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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손교회 중고청년대학부 원문보기 글쓴이: 모황민
[구약연구29]
선지자들의 외침 2 (나훔, 하박국, 스바냐)
나훔서는 앗수르 제국의 멸망에 대해, 하박국서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유명한 구절과 함께 믿음에 대한 강조를, 스바냐서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경고 및 회개의 촉구를 각각 외치고 있습니다.
[나훔]
* 제목: 나훔
이는 ‘위로’, ‘위로자’라는 저자의 이름을 따름(70인역과 벌게이트역 역시 동일한 제목).
* 저자: 나훔
본서의 내증(1:1)으로 보아 나훔이 저자인 것이 분명함.
한편, 저자에 대해선 ‘엘고스’ 사람이란 것 외에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음(엘고스는 예루살렘과 가사 사이의 ‘엘케세이’가 유력함).
* 기록연대: B.C. 621~612년경(혹자는 B.C. 663~654년으로 보기도 함)
유다 왕 요시야의 개혁 이후이며(1:15), 앗수르 제국의 멸망 직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에 대한 나훔의 메시지는 요나의 메시지 이후 적어도 70년 이후의 것임이 분명합니다. 요나 당시, 비록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를 보내 회개를 촉구하셨고, 그들이 회개하자 심판을 거두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7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 오히려 이전보다 더 교만하며 사악해져,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 기록목적:(1)대적 앗수르의 멸망과 (압제 받던) 유다의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
(2)난공불락의 성 니느웨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알리기 위해.
(3)불의한 국가와 부패한 백성은 반드시 패망케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 기록장소: 유다 엘고스로 추정됨.
* 주제: ‘니느웨’란 말로 표현되고 있는 앗수르의 멸망(또는 심판)
앗수르가 한때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로 사용되긴 하였으나, 이젠 스스로 행한 죄악과 강포로 인해 멸망당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 대상: 유다 백성들앗수르의 탄압을 받던 유다 백성에게 구원의 기쁨과 위로를 주기 위함.
* 핵심장: 제1장본장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제시함으로써(1:2~8) 본서의 핵심 주제인 니느웨의 멸망과 그로 인한 유다의 구원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공의에 관련된 것임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 특징:(1)회화성 -문장 및 문체의 회화성(繪畫性)과 명료성(明瞭性)이 다른 선지서에 비해 뛰어남.
(2)답관체 -서론(1:2~9) 부분이 비록 불완전하긴 하나 히브리어의 알파벳순을 따라 지은 답관체(acrostic) 운율을 갖추고 있음.
(3)감사찬송 -후일 이스라엘의 신년 절기 때 앗수르의 멸망을 감사하는 송가로 채택됨.
* 배경:
나훔서는 70여 년 전(또는 100여 년 전) 기록된 요나서와 함께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기록한 선지서로, 요나가 니느웨의 구원의 회개를 중심하여 다루고 있다면, 나훔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니느웨의 멸망을 다루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앗수르 사람들은 과거의 신앙 부흥운동(욘3:10)을 다 잊고, 불법과 우상숭배와 교만한 죄 등으로 되돌아가고 말아, 결국 (바벨론-메대 연합군을 통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B.C. 612년).
* 본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유다 백성에게 전한 ‘아름다운 소식’(1:15)은 신약 시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원한 구원의 복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도 바울에 의해 인용되었으며(롬10:15), 1:2~8에 나오는 하나님의 품성들 역시 재림 시에 만민의 심판자로 오실 메시야의 사역과 일치합니다.
* 본서의 개요:
1. 니느웨의 멸망이 선포됨(1:1~15)
여기서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유다에 전할 ‘아름다운 소식’(1:15)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그 사건이 1차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것이지만, 2차적으로는 자기 백성을 신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증거 해 줍니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일찍부터 이스라엘 전 민족을 괴롭혀 온 이방민족이기 때문입니다.
1)하나님의 심판의 일반적 특성(1:1~8)
-하나님의 보복(1:1~2)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능력(1:3~8)
2)니느웨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1:9~15)
2.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묘사(2:1~13)
니느웨가 어떤 식으로 멸망당할 것인지에 대해 생생한 언어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서도 나훔이 거듭 야곱과 이스라엘의 영광(2:2)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니느웨의 멸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질 사건임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니느웨의 멸망의 필연성(3:1~19)여기서 나훔은 다시 한 번 니느웨의 죄악을 지적함으로써(3:1~7)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당위성과 필연성(3:8~19)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멸망 원인(3:1~11)-큰 죄악들(3:1~7)
-노아몬과의 비교(3:8~11)
2)멸망의 불가피성(3:12~19)
* 핵심단어 및 구절, 인물연구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1:1) -이가 누구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14절의 내용과 사 36, 37장을 고려해 볼 때 앗수르 왕 산헤립으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 같습니다. 한편, 그는 B.C. 705~681년까지 앗수르를 통치했으며 B.C. 701년경에는 유다를 위협했습니다(왕하18:13).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없게 되었음이라.”(14절)
아름다운 소식(1:15)
-이는 일차적으로 니느웨, 즉 앗수르 제국의 멸망 소식을 가리키지만(사40:9; 52:7 등에서는 바벨론 제국의 멸망과 포로의 귀환 등을 의미), 궁극적으로는 후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될 구원의 복음, 즉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된 기쁨과 진정한 위안을 주는 만민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15절)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40:9)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고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52:7)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5)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삶 속에서 주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자 힘쓰고 있습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된 소식을 나누고자 애쓰고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전파하는 자 없이는 결코 이 복된 소식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파괴하는 자(2:1) -이는 바벨론의 나보폴라살(B.C.626~605)과 메대의 카카레스(B.C. 625~585)가 거느린 연합군으로서 하나님께서 패역한 니느웨를 멸망시키기 위해 예비해두신 심판의 도구들을 가리킵니다(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1절) 아이러니 하게도 후일 바벨론 역시 그 패역함이 극에 달하자 바사와 메대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게 됩니다.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 였더라.”(단5:28,30,31)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2:6) -이는 완벽한 수리시설을 갖추고 있는 티그리스 강조차도 그 수문이 부서지고 급기야는 강물이 범람, 단숨에 니느웨를 물바다로 만드는 등 하나님의 심판 앞에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고로, 앗수르의 도성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을 전면(前面)에 두고 있던 난공불락의 요새였지만, 오히려 그들이 의지하던 천연의 방어무기인 티그리스 강의 범람을 통해 마침내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더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6절)
피의 성(3:1) -이는 ‘피흘린 성읍’이란 뜻으로 니느웨의 죄악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1절)
노아몬(3:8) -이집트어로 ‘파아문’이라고도 불리는 이 도시는 B.C. 663년 앗수르의 앗술바니팔에 의해 점령당한 상애굽의 수도 터베(Thebes)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실 노아몬은, 앗수르에게 점령당하기 전, 이방 종교의 중심지로서 천연 요새의 역할을 하는 나일강으로 둘러쌓여 있었으나 이와 같은 천혜의 도시 터베도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홍수와 그로 인한 범람을 통해) 순식간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장차 니느웨가 겪게 될 멸망에 대한 예표와 상징으로 본문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매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너도 술에 취하여 숨으리라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으리라.”(8~11절)
무엇을 의뢰하고 있습니까?(나2:6, 3:8~11)
*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매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너도 술에 취하여 숨으리라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으리라.”(8~11절)
본문 속 ‘노아몬’은 과연 성읍이었습니까? 이집트어로 ‘파아문’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읍은 B.C. 663년 앗수르의 앗술바니팔에 의해 점령당한 상애굽의 수도 터베(Thebes)를 가리킵니다. 사실 노아몬은, 앗수르에게 점령당하기 전까지, ‘보이지 않는 신’ 아문(Amun/Amon) 숭배의 중심지이자 무려 500여 년 동안이나 그 부귀와 명예를 떨친 애굽 제1의 도시로서 ‘나일강’이라는 천혜의 방어선에 쌓인 난공불락의 요새도시였습니다.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렀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8절 하)
그러나 이와 같은 천혜의 도시 ‘노아몬’도 결국 하나님의 진노, 즉 홍수 앞에서 꼼짝없이 망할 수밖에 없었으며, ‘천혜의 방어벽’이라 자부하던 그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해 나아몬 전체가 삽시간에 물바다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자신이 자랑하던 무거운 머리털 때문에 잡혀 죽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삼하14:25,26)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삼하18:9)
마치 당시 그 누구보다도 달음질에 자신 있었던 아사헬이 결국 그로 인한 과욕 때문에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곳에 스루아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 같이 빠르더라 아사헬이 아브넬을 쫒차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그가 물러가기를 거절하매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의 배를 찌르니 창이 그의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삼하2:18~23)
그런데 선지자 나훔은 장차 어떤 성읍이 이와 같은 노아몬의 전철을 밟아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까? 앗수르의 도성 니느웨입니다. 이는 무슨 말입니까? 천혜의 도시 터베가 (자연 방어벽인) 나일강의 홍수를 통해 순식간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듯이, 니느웨 역시 (자연 방어벽인) 티그리스 강의 범람을 통해 삽시간에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강들 사이에 있었고 물이 둘렀으며 바다가 그 성루를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던 노아몬이 (나일 강 범람 직후) B.C. 663년 앗수르의 앗술바니팔에 의해 점령당하고 만 것처럼, 완벽한 수리시설을 갖추고 있던 니느웨 역시 (티그리스 강 범람 직후) 바벨론의 나보폴라살과 메대의 카카레스 연합군에 의해 패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나아몬은 어느 성의 멸망에 대한 예표와 상징으로 본문 속에 제시되고 있는 셈입니까? 앗수르의 도성 니느웨입니다.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나2:6)
* 누굴 믿고 있습니까? 무엇을 의뢰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20:7)
지금 우리는 무엇을 의뢰하고 있습니까? 누굴 더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혹 애굽의 노아몬이나 앗수르의 니느웨처럼 천혜의 지형지물이나 지정학적 요소, 군대와 병거 등을 더 의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다윗의 아들 압살롬처럼 자신의 빼어난 외모(특히, 가장 큰 자랑거리였던 머리털)를 믿고 자만해 있지는 않습니까?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머리털은 미의 상징이었으며, 특히 머리털의 숱이 많고 빨리 자란다는 것은 남성적인 힘이 많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로 간주되었음) 혹 요압의 동생 아사헬처럼 타고난 신체적 조건만을 자신만만해 있지는 않습니까?
불과 70여 년 전만 해도 앗수르(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거국적인 회개운동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했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3:10)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다시 옛 생활, 즉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기 시작했으며(엡4:22), 급기야 자신들에게 한없는 긍휼과 은혜를 베푸셨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해 패역한 말과 행실 등을 쉬지 않았던 것입니다.
“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자기의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냈기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하니라.”(사36:18~20)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없는 그 은혜와 사랑 등을 베풀어주신 하나님보단 자신의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신체적인 조건, 재능, 학력, 인맥, 가정적인 배경 등을 더 믿고 의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이 같은 행동은 과거 노아몬이나 니느웨, 아사헬과 압살롬 등이 밟았던 그 전철을 고스란히 다시 밟고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20:7)
[하박국]
* 제목: 하박국
이는 ‘껴안은 자’라는 저자의 이름을 따른 것임.
* 저자: 하박국
2차례에 걸쳐 본문이 증거하고 있음. 한편, 저자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으나, ‘시기오놋’(3:1),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3:19) 등 전문 음악용어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레위 자손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1:1)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3:1)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3:19)
* 기록연대: B.C. 612~598년
선지자 하박국이 활동하던 시기는 앗수르가 이미 멸망당하고(B.C. 612년), 갈대아(바벨론) 세력이 근동의 새로운 패자로 부상하던 때로 애굽에 의해 세워진 여호야김(B.C. 609~598년) 때로 추정됩니다. 1장에 등장하는 갈대아 사람은 신바벨론을 말하며, 이들이 강성해져 유다를 침입한(B.C. 605년) 내용이 기술되어져 있으므로, 이때 기록되어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편, 본서에는 바벨론에 의한 유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한 사건처럼 예언되어 있는데 실제로 하박국의 예언 후 그리 오래지 않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말았던 것입니다(B.C. 586년).
* 기록목적:1)비록 악인이 창성하고 의인이 고통당하는 모순된 현실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것들은 일시적인 것일 뿐,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며, 그 섭리 하에 악인은 끝내 심판당하고 만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2)반면, 의인은 그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오직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필요성).
* 기록장소: 유다
* 대상: 유다백성들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 바벨론의 침략을 당한 유다 백성들에게,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 궁극적인 소망을 얻을 것을 권고하고 있음.
* 배경: 바벨론은 B.C. 612년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마저 격퇴함으로써 근동의 절대강자로 급부상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와중에도 유다 악행은 계속되었고, 결국 이후 세 차례의 바벨론의 침입으로 끝내 멸망하고 맙니다.
* 특징:
1)대화체 구성 -기록의 형식이 백성에 대한 예언이 아닌 하나님과 선지자의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음(질의응답의 형식/ 제1장과 제2장).
2)찬송시 -본서의 결론부인 3장 전체가 시편과 비견될 만한 찬송시로 되어 있음.
3)믿음에 대한 강조 -주제 면에서 구약의 여느 책과는 달리 신약적 특징을 드러내고 있음.
4)신앙변증서 -중요한 신학사상을 담고 있는 책으로, ‘어떻게 해서 불의가 선보다 득세할 수 있느냐?’ 등 성도라면 누구라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신앙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음.
* 핵심단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이 말씀은 복음의 핵심으로서 인간 구원 조건이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엡2:8)에 있음을 증거 해 줄 뿐만 아니라 (믿음이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실생활 가운데서 수호해야 할 참 생명의 원천임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즉 비록 도처에 악이 횡행하며 원치 아니하는 환난이 성도들에게 임한다 할지라도 오직 의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확신하는 가운데 참고 인내함으로써 온전히 그것을 성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핵심장: 제3장본장은 하나님과의 두 번에 걸친 질의응답을 통해 성도들이 삶 가운데 제기할 수 있는 신앙의 문제에 대한 답을 주고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본서의 핵심장으로써 모든 신앙의 문제를 해결 받고 그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본서에 나타난 그리스도하박국이 회상하고 있는 바,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환난 가운데서 보호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역사(3:3~15)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 그의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부터 궁극적인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예표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 2:14은 메시야 재림에 대한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 본서의 개요:1. 서론(1:1)
2. 하나님과의 대화(1:2~2:20)
1)첫 번째 질문(1:2~4)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찌 유다의 죄악을 벌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가?’
2)첫 번째 답변(1:5~11)
-갈대아(바벨론)를 심판의 도구로 예비해 두셨다.
3)두 번째 질문(1:12~2:1)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어찌 유다보다 더 불의한 갈대아를 사용하여 유다를 징계하시는가?
4)두 번째 답변(2:2~20)
-유다가 자신들의 죄 때문에 징계를 당하는 것처럼, 갈대아 역시 그들의 죄 때문에 궁극적으로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인데, 그 가운데서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
2. 하박국의 찬양(3:1~19)
세상 역사를 자신의 선하신 뜻대로 주관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대해 깨닫게 된 하박국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제는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인하여 온전히 즐거워하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하나님의 위엄과 심판의 장엄함(3:1~16)
2)믿음으로 인한 기쁨(3:17~19)
* 핵심단어 및 구절, 인물연구
경고(1:1)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맛사’는 ‘짐’이란 뜻으로 하박국이 유다 백성들과 통치자들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얼마나 무섭고 엄중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단어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1절)
갈대아(1:6) -원래 티그리스 강 및 유브라데 강의 하류에 위치한 바벨론 남부 지역(창11:31)을 가리키지만, 바벨론 전 지역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앗수르 제국을 물리치고 대제국을 건립한 신바벨론 제국을 가리킵니다. 한편, 그들은 교만하고 영악한 성격을 지닌 자들로서 끝없는 야심을 채우기 위해 잔인하고도 포악한 행위들을 스스럼없이 자행하는 등 궁극적으로는 인간성이 결여된 야만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유다의 심판 도구로 삼으셨던 것은 당시 유다의 타락상이 얼마나 극에 달하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1:13) -이는 단지 갈대아인들이 유다 백성들보다 훨씬 더 패역했다는 의미일 뿐 실제로 유다 백성들이 의로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1:15) -이는 갈대아인들이 유다 백성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 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세 차례에 걸친 바벨론 포수).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1:16) -이는 갈대아인들이 자신들의 막강한 군사력과 풍부한 재력에 스스로 도취, 결국에는 그것을 우상화했음을 가리킵니다(11절 참조).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인간들입니까?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줄로 모른 채 군사력과 재력 덕 뿐에 여기까지 왔다고 믿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그들처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더욱 믿고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의 신격화 하다시피 하면서 말입니다.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16절)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11절 상)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2:2) -‘판에 명백히 새기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에게까지도 이 계시의 내용을 알려줄 수 있도록 영구보존이 가능한 석판에 새겨두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그 당시 이러한 판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공적인 장소에 계시되었으며, 보관용 판의 경우는 더욱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도록 땅 속에 묻어 두는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한편,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는 말씀은 달려가면서도 기록된 내용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뚜렷하게 새기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2:4) -여기서 그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자신들의 힘을 과신했던 갈대아인들입니다. 한편,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는 구절은 ‘비록 그들이 자신들의 힘만을 과신한 채 거짓되고 교만할지라도’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4,5절)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하) -비록 그러할지라도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이 구절은 하박국서 전체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장차 신약 시대에 가서 꽃 피우게 될 이신득의 사상의 근간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롬1:17; 갈3:11).
참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의 재발견
로마서는 어떤 의미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를 재발견한 서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물론 이 또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창12:3을 재발견한 것임)와 합2:4는 하박국서 전체 주제를 함축한 말씀일 뿐 아니라 신약 시대의 이신득의(이신칭의)의 근간이 되는 말씀이며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음’을 증거 하기 위해 아브라함 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물론 히브리서 기자는 아담의 아들 아벨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논증을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족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3:6~8, 비교 창15:6, 창12:3)
‘믿음으로 구원받는 교리’는 결코 신약시대 사도들의 의해 자의적 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산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담, 아벨과 아브라함 등과 같은 족장시대, 즉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이 범죄 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으로, 신약시대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그럴 듯 해보일지 몰라도 성경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순 그 자체임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아벨은 무엇을 믿었으며 아브라함은 도대체 누구를 믿었단 말입니까? 아담과 아벨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아브라함은 ‘자신의 후손’(그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마1:1)을 오신 예수 그리스도 말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원시복음)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그렇다면 율법은 왜 주어진 것입니까? 인류가 범죄 함으로 더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가 무엇이지 알게 하고자 주어진 것입니다(공동번역). 그것도 한시적, 임시적으로 말입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약속하신 그 자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것들을 온전하게 하실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유효기간은 그리스도의 초림 때까지라고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그러므로 율법은 ‘초등교사’(몽학선생)로 비유되곤 있습니다. 초등교사(몽학선생)이란 본래는 아이가 사고 없이 학교에 잘 오갈 수 있도록 보호하는 수행노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율법이 바로 그런 역할을 감당해왔다는 말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몽학선생)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갈3:24,25)
믿음과 율법, 어느 것이 먼저 주어진 것입니까? 창15:6과 출20장 사이에는 430년이란 세월의 공백이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교리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거꾸로 생각한다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정하신 구원의 방편이요, 율법은 이를 보조하도록 후에 더해진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3:17)
믿음과 율법은 각각 은혜언약과 행위언약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두 언약)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4:22~26)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2:14) -심판의 날이 도래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여호와의 능력과 위엄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서, 선지자 하박국은 본 구절을 통해 장차 완성될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주께 대한 소문(3:2) -이는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알려주신 예언적 계시,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고 갈대아인들을 멸망시키겠다는 내용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2절 상) 한편, 선지자 하박국은 2절 하반절에서 보아 알 수 있듯,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 달라’는 간구와 함께 수년 내에 이와 같은 일들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2절 하)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3:16) -이는 바벨론에 대해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인해 심령에 사무칠 정도로 공포감이 최절정에 이른 상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없으며... 없으며...(3:17) -이는 장차 갈대아인들에 의해 유다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3:18) -이처럼 하박국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장차 유다가 환난을 당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합2:4)
* 비록 도처에 악이 횡행하며 원치 아니하는 환난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니 못하나....”(4절 상)
여기서 그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자신들의 힘을 과신했던 갈대아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1:11 상) 또한 그 당시 유다 사회에서 율법을 해이하게 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게 만들었던 악인들을 가리킵니다.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1:3,4)
그렇다면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는 구절은 어찌 해석해야 합니까? (5절 이하의 내용과 관련하여) ‘비록 그들이 자신들의 힘만을 과신한 채 거짓되고 교만할지라도’, 나아가 비록 도처에 악이 횡행하고 원치 아니하는 환난이 임한다 할지라도, 죄악을 보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된다고 할지라도,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등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4,5절)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연일) 수많은 죄악들을 보며 패역함을 직접 목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겁탈과 강포가 내 눈 앞에서 보란 듯이 벌어지고 악의에 찬 변론과 분쟁 등만이 가득하진 않습니까? 율법이 해이해지며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고 있진 않습니까? 악인들이 오직 자신들의 힘만을 과신한 채 거짓되고 교만한 행동을 일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 도다.”(시12:8)
그렇더라도 낙심하거나 넘어지지 마십시오. 실족하지 마십시오. “나는 거의 넘어질 뻔 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73:2,3)
* 오직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야 합니다.
“...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하)
대신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입니다. 즉, 비록 악인들이 자신들의 힘만을 과신한 채 거짓되고 교만할지라도, 오직 성도는 그의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연일 수많은 죄악들을 보며 패역함을 직접 목도한다 할지라도 오직 그의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고, 겁탈과 강포가 눈앞에서 보란 듯이 자행되고 악의에 찬 변론과 분쟁 등만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며, 말씀이 해이해지며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오직 성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확신하는 가운데 참고 인내함으로써 온전히 그것을 성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의인이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은 하박국서 전체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장차 신약 시대에 가서 꽃 피우게 될 이신득의(또는 이신칭의) 사상의 근간이 되는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3:11)
참고로, 롬1:17 ‘믿음으로 믿음에’(from faith to faith)라는 구절은 과연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선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7절 하반절과 관련해서,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확신하는 가운데(엡2:8) 오직 믿음으로써 그것을 온전히 성취해나가야 함’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구원 받는 것도, 또한 받은 그 구원을 (실생활 속에서) 온전히 성취해 나가는 것도 모두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또는 선물로) 주신 그 믿음에 있으며(엡2:8), 삶 속에서 그 구원을 온전히 성취해나가는 것 역시 (행함을 동반한) 그 믿음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하) /“...믿음의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22)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그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러한 확신 가운데 살아가고 있느냔 말입니다(엡2:8). 혹 그렇지 못하다면 오늘 이 시간부로 확신케 되길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그 구원을 온전히 성취해나가되 오직 믿음으로 그리하고 있습니까?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닌 행함과 결단을 수반한 온전한 믿음으로써 말입니다.
*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3:11)
한편,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모토는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라는 구절을, (다시) 사도 바울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라는 구절을, 하박국 선지자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매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는 구절을 각각 재발견한 것뿐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음’을 증거 하기 위해 아브라함 때까지 거슬러 올라갔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한참을 더 올라가) 아담의 아들 아벨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논증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결국 우리는 이를 통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 교리’는 결코 신약시대 사도들이나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자의적 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산물이 아닌, 오히려 아담, 아벨과 아브라함 등과 같은 족장시대, 즉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이 범죄 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유일한) 구원의 방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아담과 아벨은 무엇을 믿었으며 아브라함은 도대체 누구를 믿었단 말입니까? 아담과 아벨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아브라함은 ‘자신의 후손’(그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즉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마1:1)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원시복음)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 율법이 아닌 ....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그렇다면 율법은 왜 주어진 것입니까? 인류가 범죄 함으로 더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가 무엇이지 알게 하고자 주어진 것입니다(공동번역). 그것도 한시적, 임시적으로 말입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약속하신 그 자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것들을 온전하게 하실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유효기간은 그리스도의 초림 때까지라고 무방할 것입니다(갈3:19).
그러므로 율법은 ‘초등교사’(몽학선생)로 비유되곤 있습니다. 초등교사(몽학선생)이란 본래는 아이가 사고 없이 학교에 잘 오갈 수 있도록 보호하는 수행노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율법이 바로 그런 역할을 감당해왔다는 말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몽학선생)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갈3:24,25)
믿음과 율법, 어느 것이 먼저 주어진 것입니까? 창15:6과 출20장 사이에는 430년이란 세월의 공백이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교리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거꾸로 생각한다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정하신 구원의 방편이요, 율법은 이를 보조하도록 후에 더해진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3:17)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말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3:17,18)
*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17절)
이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16절의 내용으로 보아) 장차 갈대아, 즉 바벨론 군대에 의해 유다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16절 중) 실제로 유다와 그 도읍 예루살렘은 하박국의 예언으로부터 불과 20여 년 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 왕의 제 구년 열째 달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더니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성이 함락되니라 예루살렘이 함락되매.”(렘39:1,2)
한편, 본절은 바벨론 군대가 유다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 바로 그 날에(16절) 유대 땅이 어느 정도까지 파괴되고 황폐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까? 팔레스타인의 주요 과목들은 물론 가축, 밭의 소출에 이르기까지 삶의 거의 모든 터전이 강탈당하거나 파괴될 것입니다. “...무성하지 못하며...없으며...없으며....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17절)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그와 같은 처지나 상황에 놓여 있지는 않습니까? 혹 그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상념 속에 잠겨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까지 일궈온 삶의 터전 대부분을 한순간에 빼앗기거나 잃을 수 있다는 그런 걱정과 근심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힘을 내십시오. 한순간이라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앞서간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처럼 말입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1:20,21)
*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8절)
유다와 그 백성들이 장차 당하게 될 환난을 (묵시를 통해) 알게 된 선지자 하박국의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마치 창자가 심하게 요동치고 뼈가 타 들어가는 것 같은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으며, 입술은 몰론 온 몸이 떨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16절)
혹 우리는 어떻습니까? 뜻하지 않는 환난과 예기치 못한 문제들로 인해 창자가 흔들리고 뼈가 썩어 들어가는 듯한 고통 속에 있지는 않습니까? 입술은 물론 온 마디 마디가 흔들리고 떨리는 것 같은 두려움 속에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더라도 힘을 내십시오. 한순간이라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본문 속 선지자 하박국처럼 말입니다.
한편, 선지자 하박국은 어떻게 이 같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이와 같은 고통과 불안 등을 떨쳐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까? (장차 유다가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을 알고도, 불과 20여 년이 채 안 되어서 바벨론에 의해 패망하게 될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껴안은 자’라는 자신의 이름의 의미처럼) 여호와 한 분만을 꼭 껴안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구원의 하나님 한 분만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반드시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말입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8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선지자 하박국처럼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꼭 붙들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어떠한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직 구원의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젠가 우리를 건져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승리케 하실 것을 확신한 채 말입니다.
왜 입니까? 오직 이와 같은 성숙한 믿음만이 모든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각종 고통과 불안 등을 떨쳐 버릴 수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많고 많은 ‘없는 것들’ 가운데서도 ‘있는 것’을 발견하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성숙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스바냐]
* 제목: 스바냐
이는 ‘여호와께서 그를 감추셨다’는 뜻으로 저자의 이름을 따른 것임.
* 저자: 스바냐본서의 내적증거(1:1). 한편, 스바냐는 유다의 최고 현황이었던 히스기야의 4대 손으로(1:1), 요시야 왕(B.C. 640~609)의 통치초기에 활동했습니다(선지자 예레미야와 동시대에 활동). 기록상 스바냐는 요시야 왕의 궁궐에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이와 같은 예언 활동은 고스란히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 반영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기록연대: B.C. 640~622년경.저자가 요시야 왕의 재위기간(B.C. 640~609년) 중 활동한 것과(1:1), 우상숭배에 대한 책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B.C. 622년)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 기록목적:
1)심판의 날인 ‘여호와의 날’을 선포함으로써 그 회개를 촉구하기 위하여.
2)그와 같은 심판 중에서도 회심한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구원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도록.
* 기록장소: 예루살렘
* 대상: 유다 백성들
요시야 왕의 등극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전의 악습을 버리지 못한 예루살렘과 인근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 주제: 여호와의 날* 핵심장: 제3장
‘여호와의 날’이 지니고 있는 심판(3:1~8)과 구원(3:9~20)의 이중적 성격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보임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지난날의 행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무언의 시각적 호소를 강력하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 배경: 당시는 악한 왕 아몬의 시대가 끝나고 요시야의 시대가 새롭게 시작한 때로 아직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이전이었습니다.
* 특징:
1)여호와의 날 사상 -여호와의 날의 심판과 구원의 양면적 성격을 자세히 부각되어 있음.
2)간결하고 사실적인 문체 -수식어를 거의 사용치 않고 운율성 역시 강조하고 있지 않음.
* 본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여호와의 날’에 있을 우주적인 심판과 그 참상(1:3,15)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것으로서 예수께서도 이에 대하여 언급하실 때 본서를 두 차례 인용하신 바 있습니다(마13:41; 24:29).
* 본서의 개요:
1. 서론(1:1)
2.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1:2~3:8)
유다의 죄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 및 그의 백성을 대적한 열방에 대한 보응적 심판이 동시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심판이 전 우주적인 것임을 증거함).
1)유다에 대한 심판의 선포(1:2~13)2)여호와의 날에 있을 하나님의 진노(1:14~18)
3)회개의 촉구(2:1~13)
4)열국에까지 이를 심판(2:4~15) -블레셋, 모압과 암몬, 구스, 앗수르
5)예루살렘의 불의(3:1~8)
3. ‘여호와의 날’에 임할 구원(3:9~20)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베푸시고 사람들에게 소망을 안겨 주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증거 하는 단락으로서 심판 후 도래할 영광스러운 메시야 왕국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1)이방인의 구원(3:9)2)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3:10~20)
* 핵심단어 및 구절, 인물연구
그마림(1:4) -‘검은 옷을 입은’이란 뜻을 지닌 말로서 왕의 임명을 받아 우상숭배를 주도했던 제사장을 의미합니다(왕하23:5; 호10:5).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주위의 산당들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별 떼와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왕하23:5)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히, 그마림)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호10:5)
말감(1:5) -‘밀곰’(왕상11:5) 또는 ‘몰록’(왕상11:7)으로 불리기도 하는 암몬 족속의 신으로서 ‘저들의 왕’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솔로몬 왕이 후궁들을 위해 말감의 산당을 지어 줌으로써 말감 숭배가 시작(왕상11:7,8,33) 이후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이를 소멸시킨 바 있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2:1) -이는 유다 백성들이 자신의 범죄에 대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3:5; 렘6:15) 그 잘못을 뉘우칠 줄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겸손(2:3) -히브리어 ‘아나와’로 ‘내리 누르다’, ‘굽혀놓다’에서 유래, 결국 겸손이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전인격을 복종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폐하게 하여(2:13) -‘앗수르의 멸망’이 미래형으로 언급된 점으로 보아 아직 앗수르(니느웨)의 패망 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가 북쪽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폐하게 하여 사막 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3:9) -이방인의 구원이 언급된 구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잠잠히 사랑하시며(3:17) -이는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하고, 위대하며, 자기희생적인 영원한 사랑을 뜻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17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슥3:9~20)
* 요시야의 시대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습1:1)
스바냐는 유다 왕 요시야의 재위기간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절 상) 요시야, 그는 과연 어떤 왕이었습니까? 유다의 마지막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인물로서 8세에 즉위, 무려 31년간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되 좌로나 우로 치우침이 없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심일 년 동안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대하34:1,2)
한편, 그는 (아직) 어린 나이였던 16세 때, 즉 재위 8년에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기 시작했고, 12년째부터는 (나이 스물에)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 심지어 므낫세와 에브라임, 시므온, 납달리 등 북이스라엘의 옛 지경에 이르기까지 바알과 아세라 등을 훼파하는 등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아직도 어렸을 때 곧 왕위에 있은 지 팔년에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제십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하게 하여 그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거하여 버리매....”(대하34:3~)
특히, 그는 재위 18년 (26세 때)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던 중 그곳에서 율법책, 즉 모세오경을 발견,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종교개혁 작업에 착수, 범이스라엘적인 종교개혁 단행은 물론 (선지자 사무엘 이후) 가장 성대한 유월절 준수를 하기에 이릅니다. “요시야가 왕위에 있은 지 열여덟째 해에 그 땅과 성전을 정결하게 하기를 마치고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여 하여 아살랴의 아들 사반과 시장 마아세아와 서기관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를 보낸지라 ....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헌금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대하34:8,14)
오래전 한 무명의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것처럼 말입니다.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 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왕상13:1,2)
*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까웠으니 너희는 돌이키고 회개하라!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오는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1:14~16)
당시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선왕(先王) 므낫세와 아몬의 영향을 받아 각종 우상 숭배와 죄악에 젖어 있어, 유다 멸망이 기정사실(旣定事實)화 되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를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 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들을 버려 그들의 원수의 손에 넘긴즉 그들이 모든 원수에게 노략거리와 겁탈거리가 되리니.”(왕상21:13,14)
결국 하나님은 누굴 보내 유다에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경고하게 하셨습니까? 선지자 스바냐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스바냐는 유다의 최고 현황이었던 히스기야의 4대 손으로(1:1), 요시야 왕(B.C. 640~609)의 통치초기, 즉 B.C. 622년 종교개혁 이전에 활동했으며, 이와 같은 스바냐의 활동에 힘입어 요시야는 몇 년 뒤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기록상 그는 요시야 왕의 궁궐에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이와 같은 예언 활동은 고스란히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 반영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편, 요시야의 재위 기간 선지자 스바냐 외에도 여선지자 훌다, 예레미야 등이 함께 활동했는데 스바냐는 요시야의 통치초기, 즉 종교개혁 단행 이전에, 여선지자 훌다는 통치 중반부(종교개혁 당시)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물론 재위 13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시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서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왕하22:14)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지 십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렘1:2,3)
사실 말이 쉽지 종교개혁 단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시야 왕이 비록 나이 16세 때부터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왜 입니까? 히스기야 이후 무려 57년 동안이나 므낫세, 아몬 두 왕에 의해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에서 온갖 우상숭배와 악행들이 스스럼없이 자행되어 왔으며, 백성들 역시 그 죄악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젊은 개혁자 요시야에게 어떤 사람들을 붙여주셨습니까? 선지자 스바냐, 훌다, 예레미야 등입니다. 다윗에게 선지자 사무엘과 나단(대상17:1,2), 갓(대상20:9) 등을, 여호사밧에게 선견자 예후를(대하19:2), 요시야에게 제사장 여호야다와 그의 아들 스가랴를(대하24:2,20), 웃시야에게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를(대하26:4,5), 히스기야에게 선지자 이사야(사1:1)를, 스룹바벨에게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스6:13), 느헤미야에게 하자 겸 제사장 에스라를(느8:1~) 붙여주셨듯이 말입니다.
*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신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또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바냐를 통해 무엇을 말씀해주셨습니까? 전(全)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3:9~20). 물론 이는 어느 때에 성취될 것입니까? 그 때, 즉 여호와의 날입니다(3:9,11,16,19,20). “그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3:9) 그 때가(또는 그 날이) 되면 어찌 된다고 하셨습니까? (유다의 죄악으로 인해 임하는) 진노 중에서도 남은 자가 있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물론 많은 이방인들까지도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이 같은 회복의 말씀은 ‘거국적인 종교개혁의 단행’이라는 중차대한 과업을 앞에 둔 유다 왕 요시야에게 역시 주어진 것임이 분명합니다(물론 본문은 혹자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두려워하거나 그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말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16절 하) 왜 입니까?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즉 그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와 함께 하시고,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17절 상)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그 하나님께서 그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그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그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17절 하)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겠느냔 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선 우리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