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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평론집 [☆윤동주문학론☆]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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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문학론]
조성일 주필 평론집 / ♡♡시선 485 / 연변인민출판사(2013年6月第1次印刷) / 값 35.00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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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의 별세계
리함
머리말
맑고 깜깜한 밤하늘은 세상 아름다움의 반이라고 별빛이 내리는 야외에서 은가루를 뿌려놓은듯한 별세계에 도취되여 별자리와 별이름을 별들로 다가서는 큰곰자리와 작음곰자리의 북두칠성과 북극성, 여름밤, 가을밤에 이어 머리우로 흐르는 아름다운 은하수와 은하수를 사이 두고 바라보는 견우별과 직녀별-전설속의 이런 별들을 대할 때면 더욱 멋지기만 하다. 가슴을 울렁이며 들뜨게 하는 그 시각의 설레임과 정겨움과 황홀경은 실로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내 고향 시인이요, 조선족시인인 윤동주가 바로 이런 경지에 빠져든 시인이였다. 별세계에 대해 유별난 애착을 가진 윤동주시인에게 있어서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은 특별히 동경의 대상으로, 꿈의 세계로, 다정한 친구사이로 되었다. 하기에 한국과 중국의 여러 문학평론가들은 윤동주시인을 “암흑기 하늘의 별”1) “암흑기 최후의 별”2), “어둠속에서 별을 바라보며 민족과 조국을 생각한 시인”3)이라고 평가를 모았다.
알다싶이 중국 당나라때 시인 리백은 달에 대하여 특이한 사랑을 지니고 달을 노래한 위대한 시인이다.이에 대비해 윤동주는 별에 대하여 특이한 사랑을 지니고 별을 노래한 내 고향 시인이다. 그만큼 윤동주는 일제의 탄압하에서 “별을 바라보며 민족과 조국을 생각한 시인”이고 별을 시의 원천으로 간주하면서 별과 운명을 같이한 하나의 “별”로서 그의 시에는 별을 노래한 시가 많고 산문에도 가끔 별이 떠오른다.
요즘 필자들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윤동주시집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4)를 살펴보았는데 사용도가 가장 높은 시어는 나, 내, 밤, 하늘이고 그 버금으로 가는것은 달과 별로서 달의 언급이 32개, 별의 언급이 24개였다. 그 중 별과 관련된 시가 “서시”, “눈 감고 간다”, “별헤는 밤”, “산림”, “무얼 먹고 사나”, “오줌싸개 지도” 등인데 시 “별 헤는 밤”에만 해도 별이 무려 열두번이나 떠오른다. 이는 우리 시단에서 극히 보기드문 현상으로서 별의 시인인 윤동주의 품위를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고로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자기 론문이나 평론들에서 별과 시인을 이어놓으며 평론하기를 잊지 않았으며 “연변지역의 밤하늘, 특히는 가을의 밤하늘에서 뭇별들이 쏟아져내리는듯한 그 야경을 보지 못하고서는 윤동주가 읊조린 하늘이요, 별들에 대해 리해하기 힘들것이”5)라고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허나 유감스러움도 없지 않다.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 별의 시인으로서의 윤동주와 시인의 별세계를 전문 다룬 론문이나 평론을 한편도 찾아볼수 없고 이 면에 대한 연구가 따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비추어 본 고에서는 별과 별세계에 대한 진지한 리해가 없이는 윤동주시인을 올바로 리해할수 없다는데 초점을 두면서 머리말과 맺음말의 별에 대한 애착의 뿌리와 그 계승, 동심에 젖은 맑은 별시들, 맑지만 않은 슬픈 모습도 , 별에 희망을 기탁한 시인의 참모습 등 4개 부분으로 나누어 윤동주 시의 별세계를 전문 검토하고저 한다.
본 론문은 한국과 중국의 겨레문학평론가들의 해당 론문과 평론들에 토대해 2002년 7월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윤동주시집-≪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를 기존 연구사료로 하였음을 밝히면서 윤동주와 그의 시 연구에 힘을 보태리라고 믿어마지않는다.
2. 별애착의 뿌리와 그 계승
윤동주는 별에 특이한 사랑을 지니고 별세계에서 희망과 광명의 새 세계를 찾은 시인이다. 하다면 윤동주시인이 어찌하여 별에 대하여 그다지도 유별난 애착을 가지게 되었을가? 한 인간의 성장에서 대대로 내려온 집단무의식(集体无意识)의 침전을 무시할수 없다고 할 때 우리 배달민족의 반만년의 력사를 거스르면서 고시대부터 헤아리면 이런 애착의 뿌리와 그 계승을 잘 알수있을 것이다.
민심(民心)이 곧 천심(天心)이란 말이 있듯이 인간이 지닌 본성을 인성이라고도 하고 천성이라고도 한다. 인성이 천성이라고 함은 사람과 하늘이 아주 가깝고 서로 통한다는 의미를 띠고있다. 이같이 인성은 하늘의 원칙인 천성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하나의 일치를 이루고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늘을 우러르고 숭상하는것은 지구상의 모든 고대민족들에게서 다 찾아볼수 있는 일이다. 배달민족도 례외가 아니지만 오랜 기간 유교문화속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은 “하늘”혹은 “하느님”(하나님)을 자주 부르지 않고 가슴속에 깊이 소중하게 모셔왔다. 그만큼 표면상 하늘을 숭배하는 일에 유별나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했으나 오늘날 조선반도의 남부지역에 별을 새긴듯한 선사시대의 암각화, 즉 바위그림이 여러곳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별을 인식하고 별세계에 집착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천문학사≫(나일성 저)에 따르면 경남 울산군 두동면 천전리와 경남 한안군 가야읍 도항리, 경북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 등 세곳에서 고대인들의 별을 상징하는 암각화가 발견되었다.6) 이런 암각화들에는 동심원으로 곱게 새겨진 무늬와 점들이 있어 아주 인상적이다. 도항리의 암각화에는 수많은 작은 둥근점들이 박힌 가운데 여러개의 동심원무늬가 새겨져 특기할만하다. 천전리 이북의 영일군 칠포면 칠포리에서는 1994년에 포철고문화연구회에 의해 수십개의 암각화가 발견 또는 조사7)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바위에는 북두칠성이, 어떤 바위에는 복잡한 모양의 별들이 기록 또는 새겨져있었다.
상고시대 고대인들은 별에 관한 자료도 남기였다. 이런 자료들중 가장 오랜것은 낙랑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기원 1세기경의것으로 추정되는 2점의 토기와 두 개의 석판이라고 한다. 2점의 토기는 달을 상징한 그림이고 두 개의 석판에는 북두칠성이 새겨져있단다. 그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조 세종시대에 별을 관측한 기록이 많은데 이런 기록들은 ≪삼국사기≫, ≪고려사≫천문지와 오행지, ≪조선왕조실록≫, ≪증보문헌비고≫, ≪승정원일기≫ 등에 자세히 남아있다.
고려(918-1391)시대에 일식, 월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천문과 기상현상관측자료가 풍부히 기록되여있다면 조선조 세종시대에는 관측의기가 완비하리만치 천문관측이 활발했다.
천문기록자료가 이러하다면 전설 또한 상당히 풍부하다. 그중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하게 안겨지는 전설은 북두칠성이나 견우, 직녀 전설일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 땅의 40,50대들 치고 어린시절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자연시간에 선생님의 강의에서 상기 전설이야기를 듣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다. 더욱이 우리 동양문화권에서 베틀을 돌리는 소녀로 전해지는 직녀별, 이 별이 포함한 거문고자리 작은 삼각형에는 우리가 어린시절 많이도 들었던 선녀와 나무군의 전설이 살아 생생히 숨 쉬고있다. 이같이 하늘나라, 별나라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밤별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는 소망은 의식, 무의식간에 어린 윤동주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수 없었다. 여기에 별자리이야기를 두고 가슴을 뭉클케 하는 생동한 자료가 있다.
윤동주의 친동생인 한국의 고 윤일주교수8)는 형님 동주의 서울 연희전문학교시절9)의 모습을 두고 이런 이야기를 남기였다.
동생들은 방학기간에 그에게서 많은것을 배웠다. 방학숙제도 같이하고 대학생이던 그와 구슬치기며 공차기 등 장난도 많이 하였다. 책 볼 시간이 아까우면서도 동생들이 귀여워서 놀아주는 것이다…10)
동생 윤일주가 형님을 그리는 생생한 모습이다. 그 시절 교과서에 별자리랑 오른 모양인데 그때 벌써 별자리를 알고 동생들에게 요령 있게 가르쳤다는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지금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별자리와 별자리의 위치를 모른다는것을 념두에 둘 때 더욱 그러하다. 이에 비해 윤동주는 그 시절에 벌써 별자리를 가르칠만치 별세계에 숙달하였다. 윤동주에게 있어서 지옥이라 일컫는 땅을 살피면 시원한 호흡 한번 바로 할수 없이 숨막히기만 한데 천당이라 일컫는 하늘을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이니 그런 하늘에 집착할 수밖에 없은것 같다. 한데서 윤동주는 그제날 일제탄압하에서 별수없이 별에 희망을 기탁하고 시를 써서 마음의 념원을 표달한것이 아닐가.
3. 동심에 젖은 맑은 별시들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가슴 뜨거이 와닿는것이 동심과 같이 청순하고 거짓없는 마음이다. 하기에 명동 장재촌 출신이고 시인이며 명동소학교시절 윤동주와 동기동창인 한국의 고 문익환목사는 “윤동주를 회상하는것만으로 언제나 정신이 맑아진다”고 내심을 토로11)한적 있다. 확실히 윤동주의 시는 읽는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울렁이며 정신이 맑아지게 하는 특징이 있다. 동심의 경우도 례외가 아닌데 지금까지 알려지는 윤동주의 시작품 110여수중 35수 정도가 동시들로서 “이런 동시의 세계는 순수하고 청순한 동심의 세계라 할수 있을것”이다.
윤동주는 1931년 3월에 15살 나이로 명동소학교를 마치고 다달라자의 현립1교에서 6학년 공부를 하다가 1932년 4월에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명동소학교시절에 벌써 송몽규 등 또래들과 같이 자체로 문예지 ≪새명동≫을 간행하고 동요, 동시 창작에 열을 올리였으며 은진중학교 1-2학년 때는 제법 윤석중의 동요, 동시에 깊이 심취되여있었다. 광명중학교 4-5학년을 다니던 1936년과 1937년 2년 동안에는 시창작의 왕성기를 보이며 무려 29편의 시작품을 남기였는데 광명중학교 첫해인 1936년은 윤동주가 동시를 많이 쓴 해였다. 이해에 쓴 16편 시중 10편이 동시로 나타난다.
1936년과 1937년 이 시기는 윤동주가 동시창작으로부터 시창작의 원숙한 모습을 보이던 시절로서 “병아리”, “비자루”,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 등 5편의 동시가 북간도의 어린이월간지 -≪카톨릭소년≫에 실리였다. 그중 ≪카톨릭소년≫1937년 1월호에 발표된 “오줌싸개 지도”와 1937년 3월호에 발표된 “무얼 먹고 사나”가 별나라와의 관계속에서 씌여졌다. “오줌싸개 지도”는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는 간밤에 동생이 오줌 싸 그린 지도가 그려졌는데 시인의 눈에는 그 지도가 천국에 계신 엄마의 별나라지도로 보인다. “무얼 먹고 사나”도 별나라와 통하는데 별나라 자체가 벌써 동심이 흐르는 세계이다.
바다가 사람
물고기 잡아먹고 살고
산골사람
감자 구워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무얼 먹고 사나”에서(1936.10)
이 동시는 참으로 동심이 넘치며 감칠맛 있게 씌어진 작품인데 바다가사람, 산골사람, 별나라사람간의 대비속에서 동심의 시야로 안겨지는 미지의 세계-별나라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1936년 이후 윤동주의 시는 보다 원숙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의 원숙한 시속에는 의연히 동시적인 가락이 면면히 흐르고있다. 그 대표적인 시가 바로 1941년 11월 5일에 쓴 “별 헤는 밤”이다.
(상략)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하략)
이 시는 청신한 가을밤의 맑은 별빛이 넘치는 아름다운 시이다. 시에서 윤동주는 별 하나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는데 그속에는 달라자 현립1교시절에 한학급에 다니던 패, 경, 옥 등 중국인 소녀들의 이름이 곁들여지는가 하면 대자연의 동물군체까지 곁들면서 “맑은 별빛이 내린 언덕우에” 자기를 내세우고 “나는 아무 걱정이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하고 내심을 드러낸다. 일제탄압하의 암담한 시절에도 가을밤에 하늘을 우러러 별을 헤는 그 시각만은 잠간이나마 어지러운 세상을 잊게 한다. 그만큼 이 시에는 동심이 가득 넘치고있는바 그 동심은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그리움과 슬픔으로 나타나면서 동심의 세계는 그리움으로 확산된다. 서울 연전졸업반때 지은 이 시는 멀리 북간도에 대한 그리움을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면서 쏟아붓는다. 그러면서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며 밝아오는 새 세상을 한없이 동경한다.
이렇듯 윤동주와 시인의 시세계-별세계는 맑고 청결한 기품으로 흘러넘치면서 천진란만한 동심에 함뿍 젖어있다. 하기에 허다한 시인과 문학평론가들은 윤동주의 어지럽혀지지 않은 순결한 영원한 동심이라고 평가를 한곬으로 모았다.
4. 맑지만 않은 슬픈 모습도
윤동주의 순결을 영원한 동심으로서 맑고 청결한 기품이 흐른다지만 시인과 시인의 시세계는 결코 맑지마는 않다. 하늘나라, 별나라를 스친 그의 시세계는 가끔 슬픈 모습들이다. 먼저 시 “무서운 시간”(1941.2.7)을 보기로 하자.
거 나를 부르는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
한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요
(하략)
보다싶이 윤동주는 시 “무서운 시간”에서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는 “나”를 그리면서 험악한 그 세월의 하늘에는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고 “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도 없다고 통탄한다. 이는 그 시대에 대한 강렬한 울분과 하소연이 아닐수 없다.
시 “아우의 인상화”(1938.9.15)에는 하늘나라의 달이 그려져있는데 시에서 나오는 달은 싸늘한 모습이다. “싸늘한 달”의 어린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일 수밖에 없다. 윤동주는 아우의 인상화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은 “슬픈 그림”이라고 형상성 있게 그려냈다. 시 “비애”(1937.8.18)에 그려진 젊은이는 “호젓한 세기의 달” 아래에서도 “피라미처럼 슬픈” 모습인데 그런 모습으로 “끝없는 광야를 홀로 거니”니 그 처경은 “외로”울뿐이다.
윤동주는 1937년 4월 15일에 쓴 시 “달밤”에서 또 다른 하나의 슬픈 모습을 살려냈다.
흐르는 달의 흰물결을 밀쳐
여윈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고독을 반려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하략)
이 시에서 나오는 주인공은 달빛이 흐르는 달밤에 북망산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북망산은 묘지를 상징하는데 고독한 마음에 북망산을 향한 마음은 슬플 수밖에 없다. 윤동주 시에 반영된 또 하나의 슬픈 모습이다. 이런 슬픈 모습속에서 1936년 6월 26일 시창작의 왕성기에 쓴 별시 “산림”은 희망이 동반된 새로운 모습도 보여준다.
시계가 자근자근 가슴을 때려
불안한 마음을 산림이 부른다
천년 오래인 년륜에 짜들은 유암한 산림이
고달픈 한몸을 포옹할 인연을 가졌나보다
산림의 검은 파동우로부터
어둠은 어린 가슴을 짓밟고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
솨-공포에 떨게 한다
멀리 첫 여름의 개고리 재질댐에
흘러간 마을의 과거는 아질타
나무틈으로 반짝이는 별만이
새날의 희망으로 나를 이끈다
시로 보아 첫 여름의 고느적한 저녁 한때인데 시속의 주인공은 “불안한 마음”, “고달픈 한몸”을 달래려고 산림으로 향한다. 허나 “어둠”, “바람”으로 상징한 일제의 탄압은 어린 가슴을 짓밟으며 공포에 떨게 한다. 슬픈 모습이 나타나는 또 한수의 시지만 이 시에서의 모습은 슬프지마는 않다. 나무틈새로 비껴드는 별빛은 “불안한 마음”,“고달픈 한몸”에 새날의 희망을 듬뿍 안겨준다.
윤동주의 여러 시들속에서 맑지만 않은 슬픈 이모저모의 이미지들을 살펴보았다. 그 시대의 락인인 슬픈 모습들이다. 하늘나라, 별나라를 통한 슬픈 모습들에서 우리는 시대상을 재치 있게 다룬 윤동주의 세련된 솜씨를 깊이 터득할수 있다.
5. 별에 희망을 기탁한 시인의 참모습
윤동주는 하늘과 별에 꿈과 희망을 기탁하면서 밝아올 세상을 기대하는 아름다운 시편들을 많이 써냈다. 1938년 2월, 22살에 나는 윤동주는 룡정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4월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는데 1938년 이해 한해동안 “새로운 길”등 8편의 시와 “산울림”등 5편의 동시, “달을 쏘다”란 산문 1편을 써냈다. 이같이 윤동주는 연전시절에 시창작에 몰두했는데 인생의 갈림길에서 공부하던 1941년 한해동안에만 해도 그의 대표작으로 되는 “서시”, “또 다른 고향”, “십자가”, “별 헤는 밤”, “새벽이 올 때까지”등 시작품을 포함해 주옥같은 수십편의 시편들을 썼다.
윤동주의 만27년이란 생애에서 연희전문학교 문과시절 4년은 “가장 풍요로왔던 시기, 가장 자유로왔던 시기”로 알려진다. 이 시기의 시들이 그 앞선 시기보다 확연히 다른것은 시인의 보다 원숙한 모습인데 그의 시작품들에는 일제 암흑기에도 열심히 살고 깨끗이 살려는 깊은 정서가 푹 배이면서 주어진 길, 새로운 길을 추구하며 밝아올 새벽, 아침을 기대하는 마음,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을 바라는 마음이 여느때보다 강하게 안겨든다.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후 윤동주가 쓴 첫 시는 “새로운 길”(1938.5.10)이다. 이 시에서 윤동주는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나의 길 새로운 길”,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이라고 쓰면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펼친 청춘의 활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시 “십자가”(1941.5.31)는 명동소학교시절의 그리움을 나타내면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처럼 되라고 한다면 기꺼이 “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하고 맹세한다. 겨레를 위해서라면 한목숨도 주저없이 바치겠다는 비장한 맹세가 거침없이 풍겨온다. 시 “새벽이 울 때까지”(1941.5)에서 시인은 “이제 새벽이 오면/나팔소리 들려올거외다”하고 확신하면서 일제가 꼭 멸망하고 조선민족이 꼭 햇볕을 볼 날이 올것임을 보여주었다면 시 “또 다른 고향”(1941.9)에서는 어둠이 비낀 고향 아닌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새 세상을 동경한다.
일제의 멸망을 예고한 윤동주의 이색적인 시는 1942년 6월 3일 일본땅에서 쓴 “쉽게 씌여진 시”이다. 이해 4월 윤동주는 일본 도꾜 립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가을에 다시 도꾜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때의 조선은 창씨개명까지 강요당한 일본의 식민지였다. 그런 식민지나라의 청년이 자기의 시 “쉽게 씌어진 시”에서 일본은 남의 나라-6첩방이라고 지적하면서 자기는 일본의 신민이 아님을 결연히 선언했다. 한편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스스로를 깊이 반성한다. 나중에 자기의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을 새롭게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이 시구에서 윤동주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어둠”에 비유하면서 “등불”로 이 어둠을 내몰아간다면 해맑은 아침이 밝아오리라고 굳게 확신한다. 일본땅에서의 대담한 마음의 거사가 아닐수 없다. 어둠과 밝음의 명암대비를 잘 보여준 한편의 훌륭한 시라하겠다. 이밖에 앞에서 본것과 같이 별과 관련된 시 “산림”에서도 어둠의 불안한 마음을 나타내면서 새 생활의 상징, 광명의 상징인 별만이 “나무틈으로 반짝”이며 “새날의 희망으로 나를 이끈다”고 했다면 별시 “눈 감고 간다”(1941.5.31)에서는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 “별을 사랑하는 아이” 모두가 밤처럼 어두운 세상에서 눈 감고 가더라도 광명을 바라고 “가진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고 호소한다. 이 씨앗을 뿌리며 가는지는 다름아닌 항일의 선구자들일 것이다.
윤동주시인의 세계관, 인생관의 발전과정과 나아갈 길은 그의 산문 “별똥 떨어지는데”, “화원에 꽃이 핀다”와 가장 대표적인 시들인 “별 헤는 밤”, “서시” 등에서 잘 드러난다.
어둠과 밝음의 명암대비가 선명한 산문 “별똥 떨어지는데”에서 윤동주는 일제탄압하의 현실사회의 어둠과 밝음, 불행과 행복을 뚜렷한 명암대비속에서 보여주면서 “행복이란 별스런 손님을 불러들이기”위한 어둠과의 전투를 선언했다. 이 선언이 바로 “밤을 쫓고 어둠을 짓내몰아 동켠으로 훤히 새벽이라는 새로운 손님을 불러”오는 것이다. 결국 시인은 동서남북-“어디로 가야 하느냐”에서 “별똥 떨어진데가 내가 갈 곳”이라고 단언하면서 나아갈 길을 찾는다. 또 다른 산문 “화원에 꽃이 핀다”에서는 세계관, 인생관을 스치면서 “정확한 진리를 탐구”하는 모습을 보이였다. 이 모습속에서 시인은 “서리발에 끼친 락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것을”굳게 믿었다.
별시를 포함해서 윤동주 시의 가장 대표적인 시는 “서시”와 “별 헤는 밤”(1941.11.5)이다. 우에서도 스치고 지났지만 “별 헤는 밤”에서 별은 12차나 거듭된다.
윤동주는 아름다운 말을 붙여보는 이런 별 하나하나에 희망을 기탁하면서 밤이 물러가면 아침이 오듯이 겨울이 지나면 희망의 별에도 봄이 온다며 밝은 미래를 확신한다. “서시”에서는 윤동주시인의 세계관, 인생관, 나아갈 길이 가장 훌륭하게 표현되고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서시”는 윤동주가 1941년 11월 20일에 쓴 시로서 연전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18편의 시에 담은 머리시이다. 머리시는 한국의 송우혜선생이 분석한것처럼 “자연히 지금까지의 삶을 뒤돌아보려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각오를 총체적으로 담은 내용”으로 엮어졌다. 보다 더 강조한다면 이 머리시는 윤동주생활의 신조이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시인의 세계관, 인생관의 집대성으로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했”던 시인 윤동주의 량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따라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고 속마음을 내비치면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한마음으로 살아갈것을 결의한다. 이 결의가 바로 그한테 “주어진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서시”를 통하여 윤동주사상의 성숙과정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점 부끄럼이 없”이 살기를 원하는 시인의 진정을 헤아리게 된다.
6. 결속어
본 론문에서는 내 고향 시인이고 조선족시인인 윤동주를 처음으로 별세계와의 관계속에서 조명하면서 별에 대해 유별난 애착을 가진 윤동주의 참모습을 헤아리려고 시도하였다. 본문 시작에서 별애착의 뿌리를 거스르면서 윤동주의 성장에 끼친 집단무의식의 침전을 건드려본것이 그러하고 윤동주의 시를 별시에 따라 분류하면서 맑은 동심이 반짝이는 시들, 흐리고 슬픈 모습들, 별에 희망을 기탁하며 삶을 도모한 진지한 모습을 헤아린 것이 그러하다. 윤동주에게 있어서 별은 동심이요, 슬픔이요, 희망이요, 결의요, 참모습이였다. 문학을 지향한 윤동주는 하늘과 별을 시상을 기탁하는 매개물로 삼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윤동주시인이 어찌하여 시세계에서 그토록 별에 희망을 기탁하면서 그토록 밝아올 새벽, 아침을 기대하였는가를 보다 리해하게 된다. 어찌할수 없는 현실에서 별에 희망을 기탁한 시인 윤동주의 참모습이 우렷히 떠오른다. 그 참모습은 아래와 같이 개괄해볼 수가 있다.
첫째, 하늘과 별에 대한 전통숭배의식은 의식, 무의식간에 성장하는 윤동주에게 영향을 끼쳤다. 우리 배달민족은 여느 민족들에 못지 않게 하늘을 받드며 별을 숭배하여온 민족이다. 본문에서 취급한 선사시대의 암각화나 력대의 천문자료들, 대대로 전해내려온 전설들이 이를 잘 알려주고있다. 한데서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서울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통한 윤동주는 하늘에 숙달하리만치 별과 별자리에 익숙했다. 이는 문학을 지향한 윤동주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수 없었다.
둘째, 일제탄압하의 암담한 시대에 직접 행동으로 일제에 저항할수 없는 윤동주는 새 세계, 새 희망을 별에 기탁하면서 동심이 흐르는 맑은 시들을 적잖게 창작하였다. 동시로부터 보다 원숙한 모습으로 나타난후에도 그의 시에는 보이는바와 같이 동시적인 가락이 그대로 흘러넘치고있다. 동심과 같이 청순하고 거짓없는 윤동주에게 있어서 별의 세계는 그야말로 희망이 넘치는 세계요, 환상의 세계였다. 숨막히는 시대에 살면서 윤동주가 마음상 위안을 느끼며 잠간이나마 어지러운 세상을 잊은 때가 바로 하늘나라, 별나라를 바라보는 그 시각이였을것이다. 하늘과 별의 세계에서 마음을 달랜것이다.
셋째, 실생활속의 윤동주가 보는 세계는 어지러운 세상 그대로여서 이런 숨막히는 현실은 시인의 시작품에 반영되지 않을수없었다. 그 직접적반영이 하냥 동심과도 같이 맑을수만은 없는 슬픈 모습의 등장이다. 손들어 표할 하늘이 없다는것이나 싸늘한 모습의 달과 그에 비낀 아우의 슬픈 인상화나 북망산을 향한 슬픈 마음이나 세월에 찌든 고달픈 한몸 등등이 그 진실한 체현이라 하겠다.
넷째, 윤동주는 살아가는 험악한 현실에서 직접 행동으로 일제에 저항한 시인은 아니여도 그의 시세계는 결코 소극적무저항이 아니라 적극적저항이 곳곳에 엿보이는 세계였다. 윤동주시인이 어찌하여 시세계에서 그토록 별에 희망을 기탁하면서 그토록 밝아올 새벽 그리고 아침을 기대하였는가가 여기에서 풀려간다. 하늘과 별, 자연의 섭리가 시에서의 이미지형상화에 좋은 감으로도 되겠지만 일제탄압하의 험악한 세월에 윤동주시인은 시라는 무기를 들고 그런 방식으로 싸워갈 수밖에 없었다. 시창작이란 이 주어진 길로 나아가는것이 윤동주시인의 삶의 자세였다.
결론은 하나다. 윤동주는 별을 사랑하고 별을 노래하려는 결의를 지니고 시창작에 나선 별의 시인이였고 자기한테 주어진 길-시창작으로 훌륭한 시편들을 써내며 마음을 표달한 투사시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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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충남대 신용협선생의 론문-“윤동주론”에 따르면 한국의 백철선생이 윤동주를 “암흑기 하늘의 별”로 김우종선생이 “암흑기 최후의 별”로 보았다. “윤동주론”은 1994년 제6호 ≪문학과 예술≫잡지에 실리였다.
2)한국 충남대 신용협선생의 론문-“윤동주론”에 따르면 한국의 백철선생이 윤동주를 “암흑기 하늘의 별”로, 김우종선생이 “암흑기 최후의 별”로 보았다. “윤동주론”은 1994년 제6호 ≪문학과 예술≫잡지에 실리였다.
3) “윤동주의 시세계”(박충록 저, ≪장백산≫,1991년 제3호 제123페지)
4)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2002년 7월)
5)“민족시인 윤동주님을 기리며”(김성호 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2002년 7월)
6) ≪한국천문학사≫(나일성 저, 서울대학 출판부, 2000년 10월, 제61-62페지)
7) 동상서(65페지)
8) 윤동주는 항렬에서 맏이고 그들 남매는 3남 1녀였다. 동주아래로 녀동생 혜원, 남동생 일주, 광주가 있었는데 막내 광주가 룡정태생인의 웃 3남매는 모두 명동태생이다.
9) 1917년생인 윤동주는 1925년, 만8살에 명동소학교에 입학, 1931년 3월 25일에 졸업하고 달라자 현립1교 6학년에서 1년 공부, 1932년 4월에 룡정 은진중학교에 입학, 그간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다가 폐교되니 룡정 광명중학교 4학년에 편입, 1938년 2월 17일에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4월 9일에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
10) ≪윤동주평전≫(송우혜 저, 한국 열음사, 1988년 10월, 제199-200페지)
11) “윤동주론”(한국 충남대학 신용협이 쓴 론문, ≪문학과 예술≫1994년 제6호 60페지)
윤동주 시 다시 읽다
석화
들어가는 글
우리는 오늘 시인 윤동주의 이름으로 여기 모였습니다. 1917년 12월 30일, 용정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꾸오까형무소 유치장에서 생을 마감한 그, 우리나이로는 29살, 실제로는 스물일곱 해, 한 달 반가량 밖에 살지 않은 그가 아름다운 시, 불후의 시편들을 써서 남김으로써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동주의 시는 그 문학적가치로 윤동주라는 자신의 이름을 영원한 시간속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 땅에 태어나고 다시 돌아와 이 땅에 묻힘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중국조선족문학사를 기술하는데 있어서 더할 나위없는 다행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중국조선족문학의 개념과 성격, 그리고 시간적구분에 대하여 학계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 윤동주와 그 시문학의 귀속에 대하여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관점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각론하고 동주의 시가 중국조선족문학에 매우 큰 비중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은 의심할 바 없는 일이며 그 존재가치와 의미는 무한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건국후 중국조선족문학에 김학철이라는 큰 산이 솟아있어 우리문학이 비로소 본질적의미를 확보하게 된 것과 같이 건국전, 광복전의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에 동주의 시가 존재함으로써 우리의 문학은 주제와 제재면에서 보다 중대한 가치를 획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인 윤동주가 한 줌의 재가 되어 태어났던 이 땅에 다시 돌아와 묻힌 지도 어언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따라서 반세기전에 씌어진 동주의 시가 2010년대 오늘의 우리문학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나아가 현재형으로 부단히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낼 수 있을 것인가. 현실적으로 제시된 이 과제를 바로 밝히는 것은 동주의 시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우리 중국조선족문학 특히는 중국조선족시문학의 보다 나은 내일을 도모하는데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화자는 동주의 시 세편을 다시 읽으며 아래와 같은 세 가지 화두를 던지고 그 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시의 길은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는가. 둘째, 시의 탑은 어떻게 쌓여지는가. 셋째, 시의 향기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1. 시의 길은 궁극적으로 민족어완성을 향한 길
문학이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 또는 언어를 통하여 인간과 생활을 형상적으로 반영하는 예술이라는 사전적 의미로부터 출발한다고 하더라도 문학의 문학으로 불리는 시는 언어에 대한 요구가 보다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시에서의 언어는 도구이면서 목적이며 과정이면서 결과입니다.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무한한 책임감 그리고 보다 아름다운 시적언어를 얻고 다듬기 위해 바치는 각고한 노력이 결국 시인의 자격과 품위를 가늠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작품을 이루는 시어는 불가피하게 시인 본인이 속한 해당 민족의 민족어를 두고 말하게 됩니다.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의 한 장르로서의 시는 운율에 의하여 완성되는데 이 운율을 이루는 리듬은 그 민족어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르게 형성됩니다. 그것은 민족마다 발성법이 다르며 이 자기만의 발성법은 그 민족 나름의 호흡에 의한 성대의 울림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민족은 역사, 지리, 문화의 사회학적 공통성과 함께 피부, 골격, 체질 등 생리학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는데 여기서 민족어는 그 해당 민족의 제일 주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특징으로 나타나 이 모두를 함께 아우르게 됩니다. 따라서 시어는 생태적으로 모태의 시간을 넘어 아득한 태고로부터 한줄기 핏줄을 타고 흘러온 그 민족의 맥박과 숨결이 시인의 호흡에 이어져 민족어의 운율로 리듬을 타게 되는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전문.
동주의 이 시는 형태상 여덟 행으로 이루어진 1연과 한 행으로 이루어진 2연, 이렇게 두 연, 아홉 행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 시는 《하늘/ 부끄럼》, 《바람/ 괴로움》, 《별/ 사랑》, 《길/ 인생》의 상관구조를 펼쳐 보이면서 티 없이 맑은 별의 이미지를 통하여 전체적인 서정성을 획득하고 시인의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한 변함없는 지향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구성상의 특성이라고 한다면 이 시의 리듬, 즉 운율적 특성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언어예술의 최고형태인 시어는 일반적인 경우 사전적인 일상어로서의 단순한 의사전달도구나 기술상의 언어가 아니라 비유되거나 상징화된 특수한 언어로서 심미적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의미망을 형성합니다. 또 이와 같은 시어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시적운율입니다. 이 시적운율의 조성에는 부동한 언어에 따라 각기 여러 가지 다양한 기법이 있습니다. 우리말은 일반적으로 초성, 중성, 종성으로 되어있는데 낱말이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소리가 반복되는 현상을 각운脚韻이라고 합니다. 이 각운은 초성이 반복되면 두운(頭韻 머리운), 중성이 반복되면 요운(腰韻 허리운), 종성이 반복되면 말운(末韻 다리운)이 됩니다.
《서시》의 첫 행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라고 씌어졌습니다. 이 첫 구절이 왜서 《하늘을 쳐다보며》 혹은 《하늘을 공경하며》가 아니고 《하늘을 우러러》일가요. 이것은 바로 요운효과를 이루어내기 위함입니다. 《하늘을 쳐다보며》, 《하늘을 공경하며》가 단순한 의미전달을 목표로 한 것이라면 《하늘을 우러러》에는 《―ㄹ― / ―ㄹ―》의 반복이 이루어져 요운현상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훌륭한 것은 이 시의 마지막 행의 운율조성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 행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가 아름다운 것 역시 상기 요운효과를 최대한 발휘한 훌륭한 시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밤― / ―별― / ―바람―》에서의 《ㅂ》, 《ㅁ》, 《ㄹ》의 연속되는 반복이 이루어내는 요운현상입니다. 시가 예술임은 바로 이와 같이 미적효과를 목표로 세밀하게 작업하는 미적책략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시는 리듬 속에 모든 것을 담아냅니다. 훌륭한 시인은 민족어의 운율에 자기 숨결의 호흡을 맞추는 자이며 그 리듬에 자기 심장의 박자를 맞추는 자입니다. 조상의 숨결에 핏줄을 대고 그 맥박에 박자를 같이 하여 가슴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리듬이 입에 올라 스스럼없는 경지에 이르는 자, 그 리듬으로 조화로운 운율을 엮어내는 자를 우리는 훌륭한 시인이라고 부릅니다.
윤동주시인의 이 작품 《서시》가 수많은 인구에 회자되며 아름다운 명시로 사랑받는 것은 이 시에 담긴 내용과 함께 바로 이와 같은 미묘한 시적 운율 즉 소리효과, 음악성 그것도 섬세한 운율의 효과가 감동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시가 명시인 것은 작품의 내면에 이와 같은 시어의 예술성이 안받침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시인은 이처럼 민족어의 특성을 깊이 깨닫고 시를 썼습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은 우선 민족어에 대한 시인의 무한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인의 평전에는 1930,40년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나날이 가혹해지는 상황 하에서 사라져가는 민족어의 운명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고향에 있는 아우에게 우리글이 찍힌 책이나 신문지라면 종이 한 조각이라도 모두 소장해 두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참으로 처절한 부탁이라고 하겠고 간절한 호소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라고도 부르는 데는 시인이 잃어져가는 조선말, 민족어를 붙들고 한 글자 한 구절씩 시로 써내려갔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각일각 멸망에 다다른 일제가 소위 “국가총동원령”을 내린 체제하에서 시국과 엇나가 조선말로 시를 썼다는 자체가 바로 처절한 저항이었던 것입니다. 그 절체절명의 시각, 내 말을 내가 한다는 것은 굳은 의지와 대단한 용기의 소산으로 오늘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가볍게 볼 일이 아니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민족의 언어에는 그 민족의 숨결과 함께 그 민족의 문화, 풍습, 역사와 전통 모든 것이 스며있어 이를 일러 그 민족혼의 가장 기본적인 염색체(DNA)라고 합니다. 따라서 민족어를 잃은 민족은 모든 것을 잃은 민족이며 역사 속에 버림받고 현실 속에 사라진 민족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우선 이 지역에서 민족어의 자치가 실시되고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민족어가 사라진 마당에서의 민족자치는 그 실질적인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민족에게 자치구역을 따로 떼어준다고 한들 별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시인들은 반세기전 윤동주시인이 민족어에 바친 무한한 사랑 그리고 우리말의 더욱 훌륭한 표현을 위해 끝없이 탁마해온 장인정신을 본받아 오늘의 우리시를 더욱 푸르게 가꿔가할 것입니다. 우리시인들의 민족어에 대한 자각과 애정, 그로부터 우리시는 비로소 보석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시의 길은 궁극적으로 민족어완성을 향한 길입니다.
2. 시의 탑은 시인의 끝없는 거듭나기의 결과물
동주의 시에서 작품 《간》은 다른 작품들보다 덜 거론되는 시입니다. 그러나 이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행간에 시인의 재치가 곳곳에 숨어있어 전체적으로 시인의 다양한 학식과 문학적 깊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산중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 윤동주, 《간》 전문.
이 시는 시인의 우리전통설화와 서구적 독서체험의 접점을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시는 두 개의 이질적인 설화 즉 우리민담의《토끼전》과 그리스로마신화의 《프로메테우스》란 동서양의 두 고전을 혼합하여 시적 변용을 이루어 내었는데 이 두 고전은 작품에서 《간》이라는 공통요소를 중심으로 결합되었습니다. 토끼는 《현실의 고난 때문에 환상에 잠기는 인간성의 전형》입니다. 그는 자기가 처한 현실의 억압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 용궁으로 찾아갔으나 오히려 삶의 포기를 요구 받고 그 꿈은 한낱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2연에서 《토끼전》의 귀토설화맥락에 프로메테우스이야기가 접속되며 간은 의미심장한 상징이 됩니다. 간은 뇌나 심장과 더불어 사람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되는데 그것은 영혼과 깊게 관련지어지며 힘과 용기의 수용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간도 쓸개도 없다》는 말,《간이 부었다》, 《간도 크다》는 말은 그래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코카서스의 산중에서 도망해온 토끼는 힘과 권력의 속박을 벗어난 토끼라는 점에서 용궁에서 도망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힘과 권력에 의한 속박의 세계라는 점에서 코카서스산은 용궁과 동일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질적인 두 고전의 접합이 이루어지며 3연으로의 무리 없는 연결을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민담《토끼전》에는 독수리가 출현하지 않기 때문에 3연의 독수리의 등장은 2연의 코카서스 산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합니다. 여기서 간을 쪼아 먹는 독수리는 힘의 상징으로 오래 기르던 독수리를 살찌우고 나는 여위겠다는 것은 자신의 육체는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의식은 예리하게 지니겠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너》는 정신적 자아요, 《나》는 육체적 자아이며 육체적 자아의 희생은 감수하려하나 그것이 자신에 대한 전적인 포기는 아닙니다. 4연의 《그러나》는 여위어 힘은 없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겠다는 의지, 뜯어 먹히더라도 간을 내놓을 수는 없다는 결의를 표명합니다. 이어 프로메테우스가 등장하는데 천상의 불을 훔쳐와 인간들에게 나눠 주고 집 짓는 법, 글 쓰는 법을 배워준 그는 《인류문화의 정신, 지성의 상징》으로 됩니다. 인류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죄로 바위에 묶어 매일같이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는 밤마다 새로 간이 돋아나기에 그 고통은 끊임없이 계속되며 이것이 《인간적 고통의 핵심》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맷돌의 등장이 매우 특이한 의미를 지니는데 여기서 맷돌은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에 상응 하면서 또한 우리민속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목에 맷돌을 단 프로메테우스, 그는 고통 받는 조선 사람인 시인 자신이고 시인은 자기 동일성으로 서양의 그리스로마신화인물 프로메테우스를 택하였습니다. 자기희생적 인간, 고통을 감내하며 제우스에 대항하는 저항적 인간으로 시인은 이 프로메테우스를 본받자고 한 것입니다.
이 시는 간을 말리고 그 간을 지켜 지배층 세계와 대응하는 자세를 취하려는 토끼의 저항정신과 고통을 당하며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의 희생정신을 나타내었습니다. 또한 우리민담의《토끼전》과 그리스로마신화의 《프로메테우스》란 두 고전을 차용하여 저항과 희생이라는 이질적인 정신적 지향을 무리 없이 담아냈습니다. 여기서 특히 《코카서의 산중에서 도망해온 토끼》란 표현을 써서 두 고전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해나간 수법은 놀랄 만한 것입니다.
시인의 이와 같은 재치 있고 놀란 표현력은 결코 하늘이 그에게 천재시인의 선물로 그냥 준 것이 아닙니다. 시인의 이력과 학습과정, 독서경력을 살펴보면 한낱 용정 명동촌에서 태어난 시골아이에 불과했던 그가 나중에 어떻게 우리겨레의 가장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하였는가를 잘 알 수 있게 합니다.
시인은 아홉 살 때인 1925년 4월 4일,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12~14살이 되는 4학년 무렵부터 서울에서 간행되는 간행물인 《어린이》, 《아이생활》등 잡지를 구독하였고 5학년 때는 급우들과 함께 《새 명동》이란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1931년 3월 25일, 이 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졸업선물로 김동환의 시집 《국경의 밤》을 받았습니다. 이어 명동에서 동남쪽으로 약 10여리 상거한 달라재(大拉子 ― 현재의 룡정시 지신향)의 중국인 관립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공부하였습니다.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패佩, 경鏡, 옥玉 등 이름의 《이국소녀》들과 책상을 나란히 하고 함께 공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중국어(漢語) 실력을 알아볼 수 있는 대목으로 여기에는 북경유학까지 하고 온 아버지의 영향과 함께 한학자집안인 외가의 영향이 컸습니다. 특히 외삼촌인 규암 김약연선생의 가르침이 많았던 것으로 그분은 1900년대 초에 손수 명동학교의 전신인 규암서숙圭巖書塾을 일떠세우고 수많은 애국지사를 길러내어 《간도의 대통령》이라고까지 불리던 분이셨습니다.
1932년 4월, 용정의 기독교계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1935년 9월 1일 이 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에 편입하였습니다. 1936년말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거부로 폐교되자 다시 용정에 돌아와 5년제인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였습니다. 이때 연길에서 간행하던 《카톨릭소년》지 1935년 11월호, 12월호에 연속 《병아리》《빗자루》등 동시를 발표하였으며 이듬해 1936년 1월호, 3월호, 10월호에 또 《오줌싸개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등 동시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외가에 와있던 동요시인 강소천선생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신문과 잡지들에서 이상 등 문인들의 작품을 스크랩하였고 《정지용시집》을 정독하였습니다. 또한 1937년 8월에는 당시 100부 한정판으로 출판된 백석의 시집 《사슴》 한 책을 완전히 필사하였습니다. 1938년 2월 17일, 용정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9일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그는 최현배선생에게서 조선어를 배우고 리양하교수에게서 영시英詩를 배웠으며 당시 문단의 대시인 정지용시인과 동요시인 윤석중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방학기간 용정에 돌아와서는 또 외삼촌 김약연선생에게서 《시전詩傳》을 공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 시기 《문장文章》, 《인문평론人文評論》등 간행물을 정기적으로 구독하였고 교내잡지인《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등 시작품을 발표하였으며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 발레리, 지드, 장 콕토 등의 외국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연전졸업기념 자선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를 준비를 하며 1941년 11월 5일에 쓴 시 《별 헤는 밤》의 《프랑시스 잠》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여기서 온 것입니다.
시인의 아우 윤일주씨가 보존한 시인의 유품 중에 42권의 도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도서목록에서 시인의 문학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정지용, 서정주, 김영랑 등 조선시인과 다찌하라(立原) 등 일본시인의 시집 그리고 잠의 시집 《밤의 노래》와 《릴케시집》, 《말테의 수기》를 비롯한 여러 나라 시인, 작가의 작품집과 서구문학이론서들인《문학론》, 《시론서설》, 《소설의 미학》, 《근세미학사》, 《전조와 우화》, 《체험과 문학》 및 《고호서간집》과 같은 다양한 내용의 도서들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조선어, 중국어(漢語), 일본어 등 3 개 국어는 기본이었고 영어는 대학전공과목이었던 그가 문학원서를 읽기 위해 또 프랑스어를 제2외국어로 공부하였는데 이는 시인의 독서범위와 독서량을 짐작하고도 남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시인 윤동주 그리고 동주의 시는 이렇게 조선과 중국, 일본이라는 지정학적인 역사, 문화환경이 바탕이 되고 이 세 나라를 비교적 쉽게 나들면서 당시의 가장 최첨단의 가치 있고 생생한 정보를 우선 접수하여 다양한 영향을 섭취하였으며 또한 시인 본인의 끈질긴 탐구로 이뤄낸 학문적 깊이가 종합적으로 어우러지어 형성된 결과물라고 하겠습니다.
동주시의 탑은 이와 같이 시인의 끝없는 거듭나기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오늘 중국조선족시문학이 침체의 깊은 늪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데에 있어서 우리 시인 모두에게 큰 계시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스스로가 거듭나 내가 세상에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하지 세상더러 나를 보아달라고 아양 떨거나 발버둥칠 일이 아니라는 것이겠습니다. 동주의 시와 같이 스스로 거듭나 나날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길, 이 길이 바로 우리시인들 각자 걸어갈 길이며 이렇게 걸어간 노력의 작은 길들이 모아져 우리문학의 밝고 넓은 길이 크게 열린다고 하겠습니다.
3. 시의 향기는 시인의 깊은 자아성찰에서 비롯되는 것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륙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전문.
시인의 깊은 자아성찰을 표현한 이 시는 또한 시인의 최후 작품으로 기록되어 동주시의 문학경향을 전체적으로 갈무리하는데도 의미가 있습니다. 시인의 작품연보를 살펴보면 시인은 1942년도에 모두 여섯 편의 시를 썼습니다. 그중 시《봄》은 창작 날자가 적혀 있지 않고 그 외 창작 날자가 적힌 다섯 편은 《참회록》(1월24일), 《흰 그림자》(4월14일),《흐르는 거리》(5월12일),《사랑스런 추억》(5월13일) 그리고 이 작품인데 1942년 6월 3일이라고 창작 날자를 밝힌 이 작품《쉽게 쓰어진 시》가 시인의 마지막 작품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는 물론 시인이 1943년 7월 14일, 쿄토에서 《독립운동》죄목으로 체포된 후 일본경찰당국에 압수당한 상당한 분량의 작품과 일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아 그 후의 작품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내용상으로 크게 두 개 부분으로 나뉘어 볼 수 있는데 1연부터 7연까지가 첫째 부분으로, 이하 8연부터가 둘째 부분입니다. 이 시는 첫 연에서 《밤비》와 《육첩방》의 이미지로 시 ․ 공간적 환경을 제시하면서 시인이 처하고 있는《남의 나라》라는 현재의 엄혹한 상황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하에서도 시인은 이 《한 줄 시를 적》는 《천명》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시인의 시인됨은 하늘의 명령이며 그것은 또한 극도로 민감한 상처의 능력이기에 슬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쉽게 씌어지는” 시가 부끄러운 일로 명백히 인지되는 순간, 시인은 어려운 인생을 살면서 자신은 시를 너무 안이하게 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시의 두 번째 부분 8연에서 시인은 다시 처음의 시적상황을 되풀이하여 어두운 현실의 분위기를 부각시키고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립니다. 이러한 자기다짐 속에서 갈등하는 두 자아가 만나게 되는데 《나는 나에게》, 이렇게 두 사람의 자신을 악수시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의 《나》는 하나는 《홀로 침전하는》 그래서 부끄러운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즉 반성적 자아로서 이것은 먼 길을 돌아온 시인의 또 다른 자기 응시가 됩니다. 이렇게 시인은 이 작품에서 부끄러움의 정서를 거짓 없이 드러냄으로써 그의 작품세계의 대표적인 시적주제로 나타나는 자아성찰의 경지를 원만하게 이루어내었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소위 “조선독립운동” 등의 혐의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받고 복역 중 생체실험의 의문사로 옥사하였습니다. 이런 전기적사실로부터 우리는 시인을 저항시인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주의 시에는 육사의 시《광야》나《절정》에 나타나는 서릿발어린 투지나 만해시가 품고 있는 깊은 사념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동주의 시에는 사랑과 그리움과 눈물 그리고 참회와 감동이 담겨있습니다. 시인 윤동주와 동주의 시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부끄러움의 시학”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동주의 시에서 “부끄러움”이라는 시어가 《서시》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에서부터 시작하여 《별 세는 밤》, 《길》, 《참회록》, 《쉽게 씌어진 시》등 다수의 작품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의 시 전체 흐름에서 주요한 경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주시의 특징을 작품에서의 시인과 시적화자의 일치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작품에서의 시적화자가 김소월이나 한용운의 시에서처럼 시인자신과는 별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는 다른 표현입니다. 김소월, 한용운 시에서의 시적화자는 “님”을 노래하는 “여성화자”의 어조로 나타나 시인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동주의 시에서 시적화자는 대체로 시인자신과 일치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례로 “1942년 1월 24일”이라고 지은 날짜를 밝힌 시《참회록》에는 “만 24년 1개 월”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정확히 시인의 나이와 일치합니다. 이처럼 동주시의 문체가 고백체 또는 일기체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체험시적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시인과 시적화자가 일치할 경우 시인의 자기인식문제가 작품의 중심주제로 제기되면서 시인자신의 내면상태를 그대로 드러내게 되어 그만큼 시에 자아성찰의 색채가 두드러지게 합니다.
연변대학 김호웅교수는 시인 윤동주와 동주시의 문학적의미를 개괄하여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방면으로 서술하였습니다.
“첫째, 그는 강인한 저항정신을 지녔지만 이를 사춘기소년과 같은 청순한 감각으로, 겸허하고 유연한 언어로 써나갔기 때문에 다수 독자들의 공감과 사랑을 받는다. 또한 그는 저항시인이었지만 그 기본정신은 결코 타민족에 대한 배타주의자가 아니라 평화주의이고 인도주의였다.
둘째, 그의 정신은 염치사상(廉恥思想)이다. 염치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서 예의(禮儀)와 더불어 참된 인간이 가져야할 덕목이다. 그것은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정신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한 그의 사상은 정신적 순결주의이며 그것은 우리의 전통적인 염치사상과 다름없다.
셋째, 그가 남긴 가장 빛나는 시는 사명시(使命詩)이다. 우리민족 또는 온 세상에서 고통을 받고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도록 사명을 받았다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윤동주의 시를 통해 순수한 동심, 겸허한 자세, 평화주의와 인도주의를 되찾을 수 있고 자기반성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김호웅교수의 상기 지적은 동주시의 문학적의미에 대한 정치精緻한 개괄입니다. 특히 시인 윤동주를 강인한 저항정신을 지녔지만 타민족에 대한 배타주의자가 아닌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평가한 부분과 동주시의 “부끄러운 마음”에서 비롯되는 “염치사상”과 “사명시”에 대한 논술은 윤동주연구에서 새롭고 가치 있는 의논이 되며 오늘의 우리 중국조선족시문학이 새로운 시기 새 모습에로의 변신을 기약하는데 훌륭한 가르침이기 되겠습니다.
시인을 “한줄 시를 적”는 “슬픈 천명”을 소명召命 받은 자로 규명하면서 자신의 “쉽게 씌어진 시”로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참회하는 시인 윤동주를 조금만이라도 더 생각한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더 이상 한 줄의 시라도 쉽게 쓰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한 동주시에 표현된 “염치사상”과 “사명시”에 대하여 조금만이라도 더 깊이 생각한다면 우리 시인들의 마음이 한결 순수해지고 우리시단이 보다 깨끗해지게 될 것입니다. 시의 향기는 시인의 깊은 자아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마무리
동주의 시 세편 《서시》, 《간》, 《쉽게 씌어진 시》를 다시 읽으며 던져본 세 가지 화두에 그 답을 적어봅니다.
첫째, 시의 길은 궁극적으로 민족어완성을 향한 길이다.
둘째, 시의 탑은 시인의 끝없는 거듭나기의 결과물이다.
셋째, 시의 향기는 시인의 깊은 자아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2010년 5월 16일
[부록]
조선족문단의 별-윤동주
조성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전문
윤동주(1917. 12.30-1945.2.16)는 우리 연변이 낳은 별이다. 그는 일제통치의 암흑기에 자기의 “서시”에서 표출한 오롯한 시혼과 기개를 추호도 배신함이 없이 스스로 선택한 저항의 길을 걸으면서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다 간, 끈질긴 “잠재창작”으로 한 시대와 량심을 노래한 우리 민족의 저명한 저항시인이다. 그는 연변의 명동에서 탯줄을 끊었고 룡정에서 공부하고 창작했으며 룡정 동산의 교회묘소에 고이 잠들고있는 우리 조선족시인이다.
윤동주(아명 해환)는 1917년 12월, 길림성 룡정시 명동촌에서 태여나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룡정의 은진중학, 평양숭실중학, 룡정 광명중학을 거쳐 1938년 4월에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42년 3월, 그가 연희전문학교를 마칠 때 졸업기념으로 자기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묶어 출판하려 하였지만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그의 이 시집은 1948년 1월에 공개출판되였다.) 그는 자기의 꿈을 이루려 1942년 4월 일본에 건너가 도꾜 립교(立敎)대학 문학부영문학과 1학년에 입학, 그해 10월에 교또(京都)도시샤(同志社)대학에로 옮겨 영문학과를 수학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길로 나아갔다. 그는 “교또 조선인학생주의그룹사건”에 련루되여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로 1943년 7월 19일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였다. 그 이듬해 3월 31일 윤동주는 2년 실형의 언도를 받고 일본 후꾸오까형무소로 이감되여 모진 옥고를 겪다가 광복 여섯달을 앞두고 1945년 2월 16일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하였다.
1945년 2월 하순의 어느 일요일, 룡정에 있는 윤동주의 고향집에 한통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2월 15일 동주 사망, 시체 인도해가라”는 사망전보(死亡電報)였다. 윤동주 부친은 천신만고 끝에 일본 후꾸오까형무소에 가서 윤동주의 유해를 고향 룡정으로 옮겨왔다. 1945년 3월 6일, 눈보라가 치는 날 룡정가 제창로1호 그의 집 앞뜰에서 한줌의 유해를 놓고 그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장례식에는 윤동주의 할아버지, 아버지 등 일가친척들은 물론이요, 교회 지도자나 유지들이 모여들었다. 조촐하고도 장중한 의식이요, 가족장이였다. 그날 문재린(문익환의 부친)선생이 집사하였다. 그 장례식에서 윤동주의 유작 “우물속의 자화상”,“새로운 길”을 읊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무렵 교내잡지 ≪문우(文友)≫에 발표되었던 작품이였다. 유해는 그날 오전에 룡정 동산공동묘지에 안장하고 묘비를 세웠다.
묘비 “시인 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는 그의 조부와 부친이 서둘러 세운것이였다. 당시 “간도문단”밖의 시인에 머물러있던 그에게 최초의 시인의 관사(冠詞)를 붙여준 처사는 진정 개화된 의식의 선행(先行)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였다.(권일송 ≪윤동주평전≫에서)이것은 윤동주를 가족관계의 서렬이나 위계(位階)를 떠나 정신적선구자로 떠받들려는 개화된 의식이였다. 하지만 그후 윤동주 묘소와 묘비는 오래동안 뭇사람들에게 소외되여 사나운 풍상속에 버려진채로였다.
그러나 윤동주의 유가족은 한국으로 나갔고 중국에 남아있는 친척들은 무시무시한 정치적풍파속에서 “지주계급”으로 몰려 윤동주 및 그의 묘소에 대해 “모르쇠”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연변에 살던 윤동주의 아우 윤광주(시인)은 내두산 개간대에서 고된 고통에 시달리다가 1962년 폐염으로 병사하였다. 또한 중국과 “남조선”은 적대적관계속에서 상호 래왕이 단절되였기에 윤동주는 우리 조선족력사의 뒤자락에 묻혀버리게 되였다. 윤동주는 오래동안 무주고혼(無主孤魂)으로 땅속에 묻혀있었고 그의 묘비마저 무성한 잡초속에 파묻혀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윤동주가 력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고 우리 조선족사회에 불후의 저항시인으로 가까이 다가오게 되었는가?
개혁개방의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서 외국과의 래왕과 문화교류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1985년 4월 중순에 일본 와세다대학 오오무라 마스오선생(부인과 함께)는 연변대학 민족연구소객원교수로 오게 되었다. 오오무라 마스오선생은 이때 연변에 오게 된 동기를 “나는 왜 윤동주의 고향을 찾았는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나의 전공은 중국문학이였다. 그러나 조선반도에 전운(戰雲)이 걷히고 전쟁의 참화에서 일어선 한국인들이 재건부흥의 열의에 불탈 즈음인 1956년경부터 나의 관심은 한국문학쪽으로 기울어져갔다. 고심참담(故心慘憺)하게 한국말을 익히고 한국문학을 섭렵하면서 나는 많은 작가들과 작품의 연구에 몰입해갔다. 최서해, 김정한, 정지용, 리육사에 관해서 흥미를 느끼고 그 인물들과 작품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참으로 크나큰 매력을 느끼고 깊이 파고든것은 윤동주였다.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느꼈던 크나큰 감동을 나는 억누를수가 없었다. 그의 작품을 더욱 깊게 리해하기 위하여 그의 인간적인 면을 좀 더 알고저 갈망하던 끝에 나는 윤동주의 아우 윤일주씨를 만났다.
1984년 여름, 나는 당시 일본에 와있던 윤일주씨를 만나 도꾜 히비야(日比野)의 한 다방에서 약 2시간 가량 그의 형에 관해 많은 사연들을 들을수가 있었다. 당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병색이 완연했던 윤일주씨는 나의 요청을 쾌히 받아들여 나를 만나주었고 그가 아는 그의 형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다 말해주었다. 특히 40여년이나 세월이 흘렀음에도 윤동주가 도꾜류학시절 읽던 책보따리속에 어떠어떠한 책이 들어있었다는 것과 룡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소가 있는 곳을 일러주는 략도까지 그려주었다.
그때 나는 윤동주의 묘소와 그가 살던 고향을 찾고싶은 강렬한 충동적욕구를 느꼈다. 그것은 윤동주를 요절케 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죄책감 같은 착잡한 심경에, 그를 훌륭한 시인으로 존경하는 사람으로서 그이 묘소를 참배하고 그의 한(恨)을 위무하며 그를 더욱 진실하고 깊이 리해하기 위해 그가 고향에 남겨놓고 간 흔적을 찾고싶은 마음이 간절했기때문이였다. 물론 윤일주씨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지만 윤동주의 고향을 찾고싶은 마음은 내 스스로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다.
내가 중국 길림성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1년간 체류할 기회를 만든것은 나의 원래의 소망을 이루어보고저 하는 마음이 컸었기 때문이다.“(≪윤동주연구≫, 권영민 엮음, 문학사상사, 1995년 8월 출판)
실로 오오무라 마스오선생은 연변에 와서 중국조선족문학사료를 수집, 연구하는 한편 시인 윤동주의 묘소를 찾고 그의 행적을 더듬는 것을 주요과제로 삼고 룡정의 방방곡곡을 답사하였다.
1985년 5월 14일 오오무라 마스오선생는 한국 윤일주교수(윤동주의 동생)가 그려준 설명도를 가지고 연변대학의 권철교수와 룡정중학교 류기천선생(당시 룡정중학교 교장)등의 협조를 받아 각고 끝에 드디어 윤동주 묘소와 묘비를 찾아냈다.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었다.
뒷면:
“鳴呼故詩人尹東柱其先世坡平人也童年畢業於明東小學反和龍縣立第-校高等科編入龍井思眞中學修三年之業轉學平壤崇實中學開-歲之功復回龍井竟以優等成績卒業干光明學園中學部-九三八年升入京城延禧專門學校文科越四年冬卒業功己告成志猶末己復於翌年四月負纘東渡在京都同志社大學文學部認眞琢磨尾意學海生波身失!自由將雪螢之生涯化龍鳥之環境加之二翌不仁以一九四五年二月十六
우측면:
日長逝時年二十九材可用於當世詩將鳴於社會乃春風無情花而不實屠可惜也君夏鉉長老之今孫永錫先生之圭子敏而好學尤好新詩作品顔多其筆名童舟云
좌측면:
一九四五年六月十四日
海史 金錫觀 撰竝書
弟一柱 謹竪
光柱
이것을 우리 글로 훈독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아아, 고 시인 윤군 동주는 본관이 파평이다. 어릴 때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화룡현립 제1교 고등과에 들어가 배웠고 룡정 은진중학에서 3년을 배운 뒤 평양 숭실중학게 전학하여 학업을 쌓으며 1년을 보냈다. 다시 룡정에 돌아와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광명학권 중학부를 졸업하고 1938년에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전학하여 4년, 겨울을 보내고 졸업했다. 공부 이미 이루었어도 그 뜻 오히려 남아서 다음해 4월에 책을 짊어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도시샤대학에서 진리를 갈고 닦았다. 그라 어찌 뜻하였으랴, 배움의 바다에 파도 일어 몸이 자유를 잃으면서 배움에 힘쓰던 생활 변하여 조롱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되었고 거기에 병까지 더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운명하니 그때 나이 스물아홉, 그 재질 가히 당세에 쓰일만하여 시로써 장차 사회에 울려퍼질만했는데 춘풍 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아아 아깝도다. 그는 하현 장로의 손자이며 영석선생의 아들로서 명민하여 배우기를 즐긴데다 신시(新詩)를 지어 작품이 많았으니 그 필명을 동주(童舟)라 했다.
1945년 6월 14일
해사 김석관 짓고 쓰다
아우 일주, 광주 삼가 세우다
- (≪윤동주 평전≫ 송우혜 355페지
윤동주묘소와 윤동주묘비의 발견은 우리 문단, 나아가 전반 조선족사회에 크나큰 희사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무한한 흥분과 희열 속에 잠기게 하였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우선 윤동주에 대한 추모활동에로 궐기하게 하였다.
시인 윤동주묘소를 찾아낸 5일후인 1985년 5월 19일 연변대학 정판룡, 권철 교수를 비롯한 5명 교수와 연변민속박물관의 책임자 그리고 오오무라 마스오선생과 부인 등 일행 9명이 윤동주묘소에 찾아가 우리 민족의 풍습대로 제사를 지냈다. 뒤따라 학생들, 친척들, 여러 분야의 인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추모활동을 벌렸다. 그중 윤동주의 모교인 룡정중학교 사생들의 추모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사생들은 “윤동주시문학 학습써클”을 두었고 1985년 6월 11일에는 학교지도부의 주최하에 시인을 추모하여 추도회를 거행하였다.
그후 룡정중학교에서는 자기들의 노력과 국내외인사들의 후원에 기대여 윤동주묘소를 수선하였고 시인의 기일이나 청명, 추석 등 명절때면 묘소에 가서 성묘하고 제사를 지내며 또한 시랑송회, 강연회, 가창공연으로 윤동주의 거룩한 시정신을 기리고있다. 1988년 12월 30일 이 학교에서는 윤동주 탄생 71주년을 맞으며 “윤동주장학위원회”를 건립하여 해마다 우수학생을 장려하고있다. 또한 같은 해 같은 달에 “윤동주문학사상연구회”를 설립하고 윤동주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고있다.
시인 윤동주에 대한 추모활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룡정의 범위를 벗어나 재빨리 연변의 다른 지역에도 퍼져갔다. 이를테면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종소리”문학사, “하얀 넋” 신문사 등 회원들, ≪중학생≫잡지 “윤동주문학상” 수상자들은 청명절때면 시인의 묘소를 찾아 가토하고 그 묘소앞에서 시랑송, 강연회를 갖는다.
연변의 인사들은 한국해외한민족연구소 리윤기소장의 재력적후원에 기대여 1992년에 윤동주가 다니던 룡정중학교내의 대성중학 낡은 건물을 파하고 신축하여 그곳을 윤동주기념관으로 탈바꿈시켰으며 그 건물앞에 윤동주시비를 세웠다. 1994년 4월 23일에 “윤동주문학상”을 세우고 한동안 운영해왔다. 그리고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편집부에서도 해마다 ≪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시상식을 거행하고있다.
윤동주시인에 대한 추모 및 기념 행사와 더불어 윤동주시문학에 대한 출판, 연구 작업도 1980년대말부터 서서히 진행되게되였다. 연변사회과학원 문화예술연구소는 ≪문학과 예술≫1985년 12월호에 처음으로 윤동주 시 10수(“자화상”, “새로운 길”,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 “십자가”, “길”, “쉽게 씌어진 시”,“참회록”,“사랑의 전당”,“창공”등)를 발표함에 따라 조선족 신문 잡지, 조선족중학교 교과서 등에 윤동주의 시작품이 륙속 발표되였다. 1996년 12월에는 최문식, 김동훈 편으로 된 ≪윤동주유고집≫(조,한문판)이 출판되였다. 이에 따른 연구작업 중 몇편의 연구론문과 평론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외롭게 대화하는자”(김경훈,≪문학과 예술≫1989.1호)
◆ “윤동주론”(일철, ≪중국조선족문학연구≫에 수록,1989년 6월,흑룡강성조선민족출판사 출판)
◆ “윤동주 시에 반영된 의식차원에 대하여”(리원, ≪문학과 예술≫1990년 3호)
◆ “윤동주”(권철, ≪중국조선족문학사≫1990년 7월, 현변인민출판사 출판)
◆ “윤동주 시의 변모양상”(임윤덕, ≪언어문학론문집≫에 수록, 1991년 7월 연변인민출판사 출판)
◆ “윤동주의 시세계”(박충록, ≪장백산≫1991년 3호)
◆ “저항시인 윤동주”(임윤덕, ≪천지≫1999년 3호)
◆ “윤동주와 그의 시”(최봉룡, 료녕신문, 1992년 5월 16일)
◆ “서서히 빛을 뿌리는 별-중국에서의 윤동주”(림연, ≪계간문예≫1992년 겨울판)
◆ “윤동주 시의 저항성에 대한 사고”(임윤덕, ≪연변대학 학보≫1993년 3호)
◆ “윤광주의 작품세계-윤동주 시와의 비교”(김경훈,≪문학과 예술≫1995년 1호)
◆ “중국조선족과 시인 윤동주”(정만룡, ≪문학과 예술≫1995년 6호)
◆ “윤동주의 생애, 옥사, 묘소”(류기천, ≪문학과 예술≫1995년 6호)
◆ “윤동주의 시와 현대파시의 내재적관련성”(리해산, ≪문학과 예술≫1995년 6호)
◆ “시인 윤동주 50주년을 맞이하여”(일철, ≪문학과 예술≫1995년6호)
◆ “윤동주 시의 심미적가치에 대하여”(임윤덕, ≪문학과 예술≫1995년 6호)
◆ “윤동주의 시세계”(리상각, ≪천지≫1995년 12호)
◆ “어둠속에 빛나는 한줄기 빛-윤동주론”(김호웅, ≪재만조선인문학연구≫에 수록, 1997 년 12월 한국 국학자료원 출판)
평론가들의 연구작업과 동보하여 연변대학 조선한국학연구중심, 연변작가협회,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연변대학조선어문화부, 연변대학 언어학연구소, 룡정시문련 등이 공동으로 1995년 6월 14-15일 사이에 룡정에서 “민족시인 윤동주50주년 기념학술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 학술토론회는 기념활동, 시랑송과 노래공연, 학술론문 발표, 참관과 제사 등으로 엮어졌다. 학술토론에서는 정판룡교수가 개막사, 조성일주석(당시 연변작가협회 주석)이 기념연설을, 최삼룡소장(당시 문학예술연구소소장)이 폐막사를 하였고 장춘식, 리해산, 임윤덕, 김경훈, 전성호, 김만석 등이 론문을 발표하였다. 이 학술토론회는 윤동주가 타계한후 50년만에 윤동주의 고향 룡정에서 처음으로 열린 규모가 방대한 학술잔치였다.
2005년 8월 15일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연변대학 조선-한국학연구중심, 한국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서시”문학사가 공동주최하고 한국해외한민족연구소, 한국스포츠외교문화원이 후원한 “윤동주 서거 60주년 중한학술쎄미나르”가 연길시 세기호텔 2층 회의실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였다. 이 쎄미나르는 김호웅교수의 개회사, 한국해외한민족연구소 리윤기소장과 한국스포츠외교문화원 박영우원장의 축사, 론문발표, 자유토론, 김관웅교수의 폐막사 등으로 진행되였다. 론문들로는 “윤동주 시의 공간의식연구”(연변대 김경훈교수),“윤동주의 순결주의, 민족주의, 인류평화주의”(한국 덕성녀대 김우종교수), “윤동주는 우선 먼저 우리 조선족시인”(리광인부장)등이 발표되였다. 이 쎄미나르는 중국 연길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윤동주 관계 중한학술쎄미나르이다.
윤동주는 룡정식 명동에서 태여나 잔뼈가 굵었다. 거기에는 그가 오르내린 언덕과 산이 있고 송아지친구와 함께 물장구를 치던 시내물이 있고 이웃과 동포에 대한 사랑을 배운 학교며 신앙을 키우던 교회당에 있다. 이 모두는 윤동주의 의식속에 깊숙이 그리고 선명한 색채로 아로새겨졌다. 이런 생활모습들은 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감명깊게 형상적으로 담겨져있다.
윤동주는 우리 연변이 낳은 시인이다. 동시에 전반 세계배달겨례의 민족시인이며 아울러 민족의 한계를 뛰여넘은 세계적시인으로 될것이라고 믿어마지않는다. 윤동주의 시세계에는 저항정신이 맥박치고있음과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전인류적인 휴머니즘의 향기도 짙게 풍기고있다.
우리 조선족문학사에서 윤동주와 그의 삶은 이미 하나의 전설이요, 혼불이다. 윤동주의 슬프고 아름다운 삶과 죽음은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우리 민족의 수난과 비극을 상징하고 그의 시는 민족의 아픈 상처와 한을 대변하며 따라서 윤동주는 우리 조선족문학의 대표적작가로 세월의 벽을 넘어 영원히 겨레의 가슴속깊이 살아있을것이다. 윤동주문학에 대한 연구는 엄격한 의미에서 상기도 초기단계에 머물러있는바 우리 문학사기와 평론가들은 윤동주에 대한 연구작업을 새로운 차원에로 인상시켜야 한다고 나의 생각을 세워본다.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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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설
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는 우리 연변이 낳은 별이다. 그는 일제통치의 암흑기에 자기의 “서시”에서 표출한 오롯한 시혼과 기개를 추호도 배신함이 없이 스스로 선택한 저항의 길을 걸으면서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다 간 끈질긴 “잠재창작”으로 한 시대와 량심을 노래한 우리 민족의 저명한 저항시인이다. 그는 연변의 명동에서 탯줄을 끊었고 룡정에서 공부하고 창작했으며 룡정 동산의 교회묘소에 고이 잠들고 있는 우리 민족 시인이다.
그러나 윤동주의 빛나는 생애와 그가 남긴 귀중한 문학유산 및 그의 타계 440년 뒤인 1985년에야 우리 연변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해방후 윤동주의 유가족은 한국으로 나갔고 중구에 남아있는 친척들은 무시무시한 정치적풍파속에서 윤동주의 묘소에 대해 “모르쇠”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연변에 살던 윤동주의 아우 윤광주(시인)는 내두산 개간대에서 고된 고통에 시달리다가 1962년에 폐염으로 병사하였다. 또한 개혁개방전까지 중국과 한국은 상호 래왕이 단절되였기에 윤동주는 우리 조선족 력사의 뒤자락에 묻혀버리게 되었다. 윤동주는 오래동안 무주고혼无主孤魂으로 땅속에 묻혀있었고 그의 묘비마저 무성한 잡초속에 파묻혀 있었다. 개혁개방의 새로운 력사사기에 진입하여 외국과의 래왕과 문화교류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1985년 4월 중순에 일본 와세다대학 오오무라 마스오선생은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객원교수로 오게 되었다. (부인과 함께)오오무라 마스오선생는 연변에 와서 중국조선족문학사료를 수집, 연구하는 한편 시인 윤동주의 묘소를 찾고 그의 행적을 더듬는것을 주요과제로 삼고 룡정의 방방곡곡을 답사하였다. 그는 연변 유지인사들의 협조를 받아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여 윤동주 묘소와 묘비를 찾아냈다. 윤동주묘소와 윤동주묘비의 발견은 우리 문단, 나아가 전반 조선족사회에 크나큰 회사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무한한 흥분과 희열 속에 잠기게 하였다. 바로 이때로부터 윤동주에 대한 추모활동이 진행되였고 윤동주문학상을 세웠으며 윤동주 시문학작품집을 출판하면서 윤동주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는 연길 철남열공급유한공사 지원준리사장의 재력적후원에 기대여 우리 민족의 위대한 저항시인 윤동주의 문학사상과 정신을 기리며 그의 시문학성과를 조명하며 연구성과를 결산하기 위하여 지난 세기 80년대말부터 2012년까지 사이에 씌어진 론문, 평론 및 유관 자료중의 대표적인것들을 선정하ㅕ 처음으로 종합론문집 ≪윤동주문학론≫을 펴내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수준미달로 적지 않은 부족점들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독자들의 조언을 바라마지않는다. 여러 학자와 시인들이 윤동주의 시에 관한 론문을 쓸 때 각기 다른 판본을 토대로 하였음으로 작자가 인용한 시를 그대로 따랐음을 알리는바이다.
끝으로 이 론문집의 출판을 위해 재력적후원을 담당한 지원준리사장에게 인사를 드리며 많은 심혈을 기울여준 연변인민출판사 리성권사장님과 여러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회장 조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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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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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에서 띄어쓰기나 맞춤법은 원문에 따랐습니다 - 카페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