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양희용
유월은 남동풍을 따라 올라온다. 무더위를 알리는 후덥지근한 바닷바람을 타고 오면서 봄 내음과 색깔을 하나하나 지워나간다. 야산과 들판, 시가지마다 연중 한 번 찾아오는 귀빈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다. 화려한 장미와 수국이 선봉에 서고 초록과 연두색 옷으로 분장한 가로수들이 사열을 받기 위해 몸을 곧추세운다.
햇볕이 따갑고 온도와 습도가 오르지만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는 바쁘게 활동한다. 나무는 흘러가는 구름을 낚아채기 위해 높이를 키우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몸피를 치장하며 신록의 계절을 선도한다. 이파리와 뿌리에 기생하는 작은 곤충들은 생존과 종족 번식을 위해 목숨을 걸고 밤낮없이 영역 다툼을 벌인다. 여름 철새들은 잎이 무성한 가지 사이에서 둥지를 치고 새끼를 키우느라 동분서주한다. 숲속의 생기와 활력이 햇발을 따라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들판에는 돌복숭과 오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리고 보리와 밀은 토실토실 익어간다. 땀 흘리며 일한 대가가 수확의 기쁨으로 이어진다. 보릿고개의 고통이 사라진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늙은 농부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뼈저린 아픔으로 남아 있다. 잠시도 쉴 수가 없다. 모내기와 김매기를 도와주려고 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시골집으로 달려온다. 모처럼 사위와 며느리, 손주까지 다 모인다. 고단한 노동은 가족들의 화합과 가을철 황금빛 들판에 대한 희망을 만들어 준다.
유월 중순, 아내와 함께 처가에 갔다. 도라지와 고추밭에 애벌 김매기를 끝낸 후, 돌복숭 30㎏을 수확해서 트렁크에 싣고 돌아왔다. 서너 번 세척 하고 말린 후, 돌복숭과 설탕의 비율이 1:1이 되도록 두 개의 단지에 나누어 담갔다. 6개월이 넘는 숙성 기간이 지나면 몸에 좋다는 돌복숭청淸이 완성된다. 요리할 때 조금씩 넣어 먹으면 특유의 새콤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몇 달간 공을 들인 돌복숭청을 자식과 친인척에게 나누어 주는 아내의 표정은 밝다. 유월은 나눔의 기쁨을 얻기 위해 정성을 담그는 달이다.
도심의 유월은 청춘의 활력으로 시작된다. 시내와 대학가에 가보면 건강한 몸매가 드러나는 시원한 복장, 여름용품 세일 행사장에 북적거리는 캠핑족,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손에 든 채 바쁘게 사무실로 들어가는 풍경에서 여름의 전초병, 유월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다.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젊은이들도 눈에 띈다. 자신의 미래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비지땀을 흘리는 라이더와 택배기사, 박봉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젊은 경찰과 소방관, 군인들은 마음으로 유월을 느낀다. 열심히 일하고 즐기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청춘은 참 아름답다’는 문구가 떠오른다.
‘아름답다’는 ‘감탄을 느끼게 하거나 감동을 줄 만큼 훌륭하고 갸륵하다.’라는 뜻이지만, 조선 시대 수양 대군이 세종의 명을 받아 지은 《석보상절》에는 불교적인 해설이 실려있다. ‘아름답다’의 어원 ‘아(我)답다’는 ‘나를 뜻하는 아(我)다운’이란 말이다. 즉, ‘나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석한다. 자신의 가치를 존중하고 일상생활을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부모를 공양하고 자식을 부양하느라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살아온 기성세대의 삶도 나름 가치와 의미가 있지만, 개성을 중시하고 젊음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MZ세대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면서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스러운 것은 6·70대 노인들의 마음속에도 미약하나마 유월의 청춘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월은 가슴 아픈 달 이기도 하다.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발발했고, 민주화를 위한 유월 항쟁이 일어났다. 많은 젊은이가 조국과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졌다. 그들은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들딸이고, 가장이고, 형제자매였다. 마지막 눈을 감기 전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바람은 무엇일까. 숭고한 희생정신을 가는 세월 보내듯 지나간 역사의 일부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슬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는 과연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도 유월은 애달픈 달이다. 스무 해 전 현충일 전날,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보다 마흔 해 전, 유월 중순에 연년생이던 일곱 살 남동생이 심한 열병을 앓다가 눈을 감았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가난이 원인이었고, 양지바른 언덕의 애기무덤에 묻었다고 들었다. 동생이 보고 싶으면 집 근처 야산으로 뛰어가 함께했던 전쟁놀이와 달리기 시합을 혼자 하다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돌아왔었다. 나를 잘 따랐던 60년 전의 동생 얼굴이 요즘 왜 자꾸 가물거리는지 모르겠다.
동생이 살아있다면 나의 삶에도 적잖은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동생은 세상을 떠나면서 나에게 ‘막내’라는 계급장을 넘겨주었다. 동생이 물려준 자리 덕분에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는 혜택을 누렸고 지금까지 무난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운명인지 팔자인지 모르겠지만 동생의 희생이 나의 성장 과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어머니 제삿날은 있지만, 동생의 기일은 없다. 창밖의 먼 산을 바라보며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달래본다.
1년 열두 달 중 사연이 없는 달은 없다. 그중 유월은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달이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처럼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나누어야 한다.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가 유월 하순에 있다. 열심히 일한 사람들에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넉넉하게 주려는 숨은 뜻이 6월 속에 담겨 있다.
유월은 일 년의 중심이며 반환점을 돌아가는 달이다. 연초에 작심삼일로 포기했던 계획이나 목표를 점검하고 새출발을 할 수 있는 시점이다. 마라토너는 반환점을 돌면서 물병의 물을 마시지 않고 머리 위로 쏟아부으며 다시 한번 다짐한다.
‘끝까지 멈추지 말고 달리자!’
《수필과비평》 신인상(2015). 부산수필문인협회 사무국장.
금샘문학상수필 대상, 부산수필가문학상, 신곡문학상 본상 등.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및 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수필집 『빗방울에 갇힌 시간』 외 4권. 선집 『꽃산 두레』
첫댓글 올 해 6월에는 좋은 추억이 보태지기를 바랍니다.
홍보국장님.
선생님도 화이팅하면서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양희용 사무국장님.
아픈 기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유월>의 글 감명 깊이 잘 읽었습니다.
아무쪼록 장도에 행복하시기를바랍니다.
이용수 선생님.
반갑습니다. 댓글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도 늘 건강하게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