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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빙점] 소묘
요코가 속해 있는 미술 서클인 흑백합회의 정기 모임은 매주 화요일 오후 여섯 시부터 클라크 회관 1호 집회실에서 있었다. 일찌감치 식사를 마친 요코는 1호 집회실 문을 열었다.
뜻밖에 다쓰야가 창가에 혼자 서 있었다.
“어머!”
순간 요코는 방을 잘못 찾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나도 오늘부터 회원으로 가입했어요.”
“어머, 우연찮게 같은 서클 회원이 되었군요. 미쓰이 씨도 그림을 좋아하세요?”
요코는 다쓰야에게서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사실 그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다쓰야는 히죽 웃었다.
“어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가입했어요?”
“그림은 좋아하지 않지만, 댁이 있잖아요?”
“어머!”
요코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잘못됐나?”
다쓰야는 어린아이처럼 머리를 긁적였다.
“서클은 그런 식으로 가입하는 게 아녜요.”
요코는 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쓰야는 말하다 말고 등을 홱 돌렸다.
“참, 저번에 같이 걸어가던 사람은 누구였죠?”
“친구예요. 이학부 닥터 과정을 밟고 있어요.”
“흠, 닥터 과정이라?”
다쓰야는 짙은 눈썹을 고집스럽게 추켜 올렸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예요. 오빠와 단짝이어서 아사히가와 집에 와서 묵어 가기도 했어요.”
요코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6시 5분 전이었다. 요코는 일어나 의자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다쓰야는 말없이 요코를 바라보고 있다가,
“왠지 못마땅하군.”
하고 말했다.
“누가요?”
“그 친구 말이에요.”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지난번에 스포츠 카가 난폭하게 달려왔을 때, 요코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다. 위급한 순간에도 기타하라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아마도 누구와 함께였더라도 기타하라는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타하라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그 순간 옆에 있던 기타하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쳤을 것이다.
“훌륭한 사람? 그럼 이번에 꼭 소개해 주세요. 그 훌륭하다는 사람이 대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어요.”
요코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댁은 날 싫어하는 모양이죠?”
“왜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째서 그런 말을 하세요, 미쓰이 씨?”
“어째서라뇨? 저번에 그 일이 있은 후로는 댁이 그 황벽나무 아래 앉아 있는 걸 본 적이 없어요. 난 몇 번이나 그 잔디밭에 갔었거든요.”
1호 집회실은 20평 남짓밖에 안 되었다. 의자를 정돈하는 일은 금방 끝났다. 요코는 다시 의자에 걸터앉아 아직도 훤한 바깥을 내다보았다. 깔끔하게 가지가 잘린 정원수가 잘 손질된 잔디밭에 길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고 자주색 라일락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미쓰이 씨를 싫어한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어요.”
“하지만 하숙집에 찾아갔을 때에도 외출한다고 하면서 문전 박대를 했잖아요? 동행할 사람이 어디 갔나 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나 같은 건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더군요.”
요코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6시가 다 되었는데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요코는 빨리 누가 왔으면 싶기도 하고 아무도 오지 말았으면 싶기도한 묘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미쓰이 씨, 내가 싫어한다고 멋대로 생각하세요.”
요코는 가볍게 흘겨보았다.
“미안해요. 화내지 말아요. 난 댁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하지만 기회가 없어서 초조해요. 댁은 요즘 항상 누군가와 함께 다니더군요. 그래서는 아무리 기다려 봐야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다쓰야는 애원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미쓰이 씨, 우정이란 좀더 조용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조급하게 굴면 안 돼요.”
“난 성미가 급한 편이에요. 어머니나 형에게도요. 좋고 싫은 걸 지나치게 따지죠. 나 자신도 그런 내가 싫어요.”
다쓰야와 너무 깊이 사귀지 말라고 당부하던 게이조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쓰야는 자신을 생판 남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까지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생각하게 해야 한다. 게다가 너무 친한 타인이어서도 곤란하다. 다쓰야가 다소 싫어 해도 냉정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요코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미쓰이 씨는 다도회 같은 서클에 가입하는 게 좋겠군요. 자신의 과격한 성격이 그렇게 싫다면…….”
요코는 약간 냉정하게 말했다.
“댁이 그러라면 그렇게 할게요.”
다쓰야는 의외로 순순히 말했다.
노크도 하지 않고 대여섯 명의 회원들이 우르르 몰려 들었다.
저마다 말없이 중앙의 테이블에 놓인 석고로 된 여인의 흉상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다쓰야도 요코의 옆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같은 서클에 가입해서까지 자신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다쓰야의 마음이 요코를 차츰 우울하게 만들었다. 콩테를 잡은 손이 자꾸만 흔들렸다.
‘난 분명히 다쓰야를 속이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요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요코는 옆의 다쓰야를 살짝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약간 가늘게 뜨고 흉상을 보고 있었다. 요코는 다시 콩테를 잡은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어머니 게이코가 이런 자신과 다쓰야의 모습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아버지 게이조는 이렇게 말했었다.
“무척 괴로워하셨던 모양이야. 다쓰야 군과의 일은 별개로 하더라도 요코도 한번쯤 만나뵙고 낳아 주신 데 대한 인사를 해야지?”
옆에 있던 도오루도 말했었다.
“요코를 만나면 그분의 괴로움이 조금은 가벼워질지도 몰라. 무척 좋은 분이야.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거야. 그것이 비극을 낳게 한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두 사람의 발은 게이코에 대한 동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요코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이코의 고민이나 괴로움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범한 과실 때문에 겪는 것이다. 하지만 다쓰야 형제나 그 아버지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고통은 누구 때문에 겪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면, 요코는 친어머니보다도 그 남편이나 지식들을 더욱 동정해야 할 것 같았다.
스케치가 끝나자 작품에 대한 간단한 비평이 있었다. 후시마가 끝으로 다쓰야의 작품을 손에 들고 한참 동안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쓰야의 얼굴을 흘끔 바라보고 나서 말했다.
“다른 데서 배운 적이 있나?”
“아뇨.”
“흠, 그래? 선이 좋아. 터치가 쓰지구치 양하고 아주 비슷하군. 지나치게 날카롭기는 하지만…….”
후시미는 요코 쪽으로 네모난 얼굴을 돌렸다. 고개를 푹 숙인 요코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내 선과 비슷하다!’
후시미는 해마다 도 전람회에 입선했고 특선을 수상한 적도 있기 때문에 그림을 보는 눈은 상당히 정확할 것이다.
모임이 끝나고 복도에 나온 뒤에도 요코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다쓰야가 요코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말했다.
“댁의 선과 비슷하다고 해 난 무척 기뻤어요.”
다쓰야는 천진스럽게 기뻐했다. 요코는 태연하게 말했다.
“후시미 씨가 그처럼 오랫동안 그림을 들여다본 건 처음이에요.”
“다음주에도 또 참석할까봐요. 댁은 나더러 다도회에 가입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요코는 다쓰야가 그림을 계속하게 되면 자신은 이 모임에서 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로비로 나왔다. 밤이어서 그런지 로비에는 10명 가량의 학생들이 여기저기 보일 뿐 조용했다.
로비 입구에서 다쓰야가 말했다.
“다음주 오늘밤은 삿포로 신사제의 전야제가 열리는 날이죠?”
요코의 무거운 심정을 다쓰야는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가요? 전야제는 6월 14일에 열리잖아요.”
“그 날 바쁘세요?”
“그럴걸요. 전야제에는 친구들이 놀러 올 거예요.”
“그…….닥터 과정을 밟고 있다는………?”
“아뇨, 여자친구들요.”
“여자 친구들이라고요?”
다쓰야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을 이엇다.
“아직 아홉 시가 좀 지났을 뿐이니까 여기서 얘기나 좀더 하고 가지 않겠어요?”
“하지만 미쓰이 씨는 오타루까지 가야 하잖아요? 너무 늦으면 안 돼요.”
“아니, 괜찮아요. 오늘밤엔 외할머니 댁에서 자고 가기로 했거든요.”
“외할머니요?”
“네. 어머니의 어머니 말이에요.”
다쓰야의 외할머니라면 요코 자신에게도 외할머니가 된다.
“그래요?. ……그럼 귀가 시간인 아홉시 반 까지는 함께 있어 드리죠.”
“아홉 시 반요? 하슥집이 꽤 엄격하군요.”
두 사람은 창가에 놓인 의자에 마주 앉았다.
“아녜요, 내가 정한 거예요.”
“그래요? 그럼 아홉 시 반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누구한테 혼나지는 않겠군요?”
“미쓰이 씨, 남이 책망하지 않는다고 귀가 시간도 지키지 않는 건 싫어요.”
“자기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군요.”
“그래요, 책망을 들을까봐 무슨 일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서커스단의 개나 원숭이와 다를 바 없어요.”
요코는 일부러 쌀쌀하게 대답했다.
“그럼 아홉 시 반에 하숙집으로 돌아가면 그 이후엔 뭘 해요?”
다른 서클의 학생 두세 명이 계단을 내려와 로비로 들어왔다.
“글쎄요, 아주 평범해요. 들어가자마자 바로 목욕을 해요. 늦게 하면 하숙집 아줌마한테 미안해서요. 그리고 열한 시 정도까지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고 나서 자죠.”
“아침엔 몇 시에 일어나요?”
“어머, 무슨 생활지도원 같네요. 아침엔 일곱 시에 일어나요. 미쓰이 씨는요?”
“나도 일곱 시쯤에 일어나요.”
사소한 이야기였지만, 요코는 그래도 즐거웠다. 문득 자신의 혈육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일어나요?”
“아뇨, 어머니가 날 깨우느라고 무지 애쓰시나 봐요.”
창 밖의 수은등이 정원수와 잔디를 푸른색으로 비추고 있었다. 왠지 깊은 물속을 연상케 하는 색깔이었다.
두 사람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영자신문을 읽고 있던 학생이 하품을 하고 나서 천천히 일어나 걸어갔다.
“어머니는 신경질은 내지 않지만 때때로 엄해요.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면 이불을 사정없이 젖혀 버리죠.”
“어머!”
“갑자기 찬물을 적신 타월을 얼굴에 얹기도 하고………”
“행복하겠군요, 미쓰이 씨는.”
요코는 친어머니께 응석을 부릴 수 있는 다쓰이는 행복하겠다고 생각햇다 .자신은 나쓰에의 재촉을 받고 일어난 적이 없었다. 겨울에도 어떻게든 나쓰에보다 먼저 일어나 난로를 따뜻하게 피워 놓곤 했다. 무슨 일이든지 요코는 나쓰에가 시키기 전에 먼저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단지 자주적인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불을 젖힌 후에는 얼음같이 차가운 타월을 얼굴에 얹어 놔요. 그래도 행복한 건가요?”
“그럼요. 깨울 때까지 잠들어 있을 수 있는 몸이니까요.”
“그럼 댁은 그런 적이 없어요?”
“없어요.”
‘친어머니의 손에서 자란 미쓰이 씨와는 달라요.’
“모범생이군요. 하긴 스스로 귀가 시간까지 정해 놓고 있는 것만 봐도 알만해요. 모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해나가나 보죠?”
다쓰야는 요코의 마음속을 알 턱이 없었다.
“미쓰이 씨는 무슨 음식을 좋아해요?”
“낫토요.”
“어머, 낫토라구요?”
요코는 무심코 웃었다.
“모두들 웃지요. 낫토는 정말 맛있는 음식이에요. 대파와 고춧가루를 넣은 양념장으로 간을 한 다음 걸쭉한 낫토를 뜨거운 밥 위에 끼얹어서 먹는 맛이야말로 최고라고 생각해요.”
“우습지는 않지만 뜻밖이에요. 불고기나 중국 요리 같은 걸 좋아할 나이잖아요?”
요코는 낫토를 좋아한다는 다쓰야와 둘이서 낫토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댁은 뭘 좋아해요?”
“난 뭐든지 좋아해요. 특히 호박하고 감자를 좋아해요.”
다쓰야도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미쓰이 씨도 웃었으니 피장파장이에요.”
“하지만 댁한테는 정말 어울리지 않아요. 쇼트케이크나 초콜릿 같은 걸 좋아할 나이잖아요. 그런데 호박하고 감자라니……”
요코의 흉내를 내며 다쓰야가 응수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소리내어 웃었다. 요코는 웃다 말고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렸다. 자기들 남매는 이제 겨우 서로의 식성을 알아낸 것에 불과한 것이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다 나네요.”
요코는 다쓰야가 그린 그림의 선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말한 후시미의 말이 더욱 가슴속 깊이 새겨지는 것을 느꼈다.
“나, 잠깐 댁의 방을 구경하고 싶은데…..”
시계를 보고 있던 다쓰야가 약간 정색을 하고 말했다.
요코의 하숙집은 클라크 회관에서 2백 미터도 못 되는 곳에 있었다.
아홉 시 반까지는 아직 10분쯤 남아 있었다.
“미안해요. 난 남자 친구를 내 방에 들이지 않거든요.”
“왜죠? 아니, 왜냐고 물으면 우스운가요? 하지만 그건 너무 상직적이에요.”
“상식이 아니라 양식이에요.”
“날 믿을 수 없나요?”
“아녜요. 미쓰이 씨만이 아니라 아무도 들이지 않기로 하고 있어요.”
“남자를 너무 경계하는군요. 그런 사고방식은 불쾌해요.”
다쓰야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면서 다리를 포갰다.
“불쾌해도 어쩔 수 없어요. 난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남자를 방에 들이지 않기, 너무 어두운 길을 남자와 단둘이 걷지 않기 같은 일은 스스로 분명히 지키고 싶어요.”
“난 그런 보수적인 사고방식은 싫어요. 댁은 남성을 모두 치한으로 생각하고 있군요.”
“그것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난 남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해요. 하지만 방에 들이지 안는 일로 깨져 버릴 우정밖에 없는 남자와는 사귀고 싶지 않아요.”
다쓰야는 금세 얼굴색이 변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요코를 향해,
“알겠어요, 댁은 훌륭한 여자예요. 하지만 난 존경받는 여자는 딱 질색이에요.”
하고 말하고는 곧바로 로비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 버렸다.
요코는 의자에 앉은 채 멀어져 가는 다쓰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슬픈 빛이 감돌았다. 그녀는 화를 낸 다쓰야의 심정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동생인 다쓰야를 경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응석을 부리듯이 다가올 것 같은 그의 성격과 그 응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 같은 자신의 육친에 대한 정을 경계했던 것이다. 사실 요코는 하숙집에 남자 친구를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는 문란한 생활을 싫어했다. 그것은 남편을 배신하고 자신을 낳은 게이코에 대한 항의 표시이기도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낫토와 감자 얘기를 하며 한바탕 크게 웃었던 다쓰야는 결국 화를 내고 가버렸다. 그것은 섭섭한 일이지만 그러는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고 요코는 생각했다. 다쓰야와 자신이 가까워지는 것은 결국 아무 결실도 기대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대로 피차 먼 존재로 지낼 수밖에 없는 누나와 동생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