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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아우구스티노(8.28)
아우구스티노(8.28)
성인명 아우구스티노 (Augustine)
축일 8월 2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교회학자, 교부
활동지역 히포(Hippo)
활동연도 354-430년
같은이름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오스틴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이교도로서 로마 제국의 관리인 아버지 파트리키우스(Patricius)와 그리스도교 신자인 어머니 성녀 모니카(Monica, 8월 27일)의 아들로 354년 11월 13일 아프리카 누미디아(Numidia) 지방의 타가스테(Tagaste, 현 알제리 북쪽의 수크아라스[Souk Ahras])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타가스테와 그 근처에 있는 마다우라(Madaura)에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는데, 370년에 법률가가 될 꿈을 안고서 수사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카르타고(Carthago)의 대학교에 들어갔다. 이때 그의 나이는 17살이었는데, 여기서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여 그의 부친이 항상 소중히 여기던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를 낳았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여러 지방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생활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는 점차 철학에 흥미를 갖다가 존재 문제, 특히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을 기대하고 373년경 마니교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타가스테와 카르타고 등지에서 10여 년간 교사 생활을 한 후 383년에 로마(Roma)로 가서 수사학교를 세웠으나 학생들의 태도 때문에 크게 실망하다가 384년 가을부터 밀라노(Milano)의 수사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그는 신플라톤 철학과 밀라노의 주교인 성 암브로시오(Ambrosius, 12월 7일)의 설교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성 암브로시오의 강의를 통해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은유적 또는 영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배웠다. 또한 로마와 밀라노까지 따라와 아들의 회심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던 성녀 모니카의 영향으로 심경의 변화를 가져왔다. 성 암브로시오는 아들 때문에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성녀 모니카를 만나 “안심하십시오. 그런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둔 아들은 결코 멸망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로 위로와 확신을 주기도 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한편으로는 명예, 재산, 결혼 등 현세적 문제로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고 싶은 소망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하지만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정원을 산책하다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라고 반복해서 외치는 신비로운 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쳐 읽어 본 것이 사도 성 바오로(Paulus)의 로마서 13장 13절의 말씀이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래서 그는 386년 8월 교수직을 그만두고 친구인 성 알리피오(Alypius, 8월 15일)와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지도로 교리를 받고 387년 4월 13일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에 밀라노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던 중 로마 근교 오스티아(Ostia) 항구에서 일생을 자신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를 열병으로 잃고 말았다. 타가스테로 돌아온 뒤에는 어린 아들마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아들을 잃은 성 아우구스티노는 큰 슬픔 속에서 하느님의 뜻으 찾으며, 아버지의 유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일종의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다가 391년에 자신의 소망과는 달리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5년 후에 히포 레기우스(Hippo Regius, 오늘날 알제리 동북부의 항구 도시인 안나바[Annaba]의 옛 이름으로 보통 히포로 부른다)의 주교 발레리우스(Valerius)가 선종하자 그의 후임 주교로 선임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북아프리카의 히포 교구에서 그리스도교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주교 중의 한 사람으로 거의 35년을 참된 사목자로 헌신했다. 그는 사목자의 권위를 행사하되 백성들의 복리와 행복을 위하여 사용했고, 대성당의 성직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으며, 엄격한 규율 아래 모든 일을 행했고, 주일과 축일에는 강론을 반드시 하고 직접 예비신자 교리를 담당했으며,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의 재정지원을 물색하는 등 사회 정의를 위해서도 주교직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글을 쓰는 데 힘썼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교구 신자들과 도나투스파(Donatism) 이단자들에게도 반박문을 써 보냈다. 특히 마니교(Manichaeism)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를 반박하는 강연회에는 너무 많은 청중이 몰릴 정도였다. 이외에도 삼위일체와 은총론에 관한 책도 썼는데, 그의 연구 대상은 매우 광범위했다. 그래서 전해오는 저작으로 113종의 책과 논문, 200여 통의 편지, 500회의 설교 등이 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자신의 개종 과정을 기록한 자서전적 저서인 “고백록”(Confessiones)과 호교론적 저서인 “신국론”(De ciavitate Dei)이다. 그는 자신의 극적인 개종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은총을 절실히 체험했기 때문에 은총론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거듭했다. 그래서 그를 흔히 ‘은총론의 박사’(Doctor Gratiae)라고 부른다. 그는 서방교회의 4대 교부 중에서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교회 학자이며 뛰어난 영성가였다. 주교가 된 이후에도 주교관 내에 성직자 수도원을 세워 공동생활을 이어갔을 정도로 수도자로서의 그의 영향 또한 대단했다. 그의 수도 규칙은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성 베네딕토(Benedictus, 7월 11일)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성 아우구스티노는 서방 그리스도 교회 지성의 모델로서 가톨릭 신앙 안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반달족이 히포를 포위 공격하던 430년, 병상에서 도시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던 그는 그해 8월 28일 76세의 나이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어떤 성인도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다. 또한 어떤 큰 죄를 지었던 죄인이라도 미래가 없는 사람은 없다.”라는 교회의 오랜 진리를 몸소 보여 준 인물이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오랜 세월 눈물로 하느님께 기도했던 어머니 성녀 모니카의 정성과 영적 스승이었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도움으로 그는 하느님 사랑과 희망의 증거자가 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 8월 28일 목록에서 히포의 주교이자 교회 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노가 성 암브로시오에 의해 개종하고 세례를 받아 마니교와 다른 이단에 맞서 가장 큰 열정으로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고 하느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선종했으며, 그의 유해는 야만족의 침략으로 인한 훼손을 막고자 5세기 말 사르데냐(Sardegna)로 옮겼다가 723년 랑고바르드(Langobard) 왕국의 왕에 의해 파비아(Pavia)로 이장해 안장했다고 전해주었다. 1842년에 그의 유해 일부가 다시 히포 레기우스로 반환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주교이자 저명한 교회 박사인 성 아우구스티노가 불안한 청소년기를 보낸 후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하고 밀라노에서 성 암브로시오에게 세례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수도 생활을 시작했으며, 하느님과 성경 연구에 헌신하다가 히포의 주교로 선출되어 34년 동안 설교와 수많은 저술을 통해 양 떼를 돌보며 그 시대의 이단에 맞서 올바른 믿음을 지키고 가르쳤다고 기록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성 아우구스티노는 대개 연구에 몰두하는 주교의 모습으로 서재에서 연구하거나 책을 든 모습으로 그려진다. 15세기 이후에는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를 든 어린아이와 함께 등장하는데, 이는 성인의 환시 내용을 기초로 한 것이다. 중년의 성 아우구스티노가 심오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몰두하던 중 바닷가를 거닐다가 한 아이가 모래톱에 조그만 구덩이를 파놓고 조개껍데기로 부지런히 바닷물을 퍼 나르는 것을 보았다. 궁금해 묻는 그에게 어린아이는 바닷물을 다 퍼 담을 것이라 했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에 “그럼, 아저씨 작은 머리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어떻게 알아들으려고요?” 하는 말을 남기고 어린아이는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17세기 이후에는 불타는 심장을 들고 있거나 화살에 의해 관통된 심장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되는데, 불타는 심장은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자 하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종교적 열망을 상징한다. 그리고 심장을 꿰뚫는 화살은 우리의 심장을 꿰뚫는 하느님의 영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계속 성장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화살에 찔린 불타는 심장은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상징이자 영성을 잘 보여준다.♣
성녀 모니카와 성 아우구스티노
8월 27일은 성녀 모니카 기념일이고, 8월 28일은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두 성인은 어머니와 아들 관계인데, 성인을 배출한 여느 그리스도인 가정과는 달리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터라 이들의 삶은 더 큰 감동을 전해줍니다.성녀 모니카는 332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오늘날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 부모 아래서 온순하게 자란 성녀는 로마 제국의 관리이며 이교도였던 파트리키우스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아들 아우구스티노, 나비기우스, 딸 페르페투아를 낳습니다. 모니카는 세속적인 남편과 까다로운 시어머니 때문에 고통을 겪는데, 희생과 기도로 370년 그들을 회개하고 개종하게 하였습니다. 남편은 세례를 받고 새 사람이 되었으나, 이듬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아버지의 성격을 물려받아 일찍부터 어머니의 속을 썩였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그는 18세였는데, 세속적 성공을 바라고 신앙에는 무관심했습니다. 법률가가 될 생각으로 북아프리카 최고의 도시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공부하였고, 이때 방탕한 생활로 아들 아데오다투스도 갖게 됩니다. 373년경에는 마니교에 빠졌으며, 타가스테와 카르타고 등지에서 1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다 383년에는 로마로 건너가 수사학교를 세우고, 384년 가을에는 밀라노로 옮겨가 계속 교수로 일했습니다.
한편,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회심과 개종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로마와 밀라노까지 찾아간 모니카는 눈물로 기도하던 어느 날,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를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이때, 암브로시오는 “안심하십시오. 이런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둔 아들은 결코 멸망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라며 위로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런 어머니의 기도에 더해, 암브로시오의 설교, 신플라톤 철학, 바오로 서간에 영향을 받아 마침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안토니오 성인의 은수 생활 이야기에 감동하며 산책하던 중,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하는 신비로운 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치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바로 로마 13,13이었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는 회개하여 암브로시오를 찾아가 예비 신자 교육을 받고, 387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아우구스티노가 어머니,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그해 11월 13일, 모니카는 로마 근교 오스티아에서 열병에 걸려 숨을 거두고 맙니다.
아우구스티노는 388년 타가스테로 돌아와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391년에는 히포로 가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는데, 그곳에서 자기 지향과는 달리 사제품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5년 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됩니다. 그는 35년간 사목자로 헌신하는데, 「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론」 등 전해진 것만도 113개의 책과 논문, 200여 통의 편지, 500회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 방대하고 뛰어난 저술로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대 그레고리오와 함께 4대 서방 교부에 꼽힙니다. 또한 주교관 내 세운 성직자 수도원의 규칙은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토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430년, 76세의 나이로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성녀 모니카는 어머니, 과부, 가톨릭 여성 단체의 수호성인이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신학자, 철학자, 신학생, 인쇄업자의 수호성인입니다.
