식민 종주국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됐다. 프랑스 임시정부는 레바논의 독립을 약속했다. 프랑스가 물러가면 레바논 안에서 마론파와 수니파, 시아파 등 각 종파가 새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
- 1943년 지도자들이 모여 독립 레바논 국가의 정치적 설계도를 합의. 각 종파의 실력자들이 모여서 합의한 내용을 구두로 동의.
- 1944년 1월 레바논은 국민협약에 기초해 레바논 독립국가를 선포. 마론파는 레바논에 외국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중단할 것, 수니파는 시리아와의 통합을 포기할 것, 1932년 인구 총조사에 의거해 레바논의 대통령은 인구 다수인 마론파 출신이 맡을 것, 총리는 수니파 출신이 맡을 것, 국회의장은 시아파 출신이 맡을 것, 국회의석은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6대 5의 비율을 배분할 것.
분열과 갈등
-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독립 레바논공화국에 황금기. 미국 유럽과 갈등을 빚고 있는 다른 아랍 지역과는 달리 레바논은 가장 서구화된 중동국가. 레바논은 아랍 전 지역에서 교육 시설이 가장 잘 마련 보급된 국가, 문자해독율이 88%로 압도적인 교육수준.
-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는 외국인들에게 동방의 파리로 알려짐. 그러나 화려함과 부유함을 레바논 모든 국민이 누리는 것은 아니었다. 마론파가 모여 있는 베이루트와 마운트 레바논 지역을 벗어나면 대조적으로 극심한 가난에 고통을 받는 이들로 넘쳐났다.
- 마론파와 일부 수니파들이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를 모두 차지한 반면 대다수 주민들은 부에서 소외된 채 착취당한다고 여겼기 때문.
- 1967년 6일 전쟁 이후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대거 레바논으로 밀려들면서 상황이 악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유입으로 마론파 우위의 레바논 인구구성이 깨졌고, 무슬림이 기독교 인구보다 많아짐. 국민협약을 개정하라는 무슬림들의 요구에 다시 불이 붙었고 레바논 사회는 불안정한 상태로 내몰림.
- 마론파 무장단체와 PLO사이에 공공연한 무력충돌 발생. 레바논 정부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1975년 이후 그들 사이의 무력충돌이 레바논 내전으로 진행되었고,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개입으로 내전 상태가 1990년대 초까지 지속. 사실상 레바논에는 무정부 상태가 지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