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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과 핵정치
은호기(시사평론. 샌디에이고 거주 )
처음부터 잘못 쓰여진 핵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떨어뜨렸다. 9만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론 도시는 깨끗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사흘 후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또 하나의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8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역시 도시는 완전하게 파괴되었다. 이로써 희생을 줄이고 전쟁을 앞당겨 끝낼 수 있었다고 미국은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1943년 6월 이태리 항복에 이어 1945년 5월에는 독일이 항복, 연합군의 승리는 결정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얄타협정(1945.2.11)에 의하여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기로 이미 약속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항복은 시간 문제이었다. 이러한 막바지 상황에서 구태여 원자탄까지 쓸 필요가 있었겠는가, 강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이 끝나기 전에 원자탄을 실전에서 실험해보고픈 조급증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더우기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이 우라늄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비하여 나가사키에 떨어진 것은 플루토늄으로 만들어진 원자탄이어서 실험의 의혹은 더욱 짙어진다. 그리고 전쟁수행의 총지휘부가 있는 동경이 아닌 지방도시를 선정한 것도 시위용폭격이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끝으로 인종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미국이 아무리 다급하였다 하더라도 백인국가에 원자탄을 쓸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다. 그간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일본이었기 때문에, 바꿔 말하면 백인 아닌 유색 인종국가이었기에 서슴없이 원자탄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소련의 핵폐기물 방치 및 처리도 유럽쪽의 북극해를 피하고 극동의 바다에 버린것도 이런 시각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미국은 전쟁을 빙자하여 유색 인종국가인 일본에서 각기 다른 두가지의 원자탄을 실전에서 실험해 본 것이다. 핵무기는 이와같이 강대국에 의하여 처음부터 잘못 사용 되어졌으며, 이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서도 미국은 심심찮게 원자탄 사용을 검토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핵무기와 국제정치
제 2차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으며, 미국의 핵무기 개발은 핵무기의 중요성을 국제사회에 인식시켰다. 핵무기가 강대국의 기본요건으로 등장한 것이다. 세계 여러나라들이 원자탄 개발에 뛰어들었다. 특히, 식민지 재분할전쟁의 성격이 강했던 세계대전의 결과가 미 · 소 양 진영을 주축으로 하는 냉전구조로 개편됨에 따라 소련의 국제적 지위와 역할이 강화되었거니와, 소련은 1949년 8월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원자탄 보유국이 되었다.
영국과 불란서도 원자탄 개발을 서둘렀음은 물론이다. 영국과 불란서는 잃어버린 식민제국의 위신을 되찾고, 대전중에 뼈저리게 경험하였던 미국에 대한 의존도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서 자기들의 몫을 지키기 위하여 원자탄개발을 서둘렀다. 핵무기는 곧 강대국의 상징물로 인식되었으며, 핵무기 보유 여부가 국가의 수준을 결정하는 척도로 생각되었다. 영 · 불 모두 원자탄 개발을 국책사업으로 정하고 박차를 가한 결과, 영국은 1952년에, 그리고 불란서는 좀 늦은 1960년에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불란서가 이토록 늦어진 까닭은 미국이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핵무기가 국제정치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는 중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근대사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잠자는 사자' 가 '썩은 돼지' 로 확인되면서 영,불,독 등 서구열강은 물론 세계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찢어 발기던 역사, 이런 처참한 시련을 국복하고 중국인 특유의 뚝심과 방식으로 인민혁명을 성공시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중국은 서방측, 특히 미국의 냉대와 외면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으며 한국전쟁 참전을 이유로 국제연합으로부터 '침략자'로 규정받기도 하였다. 게다가 1960년대에 접어 들면서 소련과도 틈이 생기면서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외로운 투쟁을·하여야만 하였다. 그것은 다른 강대국과는 달리 아세아, 아프리카의 여러나라 즉 비동맹국들과 연대, 비동맹국가들의 이익을 대변하였던 결과이기도 하였다.
중국은 비동맹국가들의 입장, 즉 핵무기 전면철폐의 입장을 바꿔 1957년 소련과 핵무기 개발 협정을 맺고 핵무기 개발을 서둘렀다. 그러나 1960년 소련이 전면 철수하는 바람에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 밖에 없었으며, 1964년 10월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중국의 핵개발과 관련하여 중국계 미국인 핵물리학자 양 씨의 귀국을 둘러싼 이야기가 자뭇 흥미롭다.) 이로써 중국은 미,소, 영,불에 이어 핵보유국이 되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드디어 1972년 국제연합 상임이사국이 되면서 정식으로 강대국의 모습을 가지고 국제사회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핵개발은 국제적 지위향상을 노리는 후발국가들에게 열병처럼 번져 나가게 되었다.
군비경쟁과 군축문제
제 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뼈 아프게 겪었던 세계는 독가스, 화학, 생물학적 무기 사용의 전면금지를 결정하였고 (19225년 제네바 의정서) 군비를 국가의 안전이 보장되는 '최저수준' 으로 감축할 것에 합의하였으나 (국제연맹규약) 끝내 제 2차 세계대전을 또 다시 겪어야만 했다. 앞서 말한대로, 2차대전은 원자탄으로 막을 내렸고 원자탄의 실전 사용은 세계를 핵무기 경쟁시대로 몰아갔다.
당연히 미국은 핵무기 경쟁의 선두주자 자리를 늘 차지하였다. 원자탄에 이어 미국은 1951년 수소탄 개발에 성공했고 뒤이어 소련이 1953년에, 영국이 1957년에, 중국이 1967년에, 불란서가 1968년에 각각 수소탄을 개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성자탄, 코발트탄을 개발하기에 이르렀으며, 핵무기 운반수단(미사일)도 이에 따라 급속히 개발 · 발명되어져 왔다. 특히 미 · 소간의 군비경쟁은 우주 전쟁계획에까지 이르고 있어, 인류는 말할 것도 없고 지구 자체가 폭발해 버릴 위험마저 안고 있다. 여기에는 '뱁새가 황새 걸음을 따라가다가 …' 하는 식의 미국의 의도가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전쟁의 참화로부터 앞으로의 세대를 구하기 위하여' 국제연합이 창설되었으나, 평화와 군축문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속수무책이었다. 국제연합은 이사회 중심으로 운영되도록 조직되었으며, 이사회는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이 좌지우지하게 되어 있는데, 상임이사국간에 (특히 미 · 소간에) 불신이 깊고 이해관계가 서로 엇갈려 있기 때문이다. (상임이사국 다섯나라가 핵무기 보유국임을 유의해야 한다.)
이런 사정으로 군축문제는 권고기능만을 가진 유엔 총회나 그 하부조직에서 논의될 수 밖에 없었으며, 그간 여러가지 형태로 제네바에서 군축회담이 열렸으나 형식적이고 선전적인 효과뿐이었다. 또한 미 · 소 양국간에 이루어졌던 전략무기 제한협상(SALT)도 질적 내용보다는 사소한 양적제한에 대한 입씨름으로 일관되어 왔다. 강대국은 강대국대로 핵무기를 세계 지배도구로, 미 · 소의 초강대국은 핵우산론을 가지고 세계를 양분, 지배를 고집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대국의 지배욕구를 만족시키면서 또한 세계여론을 받아들인다는 최소공배수적인 제안과 결정이 곧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nal Atomic EnergyAgency, IAEA)와 「핵환산금지조약」(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NTP)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확산금지조약(NPT)
1954년 미국이 비키니섬에서 실행한 대형 핵실험은 그 위력과 생태계 파괴력의 규모로 인해 세계의 각성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쉬바이쳐, 러셀, 아인쉬타인 등 세계 저명인사들의 항의가 거세게 일어났으며, 중국, 인도를 중심으로 한 비동맹국들의 핵실험 전면금지운동이 유엔을 무대로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56년 10월에 창립된 것이 국제원자력기구이다. 원자력을 전쟁목적이 아닌 의학, 농업, 산업 등에 평화적으로 이용하고 이를 촉진,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립된 유엔 기구이다. (1946년 유엔에 원자력위원회를 설치한 바 있었으나 별성과없이 1952년에 해체 되었다.) 따라서 핵무기를 국제관리하에 두려는 목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다가 핵무기가 급속도로 확산 될 기미를 보이자 이를 우려한 미· 영 · 소 등 강대국(핵보유국)이 1968년 7월에 핵확산금지조약을 제안, 1970년 3월에 효력을 발생함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가 핵확산금지조약을 관리하는 기능을 맡게 되었다. 핵확산금지조약은 처음부터 차별조약이라하여 인도 등이 거부하는 소란속에서 출발하였다. 즉, 1967년 1월 1일을 기준으로하여 그 이전에 핵무기를 실험한 나라를 핵보유국으로 정하여 핵보유국의 핵은 인정되는 반면 여타의 나라로 핵무기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데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핵확산금지조약은 1기존 핵무기보존국이외에 비핵국들의 핵무기 재조 및 취득금지(I,Ⅱ 조) 2조약체결국간의 성실한 핵군축교섭의 진행(Ⅲ 조) 3핵의 평화적 이용촉진(Ⅳ,V 조) 4비핵보유국의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수용(V 조)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강대국은 핵군축교섭을 '성실하게' 하며,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 촉진하는데 '성실성' 을 보여야 하는 반면, 비핵보유국은 핵무기를 개발, 제조, 반입, 보유할 수 없으며 사찰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와같이 강대국들은 성실의무만 있어 해도그만, 안해도 그만이지만 (실제로 성실히 해 온적이 없다.) 약소국은 강제로 사찰을 받고 제제를 받아야하는 의무규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어 불평등하기 그지없는 조약이다.
또한 형식면에서, 참가국들의 동의없이 가입과 탈퇴가 가능한 다자간 개방조약일 뿐더러, "조약체결국은 이 조약의 대상이 되는 사항에 관한 비정상적인 사태가 자국의 최고이익에 위해가 된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주권을 행사하여 탈톼할 권한을 갖는다."(X 조)고 규정하고 있어 핵보유국들이 언제든지 탈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운용면에서도 편파적이라는 지적과 불만이 따르고 있다. 단적인 예로, 미국이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을 지원하여 이스라엘이 200여 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도 이스라엘의 핵사찰 문제는 거론도 되지 않는데 비하여 이라크과 북한에 대해서는 미국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어, 국제원자력기구나 핵확산금지조약이 미국의 편의대로 –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핵확산금지조약은 불평등한 조약일 뿐더러 불완전한 조약이기도 하다. 현재 가입국이 154개국에 이르고 있지만 핵보유국 또는 가능국으로 분류되고 있는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브라질, 알제리, 남아연방 등이 가입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중국은 가입은 하고 있으나 (91년가입) 아직 서명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25년째인 1995년에 일단 효력이 만료되기로 되어 있어 앞으로의 일이 불투명한 상태이다.
지구와 인류의 파멸을 막고 진정한 세계평화를 원한다면, 앞으로의 조약은 핵보유국의 핵무기부터 전면 폐기되어야 하며, 최소한 핵보유국이 비핵보유국을 핵무기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담겨져야 할 것이다.
미국의 예방적 선제공격론
불행하게도 국제연합은 세계기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한채 미국의 뜻대로만 움직여 온 감이 없지 않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유엔은 미국의 국제적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방편으로 늘 쓰여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유엔의 기능과 강제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미국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중동전쟁에 관한 유엔결의안 제242호와 제318호를 이스라엘이 묵살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가 된다.) 따라서 미국은 직접 물리력을을 사용하기 전에 절차적으로 유엔을 사용해오고 있다.
후발국가의 핵무기개발에 대한 미국의 정책도 대체로 이러한 절차와 방식을 따르고 있다. 안전보장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여러가지 제제조치를 취하고, 그래도 효과가 없을 때엔 예방적으로 선제공격을 하여 아예 화근을 없앤다는 전략이 곧 예방적 선제공격론이다.
이러한 예방적 선제공격은 이미 1981년 6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에 있는 원자로를 기습공격케 함으써 실험이 끝난 셈이다. 따지고 보면 이라크전쟁도 후세인의 핵무기개발을 미리서 막는다는 목적이 석유자원 확보문제와 더불어 중요하게 작용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의 핵무기개발에 대한 예방적 선제공격론이 지난90년부터 꾸준히 들먹거려지고 있다. 북한측 주장에 의하면, 미국과 한국은 이미 지난 1990년 8월에 각종 전투기와 수송기를 동원, 북한을 기습공격하는 합동훈련을 마쳤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노태우정권의 이종구국방장관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엔테베작전'의 감행을 넌즈시 말한바 있으며, 미국은 이러한 방법이 '하나의 선택사항'임을 확인한바 있어 주목되고 있다. 특히 최근의 움직임–핵사찰의 강요, 유엔 이사회에의 제소등 일련의 조치가 미국의 선제공격을 위한 수순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하고 있다.
북한의 핵 무장은 일본의 핵무장을 자극하고 일본의 핵무장은 곧 미국의 핵우산정책으로부터의 탈퇴를 의미하여, 미국과 소련의 핵균형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는 동북아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깨트린다는 미국의 논리에서 출발한 물리적 공격론이다.
이러한 미국의 선제공격론이 세계평화를 과연 보장할 것이며 핵무기 확산방지에 얼마만큼 기여 할 수 있는가를, 미국의 시각아닌 세계적 시각에서 따져 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핵민족주의와 한반도
원자로의 보급이 보편화됨에 따라 핵무기의 세계화는 필연적이라 하겠다. 기존의 핵보유국의 양산화는 몰론 일본,독일을 비롯하여 핵보유국은 급격히 늘어날 전망이다.
이미 한국은 지난 1970년대에 핵무기 개발에 착수. 상당한 진전을 보았으나 미국의 압력으로 어쩔수 없이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핵무기 개발 중단과 관련, 책임교수였던 이모 박사가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이런 쓰라린 경험을 가진 한국에서 요즈음 핵민족주의가 조심스럽게 거론 되고 있다.
지난 3월 15일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는 "우리도 독자적인 핵주권을 확보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조심스럽게 거론되었는가 하면, 3월 20일에 열린 한반도 비핵화 세미나에서 한 교수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한국은 핵무장을 고려해야'한다면서 공개적으로 여론화시켜 여론에 바탕을 둔"독자적인 핵정책" 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서 북한의 핵무장을 꼭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볼 수있겠느냐하는 소수의 의견도 있는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강대국이 핵을 가지면 평화수단이 되고 약소국이 핵을 가지면 전쟁수단이 된다는 미국의 논리를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남아연방의 핵무기 폐기 이유가 극명하게 보여주듯, 백인이 핵무기를 가지면되고 유색인종은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논리도 마땅히 거부되어야 한다. 인류의 역사는 불행히도 강대국이 그리고 백인국가가 대부분 전쟁을 일으키고 파괴하여왔음을 상기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렇긴 하지만, 지금은 한반도의 핵무기 개발을 논의할 때가 아니라 생각한다. 핵무기 개발은 전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그리고 전민족의 장래를 고려하여 결정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선은 분단문제 해결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줄 안다. 자칫, 어느 한쪽의 핵무기 개발은 분단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국제관계를 흐트러 놀 가능성마져 없지 않다.
분단문제를 해결하면서 민족의 자주력을 기르고, 그 자주력의 바탕에서 민족의 장래를 가늠해 볼 일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영세중립국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핵무기를 가질 것인가가 되지 않을까.
1993년 5월 미주현대불교 제 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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