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도레,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다〉, 1866.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물 한 가죽 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사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창 21:14).
하갈의 어깨에 떡과 물 한 가죽 부대가 지워졌다.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 1832-1883)는 가죽 부대를 항아리로 표현했다. 왼쪽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핏자국처럼 또렷하게 길을 내며 흐르고 아브라함의 뒤로 멀리 낙타와 함께 이동하는 대상(隊商)이 흐릿하다.
대상들과 함께 떠나 보내는 게 안전할 것 같지만, 아브라함은 상인들이 있는 곳의 반대편을 가리킨다. 슬픈 표정에 반해, 방향을 가리키는 손은 단호하다. 이스마엘은 엄마 하갈의 옷자락을 잡고 아버지 아브라함과 대결하듯 뒤돌아섰지만 아직 어리다.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지기까지 며칠이 걸렸을까(창 21:15). 물이 떨어지자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은 화살 한 바탕만큼 떨어져서 죽기를 기다리며 마주보며 울었다(창 21:16). 기도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선 기도마저 할 수 없다.
하나님은 기도마저 할 수 없는 자의 울음소리를 들으신다(창 12:17). 이스마엘의 기도에 응답하신 게 아니라 울음소리에 응답하셨다. 울음이 기도다.
울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혀 주셨고, 하갈이 우물을 발견한다(창 21:19). 아버지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위해 이미 광야에 ‘브엘세바’라는 우물을 준비해 두셨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블레셋 아비멜렉에게 양도받은 우물이었다(창 21:25-27). 브엘세바에서 지낼 때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 즉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창 22:14, 19). 브엘세바를 알고 있었고 거기에 꽤 오래 살았다면, 아브라함은 하갈에게 물 한 가죽 부대만 준 것이 아니라, 우물이 있는 곳을 가리켰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우물 옆에 나무를 심어 그 위치를 정확하게 피악하고 있었을 테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창 21:33)
광야로 내쳐진 것 같을 때가 있다. 죽을 것 같은 광야로 내몰려 기도마저 할 수 없을 만큼 힘들 때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내치실 땐 ‘물 한 가죽부대’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물’을 준비해 두신다. 어깨에 짊어지지 않아도 되고, 마르지도 않는 ‘우물’이 있어 광야를 이기게 하신다.
광야는 시작하는 곳이다. 시작하려면 광야여야 한다. 머리에 이고, 어깨에 메고, 등에 지고, 손에 든 게 아무리 많아도 광야에서 버티진 못한다. 이고, 메고, 지고, 든 것을 계산하지 말라. 깊이 우물을 파라. 눈물 고인 자리에 우물이 흐른다.
첫댓글 눈물이 기도였다.
눈물이 고인 자리에 우물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